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이집트 영공 북한 조종사가 참전해 지켜줬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 이집트와 북한은 어떤 계기로 혈맹관계를 맺었나?
▲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됐을 때에 주변국과 1차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가말 압델나세르가 혁명으로 집권하여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을 때 2차 중동전쟁이 발생했다. 3차는 유명한 1967년 6일 전쟁인데, 이스라엘의 기습으로 이집트 측이 대패했다. 이집트는 3차 중동전쟁에서 시나이반도까지 빼앗겼는데, 참패에 대한 복수로 이집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4차 중동전쟁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1973년 이스라엘 유대교의 신년 명절인 욤 키푸르 기간에 이집트가 기습 공격을 감행해 초전 승리를 거두었다. 기습 공격의 주역이 당시 호스니 무바라크 공군사령관이었다. 공군에 의한 기습 공격으로 초기에 승전보를 울렸으나, 결국에는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종전이 됐다. 그러나 이집트는 4차 중동전쟁을 승리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매년 승전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초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전쟁 준비를 할 때 낌새를 챈 소련이 전쟁을 우려하여 무기 공급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반발을 한 사다트 대통령은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던 3,000명에 달하는 소련 군사 고문단에 72시간 모라토리엄을 주고 추방 명령을 내렸다.
추방으로 인해 생긴 군사적 공백을 김일성 주석이 메워줬다. 이집트 공군의 주 무기인 미그 전투기 부품 제공은 물론 이집트 조종사들이 북한에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초기에 전쟁이 났을 때는 모든 이집트 조종사가 기습에 동원이 돼서 공백이 생긴 이집트 영공을 북한의 조종사들이 직접 참전해 지켜줬다. 이집트군으로 위장한 북한 공군 조종사 일부가 전사해 혈맹관계가 된 것이다. 이집트 전쟁 시 결정적으로 도와준 사람이 김일성 주석이다.
- 북한 공군 조종사들이 이집트에 파견됐나?
▲ 그렇다. 초전 승리에 공을 세운 무바라크 이집트 공군사령관은 전쟁 후에 총리가 됐다. 그가 총리 재직 시 사다트 대통령의 사은사로 평양에 방문했을 때 김일성과 무바라크 사이에 맹약이 맺어진 것이다.
무바라크 총리가 “이집트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도와줘서 보은을 하고 싶은데, 무엇으로 보답을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 김일성이 웃으면서 “우리는 형제국가로 형제를 돕는 건 당연하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 단 한 가지만 약속을 지켜 달라. 남북한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남한하고 수교를 하지 말아 달라” 하고 부탁을 한 거다. 무바라크와 김일성 사이의 약속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까지 지켜졌다.
-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역량 있는 외교관들이 파견됐음에도 불구하고 대사급 관계 수립이 쉽지는 않았던 큰 이유였나? 그런데 어떻게 총영사급 관계는 맺을 수 있었나?
▲이집트는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었기에 북한과는 대사급 관계를, 한국과는 영사급 관계로 처음부터 차등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총영사의 기본 임무는 자국민 보호다.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국민을 보호하는 일이 주 업무고, 부차적으로 정무적인 일을 본다. 물론 실질적인 외교 업무를 보기는 하지만 공식 활동에 제약이 있다. 대사급 관계와 영사급 관계는 정부를 대표하여 협상을 하는 데 차이가 많다.
우리나라는 국력이 북한보다 강해져 활발한 대외 활동을 했지만 공식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외교 활동에 지장이 많았다. 부트로스 갈리는 UN 사무총장이 되기 전에 이집트의 해외 담당 국무상을 역임했다. 갈리 국무상이 방한했을 때 우리와 수교 문제를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여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이집트 수교는 실현되지 못했다. 외교관계를 총영사급 관계에서 대사급 관계로 격상시키는 일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 대사는 1995년 4월 이집트와의 수교를 성사시키시면서 그해 5월에 초대 이집트대사가 됐다. 북한과 혈맹관계였던 이집트와의 수교는 흔히들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집트와의 수교 성사가 김영삼 정부 시절의 가장 커다란 외교 성과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대사가 전임자들이 이루지 못한 이집트와의 수교를 어떻게 성사시켰나?
▲ 이집트와의 수교는 역대 정부가 계속 달성하려고 했던 외교 목표의 하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부임을 해 사태를 살펴보니 한국과 이집트 관계의 전략적 가치를 통상적인 방법으로 강조하는 수준으로는 외교 목표를 달성할 수 없고, 특단의 접근 방법을 취해야 가능해 보였다.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직접 접근해서 종래까지 품어온 그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공군 참모총장을 역임했고, 전쟁 시 공헌을 바탕으로 대통령까지 됐기 때문에 그의 관심과 마음을 잡기 위해 당시에 관방장관을 역임한 한·이집트 친선협회 아흐메드 회장과 상의해서 대한한공의 카이로 취항을 성사시켜 대통령의 관심을 유발하도록 했다.
당시 조중건이라는 사람이 대한항공 부회장으로 있었는데, 이 사람이 외교에 관심이 많아 그와 사전에 접촉해 수교를 위해서 카이로 노선을 개설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 했고, 상업적으로도 이윤 보장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이 1,000만 명 이상 되는데,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려면 일단은 카이로를 경유해야 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와 연계하는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이익 보장이 되리라는 점을 설득해서 대한항공을 취항시켰다.
이어서 무바라크 대통령과 제일 가까운 인사를 찾기 시작했다. 육군 장군 출신인 오마르 술레이만 정보부장이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매일 정세 보고를 하는 최측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파견관을 통해 정보부장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를 만나 “우리의 수교 목적이 북한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북한과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친구인 한국과도 교류하는 것이 이집트 국익에 더 부합한다”는 논리로 설득하고, 나아가 “지금 북한은 이집트에서 제공받은 소련제 스커드미사일로 자체 미사일을 개발하여 이란을 포함한 중동 지역에 미사일을 역수출하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스라엘과 대적하는 데 가장 유효한 무기가 미사일이다. 중동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상대하기 위해 미사일이 필요하고, 이스라엘과 대적하는 중동 국가들 중 일부가 북한제 미사일을 구매한다.
나는 술레이만 정보부장에게 “북한이 이집트에도 판매를 하지만 경쟁국인 이란에도 공급하고 있으니, 이집트의 국익을 저해하고 있으므로 이런 국가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한국과 관계를 맺는 것이 이집트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설득했다.
술레이만 정보부장이 무바라크 대통령에게도 보고를 했다. 이는 곧 무바라크 대통령의 대북관에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됐으며, 한국의 경제 개발 경험이 이집트 경제 발전에 유익하다는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오두환 기자 odh@ilyoseoul.co.kr
출처: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3609
이집트인, “1973년 4차 중동전쟁 승리는 북한군 덕”
최근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사퇴로 시민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한 이집트인이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당시 북한이 이집트 편에 서 참전한 사실을 알려 주목받고 있다.
북한 <노동신문> 12일자에 따르면 야흐야 자카리야 헤이룰라 아랍예술문화공보협회 총서기는 ‘김정일 영도자의 담력은 조선의 국력이다’는 제목의 찬양 글에서 북한 덕택으로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섬멸적 타격을 안기고 제4차 중동전쟁에서 커다란 승리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집트사람들에게 북한이라는 나라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43년 11월말 카이로회담이라면서 당시 카이로선언의 중요내용이 미국, 영국, 중국 3개국이 “‘적당한 시기’에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실현시켜 준다는 것이었다”면서 “그 선언을 들으며 우리 이집트인들은 식민지예속국인 조선인민에 대한 동정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러나 그로부터 30년 후인 1973년에 우리 이집트사람들은 조선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면서 “조선은 식민지예속국이나 약소국, 은둔국이 아니었다”고 이어갔다. 그 계기가 북한군의 제4차 중동전쟁 참가라는 것이다.
그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조선의 공군무력은 베트남과 시리아뿐 아니라 우리 이집트에서도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면서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에 온 조선의 비행사들은 첫 공중전투에서만도 하늘의 ‘제왕’이라고 하며 날치던 ‘F-4’를 4대나 격추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며 북한군의 전과를 내세웠다.
계속해서 그는 “조선의 비행사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쓰는 전투방법이 아니라 자기식의 새로운 주체전법으로 적의 비행장과 미사일기지, 연유창 등을 비롯한 중요 군사거점들을 연이어 타격하면서 전과를 크게 확대하였다”고 북한군의 독특한 전술을 부각시켰다.
나아가 그는 “이에 크게 고무된 우리 이집트군은 전 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하여 이스라엘침략자들에게 섬멸적 타격을 안기고 제4차 중동전쟁에서 커다란 승리를 가져왔으며 결과 빼앗겼던 시나이반도를 비롯한 많은 영토를 다시 찾게 되었다”고 전공을 북한 측에 돌렸다.
그는 “하기에 우리 이집트의 제4차 중동전쟁자료집에는 조선인민군이 이 전쟁에 참가하여 싸울 아무런 이유도 없지만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희생적으로 전투를 진행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면서 “조선인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에 의하여 우리 이집트에 훌륭하게 건립된 10월전쟁기념관과 박물관에도 이에 대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전시되어있다”고 밝혔다.
출처: https://www.nocutnews.co.kr/news/5075534
한국산 핸드폰을 든 중동인들, 김정은을 좋아한다?
출처: https://kimssine51.tistory.com/687
출처: http://www.jajusibo.com/34075
[북한군일화]11.제4차 중동전쟁에서 활약한 북한 군사고문단 (1)
해금강 | 기사입력 2017/06/16 [02:36]
애급(이집트)의 사다트대통령은 1960년대 3차 중동전쟁 때 소련만 믿고 있다가 6일만에 무참히 패한 것을 복수하려는 의지로 우선 소련과의 군사교류를 중지하고 소련군사고문단을 철수시키며 비밀리에 북한 군사고문단을 초청하여 전쟁준비를 강행한 후 1973년 10월 6일 전쟁을 일으켜 시나이반도를 되찾는다.
이 전쟁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 여러 글들에서 펴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전쟁이 담고 있는 모든 사실을 다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특히 북한도 현재까지 러시아나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자기의 구체적인 활동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글에서는 4차 중동전쟁 과정에 지금까지 언론들에서 중요하게 보도하지 않았던 몇 가지 사실들을 통해 북한군이 활용하는 특이한 전법의 위력과 실지 전력을 가늠해 보려고 한다.
3차 중동전쟁과 4차 중동전쟁에 이용된 애급과 이스라엘 쌍방의 병력과 무기기술장비는 큰 변화가 없다. 굳이 강조한다면 애급이 3차 중동전쟁 때 수백 대의 미그-21과 미그-23을 손실당한 후 취약해 진 공군력을 대신하기 위하여 소련으로부터 SA-6과 SA-7를 비밀리에 반입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정신적 우월감, 무기장비수준, 방어준비, 일상동원준비의 모든 면에서 애급을 압도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참고, 2000년 이전에는 북한군에서도 소련제 대공미사일을 삼-2, 삼-4, 삼-6, 삼-7이라고 불렀다. 서방식으로 말하면 SA-2, SA-4, SA-6, SA-7이다. 최근에 와서야 러시아식으로 S-75, S-100, S-125, S-175, ... 라고 부른다. 여기서 SA-4는 S-125, SA-6은 S-175이며 SA-7은 소련이 처음 개발한 휴대형대공미사일을 의미한다. 굳이 북한에서 자체로 개발한 대공미사일과 대비한다면 각각 번개-1, 번개-2, 번개-3, 화승총에 대응한다.)
그런데 4차 중동전쟁은 첫 순간부터 애급의 일방적인 우세로 일관되었다. 만일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거나 전쟁의 결정적인 시각에 애급군 총참모부가 우유부단하지 않고 북한 군사고문단의 강경한 충고를 새겨들었다면 이스라엘군은 별로 저항해 보지도 못하고 완패하였을 것이다.
이 전쟁은 전쟁의 주체는 무기가 아니라 해당 나라 지도부와 국민의 전쟁의지, 군대의 전략전술과 군인들의 각오라는 사실을 다시금 증명하였다. 지금 대부분 언론들에서 이것을 애써 가리우려고 하지만 하늘의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다.
1. 북한 군사고문단이 제기한 문제점들
초청받고 애급에 도착한 북한 군사고문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장비수준이 높은 애급군의 실태를 보고 깜짝 놀란다. 실지로 당시 북한군의 장비수준은 그리 높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이나 1950년대 한국전쟁 때 쓰던 장비들을 그대로 쓰는 부대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급은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으므로 북한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최신형 전투기들과 전차들, 미사일들을 충분히 장비하고 있었다.
북한 군사고문단은 애급군의 실태를 요해한 후 사다트대통령과 애급군 총참모부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제기한다.
- 애급군의 전쟁의지는 확고하지 못하다. 우선 애급군 총참모부가 신심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대통령의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행정신이 없다. 또한 대부분 군인들은 이스라엘군대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다.
- 소련이 제공한 교범과 전술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 애급군이 장비한 무기들은 이미 전에 이스라엘이 충분히 연구하고 대책을 세운 상태이므로 실지로 전쟁에서 자기 위력을 나타낸다고 보기 힘들다.
- 국민들이 전쟁에 대한 신심이 없고 두려워한다. 특히 애급보다 우세한 이스라엘공군을 결정적으로 제압하고 수도와 국민들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전쟁은 불가능하다.
이런 문제는 소련 군사고문단이라면 제기조차 못했던 내용들이다. 오직 자력으로 강대한 적과 간고하게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북한만이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인데 이것은 사다트대통령과 애급 군부의 주요 간부들의 지지를 받았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가겠는가 하는 것이다.
북한 군사고문단의 능력이란 북한에서 배우고 체험한 것밖에 없으므로 결국은 북한의 경험을 애급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는 방향에서 해결하여야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한의 경험을 애급의 실정에 맞게 적용한다는 문구이다.
