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형이 영국인입니다. 한국생활 햇수로 12년째, 홍콩과 한국을 오간 시간까지 합하면 무려 16년째인 매형은 아직 (아마도 영원히) 어눌하고 새는 한국어 발음을 빼면 소주 좋아하고 국밥으로 해장한뒤 사우나에서 땀빼기를 즐기는 전형적인 한국의 중년 아저씨가 다됐습니다.
그의 고국에 살고있는 남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역시 축구라면 자다가도 벌떡깨는 열혈축구광입니다. 서울 대치동과 화곡동 일대의 조기축구계 파란눈의 침략자(?)로 불리우던 시절도 있었다지요. (본인 진술입니다. 확인안해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한국화된 아저씨라해도 2002년 한일월드컵때 내내 일본에 가서 잉글랜드를 응원했을 정도로 고국축구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최근에는 지성,영표의 프리미어진출로 맨유-토트넘 위주의 프리미어 경기들이 자주 중계되다보니 저보다 더 열심히 고국축구를 시청하는듯 합니다.
허나 그의 진정한 애정은 언제나 고향팀인 선더랜드(Sunderland A.F.C)를 향해 있습니다. 매형은 지난 2년동안 틈틈히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 아이파크의 경기를 관전하곤하는데, 부산에 그어떤 연고도 인연도 없는 그가 일부러 먼길을 찾아가는 이유는 바로 선더랜드가 낳은 전설적 스타인 이언 포터필드 감독과 그가맡은 클럽을 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1973년, 선더랜드의 마지막 메이져트로피였던 FA컵 우승의 일등공신이기도 한 이언 포터필드는 매형의 최고 우상이었다고 해요. 뿐아니라, 고향인 영국과 사업적 본거지인 홍콩 등에서 가족과 지인들이 수시로 경기 녹화테이프, 레플, 타블로이드 스크랩 등 선더랜드에 관한 자료들을 보내주곤 한답니다. 한국사람 다된 매형이지만, 이렇듯 언제나 선더랜드FC는 그의 향수이고 그리움의 대상이지요.
선더랜드는 사실 명문클럽의 범주에 넣을수 있는 팀입니다. 명색이 축구종가 잉글랜드에서 리그타이틀을 6회나 차지한 클럽이니까요. (6회 기록은, 리버풀-맨유-아스날-에버튼-아스톤빌라에 이어 여섯번째 많은 기록입니다) 하지만 선더랜드 서포터의 자부심이란 마치 징기스칸의 영광을 되새김하는 현대 몽골인들의 로망과도 같을겁니다. 영국 리그 출범 초기 아스톤 빌라와 함께 양강구도를 형성한 선더랜드지만, 6회의 우승 모두 세계2차대전 이전의 영광들일뿐, 이후 1,2부를 오락가락하는 그저그런 세월을 보내온지도 어언 70년이 되어가니까요. 2부리그 소속으로 FA컵 우승을 일궈냈던 1973년의 승리, 그리고 피터 리드 감독의 지휘아래 케빈 필립스-니알 퀸 막강투톱의 활약으로 실로 모처럼의 프리미어에서의 견고한 경쟁력을 보여줬던 99~01년의 달콤했던 두시즌만으로는 이 영국 북동부 아름다운 항구도시의 헌신적인 축구팬들의 목마름을 보상해주기에는 부족했을겁니다.
뉴밀레니엄을 낀채로 2년간 프리미어에서의 성공적인 분전은 그들이 다시 톱리그 타이틀 컨텐더로 자리잡는 서막인듯 보였지만, 지난 70년간 이어온 "오락가락"의 역사는 여지없이 반복되고 맙니다. 01~02시즌 겨우 강등을 피할 정도의 급추락 후 02~03시즌에는 급기야 당시 개인득점왕이었던 맨유의 반니스텔루이의 개인득점(25점)에도 못미치는 팀득점(21점)의 형편없는 공격력으로 결국 4승7무27패 승점 19점이라는 최악의 성적에 가장 잘어울리는 꼴찌성적표를 받아들고 4년만에 2부리그(현 챔피언쉽)로 떨어졌죠. 게다가 백일몽을 위한 분에 넘치는 지출로 인한 빚더미까지 덤으로 짊어지고 말입니다.
