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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신화 스크랩 [침략의역사] 잉카문명의 몰락
일 행 추천 0 조회 265 10.08.15 11: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잉카제국 최후의 날

1532년 에스파냐인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를 정복하기 위해 페루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63명의 기병과 20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피사로 일행은 황제 아타우알파가 있는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 도시가 질서가 엄격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복자들은 이 강력한 문화에 대항하려면

잔꾀를 부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도시는 넓은 중앙광장과 주위에는 돌을 쌓아 건축한

균형 잡힌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건물들은 잉카인들이 상당한 건축 기술을 지녔음을 보여 주었다.

도시 입구에는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한 장엄한 신전이 서 있었다.


에스파냐인과 잉카인은 협상을 시작했다.

그 협상을 통해 이 이방인들과 자칭 황제의 회담이 주선되었다.

처음에는 전령이 나와 아타우알파가 단식중이라고 전했다.

이어 사절이 교환되고, 각기 상대를 엄중하게 감시했다.

드디어 피사로는 동생 에르난도를 아타우알파에게 보냈다.

에르난도 일행은 잉카가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 잉카는 30세 가량 되어 보였고,

매우 정교하게 짠 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 왕권의 상징을 쓰고 있었다.

머리를 다섯 번 말아감은 뒤 이마를 덮은

모직 장식 끈이 바로 왕권의 상징이었다.

그 끈에는 금을 엮어 넣은 빨간색 술이 달려 있었다.

그의 귓불에는 황금 원반이 끼워져 있었고,

잉카의 얼굴에는 아주 고운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다.


태양의 아들인 그를 인간이 직접 볼 수는 없다는 거였다.

에스파냐인들은 그 베일을 걷으라고 요구했다.

그는 베일을 걷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어 잉카는 그동안 에스파냐인들이 빼앗은 직물을 전부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약간 냉랭한 대화가 오간 후,

잉카는 카하마르카의 중앙 광장에서 피사로를 만나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나서 잉카는 에스파냐인들에게 커다란 황금 술잔에 담은

옥수수술을 제공했다.


정복자들은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잉카의 위협에 가까운 강권에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했다.

협상을 시작하는 자리에서는 강자 측에서 마실 것을 내놓는 것이

그곳의 관습이었다.


케로컵ㅡ종교의식에 사용된 술잔.   삭사이와만ㅡ외부의 침략자를 방어하는 최후의 장벽

그 다음날, 결정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피사로는 부하들에게 숨어 있다가

사도 야고보라는 말이 떨어지는 즉시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잉카의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

잉카는 앵무새 깃털로 호사스럽게 장식한 가마에 올라탄 채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의상을 걸친 근위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행렬 앞에는 어린 소년들이 잉카가 자나갈 땅을 조심조심 쓸었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행렬 좌우에서 소라고동과 피리를 불었다.

카하마르카 주민들은 화려한 색깔의 옷 밑에

몽둥이와 투석기를 감추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피사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종군 사제가

잉카 앞으로 나아가 한 손으로는 성호를 긋고

다른 손으로 성서를 내밀었다.

"나는 그대에게 신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노라."

잉카는 성서를 빼앗아 귀에 대보고는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것이 신호였다.


피사로는 아무도 감히 손댈 수 없는 태양의 아들의

팔을 잡아 가마에서 끌어 내리려고 했다.

이어 화승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창기병이 말을 몰고 짓쳐 나오면서 엄청난 살륙이 시작 되었다.

한 바탕 혼란이 휩쓸고 간 후 광장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공포에 질린 잉카인 몇 명과 이제는 권위가

땅에 떨어진 황제만이 살아 남아 있었다.

그의 옷은 갈기갈기 찢기고, 팔은 묶여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5000의 잉카 근위대가 180명의 보병과

27마리의 기병을 가진 에스파냐인에게 정복 당한 것이다.


잉카인들은 이방인이 감히 태양의 아들인 잉카의 팔을

잡아 끌어 내리려하고,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상한 짐승(말)과 천둥소리를 내며 불을 뿜어대는 화승총 등

驚天動地할 광경이 너무나 무서워서 싸워야한다는

생각 보다는 달아나야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잉카제국의 멸망은 그들 스스로의

골육상쟁의 내분이 1차적 원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부터 정복자들의 무자비한 잉카문명 파괴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타우알파는 목숨을 살려 주면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왕국의 보물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방은 높이가 7m,너비가 6m나 되었다.

피사로가 허락하자 곧바로 해안지방,산악지대 등

사방에서 귀금속들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두 달 만에 황금 200상자,은 20상자,보석 60상자가 모였다.


