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검(劍)과 숫돌 -6 ━━━━━━━━━━━━━━━━━━━━━━━━━━━━━━━━━━━ 그 안은 약제실인 듯 수많은 옥병(玉甁)이 벽장 가득 진열되어 있 었다. 천정에는 어림잡아도 이백 개가 넘을 누런 약재(藥材) 봉지 들이 박쥐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뒤따라 들어서던 환우령은 쾨쾨하게 풍기는 한약재 특유의 냄새를 진하게 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께서 의술을 터득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때 초막노태야는 수많은 약병 중에 하나를 집어들더니 작은 수 저로 반 수저 떠내어 조심스럽게 작은 절구 모양의 백자단로(白瓷 短爐)에 쏟는다. "개구리 눈꼽 반 수저." 중얼거리는 노인의 음성을 듣는 순간 환우령은 자신의 귀를 의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른 병을 집더니 그는 기절초풍할 말을 꺼냈다. "여우 발톱 곱게 빻은 분말 한 수저…… 지렁이 갈비뼈 세 대…… 자라오줌 열 두 방울…… 살모사 쓸개 반쪽……" 초막노태야의 표정은 진지했으나 계속 웅얼거리는 약재의 이름들 은 갈 수록 해괴한 것들이었다. 환우령은 당혹성으로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초막노태야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젓는다. "화타나 편작도 못 만들었던 신비(神秘)의 단약(丹藥)을 만들고 있는 중이니까…… 산만하게 굴지 말거라." 순간, 환우령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끄응……) 초막노태야는 백자단로를 화로(火爐) 위에다 올려 놓고 젓가락으 로 휘휘 젓다가 냄새를 음미했다. "이게 아니야…… 배합이 조금 잘못 됐다." 그는 환우령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 두꺼비 정액 좀 집어다오." "이겁니까?" 환우령이 파란 병을 집어주자 초막노태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 좌측 세 번째 황색병 말이다." "여기 있습니다." "쯧쯧…… 젊은 녀석이 이렇게 동작이 느려서야."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백자단로가 시뻘겋게 달구어지며 배합한 그 해괴한 약재들이 끈적거리며 굳어가고 있었다. 환우령은 그제야 한 가지 깨닫는 바가 있었다. "원숭이가 어디 아픈가요?" "아니다." "그럼 이 단약은 어떤 동물에게 먹일 겁니까?" 순간 초막노태야는 환우령을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다. "너." "그 단약을…… 제가요?" "그렇지. 바로 너의 내상을 치료해 주기 위해서 만드는 신비의 단 약이란다." 환우령은 일순 어이가 없었다. (자라 오줌, 여우 발톱, 지렁이 갈비뼈 같은 것들을 생각나는 대 로 마음대로 뒤섞어 놓고는…… 신비의 단약이라고?) 환우령은 고개를 힘껏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저는 이미 내상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이때 초막노태야는 엄지 손가락 만한 거무튀튀한 단약을 들고 환 우령에게 다가왔다. "이 녀석아, 노부는 네 혈색만 봐도 증세를 알 수 있다니까. 어서 먹어라." 환우령은 문에 막혀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데, 초막노태야는 단약을 그의 코 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어서 입 벌려라. 노부가 특별히 너를 위해서 직접 먹여 줄테니 까." "노태야……" 화를 낼 수도 없고 눈 딱감고 먹자니 속이 메스꺼웠다. 환우령은 이마에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초막노태야는 쭈글쭈글한 안색에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부친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느냐?" 환우령의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이걸 먹어야…… 말씀해 주신다는 뜻입니…… 흡!" 슈앙-! 말을 하는 그 짧은 순간에 초막노태야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단약 을 환우령의 입 속에 밀어넣었다. "이 녀석아, 병이 나아야 복수든 뭐든 할게 아니냐?" 입 안에 가득 번져가는 구린내 비슷한 내음. 환우령이 뱉아낼 기회도 없이 노인의 손이 입을 틀어막고 있는 사 이에 괴이한 단약은 액체로 녹아 스르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 갔다. 그와 동시에 초막노태야의 열 손가락이 육안으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쾌속하게 움직이며 환우령의 가슴과 복부의 삼십 육 혈도 를 찍었다. 바로 그때였다. "웩!" 환우령의 입에서 검은 피가 한 사발이나 토해졌다. "약효가 어떠하냐?" 환우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크게 해보거라." 초막노태야의 말대로 숨을 길게 들이마시는 순간, 환우령의 안색 이 가볍게 굳어졌다. (신기하군.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가슴이 시원하다니……) 초막노태야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이 녀석아, 어른 말씀 잘 따르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게야…… 쯧쯧 미련한 녀석." "……" "노부만 알 수 있는 비밀약재명을 중얼거리며 단약을 제조했더니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고는…… 쯧쯧!" 환우령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길, 이름을 솔직하게 말하면 단약이 잘못 만들어진답니까?" 