소련은 애급의 구체적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저들의 경험과 교범을 강제로 내리먹였다면 북한은 자기의 경험을 철저히 애급사람들이 인정한 조건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하여, 그들의 것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북한 군사고문단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다트대통령과 애급군 총참모부의 제한된 성원들만 알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지어 정탐에서는 최고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의 모사드도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그 어떤 낌새도 채지 못 했는데 이것은 반탐분야에서 하나의 중요한 경험이다.
북한 군사고문단은 크게 작전부문, 공병부문, 특수전부문, 통신부문, 공군부문, 반항공부문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공군부문은 많이 취급되었으므로 될수록 약하고 다른 부문들만 설명한다.
2. 유사한 두 전쟁의 수행방식과 군내부의 정신교양
사실 세계전쟁사를 깊이 연구하면 유사한 전쟁들이 적지 않은데 바로 한국전쟁과 4차 중동전쟁이 대표적 실례이다. 정말이지 4차 중동전쟁은 꼭 1950년 여름의 한국전쟁 초기를 방불케 한다.
- 북한은 1950년 여름에 전쟁준비를 하면서 5월부터 미국과 한국이 눈치 채지 못하게 주력부대들을 농촌지원의 명목으로 황해도와 강원도에 이동 배치한다. 이와 비슷하게 애급군도 훈련과 휴가의 명목으로 이스라엘의 의심을 받지 않게 주요 부대들을 수에즈운하계선에 집중배치하는데 성공한다.
- 북한은 1950년 여름에 전쟁승리의 기본요인을 단기간에 서울을 점령하는데 두고 대부분 38도선 근방에만 배치되어 있는 한국군을 소멸한 다음 미군이 개입하기 전에 전격전으로 대전과 부산을 점령하려고 기획한다. 물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애급군도 전쟁승리의 기본요인을 수에즈운하를 단번에 강행 도하하는데 두고 운하를 경계로 종심이 깊지 않은 이스라엘군 방어진을 짧은 기간에 격파소멸한 다음 후방에 배치된 이스라엘군이 미처 진출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전격적으로 시나이반도를 점령하는 방법으로 전쟁을 결속하려는 작전 안을 세운다. 물론 꼭 이 기획대로 전쟁이 되지 않았다. 너무도 신통히 방불케 하는 전쟁방안과 진행과정이다.
두 전쟁 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승패는 너무도 명백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반드시 강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애급군 내부에서 사다트대통령에 대한 우상화와 총참모부 지시집행에서의 절대성, 전쟁의 필요성과 승리의 신심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신교양을 대대적으로 강화한 것이다. 이것은 북한이 전통적으로 해오는 사상교양사업과 같은 것으로서 애급의 입장에서는 3차 중동전쟁의 교훈으로부터 쉽게 접수되어 매우 강도 높게 진행한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 서방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3. 승리에 대한 신심을 키워 주고 전쟁공포심을 없애는 사업
아무리 무장이 좋아도 군인이 전쟁과 전투에 대하여 공포심을 가지고 있으면 무용지물이다. 더욱이 3차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이스라엘보다 기술적으로 열세한 상황에 처한 애급군에 있어서 군인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기가 이스라엘군의 무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전쟁을 할 수 없다.
이 문제를 북한군사대표단은 다음과 같이 해결하였다.
- 우선 총참모부와 주요 부대의 담당참모들을 준비시키는데 일차적인 힘을 넣었다. 그들을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실지 동작으로 하나하나 배워 주고 머리를 틔워주어 그들이 애급군이 현재 장비하고 있는 무기장비가 결코 이스라엘 무기보다 못하지 않으며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하였으며 소련의 전법이나 교범이 기준이 아니라 무기를 장비하고 운용하는 주체인 애급군의 실정이 기준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기발한 전술방안들을 부단히 창조하고 무기들을 개량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 민간소방차 몇대로 수에즈운하 모래 둑을 허무는 세계전쟁사 어디에도 없었던 기발한 전술방안, 대구경포병화력을 최대로 집중하여 수에즈운하에서 방어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정신적으로 제압하고 완전소멸하는 전법, 7호발사관을 장비한 결사대로 이스라엘전차들을 격파하는 전법, 낡은 통신기재들을 개조하고 전술적으로 잘 운용하어 이스라엘과 서방, 소련을 기죽게 하는 전자장애를 조성하는 전법, SA-6을 위주로 여기에 SA-4와 SA-7, 소구경대공포를 3~4층으로 배치하어 수도 카이로 상공에 날아드는 이스라엘 전폭기들을 모조리 격추하는 전법, 미그-17을 근접지원기로 활용하는 전법 등 4차 중동전쟁을 대표하는 수많은 전법들이 태어났는데 이것들은 북한 군사고문단의 고심어린 탐구와 노력, 정력적인 지도에 의해 태어 난 그야말로 애급의 실정에 꼭 맞으면서도 이스라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전법으로서 세계전쟁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기록하였다.
아마도 4차 중동전쟁이후 전쟁에서 거둔 귀중한 경험과 교훈을 잘 총화하고 부단히 연구발전시켰다면 1982년 5차 중동전쟁 때 시리아가 쓰디쓴 패배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 전쟁과 전투의 기본참가자인 군인들을 준비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넣었다. 이를 위해 특공대를 조직하고 북한 군사고문단 특수전담당교관들이 직접 훈련을 집행한다. 그것은 특공대가 돌파구를 열면 나머지 부대들은 별로 걱정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특공대는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심이 가득한 군인들로 자원선발하여 조직하였다. 다음 특공대원들에게 북한 특유의 고강도훈련을 들이먹였다. 그 훈련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훗날 북한 군사고문단이 철수할 때 제일 서운해 하고 눈물을 많이 흘린 군인들이 바로 특공대 대원들이였다는 하나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전장에서는 아무런 무서움이 없이 수에즈운하를 번개처럼 돌파하고, 반격하는 이스라엘 전차를 맞받아 7호발사관을 들고 나가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눈물을 몰랐던 4차 중동전쟁의 영웅들이였지만 귀국하는 북한 군사고문단 특수전담당 교관들을 붙잡고 눈물을 흘린 것은 어제 날의 겁쟁이에 불과했던 자기들을 참다운 군인으로, 영웅으로 키워주었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또 부어 준 북한 군사고문단에 대한 최대의 믿음과 경의의 표시였다.
특공대는 70cm높이에 기관총실탄들이 무섭게 빗발치는 상황에서 각종 장애물들을 신속정확히 극복하고 지정된 대상물을 점령하는 훈련, 상상을 초월하는 초강행군훈련, 고도의 실탄사격훈련, 피투성이의 태권도훈련, 짧은 시간 내에 사막과 초원에 아무런 흔적 없이 은폐하였다가 적을 불의에 기습타격하고 신속히 이탈하는 훈련들을 몇 달 동안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 특공대원들은 점차 겁을 모르고 그 어떤 정황 속에서도 적을 타격소멸할 수 있는 만능병사로 준비 되였으며 애급군의 별로 성장했다.
이러한 경험에 토대하어 애급군에서는 우세한 이스라엘의 전차부대를 소멸하기 위하여 전문적으로 7호발사관으로만 무장한 특공대들을 추가적으로 조직하였다. 이 특공대는 이스라엘 전차가 지나갈 수 있는 노상에 개인점호를 파고 은폐하였다가 전차가 지나 간 다음 뒤에서 일어나 전차의 엔진이나 무한궤도를 목표로 7호발사관을 발사하는 훈련을 기본으로 진행하였는데 전쟁과정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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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일화]12.제4차 중동전쟁에서 활약한 북한 군사고문단 (2)
해금강 | 기사입력 2017/06/17 [04:20]
4차 중동전쟁에 적용된 북한식 전법의 놀라운 위력
4차 중동전쟁에 적용된 애급군의 전법은 본질에 있어서 북한군이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전법이다. 그러기에 4차 중동전쟁은 군사전략전술적인 측면에서는 북한과 이스라엘과의 대결장이며 북한군의 전략전술이 이스라엘군의 전략전술을 완패시킨 전쟁이다.
4차 중동전쟁을 대표하는 몇 가지 전법을 보기로 하자.
- 소방차로 모래 둑을 허무는 전술
공격하는 전차와 보병부대의 가장 큰 장애는 모래 둑과 갯벌이다. 우선 이것을 파괴할 만한 재래식폭탄도 없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폭이 수십m에 달하는 거대한 모래 둑을 운하기슭에 쌓아 바흐레브선을 구축한 다음 '금성철벽'이라고 자처했다. 소련군사고문단도 모래 둑 돌파를 놓고 고심했지만 끝내 방도를 찾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런데 북한 군사고문단의 지도 밑에 한 애급군 참모가 어렸을 때 모래무지를 물총을 쏘아 허물던 생각으로부터 이 방안을 제기한다. 그러나 인차 총참모부의 반대에 부딪친다. 이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지로 보여준 것 역시 북한 군사고문단성원들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운하에 구축한 것과 꼭 같은 모래 둑을 쌓고 여기에 소방차로 물을 쏘면 모래 둑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였다. 그리하여 하나의 돌파구를 개척하는데 소방차 6대를 3시간정도 동원하면 된다는 과학적인 수치를 산출해 내고 그에 따라 특공대의 사전진입과 물총을 장비한 선견대의 투입, 기본부대의 진출로 된 수에즈운하돌파전법을 수립한다.
더욱이 이 전법은 운하에 무진장한 바닷물을 원천으로 하기 때문에 물총을 쏘는데 필요한 엔진기름만 얼마간 있으면 된다. 특별한 무기장비가 필요치 않으므로 아주 효과적이고 비밀준수에도 유리했다. 실지로 전쟁직전에 수십대의 민간소방차와 물총들이 수에즈운하계선에 나타났지만 이스라엘군은 이에 대하여 전혀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 포병집중이용전술
북한의 특기가 바로 포병집중이용전술이다. 특히 방사포를 잘 활용한다. 그래서 북한은 당시 애급군이 장비하고 있던 대구경포들과 방사포들을 모두 돌파지역에 집중시키고 1km당 250문 이상의 포화력을 조성했다. 아마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렇게 많은 포들을 집중시킨 실례는 오직 4차 중동전쟁 하나일 것이다. 포들은 사거리와 위력에 따라 층층이 배치하고 임무를 구체적으로 주어 수에즈운하에 굴설된 바흐레브선을 일격에 격파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스라엘군 군인들을 정신적으로 위압시켜 전투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결국 10월 6일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바흐레브선은 형체가 없어지며 이스라엘군은 애급군 주력이 운하를 돌파할 때까지도 아무런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것은 미국과 서방을 공포에 떨게 하였고 애급과 이스라엘에는 진짜 전쟁이 어떤 것인가를 똑똑히 보어 준 좋은 교범으로 되었다.
- 전무후무한 전자장애조성전술
3차 중동전쟁에서 애급군이 6일만에 처참하게 패한 원인의 하나는 전자전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아 이스라엘의 전자전에 공략당한 것이다. 당시 소련의 전자기술이 그리 높지 못했으므로 애급군의 전자전능력은 이스라엘보다 한참 뒤떨어졌다. 이러한 실정에서 애급군은 북한 군사고문단의 통신전문가들의 지도 밑에 그동안 관심밖에 두였던 낡은 대출력통신기재들을 모두 장애기로 개조하고 육군과 공군이 장비한 모든 통신기재들이 통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군의 통신도청과 장애를 조성할 수 있게 준비시켰다. 동시에 이스라엘군의 무선장비들에 대한 정보수집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어 이스라엘군의 지휘부와 비행기들에 장비된 통신기재, 장애기들을 모두 장악하고 대책을 세웠다. 특히 주요 대공미사일시스템인 SA-4와 SA-6의 유도방식을 근본적으로 개조하여 이스라엘의 전자전에 관계없이 정확한 명중사격이 가능하게 한 것이 매우 주목된다.
결국 전쟁이 터지자 시나이반도는 지금까지 인류가 겪어 보지 못한 최대의 전자장애지역으로 돌변하여 이스라엘군의 지휘시스템을 완전 마비시켜 놓았으며 이스라엘군 전투기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유도방식으로 몰입하는 애급군의 대공미사일을 피하지 못해 연이어 격추되어야 하였다.
- 다층으로 구축한 수도항공방어시스템
베트남전쟁과 이전의 중동전쟁에서는 대공무기들이 거의 독단적으로 운용되었고 설사 협동한다고 하어도 연관성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4차 중동전쟁은 유사한 사명을 가진 서로 다른 제원의 무기들을 잘 어울려 쓰면 상상 외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실물로 입증하였다.
애급군은 공군의 준비상태가 이스라엘공군보다 못한 조건에서 공군의 대부분을 북한 군사고문단의 지휘 밑에서 이스라엘의 전략적 대상에 대한 공습과 이스라엘군 공군비행장에 대한 타격에 집중이용하면서 항공방어는 주로 대공미사일과 소구경고사포로 보장하였다. 특히 수도항공방어가 가지는 의의로부터 다층으로 된 항공방어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 항공방어시스템에서 기본역량은 반능동유도방식의 중거리대공미사일 SA-6이다. 그러므로 다른 대공미사일들과 고사포들은 보조적인 차원에서 SA-6과 협동하게 하였다. 먼저 앞 계선에서 소구경고사포로 이스라엘군 전투기들을 위협하면 바빠난 이스라엘군 전투기들은 중고공으로 상승한다. 이것을 노리는 것이 다음 계선의 SA-4이다. 대체로 여기서 30%이상이 격추된다. 이 구간을 가까스로 벗어난 이스라엘 비행사들은 벌써 제 정신이 아니므로 자기가 SA-6의 먹잇감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고사포부터 대공미사일까지 모든 반항공지휘는 북한 군사고문단의 반항공담당교관들의 지도 밑에 통일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뒷 계선의 SA-6미사일들은 SA-4의 타격을 가까스로 벗어나 허둥대는 이스라엘군 전폭기들을 조준하고 있는 상태이다. 일단 이렇게 걸려들면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이스라엘 비행기의 나머지 60%이상이 격추된다. 이 죽음의 함정에서 운수 좋게 겨우 벗어 난 이스라엘 비행기들은 불과 몇 대 안되며 대체로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거나 SA-6을 피하기 위해 저공으로 내려 오다가 최종적으로 SA-7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만다. 그래서 전쟁 전 기간 카이로에 단 한 개의 폭탄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 카이로 항공방어시스템은 북한 평양의 항공방어시스템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결국 평양 항공방어시스템의 효율성을 세계적인 군사강국이라고 자처하던 이스라엘 공군을 대상으로 카이로에서 검증한 셈이다.
