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땀으로 다시 살아난 낙산사 해송 숲
월간산 2021.08.05
[숲과 사찰] <4> 양양 낙산사
16년 전 폐허의 자리에서 다시 올곧게 커가는 낙산사 해송 숲. 화재 후 1만 2,000그루를 옮겨 심었다.
‘장하던 금전벽우 찬재되어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낙산사를 찾아가는 길에서 가곡 ‘장안사’가 자꾸만 입에서 맴돌았다. 산중에도 흥망이 있다지만 그 희비를 가를 수 있는 게 또 사람의 손길이다. 금강산의 장안사는 비감悲感으로 남았지만 설악산 줄기에서 내려온 낙산사는 오늘도 건재하다.
강원도 양양에서 7번국도를 따라 속초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설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동해 바닷가에 도달해 마지막 숨을 토해내며 낮은 산을 하나 나투었다. 오봉산이다. 낙가산洛迦山 내지는 낙산洛山이라고도 불린다. 낙산은 범어 ‘포탈라카potalaka’를 음사한 보타락가補陀洛伽의 줄인 말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이다. 작고 낮아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산이지만 우리나라 대표 관음도량 낙산사와 의상대, 홍련암을 품고 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과 7층석탑. 원통보전은 화재 후 다시 복원했다.
오봉산이 낙가산이 된 이유
지금으로 치면 강원도지사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관찰사 정철은 동해안의 절경을 둘러보고 ‘관동별곡’을 썼다. 그는 관동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경치 여덟 군데를 들어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양양 낙산사,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을 꼽았다. 삼일포와 총석정은 북한에 있고, 망양정과 월송정은 현재 경상북도에 편입되어 있다. 대부분 바닷가인 관동팔경을 즐기기 위해 옛 선비들은 수많은 정자와 누각을 지었지만,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오봉산 낙산사洛山寺는 관동팔경 중 유일한 사찰이다.
낙산사는 신라 화엄의 종조인 의상 대사가 671년 (문무왕 11년)에 창건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세음보살의 대비진신이 이곳 바닷가 굴속에 있기 때문에 낙산이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후, 대나무가 쌍으로 돋아나는 곳에 불전을 지으라는 말을 듣고 법당을 지은 것이 지금의 낙산사라고 한다. 그 바닷가 굴이 홍련암이다.
이후 858년(헌안왕 2년) 범일대사가 중건한 이후 몇 차례 소실과 중건을 되풀이하다가 6·25전쟁으로 소실된 절을 1953년에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낙산사의 관문은 홍예문이다. 세조가 1466년 낙산사에 갔을 때 세운 무지개형의 석문으로 26개의 화강석으로 쌓은 무지개는 당시 강원도의 고을 수라고 한다. 원래 이 돌들은 강현면 정암리 해변에서 채취해 쌓은 것이라고 한다.
원통보전 내에 있는 건칠관음보살좌상. 화마가 낙산사를 덮치기 직전 스님들이 안전한 곳으로 옮겨서 무사했다. 보물 1362호.
잿더미 된 소나무 숲을 다시 살리다
2005년 4월 식목일, 고성과 양양을 휩쓴 대화재로 관음도량 낙산사는 천 년의 자취들이 잿더미로 변하는 안타까운 재난을 겪었다. 경내 목조 건물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화마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500년 역사의 낙산사 동종을 녹여버릴 정도였다. 불은 불과 하루 하고도 8시간 동안 973헥타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대화재로 낙산사 동종 등 귀중한 문화재 5점과 전각 등 17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낙산사의 얼굴 홍예문도 피해를 입었고 해송 숲도 무사하지 못했다. 불이 나기 전, 낙산사는 소나무의 바다였다. 청량한 기운으로 산사에 든 속인들의 찌든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던 잘 생긴 해송들이 허망하게 재로 변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갔다. 폐허의 숲에 1만 2000여 그루의 소나무를 새로 심어 16년이 지난 지금 예전의 위용은 아니지만 다시금 멋진 자태로 빛을 발하고 있다.
해파랑길 양양속초 구간 ‘헤밍웨이길’에 있는 그네. 알려지지 않은 일출 명소.
