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성재(楊誠齋 : 양만리(楊萬里))는 비서감(祕書監)에서 시작해 강동 조운부사(江東漕運副使)를 맡았었고, 나이 70도 안 되어 남계(南溪) 가에 물러와 쉬었다. 겨우 비바람을 가릴 수 있는 낡은 집 한 채에 늙은 하인 3 ~ 4인이 있을 뿐이었다. 서영휘(徐靈暉)가 시를 보내기를,
淸得門如水 청백한 가문 물같이 깨끗하고
貧唯帶有金 가난하기는 허리띠의 쇠고리뿐.
했는데, 이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도 총명하고 강건하게 16년 동안 청한(淸閑)한 복을 누렸다.
영종(寧宗) 초에 주 문공(朱文公 : 문공은 주희(朱熹)의 시호(諡號))과 함께 부름을 받았었다. 그때 문공은 나아갔지만 공(公)은 나가지 않았다. 주문공이 공에게 보낸 편지에,
“다시 하늘을 즐기고 천명을 아는 즐거움 때문에 사람들과 걱정을 같이한다는 그 걱정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우유(優遊)와 은둔(隱遁)을 지나치게 고집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나는 그래도 이 세상에다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했으나, 공의 고상한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일찍이 공이 스스로 찬(贊)하기를,
江風索我吟 강바람은 나에게 시를 읊게 하고
山月喚我飮 산의 달은 나에게 술을 마시게 하네.
醉倒落花前 취해서 꽃밭 앞에 쓰러지니
天地爲衾枕 천지가 그대로 이부자리구나.
했고, 또 찬하기를,
淸白不形眼底 청백은 눈에 나타나는 게 아니고
雌黃不出口中 나오는 대로 읊으니 수정이 필요 없네.
只有一罪不赦 단지 용서 못할 당돌한 게 있다면
唐突明月淸風 그지없는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라네.
했다. 《학림옥로(鶴林玉露)〉 閑情錄 148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