- 미그-17을 근접지원기로 활용한 전법
미그-17은 1950년대에 항공방어용으로 만들어진 아음속 요격기이다. 베트남전쟁의 한 가지 교훈은 지상전에 대한 근접지원에 초음속전투기가 아무런 의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이 각각 A-10과 수호이-25를 개발장비하지만 북한이나 애급은 이런 호사를 바랄 수 없다. 더욱이 일단 수에즈운하를 돌파한 후에는 일선에서 공격하는 지상부대들에 대한 지원을 오직 비행대로밖에 할 수 없는데 당시 애급군에는 마땅한 근접지원기가 없었다.
그래서 애급에 파견된 북한 군사고문단의 공군담당교관들은 애급군에서 성능이 뒤 떨어진다고 밀어 놓은 미그-17을 근접지원기로 활용할 방안을 세운다. 근접지원기의 특징은 공중전보다 지상지원이 기본이므로 공대지화력이 매우 강해야 하며 거의 단독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고 다른 전투기들의 공중지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연 낡은 미그-17이 이 중대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는가 하고 모두 머리를 기웃거리는데 애급의 한 부대가 공격도중 이스라엘군의 방어에 부딪쳐 공격이 좌절됐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대책은 오직 하나 공중지원이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 하는 수없이 북한 군사고문단의 한 비행사가 직접 미그-17을 단독으로 몰고 가서 이스라엘군의 방어진에 무자비한 타격을 가하고 애급군의 공격을 보장한다.
여기서 너무도 놀라워 잘 이해 안 되는 점이 2가지 있다.
우선 원래 미그-17의 무장은 오직 기관포밖에 없다. 그런데 지상전의 근접지원에 활용하려면 적지 않은 폭탄과 로켓을 장비하어야 하고 기관포의 성능도 높아야 한다. 만일 북한이 이런 전법을 서슴없이 제기할 정도라면 북한군은 20년 전부터 장비한 미그-17을 이미 다 개조하고 비행사들도 공중전뿐만 아니라 근접지원도 할 수 있게 준비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초저공비행으로 단독임무를 수행한 그 비행사의 높은 담력과 비행술이다. 그 전투가 끝난 후 애급군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생각치 않은 미그-17의 지원에 대하여 모두 격찬했으며 비행사의 높은 비행술과 타격의 무자비성을 평가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전법이 있지만 대체로 다른데서 소개되었으므로 그만 약한다.
[↑제4차 중동전쟁, 욤 키푸르전쟁에서 이집트 특공대가 적진 깊숙이 진입하여 새거 미사일을 이용하여 이스라엘 탱크를 파괴하는 동영상]
5. 4차 중동전쟁과정에 북한 군사고문단이 찾은 교훈
북한 군사고문단이라고 하어 완성된 인간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므로 아무래도 부족한 측면도 있고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상대가 세계적으로 가장 두뇌가 뛰어나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므로 그들과의 전쟁은 고도의 두뇌전쟁인데 전쟁과정에 북한 군사고문단도 몇 가지 심중한 교훈을 찾게 된다. 이것은 지금 북한군의 전쟁준비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 상상을 뛰어 넘은 이스라엘 전차부대의 진출속도
초기 전쟁기획을 세울 때 북한 군사고문단과 애급군 총참모부는 수에즈운하 뒷 계선에 배치된 이스라엘 전차부대에 대하여 크게 관심 돌리지 않았다. 그것은 그 전차부대에는 전차만 있고 전차병들은 그로부터 수백km 떨어진 곳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3~4일 후에야 전차부대가 진출할 수 있다고 보고 기획을 세운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뜻밖에도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 밑에 전차병들을 수송기와 헬기로 즉시에 공수하며 다음 날에는 이스라엘 전차부대가 애급군에 반격을 가한다. 북한 군사고문단과 애급군이 사전에 7호발사관으로 무장한 특공대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어떤 후과가 초래되었겠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 전쟁승패에 작용하는 위성정찰의 위력
다 알다시피 4차 중동전쟁과정에 애급군이 주도권을 상실한 기본 배경은 미국이 개입하면서 전쟁상황을 애급군 총참모부보다 더 신속히 이스라엘군에게 제공한데 있다. 북한 군사고문단으로서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고, 한번도 보지도 못한 것이므로 아무런 대책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미국이 이스라엘을 그런 방법으로, 그렇게 빨리 지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이 이때부터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지원방식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정찰위성의 보유와 정찰위성자료의 수집, 정찰위성장애에 대하여 각방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0년대 초부터 정찰위성자료를 수집하는 통로와 기술을 개척하며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여기에 사이버전력까지 투입하어 완전한 정찰위성정보수집 관련기술과 장애기술을 개발하게 된다.
- 조성된 불리한 상황에 당황하지 말고 끝까지 내미는 담력
이것은 정확히 말하여 북한 군사고문단의 오류가 아니라 애급군 총참모부의 돌이킬 수 없는 오류이다. 즉 애급군의 오류를 통해 북한군이 새기는 교훈이다.
미국의 정찰위성자료를 받은 후 이스라엘군이 정신을 차린다. 그리하여 애급군 부대들의 협동에서 나타난 빈 공간을 찾고 거기로 소련제 전차로 무장한 소규모 특공대를 투입하는 모험을 감행하는데 뜻밖에도 대성공한다. 이것을 한국전쟁에 비유하면 인천상륙작전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전쟁당시 1950년 9월에 이르러 북한은 사실상 전력을 다 소모한 상황이라면 4차 중동전쟁의 경우에는 애급군은 아직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전력이 충분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도 파악 못한 채 지레 겁을 먹은 애급군 총참모부가 퇴각명령을 내리는 통에 전쟁국면이 바뀐다. 그때 북한 군사고문단은 뒤 계선에 침입한 특공대는 내버려두고 진격하는 부대들은 끝까지 공격하어 전쟁목적을 달성하면 고립된 특공대는 저절로 소멸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애급군 총참모부는 북한 군사고문단의 의견을 듣지 않아 결국 전쟁을 망쳐먹는다. 그때 전선으로 진출하던 수많은 포병부대들과 전차부대들이 어처구니없는 손실을 당한다. 지어 멋모르고 계속 공격하던 한개 사단은 인접보장이 안되어 완전히 포위되고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하는 비극까지 빚어진다. 지금은 그 골짜기에서는 해마다 애급과 미국, 이스라엘이 공동으로 군사연습을 진행하는 웃지 못 할 코미디가 연출된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오랫동안 시나이반도에서 특수전을 벌리다가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귀대한다.
6. 4차 중동전쟁의 결말
미국의 지원 밑에 애급군을 반격하여 가까스로 전쟁 상황을 수습한 이스라엘이지만 전쟁초기에 너무도 처참하게 손실을 입어 더는 전쟁하기 어렵게 되였다. 애급도 전쟁과정에 상당한 손실을 입어 결국 애급과 이스라엘이 다 같은 상황에서 장기적인 담력전으로 이행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람들의 상상을 뒤 집고 이스라엘이 먼저 항복하여 이스라엘군이 시나이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도 미지수이지만 어쨌든 애급의 전쟁목적이 달성된 셈이다.
지금도 적지 않은 군사전문가들 속에서 논의되는 문제는 만일 소련 군사고문단이 애급군을 지도하였다면 이스라엘이 이처럼 빨리 항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이스라엘이 애급이 아니라 북한에 항복했다는 의미이다.
전쟁이 시작된 후에 이스라엘은 북한 군사고문단이 애급군을 지도하며 공군같은 경우에는 북한 비행사들이 직접 비행기를 타고 참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결국 주적이 애급군이 아니라 북한군으로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북한 군사고문단이 있는 애급군과의 대결에서는 한두 개 작전에서 성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전쟁 전반에서는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차 간파한다. 이럴 때에는 한번 반격하여 애급군이 강타를 먹고 비칠거릴 때 제때에 전쟁을 결속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되는 것이다. 과연 유대인다운 영리한 판단이라고 평가하게 된다.
7. 글을 마치며
1970년대 초 북한군의 모든 특기와 전법들이 가장 종합적으로 활용된 4차 중동전쟁은 이처럼 북한군이 전통적으로 내 세우는 사상정신적 우세와 전략전술적 우세가 전쟁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으며 순수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던 미국과 서방, 소련의 체면을 여지없이 구겨버린 사변이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세계각국의 평가가 서로 엇갈리며 특히 서방이 의도적으로 사실을 은폐왜곡하거나 폄하한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절대로 감출 수도, 왜곡할 수도 없다.
이것을 정확히 파악하면 자체로 개발한 무기들로 장비하고 자기 지도부와 체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일관된 사상으로 교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랜 기간의 군 복무과정에 고도로 숙련된 북한군의 대상이 될 군대가 과연 어느 나라에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대놓고 말한다면 미군과 유엔의 지원만 바라보는 한국군은 절대로 북한군의 상대가 안 된다.
군사력에서 한국이 세계 11위이고 북한이 세계 23위라는 평가는 어리석은 자들의 개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현재 북한군의 실력이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1위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한국군이 북한군보다 한참 뒤떨어 진다는 것이다. 또한 미군이나 중국군도 북한군과 감히 전쟁하지 못한다. 실력상 북한이 몰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다가 마지막에 나 죽고 너 죽고 해 보자는 식으로 어떤 강수를 써서 워싱톤과 뉴욕, 베이징과 상하이, 나아가서 온 지구를 폐허로 만들지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북한 지도부가 전 세계에 대고 25년 전부터 하는 말을 그저 선전적, 체제유지 목적이라고 생각하면 큰 낭패가 되며 반드시 새겨들어야 한다.
좋은 사례가 이번의 말레이시아 김정남 사건이다. 이 사건도 세계정상급으로 우뚝 솟은 북한군 전력의 뒷받침이 없으면 절대로 북한의 요구대로 마무리 될 수 없는 세계외교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다.
적국에 대한 전략적인 선제타격능력을 갖춘 군대가 진정한 군대라고 생각한다. 지금 북한 이상으로 적국에 대한 전략적인 선제타격능력을 갖춘 나라는 오직 미국과 중국, 러시아 3개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는 영국이나 프랑스도 북한보다 못하다. 결국 지금 북한군의 실지 전력이 세계 4위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3~5년 내에 서방의 폄하된 잣대로 평가해도 북한군의 전력은 반드시 세계 5위권 안에 꼭 든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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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군의 작전목표는 이스라엘에게 강탈당한 시나이반도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시나이반도의 면적은 60,000㎢이고, 이스라엘 국토면적은 20,770㎢이므로,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자기 국토면적보다 거의 세 배나 더 큰 이집트 영토를 강탈한 것이다. 이집트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제4차 중동전쟁은 영토탈환전쟁이었다.
이집트군이 시나이반도를 탈환하려면 폭이 약 300km나 되는 홍해를 건너는 것보다 폭이 약 80m밖에 되지 않는 수에즈운하를 건너는 것이 비할 바 없이 쉽다. (확장공사를 아직 하지 않았던 1973년 당시 운하의 폭은 약 80m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스라엘군은 수에즈운하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방어선을 구축했다. 수에즈운하의 길이는 193.3km다.
이집트군이 수에즈운하를 건너 이스라엘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시나이반도를 동서로 관통하여 이스라엘 국경지대에 도착하려면 약 200km를 진격해야 한다. 이집트의 이스마일리아에 인접한 수에즈운하 중간지점에서 이스라엘의 카데쉬 바르네아 인근 국경까지 직선거리가 약 200km다. 이집트군이 수에즈운하 중부지점에서 국경지대를 연결하는 200km 길이의 작전구역을 점령하면 시나이반도 다른 지역에 포진한 이스라엘군은 고립된다. 그러므로 이집트군이 하루에 70km씩 동쪽으로 진격하여 200km 길이의 작전구역을 점령하면, 승리할 수 있었다.
이집트군은 영토탈환전쟁을 준비하였다. 이집트군 전쟁지휘부는 이집트에 파견된 북한군 군사고문단의 방조를 받아 작전계획을 세웠고, 소련산 무장장비들을 도입하여 전투력을 대폭 보강했고, 전투부대들은 군사훈련에 힘썼다. 그에 따라 이집트군의 전투력은 1~2년 사이에 크게 증강되었다. 이집트군이 1973년 영토탈환전쟁에서 사용한 기발한 전법들은 다음과 같다. <사진 2>
▲ 위의 사진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중에 수에즈운하 도하에 성공한 이집트군이 부교 위에서 환호하는 장면이다. 이집트군 공병부대는 이스라엘군이 구축한 모래장벽을 고압물대포를 집중분사하는 전술로 2시간 만에 무너뜨리고 진격의 돌파구를 열어놓았다. 47년 전, 이집트군 공병부대는 고압물대포를 집중분사하여 모래장벽을 2시간 만에 무너뜨리고 돌파구를 열어놓았지만, 오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군 전진보장구분대는 비무장지대 콘크리트장벽과 대전차차단물을 핵배낭으로 연속폭파하고 1시간 안에 돌파구를 열어놓을 것으로 예견된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수에즈운하 동쪽에 거대한 모래장벽을 구축하였다. 이스라엘군이 구축한 모래장벽은 길이가 160km, 높이가 18~25m, 경사각이 45~60도였다. 모래장벽 하부에 콘크리트토대까지 축성해놓았기 때문에 이집트군 수륙양용차량이 수에즈운하를 건너가도 콘크리트토대를 기어오를 수 없었다. 게다가 모래장벽 후방에는 10m 정도 깊은 구덩이, 철조망, 지뢰매설지대, 화점들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이 모래장벽과 방어선을 돌파하려면 적어도 하루에서 이틀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안심하였다.
