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洪蘭坡, 1898년 4월 10일(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는 한국의 음악가이다.
본관은 남양 홍씨. 본명은 홍영후(洪永厚).
수원군 남양읍 활초리(현재의 화성시 남양동)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YMCA 중등부를 졸업하고 1915년 조선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 양악부(洋樂部)를 마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돌아왔다.
1920년 '봉선화'를 작곡하고, 1922년 연악회(硏樂會)를 조직했으며, 잡지 '음악계'를 발간했다.
1926년 다시 도쿄 고등음악학교에 편입하고, 이듬해 도쿄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가 되었다.
1931년 귀국, 중앙보육학교 교수 등을 지내고, 미국 셔드우드 음악학교에서 연구한 후 1940년 우리나라 최초의 관현악단을 조직, 서양음악 보급에 힘썼다.
우리나라 초창기 악단의 선구적 개척자로서,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고향의 봄' 등의 동요 곡을 남겼다. 저서에는 '음악만필' '세계의 악성' 등이 있다.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
중국에 있던 안창호는 국내에서 성격이 유사한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동시에 조직되자 두 단체의 합동을 적극 권유했다. 흥사단의 국내 조직은 1926년 1월 통합조직 ‘수양동우회’를 탄생시켰다.
1937년 6월 조선총독부는 동우회 회원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에 착수하여, 1938년 3월까지 모두 18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하였고 이 중 41명을 정식으로 기소하였다.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던 홍난파는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현제명과 함께 검거되었다.
난파 홍영후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고 있다가 회복되었으나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을 받고 늑막염이 재발하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종로경찰서에서 72일간의 옥고를 치른 후 건강악화와 강압에 의해 친일 작곡가로 전향했다.
그의 생 마지막 3년은 항일 운동으로 겪은 옥고와 고문으로 악화된 병고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강압에 시달려 한두차례 친일 가요를 써야만 했던 악몽의 최후다.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뇌결핵으로 이어져 1941년 8월 30일 경성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향년 44세).
애수의조선 愛愁의 朝鮮 Korean Lament
* Lament :비가(悲歌)
두도막 노래형식으로 된 '애수의 조선(愛愁─朝鮮)'은 1926년 연악회(硏樂會)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서구에서 하나의 경향을 이룬 바이올린 소품, 특히 바이올린의 대가인 크라이슬러(Kreisler,F.)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인디언 라멘트라는 곡조에 대비하여 ‘코리안 라멘트’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32년에 홍난파 자신에 의해서 초연되었고 연주회 때마다 중요한 곡목으로 등장하였다.
‘애수의 조선’이라는 제목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되었고, 4분의 3박자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작품의 기조에 특별히 전통적인 기법이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 단지 작곡자가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관계로 자신의 기교적 역량과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는 충분히 화제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는 레코드로도 취입되어 한국 바이올린 소품의 전형이 되었다. 당시 일제강점기하에서 억압받던 시대에서 ‘조선’이라는 제목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지녔으며, 1930년대 한국 창작의 상징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애수의 조선
작곡연주 : 홍난파,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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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홍란파.... 많이 들어온 이름이죠.
아마 이분이 작곡한 노래를 안 불러본 국민이 없을 정도로 많이 작곡하였고
정서적으로도 우리곁에 다가와 있던 노래였습니다.
그러던 분이 우여곡절끝에 본의 아닌 일을 하게 되였음을 우리는 이해를 하며 그분을 동정도 합니다.
'봉선화' 지금도 선울이 들리는 듯 합니다.
참으로 참혹한 암흑의 시대에
민족 전체에 내려진 탄압을 대표적으로 당한 것 같은...
44세에 죽어간 처참한 운명을 이해하자면
피가 끓어 오릅니다.
홍난파
대단한 작곡가이신데
젊은 나이에 떠났군요
44세??
청춘인데??
아무튼 예술은 영원한가 봅니다
저는
낮에 나온 반달이
많이도 부르곤 했답니다
일제가 아니었다면??
나쁜늠들...!!
어찌 제 마음을 꿰뚫어 보시나이카.
내일은 천상 수배령을 내려야겠다....
고향도 내 이름도 묻지를 마라.
사연은 묻지 않겠습니다.
나타나시니 반갑기도 하고
어인 일인가 싶기도 하고
느닷 없기도 하고
하네요. ㅎ
홍난파 선생의 역사를 알게 되였습니다. 고향분이라 더욱 애정이 갑니다. 잘보았습니다
수원군 남양읍 활초리(현재의 화성시 남양동)
옛날 이름의 남양읍....
홍난파 선생은 2세 때 서울로 이사를 왔더군요.
가슴 아픈 역사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