이때에 잉카의 찬란한 금 세공품들이 무자비하게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몸값이 다 거두어지자 피사로는 그 1/5은 에스파냐 국왕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몫을 제외한 나머지를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병사들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부유해진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사로는 그것들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가 아타우알파를 불태워 죽이려고 하자 아타우알파는

기독교도가 되겠다고 애원해 겨우 화형을 면하고 목이 잘려 죽었다.

잉카인들은 육체가 없어지는 화형에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타우알파는 목이 잘린다면 언젠가 반드시 돌아와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했다.

아타우알파가 처형되던 날, 하늘이 어두어졌다.

그의 아내 몇 명과 누이는 내세에서 그를 섬기기 위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잉카의 죽음을 따르는 자살은 북부 안데스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관습이었다.

슬픔에 젖은 잉카인들은 분노에 떨며 뿔뿔이 흩어졌다.


아타우알파의 죽음으로 4방위의 잉카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1533년 에스파냐인들은 쿠스코에 입성 태양의 사원을 약탈했다.

그러나 식민 통치 초기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에스파냐인 사이의 분쟁이었고,

다른 문제는 원주민들이 정복자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에스파냐인들에게 수모를 겪은 꼭두각시 군주

망코(아타우알파의 동생)는 군대를 이끌고 안데스 고원지대

(비트코스와 빌카밤바에 있는 전설상의 요새들)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망코는 원주민들과 저항 운동을 시작했다.

망코의 아들인 티투 코시와 토파 아마루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저항을 계속했다.

1572년 결국 토파 아마루어는 에스파냐인에게 사로잡혔고,

40년 전 큰아버지인 아타우알파가 당했던 것처럼

목이 잘리는 죽임을 당한다.

그후 300년 동안 에스파냐는 안데스 산맥을 확고하게 지배했다.  


  잉카제국의 역사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방에는

B.C 2000년경에 초기 신전(神殿)이 출현하였고,

차빈 문화는 적어도 B.C 500여 년 전에

중부 안데스(페루의 북부)에서 발생 해안지방까지 영향을 미쳤다.

7세기에는 모치카족이 또 다른 독창적인 문화 ㅡ화려한 무늬의

도자기가 그 증거이다ㅡ를 꽃피웠고,

그 덕에 북부 안데스의 다양한 종족이 통합되었다.


10세기에는 두 개의 문화가 발생했다.

하나는 티티카카 호수변에 있는 티와나쿠의 도시를 중심으로 한 문화였고,

다른 하나는 쿠스쿠의 북서부에 있는 와리를 중심으로 한 문화였다.

그리고 잉카족이 권력을 장악하기 얼마 전,

북부 해안의 개별 부족들이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 되었다.

치모르라고 불린 이 왕국은 찬찬이라는 도시를 기반으로 하였다.


모치카의 도자기   키푸ㅡ줄과 매듭으로 표시     나스카의 지오글립스의 일부

한편 북부에서 차빈 문화가 발생한 것과 같은 시기에

남부에서는 파라카스 문명이 발생, 세련된 채색 도자기,

화려한 모직물, 그리고 후일 피사로 일행이 감탄한 공동묘지를 남겼다.

B.C 600년~A.D 500년 사이에 잉카 이전의 문명 가운데

가장 유명한 나스카 문명은 채색 도자기와 직물로도 유명하지만

나스카인들은 땅에 기하학적 도형과 동물의 형상을 새긴

거대한 그림으로 더욱 유명하다.


지오글립스 즉 지상회화라고 하는 이 그림들은 하늘에서

봐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며,

아직도 고고학자들은 그 해석을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다.


잉카제국은 그들 여러 왕국 중에서 가장 늦게 나타나

치모르를 비롯하여 각지의 지방적 정치조직을 정복 통합하고

전(全)안데스 지대에 걸치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잉카제국을 건설한 잉카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6세기에 잉카를 정복한 에스파냐인이 채집하였던

전설에 의하면 망코 카파크라는 전설적 인물이 13세기경,

자기의 부족을 이끌고 남페루 고원의 쿠스코에 정주하여,

그곳에 태양의 신전을 축조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이 망코는 태양의 아들로서 숭앙되고,

잉카제국 초대(初代)의 황제라고 불렸으나,

그와 그에 잇따르는 7명의 황제들에 대한 전승은, 역사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13∼14세기에 잉카족이,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정된

소지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여 주변의 다른 부족,

특히 남부 티티카카호 북안의 아이마라족과 대치하였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잉카제국이 쿠스코에서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초에 제9대 파차쿠티황제 시대부터이다.