허나 재기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습니다. 한국대표팀의 포스트히딩크 후보로서도 진지하게 거론된바 있는 전 아일랜드 국가대표 감독 믹 매카시를 사령탑에 앉힌것은 강등 직전 선더랜드의 유일하게 현명한 행보였고, 그는 초토화된 팀을 다시 추스려 불과 1년여만에 2부리그 챔피언쉽의 독보적인 클럽으로 조련해냅니다. 설기현의 울버햄튼 진출로 인해 우리 국내축구팬들의 관심도 컸던 04~05시즌의 챔피언쉽 순위표에서 시즌 내내 위건과 함께 꼭대기에서 놀다 결국 29승에 승점 94라는 놀라운 성과로 우승트로피를 챙긴 바로 그팀이 2년전 프리미어에서 27패를 당하던 같은 팀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죠. 맥카시의 공헌을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선더랜드는 지난 70년간 이런 팀이었습니다. 떨어지면 다시 나무뿌리 붙들고 기어올라오고.. 또 떨어지고..또 기어올라오고.. 3부리그 강등은 단 한번밖에 없었을 정도로 언제나 재생력 강한,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않는 불굴의 캔디같은 클럽이었죠.
2년만의 화려한 프리미어리그 컴백. 다시 타인웨어 더비(선더랜드와 뉴캐슬의 북동부지역 더비)를 볼수있다는 기쁨에 매형은 무척 즐거워했습니다. 99-00시즌 이후에 한번도 리그경기를 관람하지 못한데 한을 품은듯 이번 겨울엔 반드시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이번만큼은 기대해도 좋다는 호언장담을 하더군요. 아마도 속뜻은 이번만큼은 제발 오랫동안 프리미어리그에 정착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겠죠. 하지만 그가 그리워하는 고향의 5만석짜리 축구장 '빛의 스타디움'(Stadium Of Light)에 02~03시즌의 처절한 악몽이 보다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불어닥칠거라고는 아마 상상조차 못했을겁니다.
2006년 3월13일, 총 38라운드 중 29라운드까지 치른 현재, 선더랜드는 2승4무23패 승점10점으로 가히 기록적인 재앙의 시즌을 보내고 있습니다. 총득점 19점으로 최악의 공격력, 총실점 52점으로 최악의 수비력 모두 선더랜드의 차지이고, 기어이 최근에는 번개같은 리빌딩으로 Sunderland를 Thunderland로 만들어낸 믹 매카시 감독의 비극적인 경질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꼴찌나 강등따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재앙은, 매형의 표현을 빌자면 '있을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재앙은, 시즌 3분의2를 지난 현재까지도 그들의 홈인 '빛의 스타디움'에서 단 1승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홈무승 기록이 이어지면서 현지언론에서는 '(소속디비젼을 막론하고) 선더랜드가 역사상 최초의 크리스마스 이전 홈무승이라는 극악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홈팬들에게 주려한다'는 비아냥이 파다했다하는데, 그보다 3개월이 더 흐른 현재마저도 이 치욕은 이어지면서 설마설마했던 시즌 홈경기 무승이라는 대기록(?) 작성이 코앞으로 다가온것이죠.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올시즌 이 어둠의 스타디움(Stadium Of Darkness)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현상은 유럽축구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입니다. 연고정착이 제대로 되지않은 우리 K리그에서는 각팀의 홈.원정 성적편차가 거의 무의미한 분포로 나타나지만, 아무리 약한 클럽이라도 홈에서만큼은 범무서운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로 돌변해 덤벼드는게 바로 유럽축구죠. 절대다수의 클럽들이 홈경기에 더 강하고, 그중 상당수는 원정성적과는 아예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기도 합니다. 좋은 예로 올시즌 프리미어에서 선더랜드와는 반대로 원정경기 무승행진을 이어가고있는 클럽 풀럼같은 경우엔 현재 홈성적(9승2무3패)과 원정성적(0승3무12패)을 보면 도저히 같은 팀의 성적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럴진대 홈경기 무승이라니. 홈팬들에게는 기막힐 노릇이죠. 만일 구단주가 4부리그 첼튼햄(Cheltenham)과 세미프로클럽 노스위치(Northwich)를 상대로 거둔 리그컵/FA컵에서의 홈승리로 면죄부를 얻으려한다면 아마 똥물이라도 끼얹을지 모를겁니다.
