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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룡산 263회
( 게론티온님의 후기를 옮김 )
화려하고 멋지고 조망이 좋은 산은 예외 없이 그 덩치가 크게 마련이다.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화천군의 경계를 이루면서 경기도 최고봉인 화악산(華岳山)도 그러하다. 화악산(1,468.3m)은 경기 오악 중의 하나로 운악산, 관악산, 송악산, 감악산 중에서도 제일 맏형 격이다. 민속산악회가 여름 맞이 오지의 산과 계곡산행으로 선정한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이 화악산의 북서릉상에 붕긋 솟은 가평군 북면에 위치한 석룡산(1,147m)이었다. 그 서편엔 국망봉이 자리잡고 있으며 화악산과 석룡산 그리고 국망봉 남쪽 자락으로 북위 38도선이 가로 지르고 있다. 화악산 북쪽 바로 아래에 사창리가 있고 좀 더 나가면 다목리, 그리고 수피령을 연하여 대성산(1,174.7m)이 솟아있고 그 아래에 육단리가 있다. 석룡산 북쪽 자락에는 38교가 놓여 있고 건너편엔 백운산과 번암산이 그 너머 작은 마을 와수리가 있다. 모두 철원 김화로 가는 길목들이다. 지난해 7월 17일 번암산 산행후기에 잠깐 소개했던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공세로 국군 보병 제6사단이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던 ‘사창리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 국군 보병 제 6사단은 4월 21일부터 사창리와 화악산 일대에서 육단리와 와수리 방향으로 적을 추격하고 있던 중, 22일 오후 사단 전방에 대규묘의 적이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자 즉시 공격을 중지하고 방어 작전으로 전환했다. 한편 중공군 제 20군과 40군의 예하 4개 사단들은 화천-가평축선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중동부의 유엔군과 서부지역의 유엔군들의 상호지원을 차단하고 서울을 공격하는 주공부대의 동 측방을 엄호하기위한 목적으로 최초엔 미 해병 제 1사단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화력과 기동면에서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북한강을 도강해야하는 상대적 불리함이 있었기에 미 해병 1사단 대신에 전투력이 약한 국군 보병 제6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정면 공격과 동시에 부대와 부대사이의 빈 공간으로 침투하여 사단후방을 차단함으로서, 보병 6사단 장병들은 적진에 고립된 상태로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만 했었다. 23일 날이 밝자 유엔군의 항공기와 지원포병의 사격으로 중공군의 공격이 다소 둔화된 틈을 타서 부대를 재편성하여 국망봉-석룡산-화악산을 연하는 소위 ‘캔사스’선을 점령하여 급편방어편성을 완료하였다. 당시 작전요도에 의하면, 국방봉과 석룡산엔 보병 6사단 예하 제19연대가, 그리고 화악산과 매봉일대엔 제2연대가 배치되었다. 그러나 23일 야간이 되자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에 또 다시 돌파당하고 영국군 제27여단의 엄호하에 가평일대로 철수하여 부대재편성에 들어갔다.
중공군에 쫓기면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화악산과 이 석룡산 등성이와 계곡을 타고 올랐던 당시 6사단 병사들의 고통이 어땠을까? 숨은 차오르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그 배고픔은 어떻게 견뎠으며 장비나 탄약 그리고 보급품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리가 있었겠나? 그 짧은 시간에 개인호와 교통호조차 구축할 수도 없었을 터... 잠시 바위나 숲속에 몸을 숨겼다가 피리불고 북치며 개미떼처럼 밀려오는 중공군을 맞이한 그들의 두려움은 또 어땠을까? 이 석룡산 능선과 계곡구석구석에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의 원과 한과 피가 얽이여 있을 것이다. 흙속에 뒤섞인 채 녹아 있거나 꽃과 풀이 되어 되살아 자랐거나, 개울물에 휩쓸려 어디론가 긴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불과 58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모두 잊었다. 산행버스는 판교IC를 지나 미사리 근처에서 신설된, 서울 - 춘천을 잇는 민자 고속도로를 통해서 달려온 탓인지 오전 9시 30분쯤에 ‘석룡산, 어서 오십시오, 석룡산 정상 4.6km' 라 적은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석룡산 산행 들머리에 닿았다. 버스를 내리면서 일행들은 계곡 한 구석에 마련할 뒤풀이 장소에 미리 옮겨 놓을 물품들을 하나씩 들고 내렸다. ’조물락 계곡‘인 줄 알았더니, 왠 ’조무락(鳥舞樂)‘이라는 간판을 달아 둔 차와 커피를 파는 방가로 형 까페를 지나 왼쪽으로 꺾어 석룡산 초입 풀숲 속으로 들어섰다. 숲은 짙게 우거졌고 개울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역시 후미였고 김회장과 이총무가 좀 여유롭게 내 뒤를 따라 올랐다. 얼마쯤 걸어 오르다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해 낼 수가 없는데 아마, 숲속의 서늘한 기운과 숲 향기에 취했던지 김회장이 ’신고산타령‘ 한 자락을 깔았다.
