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그 녀석이 생각났다. 엘퀴네스.
라피스가 뜬금없이 실실 웃음을 흘리자 한 쪽 벽에 기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트로웰이 고개를 들었다.
"뭐야, 너 미친 거냐? "
라피스는 언제나처럼 차갑게 얼어있는 그의 눈빛에도 위축되지 않은 채 여유롭게 말했다.
"아~ 우리 반에 재미있는 여자애가 와서요~ "
현재 고등학교 3학년인 트로웰은 라피스와 사적으로 꽤 아는 선배로, 여러 모로 학교에서 유명했다. 특히, 얼음장보다 차갑게 느껴지는 그의 표정과 성격은 더더욱.
"아. "
트로웰은 관심없다는 듯 다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걔.. 선배랑 왠지 닮은 것 같던데요. "
"... 나랑? "
트로웰이 다시 고개를 들자 라피스는 재미있다는 듯 계속 실실 웃어대며 '성격 말이예요~ '라고 가볍게 던졌다.
그 때, 체육관의 문이 열리고 이사나와 알리사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트로웰 선배~ 어? 오랜만이야, 카나~~"
"안녕하세요, 선배... "
조용히 앉아있던 붉은 머리카락과 검정색 눈동자를 지닌 '카나'라는 소녀는 성격이 소심한 듯, 조용한 목소리로 카나와 이사나에게 인사하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알리사는 별로 신경쓰지 않으며 체육관 한 쪽에 자리잡았다.
"역시 여기가 시원하긴 하지~ 겨울에 너무 춥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
이들에게 체육관은 아지트와 같았다. 이들을 통틀어 '류엘'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어울리는 기준은 확실치 않았다.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화려한 이목구비 뿐이었다)
류엘의 인원을 열거하자면
3학년에 트로웰, 페르데스, 릴리트, 루시어스가 있었고
2학년에는 라피스, 류칼레시안, 알리사♡이사나 커플이 있었다. 그리고
1학년은 카나♡자드키엘 커플 뿐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라피스? "
알리사의 질문에 라피스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아아, 오늘 전학 온 여자애가 트로웰 선배를 닮았다고 말했었어. 엘퀴네스... 였던가? "
"아, 엘 말하는 거야? 성격이나 분위기가 비슷하긴 하더라~ "
"...엘? 너보고 그렇게 부르랬냐? "
알리사는 엘이 라피스에게 애칭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곧장 눈치채고 짓궃게 웃었다.
"아~~ 엘이 너는 마음에 들지 않았었나 보다~ 나랑 이사나가 알아서 친해지라고 눈치껏 빠져줬더니 친해지긴 커녕 눈엣가시가 된 거 아니야? 어휴, 니가 그럼 그렇지. 어쩜 그렇게 사교성이 없는 거니? "
라피스는 인상을 살풋 찡그렸다.
'저게 은근히 나를 무시하네? '
그는 왠지 자존심히 상해 알리사에게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트로웰이 먼저 말을 시작했기에 일단 입을 다시 다물었다.
"얼마나 닮았는데. "
....트로웰도 은근히 신경쓰인 모양이었다. 그의 귀여운(?)모습에 알리사는 낮게 터진 웃음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정 궁금하시면 언제 한 번 데려올게요~ "
트로웰은 잘 들리지도 않을 크기의 목소리로 '그러던지. '라고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다시 무관심하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엘~~ 밥 같이 먹자~"
"...미안. "
"에에? 왜~? 같이 먹으면 좋잖아~ "
"사람 있는 걸 안 좋아해서. ...그리고 오늘은 입맛이 없어. "
엘은 아까부터 속이 쓰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이 먹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보니 내가 오늘 아침에 떡볶이를 먹었구나. '
떡볶이를 좋아하는 엘을 위해 아버지 엘뤼엔은 종종 떡볶이를 사오고는 했다.평소 아무리 매운 것을 먹어도 속이 나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공복에 먹어서 탈이 난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우리, 체육관 갈래? "
알리사가 트로웰에게 엘을 데려가겠다고 한 지 이틀 후인 지금, 알리사는 엘과 대화하다가 트로웰과의 대화가 떠올라 조금은 뜬금없지만 체육관에 가자는 말을 꺼냈다.
"체육관? "
"응~ 곧 한여름이라 슬슬 더워지잖아~ 체육관은 시원하거든~~ "
알리사는 '우리 학교는 하복 혼용기간이 너무 느리다'며 밉지않게 투덜대고는 엘의 팔을 붙잡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
.
"안녕하세요~ "
알리사의 인사에 트로웰은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는 알리사 옆의 엘은 안중에도 없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엘 또한 체육관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자신이 신경쓸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체육관을 둘러보기만 했다.
