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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간에 전혀 배우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덕혜옹주(德慧翁主, 1912~1989) 결혼 기념비를 만났습니다. 여전히 날씨는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 되었고 다리도 피곤해서 걷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열심히 따라 다니기에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간신히 뒤를 쫓았습니다.
길가에 아담한 문을 지나니 희안한 모습이 보입니다. 명색이 문화재인데 그 안에 수영장이 있네요. 아이들이 수업중이었습니다.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이지만 문화재 안에 저런 수영장을 만들다니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더운 여름덕분에 무지하게 시원해 보입니다. 더운 여름에 발이라도 잠시 담고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지만 간신히 참고 앞에 간 사람들을 따라 갔습니다.
조그마한 정원을 잠시 걸어가니 덩그러니 서 있는 기념비가 보였습니다. 조선통신사가 도착을 했다는 곳과 덕혜옹주의 결혼 기념비가 보였습니다. 누가 이런 것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위치입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을 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묘는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고 합니다. 조선의 운명 만큼이나 비참한 일생을 살았습니다. 대마도주가 살던 곳인 긴세끼죠(金石城) 가는 길 입구에 서있는 현재의 봉축비는 결혼 당시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근래에 들어와 세운 것입니다. 2001년 11월에 부산과 대마도 간에 정기 여객선이 취항하면서 새로 만들어 세웠다고 하는데, 어찌보면 한국 관광객 하나라도 더 유치하기 위한 대마도의 술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덕혜옹주의 출생과 어린시절
덕혜옹주는 영왕의 생모인 엄비가 죽은 후, 고종황제(이하 고종)께서 상궁 양씨를 총애해서환갑의 나이에 얻은 딸입니다. 상궁 양씨는 옹주를 낳은후 귀인으로 봉해져 복녕당(福寧堂)이란 당호를 얻었습니다. 고종은 귀여워하던 영왕(영친왕)이 일본으로 볼모로 끌려가고, 엄비마저 사망한 후 외로워하다가 얻은 이 옹주를 무척이나 사랑하였습니다. 옹주도 어머니보다 할아버지에 가까운 아버지 고종을 무척 따랐다고 합니다. 고종은 옹주를 위해서 덕수궁에 유치원을 특설하고, 수시로 유치원에 들려 늦게 얻은 손녀 같은 고명딸 덕혜옹주의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을 말년의 낙으로 삼고, 온갖 애정을 그녀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고종에게도 이 막내딸을 보면서 근심이 생겼습니다. 일본이 “조선왕족은 반드시 일본에 와서 일본황족과 같이 교육시켜야 된다”며 영왕을 데리고 간 것처럼, 옹주도 뺏어갈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본의 황실전범이라는 규칙에는 “조선왕족은 반드시 일본의 황족 또는 귀족과 결혼한다”는 조항이 있어, 그 근심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귀여운 딸을 일본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궁리끝에 옹주를 어린나이에 시집을 보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시집을 보내면 제아무리 일본이라고 해도 더 이상 옹주를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래 부마감을 비밀리 물색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시종인 김황진의 조카와 혼약을 맺기로 하고, 그 조카를 김시종의 양자로 입적한 후에 적당한 시기에 두사람의 약혼을 발표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시 1919년 1월에는 제1차세계대전 전승국(戰勝國) 27개국이 파리에 모여 세계대전의 뒷처리를 논의하기 위한 파리 강화회담을 개최하였습니다. 고종은 이 회의에 대표단을 일본 몰래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비밀리에 자금을 마련하려 시도하였습니다. 바로 이 작업을 시종 김황진이 어명을 받고 동분서주하였는데, 그만 일본의 안테나망에 잡혀, 김황진은 경무총감부에 체포되고 맙니다. 그후 갖은 고문을 당한 김황진은 다시는 고종황제 앞에 나타날 수 없게 됩니다. 이래서 파리강화회담 대표단 파견도, 옹주의 약혼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낙담하던 고종은 혼자 괴로워하다가 갑작스레 승하하시고 맙니다. 고종이 승하하셨을 때 옹주의 나이는 겨우 일곱살이었습니다.
고종의 승하후 자식이 없는 순종황제(이하 순종)와 황후 윤씨는 어린 옹주를 친딸처럼 돌보았습니다. 총명하고 음악적 재능도 많았던 옹주는 나이많은 오래비 순종 부부를 기쁘게 하였고, 옹주 역시 일출국민학교(일신초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도 하였습니다.
기어코 일본으로 옹주를 끌고가다
그러던 1925년 정월, 즉 옹주가 일출국민하교 5학년 시절, 이왕직 차관(조선왕실 담당관청) 고쿠부(國分)는 순종에게 덕혜옹주의 일본행이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하였습니다. 순종은 세자 영왕을 일본으로 데려갔으면 됐지, 어린 옹주까지는 안된다며 극력 반대하였으나 물러설 일본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는 이미 조선의 궁궐인 창경궁의 전각들을 허물고 동물원이 들어섰으며,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 근정전 앞에는 우람한 총독부 건물이 세워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1925년 3월 25일 13세의 덕혜옹주는 따뜻한 부모의 나라 조선을 떠나 억지로 생경한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같은달 30일 옹주는 차디찬 동경땅을 밟게 됩니다. 순종과 윤비의 낙심은 물론 생모 복녕당 양씨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양씨는 오로지 옹주 하나를 의지하며 살았는데 옹주가 일본으로 끌려가자 침식을 잊고 슬퍼하기만 하였습니다.
