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 류(柳) 성씨(姓氏) 2.1 개 관(槪 觀) 우리나라의 버들 류(柳)씨는 2000년 통계에 의하면 인구 순위 19위로 60여만 명인데 제일 오랜 역사를 가진 본관은 전주류씨(全州柳氏)로서 신라 때 각간(角干)을 한 류기휴(柳其休)의 기록이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한 류방헌(柳邦憲)의 묘지명에 나온다. 한편 버들류씨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문화 류씨(文化柳氏)는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와 같이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창성한 성(姓)이라 하며, 진주 류씨[移柳], 서산 류씨, 선산 류씨는 문화 류씨의 한 분파라고 한다. 1908년에 간행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버들 류(柳)씨는 본관이 131개이며, 1985년 인구 및 주택센서스에서는 본관이 54개로 조사되었는데 이를 가나다순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강남, 강릉, 강진, 거창, 경주, 고령, 고흥, 곡산, 공주, 광주, 금산, 김해, 나주, 남원, 대전, 문안, 문화, 밀양, 백천, 부안, 부평, 서령, 서산, 선산, 성주, 세령, 수원, 순흥, 안동, 약목(칠곡), 연안, 영광, 옥천, 육창, 인동, 전주, 정주, 진선, 진양, 진주(인비), 진주, 진천, 창원, 천안, 청주, 파평, 풍산, 하동, 하외, 하해, 함평, 해주, 호산, 흥양. 여기서 문헌상으로 시조를 알 수 있는 본관은 문화(文化), 진주(晉州), 전주(全州), 서산(瑞山), 고흥(高興), 풍산(豊山), 선산(善山), 영광(靈光), 육창(陸昌), 정주(貞州) 등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한 본관별 시조는 표-2.1과 같으며, 인구가 많은 순위로 본관을 나타내면 표-2.2와 같다.
한편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편서잡고(編書雜稿) 송사전(宋史筌) 고려열전(高麗列傳)을 보면“선비들은 종족(宗族)의 명망(名望)을 가지고 서로 뽐내었는데 류(柳), 최(崔), 김(金), 이(李)의 4성(姓)을 귀족으로 여겼다.”라는 글이 있다. 따라서 버들류(柳)씨는 고려 때 명문대가(名門大家)였던 것이다. 고려의 종성(宗姓)인 왕(王)씨는 오늘날 겨우 2만명 정도에 불하다. 이러한 숫자는 근세에 창성(創姓)된 성씨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이다. 고려 태조는 12명의 부인으로부터 25명의 아들을 두었고, 현종은 5명, 문종은 13명, 숙종은 7명의 아들을 두어 번성하였으니 그 후손은 벌족(閥族)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성씨가 된 원인을 근친혼(近親婚)에 따른 유전성 질환에 의한 감소, 불교에 귀의(歸依) 또는 조선 초에 많은 후손이 화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근본적인 원인은 많은 왕자와 왕손들이 종실을 떠나 서민이 되었거나 외가성(外家姓)으로 변성(變姓)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개성왕씨세보(開城王氏世譜)에 탈루된 왕족은 고려의 종성을 사용하지 못하고 세보(世譜)에도 기록이 없는 것이다. 고려 초에는 신라의 골품제의 영향으로 혈족보존이란 차원에서 형제, 사촌, 육촌 사이의 근친결혼이 성행하였는데 이때 왕녀(王女)는 외가(外家)의 성(姓)을 따랐으며, 대부분은 모친(母親)의 성(姓)으로 변성(變姓)하였으나 더러는 조모(祖母)의 성(姓)으로 변성(變姓)한 사람도 있다. 한편 숙종 이후에 이자겸(李資謙)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자기의 외손을 왕위에 계승시키고자 왕실의 자손들을 모두 죄를 얽어 추방하였는데 이러한 왕실의 자손은 고려성원록에 모두 계대가 단절되어 있다. 물론 후사(後嗣)가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외가(外家)의 성(姓)으로 변성(變姓)하였거나 평민으로 돌아가 본관을 달리 하였을 것이다. 