어느 새 환우령은 어린시절 황보에게 대하듯한 말투를 쓰고 있었 다. 초막노태야는 약재실을 나서며 말했다. "단약(丹藥)의 비법은 함부로 공개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노부가 약재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면 네 녀석은 그것을 기억해 두었다 가 다른 곳에 가서 의원 행세를 할게 아니냐." 환우령은 뒤따라 나서며 속으로 생각했다. (노인네…… 목소리는 마치 놋쇠주걱으로 가마솥을 벅벅 긁는 것 보다 카랑카랑해 가지고는……) 이때다. 모용설이 아담한 찻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초막노태야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노부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설록차(雪綠茶)를 끓여 온 것을 보니 저 녀석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던 게로구나." 모용설은 얼굴을 도화빛으로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기실 조금 전 초막노태야의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고 나간 그녀 는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혜를 짜낸 끝에 설록차를 끓여 자연스럽게 들어온 것이다. 초막노태야는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설아는 그만 나가 있고 네 녀석이 들고 오너라." 모용설이 살포시 미소지으며 찻상을 건네주자 환우령은 그것을 엉 거주춤 받아 들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노인네, 알량한 단약 한 개 만들어주고 이 따위 아녀자나 하는 일을 마구 시키다니…… 그때 제자가 되지 않기를 백 번 잘했다!) 찻상을 내려 놓고 마주 앉자 한쪽 구석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던 원숭이가 쪼르르 달려와 재빨리 찻잔의 뚜껑을 열어 놓는다. 초막노태야는 원숭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이럴 때 보면 녀석이 제법 의젓하지 않은가?" 설록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는 노인은 다시 가느다란 붓을 집어들 어 화폭을 마주한다. 환우령은 이 노인의 정체가 여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 년 전에 뵈었을 때는 백혈태무존과 절친한 친구(親舊) 사이라 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까 서로의 심장에 칼을 겨누는 적(敵)이더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잠시 붓을 놀리더니 그는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호적수(好敵手)란 때로는 좋은 친구 이상으로 소중한 게야." "……?" "마치 숫돌같다고나 할까……" 쉽게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환우령은 묵묵히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숫돌에 갈면 갈 수록 검(劍)은 살이 깎여 나가는 고통을 느낀다. 허나…… 숫돌에 날을 세우지 않은 검은 쇠몽둥이나 다름없다." 차츰 초막노태야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영혼의 메아리처럼 신비하 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백혈태무존과 노부는 서로의 검(劍)을 갈아주는 숫돌처럼 없어서 는 안될 소중한 존재인게야…… 친구(親舊) 이상으로 깊은 의미가 있지." "……" 환우령은 이제야 이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삼 년 전에 자신에게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허허…… 이 녀석아,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평가하다 보면 왕왕 돌 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게야! 그렇다. 진실로 뛰어난 사람은 범인(凡人)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반드시 체구(體軀)가 커야만 거인(巨人)이 아니었다. 초막노태야 의 왜소한 모습은 앉아 있는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산악(山嶽)이 었다. 그 누구도 오를 수 없는 하늘(天) 아래 가장 높은 거봉(巨 峰)인 것이다. 노인은 무심히 입을 연다. "태극무원청에 갔을 때 팔황혈로군을 보았느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초막노태야는 느릿하게 환우령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 팔황혈로군의 총수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다. 네 녀석이 그 들을 맡아다오." 단도직입적인 음성이었다. 허나, 환우령은 담담히 거절했다. "노태야, 저는 무림정의(武林正義)니 중원평화(中原平和)니 하는 따위의 거창한 구호에는 관심없습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황 보를 죽인 흉수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으음……" "저도 이제까지 기다릴 만큼 기다려 왔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 자는 누구입니까?" 뇌전처럼 강렬한 빛을 쏘아내는 환우령의 눈길은 차라리 활활 타 오르는 두 개의 불꽃이었다. 