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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행 6 - 서울 교육 박물관
1995년 6월 15일에 개관한 정독도서관 부설 교육전문박물관입니다. 원래 박물관 건물은
경성고등보통학교 건물이었으나, 경기고등학교의 이전으로 현재는 정독도서관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5길 48 정독도서관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울교육의 위상을 정립하고 후손들에게 우리 교육의 밝은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 우리나라
교육의 발전 모습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교육제도, 교육과정, 교육내용, 교육기관, 교육
활동 등에 관한 유물과 사진 등 각종 자료들을 시대별로 전시하여 지난 , 운영하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교육기관에서 현대에 이르는 교육관련 자료가, 개화기, 민족저항기, 미군정기,
교육과정기, 서울시교육청의 어제와 오늘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는데, 개화기의 교과서와
풍금, 일제시대의 통지표와 졸업앨범, 검정고무신, 몽당연필, 등사판, 무시험 추첨기,
양은 도시락 등의 물품을 비롯하여 8?15광복 후 첫 수업 모습, 콩나물교실, 얼룩무늬 교련복
을 입은 고등학생 모습 등의 사진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소장품은 개화기 교과서 외 도서류 3,888점, 1910년대 학적부 외 기록문서류 3,411점,
교구류 228점, 1970년대 교복 등 복식 738점, 기타 400여 점 등 총 8,670점입니다.
전시 외에 연 4회에 걸쳐 관람홍보와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단체교육을
실시합니다.
최초 미국 유학생 김란사에 대한 기사입니다. 그당시 미국 유학을 하였다니 대단합니다.
3ㆍ1절을 기준으로 국가보훈처에서 훈ㆍ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4329명, 이 중 여성은
달랑 272명(1.9%)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훈처에서 발굴한 전체 여성 독립운동가 규모
(2747명)에 비하면 포상은 10%에 불과합니다. 자료가 부족하거나 행적이 확인되지 않아
포상에서 제외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는 일제강점기부터 강고했던 남성중심의 사회
구조로 인해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이 저평가됐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훈ㆍ포상을 받은 여성 독립유공자 272명 중 한국 국민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장렬히 순국(殉國)한 유관순 열사(烈士)입니다. 최근 한국인들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커졌지만, 광복 70주년이 지나도록, 일반인들에게 ‘여성 독립운동가=유관순’이라는
공식만 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관순 열사 외에 생각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별로 없습니다.
김하란사(金河蘭史, 본명 : 金蘭史, 1872~1919)는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재학할 때 스승으로
3ㆍ1운동을 태동시킨 주역이었습니다. 이화학당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를
이끌며 암울한 민족의 현실과 세계 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유관순 열사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제자였던 유관순 열사에게 이문회 가입을 권유한 뒤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돼 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2011년 ‘최초의 여학사, 하란사의 생애와
활동’이라는 논문을 쓴 고혜령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은 “이화학당 학생들이 3ㆍ1만세
운동을 주도한 데에는 하란사의 영향이 컸다”고 평가했습니다.
김란사는 고종 9년인 1872년 평양의 전주김씨 문중에서 김병훈과 이씨 부인 사이에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 서울 평동(平洞) 32번지에서 거주(居住)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아버지의 무역업을 도우며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인천으로 이주(移住)하였습니다.
1893년 인천에서 감리(監理)로 활동하고 있던 하상기(河相驥)와 혼인하였는데, 김란사는
개화기의 신여성으로서 학구열(學究熱)이 대단하여 밤중에 당시 기혼자는 입학할 수 없는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직접 찾아가서 프라이(Lulu E. Frey) 학당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입학하였습니다.
정독 문방구를 보내 옛 생각이 솔솔 납니다.
고종 31년인 1894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하여 1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그 이듬해인
1895년 3월 한국 여성 최초로 일본유학의 길에 올랐습니다. 김란사는 처음에 자비(自費)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공부하였는데 5월에 100여명의 관비유학생들이 파견된 사실을
알게 되어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자신도 관비유학생들과 같은 감독을 받기를 원한다고
청원하였습니다.
이완용이 김란사의 청원을 수용하고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청원내용을 알렸으며, 이를 다시
일본공사에게 전달하여 결국 김란사는 관비유학생들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김란사는 게이오의숙(慶應義淑)에서 1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건양 1년인 1896년에 귀국
하였습니다. 친일파 이완용이 영어를 잘하고 일본어를 못하였다고 합니다.