또한 선종(宣宗)은 왕위를 아들에게 전위(傳位)하려고 왕제(王弟)들에게 식읍(食邑)을 내리고 모두 왕실을 떠나게 하였다. 이렇게 왕실을 떠난 왕자(王子)들은 왕실족보인 성원록에 그 자손이 기록되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왕자로는 상안공 수(琇), 근관후 비(怌), 변한후 음(愔), 낙랑후 침(忱), 조선공 도(燾), 부여공 수(燧), 진한후 유(愉) 등이 있다. 고려15대 숙종의 자녀들을 보면 숙종왕비는 정주류씨 류홍(柳洪)의 딸인 명의태후로서 7남4녀의 자녀가 있는 것으로 성원보에 기록되어 있다. 장남은 예종(1078~1122, 재위 1105~1122), 2남은 상당후(上堂候) 필(泌, ?~1099)로서 고려성원보에 차파후손휘칭류씨(此派後孫諱稱柳氏)로 기록되어 있고, 3남은 원명국사 징엄(澄嚴, ?~1141), 4남은 대방공(帶方公) 보(俌, ?~1128), 5남은 대원공(大原公) 효(侾)인데 그의 아들 감(瑊)은 차파후손휘칭외씨(此派後孫諱稱外氏)라 기록되어 있다. 6남은 제안공(齊安公) 서(偦, ?~1131)인데 그의 아들 장(璋)은 차파후손휘칭외씨(此派後孫諱稱外氏)로 기록되어 있다. 7남은 통의후(通義候) 교(僑, 1096~1119)인데 차파후손휘칭류씨(此派後孫諱稱柳氏)로 기록되어 있다. 즉, 2남과 7남은 성을 류씨로, 5남과 6남은 외가(外家)의 성(姓)을 따랐다고 하였다. 5남 대원공 효와 6남 제안공 서의 처가(妻家) 성씨는 알 수 없으나 고려종성연구회측은 류(柳)씨로 이야기하고 있다. 1녀는 대령궁주(大寧宮主, ?~1114)로 회안백(淮安伯) 기(沂)와 결혼하였는데 기는 진안공 유의 아들로서 4촌과 결혼한 것이다. 2녀는 흥수궁주(興壽宮主, ?~1122)로 승화백(承化伯) 정(禎)과 결혼[평양공은 조선공 수의 아들로 결혼], 정(禎)의 동생 시(禔)는 차파후손휘칭외씨(此派後孫諱稱外氏)로 기록되어 있다. 3녀 안수궁주(安壽宮主)는 생몰연대가 미상이며, 광평공(廣平公) 원(源)과 결혼하였는데 광평공은 안수궁주의 숙부이다. 4녀 복녕궁주(福寧宮主, ?~1133)는 진강백(晉康伯) 연(演)과 결혼하였는데 연은 진한공 유의 아들로 역시 4촌과 결혼한 것이다. (사)고려역사선양회의 류재하(柳在河) 문헌편찬위원장에 의하면 이렇게 고려 왕실을 떠나 외가(外家) 성(姓)으로 변성(變姓)한 것으로 보이는 성씨의 관향과 그 선친으로 보이는 종실인의 봉작 등을 추적(追跡)한 결과, 대부분이 버들류(柳)씨로 변성(變姓)하고, 오직 한산이씨가 있을 뿐이라 하였다. 그가 추적하여 추정(推定)한 고려왕실을 떠난 왕자들의 세계도를 참고로 수록하면 다음 표-2.3과 같다. [참고문헌 참조]
2.2 본관별 개요 버들류(柳)씨 중에서 인터넷 등으로 본관별 연혁을 알 수 있는 문화, 전주, 진주, 고흥, 강릉, 서산, 풍산 류씨 등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문화류씨(文化柳氏) 시조 대승공 류차달은 황해도 유주 태생으로 고려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보급한 공으로 대승에 제수되고 통합삼한익찬공신의 호를 받았다. 시조의 9세손 경(璥)이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왕정을 회복시킨 공으로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봉해지고, 그의 고향인 유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음에 따라 후손들이 문화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 차달의 10세손 내지 12세손 대에서 14파로 크게 나뉘는데, 그중 역사상 벼슬의 역력이나 인구수에서 큰 파(派)를 이룬 것은 충경공파, 좌상공파, 하정공파, 검한성공파 및 지후사공파의 5개파이다. 충경공파의 파조(派祖)인 량(亮)은 시조 차달의 14세손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예문관대제학·우의정 등을 지냈다. 그의 5대손 관(灌)은 인종 때 좌의정을 지냈는데 명종 때 외척(外戚)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윤임(尹任)과 윤원형(尹元衡) 사이의 정권쟁탈전에서 사사(賜死)되었다. 