침묵…… 시공이 멈춰버린 듯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에 장막처럼 드 리워지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방문이 열리며 모용설이 황급히 뛰어들었다. "노태야, 들으셨습니까?" 급히 부복하는 그녀의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노태야…… 방금 태극무원청에서 온 연락에 의하면 신수장인 팽 노달(彭老達)이 삼 일 전부터 행방불명 됐다고 합니다." "팽노달이……" 초막노태야의 입에서 나직한 되뇌임이 흐르는 순간, 노기인의 손 에 들려 있던 세필이 뚝 하고 반토막으로 부러져 나갔다. 자고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붓을 생명처럼 아낀다. 헌데, 자신의 손때가 묻은 붓을 무의식 중에 부러뜨리다니…… (저 거인(巨人)이 자제심을 잃을 정도로 뭔가 중대한 사건이 벌어 진 모양이군.) 환우령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초막노태야의 나직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삼 일 전에 없어진 사람을 어째서 이제야 알았느냐?" "그것은…… 신수장인 팽노달이 삼 일 전에 약간의 건량을 준비해 가지고 만통선옹이 기거하고 있는 무저동(無底洞) 제 삼관의 보수 공사를 위해 보조장인도 없이 혼자 지하로 들어갔다 하옵니다." 그녀의 음성은 긴장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헌데, 삼 일이 지난 오늘까지 전혀 소식이 없어서 그가 일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보니…… 기관장치의 보수공사는 손덴 흔적도 없고 신수장인 팽노달이 그 곳에 머물렀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고 합니다." "으음……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 "팽노달은 태극무원청 곳곳에 설치돼 있는 기관장치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의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알고 있다. 신수장인… … 그가 없어졌다는 것은 곧 대정천부가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의 미한다." 모용설이 급히 입을 열었다. "만통선옹께서 천지영매술로 추적해 본 결과 팽노달이 머물고 있 는 현재 위치는 개봉성 근처라고 합니다." 순간, 초막노태야의 눈빛이 칙칙하게 굳어졌다. "그가 이미 개봉성으로 향하고 있다면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이 것은 사전에 어느 세력과 결탁하여 치밀하게 계획된 영원한 잠적 을 의미한다." 단숨에 사건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초막노태야의 혜안(慧眼)은 놀 라울 정도로 치밀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환우령을 직시하며 말했다. "우령아…… 이번 일에는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들어 주겠느냐?" "팽노달이 결탁된 세력이란 백혈군마성을 뜻하는 것이겠군요." "그렇다. 때문에 사태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두 사람의 따가운 눈길이 환우령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백혈군마성이 사전에 치밀히 계획을 세우고 시작된 일이라면 그들 은 전력을 기울여 팽노달을 보호하려 할 것이다. 결코 간단히 끝 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 피(血)와 살(肉)이 타들어가는 듯한 시간이 살같이 흐르는 가운데 환우령의 입술은 도무지 떨어질 줄 몰랐다. "환대협……" 모용설의 음성이 안타깝게 흘렀다. 초막노태야의 뇌전같은 눈빛은 환우령의 얼굴에 못박히듯 고정돼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좋습니다." 환우령은 나직이 대답하며 일어섰다. 신형을 돌려 나가려다가 문 득 환우령은 초막노태야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제가 이 일에 개입하는 것은 무림평화를 위해서도 아니고 황보를 죽인 그 인물이 정체를 알려주는 교환조건 때문만은 더 더욱 아닙 니다." 환우령의 성격이라면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초막노태 야의 입에서 황보의 원흉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환우령의 입술을 비집고 조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오직 한 사람…… 스스로 영원한 폐인이 되는 줄 알면서도 한 명 의 떳떳한 인간으로 대접받고 싶어서 천지영매술을 익혔다는 그 분. 만통선옹의 행복한 생애를 지켜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녀석, 노부의 마음에 쏙 드는 말만 하는구나." 초막노태야는 빙긋이 웃으며 덧붙였다. "우령아…… 노부를 할아버지라고 불러 주겠느냐?" "모용소저를 제 아내로 주시겠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주 보며 빙긋이 웃는 두 사람의 가슴은 돌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신수장인 팽노달,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이 가져 올 결과는 중원 십팔만 리를 혈겁(血劫)이 난무하는 아수라지옥으로 만들 거대한 폭풍(暴風)인 것이다. 환우령은 모용설과 함께 설우신학을 타고 쏜살같이 날았다. 풍운(風雲)에 휩싸인 개봉성으로…… ■ 黑風令 제3권 제25장 血夜 ━━━━━━━━━━━━━━━━━━━━━━━━━━━━━━━━━━━ 개봉성 태화정 별채. 창문마다 외부에서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두터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실내에는 네 명의 인물이 침중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있었 다. 