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박이의 세상 보기 (2)
저녁 무렵, 내일(5월 7일) 공항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사실은 나도 미심쩍은 바가 있어서 조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던 터수였다.
곁에 있던 데레사가 그것 보라며 퉁바릴 놓는다.
처음 전화 왔을 때 받는 것을 보니 7일이라고 하던데 내가 딴소릴 한다는 것이다.
전화 메모가 없어진 터에 결과가 그러니 도리 없이 나만 모자란 사람이 되고 말았다.
대개 데레사는 이런 경우, 결과를 슬쩍 보고나서 사람을 찍어 누른다.
‘땅 짚고 헤엄치기’의 불공정 거래지만 굳이 따지려 들지 않다보니 이게 또한 관행이 되었나 보다.
그나마 살림살이라고 뒤집어엎은 후에 지지고 볶느라고 문밖에 나가볼 겨를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인터넷을 뒤지며 인천공항에 나가는 방법이며, 소팔가자가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따위의 예비지식을 챙겼다.
약속 시각인 오전 8시에 공항에서 김 위원장과 여행사 사람을 만났다.
일행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번에 몇 명이나 가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둘뿐이란다.
뜻밖의 대답에 속으로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후원해 온 소팔가자에 무슨 행사가 있어서 단체로 나가는데 함께 가자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나름대로의 짐작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당초에 8일 날 출발하자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7일로 예정된 본당 ‘성모의 밤’ 행사에 총회장으로서 자리를 비우기 어려워 8일 출발하려고 했는데, 모처럼 동행하자고 해놓고 하룻밤만 자고 오자고 하기가 미안해서 나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출발 일자를 하루 앞당겼다는 것이다.
순간 데레사한테 또 애매하게 당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뻗대거나, ‘그랬나!’ 정도로 피해 가면 곁에 있어도 어쩔 도리는 없는 일이지만 ---.
1992년부터 가락동성당 교우들을 중심으로 김대건 성인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추진 현황도 살필 겸, 올 여름에 구상 중인 피정 문제 등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방문이란다.
이륙 1시간 40분 만에 도착한 장춘공항.
하늘에는 잔뜩 먹장구름이 끼고 찬비가 흩뿌린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대합실에 들어서니 출영객 대여섯 명이 나와서 기다린다. 그 가운데는 뜻밖에 검정 싱글에 로만 칼라를 한 장년의 신부님 한 분이 끼어 있었다.
덥석 포옹은 했지만 귀와 입이 먹통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옷가지 따위의 행구를 넣은 가방 하나와 소지품을 넣은 작은 슐더 백이 행장의 전부였다.
조금 무게가 나가는 가방은 누가 받아서 차에 실었는데, 담배쌈지만 한 소지품 백을 신부님이 굳이 자기에게 달란다.
조금 민망했지만 손[客]에 대한 예로 청하는 것을 굳이 마다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싶어 못 이기는 체하면서 맡겼다.
그 순간에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뜩 뇌리에 스쳤다.
시원스럽게 쭉쭉 뻗은 거리와 대하(大廈)란 말이 실감 날 정도의 저층 대형 건물 따위에서 만주국을 세워 중국 동북 지방을 경략(經略)한 일본의 안목과 토지의 광활함을 첫눈에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차가 멈춘 곳은 ‘재 길림성 한인회장배 쟁탈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는 운동장.
김 위원장이 출국에 앞서 연락해놓은 지인(知人)을 만나기 위함이란다.
잠시 후에 K도 주 길림성경제무역사무소 J 소장이라는 분이 우리가 타고 있는 차에 올라 장춘 시내 간선도로를 거쳐 코리아 타운 등지를 안내했다.
눈에 띄는 즐비한 한글 간판들이 잠시나마 내가 문 밖에 나와 있다는 낯설음을 완화시켜 준다.
우리는 창바이호텔 한성관으로 자리를 옮겨 일행과 함께 점심식사에 들어갔다.
J 무역사무소장의 브리핑이 이어진다.
