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름다운 소백산 자락길을 걷는다. 첫 번째 소수서원에서 풍기까지,
2023년 9월 8일(금)에서 10일(일)))까지 그 아름다운 소백산 자락길을 걷습니다. 나라 안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소백산 자락길>을 천천히 종주하며 걸어갈 예정이니 많은 참여바랍니다.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서리서리 백리百里나 구름 속에 꽃혔네. 분명히 동남계東南界를 모두 구획하였으니, 하늘땅이 이루어져 귀신은 인색을 끼쳤네.”
위의 글은 조선 초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서거정徐居正은 순흥을 병풍처럼 감싸안고 있는 소백산을 두고 한 말이다.
소백산 자락 길을 간다. 소백산 자락 길, 그 길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어느 날 저녁 전화 한 통화에 의해서였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하는 ‘<문화생태탐방로> 선정을 하던 중, 담당자인 홍성운 사무관의 전화가 걸려 왔다. 환경부와 삼림청에선 백두대간을 주제로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문체부에서 나설 일이 뭐 있겠는가고? 그 물음을 가지고 계획한 것이 <소백산 자락길>이었다.
그 다음날 나의 계획을 들려주었다. “<소백산 들레길>을 만들어줍시다.” “어떻게 만들지요?” “지리산 둘레길만 있으라는 법지요. 소백산. 속리산, 팔공산, 무등산, 변산, 다 만들 수 있지요. 소백산을 둘러싸고 있는 길, 봉화의 닭실마을에서 시작합시다. 청암정에서 길을 나서면 물야면의 오전약수고, 오전약수에서 산기슭을 따라가면 나라에서 제일가는 아름다운 절 부석사에 이르지요,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멀지 않습니다. 순흥향교를 지나 죽계계곡에 이르면 퇴계 이황이 명명한 죽계구곡이 있고, 초암사에서 고개를 넘으면 비로사가 있으며 바로 그 아래가 <정감록> 십승지지 중의 한 곳인 금계촌입니다. 풍기에서 명승지로 지정된 죽령 옛길을 넘으면 단양의 용부원리이고 남한강 가를 따라 단양 팔경을 지나면 구인사 부근에 있는 영춘의 온달산성입니다. 그곳에서 영월 하동의 김삿갓묘가 지척입니다. 다시 백두대간의 늦은맥이재를 넘으면 바로 오전약수에 이릅니다. 약 200km, 소백산 둘레길입니다.“ 내 말을 들은 홍사무관이 ”좋은데요. 그런데 둘레길은 이미 선점했으니 <소백산 자락길>로 명명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해서 영주시에 신청하도록 해서 선정된 길이 소백산 자락길이다.
소백산 자락길은 소수서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액을 받아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원래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풍기군수를 지낸 주세붕이 이 지역출신인 안향을 배향하면서 세운 소수서원은 사적 55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년)에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시켰을 때도 남은 47개 서원의 하나로 서원 내에는 국보 111호인 회헌영정을 비롯하여 보물들이 여러 점 남아 있다.
지금은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에 덩 그라니 당간지주만 남은 숙수사宿水寺를 찾았던 노여魯璵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 가벼운 옷차림으로 그윽한 경치 찾았더니, 난초의 뜰은 10년 전의 모습이어라. 벽의 값어치는 몇 년간 시와 함께 비싸고, 절의 이름은 천고의 물과 더불어 흐르누나. 추위가 산 빛을 미니, 스님은 문을 닫고, 차가움이 개울소리를 누르니, 손님은 다락에 오르도다. 휘파람 불며 서성거리는 중은 해가 졌다고, 난간에 고개를 돌리면 고향생각 나누나.” 세월 속에 그 한적했던 절은 사라지고 지금은 서원으로만 남아 있는 숙수사지에 있던 소수서원과 죽계를 이중환은〈택리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영천(榮川 영주를 말하는 듯함) 서북쪽 순흥부(順興府)에 죽계(竹溪)라는 계곡이 있는데, 죽계는 소백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곳의 들은 넓고 산은 낮으며 물과 들이 맑고 깨끗하다. 상류에 있는 백운동서원은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를 제사하는 곳이다. 명종 때 부제학을 지낸 주세붕(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지은 것이고, 우리나라에서 서원이 생긴 시초이다. 서원 앞에 있는 누각은 시냇가에 위치하고 있어 밝고 넓으며, 온 고을의 경치를 완전히 차지하였다.”