잠비사존, 지옥낭인, 적미천불, 그리고 또 한 사람. 일견키에도 노련한 장인(匠人) 특유의 편집광적인 광기로 두 눈이 번뜩이는 노인이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보시오.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노부가 요구했던 신분 위조 서류와 황금 십만 냥짜리 전표(錢票)를 건네주시오." "……" "그들은 지금쯤 노부가 없어진 것을 알아냈을지 모르오. 아니 이 미 노부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대정천부의 무림인 전원이 동원 됐 을지도……" 신수장인 팽노달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불안감으로 인해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있었다. 허나, 그가 건네준 두터운 책자(冊子) 즉, 태극무원청의 이백 팔 십 개 기관매복이 세밀히 표시되어 있는 설계도를 훑어보던 잠비 사존은 근 오십여 장으로 이루어진 그것들을 모두 머릿속에 암기 하려는 듯 한 장 한 장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한 순간 잠비사존은 그 책자를 지옥낭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틀림없군. 백혈군마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대가 보관하시오." 지옥낭인은 말없이 책자를 품 속에 갈무리하며 무엇인가를 꺼내어 신수장인 팽노달에게 건네준다. "팽노인, 확인해 보시오." 대충 훑어 보더니 신수장인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이것으로써 그대들과 나의 거래는 끝났소." 이제부터 팽노달은 남은 여생을 주지육림 속에 묻혀서 초호환판 생활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급히 밀실의 문이 열리며 월하혈객이 들어섰다. "태상께 아룁니다. 지금 북쪽하늘에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쏜살 같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순간 팽노달의 안색이 밀랍처럼 창백하게 질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것은 태극무원청에서 길들인 설우신학이오." 그의 음성이 다 끝맺어지기도 전이다. 콰과과과쾅! 느닷없이 삼층으로 된 별채의 지붕에서 굉량한 폭음이 이는 것이 아닌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어느새 하나 의 검은 인영이 천정을 종잇장 찢듯이 꿰뚫고 방 안으로 내리 꽂 혔다. ㅆ아앙---- 나타난 그 인영은 바로 환우령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가장 가까이 있는 잠비사존을 향해 쾌속무비하게 살수(殺手)를 펼쳤다. 꽈우우웅…… 태산도 뭉갤 듯한 장경이 밀려갔다. 순간 적미천불이 잠비사존을 대신 가로막으며 금빛 쌍장을 마주 뻗었다. "바라밀천수(派羅密天手)! 탄지지간에 고금제일의 살인술사 지옥낭인의 신형이 빛살보다 빠 르게 움직였다. 파츠츠츠츠…… 찰나간에 허공을 가르는 검광(劍光)! 검신(劍身)이 온통 시뻘건 핏빛을 띠고 있는 송곳처럼 뾰족한 지옥낭인의 혈검(血劍)은 독사 가 개구리를 향해 혀를 뽑듯 무섭도록 빠른 한 가닥 빛줄기가 되 어 환우령의 목젖을 쑤셔갔다. 콰과과쾅! 굉량한 폭음이 진동했다. 헌데, 환우령과 적미천불의 쌍장이 맞부딪친 그 짧은 순간이다. 츄츄츄츄…… 잠비사존의 쇠갈고리 같은 손이 느닷없이 신수장인 팽노달의 목을 사정없이 쳤다. "커억!" 신수장인의 신형이 맥없이 바닥에 나뒹굴음과 동시 적미천불의 신 형은 장력이 맞부딪친 여세를 몰아 그대로 벽을 뚫고 뛰쳐 나갔 다. (위험하다!) 환우령이 머릿털이 쭈뼛해지는 위기를 느끼며 지옥낭인의 혈검을 피해내는 순간, 지옥낭인의 신형은 화살처럼 창문을 뚫고 나갔다. 와장창! 환우령의 동공에 번뜩 스치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잠비사 존이었다. 그가 재차 잠비사존을 공격하려고 파천마불장을 전개하 며 신형을 번개처럼 날려 덮쳐갔을 때였다. 스르르…… 잠비사존의 검은 신형은 이미 한 줌 혈수로 녹아 내리며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콰과쾅---- 환우령의 장력은 애꿎게 맨바닥을 후려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럴 수가…… 당금 무림에 배교의 환둔무영술을 익힌 자가 있었 다니?) 설명은 길었으나 그 모든 상황이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환우령의 안색이 무겁게 굳어지고 있었다. "실로 대단한 인물들이다." 무도천제의 무공을 터득하고 있는 자신이 삼 인 중에 어느 한 사 람에게조차도 상처조차 못입힐 정도였으니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 도인지 짐작이 갔다. 그러다가 문득 환우령의 뇌리를 섬전처럼 스치는 강한 충격이 있 었다. (지옥낭인…… 그렇다! 핏빛 혈검으로 나를 공격하던 백포 중년인 은 바로 황보를 잔인하게 고문한 지옥낭인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간 환우령의 눈동자가 얼음보다 한냉(寒 冷)하게 식어감과 동시 그의 신형은 지옥낭인이 피신한 유리창을 통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피잉----- 환우령이 밖으로 내려서는 순간이다. 근 백 명에 달하는 혈포인(血布人)들이 그를 에워싸며 소리없이 조여들었다. (구십 구 인, 이들이 바로 피(血)의 밤(夜)을 지배한다는 적야살 인벌의 초특급 살수(殺手)들이로군!) 선제 공격을 하지 않는 까닭은 단순히 지옥낭인을 비롯한 삼 인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때까지 환우령의 추적을 지연시키려는 속셈 같았다. 