선더랜드 팬들이 겪고있는 것은 극심한 두통뿐만이 아닙니다. 복통도 동반하고 있죠. 지난시즌 챔피언쉽에서 자신들 발밑에 있는 팀들이었던 위건과 웨스트햄이 현재 나란히 8,9위에 자리잡고 중위권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있는 것을 지켜보는것은 홈무승의 치욕과 함께 극악의 컴비네이션일겁니다. 특히 프리미어리그 초짜클럽인 위건의 돌풍이 얼마나 부러울지는 훤합니다.
헌데 사실 선더랜드가 프리미어리그 재입성의 준비에 소홀했던것은 아닙니다. 뉴밀레니엄의 성공 이후 극도로 취약해진 재정은 여전하지만 작년 여름 많은 기존 선수를 챔피언쉽이나 리그1에 떨궈놓고 안소니 르탈렉, 크리스티안 바실라, 저스틴 호이트, 토미 밀러, 조나단 스테드, 마틴 우즈 등 나름대로 10명 안팎의 중저가형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거나 임대해오면서 리그수준에 맞추려는 노력을 행했습니다. 허나 위건이 기존의 제이슨 로버츠, 안드레아스 요한슨, 리 맥쿨로치, 레이튼 베인스 등 기존 승격공신 멤버들에다 '돌아온 캡틴' 아르얀 드제우르 비롯해 앙리 카마라, 파스칼 심봉다 등 새로 가세한 멤버들이 마치 낡은 부품만을 정확하게 교체한 기계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프리미어리그에서도 경쟁력을 유지한 반면, 선더랜드는 숫자만 많았지 전혀 팀전력에 보탬이 안되는 어중간한 뉴페이스들의 오합지졸이 된데다 초반부터 극심한 부진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생겨난 선수간, 선수-감독간 불화들, 또 여기서 파생한 주전 몇몇의 팀 이탈등 악재가 계속되면서 차라리 작년 챔피언쉽에서의 멤버를 그대로 유지하고 조직력으로 승부했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팀일거라는 자조가 흘러나오고 있죠. 특히 무엇보다 주전 스쿼드 대부분이 82년생 이후출생일만큼 지나치게 젊은 선수들 위주로 새팀을 구성했다는 점은 맥카시감독의 엄청난 실수였다고 여겨집니다.
어쨌거나 매형은 다음달 17일 '어둠의 스타디움'에서의 뉴캐슬과의 더비를 보기위해 누나의 차가운 반응을 뒤로하고 고향에 다녀올 계획이라고 합니다. 매형과 축구얘기를 하다보면 그래요. 자신이 서포팅을 하지않아서 팀이 지고있다는 말도안되는 자책따위를 느낄 정도입니다. 참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한 열정이죠. 서울사람으로 불행하게도 국내리그에 지지클럽이 없고, 또 앞으로 서울팀이 생긴다해도 갑작스럽게 충성심이 생길것같지도 않은 그런 저에게 설령 홈에서 못이기는 꼴찌팀이라도 긴장하고 흥분하고 열광하고 낙심하면서 응원할수있는 그런 대상의 존재자체가 그저 부럽기만합니다.
이미 강등은 확실한 선더랜드이지만 곧 다가올 홈더비에서 뉴캐슬을 시원하게 이겨서 치욕적인 시즌전체 홈무승기록에는 종지부를 찍고 매형을 기분좋게 한국으로 돌려보내주기를 바랍니다.
선더랜드라는 클럽에 관심있는 분도 별로 안계실텐데 너무 긴글을 썼군요. 소모적인 시간이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첫댓글 이야...저도 축구팬으로써 저런 분들을 보면 참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대단...;;
부럽져 영국인의 축구愛
영국에서 살고싶다 ㅋ
와 엄청난 축구팬이시네요..
선더랜드응원하고싶어짐...프리미어리그어느팀이라도 울나라선수 들어가면 좋겠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