‘신고산이 우루루 함흥차 가는 소리에 구고산 큰애기 밤보짐만 싸누나, 어랑 어랑 어허야 어허야 더어야 내 사랑아, 공산야월 두견이는 피나게 슬피 울고, 강심에 어린 달빛 쓸쓸히 비쳐 있네. 어랑 어랑 어허야 어기여차......’ 타령엔 한 가닥 조예가 있는 듯 낭랑했다. 기분도 좋았다. 그런데 순간 그 김회장의 ‘신고산타령’가락이 마치 이 석룡산 등성이와 계곡에 잠든 젊은 영혼들을 위무하는 듯한 노랫소리로 들리면서 내 마음이 무거워지고 숨도 차고 발걸음도 무디어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번암산 중턱에서 느꼈던 그런 심리상태였다. 소위 사점이 산행을 시작한 지, 채 30분도 되기 전에 일찍 닥쳤다. 짙은 숲속 터널과 우거진 다래 넝쿨들이 풍기는 상큼한 내음을 폐부 깊숙이 들여 마셨다. 이토록 푸르고 짙은 숲과 청량감이 온전히 보존 돼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화악산이 여전히 민간인들에게 어느 정도 통제되고 있음에 영향을 받아 기인한 것이라 여겨졌다. 이럭저럭 견디며 걸어서 ‘석룡산 정상 2.8km' 지점을 통과하고 20여분이 경과했다. 그 때 저만치 앞선 길가에 심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심선생을 만나자, 나보다 김회장이 훨씬 더 반가워했다. 나를 뒤따라오느라고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땀 좀 흘리겠습니다‘ 라는 말 한 마디 남기고 이총무를 대동해서 비호처럼 앞으로 내달았다.
심선생이 오늘의 내 산행 스폰서가 됐다. 느릿느릿 천천히 걸어서 잣나무 단지 앞 ‘자루목이’로 가는 임도를 건너 잣나무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석룡산 정상이 1.7km 남았다고 안내판이 전했다. 그리고 다시 ‘석룡산 1.3km' 안내판을 지나자 이미 폐기된 허름한 유개호 하나와 그 옆으로 난 무너져 흐트러진 교통호들이 이곳을 군인들이 관리했음을 흔적으로 남기고 있었다. 석룡산 8부 능선쯤 되는 지점이었다. 여기서부터 다시 숨이 차오르고 땀도 물 흐르듯 등짝을 타고 내렸다. 지치기 시작했다. 석룡산을 좀 가벼이 여기고 예비 훈련을 게을리 한 탓도 있었다. 오솔길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었고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가파른 암릉과 바윗길이 거듭됐다. 내 걸음걸이가 아주 무디어졌다. 중간 중간에서 앉아 쉬기도 했다. 그 사이, 다른 산악회를 따라 온 김귀준 사장과도 조우했고, 지난번 공룡능선 산행 시에 만났던 몇 몇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고 지나갔다. 웬만해선 내색치 않고 심중이 깊은 심선생 표정에도 내가 좀 답답해 보이는 듯 느껴졌다. 걱정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 왔어요, 이제 다 왔네요‘ 라고 말하며 나에게 힘을 불어 넣었다. ’석룡산 0.3km' 안내 표지판을 지나 끙끙거리며 드디어 석룡산 정상에 닿았다. 토끼처럼 먼저 달아난 갑장 송선생이 산 정상에서 패랭이와 함께 나를 굽어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오늘은 왜 그래? 평소완 좀 다르네.’ 라고 기다린 지루함을 토했다. 지난번 지리산 바래봉 산행 시에 보폭을 맞추었던 패팽이와 함께 두 번째로 땀을 좀 제대로 흘린 모양이었다.