소수서원에서 931번 지방도로를 건너면 금성단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李甫欽이 일으킨 단종복위 사건의 현장이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 째 아들로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를 떠돌다가 이곳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고, 그 때 단종은 영월의 쳥령포에 위리안치되어 있었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고을의 군사와 향리를 모으면서 경상도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복위 운동을 모의 한다. 그러나 거사를 단행하기도 전에 밀고에 의해 그 사실이 발각 되었다. 결국 금성대군과 이보흠, 그리고 그 거사에 동조했던 수많은 영남의 선비들이 희생되었다. 그 때 그들이 흘린 피가 이곳 죽계천을 물들여 40리 아래쯤에 있는 동촌리까지 물들여 피끝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그들의 넋이 청다리 근처를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순흥도호부가 1547년인 세조 3년에 폐지되면서 그 땅은 풍기. 예천. 봉화로 조각조각 나뉘고 말았다.
금성단이 세워진 것은 단종이 복위된 뒤인 숙종 37년인 (1711)이었고 순흥은 그 때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순흥부사 이명희가 임금이 윤허를 받아 설치했는데 상단에는 금성대군을 우측에 있는 단에는 이보흠을 좌측의 단에는 그 모의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들을 제사지내고 매년 봄 가을에는 향사를 지내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지금도 단종과 금성대군이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금성단 근처에 있는 청다리에는 두 가지의 사연이 서려 있다. 어릴 적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고 알려진 다리가 이곳 청다리인데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을 뒷바라지 하는 종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때 그 종이나 이곳 마을의 처녀들과 염분이 나서 아이를 낳게 되면 처녀와 짜고서 일부러 청다리 밑에 버리라 하고서 자기가 우연히 그 다리근처를 지나다가 그 아이를 주워온 것처럼 해서 불쌍한 아이를 주었다” 고 한 뒤 본가에서 기르게 했다고 한다. 오늘날 자기가 낳은 아이를 고아원이나 경찰서 앞에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버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인가,
순흥향교를 답사하고 죽계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산이 “양백(태백과 소백) 간에 살만한 곳이 있다는 소백산이다. 소백산을 올랐던 이황은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젊어서부터 영주. 풍기사이를 오가며 소백산은 머리를 들면 바라볼 수 있었고, 갈 수 있었으나 섭섭하게도 오직 꿈에 생각하고 마음으로만 달린 것이 이제 40년이 되었다. 지난해 겨울에 인 부符를 잡고 풍기에 와서 백운동 서원의 주인이 되었으니 속으로 은근히 기쁘고 다행하여 오랜 소원을 풀 수 있으리라고 하였으나, 백운동에 오고도, 겨울 봄 이래로 일이 있어서 산 어귀도 엿보지 못하고 돌아간 곳이 세 차례나 되었다.”
이황이 40여년을 두고 오르지 못하다가 올랐던 소백산을 나는 얼마나 여러 번 올랐던가? 오늘 다시 올라가는 곳 죽계구곡은 소백산 초암사(草庵寺) 앞의 제1곡을 시작으로 삼괴정 근처의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 2㎞에 걸쳐 흐르는 계곡으로 영주시 순흥면을 휘감아 돈 뒤 낙동강 상류로 흘러들어 가는 죽계천(竹溪川)의 상류 지역이다.
배점리는 선조 때 무쇠쟁이 배순裴純이 국상을 당하자 국망산에서 3년 동안 망곡하였으므로 나라에서 무쇠점을 배순에게 주어서 배점裴店이라 하였다.
아홉 구비를 돌아 절경을 이루는 죽계구곡은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안축(安軸 1287~1348)이 지은‘죽계별곡’의 배경이 된 곳이다.