바로 그때, 혈포인들의 후미쪽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크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사방에는 이미 짙은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으나, 환우령 은 혈포인들의 배후에서 무차별 살수(殺手)를 벌이는 두 사람의 낯익은 얼굴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태극무원청의 훈련감찰인 무정마객 도위강과 환우령의 친구이며 집비령관을 맡고 있는 철혈신권(鐵血神拳) 전막성이었다. 뒤이어 모용설의 섬려한 신형이 환우령의 곁으로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섰다. "신수장인은 어디 있죠?"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그들의 손에 죽었소." 그녀가 재빨리 방 안을 돌아보니 신수장인 팽노달의 시신이 한 쪽 구석에 나뒹구는 실내는 깨진 유리창 반 쯤 허물어진 우측 벽 등,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모용설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들은 과연 신수장인으로부터 태극무원청의 기관매복 배치도를 건네 받았을까요?" "입을 막기 위해 그 촉박한 상황에서도 신수장인을 죽이고 황급히 도주한 것으로 보아 목적을 이룬 것이 틀림없소." 뒤이어 환우령은 그녀를 돌아보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어느 방향으로 도주했소?"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어요." 순간 환우령의 눈빛이 무겁게 침잠되었다. "일이 점점 어렵게 되는군." "……" "만약 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면 세 인물을 동시에 추적할 수 없 을 뿐 아니라, 신수장인이 그들에게 넘겨준 설계도 책자를 어느 인물이 가지고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지 않소." 모용설은 자신있게 말했다. "그들은 반드시 삼 인이 동행할 수밖에 없어요." "……?" "태극무원청에 비치해둔 중원전도에서 보셨다시피 현재 중원무림 은 양자강(揚子江)을 중심으로 해서 둘로 나누어져 있어요. 본시 무공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인적이 없는 조용한 수양장소가 필요했 기 때문에 역사가 깊은 정도문파(正道門派)들은 대체로 산(山)이 많은 중원의 북쪽 지방에 뿌리를 내렸고……" 그녀는 두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 이후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마도인(魔道人)들은 막강 한 세력을 구축할 때까지 정파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 남 쪽 지방에 뿌리를 내리게 됐죠." "……"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구분은 없었는데 백혈군마성이 양자 강 이남 지방을 거의 장악하면서부터 확실히 구분되어 지금은 마 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진 것처럼 불문율이 되었어요." 환우령의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 "그렇다면 양자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최대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 비밀 책자를 누가 지니고 있든 삼 인은 함께 행동할 수 밖에 없겠구려." 두 사람이 빠르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무정마객의 살기충 천한 묵도(墨刀)는 허공을 빛살처럼 가르며 진홍색 선혈을 뿌렸 다. "컥!" 또한, 으그적! 거리며 뼈마디 으스러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전막성의 무지막지한 권풍(拳風)에 한 혈의인이 비명도 못 지른 채 즉사했다. 강철침이 박힌 쇠장갑을 끼고 패황철권(覇皇鐵拳)을 구사하는 전 막성의 모습은 그야말로 성난 흑룡(黑龍)처럼 위맹했다. 허나, 구십 구 인의 혈포인(血布人)들은 결코 맥없이 당하는 허수 아비가 아니었다. 피(血)의 밤을 지배해온 적야살인벌의 살수(殺手)들…… 밥 먹듯이 살인(殺人)을 해 온 그들의 몸놀림은 그야말로 전광석 화(電光石火)였다. 그때 돌연 허공에서 느닷없이 열 개의 그림자가 섬전(閃電)처럼 내리 꽂히며 환우령의 발아래 부복하는 것이 아닌가? "속하들 십대봉공이 주군(主君)을 뵙습니다." 소림사를 떠날 때 개봉성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던 그들은 비명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홀연히 신형을 나타냈다가 환우령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익----" 혈포인들을 지휘하던 사검마영 한백의 입에서 길다란 휘파람소리 가 흘렀다. 그것이 신호였을까? 혈포인들은 일제히 신형을 날려 썰물 빠지듯 어둠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환우령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십대봉공, 저들을 제거하시오." "존명." 십대봉공의 신형이 일제히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이어 폐부를 갈라내는 듯한 비명성이 밤하늘을 비단폭 찢듯이 찢 었다. "아아아악----!" 어둠의 저편에서 첫 번째 비명이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수십 줄기 의 단말마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들이 제아무리 피의 밤을 지배하는 초특급 살수들이라고는 하 나, 이미 백 년 전에 무도천제의 제자로 선택된 십대봉공들의 신 출귀몰한 신공(神功)을 피해낼 수는 없었다. 