이집트군이 시나이반도로 진격하려면, 공병부대가 배를 타고 수에즈운하를 건너가 모래장벽에 폭이 7m 정도 되는 돌파구 3km 구간마다 한 개씩 모두 70개를 뚫어놓아야 하였다. 그런데 돌파구 1개를 뚫으려면, 공병 60명이 도하하여 폭약 300kg으로 콘크리트토대를 파괴한 다음, 배로 실어나른 평토기(불도저) 1대가 5~6시간 동안 모래장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왔다. 이집트군 공병부대가 그런 식으로 모래장벽을 허물려고 하면, 돌파구를 뚫기도 전에 이스라엘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몰살당할 수 있다.
모래장벽에 돌파구를 얼마나 빠른 속도로 뚫어놓는가 하는 것과 병력과 무장장비들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수에즈운하를 건너는가 하는 것이 1973년 영토탈환전쟁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문제로 제기되었다. 이집트군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수에즈운하의 물로 모래장벽을 무너뜨리는 기발한 방도를 찾아냈다. 광산에서 광석을 채취할 때 쓰는 고압물대포 5대를 뗏목에 싣고 모래장벽에 접근시켜 집중분사하면 2시간 만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실험결과가 나왔다. 실험결과에 고무된 이집트군은 영국산 고압물대포 300대와 독일산 고압물대포 150대를 수입하였다.
1973년 영토탈환전쟁에서 이집트군의 진격을 가로막은 것이 모래장벽이었다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북한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것은 콘크리트장벽이다. 한국군은 비무장지대 동서를 관통하는 238km 구간에 거대한 콘크리트장벽을 구축해놓았다. 그 장벽은 높이가 5~8m, 아래쪽 두께가 10~19m, 위쪽 두께가 3~7m이다. 비무장지대 콘크리트장벽은 매우 견고해서 포격이나 미사일공격으로는 파괴되지 않는다.
만일 북한군이 72시간 조국통일전쟁에 돌입하면, 비무장지대 콘크리트장벽에 돌파구를 내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북한군 최전방 전투부대들에는 콘크리트장벽을 폭파, 제거하는 전진보장구분대가 각각 편성되었다.
그런데 매우 짧은 시간에 두께가 10~19m나 되는 콘크리트장벽을 폭파하여 돌파구를 내려면, 폭약으로는 안 되고, 핵배낭(SADM)을 써야 한다. 2013년 7월 27일 북한군 열병식에는 무게가 약 30kg로 보이는 핵배낭을 멘 전투원들이 등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데, 실제로 북한군에는 핵배낭려단이 편성되어 있다. 2014년 10월 23일 북한군 최전방 기갑사단들이 쌍방실동훈련 중에 방어선을 돌파하는 남진돌격연습을 진행하였을 때, 북한군 제478련합부대 소속 전진보장구분대가 훈련장에 임시로 설치된 콘크리트장벽과 대전차차단물을 연속폭파하여 돌파구를 열어놓은 바 있다.
47년 전, 이집트군 공병부대는 고압물대포를 집중분사하여 모래장벽을 2시간 만에 무너뜨리고 진격의 돌파구를 열어놓았지만, 오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군 전진보장구분대는 비무장지대 콘크리트장벽과 대전차차단물을 핵배낭으로 연속폭파하고 1시간 안에 돌파구를 열어놓을 것으로 예견된다.
3. 천공을 뒤덮는 불우박타격과 다층방공망
1973년 영토탈환전쟁 중에 이집트군의 진격을 가로막은 두 번째 장애요인은 이스라엘군의 공습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공군은 미국산 아음속전투기 A-4 스카이호크 90대를 보유하였고, 당시 최첨단 초음속전투기로 위세가 대단했던 미국산 F-4 팬텀 전폭기를 128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이집트 공군이 맞서기 힘든 막강한 공군력이었다.
이집트군 공병부대들이 고압물대포를 집중분사하여 모래장벽을 무너뜨리면, 이집트군 기갑부대들이 그 돌파구를 통과하여 시나이반도에서 진격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공군의 대규모 공습을 받아 전멸될 위험이 있었다. 시나이반도는 개활지대이므로, 이집트군 기갑부대들이 은폐할 곳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군은 두 가지 전법을 사용하였다.
(1) 이집트 공군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선제공습으로 이스라엘 공군기지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집트 공군은 1973년 영토탈환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에 이집트에 파견된 북한군 전투비행사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전투기와 폭격기를 출격시킨 선제공습훈련에 열중하였다.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 이집트군이 총공격을 개시하였을 때, 이집트 공군은 미그-21 전투기, 미그-17 전투기, 쑤호이-7 전투기, 뚜폴레브-16 폭격기를 비롯한 200대를 출격시킨 선제공습으로 이스라엘군의 공군기지, 지대공미사일기지, 지휘소, 화력진지, 레이더기지를 파괴하였다.
47년 전, 이집트군은 전투기와 폭격기 200대를 출격시킨 선제공습으로 이스라엘군의 전략거점들을 파괴하였지만, 오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군은 연속적인 불우박타격으로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전략거점들을 파괴할 것으로 예견된다.
불우박타격에서 제1차 타격은 북한군 미사일부대들이 각종 미사일을 집중발사하여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전략거점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북한군 미사일부대들이 선제기습타격을 시작하면, 화성-1, 화성-3, 화성-5, 화성-6, 화성-11을 비롯한 탄도미사일들, 정밀타격용 저고도활공도약미사일, 정밀타격용 순항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미사일 약 3,000발을 1분에 100발씩 30분 동안 집중발사할 것으로 예견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전략거점 한 곳마다 미사일이 평균 30발씩 떨어지는 셈인데, 어떤 생명체도 그런 불우박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북한군 미사일부대들이 각종 미사일 약 3,000발을 동시다발로 발사할 때, 포병부대들도 대구경 방사포와 대구경장거리포를 1분마다 1,000발씩 30분 동안 집중사격할 것이다. 30분 동안 각종 포탄 30,000발이 거대한 불우박처럼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전략거점들에 쏟아질 것으로 예견된다.
아닌 게 아니라, 북한군 화력타격부대들은 타격구역, 타격순차, 타격시차를 각 중대별로 할당받았고, 각 소대별로 타격대상위치좌표를 할당받았다. 이것은 각종 미사일들과 각종 포들의 비행시간, 비행속도, 사거리, 비행방향, 타격면적 등을 컴퓨터로 정밀하게 계산하여 할당한 것이다. 교향악단의 여러 악기들이 울리는 서로 다른 음향들이 공중에서 조화되어 아름다운 교향악을 펼치듯이, 각이한 화력타격수단들이 발사한 서로 다른 탄두들이 공중에서 조율되어 거대한 화력전을 펼치는 것이다. 그들은 지난 수 십 년 동안 그런 전투행동을 연마해왔다. <사진 3>
▲ 위의 사진은 2017년 8월 1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한군 전략군사령부 작전지휘실에서 전략군지휘관들이 작성한 괌포위사격방안을 검토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작전지휘실에 걸린 작전지도 3개가 보도사진에 나타났다. '남조선작전지대'라는 제목이 붙은 작전지도에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해안에 이르는 지역이 4개 타격권으로 구분되었고, 각 타격권마다 사용될 각종 미사일의 종류와 수량이 별도의 도표 안에 명시되어 있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군 미사일부대들은 각종 미사일 약 3,000발을 1분에 100발씩 30분 동안 집중발사할 것으로 예견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군사전략거점 한 곳마다 미사일이 평균 30발씩 떨어지는 셈인데, 어떤 생명체도 그런 불우박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2017년 8월 1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한군 전략군사령부에서 괌포위사격방안을 검토하였을 때, 작전지휘실에 걸린 작전지도 3개가 보도사진에 나타났는데, ‘남조선작전지대’라는 제목이 붙은 작전지도에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해안에 이르는 지역이 4개 타격권으로 구분되었고, 각 타격권마다 사용될 각종 미사일의 종류와 수량이 별도의 도표 안에 명시되어 있었다.
불우박타격에서 제2차 타격은 2012년 4월 15일 북한군 열병식에 등장했던 초정밀 무인타격기 200대가 벌떼처럼 날아가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전략거점들을 또 다시 파괴하는 것이다. 이 무인타격기의 비행속도는 시속 400km이며, 조종사가 실시간 영상정보를 보면서 원격조종하므로, 초정밀타격을 할 수 있다.
<연합뉴스> 2014년 4월 6일 보도에 따르면, 고체추진제를 사용하는 북한의 무인타격기는 작전반경이 600~800km이므로, 군사분계선 이남지역 전체를 타격권에 넣는다고 한다. 무인타격기에 어떤 폭탄이 장착되었는지 외부에서 알 수 없지만, 2013년 3월 2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 밑에 진행된 초정밀 무인타격기 대상물타격훈련장면을 보면, 엄청난 파괴살상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불우박타격에서 제3차 타격은 북한군 항공군이 맡는다. H-5 폭격기 85대, 쑤호이-25 공격기 35대, 공격기로 개조된 쑤호이-7 30대, 공격기로 개조된 미그-15 100대, 공격기로 개조된 미그-17 200대를 비롯하여 폭격기와 공격기 450대가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아가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전략거점들을 최종적으로 확증파괴하는 것이다.
위에 서술된 화력타격시나리오는 47년 전 이집트군의 동시다발-선제공습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화력을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집중적으로, 연속적으로, 정밀하게 퍼부어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공습능력을 제거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2) 1973년 영토탈환전쟁에서 이집트군이 이스라엘군의 공습에 대응하기 위해 사용한 또 다른 전법은 격추전법이다. 전선 후방에 있는 이스라엘군 공군기지들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나타나면, 이집트군 반항공부대가 지대공미사일로 격추하는 것이다. 당시 이집트군 반항공부대는 5중 방공망을 구축해놓았었다. 5중 방공망을 구성한 방공무기체계는 다음과 같다.
- 소련산 S-75 드브나 지대공미사일 (사거리 45km, 요격고도 25km)
- 소련산 S-125 페초라 지대공미사일 (사거리 35km, 요격고도 18km)
- 소련산 2K12 쿱 지대공미사일 (사거리 22km, 요격고도 7km)
- 소련산 9K32 스트렐라 휴대용 지대공미사일 (사거리 3.7km)
- 소련산 고사총 및 고사포 8종 (사고도 2.5~20km)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각종 전투기, 수송기, 헬기 등 387대가 격추 또는 파괴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스라엘군 작전기들은 이집트군 반항공부대가 쏜 지대공미사일, 고사포, 고사총에 맞아 우수수 떨어졌다. 만일 수많은 작전기들을 잃고 패색이 짙어진 이스라엘에게 미국이 전투기 86대, 수송기 12대, 헬기 8대를 긴급히 보내주지 않았다면, 이스라엘군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사진 4>
▲ 제4차 중동전쟁 중에 이집트군 반항공부대는 소련산 지대공미사일, 고사포, 고사총으로 구성된 5중 방공망을 가동하여 이스라엘군 전투기와 전폭기를 격추하였다. 위의 사진은 이집트군 반항공부대가 쏜 지대공미사일을 맞고 격추된 이스라엘군 A-4 스카이호크 전투기 잔해를 촬영한 것이다. 이 잔해는 이집트 수도 까히라에 있는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각종 전투기, 수송기, 헬기 등 387대가 격추 또는 파괴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47년 전 이집트군 반항공부대는 5중 방공망을 구축하여 이스라엘 공군에게 치명타를 날렸지만, 오늘 북한군 반항공부대는 8중 방공망을 조밀하게 구축해놓고, 한국군 공군과 주한미군 공군에게 치명타를 날릴 준비를 갖췄다.
그러면 이제 한반도 군사상황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47년 전 이집트군 반항공부대는 5중 방공망을 구축하여 이스라엘 공군에게 치명타를 날렸지만, 오늘 북한군 반항공부대는 저고도, 중고도, 고고도를 포괄하는 천공 전체에 8중 방공망을 조밀하게 구축해놓고, 한국군 공군과 주한미군 공군에게 치명타를 날릴 준비를 갖췄다. 8중 방공망을 구성한 방공무기체계는 다음과 같다.
- 번개-1 지대공미사일 (사거리 76km, 요격고도 30km)
- 번개-3 지대공미사일 (사거리 25km, 요격고도 2.5km)
- 번개-4 지대공미사일 (사거리 300km, 요격고도 40km)
- 번개-5 지대공미사일 (사거리 200km, 요격고도 27km)
- 번개-6 지대공미사일 (사거리 120km 요격고도 30km)
- 자행고사로케트 (사거리 7km, 사고도 3km)
- 휴대용 지대공미사일 화승총 (사거리 5km)
- 각종 고사총 및 고사포 (사고도 2.5~20km)
자타가 공인하는 것처럼, 북한군 방공망은 전 세계에서 가장 조밀하게 구축된 ‘철갑지붕’이다. 예컨대, 북한군은 10종의 고사총과 고사포를 14,000문이나 배치하였는데, 한 번에 7,000발씩 연속사격을 퍼부어 천공 전체를 거대한 탄막으로 뒤덮을 수 있다.
미국은 스텔스전투기와 스텔스폭격기를 출격시켜 북한의 방공망을 뚫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북한은 스텔스작전기들을 먼 거리에서 탐지, 추적하는 초단파레이더를 가지고 있다. 북한이 보유한 초단파레이더의 탐지거리는 250km이고, 탐지고도는 15km다. 2015년 1월 31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기록영화에서 이 초단파레이더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초단파레이더로 스텔스작전기들을 탐지, 추적하면, 사거리가 300km이고, 요격고도가 40km인 번개-4 지대공미사일을 쏘아 스텔스전투기와 스텔스폭격기를 격추할 수 있다.
