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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로 간주될 수 있는 부분 있습니다 -
영화에 있어서 '믿고 보는 배우'는 세대교체를 거치며 존재해 왔다. 작품을 고르는 눈이 탁월해서 내놓는 출연작마다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받는 배우들을 일컫는다. 90년대 한석규가 그랬고, 2000년대 송강호가 그랬고, 2010년대에는 하정우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이 믿고 보는 배우들은 명감독들과의 호흡에서도 빛을 발하지만, 신인감독과의 호흡에서 예상치 못한 걸출한 작품을 내놓을 때 자신의 인기를 통해 감독까지 주목받게 만드는 축복을 지녔다. 한석규만 해도 그와 작업할 당시 '신인감독'이었다가 이후 한가닥 이상의 존재감을 지니게 된 감독들을 꼽으면 장윤현, 허진호, 이창동 등이 있었고, 송강호의 경우는 김지운 감독이 그렇겠다. 하정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작업 당시 신인이었던 윤종빈, 나홍진 감독과의 작업을 통해 함께 부흥을 맞았더랬다.
그리고 내 예감이 틀리지 않다면 <더 테러 라이브>가 명백하게 그 뒤를 이을 것이다. <더 테러 라이브>는 하정우가 오랜만에 신인감독과 손잡은 영화이면서 잘 안믿기게도 그의 첫 원톱 주연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믿을 수 있는 배우이긴 하지만 하정우의 첫 원톱 주연이라는 점도 새롭고, 한국영화 중에서 폭탄테러를 본격 소재로 다룬 경우도 드물었다는 점에서 또 새롭고, 전화 통화 방식으로 실시간 전개를 보여준다는 형식도 새로웠다. 새로움은 곧 불안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더 테러 라이브>는 불안함 대신 짜릿하고 통쾌한 새로움으로 훌륭히 구현했고, 곧 이 영화는 하정우를 믿고 봤다가 감독의 용감한 활기에 주목하게 되는 좋은 예가 되었다.
아내와 헤어지고, TV 마감뉴스에서도 잘린 후 라디오의 신설 시사프로그램 DJ로 버티고 있는 한때 최고의 앵커 윤영화(하정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 그는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데일리 토픽'이라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정부의 세제개편안에 대한 시민 의견을 전화로 듣던 중, 윤영화는 대화를 이상한 쪽으로 돌리며 프로그램을 혼란케 하는 한 시민과 만난다. 자신을 '50대 건설노동자 박노규'라고 밝힌 그는, 광고가 나가는 사이 윤영화에게 마포대교를 폭파할 거라고 공언한다. 흔한 장난전화로 생각한 윤영화는 '터뜨릴 테면 터뜨려 보라'고 도발하는데, 아니나다를까 생방송 중 마포대교는 정말 폭파되며 두 동강이 난다. 외부 언론들은 이 폭발의 원인과 배후를 아직 모른다. 그러나 윤영화는 알고 있다. 잘만 하면 자신의 커리어를 다시금 정점으로 올릴 수 있는 기회임을 직감한 윤영화는 차대은 보도국장(이경영)과 연락해 바로 TV 생중계로 전환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라디오 스튜디오는 순식간에 TV 뉴스속보 스튜디오로 탈바꿈하고, 윤영화는 마포대교 테러범과의 전화 통화를 단독 생중계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테러범은 윤영화에게 얼토당토 않은 규모의 요구를 하는 가운데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보도국과 경찰 등이 끼어들면서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간다. 윤영화는 과연 이 사건을 멋지게 마무리 짓고 자신의 원래 자리로 금의환향할 수 있을까.
<더 테러 라이브>의 도전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일단 활동반경이다. 초반부 윤영화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장면 정도를 제외하면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라디오 스튜디오를 벗어나지 않는다. 잘못 다루면 몹시 한 시간 반의 러닝타임도 지루해질 수 있는 요소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장소적 제약 주변에 다양한 돌파구를 마련해 놓음으로써 그처럼 우려되는 답답함을 일거에 날려 버린다. 오히려 외부 상황에 대한 정보창구가 쾌적하게 열려있지 않은 상황에서 곳곳을 통해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은, 점점 극적으로 치닫는 사건의 내외적 상황에 대한 긴장감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수시로 윤영화를 쥐락펴락하는 조정실의 흐름과 타 채널 상황을 보여주는 모니터들, 실시간으로 사건과 주변 상황을 감질나게 중계하는 프롬프터, 그리고 바로 창문 너머로 비치는 일촉즉발의 마포대교와 여의도 상황과 휴대전화 및 내선전화까지. 말이 환경의 제약이지 영화는 움직일 수 없는 윤영화 주변에 영상, 음성, 텍스트, 실사 등 거의 모든 형태의 매체들을 영리하게 배치해 놓으며 '전방위 생중계'에 성공한다.