환우령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저, 우리는 그들을 추적해야지 않겠소?" 말과 함께 환우령과 모용설은 신형을 뽑아올려 머리 위를 선회하 고 있는 설우신학의 등 위로 올라앉았다. "주위가 너무 어두워서 그들의 종적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겠군." 모용설이 환우령의 등 뒤에서 나직이 대답했다. "개봉성을 빠져나가기 전에 그들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어요. 개 봉성의 주위는 이미 일만 명의 개방제자( 弟子)들이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있으니까요." 환우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개방( )의 총타가 바로 이 개봉성에 있었지." 설우신학을 쫓듯 두 개의 그림자가 어둠을 갈랐다. 무정마객과 전막성은 줄지어 늘어진 지붕과 지붕 사이를 야조처럼 뛰어넘으며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뒤로는 어느새 혈포인들을 깨끗이 제거한 십대봉공이 따라왔다. 거의 동시다. 펑! 퍼펑----!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터지는 신호탄들이 있었다. 헌데, 신호탄은 각기 세 방향에서 거의 동시에 터지고 있지 않은 가? 모용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전혀 예상 밖인데요. 저들은 우리의 추적을 혼란시키기 위해 각 기 다른 방향으로 행로를 잡은 것 같아요." 환우령의 눈빛이 무겁게 침잠되었다. (지옥낭인과 적미천불, 그리고 배교의 환둔무영술을 터득한 그 흑 색복면인…… 세 사람 중에 어떤 인물이 그 비밀책자를 가지고 있 는 것일까?) 그러나 세 사람의 품을 일일이 확인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개봉성 외곽지대 세 곳에서 화려한 불꽃을 터뜨리는 신호탄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환우령 일행도 세 방향으로 갈라졌다. 십대봉공은 서쪽 신호탄을 향해 신형을 날렸고, 무정마객과 전막 성은 동쪽으로 갈라졌다. 그들이 쏜살같이 방향을 잡고 떠나자 환우령이 모용설에게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남쪽 신호탄을 향해 가봅시다." 설우신학이 하늘을 가르는 속도는 유성(流星)보다 빨랐다.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환우령의 전신혈관 속에 흐르는 피가 뜨겁 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지옥낭인, 본인이 가는 방향에 그대가 있기를 바란다!) 이 순간 환우령은 극심한 고문을 당해 참혹한 몰골로 죽어가던 황 보의 모습이 떠올라 전신에 으시시한 오한이 스쳤다. 뭉턱 뜯겨나간 앞가슴…… 불에 달군 인두로 지졌는지 검게 타서 쪼글쪼글하게 오그라든 양 허벅지와 겨드랑이…… 눈동자가 있던 자리는 도굴 당한 무덤처럼 휑하니 뚫려 있었고본 래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변한 황보의 모습 은 전신에 멀쩡한 곳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모습이다. ■ 黑風令 제3권 제25장 血夜 -2 ━━━━━━━━━━━━━━━━━━━━━━━━━━━━━━━━━━━ 콰르르르릉…… "아아아악!" 황금가사를 걸친 승려의 쌍장(雙掌)이 뿌려질 때마다 그를 에워싸 고 있는 개방( ) 제자들이 한꺼번에 십여 명씩 피화살을 뿜으 며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꾀죄죄한 몰골에 타구봉을 들고 있는 걸개(乞 )들의 얼굴 은 비장한 결의로 철벽처럼 굳힌 채 추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이 자리를 사수(死守)해야 한다." 만약 그들의 인의장벽(人之障壁)을 쌓고 있는 지지선이 뚫리면 적 미천불의 모습은 그들을 빠져나간 고기(魚)처럼 두 번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허나, 늑대는 난폭하다. 궁지에 몰린 늑대는 더욱 난폭하게 변한 다. 죽음이라는 절박함 속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최후의 한 줌 기력까 지 끌어 올려 사력을 다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수 배나 흉폭해지는 것이다. "왝!" 머리털이 통째로 뽑혀져 나가는 듯한 비명소리와 혼백없는 시신들 은 계속 늘어만 갔다. 적미천불! 신비의 사찰 합밀사원 원주의 직전제자이며, 신(神)의 능력을 지 니고 태어났다는 서장무림 최강의 무도자(無道者)가 아니던가. 개방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막아보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무리한 결 정이었다. 헌데, 어느 순간이었을까? "적미천불, 오랜 만이군." 한소리 중후한 음성과 함께 까마득한 암천(暗天)에서 한 인영이 백색장삼 자락을 표표히 휘날리며 적미천불의 맞은편으로 내려서 고 있었다. 전신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무상(無常)의 위엄, 태산을 발 아 래 깔고 정상에 우뚝 서서 온 천하가 뒤흔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 게 포효를 터뜨리는 백호(白虎)처럼 절대무쌍한 영웅(英雄)의 기 질을 짙게 풍기는 사나이는 환우령이었다. 홀연히 나타난 그를 보는 순간 적미천불은 두 손을 가볍게 합장하 며 돌처럼 무심한 음성을 흘렸다. "시주, 몰라보게 변모하셨구려." 비록 삼 년 전에 잠시 만난 사이였지만 적미천불은 분명히 기억하 고 있었다. 신비한 서기(瑞氣)가 후광(後光)처럼 감도는 환우령의 모습은너무 나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 보면 쉽게 잊 을 수 없는 것이다. 