해파랑길 양양속초 구간은 ‘인문학 길’
750km에 이르는 장거리 걷기 길인 해파랑길 양양속초 구간은 낙산사를 지난다. 푸른 동해바다를 온몸으로 느껴보려면 ‘해파랑길’을 걸어야 한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르는 동해안 해변길,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750km의 장거리 걷기여행길로, 전체 10개 구간, 50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해파랑길은 <삼국유사>와 <관동별곡>, 영화와 드라마 등 역사·문화적으로 다양한 인문학적 스토리를 품고 있는 길이다. 전체 길의 3분의 2는 해안선과 어촌 마을을 지나지만 나머지 3분의 1은 내륙으로 우회하며 우리 땅의 산과 들과 시골 속살까지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해파랑길은 영남과 강원 지역 10개 구간에 걸쳐 50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해파랑길 양양속초 구간은 수산항에서 출발해 낙산사를 지나 설악해맞이공원에 이르는 총 12.5km 길이다.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이 길에는 유명 호텔과 리조트,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과 낙산사 등의 유적, 서핑 명소 등 여행자들이 좋아할 만한 거의 모든 요소들이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다. 성인 남성의 보통 걸음으로 4시간 30분가량 걸린다. 전체 구간을 모두 걷기 부담스럽다면 이 코스의 백미로 꼽히는, 몽돌소리길 전망대에서 강현면사무소 앞까지 2.3km 바닷길을 걸어볼 것을 권한다.
일명 ‘헤밍웨이길’로도 불리는 이 길은 짙고 푸른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하조대, 최북단 고성 공현진의 옵바위, 울산 간절곶까지, 동해안에는 일출 명소가 즐비하다. 그런 만큼 호젓하게 일출을 맞기에는 부담스럽다. 그래서 최근 조심스럽게 떠오르고 있는 곳이 ‘헤밍웨이길’. 바다와 가장 가까이 접해 있는 이 길 중간쯤에는 운치 있는 전망대도 있고, 곳곳에 소라 모양의 아늑한 벤치가 설치되어 있다. 강현면사무소 건너편 바닷가에 있는 나무 그네도 명당 중의 명당이다. 앞은 그야말로 망망대해. 거침없는 바다에서 빨갛게 솟아오르는 해돋이를 바라보기에 동해안에서 이만 한 곳이 없다.
“홍련암을 지켜주세요” 간절한 기도… 바람 방향이 바뀌었다
화마가 10m 앞까지 쳐들어 온 화급한 상황… 홍련암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2005년 화재 당시 완전히 타버린 홍련암 요사채.
“관세음보살님! 화마로부터 홍련암만은 지켜 주십시오. 홍련암을 의지하는 중생들의 마음을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2005년 낙산사를 습격한 화마는 경내 전각과 보물들을 모조리 태운 후 홍련암까지 집어 삼킬 태세였다. 관음도량 낙산사의 상징 홍련암이 지상에서 사라질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당시 주지 금곡 스님(조계종 총무부장)은 홍련암의 관세음보살상을 밖으로 황급히 모시고 나왔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해풍이 돌연 방향을 바꾸어 불기 시작한 것. 절체절명의 순간에 홍련암은 이렇게 살아남았다. 30여 만 평의 낙산사는 전소됐지만 다섯 평짜리 홍련암은 화마가 비껴간 것이다.
금곡 스님의 간절한 기도
관음도량 낙산사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대신 원통보전이 있다. 원통보전은 불에 탔지만 법당 안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은 불길이 번져가는 속에서도 스님들에 의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무사했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안정적이고 얼굴 표정이 빼어난 이 불상은 고려 후기 양식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각이 타버린 홍예문(위). 아래는 복원 후 모습.
조선시대 원형으로 가람 재배치
천재天災는 낙산사에 큰 상처를 남겼지만 전각의 배치를 더욱 짜임새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낙산사 전각 대부분은 한국전쟁 이후 세워졌다. 재정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 둘 지은 건물이라 조선시대까지 유지했던 원형을 잃었다. 절을 처음부터 다시 짓기 위한 발굴 조사 과정에서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낙산사 유구遺構(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자취)를 발견했다. 그중 낙산사가 가장 번성했던 조선시대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이 났고,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로 복원불사를 시작해 2007년 4월 5일, 화재가 난 지 정확히 2년 만에 완료했다.
또한 궁중사리탑 복원 과정에서 부처 진신사리가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불사리 1과를 담은 유리로 된 사리호, 금제합 등이 출토됐는데, 특히 ‘불사리가 1692년(숙종 18년)에 봉안됐다’는 기록은 탑비에 새겨진 내용과 일치해 자료적 가치를 높여 주었다.
화재 현장의 수많은 관세음보살들
간절하게 원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을 때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에게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을 사람들은 낙산사의 복원 현장에서 보았다. 화마를 무릅쓰고 문화재를 지켜내고 자신들의 절보다 인근 마을 이재민들을 먼저 배려하며 경로잔치를 열어 장학금까지 마련한 스님들, 참배 온 사람들에게 종이컵에 따뜻한 커피를 나눠 주던 이름 모를 자원봉사자들이야말로 관세음보살이 아니었을까.
본 기사는 월간산 8월호에 수록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