도세(道勢)조차 상대적으로 영세한 지자체에서 독자적인 무역사무소를 운영한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젊은 엘리트풍의 J 소장은 지역 정보에 해박할 뿐 아니라 아주 역동적인 활동으로 장춘에 코리아 타운[공식명칭 ; 장춘한국상업가]을 지정하고, 무역 교류 증진에 진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눈에 띄는 실적보다도 길림성 정부에 거의 동화된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바로 중국인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면서 성장(省長) 등 고위 관리와 친교를 나누는 듯이 보였다.
그분은 이미 떠나고 없는 전직 관료에게까지 직함 뒤에 반드시 ‘님’이라는 존칭접미사를 붙였다.
형식이 아닌 마음으로 삶의 현장과 문화에 토착화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살아 있는 교훈을 실감했다.
그런 태도가 몸에 배지 않고서는 거부반응이라는 파고를 견딜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자리에는 우리 한국인 셋, 길림천주교회 조선족 박요셉 회장, 그리고 주장우(朱長友)신부님을 비롯하여 소팔가촌이 소속돼 있는 농안현 합륭진 H 부진장(副鎭長, 鎭은 우리의 군과 읍의 중간쯤 되는 행정단위이며, 부진장은 공산당 당무 책임자라고 함), 팔가자촌천주교당 봉사자 등 중국인 다섯 명이 합석했었다.
김 위원장은 중국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듯했으며, 조금 힘들 때에는 사범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했다는 주신부님과 영어로 보충을 했다. 그래도 좀 막힐 때는 박요셉 회장의 조력을 요청했다.
나는 박요셉 회장의 통역이 없으면 그야말로 ‘막대 놓친 장님’ 꼴이 되었다.
‘호남향’이라는 배갈이 몇 순배 돌자 거나해진 나는 좌우로 귀를 기울여 보지만 김 위원장과 J 소장 사이의 대화만 겨우 건질 수 있을 뿐이었다.
바벨탑을 쌓던 교만(驕慢)에 내린 하느님의 징벌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오찬을 마치고 J 소장과 H 부진장을 뺀 나머지 일행은 목적지인 팔가자촌으로 향했다.
4차로는 실히 됨직한 쭉 뻗은 포장도로 양편에 도열한 미루나무가 하늘을 가린다.
나지막한 구릉 하나 없이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 평야가 시야로 들어온다. 거무스름한 맨살을 보이는 밭이 도로 양편에 끝없이 펼쳐질 뿐 인가(人家)나 사람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어쩌다 스쳐본 김만경 평야의 오래 된 기억이 오버랩한다.
커다란 자연석에 ‘김대건로’라는 한자가 음각된 표석이 나온다.
가락동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포장을 지원한 10km의 ‘김대건로’는 첫 번째 방인 사제인 김대건이 최양업과 함께 한때 수학하고 부제품까지 받았던 유서 깊은 성지로 이끄는 길목이자 한중 우호의 상징물이다.
하지만 한국과 종교라는 두 가지 측면에 대한 중국인 특유의 거부반응 때문이었을까, 한때는 이 표석을 벽돌로 에워싸 시선을 차단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지방 정부와의 갈등과 타협 끝에 마침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이 표석에 대한 에피소드는 양국 관계의 미묘한 과거를 상징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춘에서 40여분의 주행 끝에 ‘팔가자촌천주교회당’이라는 가로 표지판과 마주치게 되었다.
첫댓글 '장춘 한국상업가' '소팔가자' '소팔가촌' '팔가자촌' 이름을 따라 가니 시원한 '김대건로'가 나오네요...수고하셨어요...몸살은 안하셨나 모르겠어요...
매번 읽어 보아도 사리재님의 글 솜씨는 가히 천하 일품입니다...^^...뜨거운 때약볕에서 왠종일 딩굴다 목이 말라 나무 그늘에 쉬면서 우리의 술, 막걸리를 한 주발 쭈욱 들이킨 입맛이랄까?..단어의 쓰임새와 문맥, 전반의 글 짜임새가 참 구성지십니다...전직,현직이 혹,소설가나 기자 직업이 아니신지요? ..^^ㅎ~
글만 보고도 직업을 맞추신다면 멍석을 깔으셔야겠죠? ㅋㅋㅋ
요즘 공짜로 에세이 한 권 읽고 있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 호기심이 춤을 춥니다.
소팔가자.........많이 궁금했었는데.....건강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