그 이후의 역사는 연대기적으로 구전(口傳)에 의하여

전해진 자료가 있기 때문에 구체적 사실이 알려져 있다.


잉카 발전의 계기가 된 것은 잉카족과 창카족의 싸움이다.

창카족은 쿠스코 남서쪽의 안다와이러스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페루 중부고원의 아야쿠초 지방까지 정치적으로 지배하였던 대부족이었다.


창카족은 쿠스코의 잉카족 정복을 기도(企圖)하여

대군을 보냈으나, 그것을 당시 잉카의 왕자였던 파차쿠티가 출격하여

쳐부수었기 때문에, 쿠스코가 갑자기 중부 페루고원까지의

넓은 영역의 정치집단을 그 지배하에 넣을 수 있었다.

영토의 확대와 더불어 파차쿠티는 태양신전을 개축시키고

그곳에서 일하는 처녀의 제도와 각종 의례를 정하여,

정치적 통합을 위한 정신적 중심이 되기 위하여 쿠스코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동시에 정복지에 관리를 보내서 그 정치조직을

쿠스코의 산하에 놓는 일도 적극 추진하였다.

이 대개혁이 단행된 것은 1430년대 말에서 40년대에 걸쳐서였다.

그 후로도 파차쿠티의 정복사업은 계속되었다.

남쪽 티티카카 지방의 아이마라족이 정복되고,

또 페루 고원의 북부까지 잉카의 군대가 쳐들어갔다.

또한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지방의 평정도 실행되었다.


다음 대(代)인 투파크 잉카가 성장하자 그의 지휘하에

페루 북해안 지방의 공략이 시작되었고, 치모르왕국도 잉카에 항복하였다.

군사정복의 확대에 따라 각지방의 도로가 정비되고

고원의 깊은 골짜기에도 다리가 놓여져

유명한 잉카 왕도(王道)의 도로망이 완성되었다.

투파크 잉카 시대에도 잉카의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에콰도르 지방과 칠레·아르헨티나의 북부도 잉카의 영토가 되었다.

질서가 확립된 행정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각종 공공건축도, 태양신전과 성채를 중심으로 각지에 세워졌다.

잉카제국의 근본적인 형태는 이 투파크 잉카 시대에 이루어졌다.


  잉카의 유적 마추픽추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유적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맞추픽추이다.

고대 잉카 유적의 꽃으로 불리는 마추픽추는 산세로보아

적의 침입이 거의 불가능했던 장소에 도시를 건설했다.

페루의 남부, 쿠스코의 북서쪽의 우르밤바 계곡

소용돌이 치는 강물만이 간신히 뚫고 지나갈 수 있다는  

협곡의 안쪽에 위치하며 해발 2,400m의 안데스 산 중에 건설된 도시이다.

공중의 도시, 하늘의 정원, 숨은 성지 겸 요새도시 등

많은 이름을 갖고 있는 곳이다.


         마추픽추

마추픽추는 1911년 7월 24일, 미국의 고고학자였던 히람 빙엄이

에스파냐인의 침략을 피해 안데스 산맥 깊숙히 숨어든

잉카인들이 마지막으로 건설했다는 '빌카밤바'를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깊은 산속 봉우리 위에 건설된 이 도시는

언제부터인가 사람의 발자취가 사라졌다.

왜 사라졌는지 아는사람도 확실치 않다.

잉카가 마추픽추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조차 알수 없다.

확실한 것은 안데스 산속에 숨겨진 이 도시가

완전한 군사요새이며, 성스러운 신전의 도시라는것이다.


여기에 세워진 건물 등 돌로 쌓아놓은 정교한 솜씨는

어디에서도 볼수 없는 걸작품이다.

40 평방 킬로미터의 이 도시를 둘러보는데만 2 시간이

소요되는데 당시로선 큰 도시였다.

약 200여 채의 가옥과 1,000 여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발굴된 170여 개의

유골을 통해 약 70%가 여자, 20%가 남자,

그리고 나머지 10%가 어린아이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에스파냐인의 손길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했던 잉카인들이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비의

유적 '마추픽추'는 여전히 잉카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마추픽추는 잉카인이 처음 세운 도시는 아니었다.

1912년 빙엄의 발굴 보고서에도 잉카시대 이전에 만든

옹기와 접시가 많다고 나와 있지만, 1988년 카본 테스트를 해보니

마추픽추에는 서기 800년 경에 정착해 산 사람들이 있었다.


인티우아타나ㅡ마추픽추에 있는 일종의 해시계


*참고문헌 ㅡ 잉카 태양신의 후예들

http://www.kongsar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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