광무 1년인 1897년에 미국유학의 길에 올라 처음에 워싱턴 D.C에 위치한 하워드 대학교에서 신학(神學, theology)을 공부하고, 워싱턴에 있는 데코네스 학원에서도 수학했습니다.
1900년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웨슬리안 대학교(Wesleyan University) 문과에 입학하여
6년의 과정을 이수하고 1906년에 대망(大望)의 졸업을 하면서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사
(신학)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김란사는 당시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의친왕
이강을 만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종황제가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과 김란사를 밀사(密使)로 파견하였다고 합니다.
김란사는 광무 10년인 1906년 마침내 10여년의 미국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남대문
상동감리교회에서 스크랜튼(Mary F. Scranton) 대부인이 설립한 영어학교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불우한 형편의 여성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기혼여성들을 위해
설립한 학교였습니다.
이 학교는 이후 감리교협성여자신학교에서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이 됐습니다.
옛날 운동회날의 모형입니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김란사가 11세가 되던 해인 1885년(고종 22)에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1894년(고종 31)에 김란사가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하여 스크랜톤 대부인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스승과 제자로서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김란사는 스승인 스크랜톤 대부인이 과부, 기생, 첩, 궁녀 등 불우한 여성들을 위해 설립한
영어학교에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면서 여성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07년부터 그는 이화학당(梨花學堂)의 총교사(현재의 교감에 해당됨) 및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엄격히 지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년(同年) 이화학당(梨花學堂) 교사
였던 이성회가 조직한 이문회(以文會)라는 학생단체를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
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국민학교시절의 동네 모습입니다.
1909년 경희궁에서 대한부인회, 자혜부인회, 한일부인회, 서울시내 각 여학교가 연합하여
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김란사, 박에스더, 윤정원을 위한 성대한 환영회를 개최
하였습니다. 그 때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종황제로부터 은장을 수여받았습니다.
1910년 9월 이화학당(梨花學堂)안에 대학과가 신설되면서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실시되었을 때 김란사는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교수로 취임하여 4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한편 부인성서강습, 교회활동, 어머니 육아교실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앨버슨과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여 거리와 농촌으로 나가 전도하는 활동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조선 선비 옷을 입으니 훈장 같습니다.ㅎㅎㅎ
중고등학교 교복을 입어봤습니다.
얼른 산호세(San Jose)의 이태완이가 걸상에 앉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닐때는 조그마해서
감히 나에게 까불지 못했는데..ㅎㅎㅎ
마치 선생님 같습니다. 하기사 미국에서 3개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으니 어울립니다.ㅎㅎㅎ
김란사는 1911년부터는 매일학교, 애오개여학교, 종로여학교, 동대문여학교, 동막여학교,
서강여학교, 왕십리여학교, 용머리여학교, 한강여학교에서도 지도교사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릴 만큼 교육에 있어 엄격했다는 김란사는 남편이
하인을 보내 끼니를 챙길 정도로 신여성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의 여성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슬기로운 어머니, 나라를 위해
훌륭한 자식을 키울 수 있는 어머니, 능력 있는 여성을 배출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여성 독립투사를 양성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1916년 미국 뉴욕 주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 신흥우 박사와 함께 참석
하였습니다. 1개월 간의 회의가 끝난 이후에도 홀로 남아서 순회강연을 하며 해외 교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습니다. 1918년에는 20여 년 동안 친분관계를 맺어왔던 도산 안창호의
도움을 받아 순회강연에서 모금한 돈과 하와이 교포들의 주선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하여
정동교회에 설치하였습니다.
일본시카고 영사가 1917년 9월 19일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기밀문서에 김란사가 1917년
9월 20일 의친왕의 처남 김춘기를 비롯하여 조선인 청년 수명(數名)을 인솔하고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라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21세 때 김춘기는 미국에 건너가 네브라스카주 오마하로가 연합태평양철도회사에서 서기로 1년 동안 근무하다가 캘리포니아주 포클리시 캘리포니아 관립대학교 상과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고 대정(大正) 6년 10월 13일 경성으로 돌아와 원적지로 돌아갔다."
이와 관련하여 김춘기는 의친왕의 최측근으로서 2년 후에 추진하는 의친왕 망명 미수 사건
에도 깊이 관련되었던 인물입니다.