4. 마지막 지상전과 마지막 해상전
1973년 영토탈환전쟁에서 이집트군의 진격을 가로막은 세 번째 장애요인은 이스라엘군 전차부대였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영국산 전차를 개조한 소트 전차, 미국산 전차를 개조한 마가취 전차, 미국산 M4 셔먼 전차, 자국산 M-50/M-51 이셔먼 전차를 비롯하여 약 2,30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이집트군 전차는 약 1,700대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집트군은 기갑무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항공륙전대를 대전차무기로 무장시켰다. 이집트군 항공륙전대가 무장한 대전차무기들은 다음과 같다.
- 소련산 9M14 말윳카 대전차미사일 (사거리 3km)
- 소련산 휴대용 RPG-7 로켓탄발사관 (사거리 700m)
- 소련산 RPG-43 대전차수류탄
– 소련산 TM-46 대전차지뢰
시나이반도에 전진배치된 이스라엘군 전차부대들이 이집트군 공군의 선제공습으로 거의 궤멸된 이후에도, 이집트군 전쟁지휘부는 이스라엘군 방어선 후방에 배치된 수많은 전차들이 증원무력으로 몰려올 것을 예견하였다. 그래서 위에 열거된 대전차무기들로 무장한 이집트군 항공륙전대 4개 대대를 출동시켰다. 그들은 수송헬기를 타고 시나이반도 깊숙이 공중침투하여 이스라엘군이 진격해올 것으로 예상되는 통로에 대전차지뢰를 매설하고, 매복하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몰려오던 이스라엘군 전차들은 이집트군 항공륙전대의 매복공격에 걸려들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군 제14기갑려단 전차 110대 가운데 85대가 30분 만에 격파되었다. 기겁을 한 이스라엘군은 제162기갑사단과 제143기갑사단을 추가로 투입하였지만, 이집트군 항공륙전대의 매복공격에 걸려들어 격파되었다. 시나이반도 전선으로 달려온 이스라엘군 전차 700대 가운데 200대가 불과 이틀 동안 파괴되었다. 제4차 중동전쟁 중에 발생한 이스라엘군 전사자 2,250명 가운데 약 1,500명이 전차병들이었다. 이스라엘군 전차부대들이 대패하자, 이집트군 2개 기갑사단은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고속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973년 영토탈환전쟁 후반에 들어서자, 미국이 전쟁에 개입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대규모 군사지원을 주었다. 패색이 짙어졌던 이스라엘군은 미국의 대규모 군사지원을 받으며 재기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렇게 되어 72시간 만에 이집트군의 압승으로 끝날 수 있었던 영토탈환전쟁은 19일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결국 이집트군의 신승으로 끝났다. <사진 5>
▲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집트군은 전차 1,700대를 가지고 있었고, 이스라엘군은 전차 2,300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군은 기갑무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항공륙전대를 대전차미사일로 무장시켰다. 대전차미사일로 무장한 이집트군 항공륙전대는 헬기를 타고 시나이반도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매복공격으로 이스라엘군 전차부대를 타격했다. 위의 사진은 당시 이집트군 항공륙전대가 쏜 대전차미사일에 맞아 파괴된 이스라엘군 전차 잔해를 촬영한 것이다. 제4차 중동전쟁 중에 발생한 이스라엘군 전사자 2,250명 가운데 약 1,500명이 전차병이었다는 사실은 이집트군이 대전차미사일 매복공격으로 이스라엘군 전차부대를 격파하였음을 말해준다.
출처 : 충청메시지(http://www.ccmessage.kr)
출처: https://namu.wiki/w/%EC%A0%9C4%EC%B0%A8%20%EC%A4%91%EB%8F%99%EC%A0%84%EC%9F%81
1. 개요2. 전간기 - 소모전3. 대(大) 복수극의 시작4. 전쟁 경과5. 미국의 장비 지원과 반격6. 결과7. 영향8. 기타9. 둘러보기1. 개요[편집]2. 전간기 - 소모전[편집]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단 6일만에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은 각각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잃어버린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의 인정과, 항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과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 지역을 반환하는 것을 비밀리에 제안했으나 이스라엘한테 영토를 빼앗긴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 8개 국가들은 같은 해 9월 수단의 하르툼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무평화, 무인정, 무협상, 3무 원칙을 공식화하며 단박에 거부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출혈을 강요하고 반환을 압박하기 위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벌였고 이에 양국이 대치하는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 사이에 수년 동안 국지전이 계속되었는데 이를 소모전(حرب الاستنزاف/מלחמת ההתשה)이라고 한다.
전쟁 아닌 전쟁으로 3년 넘게 이어져 온 소모전은 1970년 8월 휴전협상이 타결되면서 끝을 맺었으나 양쪽의 대치는 수에즈 운하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동안 이집트는 주요 밥줄인 수에즈 운하가 폐쇄되면서 경제적 손해가 막심했고 이스라엘 역시 소모전으로 인한 지속적인 출혈에 점점 부담이 가해지고 있었다.
1970년 9월 28일 가말 압델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서방국가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아랍국의 단결을 도모했고, 구태의연한 국내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사다트는 시나이 반도의 일괄적인 반환을 요구한 나세르와 달리 일단 폐쇄된 수에즈 운하부터 정상화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스라엘에게 수에즈 운하에서 20마일(약 32km)만 뒤로 물러날 것을 제안했으나 이스라엘의 무성의한 반응에 결국 전쟁을 통해 시나이를 회복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이스라엘한테 영토를 빼앗긴 주변국과 공조를 강화한다. 하지만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예루살렘을 빼앗긴 요르단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PLO를 지원해 줬다가 오히려 검은 9월로 나라 전체가 뒤집히는 난리가 났기 때문에 이집트에 미온적이었고, 결국 골란 고원 문제로 이스라엘에 이를 갈던 시리아가 또 이집트와 손을 잡는다. 당시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또한 본인의 정치적 위세를 강화하기 위해 대이스라엘 적대 감정을 활용할 여지가 충분했다.
사다트는 군대의 체질과 훈련강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변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소련 고문단을 초빙하고,[2] 이전의 전훈(戰勳)을 연구하여 대응 방법을 연구하고, 최신 병기들을 대거 도입하면서 철저한 훈련과 함께 군조직의 개편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장교단의 경우, 병사/수병/부사관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이전의 귀족적 악습을 타파하고[3] 젊은 대학생들을 장교로 선출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보안에 심혈을 기울여, 6일 전쟁처럼 시작하기도 전에 맞고 뻗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이스라엘 정부도 모사드에서 사전에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을 감지하여 보고했기에 일단은 전쟁에 대비하기는 했으나, 정작 골다 메이어 총리를 비롯한 수뇌부가 지금까지의 연승에서 비롯된 긴장감 상실과 아랍군에 대한 오판으로 인해 이전과 다른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당시 이집트는 진짜 전쟁준비를 숨기기 위해 몇 차례씩 허울뿐인 동원령을 발령했는데, 이스라엘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똑같이 동원령을 내리려할경우 동원령에 소집된 국민들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야 하는 문제가 있어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집트의 동원령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무리였다. 전쟁 개시 직전에 서로 다른 루트들을 통해서 결정적 정보들을 확인한 뒤에도 후술할 외교적 이유로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결정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골다 메이어 총리와 모세 다얀 국방부 장관이 속한 노동당 내각의 발목을 붙잡고 만다.
한편 사다트는 공격할 생각이 없으면서 이스라엘을 긴장시켰던 나세르와는 정반대로 공격할 생각을 숨기고 이스라엘이 긴장을 풀게 만드는 술책을 썼는데, 바로 이스라엘을 상대로 몇 개월에 한 번씩 곧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공갈협박을 날렸던 것이다. 처음에야 여기에 잔뜩 쫄았던 이스라엘이었으나 이집트 측이 실제로는 별다른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이를 일종의 정치적 제스쳐로 파악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공갈 협박만 날리는 상황이 사다트 집권 후 몇년 동안이나 계속되자 이스라엘 측은 안와르 사다트를 그냥 위협만 일삼는 허풍쟁이로 여기게 된다. 심지어 사다트가 4차 중동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날린 진짜 전쟁협박에도 "어디서 구라야?" 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
10월 5일, 이집트에 심어놓은 최고위급 스파이인 아슈라프 마르완[4]으로부터 당장 내일 전쟁이 시작된다!는 정보가 전달되었으나 몇 달 전 마르완이 같은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 때문에 이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는 불투명한 문제였으며, 골다 메이어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간 시점은 전쟁 시작 몇시간 전의 일이었다.[5] 어쨌거나 모사드는 마르완의 경고를 긴급히 메이어 총리에게 전달했고 메이어는 이를 매우 심각한 징조로 받아들여 즉시 장군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하게 했지만 예비군 동원에만 최소 24시간이 걸리는 상황에서 마르완의 첩보는 너무도 늦은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욤 키푸르 당일인 10월 6일에, 이스라엘에서 많은 군인들이 휴가를 떠나고[6][7]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이집트, 시리아 연합군의 전면적인 기습이 시작되었다.[8]
이전 세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이 모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난 것에 비해 이 전쟁에서는 이스라엘군이 초반에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개전 당일,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거대한 모래벽과 영구진지로 구성된 바레브 선을 돌파하기 위해 8천이 넘는 특수부대를 사전에 도하시켜 미리 요새 후방과 이스라엘군의 기동로 근처에 매복시켰고, 철저한 공격준비사격 뒤 운하 도하를 개시했다. 이때 이집트 육군 공병은 독일에서 수입한 고성능의 소방펌프를 동원해 모래벽을 적셔서 무너뜨려버리는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해 이스라엘이 요새 철거에만 이틀은 걸릴 거라고 장담하던 바레브 선을 단 9시간 만에 돌파해버렸다. 해당 작전의 창의성은 기존에는 병역이 면제되던 대학생들까지 입대시켜가며 군 장병들의 질적 향상을 꾀하던 이집트군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모래벽이라고 하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까지 바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국경도발(방어선에 냅다 포격을 가하는 등)에 이스라엘군이 거의 완벽하게 대응해 왔고 심지어 전술핵의 폭발력에도 버틸 수 있을 거란 예상까지 나오던 곳이었다. 이집트군은 이러한 바레브 선의 약점을 꿰뚫었고 사전에 모의실험까지 거친 후 해당 작전을 실행하는 철두철미함을 발휘하였다. 바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모래벽에서 그치지 않고 화공을 위해 기름 탱크를 준비해 두었고 고지대에 콘크리트 벙커를 추가 설치하긴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이 날이 욤 키푸르였기에 해당 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이스라엘군 병력 대부분이 휴가간 상황이었다. 이집트군은 Mi-8 수송헬기로 기습강습을 해 기름 탱크를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군의 화공 전법을 무력화시켰으며 고지대의 벙커의 경우 똑같은 높이의 토산을 쌓아 올려서 그 위에 전차를 올려 콘크리트 벙커를 격파해버렸다. 이 돌파작전에서 이집트군의 병력 8만 명 중 전사자는 단 208명에 그쳤으며, 당시 3만 명 이상의 피해를 예상하고 있던 이집트 수뇌부는 이런 예상외의 대성공에 기뻐서 날뛰었다고 한다. 이후 잘 훈련된 이집트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수비대 요새 근처에 신속 전개하여, 이스라엘군의 기동예비대인 육군 252기갑사단 예하 전차여단들의 진격로를 틀어막고 적극적인 대(對)전차 방어전을 구사한다. 이스라엘군은 반격을 위해 전차 부대를 투입하지만 이집트군은 이미 잘 준비된 방어진지에서 대전차미사일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다. 이집트군은 결국 시나이 반도에 전개된 이스라엘 전차의 60%인 150여 대를 격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게다가 이스라엘 공군조차 이집트 방공군의 지대공미사일에게 하루 만에 전 보유대수의 10%가 넘는 전투기를 상실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어 이전 전쟁을 항상 승리로 이끌었던 공군력에도 기대기 힘들어졌다. 사실 항공전에서 하루 만에 10%의 손실률이면 거의 기록적인 수준으로, 앞으로도 이런 손실률이 지속된다면 항공전역 수행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열흘 내로 공군기를 모조리 상실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초 이런 끔찍한 피해를 입자 지상군 전선이 엄청난 위기에 빠져있음에도, 일시적으로 지상군에 대한 지원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공군의 주요 피해는 이집트 방공군이 보유한 러시아제 신형 2K12 KUB(나토코드 SA-6) 지대공미사일과 23mm 4연장 기관포를 탑재한 '쉴카' 대공기관포 차량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집트 공군은 애초부터 형편없던지라 방공군의 활약이 컸던 것이다.[9]
10월 8일에는 이스라엘에서 2개 기갑사단이 더 투입되었지만 이들 역시 이집트군 대전차미사일의 화력 앞에 혼쭐이 나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전차부대가 보병부대의 지원이나 포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단독으로 진격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이 이스라엘의 인구 문제로 인한 보병의 부족, 그리고 제3차 중동전쟁에서 보여준 이스라엘군 기갑부대의 맹활약에 의한 전차 만능주의 때문이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반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보병의 대전차 공격능력 자체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이집트군이 더 많은 부대를 투입하여 시나이 사막을 가로지르기 전에 일단 그 기세부터 꺾고 보자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군의 계획이었던 것. 이 때문에 공세 주력이었던 2개 동원기갑사단은 아예 사단 보병과 포병이 본토에서 한창 이동 중인 상태에서 전차만으로 선공에 들어갈 정도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이러한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인 편에 속했다. 당시 보병의 주력 대전차화기인 RPG-7은 명중률이 낮고 사거리도 짧았기에 베트남 전쟁 같은 정글이면 몰라도 교전거리가 길게 나오는 시나이 사막의 특성상 이스라엘군은 적 보병의 방어진지 정도는 전차포로 장거리에서 공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이집트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전차전 같은 정공법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던 터라, 이집트군은 RPG보다 더 강한 소련제 AT-3 말륫카(나토코드명 새거Sagger) 대전차미사일을 이미 대거 들여온 상태였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1. 진지에 숨어서 이스라엘 전차를 기다린다. 이때 AT-3는 뒤에, RPG-7은 앞에 겹겹이 위치시킨다.