퇴계 이황도 그 비경에 취해 찬사를 보냈으며, 계곡 곳곳의 기암괴석이 맑은 물과 어우러져 신비경을 이루고 있는 이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한 노래 소리와 흡사하다고 여겨흐르는 시냇물이 소가 되는 곳 마다경치에 걸맞게 이름을 지었다.
죽계구곡 중 제 1곡은 백운동 취한대(翠寒臺)이고, 2곡은 배점 남쪽에 있는 바위로 금성반석(金城盤石)이다. 3곡은 금성반석 위쪽에 있는 쏘로 백자담(白子潭)이고 4곡은 초암사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이화동(梨花洞)이다. 5곡은 이화동 위쪽에 있는 소로 목욕담(沐浴潭)이며, 6곡은 초암사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청련동애(靑連東애)다.
7곡은 청련동애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용추(龍湫)라 불고 8곡은 용쏘에서 40M쯤 되는 지점에 있는 바위로 금당반석(金堂盤石)이라고 부른다. 9곡은 금당반석의 위쪽에 있는 소로 중봉합류(中峯合流)라고 지었다. 그 뒤부터 그 뒤부터 이곳을 죽계구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길가에 다래 머루, 으름이 흐드러진 길가를 흐르는 시냇물은 맑고도 청아한 소리를 낸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 벗 삼아 한 참을 올라가자 초암사에 이른다. 초암사는 130년 전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던 길에 창건한 절로 풀로 엮어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흐르는 맑은 물이 기기묘묘한 계곡과 폭포를 만들어낸 죽계천은 다시 살길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을 따라간 이황은 다음과 같이 소백산을 오른 소감을 피력했다.
“만일 청명한 날씨를 만나면 용문산으로부터 서울까지 바라볼 수가 있는데, 이것이 국망봉이다. 이 날은 산의 아지랑이와 바다의 구름이 부옇게 끼어서 흐릿하고 아득하니 용문산도 바라볼 수 없었다.(중략)
종수가 말하기를, “이 산에 올라 조망眺望하기에는 가을날 서리 온 뒤가 좋고, 혹은 오랜 비가 새롭게 갠 날이 좋은데, 주군수도(주세붕을 말함) 비에 닷새 동안 갇혀 있다가 개자 곧 올라갔기 때문에 멀리 볼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내가 조용히 그 뜻을 깨달았으니, 처음엔 답답하게 막혔단 것이 필경은 쾌함을 얻는 것인데, 내가 와서는 하루도 막힘이 없었으니, 어떻게 만리萬里의 쾌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등산의 묘한 곳은 반드시 시력이 미치는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마치 세속을 벗어난 신선들이나 느낄법하게 황홀하고, 그 누구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을 듯한 산길이 고즈넉하게 이어진다.
“거처하는 곳에 따라 기운이 변해지고, 기르는 것에 따라 체질이 변해진다.(居移氣養移體)”는 옛말이 맞다면 이 길을 걸은 사람은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발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네./ 땅 위건, 공중이건, 아니 허무이건,/ 멋대로 자란/ 숲길,/ 돌 같은 수정水晶의 만족,/ 이것이 최초의 순간,”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 같은 길을 가다가 보니 어쩌다 보이는 집들 저들은 외롭지도 않은 것일까?
순흥면 배점리 달발골에서 비로사로 넘어가는 달발재를 넘어서자 한참을 내려가자 비로사 일주문이 보인다. 전란에 불에 타 새로 지은 비로사에서 금계촌으로 내려가는 길은 포장도로다.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 금계촌 원래 풍기군 서부면의 지역이다. 세 갈래 길이 있으므로 삼거리라고 부르다가 1914년에 삼가동이 되었다.
삼거리 남쪽에 있는 샘밭골은 약수터가 있어 지은 이름이다. 샘밭골 서쪽에 있는 바위가 모양이 금닭처럼 생겨서 금계바위라고도 부르는 금계암이다.
삼가리에서 금계호를 지나자 금계리에 이르는데, 이마을 동북쪽에 있는 바위인 금선대錦仙臺는 금계錦鷄 황준량黃俊良이 명명하고 군수 이징계가 바위에 글씨를 써서 새긴 바위다.