시간표를 보니 옛추억이 새롭습니다. 풍금 앞에 앉아 "젓가락 행진곡"을 쳐 봅니다. ㅎㅎㅎ
김란사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국권회복을 위하여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능통한 영어실력으로 여러 선교사들과 특별한 친분관계가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궁궐에 자주 입궐하면서 고종황제의 통역도 하였고, 엄귀비와도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김란사는 엄귀비에게 대한제국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멀리하고 미국과 친분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여성교육을 위하여 근대적인 학교를 많이 세워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여 엄귀비가 진명(進明), 숙명(淑明) 여학교(女學校)를 설립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종황제는 1918년 6월 의친왕과 김란사를 파리강화회의에 극비리에 밀사(密使)로 파견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함, 조선의 억울함 등을 알리고, 민족의 독립의지를 표명
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정동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였던 손정도 목사를 비롯하여
현순 목사와 최창식에게 두 밀사(密使)를 파리까지 안전하게 안내하라는 밀명(密命)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뜻밖에 붕어(崩御)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계획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김란사는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한 투철한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손정도 목사를
만나러 베이징(北京)행을 단행(斷行)하기로 결심하고 기회를 엿보던 중, 1919년 1월말에
국경을 넘어 2월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김란사를 만나러 상해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온 손정도 목사가 건강이 악화되어
합달문내(哈達門內)에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가영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김란사를 결국
만나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김란사가 동포들이 마련
해 준 환영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으로 인하여 1919년 4월 10일 베이징(北京) 협화의원
(協和醫院)에서 향년(享年) 45세를 일기(一期)로 서거하였습니다.
당시 장례식에 참석하였던 미국 성공회 책임자 베커가 김란사의 시신(屍身)이 검게 변해
있었다고 증언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김란사는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이 분명합니다.
옛 도시락입니다. 저희집은 가난하지 않아 계란의 소시지를 반찬 싸가지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부러워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1995년 자체 연구 끝에 “여성의 애국정신을 고취했다”는 공로를 인정,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그러나 훈장은 14년 동안 보훈처 캐비닛 안에 잠자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혈육이던 친딸이 18세에 사망해 남은 직계혈족이 거의 없었기 때문
입니다. 2009년에야 남편(하상기) 전처의 후손이 김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수소문해
우연히 훈장 수여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김란사 남동생의 손자인 김용택(68)씨는 “고모
할머니의 활약은 어릴 때부터 무수히 듣고 자랐지만 여성의 사회활동을 꺼려하는 사회
분위기가 강해 집안에서도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고혜령 전 국사
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은 “비운의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는 유관순 열사처럼 주목 받아야
할 여성독립운동가”라고 강조했습니다.
교실 뒷벽에 반공포스타를 붙였던 생각 납니다.
겨울에 도시락(벤또)를 난로위에 놓으면 밥이 누룽지가 돼기 일수이기에 나는 일찍 학교에
가면 난로 옆 밑에 놓았습니다. 그러면 적당하게 점심때쯤 따스한 밥을 먹을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로위에 놓은 도시락 안에 김치가 익어서 김치찌개냄새가 교실에 진동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1950년 625전쟁때부터 1964년 때의 교과서입니다. 이때가 우리 학창시절입니다.
김씨는 “당시 여자들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세례명을 받았다는 얘기는 나중에 역사가들에
의해 쓰여진 것 같다”며 “원칙적으로는 ‘김란사’가 맞습니다. 하란사란 이름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 때 입국심사관이 남편 성을 묻자 ‘하’씨라고 답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말했습니다.
하란사의 출생 연도도 1875년이 일반적 기록이지만 이보다 3년 앞선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입니다. 김씨는 “미국 출입국심사 기록에서 1872년으로 나온다”며 “이는 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본관 역시 김해 김씨가 아니라 전주(全州) 김씨라고 했습니다.
가장 큰 오해는 하란사가 기생 출신으로 남편인 하상기의 첩이 됐다는 설(說)입니다.
김씨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글 쓰는 이들이 확인 없이 인용했다”며 “할머니는 무역업을
하던 부친 밑에서 풍족한 생활을 누렸으며, 결혼 역시 하상기의 전처인 조씨 부인이 사망한
이후 시집을 갔다”고 반박했습니다.
1950-1970년대 초, 성냥, 크레파스입니다.