량의 백씨파(伯氏派:府尹公派)에서 사원(思瑗)이 선조 때 임진왜란의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되었다. 좌상공파의 파조인 만수(曼殊)도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에게 참살당하였다. 그의 현손 순(洵)은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6세손 전(琠)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내는 등, 만수의 후손에서 상신이 많이 나왔다. 하정공파의 파조인 관(寬)은 조선 태종 때 예문관대제학, 세종 때 우의정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의 9대손 상운(尙運)은 속종 때 대사간으로 특진되어 영의정을 2회, 중추부판사를 3회 지냈으며, 아들 봉휘(鳳輝)는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한편 관의 둘째아들 계문(季聞)은 세종 때 형조판서를 지냈고, 계문의 손자 담년(聃年)은 중종 때 병조판서를 지냈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로 이름난 형원(馨遠)은 계문의 8세손이다. 지후사공파에서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원(誠源), 정조 때 실학자로서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등과 함께 한문신파사가(漢文新派四家)로 불린 득공(得恭)이 나왔다. 그러나 광해군의 장인 자신(自新) 일가는 대북파로서 인조반정 뒤에 크게 화를 입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8만 7186가구에 28만 40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 전주류씨(全州柳氏) 문헌상으로 백제 무왕 때 일본으로 건너간 류중광(柳重光)이란 인물이 전주류씨(全州柳氏)로 밝혀졌고, 류방헌의 묘지명에 의하여 통일신라 때 각간을 한 류기휴(柳其休)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는 시조 선계가 알려지지 않은 류혼(柳渾), 류습(柳濕), 류지(柳池)의 3파가 있다. 상세한 내용은“3. 전주류씨”편에 수록하였다. 3) 진주류씨(晉州柳氏) 가) 토류계(土柳系) 시조는 류정(柳挺)으로 고려 중기에 금자광록대부 중서령 좌우위상장군(金紫光祿大夫 中書令 左右衛上將軍)에 이르고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에 봉해졌는데 고려 중기에 크게 활약한 최충헌(崔忠獻)의 외조부로서 오래도록 진주에서 살아 온 토족(土族) 출신이다. 시조의 아들 숙(淑)은 신호위 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郞將)을 지내고, 딸은 우봉인(牛峰人) 최원호(崔元浩)에게 출가하여 최충헌(崔忠獻), 최충수(崔忠粹)를 낳았는데 최충헌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따라서 우봉최씨 가문에서 사위와 며느리를 얻어 최충헌 집권 당시에 진주류씨는 최고의 권세(權勢)를 누린 가문으로 볼 수 있다. 시조의 후손 중 유일하게 대제학을 지낸 근(根)이 이름을 떨쳤으며, 숙종 때 남인으로 온갖 파란을 겪은 이조참판 명견(命堅), 예조판서 명천(命天), 이조판서 명현(命賢) 형제는 근(根)의 종증손이다. 이밖에 을사사화 때 유배되어 죽은 이조판서 인숙(仁淑)이 있으며, 명현(命賢)의 7대손 익수는 독립운동가였다. 나) 이류계(移柳系) 문화류씨 시조 차달의 10세로 고려 밀직사(密直使) 인비(仁庇)를 시조로 한다. 인비(仁庇)는 손자대에 이르러 익양공파(翊襄公派:惠芳)와 안간공파(安簡公派:惠蓀)의 2파로 나뉘었다. 익양공파에서는 순(珣)과 그의 아들 겸(謙) 부자가 다 같이 청백리에 올랐으며,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오른 염(琰)은 순의 4촌이고 중종 때의 이조판서 빈(濱)은 겸의 5대손이다. 익양공파의 인물은 모두가 겸의 현손인 순정(順汀)과 진동(辰仝)의 후손이다. 순정은 중종반정 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르고 그의 아들 홍(泓)과 조카 영(濚)도 역시 중종반정의 공신이며, 조카 부(溥)는 중종 때 좌의정, 11대손 엄(儼)은 영조 때 문장가로서 예조판서를 지냈다. 