솔잎 향이 그윽하다. 찜솥에 송편이 가지런하게 뽀얀 속살을 드러낸다.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송편을 빚었다. 반달 모양과 보름달 모양, 손자국이 찍힌 모양, 두툼한 만두 모양의 송편이 푸짐하다. 대소쿠리에 솔잎을 깔아 놓고 송편에 참기름을 발라 옮겨놓는다. 송편을 나누고 대접할 생각에 벌써 마음에 보름달이 떴다.
얼마 전만 해도 추석이면 가족들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었다. 추석 음식으로 송편이 만들어진 데는 쌀로 빚은 떡을 풍요의 상징으로 여기며 제사에 올리는 유교의 전통도 작용했을 것이다. 솔잎을 깔고 찐다는 의미에서 소나무와 떡이 합쳐져 송병松餠이라 불렸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송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송편은 뜨거운 물로 멥쌀가루를 익반죽해서 한 덩이씩 오목하게 만들어 콩이나 깨를 설탕과 꿀로 버무려 소를 만들어 넣고 반원 형태로 접어서 쪄낸 빚은 떡이다. 떡 중에서도 정성이 들어간 고급 떡에 속한다. 유독 추석이면 왜 송편을 빚어 먹었을까.
결혼하고 채 몇 달이 되지 않았을 때 명절인 추석을 맞이했다. 시댁의 친척이며 촌수도 낯설던 때라 선뜻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며 부엌 귀퉁이 붙박이 찬장처럼 서 있었다. 작은어머니며 오촌 아주머니는 놋그릇을 닦고 전을 부치느라 분주했다. 멀뚱하게 서 있는 며느리가 집안 어른들 보기 불편했던지 시어머니는 쌀가루 반죽과 삶은 콩을 양재기에 담아주며 사랑방에서 송편을 빚으라고 했다. 어릴 적 어깨 너머로 큰어머니와 엄마가 만들던 기억을 더듬어 빚어 보기로 했다.
한 개, 열 개, 서른 개까지는 보름달 송편도 만들고 반달 송편도 만들고 그런대로 재미롭게 할 만했다. 그러나 한 쟁반 남짓부터 허리도 결리고 다리도 저리고 이만저만 지겨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 가지 꼼수를 생각해냈다. 송편에 넣을 소가 없으면 그만 빚어도 될 거 같았다. 송편 하나 만들 때마다 콩 소를 한 숟가락씩 퍼먹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반죽은 반쯤 남았는데 속에 넣을 콩이 부족했다. 인제 그만 빚어도 되겠지 생각하고 시어머니에게 앙꼬가 모자란다고 했다. "아이고, 새아가가 송편 속을 너무 많이 넣었는가 보네, 해마다 딱 맞게 준비했는데" 하시고는 잠시 후에 시어머니는 깨와 설탕을 버무린 소를 이번에는 넉넉하게 갖다주었다. 이미 송편 속에 넣을 콩을 한 사발이나 먹은 터라,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콩 송편에 깨 송편까지 온종일 백여 개가 넘는 송편을 빚었다.
송편은 지역마다 재료에 따라 색이며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강원도에서는 감자녹말을 반죽하여 팥소나 풋강낭콩, 녹두 앙금을 넣고 감자송편을, 충청도에서는 늙은 호박을 이용하여 호박 송편을 만든다. 경상도에서는 쌀가루 반죽에 모시 잎을 삶아 함께 반죽한 모싯잎 송편을 만들기도 한다. 송편의 모양도 여러 가지이다. 반달 모양과 동글 납작한 비행접시 모양의 송편, 손가락 자국이 나도록 꾹 눌러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그중에서 나는 감자송편을 좋아한다. 통깨와 꿀을 섞은 소를 넣은 것도 맛있지만, 녹두 앙금을 넣고 네모지게 손자국을 낸 소박하고 큼지막한 감자송편은 별미이다.
요즘은 거의 송편을 집에서 빚지 않고 방앗간에 주문한다. 번거롭지도 않고 이쁘기까지 하다. 흰 송편, 분홍 송편, 초록 송편이 곱게 차려입고 간택 단자 올린 규수처럼 정갈하고 가지런하다. 하지만 눈요깃거리는 되지만 선뜻 손은 가지 않는다. 투박하지만 푸짐한 달 모양의 송편이 생각나는 건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서로 공간을 나누고 한 밥상에 둘러앉아 오가던 언시言施가 그리워서인지 모르겠다.
송편은 추석의 대표적 음식이고 절식節食이다. 예부터 추석에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잘생긴 신랑을 만나고, 예쁜 자녀를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송편이 태아를 잉태한 여성의 몸과 닮았기도 하고 시집가기 전 여성이 송편빚기를 대충하자 어쩌면 정성껏 만들라는 데서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삼국유사』에 송편의 반달 또는 만월 모양은 달을 형상화한 것으로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성장하는 모습을 본떠, 다산과 풍년을 상징하고 기원한 것이라 전해진다.
송편은 언제부터 먹게 되었을까. 송편의 쓰임새 중 하나가 우리나라의 농경의례와 관련이 있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봄에 송편을 만들어 풍년을 기원하고 여름 모내기와 가을 추수철에도 농사일로 힘든 일꾼을 격려하고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송편 등을 차려 대접했다고 한다. 송편은 추석의 절식으로 자리 잡기 이전부터 어려운 일로 힘든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풍요로움을 기원하던 음식이었다.
얼마 전 태풍 힌남노가 추석을 며칠 앞두고 엄청난 물 폭탄에 강풍까지 그야말로 한바탕 할퀴고 지나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듦을 나누는 일일 것이다. 예전에 농사일로 힘들었던 일꾼들에게 송편 등으로 격려와 감사를 대접했듯이 올 추석에는 태풍으로 허물어진 집이며 물에 잠긴 논밭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한가위 둥근달 같은 송편을 나누고 대접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