석룡산 정상에 올라 정상석을 배경으로 넷 사람이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12시 35분! 그런데 석룡산 꼭대기에는 두 개의 정상석이 있었다. 기단위에 세워진 오석에다 ‘석룡산 해발 1,147.2m' 이라고 음각한 정상석 하나와, 그 옆에 그대로 방치된 듯, 보이는 ’石龍山 해발 1,153m' 라고 음각된 정상석이 있다. 지도상엔 ‘석룡산 높이가 해발 1,147m로 기재돼 있는 것으로 봐서 기단위에 오석으로 만들어진 정상석이 제대로 된 정상석인 모양이다. ’방림고개(일명 쉬밀고개)‘ 쪽을 향해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방림고개‘ 채 못 미쳐 등산로 옆 평지를 찾아 들어 점심식사를 했다. 오늘 점심엔 홍일점 패랭이가 평소의 박선생을 대신했다. 박선생은 고객관리 차원에서 모처럼 민속산악회에 나온 이선생과 함께 앞서 내려간 탓이었다. ’방림고개‘에서 ’복호동폭포‘ 쪽 계곡으로 접어들어 1km쯤 내려오니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했다. 세인들에게 흔히 새가 춤추고 즐긴다고 알려져 있는 조무락(鳥舞樂)계곡이었다. 계곡이 넓고 깊을 뿐만 아니라 수량도 풍부하다는 것을 대뜸 알 수 있었다. 실은 갑장 송선생과 함께 한 오늘 산행의 내심 목적은 이 계곡의 소와 물을 탐해서였다. 콸콸콸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사실 ‘鳥舞樂’ 은 어쩜 엉터리 調語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새는 춤추기 전에 지저귀며 노래부터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날개 짓을 하든 즐기든 해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옛 漢詩에, ‘조가화무태수취(鳥歌花舞太守醉)-새는 노래하고 꽃(아마 기녀를 두고하는 말이렸다)이 춤추니 태수가 취했도다’ 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봐도 그렇다. 물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에 놀라서 새들이 모두 도망쳐 날아가 버렸는지 유달리 이 계곡엔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조무락’은 순수 우리말 동사 ‘조몰락거리다’의 어근 ‘조몰락’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조몰락거리다’를 흔히 ‘조무락거리다’ 혹은 ‘조물락거리다’ 라로 잘 못 쓰는 경우가 허다하니, 이 잘 못 쓴 ‘조무락’의 소리를 차음하여 한문으로 만들어 쓴 것임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조몰락거리다’는 동사로 ‘작은 동작으로 물건 따위를 자꾸 주무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그 아이는 장난감을 조몰락거리며 놀고 있었다.’ 혹은 ‘찰흙을 조몰락거리더니 강아지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쓸 수가 있다. 그래서 이참에 내가 이 후기를 통해서 ‘조몰락골’ 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하나 만들어 둬야겠다.
옛날 어느 스님이 바랑을 메고 만행(卍行)에 나섰다. 가평 천을 따라 이 청정계곡에 이르니 어떤 아낙네가 바가지에 다래를 반쯤 담아 물속에서 조몰락거리다 바구니에 담아 넣곤 했다. 저만치 더 올라가니 덩치가 산 도둑만한 한 사내 녀석이 맨몸을 물속에 담근 채 몸을 앞으로 숙이고 뭔가를 조몰락거리며 히죽 히죽 웃고 있었다. 한 고개 넘어 가니 자그마한 몸매의 계집애 하나가 머리를 풀어 물속에 담그고 조몰락거리고 있었다. 그 위쪽 바위틈 외딴 작은 물탕 속에서는 중늙은이 같은 내외가 멱을 감고 있었는데, 둘이서 뭔가를 서로 조몰락거리며 희희낙락이었다. 스님이 생각키를 이 깊은 계곡에는 모두가 물속에 들어서기만 하면 조몰락거리기만 하는 구나 여기고 있다가 후일 그 동료 스님들에게 이 계곡을 일러 ‘조몰락골’ 이라 알렸다고 하여 '조몰락골'에서 ‘조무락골’로 이름 지어져 전하게 되었단다. 그래도 어쩌나? ‘조무락계곡’으로 알려져 있으면 그만이지. 새가 울지 않고 노래를 부르진 않아도 그저 춤추고 즐거워한다니까.....