한편 진동은 부제학·공조판서를 역임했는데 문한(文翰)으로 유명하다. 그의 후손에서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형(珩), 병자호란 때의 명장 임(琳), 숙종 때의 공조판서 혁연(赫然), 경종 때 부총관 취장(就章)을 비롯하여 많은 무과 출신의 무장을 배출하여 무인(武人)의 집안으로 유명하다. 4) 고흥류씨(高興柳氏) 고흥 류씨 시조 류영(柳英)은 고려 때 호장(戶長)을 하였고, 그 후손 고려 증평장사(高麗贈平章事) 류승무(柳升茂)와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영밀공 류청신(柳淸臣) 등 누대(累代)의 유지(遺址)가 있다. 시조로부터 2세 숭제(崇濟), 3세 광(光)은 모두 호장이고, 4세 명단(明旦), 5세 욱(昱), 6세 승무(升茂)는 영밀공의 영작(榮爵)으로 증 대장군, 증 평장사, 증 문하시랑 평장사의 증직을 각각 받았다. 7세 청신(淸臣)이 고려 충선왕 때 찬성사·첨의정승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탁(濯)이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도첨의 정승에 올랐다. 탁의 아들 습(濕)이 조선 태종 때 이조·예조 전서를 거쳐 세종 때 우군원수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고, 그의 6대손 몽인(夢寅)은 설화문학의 대가이다. 그는 이괄(李适)의 난 때 반군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혐의로 아들 약(龜)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밖에 3·1운동 때 순국한 관순(寬順)은 고흥류씨이다. 5) 선산류씨(善山柳氏) 선산류씨 시조는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柳車達)의 10세 류원비(柳元庇)이다. 대표적 인물로는 희춘(希春)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선조 때 부제학·대사간·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경사(經史)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부인 송씨(宋氏)도 손꼽히는 여류시인이었다. 6) 서산류씨(瑞山柳氏) 서산류씨 시조는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柳車達)의 10세 성간(成澗)인데 고려 명종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참지정사(參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성간의 5세손 굉(宏)은 성거(成巨)·성계(成桂)·성주(成柱)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거의 아들 방택(方澤)의 후손이 정숙공파(靖肅公派)로, 성계의 아들 숙(淑)의 후손이 문희공파(文僖公派)로 분파하였다. 정숙공파에서 다시 대사헌파(大司憲派), 무동처사공파(楙洞處士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로 나뉘고, 문희공파는 한성좌윤공파(漢城左尹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 태재공파(泰齋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로 갈라졌다. 세종 때 학문에 정통하고 시문에도 능하였던 방선(方善), 성종 때 분류두시공부언해(分類杜詩工部諺解)를 간행한 윤겸(允謙) 등이 이름을 알렸다. 7) 풍산류씨(豊山柳氏) 풍산류씨 시조 류절(柳節)은 고려 때 수주(樹州:경기도 부평의 옛 지명)의 호장을 지냈고, 7세 류종혜(柳從惠)가 조선 태조(太祖)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창평현령을 지낸 조부(祖父) 난옥(蘭玉)과 검교예빈경을 지낸 부친 보가 지어놓고 적선(積善)을 베풀었던 관가정(觀稼停)이 있는 하회(河回) 마을에서 풍산 류씨의 가맥(家脈)을 계승했다. 류종혜는 친구 배상공(裵尙恭)과 함께 산수가 아름다운 하회촌으로 이거하였다. 