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 중심 세력인 대종교 말살작전
[이제는 말할수있다,]라는 MBC방송국 프로그램에서 2004년 2월27일 3.1절 특집으로 방영한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의 내용을 주로하고, 필자의 연구내용 일부와 [empas백과사전]
내용 등을 첨가한 것이다,
1905년 일본의 강압 속에서 을사 늑약이 체결되었다, 을사늑약에 찬성했던 이완용,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등의 반역자들을 '을사오적' 이라고 부른다, 나철 선생은 이들 을사
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김동필, 김영채, 김인식, 오기호,이기 등과 '자신호'라는 비밀단체를
조직 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운 후 결사 대원들에게 살인 허가증인'참간장'을 나누어 주었다,
매국노들을 죽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기에 살인을 허가한다는 문구가 적힌 것이었다,
을사오적 처단계획에 동원된 결사대원만 150여명이었다, 1907년 3월25일 오전10시 입궐하던 권중혁을 향한 총성이 울렸다, 총알은 빗나갔고 결사대원18명이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로서 '을사오적 처단 의거'는 실패로 끝났다, 붙잡힐 동지들이 당할 고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나철 선생은 오기호, 최인식, 등과 함께 자수하였다, 10년 유배형을 받고 무안군 지도로
유배 되었다가 곧 특사로 석방되었다, 일본 총독부의 기밀 서류에는 이 의거를 '을사오적 암살 미수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록 실패는 끝났지만 이 '을사오적 처단의거'가 항일의혈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나철(羅喆1863-1916) 선생의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이며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29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 등을 역임 하였다, 징세서장(세무서장)에 임명 되었으나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1904년 우국지사들은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펼쳤다, 나철선생은 1905년6월 일본 침략을 막기 위하여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평화를 위해한일 청 삼국이
상호친선 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하다!"는 이견서를 일본 정계
실력자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을 설득 하였다, 응답이 없자 일본궁성 앞에서 사흘간 단식투쟁을 펼치기도 했다, 1906년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다시 건너 갔다,
이토 히로부미와 정적관계에 있던 오카모토, 도야마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최근 발굴된 1908년 일본 외무성의 요시사찰보고서인 '을급비밀 제1257호'에
1908년 11월14일 나철이 오기호, 홍필주, 정훈모와 일본을 방문 했으며 두달에 걸친 그들의 일본 체류 기간동안 그들이 몇원 몇전으로 과자와 옷을 샀다, 나철은 일본 우익의 거두이자 흑룡회 간부였던 우치다 료헤이를 비롯해 마츠무라 류노스케, 도야마 미츠루등을 만났다, 이들에게
히토 히로부미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함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들의 재산, 생명을 보호하기위한 대책을 촉구 했다, 그러나 나철 일행은 성과없이 귀국했고 정3품의 정훙모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이사가 되려는 로비에만 몰두 했다, 는 등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일본밀정이 나철 일행의 사소한 일까지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나철 선생의 독립을 위한 민간외교항쟁은 친일반민족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방해책동으로 좌절을 맞는다, 일진회가 나철 선생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쁜 소문을 퍼트려서 사람들이 나철 선생의 진의를 오해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을 거치면서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선 일본에게 한국은 지배의 대상이였을 뿐 동등한 외교적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철 선생의 선구자적 민간외교항쟁은 좋은 결실을 맺을수 없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철 선생이 일본에서 귀국 하였을 때인 1905년 백봉선사의 심부름으로 백두산에서 왔다는 90여세의 백전이라는 노인을 서대문 근처에서 만났다,