"아, 선배. 얘 이름은 엘퀴네스라고 해요. "
알리사가 말하자 트로웰은 그제서야 엘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 예쁜 얼굴이 자신과 같은 표정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변에는 전혀 관심없다는 표정. 엘은 알리사가 자신을 트로웰에게 소개하자 트로웰에게 고개를 살짝 까딱여 인사하고는 다시 유유히 주변을 둘러봤다.
'..진짜 똑같아...'
알리사는 속으로 감탄하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트로웰은 엘의 태도에 살짝 당황스러워짐을 느꼈다. 내가 저랬었나. 남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자신이었지만 저렇게 시큰둥해보일 거라는 자각이 없었던 트로웰이었기에 엘과 자신이 닮았다는 말이 잘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태도를 바꿀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덜컹-
그 때, 체육관의 문을 열고 라피스가 들어왔다. 라피스는 들어오자마자 엘의 얼굴을 보고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엘? "
"엘퀴네스. "
라피스의 등장에 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놈은 왜 멋대로 남의 애칭을 부르고 난리야?! '
엘은 자신의 애칭을 부르는 건 둘째치더라도 자꾸 자신을 쿡쿡 찌르거나 건드리며 재미있어하는 라피스가 너무나도 귀찮았다. 라피스를 밀어내며 엘은 알리사에게 도와달라는 의미를 다분히 담은 눈빛을 알리사에게 보냈다. 하지만 알리사는 어느샌가 들어온 이사나와 즐겁게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팔린지 오래였다.
'진짜 절망이다... 여기서 일 벌이면 아버지가 또 전학시키려 하겠지? '
엘의 아버지 엘뤼엔은 엘의 학교생활이나 주변 환경에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엘을 위해서 몇 번이라도 이사를 할 위인이었고, 실제로도 그래 왔다. 그런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엘이었기에 엘은 이제 전학이 지긋지긋해졌고, 자신이 모르는 다른 지역을 옮겨다니는 것이 넌더리가 났다.
'하지만 이 짜증나는 놈은 정말 떼어내고 싶다... '
..심각하게 딜레마에 빠진 엘이었다.
그렇게 엘이 딜레마에 빠져서 어떻게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트로웰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라피스를 불렀다.
"라피스. "
"네? "
"화분사와. "
"...헐? 왜요 갑자기? "
라피스가 황당해하며 되묻자 트로웰은 예의 그 얼음같은 눈동자를 라피스에게 향하며 특유의 무신경한 말투로 재차 말했다.
"빨리. "
"예이예이, 갑니다- "
라피스는 한참 엘을 괴롭히는 데 맥을 끊은 게 불만스럽다는 듯이 툴툴대며 나갔다. 그런 그와 반대로 엘은 트로웰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저런 찰거머리를 떼어준 천사같은 트로웰에게 경배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알리사는 엘에게 곧 수업 종이 치겠다며 트로웰에게 인사를 하고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교실로 가는 도중, 알리사는 뭔가가 갑자기 생각난 듯 손뼉을 치고는 말했다.
"맞다, 있잖아 엘~ 2주일 후에 트로웰 선배 생일인데 그 날에 체육관에서 간단한 생일파티를 해 드릴 거야~ 그때 너도 오지 않을래? "
"응? 아니, 난... "
"괜찮아 괜찮아~~ 내 친군데 뭘~ 선물 없어도 돼~ "
'..내가 안 괜찮아....'
명색이 생일파티 참석인데 생일선물 하나 없이 딸랑 몸만 가면, 다른 사람들이 신경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는 이상 얼마나 어색하고 민망하겠는가!
"응? 응? 올 거지~??? "
"알았..어... "
'또 져버렸다... 아빠 나 얘 너무 피곤해.... '
엘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사교활동(??)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고,성격에도 맞지 않아 진심으로 죽을 맛인 엘이었다.
***
"생일 축하드려요, 선배~!! "
제일 먼저 알리사가 트로웰에게 선물을 건넸다.그 뒤로 류엘 멤버들이 차례차례 선물을 건네기 시작했는데, 트로웰 본인과 엘 빼고는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 차 있었다.
"키 크세요, 선배- "
라피스는 본인의 말에 만족하며 트로웰에게 우유 및 유제품을 몇 봉지 건넸다.
"...나도 키 크거든? "
"저보단 작잖아요~ "
'..둘이 2~3cm정도밖에 차이 나지도않는데 유치하게... '
엘은 한심하다는 듯 둘, 정확히 라피스를 보다가 트로웰에게 안고 있던 화분을 건네주었다.
"..축하드려요. "
엘의 선물에 트로웰의 얼굴에 의미 모를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
.
.