2. 이스라엘 전차가 오면 AT-3를 쏘고 숨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차의 시야가 생각 이상으로 좁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위에도 서술하였듯이 당시 이스라엘군은 전차의 눈이 되고 서포트를 해줄 보병 없이 전차만으로 돌격했기 때문에 이 전략이 더 빛을 발했다.
3. 엄폐물로 숨으면서 장전하고 장전이 되면 다시 쏘는 식으로 이스라엘 전차를 순차적으로 부순다.
4. 이스라엘 전차가 만약 살아서 엄페물 방향으로 접근하면 파괴력에 비하여 정확도가 떨어지는 RPG-7으로 처리한다.
물론 이스라엘군은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국경에서의 분쟁을 통해 말륫카 미사일의 존재와 그 성능을 파악하고 있었고 치명적인 수준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AT-3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으며,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단점을 이를 뒷받침해줄 기동전략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돌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 대전차 보병의 전술적 역량을 낮게 평가하는 실수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당시 시나이 사막에서 투입 가능했던 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는 참패를 겪었다.[10] 앞서 2일간의 전투에서만 이스라엘군은 300대가 넘는 전차를 잃었고, 골란 고원까지 포함하면 800대가 넘는 전차가 파괴되었다. 훗날 파괴된 전차 중에서 400여 대는 이후 회수해서 수리해 다시 쓸 수 있는 상태였고, 거기다 미국의 긴급원조로 수령한 대량의 패튼 시리즈와 아랍 측의 T-55, T-62 전차도 다수 노획해 종전 후에는 전차 보유수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전차를 젊은 간부의 관이라 부를 만큼 인원손실이 커 노련한 전차 승무원들을 잃은 것은 회복하지 못했으며 전차 보유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 후의 이야기로 전쟁 중이던 당시에는 가히 뼈를 박살낸 치명타를 입은 상태였다.[11][12]
이집트군은 소련식의 조직적인 보병 중심 대(對)전차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이스라엘군을 끌어들였다. 특히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군의 반격에 맞선 이집트군은 이미 전날 밤 운하 일대의 원래 방어책임을 맡고 있던 이스라엘군 만들러 소장의 252기갑사단 전차 전력의 60%를 대전차 방어전에서 격파할 정도로 그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전날보다 더욱 취약한 상태로 공격해 오는 이스라엘군 2개 사단에 맞서 말 그대로 최고의 선전(善戰)을 펼쳤던 것이다. 그나마 이스라엘군의 반격은 이집트군이 진격을 멈추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만드는 효과는 거두어 결국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는다는 당초 목적 자체는 달성했다. 대신 만약 이집트가 작심하고 제대로 밀어붙일 경우 이에 맞서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원래 소련식 군사교리의 특성상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 6.25 때에도 이러한 특성이 보이지만, 중앙 집중화된 지휘체계상 각 제대는 원래의 목표선까지 진출하면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상태를 보고하고 피아 간의 상황을 분석해서 다음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대기하게 된다. 당시 이집트 지휘부는 지난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했던 이집트군이 예상 이상의 전공을 세우자 이것이 이스라엘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이스라엘을 너무 밀어 붙일 경우 미군이 전면개입하거나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13] 그리고 어차피 이집트의 목적도 수에즈 운하 회복과 미국-이스라엘과의 수교였지 이스라엘 전멸이 아니었으므로 더 이상 진격할 필요도 없었다.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지리멸렬해서 상급 지도부가 공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도 여유를 얻어 일부 동원병력을 먼저 시리아 전선에 돌리는 도박수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시나이 전선에서 우세를 차지한 이집트군은 예상되는 역습에 대비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한편, 시리아군 역시 초전에 헬기를 이용한 대규모 특수부대 강습으로 헤르몬 산의 이스라엘군 관측소 겸 진지를 한시간만에 점령하고[14], 기갑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이스라엘군 제188기갑여단의 방어선을 남단에서 수적(數的) 우위로 돌파하며[15][16] 쾌조의 진격을 거듭해 7일에는 요르단 강 가까이에 이르렀다. 시리아군 기갑부대가 골란 고원 서쪽 저편에서 빛나는 갈릴리 호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진출한 것이다.[17]
다만, 이때 시리아군은 소련식 교리에 치중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은 바로 탄약도, 연료도 아직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요단강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부대가,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는 교리를 철저히 지키느라, 자신들의 작전지역을 넘어서 요단강을 도하하여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사실 시리아로서는 승리의 경험이 없다보니 이것이 실제로 진격을 해야하는 상황인지, 이스라엘측의 유인작전인지 구분할만한 전술안을 가진 지휘관이 없던데다, 멋대로 행동했다가 최상층 지휘부에게 찍혀서 숙청당할 위험도 있기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던 것. 이때 시간을 끌지 않고 요단강을 넘어 진격했다면, 이스라엘 군의 동원사단이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날수도 있었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하게 변하자 다급해진 이스라엘군은 일단 가장 가까운 시리아군부터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당장 이집트 방면은 시나이 반도를 제물(祭物)로 바치면서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있었으나, 시리아 방면은 골란 고원이 돌파당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시리아군의 공격 앞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용병력을 대부분 골란 고원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골란 고원의 방어선 북단을 담당한 이스라엘 현역 부대인 제7기갑여단, 그중에서도 카할라니 중령이 이끈 제77전차대대는 1:10의 수적 열세하에서 몰려드는 시리아군 기갑부대를 말 그대로 혈전(血戰) 끝에 격퇴하면서 동원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으로 투입될 시간을 벌었다.
자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마지막 보루인 미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8일 밤 골다 메이어 총리는 전술핵탄두 조립을 승인했다. 특급 비밀이어야 할 핵무기의 준비는 그다지 비밀스럽지 않게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여차하면 이집트와 시리아에 쏴버리겠다는 협박이자,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되는 것을 미국이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계산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9일 오전 미국 국무부에 날아들었다.
이스라엘이 대놓고 핵무기를 조립하는 반응을 보이자 미국은 소련에 연락을 취해 접촉하였다. 최악의 상황인 이스라엘이 핵공격을 실제로 실시할 경우, 소련은 이집트에 핵무기를 공급해서 핵 보복을 시행하도록 허락하여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을 공멸시키고 이후 미국과 소련은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주 내용이다. 즉, 여차하면 미국과 소련은 양국의 전면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버섯구름 아래로 사라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외교 안보 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직하며 외교정책을 장악했던 헨리 키신저는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제3차 중동전쟁의 후속편을 찍어버리면, 이후 미국 입장에서 아랍국가들을 회유하여 평화협정을 주도,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게 될 여지가 아예 사라지기 때문에 초기에 대대적 지원을 꺼려했던 것이다. 전쟁 초기 키신저의 큰그림은 이스라엘이 아예 망하지 않을 만큼만 지원, 이스라엘이 아랍군을 1967년 휴전선까지 다시 몰아내면 그때 정전을 중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지원을 받긴 받았으니 군말할 수 없고, 아랍 측도 미국의 영향력으로 멸망을 모면하게 될 테니 미국이 중동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이와 같이 자신만만했던 키신저였지만 개전 초기 전황이 이스라엘에 불리해지자 지원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랍측의 보이콧을 의식한 기업들이 차터 항공편을 내 주지 않았고, 군사적 충돌에 예민했던 국방부도 협조를 거부해 첫 1주 간은 엘알 항공기 7대가 미국까지 날아와 장비를 직접 가져가는 것으로 충당해야 했다. 미국은 전선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12-13일 사이 영국에 부탁하여 휴전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사다트의 완강한 거부로 실패, 전쟁이 생각보다 장기전으로 돌입될 위험에 처하자 14일경에야 최대물량 지원을 시작하였다. 오히려 그동안 워터게이트 사건에 정신이 팔려있어 중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닉슨이 당장 하라고 밀어붙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리처드 닉슨 행정부였지만 그 대응은 빨랐다. NATO 최전선, 즉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신예 M60A1을 포함한 대규모 전차와 항공기, 막 배치가 시작된 스마트 폭탄을 비롯한 정밀유도 병기는 물론, 일설에는 핵무기까지 포함된 대규모 지원이, 봉쇄된 바다와 지상을 넘어 항공로를 통해 날아들었다. 공장에서 갓 나온 F-4들이 공중급유기의 급유를 받으며 이스라엘까지 날아왔고 대서양과 지중해에 전개해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A-4를 잔뜩 싣고 와 이스라엘 근해에서 이함시켜 배달해주었다. 이 무제한 작전(니켈 그라스 작전)은 33일 동안 계속되었다. #
여기까지 이스라엘이 치른 전술적 대가는 막대했지만 지난 3차 중동전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선제공격을 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21] 미국의 압박으로 2차 중동전에 이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외교적 패배를 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략적으로는 아랍 측의 공격 가능성을 48시간 전에 파악하고도 선제공격보다 먼저 공격을 당하고, 그 뒤에 방어전에 들어간다는 도박수[22]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둬 이것으로써 다시 전략적인 승리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군을 재정비해 반격에 성공한 것도 이스라엘군의 전술적 승리라 하겠다. 무기를 줘도 운영하지 못해 패하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골란 고원 작전 |
미국의 지원에 더해 예비 병력의 바닥까지 긁어모은 3개 동원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에 전개된 10일경,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에 대한 전면적 반격(Counter-offensive)을 실시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완전히 박살난 시리아군은 500대가 넘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시리아 공군 역시 10일 마지막 결전을 노리고 대규모로 출격했으나 이스라엘 공군에 격퇴당해 시리아 전선은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는 상황으로 돌변했다.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군의 포격이 떨어지고 있었고 시리아 정부는 일대 패닉에 빠졌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는 요르단에 대한 성의와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소련의 으름장으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암만-다마스쿠스 가도에서 진격을 중단했다.[23]이 과정에서 시리아가 하도 박살이 난 관계로 이라크군과 요르단군도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과의 전투에 일부 참전했다. 다만 이스라엘도 애초에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오면 요르단이 아랍 연합국을 구원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고, 요르단도 전쟁을 요르단 본토 쪽으로 확대시키지 않으려 했기에 투입한 병력의 수가 적었다. 이라크군은 투입되자마자 이스라엘군에게 관광당하고[24] 공군은 시리아를 도와주러 급파된 소수의 요르단군 전투기와 오인교전을 벌이다가 패해서 퇴각하는 등 시리아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전투력 면에서는 별 도움은 안 되었던 모양이다. 사우디군도 일부 참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 주장은 여단 규모 부대를 골란 고원에 파병해서 시리아의 방위를 지원하긴 했으나 파견 시점이 늦어져서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나 시리아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시리아 영내 작전기간 중 미국제와 영국제 장비를 상당량 노획했는데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조기 참전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시나이의 이집트군은 지난 제3차 중동전쟁과는 다르게 시리아가 말아먹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에서 뛰어나와 이스라엘로 진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역시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정면대결은 무리였는지 아주 박살이 나버렸고, 16일 새벽 아리엘 샤론 소장(나중에 수상이 된 바로 그 사람)이 지휘하는 이스라엘군이 이집트군의 전투지경선을 파고들어 수에즈 운하를 기습도하해 텅텅 빈 수에즈 서안으로 밀고 들어가 수에즈 운하 남반부의 이집트 3군 병력을 포위하면서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3군을 포위 섬멸함으로 이집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려 했지만 이스라엘을 기사회생시킨 미국과 이집트, 시리아의 뒤에 있던 소련이 개입했다. 두 나라는 모두 이스라엘이 3군을 물리적으로 섬멸하여 이집트에 불필요한 굴욕을 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천명했으며 이스라엘이 포위된 3군에게 식량, 의료지원을 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키신저는 만약 이스라엘이 3군을 섬멸하려 한다면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이집트 편으로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선을 넘는 순간 이스라엘이 얻은 모든 성과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이러한 중대한 개입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대한 결정적인 설욕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외교적 승리만 거둔 수에즈 전쟁이나 군사적으로 재앙적으로 가깝게 패한 6일 전쟁과 달리 이집트 쪽이 외교적, 군사적으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스라엘군이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던 지상전과 달리 해상전에선 이스라엘 해군이 압승을 거두었다. 개전 첫날 저녁 시리아 라타키아항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자국산 가브리엘 함대함미사일을 이용해 시리아 해군 소속 미사일 고속정 3척과 어뢰정 1척, 소해정 1척을 격침시켰고 시리아군이 발사한 스틱스 미사일은 ECM에 의해 모조리 빗나가버렸다. 그리고 이후 발팀에서 벌어진 이집트 해군과의 결전에서도, 이스라엘군 고속정 6척이 이집트군 고속정 4척 중 3척을 격침시키는 압승을 거두었다.
[NHKBS1다큐] 되살아나는 악몽 - 1973년 알려지지 않은 핵전쟁 위기 (2019)
개전 초기 궁지에 몰리게 된 이스라엘은 자국의 핵미사일 제리코1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이집트 또한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핵탄두가 탑재가능한 스커드 미사일 B형으로 반격할 준비를 해 핵전쟁으로 확전될 양상을 보인 무시무시한 전쟁이었다. 게다가 양측을 지원했던 미국의 닉슨과 키신저, 소련의 브레즈네프와 각료들은 서로의 잘못된 판단과 오해가 쌓여 이스라엘과 이집트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초강대국간의 전면 핵전쟁 직전의 상태까지 갈뻔 했다. 이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대의 전면 핵전쟁 위기였던 것이다.