하란사는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것을 보고 교육의 중요성을 자각했습니다. 하지만 공부하기 위해 찾아간 이화학당은 입학을 거부했습니다. 하란사가 기혼여성인
데다 유력한 집안이라는 게 이유였습니다. 하란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몇 차례에 걸쳐
학교를 찾았고 하루는 교장 룰루 프라이 앞에서 등잔불을 직접 끄면서 말했습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밤중처럼 캄캄합니다. 나에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어머니들이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의연한 조선 여성의 발언 앞에 프라이 교장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학비는 자비 부담하겠다는
조건으로 하란사를 입학시켰습니다. 이 일화는 선교사였던 프라이 교장이 미국에 보낸
보고서에 그대로 기록돼 있습니다.
옛날 중.고등 교과서
이후 하란사는 공부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도쿄 게이오
기주쿠(慶應義塾)대에서 1년을 공부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정동교회에서 서재필의 ‘미국의
남녀 평등한 활동’이란 강연을 듣고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1897년 12월 15일 미국 샌프란
시스코항에 도착했습니다. ‘하란사’란 이름은 여기서 처음 사용했습니다. 그는 1898년부터
2년간 워싱턴DC의 하워드대학과 디커니스인스티튜트에서 공부했습니다. 이어 1900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해 문학을 공부하고 1906년 졸업, 문학사 학위를 받았
습니다.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고혜령 박사는 “하란사는 열렬하고 치열한 성격의 여성
이었다”며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교육받은 게 아니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소풍갔을때 보통 김밥과 사이다를 어머님이 싸줍니다. 그리고 돈을 몇푼 주면서 과자나
빵을 사먹으라고 했습니다.ㅎㅎㅎ
아이스케끼 통
하란사는 서울 남대문 상동교회에서 앨버슨 선교사와 함께 교회 부인영어학교를 부인성경
학교로 바꾸며 전도부인 양성에 힘을 썼습니다. 전도활동도 열심이었던 하란사는 1911년에만
14차례 전도를 나갔으며 1426차례 가정 방문을 했고 250여명의 여인들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하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감리교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마침 이
무렵 시카고대에서 신학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에 파이프 오르간을
보내기 위해 재미한인 동포에게 호소문을 보내고 순회강연을 다녔습니다. 은혜로운 예배를
돕자는 게 취지였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애국운동에 참여하도록
종용하자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모금운동을 벌여 1918년 우리나라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이 정동교회에 설치됐습니다. 오르간은 하란사의 나라사랑과 민족애가 녹아있는
애국의 상징이었습니다. 후손인 김씨에 따르면 하란사는 오르간이 정동교회에 설치되자
직접 연주를 했으며, 연주를 들었던 교인 모두가 감격해 울었다고 합니다.
광복 서울피난국민학교의 상장입니다. 단기 4285년이니까 서기 1952년입니다.
625전쟁중입니다.
전쟁중 천막교실입니다. 제 큰누님은 그당시 진명여중인데 부산피난시절(1950년)에 진명여중
부산분교에서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서울이태원 국민학교 졸업장입니다.
교복입니다.
화장실 청소
조선시대때 과거제도
논어 맹자 대학 이것은 선비들의 필수 과목이었습니다.
도산서원의 정경입니다.
명성보감
상장, 임명장, 합격증, 수험표입니다.
당시 문구점입니다.
또뽑기...
아이스케끼 통
서울 교육 박물관 뒤는 김옥균의 집터가 있었습니다.
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 사상가, 급진
개화파입니다. 1872년 문과 장원급제 후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
사상 확산에 힘썼으며,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에 임명돼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했습니다.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으나, 양무 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
민씨 세력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다 못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얼마 안되는 병력 부족
으로 청나라 개입에 막혀 3일 만에 실패했으며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청일 전쟁의 발발
직전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됐습니다.
조선으로 송환된 시신은 부관참시 후 8도에 효수됐습니다. 청일 전쟁 때까지 중일 두 강대국
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존재는 늘 뜨거운 감자였으며 동양 3국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
습니다. 후일 개화파가 집권한 뒤 복권됐고 일제 강점기 순종에 의해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
됐습니다.
본관은 장동(신 안동), 호는 고균(古筠), 별호는 고우(古遇), 망명 중에는 이와타 슈사쿠
(岩田周作)란 가명을 썼는데 갑신정변 실패 직후 망명길에 치토세마루(千歲丸)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합니다. 이와타 산와(岩田三和)란 가명도 사용했습니다.
집터에는 낙엽들이 싸여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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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기가 어디여?
옛날 경기고등학교
삼청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