네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수풀이 우거진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복호동폭포’를 얼마 앞두고 갑장 송선생이 외딴 바위틈 속에 아담하게 생긴 작은 소(沼)하나를 발견했다. 그 물웅덩이 안으로 물줄기 세 개가 힘차게 쏟아져 내리고 있어 작은 폭포수와도 같았다. 송선생은 혼자서 소로를 벗어나 이미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얼른 눈치를 채고 내가 심선생더러 패랭이와 함께 먼저 내려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 역시 송선생쪽으로 갔다. 모자도 벗고, 배낭도 내리고 천천히 물속에 몸을 담갔다. 물이 어름처럼 차가웠다. 송선생은 땀이 완전히 식어버린 것을 아쉬워했다. 그래도 땀을 잔뜩 흘린 채 차거운 물속에 첨벙 뛰어 드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는 말을 그 땐 전하지 못했다. 도둑이 제발 저리 듯, 송선생의 땀이 메말라 버린 것이 내 탓이다 싶은 생각이 먼저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작년 언젠가 홍천 ‘공작산’ 산행 시에 즐겼던 냉탕 이후 처음 누리는 호사였다. 멱도 감고 머리도 감고 옷도 갈아입었다. 그토록 무거웠던 발걸음이 가뿐해졌다.
그래도 튼튼한 양다리 덕분에 내리막길은 남 못지않게 잘 걸어 내린다. 멀리서나마 ‘쌍용폭포’와 ‘복호동폭포’ 겻 눈질 해 보고 시간에 맞추어 내려오니 오른편에 개울가에 자리 잡은 뒤풀이 마당에서 일행들이 여유롭게 쉬고 있었다. 시원한 막걸리 한 컵에다 수박 몇 조각으로 컬컬한 목을 달래고 ‘석룡산’ 산행을 마무리 했다. 나에겐 가쁜 호흡으로 힘이 좀 부치긴 했으나, 산행 내내 ‘사창리전투’에서 산화한 국군 보병 6사단 용사들을 추모했고, 잘 보존된 석룡산의 깊은 숲과 맑은 계곡을 즐겼으며, 딱 맞아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계곡의 이름이 지어진 유래도 하나 만들어 봤다. 또 참 오랜만에 갑장 송선생과 더불어 차디찬 계수에 몸을 담그고 냉탕, O탕을 즐기며 보낸, 짧은 인생에서 참 의미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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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370회 석룡산 갑니다
여름 피서 석룡산에서 하세요
민속산행에서 직접 담아 온 사진을 올립니다
등산코스
A코스:명지초등학교 - 용수목 - 외딴집 - 갈림길 - 1100봉 - 석룡산 정상 - 1150봉 - 방림고개 -조무락골계곡 - 외딴집 - 용수목
[4~4"30분]
B코스: 명지초등학교 - 용수목 - 외딴집 - 갈림길 -조무락계곡-곡수곡폭포-복호등폭포-역순하산 (2:30~3시간)
*뒷풀이 고추장불고기 기대하셔도 됩니다.
*반바지&수영복 편한신발.간식또는 각자즐기는 주류.비상약품 등.
효산**님
왕언니 2
오뚜기목장님3
백두산님 2 가족석
한암님 2 가족석
장태*님 2 가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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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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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님
빈의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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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 합니다...
처음오시는 쌍용
8월25일 마지막주 석룡산 신청하신 님들 오늘도 고운하루되세요 내일 아침 버스 경유지에서 뵈어요 버스경유해서 굴다리 7시 출발 합니다
대범님
주작박상*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