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동기님, 문학도시(부산광역시 문인협회) 7월 신인상 수상을 전합니다. 글 길을 이끌어준 친구들
고맙습니다.
어머니
생신/남 정 우 (문학도시 게재)
가을이 깊어질수록
나는 또 다른 사람으로 되어간다.
여름내 힘찬 땡볕에
영글어진 빨간 사과나무 보다 청아한 가을 하늘을 뒤로한 쓸쓸한 감나무가 더 좋다.
나는 유년
시절부터 뭉쳐 다니는 것 보다 책가방을 매기도 하고 들기도 하면서 많은 세월을 혼자 다녔다.
말 수가 적은 아이가 되고
인생의 고비 고비 마다 불편을 겪는다.
그러나 그 때 뿐
용수철처럼 본래의 나로 돌아온다.
어머니가 한 번
들르라고 전화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줄은
몰랐다,
너희 아버지 돌아가는 그
해 나도 곧 갈 줄 알았지,
아들 칠순이 될 때 까지
살 줄이야,
축하한다.”
이어서 병원비용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지난여름 침대에서 내려오다
다쳐 고생하다 이제 조금 나아지졌다.
“사위한테 미안해서
그런다,
앞으로 병원비는 네가 내는
게 좋겠다.”
병원비는 여동생이 같이
부담하자고 해서 넷 형제가 나누워 냈다.
맏아들에게 짐을 지우는 게
맞나.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도 모르고 덜컹 그렇게 할 수 있나.
대답을 미루고 서둘러 집에
돌아온다.
어머니는 제법
중후한 아파트를 팔고 지금의 실버타운으로 이사 온 게 4년이 채 안 된다.
‘매달 나오는 집세는 다
어디 쓰고 돈이 없다 하시는가.’
백수 생활 십 년이 넘은
아들은 아무리 대충 계산을 해봐도 이건 아니다 싶다.
차량 유지비가 나가는 것도
아니고,
품위 유지를 위한 이런
저런 일도 없다.
다른 주머니를 차고 계신
게 분명하다.
경제력이 있는 어머니
병원비를 백수 아들이 낸다는 것,
나보다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다.
환경과 계산 방법은
다르지만 이십 년을 뒤 따라가는 아들은 또 고민을 한다.
내 친구
L은 편모 밑에서 동생 셋과 어렵게
살았다.
친구 어머니는 비슷한
연세지만 이 년 전에 돌아가셨다.
가난한 집 형제들이 잘
지내는 것을 많이 듣고 본다.
어머니는 맏인 내가 자주
동생들을 불러 밥도 먹고 만나기를 바라신다.
맏이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나무라고 종래는 집 사람 까지 싸잡아서 꾸짖는다.
그런 세월이 싫어서
역정이라도 내면,
‘밖에선 한 마디 말을
못하는 놈이 집에서 큰 소리 낸다.’고 기세 좋게 몰아붙인다.
당신이 낳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속내를 내 보이지 않은 아들의 내면을 송곳으로 찌른다.
아버지는 생전에
당당하셨다.
일찍 돌아가신 백부님
대신에 집안 제사를 가져오고 공부 잘하는 사촌 누나,
여동생이 대학을 다닐 때
틈틈이 도와주셨다.
당시 시골에서 고만
고만하게 사시는 이모부들에게 하대를 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의 존재를 은근히 무시했다.
듣고 보는 게 교육인데
나도 별 수 없이 여자에 대한 편견은 지금도 나를 옭매고 있다.
드러 내놓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 때문에 싸우시는 소리도 문틈으로 들린다.
그런 역학관계로 맏인
나에게 불똥이 튀고 어머니와 사이는 멀어져 의논하는 일도 없어진다.
어머니와 같이 어딜 가는
것도 싫어 사춘기 때부터 가급적 피하고 살았다.
오래전 선배
회사에서 찬밥을 먹고 있을 때이다.
그 해 가을 몇 안 되는
회사 직원과 합천 해인사에서 야유회 행사가 있었다.
예나 다름없이 혼자
팔만대장경 모퉁이를 돌다 그 곳에서 마주 오는 어머니를 만났다.
“여기에 어떻게
오셨소.”
당시 어머니 나이가 오십대
초반쯤 되고 친목계에서 가을 나들이 오신 걸로 보였다.
분가해서 따로 살 때인데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바쁘지도 않으면서 지나친 일이 지금도 나를 아프게 한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다가 해방 전에 한국으로 오셨다.
아들에게 당신의 젊은 날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외할아버지한테 꾸지람 듣는 이야기는 생각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계산 능력이나 암기력이 주종인 공부에는 늘 중간에서 맴돌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일 때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과 같이 우리 집에서 재미없는 공부를 하면서 밥을 먹고 잠도 같이 잤다.
다음에는 다리를 저는 수준
높은 대학생에게 과외를 맡겼다.
보란
듯이,
보기 좋게 일류 중학교에는
미역국 먹고 2차 중학교에 다니면서 실망을
드렸다.
아들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
당신의 노력 부족이라 생각하고 공부하라며 닦달한다.
이렇게 모자간 사이는
멀어져 가기만한다.
철이 없기는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내일 모레면
어머니 생신이다.
서울에 사는 큰 여동생과
제부가 오겠다고 문자가 왔다.
전에는 일터에 매여 오는
일이 없었는데 작년부터 온다.
나보다 한 살 많지만 참
반듯하다.
어머니에게 명절 때마다
과일 상자를 보내고 인사를 잊지 않는다.
참석하는 사람은 부산에
같이 살고 있는 둘째 동생과 막내 여동생 내외가 전부이다.
횟집에서 밥도 먹고 술을
마신다.
사위 둘 다 정도 많고
조카들을 잘 키워낸 남자들이다.
술 몇 순배 돌고 나면
사위 둘은 정치 이야기에 열중하고 둘째도 끼어든다.
관심이 없는 나는 대화에서
멀어지고 삼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지루하다.
술 못하는 사람이 술자리에
앉아있 듯 좌중불안하다.
아버지 기일이
되면 부산에 사는 제매가 온다.
십 육년 째 빠지지 않고
막내 여동생을 앞세우고 들어선다.
아내가 음복 상을
차리면,
“형님,
포도주가 술 중에
제일입니다.”
가지고 온 포도주 뚜껑을
힘차게 딴다.
치과의사는 의사들 끼리
‘노가다’라고 한다.
어금니 빼려면 손아귀 힘이
좋아야 한다.
대화에 끼지 않은 나를
빼고 사촌 동생까지 합세하여 술판이 이어진다.
생전에 아버지는
명절 때 오는 사위에게 말씀하시는 걸 본 적이 없다.
가끔씩 보는 외숙부는
“정우는 나이가 더니 영판
자형이네.”
아버지 생전에 못 한 말을
내게 한다.
우리에겐 하늘같은
어머니다.
이런 저런 투정을 해도 그
많은 세월을 짊어지고 사신다.
“어머니 정말
미안합니다.
생신을
축하합니다.”
자식들이 티격태격해도 당신
불찰이라 하며 까맣게 타는 마음을 감추신다.
어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