그 노인으로부터 단군왕검의 초상화 한 폭과 [삼일신고] [신사기]등의 한국 고유종교 경전을
전해 받았다, [삼일신고][신사기]등의 경전은 신시,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로 전해져서 번역되
었고 발해 때에 다시 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나철 선생은 이에 주목하지 않고 '대일외교항쟁'
'을사오적 처단' 등의 국권회복 운동에만 전념하였다, 거듭된 정치적 구국운동의 실패로 좌절한 나철 선생은 이후 민족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우리 민족을 우리 민족 정신으로 지켜 나가야 겠다는 것이 나철 선생의 뜻이었다, 나철 선생은 1909년 1월15일
한양 재동 취운정 아기, 정훈모, 최전 등 16명의 동료들과 단군대왕조신위(檀君大王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 포명서를 반포하고 '단군교'를 중광(重光)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칭 하였다, 한국고유종교의 맥은 신시, 고조선, 부여.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발해,고려시대 까지 내려오다 몽골제국의 압력과 유교를 국시로 내건 근대 조선의 탄압으로 끊기게 된다, 끊겼던 한국고유종교의 맥을 다시 복원한 것이 바로 '대종교'이다, 16명으로 시작된 대종교의 불씨는 들불처럼 급속히 번져 나갔다, 단군의 시조 신으로 깊이 숭배하는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위하여 기독교 학교에서도 단군 영정을 걸어놓고 수업을 했고 교가도 단군을 칭송하는 가사로 만들었으며 단군절(개천절) 축제고 열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예배당에서조차 십자가와 단군기를 나란히 걸어놓고 한국인의 시조신인 하느님(하나님)께
기도 하였다, 이는 시인 윤동주와 문익환 목사 형제의 모교로 기독교 학교였던 명동학교와
은진중학교에서 단군절(개천절)에는 언제나 축제를 벌였고 "한뫼(백두산)가 우뚝 코 은택 (은혜와 덕택)이 호대한 (크고도 큰) 한배검(단군) 이 깃(보금자리)치신 이 터에 그 씨와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이라는 교가를 많이 불렀다는 문동환 목사의 증언 기독교 학교 교실에는 단군초상이 다 걸렸고 예배당에도 십자기와 단군기를 같이놓고 예배를 봤다는 서광일 한신대 교수의 증언 등으로 확인 할수 있다,
지금은 단군을 조작된 신화로 몰고 단군의 역사를 부정하며 단군을 숭배하는 종교를 사이비 종교로 몰고 단군동상을 때려 부수는 그 기독교에서 말이다, 나철 선생은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
포교지역을 나누고 책임자를 파견했다, 북도본사는 이상설과 이시영, 동도본사는 만주독립군의
최고사령관(총재)인 서일 장군, 남도본사는 동아일보와 함께 백두산 성산 운동을 펼쳤던 강우, 서도본사는 신규식과 이동녕 둥에게 맏겼다, 대종교의 교세 확장에 당황한 일본은 칼을 뽑아
들었다,그 시작이 '종교통제령' 이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는 모든 종교의 신고를 명령했다, 무속까지도 종교로 인정했지만 대종교만 유일하게 포교를 금지 당했다, 대종교는 나철 선생을 중심으로한 민족주위자들의 총 집결처였다, 이러한 대종교를 일본이 종교로 인정하면 한국의 독립운동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 이었다, 일본은 대종교를 철저히 탄압하기 위해 유사 종교단체로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대종교에 대한 포교 금지령이 내려 졌다,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철 선생은 구월산 삼성사를 찿았다,
8,15 광복 후에 북한 정부의 부주석이 된 김두봉 수행제자로 따라 나섰다, 삼성사는 매년
국가에서 하느님(하나님), 환웅천황, 단군왕검 등의 삼신께 제사를 올리던 사당이었다,
1916년 8월15일 대종교의 정신적 스승인 나철 선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종교를 위해
나라를 위해 그리고 세계를 위해 암흑의 시대에 대한 죽음의 항거를 한 것이다,
하지만 대한독립운동의 아버지인 나철 선생의 자살은 끝이 아니라 또다른 시작이 되었다,
나철 선생의 자살이 무장투쟁을 불러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기미년(1919년)의 3,1독립선언,
2,8 독립선언보다 한 해 앞선 무오년(1918년)에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 되었다,비 폭력적, 평화적 방법으로 민족 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을 주장한 몽상적인 기미독립 성언과 달리 무오독립선언은 무장투쟁을 표방했다, 무오독립선언서의 서명자 39인 중 25인이 대종교 지도자들인 김교헌, 윤세복, 박은식, 김좌진, 신규식, 이시영, 신체호, 이동녕 등 이었다,
"사람은 한번은 죽는 것이니 목숨을 아끼지 말고 2천만 동포가 총궐기하여 육탄혈전으로 조국의 독립을 완수하자", 라는 무오독립선언은 곧 무장항쟁으로 이어졌다, 1920년6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일본군 600여명을 살상한 봉오동전투, 1920년10월 서일총재와 김좌진,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 3천여명을 살상한 청산리 전투, 1933년 지정천 장군이 한국독립군과 중국 의용군을 지휘하여 일본군 1개 연대를 전멸시킨 대전자령전투 등의 승전이 잇달았다, 만주지역에서 이러한 독립전쟁의 승리로 이끌었던 독립군 지도자들과 독립군은 거의 대부분 대종교 교인이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경신대학살작전'을 전개한 일본군에 의하여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또한 대부분 대종교 교인이었다,