위 다큐멘터리의 내용대로 24일 밤-25일 새벽 사이 브레즈네프의 일방적 파병 위협, 백악관의 데프콘 3 발령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번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에서 주요 증거로 제시한 소련의 핵물질 운반 관련 보고는 26일에 처음 들어왔기 때문에 데프콘 3 발령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소련이 이집트에 핵무기를 제공하려고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높지 않은데, 세 가지 이유에서다.
1. 소련 해군의 지중해상 핵물질 운반은 빈번히 있었으며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2. 소련이 아예 실전 사용을 작정하고 핵무기를 옮겼다면, 미국이 시퍼렇게 눈 뜨고 감시중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시키지 않고 비밀리에 항공수송했을 것이다.
3. 핵무기에 극도로 민감한 소련이 공산권도 최우방도 아니며, 심지어 전쟁 중인 제3국에 핵무기를 넘겨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그나마 비슷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핵무기의 통제권은 철저히 소련이 가지고 있었다.[25]
결론적으로 두 번에 걸친 정전 시도가 무산되자 위험천만한 미-소 대립 양상으로 치닫긴 했지만, 미국에서 소련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데프콘이 상향조정되었다는 주장은 과장에 가깝다. 여러 학자들도 굳이 핵무기가 아닌 재래식 병력도 소련이 실제로 투입했을 가능성이 적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24-25일의 위기는 브레즈네프의 과장 섞인 일방적 개입 위협과 극도로 긴장을 탄 키신저의 강경 대응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26] 우발적 핵전쟁 문서에도 나와있듯, 그 이후 사소한 오해나 경솔한 행동이 누적되어 핵전쟁이 발발했을 위험은 충분하지만.
이스라엘군은 그렇게 자랑하던 정예 기갑부대와 공군이 이스라엘군의 자만심과 방심으로 인해 이집트 대전차 보병들과 방공군에게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다. 그리고 일이 닥치면 자연히 해결된다는 임기응변적 사상과 예비군을 빨리 소집하면 된다는 현역병 최소화 사상이 동시에 파기된다. 이는 실제로 전쟁에 돌입하니 예비군이 동원 완료되는 72시간을 소수의 현역병이 다수의 적군을 상대로 버티지 못해서 파국이 일어났으며, 후방에 비축해둔 물자도 일선부대로 제대로 수송되지 않아 곤란을 겪었다. 전후 탈 장군(메르카바 전차 개발로 유명하다.)에 의하면 이스라엘군이 소모한 각종 탄약은 비축되어 있던 물량내였고 유일하게 175mm 포탄(M107 자주포)만 비축분을 다 소모하고 미국의 긴급지원포탄까지 사용했을 뿐 105mm 전차포탄의 경우 약 30만 발의 비축분 중 절반 정도를 소모했다고 한다. 급박한 전황 속에 보급체계도 혼돈에 빠져 급한 대로 전방 탄약고들의 탄약들이 우선 일선부대에 공급되어 소모된 후 후방 비축탄들이 보급대의 트럭에 실린 채 원활하게 보급되지 않아 일선부대들이 탄약 부족에 시달린 것이다.
무엇보다 극심한 소모전을 겪고 나니 세 집 걸러 한 집 꼴로 집안 남자들이 죽어서 돌아오는 끔찍한 경험을 하였다. 이때 다수의 이스라엘군 장교와 장군들이 전사해서 여단장과 대대장, 중대장이 전사하지 않은 부대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에 이스라엘은 사회적으로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된다. 사전에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난 여론이 빗발쳐 이스라엘 의회에서는 전쟁 대비 실패에 대한 조사를 위해 아그라나트 위원회가 구성되어 청문회를 벌였고,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모세 다얀 국방장관은 하루아침에 나라를 말아먹을 뻔한 졸장이 되어 사직서를 내야만 했다[27]. 전쟁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은 간신히 승리를 거두고 메이어는 총리직은 유지하긴 했으나, 결국 새 내각이 구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어 역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임해야만 했다. 그와 더불어 수많은 전쟁 영웅들, 이스라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장성들이 되려 범죄자들로 몰리면서 많은 수의 별이 떨어지고 배신감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난 장성들과 고급 장교들의 수도 상당했다. 이스라엘군에서 가장 미약하고 천대받던 해군만이 라타키아 해전의 승리 덕분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중동의 지역강국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무너졌으며, 언제든지 전멸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이스라엘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이는 비교적 온건파인 노동당 내각을 무너뜨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과격파들 간의 난맥상을 낳게 된다. 이스라엘의 군사전략은 다시 6일 전쟁 때 처럼 외부의 위협이 들이닥치기 전에 예방적으로 선제 공격으로 회귀했고, 이는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에서 증명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F-15 전투기를 해외도입국 중 세계 최초로 도입하고, 자국 사정에 걸맞는 메르카바 전차를 개발하는 등 무기 도입 과정에서 욤 키푸르 전쟁의 뼈저린 교훈을 대폭 반영했고, 1982년 레바논 내전에서 일방적으로 시리아군을 격파하며 복수를 단행한다.
한편, 이집트는 놀라운 선전(善戰) 덕에 협상 테이블에서 당당한 기조를 유지했다. 사실 이스라엘군이 반격하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는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이집트 역시 전보다 훨씬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보다 더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는 사실은 지난 전쟁과 똑같았고,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무릎꿇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사다트는 이스라엘과의 화평정책으로 외교정책을 180도 선회했다. 결국 이집트에게 입은 피해와 이집트의 전향적 태도에 이스라엘이 한 발 양보해 1974년 시나이 잠정 협정으로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다. 그 후 몇 년에 걸친 협상 끝에 지미 카터 행정부 때인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워싱턴 D.C. 협정으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 후 시나이 반도는 1982년 완전히 이집트의 손에 돌아오게 되었다. 사다트 대통령은 이 공로로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과 함께 78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지만,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체결에 반발한 이슬람 과격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리고는 전쟁 중에 활약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권좌에 앉아 30년간 집권하게 된다.
이는 아직도 골란 고원을 못 찾은 시리아와 비교되는데, 사실 골란 고원의 전략적 가치는 단순한 완충지대인 시나이 반도와는 다른 성격이 있다. 골란 고원을 차지하면 고지대에서 이스라엘 영토를 내려다볼 수 있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요르단 강의 수원을 차단하여 이스라엘의 목을 죄는 게 가능하게 되기 때문. 단 이 경우 요르단도 같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방어에 성공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한 이집트도 전략적으로 성공을 이뤘다고 할 수 있지만 시리아는 빼도박도 못하게 완벽한 패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이집트는 그동안 한번도 제대로 이기지 못한 적에게 크게 한 방 먹이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는 점을 근거로 이 전쟁을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으로 대대적으로 기념한다. 욤키푸르 전쟁이 발발한 10월 6일은 이집트의 국경일인 국군의 날로 지정되어 있으며 10월 6일(السادس من أكتوبر), 또는 라마단 10일(العاشر من رمضان)[28]이라는 지명이 이집트 곳곳에 존재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협정을 체결하면서 시나이 반도를 포기한 데에는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는데 우선 시나이에 사는 베두인 유목민에게 자치권을 주면서 달래고 유전 탐사 등 시나이 반도 내 여러 지하자원 개발을 실시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여러 곳 건설하는 등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점령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통치 자체는 꽤나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전쟁 직후 닥친 오일 쇼크로 인해 이스라엘 경제가 휘청하면서 안그래도 군사비 확보를 위해 쩔쩔매는 이스라엘이 막대한 돈을 들여 이스라엘 본토 면 적에 3배에 달하는 시나이 반도를 개발해야 할 동기를 상실하였다. 또 시나이 개발을 위해서는 인구가 필요한데 당시 1980년 당시의 이집트의 인구는 약 4500만 명이었던 것에 반해 이스라엘 인구는 고작 390만 명에 불과하여 이스라엘은 부족한 인구를 늘리기 위해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여기 유대인들은 당연히 위험한 데 오기 싫어하여 거부했다.[29][30] 동원 병력 또한 차이가 났는데 이스라엘은 예비군까지 포함해서 총력전으로 열심히 긁어모은 병력이 41만 5천 명이었던데 반해 이집트 주도의 아랍 연합군 측은 백만이 넘었고, 이것도 전력을 동원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 없이 이스라엘군만으로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을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에서 밀어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31] 이는 이집트가 6일 전쟁 이전 영토를 모두 차지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미국과 소련이 정전에 합의하자, 이스라엘과 이집트도 협상에 들어가 국경선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제4차 중동전쟁은 여러 가지 일화를 만들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수출을 금하는 바람에 오일쇼크가 발생해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았다.[32] 이때의 오일쇼크로 이스라엘 경제도 큰 타격을 입어서 1970년대 중후반에 두자릿수대, 1980년대 상반기에 세 자릿수대 인플레이션으로 경기침체를 겪게 되었다. 특히 1984년 당시의 물가상승률은 445%를 기록하여 중남미 국가들을 제치고 세계 최악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이 탓에 1977년 총선에서 리쿠드가 집권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를 내주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인플레이션 문제는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이미 위력을 보여준 지대공미사일은 여기서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미국에 자극을 주어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부활하는 데에 기폭제 역할을 한다. 또한 이전까지 무적을 자랑했던 전차부대가 대전차미사일에 농락당하면서, 전차 무용론까지 등장할 정도로 군사학계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제기된 전차 무용론은 보병 등의 지원 세력이 없는 전차부대의 단독 공격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이 골자이며, 보병-전차 합동 전술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었다. 또한 전차의 장갑 강화와 정밀 FCS 도입을 골자로 한 3세대 전차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쟁의 당사자인 이스라엘군에서는 단시간에 숙련된 기갑병력이 쓸려나간 뼈저린 교훈으로 주력 전차인 메르카바 전차의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메르카바의 특징인 보병 탑승 능력과 승무원의 생존성에 대한 집착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개전당일 이스라엘 공군의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대공전력 중 SA-6에 대한 ECM 미비와 이스라엘 해군의 스틱스 교란 성공은 이후 서방, 특히 미국의 ECM 및 ECCM 개발 집착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즉, 현대전과 근미래전의 다양한 무기체계 및 전술 개념과 그 효용이 이 전쟁에서 확고해진 것이다.
또한, 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주변의 여러 아랍 국가들 중에서 유달리 이집트와 과하게 적대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정확히는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할 수 있는 세력과의 적대를 꺼리게 되었다. 건국 이래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던데다 환골탈태한 이집트에게 제일 피해를 많이 본 뒤, 이집트만 배제시켜도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월등히 유리해짐을 깨달은 것이다. 거기에 사다트와 무바라크 정권도 이스라엘과 크게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고 있어, 시나이 반도 쪽은 그나마 평화로워졌다.[33] 2018년 경, 시나이 반도의 다에시를 소탕하기 위해 이집트군이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했는데 이스라엘을 자극할 소지가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은 이를 묵인하며 오히려 협력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21세기에 들어 역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 가운데 군사력이 이스라엘에 비해 뒤쳐지지 않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크게 개선하였다. 현재 이스라엘과 무력을 포함한 분쟁을 겪는 국가는 레바논이나 시리아같은 중동 내에서도 군사력이 한 수 아래이거나 혼란속에 빠진 국가들이며 그 이외에는 이란, 이라크, 오만, 쿠웨이트, 기타 북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국경을 맞닿지도 않으며 거리가 멀어 실제적인 군사력 투입이 서로 무리인 국가 정도다.
인구가 적어 전쟁을 수행할 인원이 늘 부족한 이스라엘군이지만 이 전쟁에서의 병력 부족은 여러모로 치명적이었고 이를 벌충하기 위해 징병제는 꾸준히 강화되었다. 하지만 여성까지 징병하고 3년 가까운 기간을 청년들을 군대에 붙잡아 놓고 있어 이스라엘 사회가 군국주의, 근본주의에 경도되고 보수화, 극우화가 진행됨에도 징병이 면제된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인 하레디가 사회적인 혜택에 힘입어 꾸준히 늘어나고 젊은이들의 군 기피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징병 가능 인원이 계속 줄어들자 결국 반발을 무릅쓰고 하레디에 대한 징병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제4차 중동전쟁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에 시큰둥했고 오히려 중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트러블메이커 취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미국이 대놓고 이스라엘 편을 들면서 2020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밀월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몇 년 뒤 미국의 주요 중동 파트너인 이란 팔라비 왕조가 붕괴하면서 더욱 이러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걸프 전쟁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주요 우방이 된 이후에도 미국-이스라엘의 밀월관계(라기보다는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친 이스라엘 정책은 이스라엘과 관계가 험악한 중동 주요 국가가 미국을 더욱 혐오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미국의 중동 정책에 운신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 정계에서도 맹목적인 이스라엘 편애와 지원이 얻는 이득(이스라엘과의 관계 유지, 미국 내 유대인의 자본 및 지지 확보)에 비해 손실(석유, 중동에서의 외교 전략의 한계, 중동 및 이슬람계 테러 조직의 준동 등)이 크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조금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은 있었으나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오히려 더욱 강해진 친 이스라엘 외교 정책을 꺼내들면서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34] 그러나 2020년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낙선하고, 중동 이슬람권과의 관계개선을 주창하는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 역시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해졌다.