"흐으아, 점심도 안 먹고 생일파티 준비했더니 힘들어 죽을 것 같아... "
알리사가 흐느적거리며 책상에 엎어졌을 때, 뒷문이 열리고 트로웰이 들어왔다. 옷차림이 약간 흐트러진 것을 보아 뒤늦게 허겁지겁 쫓아온 것이 분명했다.
"...너, 이거 어떻게 안 거야? "
"....?"
다짜고짜 묻는 그의 말에 엘은 무슨 말이냐는 듯 트로웰을 보았다.류엘인지 뭔지, 얘네들은 원래 다짜고짜 말하는 게 특기인 건가?
트로웰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알리사가 뒤를 돌아보았으나 트로웰은 엘에게만 용건이 있다는 듯 그녀를 채근하기만 했다.
"그 화분, 어떻게 알았냐고."
"...아, 뜬금없이 앞뒤 다 잘라먹고 그런식으로 물어보면 제가 어떻게 알아들으란 거예요? 그냥 저번에 빨간 놈한테 화분을 사오라고 하길래 화분 키우는 걸 좋아하나보다 했죠."
"...수국으로 고른 이유는."
"그야, 화분 키우는 사람이면 모두 특이하고 예쁜 꽃을 좋아할 테니까요."
아이들이 모두 당돌하게 말하는 엘을 신기하게 보던지 말던지, 엘과 트로웰은 자신들의 대화에만 집중했다.
"온 이유가 이것 뿐인가요?"
"....알았으니 됐어."
트로웰인 재빨리 교실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행동이 본인으로서도 꽤나 민망했던 것이다. 수업종이 쳤는데도 2학년 교실까지 쫓아가다니, 나도 참 제 정신이 아니지. 교과담당 선생이 없던 게 천만다행인 건가.
어차피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는 트로웰은 선생들에게 어지간히도 신뢰가 쌓여있는 참이라 선생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별 걱정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은근히 식물키우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걸 그 아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이전에 라피스에게 화분을 사 오라고 한 것은 그저 엘을 도와주기 위했던 건데, 무의식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사오도록 한 모양이었다. 트로웰은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로 자신의 기호를 유추해내는 엘의 통찰력이 꽤나 날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이유가 이것 뿐이냐고?'
"...젠장할, 2학년 주제에...사람을 놀리고 있어.."
트로웰은 인상을 마구 구기며 혼자 중얼거렸다.
지금 누군가가 트로웰의 표정만을 보게 된다면 저주를 걸고 있는 거라고 착각할 정도로 험악했다.
'...솔직히 호감이 가기는 했어. 하지만 그건 연애감정 같은게 아니라.. 그냥 좀... 뭐랄까.......'
그 녀석은 어딘가가, 나와 닮아있었다.
표정이나 말투,지금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생각 말이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나와 닮은,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조차도 귀찮아하는 녀석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 그 녀석을 찾아간 것도 어쩌면 다시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싶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 녀석은 스토커 따위가 아니야. 이미 스토킹이라면 셀 수 없이 많이 당해왔는걸. 그런데 고작 내 취향을 알고 있는 녀석이 내 스토커인지 아닌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그 녀석이 있는 반까지 찾아가는 건 역시 내가 생각해도 나다운 행동이 아니었어.
솔직히 말해서 녀석이 마음에 든다.
나한테 그렇게 당돌하게 대했던 녀석은 내 일생중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사실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도 호감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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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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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웰은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자신은 아직 호감과 연애감정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엘에게 느낀 감정은 이성에게 느끼는 감정과 일치한다는 것. 또한, 그 감정은 점점 커질 것이라는 것.
이렇게 둘의 인연이 아카시아가 만발하기 시작하는 초여름에 시작되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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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별하입니다....시험 끝나자마자 급히 쓴 거라 저도 이게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요;;;;
에...재미는 없지만 모쪼록 재미있게 읽어주시면...^_^;;<<......
첫댓글 분명히 이걸로 끝인데 소설의 프롤로그를 읽은 듯한 느낌이네요..
키 크세요...라피스 귀여워요 ><
제 의도를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ㅜㅜ;;
꺄아아~~~~~~~ 트로웰 너무 멋져요오오~~~
트로웰 좋아하시나봐요...^_^ 제가 썼는데도 멋있게 느껴지셨다니../.....
역시 트로웰입니다!! 너무 멋져용~~~^^
에....감사합니다..^^;;
떡볶이 사다준다는 엘뤼엔 아버지에 사실 저는 트로웰보다 더 놀랐고 감동했고.. 떡볶이 사오는 엘뤼엔이라니!!! 막 이러네요.. ;ㅅ; 어쨌든 너무 귀여워요 다들!
엘뤼엔은 등장도 안하는데 언급만으로 존재감을 풍기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트로웰 완전 멋져요>ㅂ<
검사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