이후 배상공의 아들 배소(裵素)의 사위 권옹(權雍)이 이어서 살게 되고 류종혜의 손자 류소(柳沼)가 권옹의 사위가 되어 다시 하회촌으로 복귀한 이래로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류소의 큰아들 류자형(柳子泂)의 후손은 자형의 아들 류공지(柳公智)가 예안 서촌에 살던 영양김씨(英陽金氏)의 사위가 되면서 예안으로 이거하였으나 현황은 알 수 없다. 류소의 둘째 아들 류자온(柳子溫)은 진사에 급제하고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류공탁(柳公綽)은 간성군수를 지냈고, 류공탁의 아들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은 문과에 급제하여 내 외직을 두루 거치고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류중영의 아들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은 원주목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영의정이 되었다. 이들의 후손은 각각 겸암파와 서애파로 분류된다. 류자온의 둘째 아들 류공권은 문과에 올라 공조좌랑을 지냈고 아들 류경심(柳景深)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류운룡의 증손 류세철(柳世哲)은 복제 문제를 논하는 영남유림소의 소수(疏首)가 되었고, 우헌(寓軒) 류세명(柳世鳴)은 문과를 거쳐 병조정랑 홍문관교리를 지냈고 도학에 깊었다. 류성룡의 셋째 아들 류진(柳袗)은 풍수지리설을 따라 상주 낙동으로 이거하였는데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류후조(柳厚祖)가 그의 7세이다. 서애 류성룡의 장손 류원지(柳元之4), 현손 류후장(柳後章), 6세 류규(柳奎) 등은 학문과 도덕으로 추앙되었다. 류원지의 6세손 류상조(柳相祖)는 병조판서를 지내고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류태좌(柳台佐)는 이조참판, 류지영(柳芝榮)은 안동부사를 지내는 등 많은 이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류성룡의 10세 류도발(柳道發)은 경술국치의 비분을 이기지 못해 식음을 끊어 순절하였다. 8) 영광류씨(靈光柳氏) 증보문헌비고에 시조는 류언(柳漹)이다. 시조의 손자가 예종 때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자환(子煥)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정난공신 3등에 오르고, 도승지·대사헌·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또 다른 시조 류자택(柳資澤)은 조선 정조2(1778)년 문과에 올라 여러 지방수령(地方首領)을 거친 뒤 마지막으로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내고, 남원(南原)에 정착하였다. 분적종 및 분파 신해보(辛亥譜) 서문에 따르면, 영광류씨(靈光柳氏)의 시조 류자택(柳資澤)은 진주군(晋州君) 류유(柳洧)의 큰 아들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익양공(翊襄公) 류혜방(柳惠芳)의 둘째 아들로서 영광류씨(靈光柳氏)가 진주류씨(晋州柳氏)에서 분파되었다고 하나, 이와 관련된 다른 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3. 전주류씨(全州柳氏) 문헌상으로 전주류씨(全州柳氏)는 백제 무왕 때 일본으로 건너간 류중광(柳重光)이란 인물이 있고, 통일신라 때 각간(角干)을 한 류기휴(柳其休)의 기록이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한 류방헌(柳邦憲)의 묘지명에 나온다. 그러나 현재는 시조의 선대를 알 수 없는, 시조가 다른 전주류씨 류혼(柳渾), 류습(柳濕), 류지(柳池)의 3파가 있다. 한편 전주류씨 3파를 합한 인구는 1985년에 47,383명이며, 2000년에는 6,1650명으로 나타났는데 우리나라 전체 인구수에 따른 순위는 116위이며, 지역별로는 표-3.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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