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나무로 만든 일본 배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역대 최단 기간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명량’은 해전(海戰) 장면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순신이 이끄는 배 12척이 적의 함대 330척과 싸울 때 ‘충파(沖破)’라는 전술이 등장한다. 판옥선을 적선에 부딪쳐 깨뜨리는 것이다. 조선의 병선(兵船)은 소나무, 일본 병선은 삼나무로 만들었기에 가능한 몸싸움이었다.
삼나무는 소나무에 비해 재질이 무르다.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임진왜란 해전사’ 저자)는 “‘명량’에 등장한 백병전도 그렇고 충파도 당시 노량 해전에서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영화적으로는 충분히 그럴 법한 상상이다.
‘명량’을 보고 강판권이 쓴 책 ‘조선을 구한 신목, 소나무’(문학동네)를 다시 읽었다. 사진작가 배병우의 소나무도 떠올랐다. 흔한 것에서 귀한 것을 볼 줄 아는 시선 때문이다. 배병우는 1970년대부터 길을 따라가며 만난 나무와 숲을 카메라에 담았다. 청령포의 관음송, 제주의 곰솔, 불국사 뒤뜰의 솔숲…. '왜 소나무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궁금했다. 내가 뭐지? 우리가 뭐지? 하다가 자연스럽게 소나무로 관심이 옮겨갔다."
- 강판권 교수가 쓴 '조선을 구한 신목, 소나무'. 저자는 소나무를 “한반도의 수호신”이라고 말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군사력을 제압하는 전함이 돼 조선의 생명을 지켜낸 것은 바로 소나무였다”는 것이다.
소나무는 우리 산림 면적의 27%를 차지할 만큼 많다. 솔방울은 땔감이자 구황식품이었다. 소나무는 '춘양목' '금강송' '적송' 등 이름이 다양하고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正二品松)처럼 벼슬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낸다. 소나무로 역사를 읽는 것이다.불타기 전의 숭례문은 세종 29년(1447), 성종 10년(1479)에 고쳐 지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국보 제1호 숭례문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목조건물이라는 점이다. 복원에 사용한 소나무는 삼척 준경묘(태조 이성계의 5대조 양무 장군의 묘) 근처에 살던 금강송이었다. 준경묘역에 좋은 소나무가 남아 있는 것은 조선왕조가 왕족의 묘를 소나무가 울창한 곳에 만들어 보호했기 때문이다.세종이 부인 6명에 18남 4녀를 뒀듯이, 왕마다 비와 후궁의 자식이 많았다. 그들의 집을 마련하는 데도 적지 않은 소나무가 필요했다. 왕은 짓자 하고 대신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필수품이었던 옹기와 도자기는 나무 중에서도 소나무로 구워야 질이 좋았다. 세종 10년(1428)에 "지금부터는 각 고을에서 바치는 기와를 굽는 데 소나무를 쓰지 말도록 하라"는 조처를 내릴 만큼 소나무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렸다. 벌채가 심해 왕가의 관(棺)에 쓸 소나무도 부족했다.조선은 그래서 강력한 산림 보호정책을 폈다. 도성 주변의 사산(四山), 즉 낙산ㆍ인왕산ㆍ남산ㆍ북악산에서는 소나무 벌채를 금했다. 처벌 규정을 형조가 아닌 병조에서 관장한 것은 소나무 보호가 군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백성이 소나무 한 그루를 베면 곤장 100대를 때렸고 열 그루를 베면 가족을 변방으로 보냈다. 산지기를 두어 벌채를 막았고 수령이 산지기를 수시로 감독했다. 울산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에서 볼 수 있듯 왕실용 황장목(관을 짜는 데 쓰는 소나무)은 따로 관리했다.왜구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순으로 많이 침입했다. 서ㆍ남해안에 섬이 많아 기습이 쉬웠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부터 1443년까지 조선왕조실록에는 살상, 민가 약탈 및 방화 등 왜구가 끼친 피해가 적혀 있다. 그런데 저자는 '기존 연구는 모두 소나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썼다. 왜구가 들어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소나무라는 기록이 실제로 세종실록에 등장한다.'왜선을 추격하여 전라도 연해변 섬을 순행해보니 거기는 소나무가 무성하나 육지와 멀어 도왜(島倭)들이 매양 배를 만들기 위해 오는 것이니, (중략) 대마도에도 배 만들 만한 재목이 없으므로 전라 해도에 와서 배를 만들어 돌아가는 것입니다.'(세종 3년 8월 24일)
- 이순신(최민식)이 배 12척으로 적의 함대 330척과 맞선 명량해전을 그린 영화 '명량'. 배를 적선에 부딪쳐 깨뜨리는 전술 '충파'가 등장한다.
소나무는 해상 방위에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병선(兵船) 재목은 거의 100년을 자란 소나무를 썼고, 배 한 척 지으려면 재목 수백 주가 필요했다. 저자는 임진왜란을 '조선 거북선과 일본 안택선(安宅船)의 싸움, 즉 소나무와 삼나무의 싸움이었다'고 정리한다. 거북선은 소나무로, 안택선은 삼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삼나무는 소나무에 비해 재질이 무르다. 안택선과 거북선이 충돌하면 안택선이 부서질 위험이 컸다.김훈이 쓴 소설 ‘칼의 노래’ 135~136쪽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섬의 나무들은 키가 작고 구부러져 목재로 쓸 수 없었다. 송진만을 뜯어오게 했다. 거제도에 높고 곧은 소나무숲이 좋았으나 거제도 소나무는 적의 배에 쓰일 것이었다.연안의 해송을 베어냈고 안면도에 군사를 보내 홍송을 베어 뗏목으로 끌고 오게 했다. (…) 배 밑창에 목재를 댈 때 이음새에 송진을 처발랐다. 목재를 포개서 붙일 때는 나무못을 박았다. 못을 수직으로 박지 않고 비스듬히 박아 위아래를 관통시켰고 남은 못대가리를 대패로 밀어냈다. (…) 진수하던 날 새 배에서는 송진 향기가 났다.목수들이 뱃전에서 시루떡을 바다에 던졌다. 군관들이 새 배를 끌고나가 연안을 한 바퀴 돌며 총통을 쏘아댔고, 장졸들이 배 위에서 함성을 질렀다.”저자는 이처럼 소나무라는 렌즈로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본다. 거북선을 소나무로 만들었다는 것도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조선과 일본의 전함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가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쉽고 알차다. 나무와 인문학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은 그는 다음엔 사찰이나 서원을 나무의 관점에서 분석해보고 싶다고 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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