9. 둘러보기
장 성스럽게 여겨지는 날이기도 하다.[2] 소련이 이스라엘을 몰아내는 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빡친 사다트는 개전 직전에 소련 고문과 기술자들을 모조리 내쫓아버렸지만, 개전 이후에도 소련제 무기가 이집트에 계속 지원되는 등 소련의 영향력은 이후에도 일정 부분 유지된다. 사실 소련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당시 시대를 고려하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을 자극하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3] 단순히 병사들을 막 부려먹는 정도가 아니라, 똑똑해지면 다루기 어렵다면서 교범 교육을 중지시키고 인간 이하의 뭔가로 보며 학대하고 부려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구 일본군의 영향을 받았던 쌍팔년도 한국군처럼 소련군의 영향이라도 받았던 모양. 이런 생각이 장교들의 머릿속에 자리잡혀 있었으니 이집트군의 전투력이 개판인 것도 당연했다.[4] 1944~2007. 이집트의 전 대통령 나세르의 사위이며 사다트 대통령의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전쟁 이후 스파이 행각이 드러났으나 처분은 해외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정작 본인은 런던에서 살면서 조국에 가고 싶어했으나 2007년 역사학자들과의 인터뷰를 코앞에 두고 호텔에서 떨어져 죽은 체로 발견되었으며 시신이 이집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5] 이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마르완에 대해 사다트의 기만전술과 연계하여 이스라엘에 양치기 소년식 작전을 시도한 공작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이스라엘(특히 모사드)에서는 최고의 모사드 정보원이었다며 서로 자기네 요원이었다고 싸우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들어지고 유족들 증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꼭 좋아한 것도 아니라고. 나세르가 죽고 찬밥이 되어버린 터에 배신한 것 뿐이라는 말도 많다. 하지만 나세르 사망 이후 찬밥이란 주장은 철저한 거짓으로, 사다트는 집권 과정에서 나세르의 구 측근들을 숙청하고 새로운 정보 책임자로 마르완을 기용하였다.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모사드는 그의 활용 가능성에 주목하였는데 나세르 이후 찬밥이 됐다는 주장은 마르완을 실드치기 위한 사실 관계 왜곡에 해당한다. 뭣보다도 마르완은 나세르가 죽기도 전인 1970년에 이미 모사드에 자기 발로 찾아가서 첩자가 된 상황이었다. 아슈라프 마르완의 이중첩자 여부 논란에 대해서는 2019년작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앤젤의 추락'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앤젤은 당시 모사드에서 붙여준 마르완의 암호명이다.[6] 속죄일은 이스라엘의 거국적 공휴일이며, 이 기간에는 그 어떤 노동행위도 허용되지 않고 금식과 종교적 행사가 주를 이룬다. 심지어 유태인 출신 스포츠 선수들이 욤 키푸르를 이유로 경기를 거부한 경우도 있을 정도.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의 행크 그린버그와 샌디 코팩스, 숀 그린이 대표적이다. 특히 숀 그린은 메츠 시절 팀이 내리막길을 타고 있던 시기에도 속죄일에 결장을 고집해 극성맞은 그 뉴욕 언론으로부터 대차게 까이기도 했다. 카할리니 중령의 회고록을 보면, 욤 키푸르 당일 개전 소식을 듣고 급하게 부대로 차를 몰고 가는데 길가의 소년들이 욤 키푸르에 뭐하는 짓이냐며 욕을 하고 돌멩이를 던지려 했다고 할 정도.[7] 이때 이집트군은 인구가 적어 전시 동원 체제에 의존해야 하는 이스라엘군의 약점을 역이용, 개전 이전부터 한 달에 한 번 씩 국경지대에서 대규모 기갑훈련을 벌였다. 그 결과 이집트군의 침공에 대비해 산업체의 청년들을 징집해야 했던 이스라엘의 경제는 그야말로 마비될 지경이었고, 결국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본격적 침공 시 전시 동원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이스라엘군이 피로에 지쳐 방심하고 있을 때 이집트군이 본격적으로 선제공격을 한 것.[8] 이 외에 이라크, 요르단,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리비아는 당시 최고 장교 중 한명인 칼리파 하프타르도 참전시켰다.)도 지원군을 보냈다.[9] 이때 치명적인 약점으로 이스라엘 공군의 A-4 스카이호크는 RWR이 없었으며, F-4 팬텀 II의 RWR은 신규 장비인 SA-6 지대공 미사일 레이더 주파수가 등록되지 않아 울리지 않았다.[10] 말륫카같은 1세대 대전차 유도탄들은 제 2차 세계대전때부터 있었지만, 평원에서의 대규모 대전차전은 사실상 여기가 처음이었다. 대전차포의 쇠퇴 이후 한동안은 장거리에서 전차를 격파하기 힘들었다는걸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방심이 제대로 찔린 결과물.[11] 당시 이집트군은 그야말로 맹훈련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군 전차병들의 피해가 더 컸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의 M48 전차들은 유압식 회전장치를 사용했기 때문에 미사일 맞으면 그대로 불이 붙어 내부 전체를 구워버렸다. 거기다가 불 타 죽어가는 전우들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무전을 통해 들어야 하는 이스라엘 전차병들의 심리적 타격도 컸다.[12] 이전까지 아랍군은 장전법을 몰라서 한발 쏘고 전차에서 도망가는일까지 있을 정도로 훈련이 부족했다.[13] 당시 이집트 수뇌부도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보유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하고 있었다.[14]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의 전투력을 얕보고 이런 작전을 펼치리라 예상하지 못했는데 시리아군이 과감히 헬리본 작전을 수행하면서 제대로 허를 찔린 것. 해당 산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 이스라엘군이 불과 11명 밖에 없을 정도로 궤멸당했다. 패닉에 빠진 이스라엘군은 지난 전쟁 때의 아랍 병사들의 추태처럼 도망다니거나 그대로 숨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5] 이때 시리아군 전차병들의 숙련도도 크게 상승해서 800m 거리 밖의 이스라엘군 전차를 정확히 타격했다고 한다. 시리아군 전차병들의 숙련도를 얕보던 이스라엘군 전차병들은 일대 패닉에 빠졌다. 거기에다가 동료 전차들이 격파되면 그대로 후퇴하거나 심지어 장비를 유기하고 도망치던 지난 전쟁과는 다르게 이 때의 시리아 전차병들은 정신 무장도 탄탄하게 되어서 난전에도 굳건히 진격해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보였다.[16] 이때 188바라크 기갑여단의 피해는 다른사람도 아닌 무려 여단장과 부여단장이 전사할 정도로 사실상 전멸했다.[17] 시리아군은 저항이 거센 요새는 우회하면서 주요 전략 거점을 신속 점령하는 전격전 교리를 구사했다. 지난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전격전을 그대로 되갚아준 것이다.[18] 별로 안 믿기지만, 골다 메이어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에 중도 좌파 출신에 속했다.[19] 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전사자가 1천 명도 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초비상이었다. 이에 이집트군은 전사자 약 3,540여 명, 부상병 8천여 명을 기록하여 피해는 조금 더 컸지만, 종전(從前)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를 이스라엘에게 안겨줬기에 크게 만족했다.[20] 이 내용과 달리 메이어 총리는 워싱턴을 방문하지 않았다. 『Crisis』에서 키신저는 당시 주미 이스라엘 대사였던 심하 디니츠(Simcha Dinitz)가 메이어 총리의 방문, 닉슨과 1시간 면담을 요청해 왔으나 닉슨과 상의하지도 않고 단숨에 거절했다고 밝혔다. 군 최고 통수권자가 긴박한 상황에 하루 이상 자리를 비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메이어 총리가 미국에 있다는 소식이 새어나갈 경우 별 움직임 없이 보고만 있던 레바논, 요르단 등 주변국들도 공세에 가담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원 요청은 주로 디니츠 대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디니츠도 이와 같이 회고했다.[21] 이스라엘 측은 아랍측이 전쟁발발 전까지 온갖 협박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선제공격을 옹호하려 들지만, 국제법상 외교적 모욕이나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 개전의 명분이 되지는 않는다.[22] 원래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 시나이 사막이 가로막는 이집트 방면을 제외하고는 작전 종심이 좁은 편인데다가, 적대적인 국가들로 3면이 포위되어 있고, 현대전에서는 동원령이 먼저 발령되는 쪽이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당한 1차 중동전을 제외하고 이스라엘의 기본전략은 선제공격으로 상대의 전력을 먼저 분쇄한다는 것이었다.[23]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영내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흑인 병사들을 포로로 붙잡게 되는데 이들은 모로코군이었고 이스라엘은 이를 통해 다마스쿠스를 점령할 경우 아랍 전체+소련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러나게 된다.[24] 이라크군은 격전지역에서 부대를 이동시키면서 첨병조차 배치하지 않아서, 이스라엘군은 소수의 특수병력을 헬리본으로 투입하여 이동하는 적 기갑장비의 첨단과 최후미를 공격해 격파하여 이동을 막은 후, 다시 활동을 시작한 공군의 A-4를 불러 폭격으로 전멸시켰다. 그런데 이게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똑같은 작전에 이라크군이 당했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25] Kumaraswamy, Revisiting the Yom Kippur War[26] 당연히 데프콘 상향 결정을 내릴 당시의 키신저는 소련이 진짜 개입할지는 알 수 없었다.[27] 다얀 입장에선 좀 억울한 것이, 이스라엘 군부 안에서 이집트의 침공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우려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다얀이었다. 이스라엘 군사정보부 AMAN은 시나이 반도 방어 책임자 만들러 장군의 보고를 비롯하여 이집트와 시리아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계속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슈라프 마르완을 통해 입수한 이집트 작계에 의하면, 이집트군이 충분한 파일럿 없이는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집트군이 치장물자를 꺼내서 배급하는 상황에도 오로지 훈련일 뿐이라고 철저히 무시했다. 다얀은 이집트의 동태에 우려를 표하며 수에즈 운하 동안에서 철수한다는 가장 전향적인 타협안까지 제시하던 인물이었고 전쟁 직전에도 유럽 순방 중이던 골다 메이어의 긴급 귀국을 추진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결국 정보부의 판단을 수용하고 말았으며, 정작 전쟁 발발 직후 20만명 이상을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며 5만명의 부분적 동원만으로 사태 대응이 가능하다고 보는 치명적인 오판을 하고 말았다.[28] 1973년 10월 6일이 이슬람력으로 1393년 라마단 10일이다.[29] 이는 이스라엘 본토에 사는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시나이 반도로 이주하는걸 꺼려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 주요 무역항으로 육성할 신도시인 야미트(ימית)를 건설했는데 당국이 상주 인구를 20만 명까지 잡고 야심차게 계획을 세운 것과 달리 철수 직전까지 이주해 온 이스라엘인은 3천명도 채 안 됐다. 사막이 99%인 시나이 반도에서 상대적으로 주거 환경이 훨씬 나은 지역인데도 결과가 이랬다.[30] 미국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건국과 유지에 큰 지분이 없다. 이스라엘 건국에 가장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한 사람들은 동유럽 유대인들과 미즈라힘,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고, 북미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은 (건국 시점에서) 만 명은 고사하고 5천명도 안된다.[31] 미국이 병력과 무기를 이스라엘에 쏟아붓고 있을 때, 소련 역시 이집트와 시리아에 무기를 지원하고 있었다.[32] 오일쇼크는 단순히 경제를 뒤흔든 수준이 아니라, 2차세계대전 전후로 계속되던 고도성장기 시절인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박살내고, 복지국가 정책이 쇠락하고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33] 소련제 무기 일색이었던 이집트군도 미국과의 수교 정상화 이후 F-4 팬텀 II와 F-16 전투기에 M1A1 전차들을 들여오는 등 미국제 무기들을 대폭 들여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계심은 여전해 미국에 대한 로비를 통해 이집트에 대한 AIM-120 판매를 제한하도록 해 F-16이라는 우수한 전투기임에도 AIM-7을 운용하고 있을 지경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집트는 프랑스 라팔 전투기의 MICA 그리고 러시아 MiG-29의 R-77을 통해 제대로 된 능동 중거리 공대공 유도탄을 갖추게 되었을 정도다. 이집트군 M1A1 사양도 열화우라늄 복합장갑 삭제 등 여러가지 부분이 다운그레이드 된 수출형이며, 당연히 F-35와 같은 스텔스 전투기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로비 외에도 이집트의 독재 정치로 인한 미국 의회 차원의 인권제재에 러시아제 무기들도 운용하고 있다는 특성상 선뜻 미국이 자국의 첨단 무기를 팔기 어려운 점이란 것도 한 몫한다.[34] 트럼프 정권이 다른 때 같으면 그야말로 미국과 이스라엘 모두에 날벼락이 떨어질 만한 이런 행보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사우디와는 나름대로 관계를 개선했고 레바논이나 시리아는 군사력이 약하다. 이란이 이스라엘에 협박을 하고 이스라엘도 지지않고 이란을 자극하지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정면 대결을 막고 있다. 그러니 미국과 이스라엘이 다른 중동 국가들의 속을 긁어 놓을 만한 일을 벌여도 사우디와 이집트만 반발하지 않으면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셰일가스 혁명으로 중동 산유국의 눈치를 덜 보게 된 이유도 있다.[35] 소설판에선 전황이 너무 불리하자 핵폭탄을 전투기에 장착시키고 조종사와 작전 실무진이 그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 지상군이 승리하면서 핵공격 명령도 취소되나 하필 기지에 불시착하던 전투기의 폭발사고로 핵공격 임무를 맡은 조종사 일행이 휩쓸려버리고 일반 폭격 임무를 맡은 조종사가 핵폭탄이 탑재된 전투기에 탑승하게 되는데 출격과 사고 수습에 정신없는 나머지 아무도 핵폭탄의 탑재 유무를 안가르쳐줬고 조종사는 조종사대로 별특징없는 탑재물이 보조 연료탱크인 줄 알고 빨리 출격해야 하니까 그냥 달고 나갔다가 격추당하고 핵폭탄을 분실하게 된다. 나중에서야 이스라엘 지휘부에서 핵폭탄 잊어먹은 줄 알고 난리쳤지만 찾지 못했고. 영화판에선 그냥 핵공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투하하기 전에 지대공미사일에 격추된 걸로 간단히 묘사한다.[36] 말이 중형차지 지금 출시되는 현대 EQ900, 벤츠 S클래스만 한 차들이다.
첫댓글 미제가 이제 경제 위기 탈피 수단으로 전쟁 대신 인프라 투자를 선택한 것 같군요.....미사일 확산등으로 전쟁은 이제 가격 경쟁력을 상실햇지요-전쟁 비용 대비 수익이 마이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