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감자 / 안도현
삶은 감자가 양푼에
하나 가득 담겨 있다
머리 깨끗이 깎고 입대하는 신병들 같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중이다
감자는 속속들이 익으려고 결심했다
으깨질 때 파열음을 내지 않으려고
찜통 속에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젓가락이 찌르면 입부터 똥구멍까지
내주고, 김치가 머리에 얹히면
빨간 모자처럼 덮어쓸 줄 알게 되었다
누구라도 입에 넣고 씹어 봐라
삶은 감자는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각오한 지 오래다
- 안도현 시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감자 이야기 / 이성목
제주시 오라동 문간방 세 들어 살던 때 일이었어요.
그 주인할머니 감자 한 광주리씩 캐서는 서문시장 아니면
신제주 오일장 굽은 등 자주 펴고 앉아 있었어요.
언젠가는 그 모습 하도 고단해 보여 그 감자 제가 사겠노라고
슬금슬금 후한 인심 미리 세어 넣었더니. 검은 비닐봉지에
캄캄하게 넣었더니. 할머니 펄펄 뛰며 젊은 것이 이렇게
셈 어두워 어쩌냐고. 비닐봉지 뒤집어 하나 세고 훑어보고
다시 보던, 그런 감자가 있었어요.
그랬어요. 그 할머니 말씀으론 무자년 4.3때, 낮에는
관덕정으로 밤에는 산으로 끌려 다니며 쓴 침조차 삼킬 수
없었던 춘궁이 있었대요. 그래도 살아야지 빈 집 돌며
거두어 온 씨감자 한 바구니 있었는데, 어느 바람 거친 새벽
젊은 놈 찾아와 그 감자 몇 개냐고 물었대요. 세어도 세어도
자꾸 틀려 하나 둘 틀리는 거 뭐 어떠랴 어떠랴 얼버무려
일렀는데, 다음날 그 서청 놈 말하길 감자 두개 어쨌냐고,
밤새 산으로 내통했냐고, 머리채 질질 끌고 산길 내려
갔었다고 할머니 울먹이며 말 잇지 못했어요.
할머니 아직도 양지바른 뜨락에 앉아 감자를 세고
있을 것 같아요. 셈이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란다.
꼭 맞게, 틀리지 않게, 세고 또 세어야 산다고, 먹고산다고
감자를 세고 있을 것 같아요. 그 날을, 세고 또 세고 있을
거예요.
감자 / 김승하
언젠가 시골 어머님이 보내주신 감자들, 냉장고의
야채 칸에 넣어 둔 감자들 답답한 마음이 싹을 틔웠네.
하얀 감자순을 뻗으며 더듬더듬 더듬이를 키워온,
거친 감자들은 흙의 기억을 더듬으며 절망을 키워 왔으리.
단단하고 매끄러운 프라스틱 상자의 어둠 속에서
연좌 농성 하듯, 서로의 둥글고 투박한 어깨에 기댄 채
말랑말랑라고 쭈글쭈글해져 가는 제 육신 위에 마지막
영혼의 싹을 틔우고 싶었을 게다. 가슴에 묻어 둔
외로움인 듯 멍 빛으로 번져 가는, 푸른 쏠라닌의 씁씁하고
외로운 사랑의 아린 맛을 전하려는 듯 자줏빛 꿈을 꾸고
있었을 게다. 제 몸을 나누어 씨눈 하나로 다시 태어나는
꿈을 꾸며 감자들은 얼마나 흙을 그리워 하였을까......
순간 암전하는 어둠 속, 겨우내 홀로 시골집을 지키시는
어머님, 감자 둔덕 속 씨감자처럼 여위어 가는 당신의
환한 미소가 감자꽃처럼 피었다 사라집니다.
- 어화(魚火)문학회 동인시집 <더듬이를 키워온 감자들>
작은 감자 / 전윤호
안주로 작은 감자가 나왔다
단골이라고 주인이 덤으로 준
검게 탄 자국이 있는 감자
쥐어보면 따뜻해서
선뜻 껍질을 벗길 수 없다
혼자 술 마시는 저녁
취하면 큰소리로 전화하는 사람들의
소주보다 차가운 입술이 부럽다
함부로 뚜껑을 날리며 병을 따고
죄 없는 젓가락을 떨어뜨리면
새 걸로 바꿔달라는 사람들이 두렵다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며
내 심장은 망설이며 뛰고
비 없이 흐리기만 한 여름
가뭄 속에서
감자야 난 잘 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