영왕의 분노
이미 일본에 볼모로 끌려와 있던 왕세자 영왕 이은의 놀라움도 컸습니다. 일본정부의 반인간적인 처사에 심히 분노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어머니가 틀린 이복남매지만 이세상에 하나뿐인 나어린 누이동생 옹주에 대한 일본의 처사에 적개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옹주가 동경역에 도착하는 날 영왕비 방자여사는 피로에 지친 시누이를 마중나갔습니다. 옹주는 오빠인 영왕의집에 가서 며칠을 묵었습니다. 영왕과 방자비가 옹주를 위로하려 애를 써보았지만 밤마다 어머니가 그리워 홀로 우는 옹주의 마음에 위안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영왕은 이미 자신이 어린시적 겪었던 아픔과 외로움이어서 옹주의 슬픔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조발성치매에 걸린 옹주
옹주는 일본땅에서 학습원(일본왕족과 귀족이 다니던 특수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영왕은 옹주를 자기집에서 데리고 있겠다고 일본정부에 청원하였지만 이 청원은 무참히 거절당하였고, 옹주는 일본인이 시중드는 숙소에서 외로이 타국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나라의 왕세자로서 누이동생 하나 데리고 있을 수 없는 영왕의 자괴감은 커져만 갔고, 이에 비례해서 옹주의 외로움도 커져만 갔습니다.
1929년 5월 30일 오로지 옹주만을 그리워하던 어머니 귀인 양씨가 향년 48세로 별세하였습니다. 4년여 일본생활에 어느정도 적응하던 사춘기의 덕혜옹주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순종께서 승하하셔서 고국땅을 밟았을때도 학업에 지장이 있다고 일본인들은 옹주가 어머니와 만나는 것을 금하였었습니다. 그래도 언젠간 만나겠지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시 잡았던 옹주에게 어머니의 별세소식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었습니다. 옹주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다니러 조선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보름후 다시 동경으로 돌아온 옹주는 수척해져 있었고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죽음후, 옹주는 더욱더 내성적이 되어갔고, 신경질적이며 학교에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930년 여름방학을 오빠 영왕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옹주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말도 하지 않고, 음식도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때는 한밤중에 몽유병자처럼 정원을 돌아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영왕부부는 한밤중에 정원을 헤매고 다니는 옹주를 찾아다녔고, 옹주를 안고 방으로 들어올때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하였습니다. 이러한 옹주의 행동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영왕 부부는 옹주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장래에 선생님이 되리라는 꿈을 가졌던 조선의 왕녀가 이제 정신장애자가 되어가고 있던 것입니다. 치료결과 옹주에게는 ‘조발성치매증’ 즉 어린나이에 일어나는 노망끼라는 진단이 내려진 것입니다.
나이 어린 옹주에 대한 일본의 만행
이러한 때 일본은 옹주를 대마도 도주의 아들인 소다케시(宗武志)백작이라는 족보도 없는 일본 귀족놈과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영왕은 분개하고, 옹주의 병치료가 우선이라며 이 계획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영왕은 옹주의 희망대로 학업을 마치는대로 귀국시켜 교사가 되게하고, 조선사람과 혼인시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영왕의 강한 반발에 주춤대며 물러났던 일본정부는 옹주의 병세가 차도를 보이자 1931년 옹주가 20세 되는해, 영왕과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소(宗)백작과 옹주의 결혼을 발표하고 날짜도 5월 8일로 못박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영왕은 강력하게 반발하였지만, 일본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옹주 역시, 자신의 결혼 소식을 듣자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지만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다소 나아져 갔던 옹주의 병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또다시 악화일로에 서게 되고, 옹주는 타국땅에서 근본도 없는 섬오랑캐와 마음에도 없는 비운의 결혼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불행한 결혼생활
정부의 강권으로 옹주와 결혼하기는 했으나, 별 애정이 없기는 옹주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말이 귀족이고, 백작이지 대마도 촌구석에서 커다란 농장을 경영하던 농장주에 불과한 자였습니다. 결혼하자마자 조선인이라고 옹주에게 막말을 하더니, 옹주의 병세가 심해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구타까지 하게 됩니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옹주의 치매증세는 더욱 심해져 갔고 결국 옹주는 3년만에 이 섬망나니에게 이혼을 당하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더욱이 3년간의 불행한 결혼생활 동안 낳은 딸 마사에는 비록 메이지대학을 나온 수재였지만, 어머니 덕혜옹주의 비극과 아버지 소(宗)백작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괴로워하다가 세상을 비관하며 현해탄에 몸을 던지고 맙니다. 이런 비극보다 더욱 큰 비극은 옹주가 이러한 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결국은 조국품에