금계천변에 세워진 정자인 금선정은 황준량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이며 금선정 위에 있는 정자인 금암정사는 황준량이 지은 정자다. 정자 아래 마을을 부계밭 또는 부게밭 부거전이라고 부르는데 쇠바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지十勝之池의 하나인 금계촌金鷄村이다. 삼거리 북쪽 골짜기인 달밭골은 월전곡 또는 절골이라고도 부르는데, 비로사라는 절이 있고, 달밭골에서 충북 단양군 가곡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민백이재다.
이 마을로만 오면 살 수 있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시골 여늬 마을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금계촌마을을 지나면 풍기읍 백리의 히여골이다. 이 마을은 백야동으로도 부르는데, 히여골에서 금계리 임실로 넘어가는 고개는 잣나무가 많아서 잣수고개라고 부른다.
새터를 지나면 풍기 온천에 이르고, 사과밭이 연이어 있는 곳을 지나면 죽령이 소재한 풍기읍 수철리에 이른다.
외국여행과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서 일정을 변경하니 양해바랍니다.
1. 일시: 2023년 9월 8일(금요일)-10일까지(일요일)
2. 출발 시간 및 장소: 서울 저녁 8시, 양재역 12번 출구 서초구청 앞
전주 저녁 8시 분, 전주 종합경기장, 50분 전주 월드컵경기장 싸우나 입구,(두대 출발할 경우)
3. 참가비: 20만원
4. 어디로 가나요: 소백산 자락길, 소수서원, 순흥향교, 죽계구곡, 초암사, 달받재, 비로사, 금계촌, 수철리, 풍기,
5 안내 도반. 신정일(문화사학자, 우리 땅 걷기 대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신 택리지( 경상도의 저자)
6. 신청방법: 댓글로 신청하고 참가비 입금해야 완료(코로나 접종을 마친 사람)
7. 참가비 입금계좌: 국민은행 754801-01-479097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8. 참가비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 5일전 인지: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
(2) 행사일 4일전부터 3일전까지: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3) 행사일 1일전부터 당일까지(미참가 포함): 환불액 없음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9. 문의전화: 010-9144-2564
10. 주의사항: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첫댓글 이근용 김경자 김희영
참가합니다
참가합니다/박선자,임영남/여/전주/입금.
총 몇회로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
6회정도요
김정주/양재 참가합니다
안호석/양재 참가합니다
전주 / 최숙희 신청
박성우, 이연미 / 양재 참가합니다.
혹시 일요일에 양재 몇시 도착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일요일 저녁 9시쯤 될거 같아요~
신청합니다 / 전주출발. 입금완료
임제식 사당 신청합니다
양재로 변경요
참가/정유순(남)/양재/고맙습니다.
하루 걷는 길이가 대략 얼마쯤 될까요?
ㅡ이는 제가 민폐를 끼치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려는 것입니다
참가합니다. /조옥희/여/전주입금함
참가합니다/이숙경/여/전주/입금완료
본 기행은 9월 8~10일로 변경되었습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
@은빛별* 소백산자락길 기행이 아쉽게도 취소되었습니다. 환불계좌 남겨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총무폰 010-9144-2564
참가합니다/벼리/여/전주
참가/윤석호/양재/남
참석합니다/이대주/양재/남/입금완료
참가합니다/손남순/여/,전주
허남숙.박철성.윤유순.윤만섭/참가합니다/전주출발
참가합니다 이선노(여)/남원호(남)/남영호(남) 3명 양재출발
소백산자락길신청합니다
지평 안호석
소백산 자락길 참가합니다
한차수/남. 정숙녀/여. 양재탑승
김옥련 김영숙/여/양재
입금완료김옥련김영숙
신청합니다/오경화/양재
김옥련 김영숙 날자 변경으로 시간이안되어 취소합니다
혹시 지금 신청해도 되는지요
현재 신청 접수 중 입니다.
현인부부(2명) 신청합니다/대전유성/입금완료
참가합니다 김종우 남 전주
신청합니다. 입금했습니다(입금자 이정언)/남/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