도전적인 이 영화에서 답답함을 거둬내고 통쾌함으로 채우는 건 배우들의 몫 역시 지대하다. 이 영화로 처음 단독 주연, 그것도 출연 비중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단독 주연을 맡은 하정우는 새삼 '왜 이 걸출한 배우가 여태 단독주연을 하지 못했나'하는 생각이 백번 들게 한다. (물론 한국영화에서 단독주연 체제를 보기가 쉽지 않은 건 사실이다.) <의뢰인>과 더불어 그의 출연작 중 보기 드물게 외관상, 사회상으로 가장 번듯한 상태로 등장하는 그는 처음 품격 있는 뉴스 앵커로서의 깔끔한 이미지를 의상과 표정, 행동으로 훌륭히 소화하다 본격적으로 사건에 휘말리면서 점점 극심해지는 멘붕 상태를 흡인력 있게 표출한다. 처음엔 자신의 직업적 입지를 걸고 시작한 일이지만, 점점 자신의 개인적 문제, 사회적 문제, 나아가 국가적 위협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 봉착하면서 그는 가장된 침착함과 끓어오르는 두려움 사이에서 격렬하게 갈등한다. 감정 변화는 확실하지만 극중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과장까지 가지 않지 않는 그의 담백한 연기 덕에, 잠시라도 한눈 팔았다간 사건 국면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숨가쁜 영화에 관객들은 정신 놓을 틈 없이 내내 집중하게 된다. 마치 연극처럼, 영화 속 시간과 실제 상영시간이 일치하는 상황 속에서 짧은 시간동안 희로애락을 역동적으로 넘나드는 그의 능숙하고도 활기 넘치는 연기에 박수가 절로 나온다. 아울러 동지였다가 심기 슬슬 건드리는 적이었다가를 왔다갔다 하며 팽팽한 긴장 조성에 더불어 한몫 하는 보도국장 차대은 역의 이경영, 전문성 있어 보이면서도 속은 알 수 없는 냉철함과 차분함으로 예사롭지 않은 카리스마를 내뿜는 경찰 대테러지원팀장 박정민 역의 전혜진의 똑부러지는 연기도 일품이다. 환경의 제약은 물론 등장하는 배우도 몇 되지 않는 영화 속에서, 한 명 한 명 뛰어난 역량을 과시하는 배우들 덕에 허전함은 느낄 틈이 없다.
100분이 안되는 상영시간동안 영화는 관객들이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윤영화는 전화 연결을 받고, 그 전화로부터 사건은 곧바로 시작된다. 결말 또한 사건이 대단히 초극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으로 암전될 뿐, 후일담 같은 건 없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일정량의 여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시종일관 지속되는 영화의 긴장감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투입된 자본과 설정된 상황의 제약을 상쇄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스튜디오를 벗어나지 않고 주인공 한 명에게만 집중하는 영화가 늘어지기라도 하면, 그 느슨함의 파장은 여느 영화보다 더 크게 다가올 것이었을 테다. 다행히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사건을 터뜨리고, 스튜디오 안과 밖, 전화 안과 밖에서의 끊임없는 국면 전환을 시도한다. 그 쉴새없는 회오리 덕분에 관객은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야 이 이야기가 오직 라디오 스튜디오에서만 펼쳐졌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더 테러 라이브>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이야기를 펼쳤다가 수렴하는 기술도 예사 수준이 아니다. '테러범과의 실시간 전화통화'라는 소재의 힘에만 매달려 앵커와 테러범 간의 전화통화 핑퐁게임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영화는 윤영화를 단순히 '사건 중계 수단'이 아니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지금 이 상황이 천혜의 기회이거나 최후의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인간'으로 충실히 묘사한다. 이 길이 관객으로 하여금 사건에 완벽히 몰입하게 만드는, 중계방송을 지켜보는 수준이 아니라 이 상황을 체험하는 것 같은 현실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짧은 시간동안 윤영화가 처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기술하고 이와 앞으로 닥칠 사건을 절묘하게 엮는다. 중계 시작 전, 광고나 다른 영상이 나가는 그 짧은 시간동안 윤영화의 현재 상황을 둘러싼 모종의 거래나 정부 기관과의 기싸움 같은 요소들이 바람처럼 지나가고, 그 과정에서 윤영화가 처한 상황은 단순한 '실시간 테러 중계' 수준에 머물지 않게 된다. 자신의 모가지와 개인적 앞날과 사회적 지위가 달렸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들이 '사회의 안정'이라는 통칭 '대의'와 충돌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도전은 한눈 팔 틈 없는 사건 전개의 에너지원으로 한국 사회 도처에 깔려 있는 현안들을 거침없이 갈무리 해놓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었기에 이질적일 수 있는 폭탄테러라는 설정은, 테러범이 처음 꺼내드는 명분과 현실적인 배경 설명이 곁들여지며 몰입이 쉬워진다. 기업은 물론 정부 당국까지 거드는 갑을관계의 병폐에서 출발한 사건은, 흐름에 경찰과 방송사 간 이권 다툼까지 끼어들며 차마 한자리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한국 사회의 약점들을 주저없이 까발린다. 그러면서 종국에는 테러를 일으키려는 쪽과 막으려는 쪽 중 어느 쪽에 서야 할지 난감해져, 관객은 영화적 재미를 얻는 것을 넘어 현실을 적확히 관통하는 돌직구, 아니 쇠직구를 얻어맞는 듯 해진다.
