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썹을 밀며
허문정
밤새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친 하얀 그믐달이 새벽하늘 차갑게 걸려 있다. 모두 잠든 어둠 속에 보초를 서며 말동무가 되었을 감나무는 검은 물체로 서서 새벽을 준비하고, 잠 설친 내가 부스스한 얼굴로 손거울을 비춰보다 조심스레 눈썹을 밀어 본다.
그리움이 눈썹으로 상징화 되어 아름다운 시로 남은 서정주님의 첫 사랑처럼, 누군가의 진한 그리움이 되어 보지 못한 나의 눈썹이지만, 선명한 새벽달처럼 수정해 가며 편안한 모습 지어 본다.
열정이 남아있던 삼십대 후반까지만 해도 서른 열 살, 서른 열 한 살 하며 마흔이란 나이를 먹지 않겠다며 별렀었는데, 그새 몇 년 흘렀다고 지금은 귀찮은 생각만 들고 편안한 것만 찾다보니, 몸무게는 늘고 눈썹 손질은 잘 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도 잔주름에는 민감해져서 눈이 처질까봐 족집게로 뽑지 않고 살살 밀게 된다.
마음을 비우기엔 아직도 멀고 먼 길이다.
젊고 풋풋할 때는 건강의 중요성을 모르다가, 조였던 나사가 녹슬고 느슨해져서야 철이 드는 우둔함을 어쩌랴.
눈썹을 밀며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가슴속엔 애증만 가득하다. 그러다 문득 나도 남자들 수염처럼 밀어야 할 눈썹이 있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세심한 조물주의 남녀평등 사상에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남자들은 수염을 밀며 무슨 생각들을 할까?
요즘 화제 거리는 ‘워런 버핏’이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하여 세간의 찬사를 받는데, 그가 모은 40조원이나 되는 재산이 ‘질레트’라는 면도기 업체에 주식투자를 해서란다.
“나는 매일 밤사이 전 세계 남성들의 수염이 자랄 것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 라고 말을 했다니 그 발상이 참으로 유쾌하고 흥미롭다.
행운도 따랐겠지만 그의 뛰어난 안목이 세계 제 2의 갑부로 만들었던 것이다.
기부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기부문화가 사회화 되어 존경의 대상이 되는 각국의 부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도 진작 수염에 관심이 있었더라면(?) 하면서 묘한 웃음을 지어본다.
남자들이 턱에 흰 거품을 잔뜩 바르고, 혹은 전기면도기를 사용하며 요쪽저쪽 혀를 알사탕 모양으로 밀어 넣고 요상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짧은 모노드라마 같다. 얼굴 베일까 조심하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면도를 하는 모습은 활력이 있고 유쾌해 보인다. 면도 후에는 출근이나 외출(만남)같은 활동적인 면이 상상되는데, 여자들이 눈썹을 밀면 왠지 여유와 사색 같은 정적인 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눈썹은 밀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대개의 남자들은 수염을 깎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또 눈썹은 문신을 하는데 수염에는 문신을 하지 않고, 멋을 내느라 여자들은 눈썹을 미는데 남자들은 멋을 내느라 수염을 기르기도 한다는 점이 재밌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과 ‘꼭 해야 함’의 차이에서 남녀의 묘한 대비를 느껴본다.
눈썹과 수염을 생각하다보니 문득 나는 살아온 날들이 다듬어진 눈썹만큼 곱게 살아진 것인지, 앞으로 살아 갈 날들이 곱게 살아질 것인지 약간은 걱정스럽기도 하다.
좀 더 열심히 살지 못했고, 좀 더 뜨겁게 살지 못했다.
지금 깨닫고 있는 것을 진작 깨달았더라면 더 성실하게 잘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여자들은 젊어서는 ‘여자’로 나이 들면 ‘엄마’로 사는 것이 당연시 되었으나, 요즘 신세대들은 ‘여자’와 ‘엄마’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잘 살아간다. 그들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삶이 멋져 보인다.
나는 속내를 감춘 채, 표면적으로는 엄마로 살았다.
당당히 여자의 주체성을 주장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비위 맞추며 살았다.
주어진 환경을 훌훌 벗어내지 못하고, 출생 서열 하나만으로도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 때문에 버거움을 느꼈다.
간밤에도 집안의 사사로운 일로 많이 힘겨웠는데, 내 손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내가 손을 놓을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포용하지도 배척하지도 못하는 중압감에 많이 시달렸던 것이다.
“나도 힘들다”는 말이 왜 그리도 힘든 건지.
꿈같은 이야기지만 나도 ‘워런 버핏’처럼 부자가 되어 내 몫 멋지게 살고 싶은 눈빛을, 까만 눈썹을 거울 속에서 본다.
관습에 얽매어 날아가지 못하는 욕망이 안타깝게 그렁그렁 고여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부족하다고만 느끼던 내게 이 만큼의 솎아 낼 눈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밀어 내고 다듬을 눈썹마저 부족한 사람이 많은데, 그러고 보니 나는 ‘눈썹 부자’인 것이다.
눈썹도 나눠 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니 반전 되는 생각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밤 새 한 근심들은 나를 좀 더 포용력 있는 사람으로 성숙시킬 것이다.
이제는 주어진 환경에 가위 눌리지 않고, 담대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도록 노력하리라.
“너에게 손 내미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다면 네가 그 사람들보다 부족해라, 그러면 네게 와서 다시는 손 내밀지 않을 것이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그래도 내게 기댈 수 있으니까 기대는 것이라 생각하니 주어진 삶이 감사할 뿐이다.
철없이 앉아 ‘내가 꿈꾸는 아름다운 것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며 어린애처럼 절망하던 일들이 얼마나 하찮고 어리석었는지 알겠다.
밤을 뒤척인 쓸쓸함으로 새벽 눈썹을 밀던 손 거두고, 이제 딸그락거리며 상쾌한 아침을 열리라.
손에 잡혔던 거울이 아침햇살에 반짝이고 나의 눈썹이 꿈처럼 사뿐 날아오른다.
첫댓글 지난 날을 디딤돌 삼아 내일을 설계하고
현재 주어진 삶에 감사..
아침햇살에 마음도 활짝 열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