파르스름하게 삭발한 머리, 백옥으로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희디 흰 피부와 단 한 군데도 흠잡을 데 없는 준미수려(俊美秀麗)한 이 목구비의 적미천불은 눈썹이 석양빛보다 붉은 적색(赤色)이었다. "시주와 본승은 끝내 친구(親舊)가 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구려." 이 순간 환우령의 안색은 서리 내린 화강암(花崗岩)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적미! 그대는 알아야 한다." "……" "힘없고 나약한 선민(善民)을 괴롭히는 자(者)…… 자신의 야욕 (野慾)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행복을 짓밟고 올라 서려는 자(者) …… 야망(野望)이라는 헛된 망상(妄想)을 꿈꾸며 무자비한 혈겁 (血劫)을 자행하는 자…… 이기적이고 편협한 독선자(獨善者)…… 이런 자들은 모두 본 천세야황의 적(敵)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을……" 어둠을 가르는 묵직한 음성을 들으며 적미천불은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옴을 느끼고 있었다. 생애 최대의 강적(强敵)을 만났을 때의 격동이라고 할까…… 어떤 움직임이나 사소한 동작까지도 모두 다 빈틈없는 무도(武道) 에 기본을 두고 호흡마저 대기의 흐름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환우 령의 신위를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 서장 최고의 무도자인 적미천 불의 전신혈관 속에는 강한 승부욕이 꿈틀대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사사로운 승부욕에 집착할 때가 아니다. 내 임무는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백혈군마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적미천불은 합장한 자세 그대로 서서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파라라라락! 바람도 없는데 그의 회색 장삼이 찢어질 듯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적미천불의 쌍수가 순식간에 눈부신 황금(黃金) 빛으로 변하는 것 이 아닌가? 환우령의 입술이 무겁게 떨어졌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익히기가 불가능하다는 서장 최고의 신비무학인 천불미륵장(天佛彌勒掌)을 두 번째 견식하게 되는군." 삼 년 전, 환우령에게 처음으로 패배(敗北)의 쓰라림을 안겨 주었 던 그 천불미륵장인 것이다. 헌데, 어찌된 생각인지 환우령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오. 내게 패배를 가르쳐 준 그대가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은 보고싶지 않으니까." 적미천불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시주, 천불미륵장은 패배를 모르는 무적신공(無敵神功)이오." 호기로운 음성과 함께 황금빛으로 변한 적미천불의 쌍수가 느릿하 게 허공을 가르며 기이한 호선을 그렸다. 츠스스스스…… 황금수는 벼락같이 환우령을 향해 뿌려졌다. 버언쩍! 눈동자가 파열될 듯 가공스럽게 폭사되는 새하얀 금광(金光)은 너 무나도 한냉(寒冷)한 죽음의 강기( 氣)였다. 적미천불의 장공(掌功)이 막 환우령의 신형을 맹타하려는 순간힘 겹게 바위를 굴리듯 환우령의 쌍수가 느릿하게 내뻗어지며 천불미 륵장을 토해냈다. 콰르르르르---- 콰쾅! 귀청이 찢어질 듯 굉량한 폭음에 이어 거대한 장력이 허공에서 맞 부딪치며 천 근 바위도 먼지처럼 부셔버릴 듯 가공할 회오리가 폭 풍처럼 사방을 휩쓸었다. 이때 주위를 에워싼 채 귀추를 주목하고 있던 수천 명의 개방제자 들은 그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분분히 신형을 날려 피해야 했다. "으음…… 이토록 무섭게 변했을 줄은……" 적미천불의 묵직한 음성이 흐른 후에야 군웅들은 모든 상황을 일 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다. 발자국! 적미천불의 앞에는 일곱 개의 발자국이 깊숙이 찍혀 있고 내상을 입은 듯 적미천불의 입술이 파리하게 죽어 있었다. 환우령은 여전히 처음 그 자리에 어둠을 밟고 우뚝 서 있다. "자만은 패배의 첩경이지." "그럴까……?" 적미천불의 입가에 차갑게 스치는 미소는 피를 본 악마가 짓는 웃 음처럼 새하얀 죽음(死)의 미소였다. 뒤이어 적미천불은 품 안에서 섬뜩한 혈광(血光)이 은은히 뿜어지 는 붉은 색깔의 백팔염주를 꺼내들었다. "시주, 이것은 합밀사원 최고의 기보(奇寶)인 백팔마안신주(百八 魔眼神珠)이오. 허나, 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약점 임과 동시에 상대는 절대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무서운 강점(强 点)을 지닌 마병(魔兵)이라오." 적미천불의 두 손에 들려 있는 붉은 색깔의 백팔염주, 이름하여 백팔마안신주(百八魔眼神珠)! 뭔가 섬뜩한 죽음의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돌연 적미천불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펴는 찰나, 그의 신형은 까마득한 허공 높이 일직선으로 솟구쳐 올랐다. 슈우욱! (심상치 않다!)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환우령은 허리에 차고 있던 천예백운검(天 藝白雲劍)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스르르릉…… 용의 울부짖음같은 기음(奇音)을 토해내며 창백한 검신(劍身)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천예백운검에서 발출되는 싸늘한 예기(銳 氣)와 눈부신 백광(白光)이 뿜어져 암천(暗天)을 수직으로 꿰뚫는 뇌전처럼 빛나고 있었다. 대륙제일의 병기(兵器)!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검극무허결(劍極無虛訣)만 터득할 수 있다면 하늘(天)조차 벨 수 있다는 전설의 신검(神劍)이 아닌가! 