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eview MDCCLXXVI / 김영사 31번째 리뷰] 이 책 <신조협려>는 김용이 쓴 '영웅전 3부작'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1부에 해당하는 <사조영웅전>의 주제가 '영웅이란 무엇인가?'라면, <신조협려>는 '정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정(情)을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사랑'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신조협려>의 무협영웅들은 하나 같이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애정에 집착하고 목숨까지 걸어버리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는 <신조협려>의 주제가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 도입부는 너무도 유명해서 '홍콩영화'를 즐겨본 이들이라면 한 번만 들어도 추억을 떠올릴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생과 사를 같이하게 한단 말인가]
원래는 금나라 시인 원호문의 '안구사'의 한 대목인데, 김용은 이 시를 통해서 <신조협려>를 통으로 써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조협려>의 등장인물들은, 특히 젊은 등장인물들은 그야말로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조협려>의 시대배경은 금나라와 몽골이 한창 싸우던 '남송시대'지만, 칭기스칸이 죽은 뒤에 몽골이 금을 멸한 뒤에 남송까지 차지하려 야욕을 드러는 때다. 이에 한족(남송인)들은 몽골의 군대에 맞서 결사항전을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서 몽골이 중원을 차지한 뒤 '원나라'를 세우기 직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소설속에서는 곽정과 황용이 한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끝까지 항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곽정과 황용이 승승장구하는 반면에 전세는 기울어 남송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이고 만다. 이런 시기인데도 젊은 남녀들은 목숨바쳐 나라를 구하려 싸우기보다 '사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살짝 의아스럽기까지 하지만, 피비린내나는 전장터에서도 사랑은 꽃을 피우기 마련(?)이라는 것인지 김용은 과연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과 사를 같이하느냐?'고 세상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신조협려>의 주인공은 단연 '양과와 소용녀'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양과는 <사조영웅전>에서 곽정과 의형제를 맺었던 '양강의 아들'이다. 양강이 자기 아버지를 죽게 만든 원수를 아버지로 섬기는 패륜을 일삼다 비명횡사한 탓에 양강의 아내였던 목염자는 아비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를 낳고 외롭게 살아간다. 이를 딱히 여긴 곽정과 황용이 목염자를 돌봐주려 하지만 거절하고 만다. 하지만 의형제 사이였던 곽정의 호의마저 거절할 순 없었기에 양강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게 되는데, 이름은 '과', 자는 '개지'로 한다. 아비의 과오를 잊지 말고 잘못을 고치라는 뜻을 담았다. 우리식으로 이름을 지으면 '양잘못', '뉘우침' 정도가 될텐데, 외국의 이름은 이렇게나 '직설적'이라서 황당한 경우가 많다. 아무리 아비가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이름을 '부정적'으로 짓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굳이 우리식으로 이름을 말하자면, '양바름'이른 뜻을 담아 '양정(楊正)'이라고 지었을텐데 말이다. 한편, 소용녀는 양과보다 두 살 많은 설정이지만, 어릴 적부터 무덤속에서 살아온 터라 피부가 새하얗고 청순가련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 20대가 넘어서도 소녀 같은 미모를 갖고 있다는 설정이다. 허나 무덤에서 적막하게 살았고 사회생활(?)이라고는 해본적이 없는 탓에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성미라서 아이돌급의 미소녀인데도 냉랭하기 그지없..좋게 말해 차분한 미녀다.
결국, 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소용녀가 젊은 나이에 죽기 때문인데, 양과는 팔 한 쪽을 잃고 외팔이가 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지키고 싶었던 첫사랑의 여인이 죽자 평생을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서도 '잘생김'은 떨쳐내지 못한 탓에 수많은 여자들을 울리고 마는데, 그 가운데 곽정의 둘째딸인 '곽양'의 마음을 사로잡아 소용녀를 잃고 아파하는 양과의 곁을 지켜주고 싶었으나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양과 때문에 곽양도 평생을 홀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홀로 무예를 닦아 '아미파'를 창시하게 되니, 훗날 3부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아미파의 여검사 주지약의 오랜 선배가 된다. 이렇듯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야기'가 <신조협려>의 이야기는 수많은 '무협지'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 만들게 된 '암연소혼장'이란 무술에서 따온 고한우의 <암연>이라는 노래는 그 쓸쓸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 하겠다.
[울음을 참으려고 하늘만 보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내 품에 안겨와 마주댄 그대 볼에 눈물이 느껴질 때는 나도 참지 못하고 울어 버렸어 사랑이란 것은 나에게 아픔만 주고 내 마음속에는 멍울로 다가와 우리가 잡으려 하면 이미 먼 곳에 그땐 때가 너무 늦었다는데]
양과와 소용녀의 사랑은 이렇듯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이런 둘의 사랑을 멀찍이 바라보던 '곽양'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슬픔에 빠져버렸고 말이다. 어쩌면 <신조협려>에서 사랑에 성공한 이들은 '찐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아픈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 아닌 것처럼 가슴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조협려> 1권에서 이야기의 서문을 여는 것도 바로 사랑이다. 적련선자 이막수와 육전원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외모를 지닌 청춘남녀였는데, 둘은 사랑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왜냐면 육전원의 앞에 '하원군'이라는 절세미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육전원과 하원군은 서로 첫 눈에 사랑에 빠져서 만나자마자 혼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막수는 육전원과 썸만 타다가 '사랑고백'을 하기도 전에 사랑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렇게 첫사랑에 실패한 이막수는 '악독한 미녀'가 되어 가는 곳마다 살생을 저지르는 악행을 일삼는데, 그 첫 번째 행패가 바로 육전원과 하원군의 혼례식이었다. 그때 대리국 천룡사의 고승에게 제압 당한 이막수는 앞으로 10년간 이 부부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떠났는데, 시간을 훌쩍 지나 바로 10년 째 되는 그날에 이막수가 찾아와 육전원 부부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은 진즉에 틀어져 육전원과 하원군은 백년해로를 하지 못하고 일찍 병을 얻어 죽고 만다. 그런데도 이막수는 육전원의 동생 내외를 비롯해서 그 집의 식솔들을 전부 살육하겠다고 쳐들어오니, 과연 사랑에 눈 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지 잘 보여주는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런데 난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어서 궁금할 따름이다. 사랑 때문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할 수도 있고, 사랑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미워하고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것마저 망설이지 않을 정도로 분노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음..여자 손목조차 잡아본 적이 없는 총각은 이해하기 힘든 소설이다(--)뻔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