대종교 출신의 주요 항일독립지사들로는 나철 선생을 비롯하여 서일 장군,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 지정천 장군, 등의 독립군 신채호, 박은식과 같은 민족사학자들, 한글운동을 이끌었던
주시경, 지석영, 김두봉, 최현배,이극로 ,이윤재, 민족지도자인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안재홍, 이상설, 언론계 지도자인 정인보 같은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대종교 사상을 바탕으로 활동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대종교 교인 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없다, 즉 독립운동의
아버지인 나철 선생을 비롯한 많은 대종교 교인들의 독립운동, 3.1 독립운동보다 한 해 앞선
무장투쟁을 선언한 무오독립선언, 한국독립사에 가장 빛나는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대전자령전투, 등이 대종교 교인들에 의하여 이루어 진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대종교의 쇠락원인
대종교의 쇠락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에 의한 대종교의 탄압 이었다, 그러나 8.15광복 이후로 대종교가 점점 더 쇠락해가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강점기에 대종교 교인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들 이었다, 그 당시에는 대종교에 입교한 이유만으로도 체포되고 고문당하는 세상이었다, 대종교인들을 비롯한 독립지사들은 그들의 재산을 독립운동에 사용했고 목숨을 버렸다, 때문에 그 자손들은 현대 교육을 받기 어려웠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반면 한반도에 있던 사람들은 일본에 협조하거나 굴복한 대신 그 재산을 지킬수 있었고 현대 교육을 받을수 있었다, 때문에 광복된 나라에서의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언론, 교육, 예술 등의 주요분야는 재산과 학식을 갖춘 그들과 그 자손들이 차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수많은 기독교 성향의 사립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세워졌다,
이들 학교에서는 한민족 역사문화와 정신 대신 기독교 역사문화와 기독교 정신을 주입시키고 기독교인을 양성하는 역할를 했다,
이러한 기독교에 의하여 환웅천황이 건국한 신시의 역사 부정,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 역사의 부정, 환웅천황, 단군왕검 등의 한국인 시조 신들에 대한 숭배를 우상숭배, 미신, 사이비종교 등으로 이어졌다, 이 밖에도 대종교 위축이유는 다음과 같은 대종교 자체의 문제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 주요 문제 점으로는
첫째, 대종교에서는 하느님(하나님)을 한자로 천재(天帝), 천주(天主), 천신(天神), 천(天), 상제(上帝)등으로 번역하여 기록하고 불교식 칭호인 환인(桓因)으로 표기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때문에 천제, 천신, 천, 상제, 환인 등을 '한얼' 이라고 해석 함으로써 한국인의 시조신인 하느님(하나님)을 천주교 예수교에서 마음껏 사칭할수 있도록 방치한데 있다,
즉, 모든 한국 사람들이 숭배하는 하느님(하나님)을 버리고 '한얼님' 이라는 새로운 신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둘째, 한민족 고유의 경전인 [삼일신고][신사기]등의 내용을 본래의 뜻 그대로 바르게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 하느님(하나님), 환웅천황을 소홀히 하고 한배검을 신앙의 중심에 놓은 것이다,
넷째, 한국인에게 친숙한 칭호인 '단군'을사용하지 않고 '한배검'이라는 생소한칭호를 만들어 단군대신 사용한데 있다,
다섯째, 사람에게 친숙한 용어인 '천국''천국의궁전'을 생소한 용어인 '한울''한울집'
으로 해석한데 있다,
여섯째, 삼법수행(선도수련)에 치우친 소극적인 포교에서 찿아야 할것이다,
일곱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제세이화 홍익인간' 이념을 소극적으로 해석 한데 있다, 즉 인간세상 구원 이념인 '제세이화''홍익인간' 이념으로 인간세상을 교화시켜 인간세상을 밝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야 할 천손으로서 의무를 소홀 했기 때문이 라고 할수 있다,
이와 같이 대종교는 7천년을 내려온 한국의 고유종교를 온전히 복원하지 못했다, 때문에 대종교는 민족종교 이기는 하지만 7천년 을 이어온 정통의 '한국고유의종교'라고
말할수 없을 것이다,
"김종서 박사,신의 자손 한국인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