많은 시민들의 목숨이 달린 중대 사건을, 방송사들은 시청률 상승으로 인한 수익의 기회로 생각해 최대한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도록 요구한다. 이 시스템에 속한 개인들 또한 자신들의 지위 상승을 위해 일촉즉발의 상황을 두고 비밀스런 거래를 하느라 바쁘다. 심지어는 안정적 진행과 이미지 회복을 빌미로 일정 부분의 인질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곳곳에서 나온다. 도덕성 운운하며 경쟁사의 도덕성을 비열하게 폭로하는 행태 또한 만연한다. 정부 측은 또 어떤지. 사건을 수습하겠다는 건지 더 키우겠다는 건지 눈치따윈 찾을 수 없는 막무가내 도발과 시간끌기를 반복한다. 나라에서는 알고 보면 별거 아닐 것 같은 요구 앞에서도 자신들을 뽑고 밀어 준 국민 앞에서 자존심을 몹시 걱정하는지, '신속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하겠다'는 류의 두루뭉술한 발언만 남발할 뿐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사태를 심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요즘도 언론과 여론에서 많이 언급되어 지는 물타기 전략까지 등장한다. 그들에겐 '국가의 위기'만 중요할 뿐, '국민의 위기'는 중요치 않아 보인다. 이만큼 <더 테러 라이브>가 다루는 현대 한국 사회의 이슈는 다방면, 광범위하다. 물론 다소의 비약도 있겠지만, 이 모든 이슈들에 대해 마냥 팔짱끼고 볼 수 없이 같이 분노하게 된다는 점이 더 서글플 뿐이다.
대범한 시작과 분주하고도 치밀한 전개로 이어지던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서 비장의 무기를 기다리고 있다. 범인의 정체가 드러난 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고, 심지어는 상당히 허무하다고도 생각될 때 쯤. 끝을 맺기 약 5초 전 영화는 한동안 우리가 목격한 가장 대담하고도 통쾌한 엔딩을 터뜨리며 마무리된다. 사실 영화의 내용이 한국의 현재를 노골적으로 반영하다보니 긴장감도 긴장감이지만 분노와 서글픔도 함께 배가되는데, 이 문제의 엔딩은 그렇게 쌓인 감정들을 일거에 날려버리기 충분할 정도로 용감하고 과감하다. 단순히 앞뒤 재지 않고 터뜨린 충격 효과가 아니라, 영화가 엔딩 발생 전 철저히 포석을 깔아놓은 뒤 그 뒤로 던지는 장면이라 영화가 암전될 때 들이닥치는 충격과 쾌감은 더욱 극적으로 와닿는다. 그러나 이 결말은 대충 봐도 명백히 알 수 있을만큼 표현되지는 않고, 조금이나마 눈썰미가 있어야 깨달을 수 있도록 강렬하지만 조심스럽게 표현되었다. 그러니 영화가 끝날 때까지 스크린 곳곳의 모든 부분을 침착히 바라봐 주시길 바란다.
물론 영화가 오직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서만 진행되다보니 외부로부터 전해지는 정보들만으로는 사건의 진행 양상을 완벽히 구성하는 데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충격 효과들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규명하는 데에도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시공간의 제약, 사건의 다면적 조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주어질 수 있는 상상과 추정의 여지라고 생각하고 싶다. 30억 선의 비교적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지다 보니 실은 매우 심각하고 큰 규모의 재난을 표현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던 것도 충분히 용인할 만하다. 중요한 건 <더 테러 라이브>가 그런 제약과 한계를 딛고 오락물로서 보기 드문 만족도를 보장하는 영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질주하는 이야기와 빈틈 없는 형식의 쇠직구는 관객들의 감각에 파편조차 남길 새 없이 깔끔하게 꽂히고, 불편한 진실들을 폭로하다가도 파격적 결말로 그로 인한 찜찜함 조차 일거에 날려 버린다. 비용 대비 효과로는 역대급으로 인정할 만한 <더 테러 라이브>는 숨막히게 조이고, 팽팽하게 당기고, 버라이어티하게 펼쳤다가 깔끔하게 접는 솜씨까지 출중한, 올 여름의 '우수 프로그램'이다. 믿고 보는 하정우라지만, 이쯤 되면 '영화가 하정우빨'이 아니라 '하정우가 영화빨'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 영화는 하정우가 먹방을 펼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물 먹방, 헛개차 먹방 정도가 전부일 뿐. 그런데 이런 것들 조차도 먹음직스럽게 먹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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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돌직구' 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쇠직구는 생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