해방이 되어서도 타국땅에서 치매에 걸려 허름한 병원의 병실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던 덕혜옹주는 방자비의 요청을 수락한 박정희 군사정권의 도움으로 1962년 1월 26일, 일본으로 끌려간지 38년 만에 그토록 그리던 고국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수속이 여러모로 까다로웠지만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일본 궁내성,외무성의 협조로 귀국하게 된것입니다. 이른아침 하네다(羽田)공항에는 30년전 옹주가 학습원에 다닐때의 학우 십여명이 꽃다발을 들고 나와 비운의 옹주를 눈물로 배웅하여 주었지만 옹주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옹주가 귀국하던날 창덕궁의 순종비 윤씨를 비롯한 왕실의 어른들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어릴 때 옹주를 키워주었던 유모 변씨가 생존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71세였지만 정정하였던 변유모는 친딸처럼 키웠던 덕혜옹주가 김포공항으로 귀국하자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옹주마마”를 외치며 기뻐하여, 공항에 나왔던 모든 이들이 따라 울었습니다. 덕혜옹주는 정부의 도움으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극진한 유모의 간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흰 벽만 바라보고 반생을 살았던 옹주는 주위 사람들의 정성때문인지 병세가 조금씩 호전되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병세가 조금 호전된 옹주는 윤대비가 살고 있던 창덕궁 낙선재에 같이 살게 되었고, 말년에는 어려서 배운 한글을 기억해내 유치원생 보다 못한 글씨로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라며 안부편지를 쓸 정도로 호전되었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 고종의 곁으로 가다
이렇게 힘들게 말년을 살던 옹주는 1989년4월 21일 창덕궁 낙선재안 수강재에서 향년 77세로 숙환으로 별세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왕실 가족장으로 장을 치루어 그렇게도 누이동생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오빠 영왕의 묘소인 영원(英圓)옆에 그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안장되었습니다.
덕혜옹주의 남편인 종무지(소다케유키 : 宗武志)
한국에 알려진 것처럼 난폭하고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일본 동경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서 대마고등학교 교가를 작사, 작곡하고 대마도지에 시를 기고하였고 유화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등 시·서·화에 두루 재질을 보인 사람이었다.
백작이 애꾸에 곱추에 난폭하고 배운 것 없는 농장 주인인데 일본정부가 옹주와 결혼시키기 위해 편법으로 백작으로 만든 거라는 소문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아무도 정정을 해주지 않자 조선 내에서는 사실로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사실 종무지 백작은 애꾸도 곱추도 난폭하지도 배운 것 없는 농장주도 아니었다. 소유게(宗家)는 대대로 대마도를 통치한 집안으로 종무지는 그 후손으로 대마도를 상속받았지만 명치유신으로 폐번치현(번이 없어지고 현으로 바뀌면서 번주의 자치가 사라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가 시작됨)이 되자 황실에서 도주의 작위를 폐하고 백작의 작위를 하사한 것이다.
종무지의 후원자는 다이쇼천황의 부인인 사다코 황후로 종무지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조선왕가의 딸로 지참금이 상당했던 덕혜옹주를 맺어주어 그 재정난을 덜어주려고 하였다. 사다코의 중신으로 맺어진 두 사람은 다분히 정략적인 결혼이었지만, 초반에는 행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황실로부터 백작위를 하사받은 종무지는 대학교수로 훗날 태어난 딸 마사에도 상당히 사랑하여 손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덕혜옹주의 정신병은 꽤 오래된 것으로 아버지의 죽음 후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와 일본인 귀족학교에서 이지매를 당하면서 향수병과 함께 커졌고, 어머니인 양귀인의 죽음 이후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당시 정신병은 신체장애와 함께 상당히 부끄러운 질병 가운데 하나였고, 특히 귀족인 덕혜옹주의 정신병은 당시에는 상당한 가십거리였었다. 종무지는 이를 꺼려해서 덕혜옹주를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할 생각을 못하고 집안에 가둬두는 것으로 대신하였고, 옹주가 자꾸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집밖을 나가려고 하자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고도 한다.
태어나자마자 옹주의 정신병 재발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옹주의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더 사랑했고,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마사에의 죽음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결혼생활 못지않게 말이 많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현해탄 투신자살 설. 해방 후 조선 왕족을 감당하지 못한 종가 사람들에 의한 살해설. 마사에는 해방 후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본인과 결혼하게 되는 데 연애결혼이었음에도 이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얼마 후 가출을 하게 되었는데 가족들은 그녀를 애타게 찾지만 결국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사인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덕혜옹주의 병이 점점 심해지자 종무지는 그녀를 병원에 입원 시켰고, 1951년 사다코 황후가 사망하자 이혼하게 된다. 그 후 종무지는 일본인 여성과 재혼하지만, 해방 후 1962년에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는 한번 보고 싶다고 찾아 왔던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옹주의 충격을 염려한 측근에 의해 거부당했다고 한다.
쓸쓸한 나라의 운명을 개인의 삶으로 살다 간 덕혜옹주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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