허나, 환우령은 아직 천예백운검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은 삼백 년 전 검성(劍聖)이라고 불리웠던 검(劍)의 달인(達 人) 신주검존(神州劍尊)의 태청생사결(太靑生死訣)을 익히고 있었 다. 돌연 적미천불의 입에서 한 줄기 웅휘한 폭갈이 터져 천공을 뒤흔 들며 길게 메아리쳤다. "팔황만천(八荒萬天) 유성우(流星雨)----!" 콰아아아아…… 핏빛 폭우(暴雨)가 쏟아져 내리는가? 암천에 무수히 박혀 있던 수많은 별(星)들이 찰나간에 유성(流星) 으로 변하여 일제히 환우령을 향해 낙하하는가. 백팔마안신주! 적미천불의 손에서 발출된 백 팔 개의 붉은 염주알은 허공에서 서 로 부딪쳐 하나하나가 수십 조각으로 깨지며 찬란한 유성의 비 (雨)가 되어 환우령의 전신을 향해 빛살처럼 쏘아져 내렸다. 실로 인간이 펼쳐낸 무공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가공할 죽음의 절 기(絶技)! "태(太), 청(淸), 생(生), 사(死), 결(訣)----!" 환우령은 천예백운검을 수직으로 세우고 거침없이 솟구쳐 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백광(白光)! 천예백운검에서 얼음보다 투명한 백색 검강(劍 )이 눈부시게 폭 사되더니 환우령의 전신이 찬란한 백광으로 뒤덮였다. 슈아아아아앙----! 백색의 빛무리가 암천(暗天)을 향해 거꾸로 치솟으며 쏟아져 내리 는 유성의 비를 마주쳐갔다. 그것은 뇌전(雷電)처럼 찬란한 빛 (光)의 질주였다. 카카캉---- 콰르르르르---- 릉! 천지종말이 온 듯 굉렬한 대폭발음이 터졌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의 신형이 남쪽 하늘을 향해 빛살처럼 쏘아져 날아갔다.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 붙은 것은 환우령이었다. 그 와중에 무엇인가 길쭉한 물체 하나가 붉은 혈화(血花)를 암천 에 점점이 뿌리며 급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툭 떨어져 황토 위에 뒹구는 것은 적미천불의 좌측 팔이었다. 돌연 적미천불의 뒤를 추적하던 환우령의 입에서 웅후한 폭갈이 터졌다. "천지멸황세(天地滅荒勢)----!" 버---- 언쩍! 한 자 두께의 철판도 단숨에 갈가리 찢어버리는 두 개의 흑자색륜 탈명회륜쌍환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 암천(暗天)을 치달리는 섬전 (閃電)처럼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쐐애애애액! 대기를 가르는 섬뜩한 파공음에 놀라 적미천불은 야조처럼 긴 포 물선을 그리며 신형을 날리다가 흠칫 돌아보니 어느 새 등판을 쪼 개오는 흑자색 륜(輪)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늦었다!)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도 적미천불은 비룡번신(飛龍飜身)의 수 법으로 신형을 뒤틀며 하나 뿐인 오른 팔로 전력을 다해 황금빛 장력을 쏟아냈다. 카가가가가캉----! 장력과 병기가 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쇳조각 부서지는 듯 역겨운 마찰음이 울려퍼지는 순간 흑자색 륜에서 괴이한 변화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파팡---- 처음에는 분명 하나였던 것이 적미천불이 장력과 맞부딪치는 순 간, 두 개로 나누어지며 하나는 머리를 향하고 또 하나는 허벅지 를 향해 사선을 그리며 짓쳐들었다. 슈아아앙! 적미천불은 등줄기에 흥건히 식은 땀이 흘렀으나 찰나간에 신형을 항아리처럼 웅크리며 빛살처럼 회전해 오는 륜 하나를 머리 위로 스쳐 보내고 또 하나의 륜에 한 발을 사뿐히 얹으며 올라탔다. 과연 서장무림의 최강자답게 신속하고 절묘한 대응수였다. 헌데, 적미천불이 숨돌릴 사이도 없이 느닷없이 뒷덜미로 살기가 엄습해 들어왔다. (이것은……?) 이를 감지하고 시선을 돌리는 순간 머리 위를 스쳐지나간 흑자색 륜이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그를 향해 되돌아 오고 있지 않 은가? 번뜩 스쳐오는 그것을 발견했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이미 악마의 이빨처럼 섬뜩한 륜의 톱니가 그의 복부를 스치고 있었다. "커---- 억!" 적미천불이 쥐어짜는 듯한 비명을 토해내며 두 눈을 부릅뜨는 순 간 믿을 수 없게도 비정하리 만큼 차가운 흑자색 륜이 그의 복부 를 관통한 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중심을 잃고 기울어지는 육신. "천세야황…… 그대는 진정…… 강하다." 떠듬거리며 흘러나오는 미약한 음성과 함께 서역무림 최강자로 군 림하던 적미천불의 신형은 화살 맞은 독수리처럼 곤두박질쳤다. 죽은 것이다. "……" 이윽고 탈명회륜쌍환을 회수하고 유연하게 땅으로 내려서는 환우 령의 곁으로 모용설이 다가서며 급히 입을 열었다. "적미천불의 품 속을 샅샅이 뒤졌지만 신수장인이 넘겨 줬으리라 고 생각되는 비밀 책자는 없었어요." "그렇다면 지옥낭인이나 흑포괴인…… 둘 중에 한 사람이 가지고 있겠군." 모용설은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된 모습이었다. "어서 서둘러야 해요. 그들이 이미 개봉성시를 빠져 나갔다면 우 리는 바닷물에 빠진 모래 한 알 찾는 것보다 어려운 추격전(追擊 戰)을 벌여야만 해요." 두 사람이 설우신학을 타고 떠난 후까지도 개방의 제자들은 환우 령이 사라진 어둠 저편을 바라보며 턱뼈가 빠진 듯 벌린 입을 다 물 줄 몰랐다. "저 인물이 대체 누구이기에 그토록 엄청난 신위를 뿌린단 말인가 ……?"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전설로만 전해지는 절대무신(絶代武神)을 보았다……" |
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독!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즐감하고 갑니다.
다녀갑니다
과연 비밀 책자를 회수 할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