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1251년)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인리(緇仁里) 해인사 경내의 2동(棟)의 장경판고(藏經板庫)에 보관되어 있는 약 8만여 장의 대장경판.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정식 명칭은 '해인사 대장경판'이나, 보통 '팔만대장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장경판은 종이에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으로써 책이 아니다. 해인사의 수다라장 다락방과 강원도 평창군의 오대산 월정사 그리고 부산의 동아 대학교에는 해인사 대장경판을 인경하여 만들어진 대장경 판본 책들이 소장되어 있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숫자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처음 8만1258판으로 집계했다. 정부가 1962년 국보 지정 당시 별도의 확인 작업 없이 이 숫자를 그대로 적용하면서 그동안 정확한 숫자, 훼손 여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이에 따라 2000년부터 실시한 ‘해인사 고려대장경 디지털 영상화 및 기초자료 데이터베이스 사업’, 2014년에 수립한 ‘해인사 대장경판 중장기 종합 보존관리계획’에 따른 조사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8만 1352판으로 밝혀졌다.
2. 역사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며 인간의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에서 유래되었다. 초조대장경은 대반야경 6백 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천여 권을 포함하고 있었다. 초조대장경은 원래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부인사와 대구 그리고 팔공산으로 옮겼다.
그 뒤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졌으며,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南禅寺)에 일부분인 1,715권의 인경본만이 전하고 있다. 이 외에 대마도의 한 신사에 있던 500권은 모두 도둑맞았다. 그 외에 국내 수집가나 국가기관에서 인출본을 꽤나 많이 역수입하여 현재는 국내에도 상당한 초조대장경을 가지고 있고, 이들은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초조대장경을 조판한 후 거란군이 물러갔듯이 불력으로써 몽골군을 쫒아내기 위해 본래 강화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어 오고 있던 경판들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합천 해인사로 옮겼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규보가 쓴 글에도 "전에도 거란이 쳐들어 왔을 때 초조대장경을 새기니 거란이 알아서 물러갔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의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는 이를 두고 1924년에 발표한 논문 《고려의 대장경》에서 "몽골의 침공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국방 능력이 없었던 고려 군신들의 종교상 미신의 결과물"이라고 비웃었지만 정작 그런 일본 역시 몽골이 쳐들어오자 일본 덴노가 피로 불경까지 베끼며 국난을 물리치길 기원했다. 덕분에 당시 한국인 사학자들도 이걸 이야기하며 덴노가 종교 미신이나 믿었다고 욕하냐라며 비꼬았다.
서여 민영규(2005년 작고) 박사는 1996년에 발표한 《고려대장경 신탐 - 바로 잡아야 할 그리고 새로운 몇 가지 사실들》이라는 논문에서 대장경 조판이 가지는 의의를 재조명하고자 했는데, 민영규 박사는 고려 최씨 무신 정권이 불교계를 회유하기 위한 결과물이 바로 재조대장경 조판이었다고 주장했다. 선종 불교와 이어져 상대적으로 기존 왕실이나 귀족들과 커넥션을 가졌던 교종 불교계와 거리가 있던 무신 정권(특히 최충헌 이래 최씨 무신 정권)이 몽골의 침공이라는 처음으로 일어난 국난으로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는 지경에 이르자, 그 기회에 그때까지 사이가 소원했던 교종 불교계를 회유해 정권에 대한 반발 세력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최씨 정권 및 이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서 재조대장경이라는 16년에 걸친 불교 사업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 즉, 다시 대장경을 조판하게 된 연유 때문에 팔만대장경을 재조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이러한 조판은 국가 사업이었으며, 따라서 최우는 이를 위해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였다. 판각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이 맡았다.
이케우치 히로시의 지적에 따르면 남해분사대장도감 조조(혹은 개판)의 간기를 구비하는 것은 모두 정안의 투자로 이루어졌는데, 이 정안은 당시 무신 정권의 집권자 최이의 처남이었다. 최우 자신도 생전에 진양후에 봉해졌는데 여기서 진양은 지금의 경남 진주시로 최씨 무신정권의 개인 식읍이기도 했다. 정안 자신도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데 남해와 진주, 하동은 서로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8만 장에 달하는 경판의 서체가 모두 일정하며, 오탈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체가 일정한 것은 글씨를 담당한 사람들의 글씨체를 모두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거의 1년에 가까운 훈련을 했기 때문이라 알려져 있다.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글자수는 52,729,000자이다.발견된 오탈자는 5200여만 자 중 단 158자, 그것도 현대에 와서 겨우 찾아냈다. 오탈자율이 0.0003%. 이것이 어느 정도 되는 오타율이냐면, 지금 당신이 200자 원고지 1,645장 분량이 되는 글을 쓰면서 그 안에 오탈자를 한 글자 이내로 할 수 있겠는가? 전설에 따르면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했다고 한다. 즉, 이 작업을 하면서 절을 무려 1억 5천만 번이나 했다는 이야기다.
3.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대한민국 국보 제3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원활한 통풍을 위해 건물 앞뒤와 위아래에 위치한 창의 크기를 달리하는 등 과학적 건물 설계가 돋보인다. 이러한 장경판고는 1995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장경판고는 세계의 도서관 건축을 다룬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건축사 교수 제임스 W.P 캠벨의 저서 <세계의 도서관> 첫머리에 언급된다.
이어 2007년 6월에는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을 한데 묶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4. 위험했던 순간
여담으로 사라질 뻔한 순간이 3번 있었다.
첫 번째는 바로 조선의 세종대에 벌어진 일로 당시 일본은 조선에 꾸준히 팔만대장경판을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일본의 의도는 조선은 숭유억불이 기조였기 때문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파악한 조선 조정에서는 대장경은 나라에서도 귀한 것이라는 연유로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일본이 계속해서 대장경을 청구하자 세종이 대장경판을 넘겨 주려고 했다가 신하들의 항의로 철회한 후 기존의 방침을 고수했다.
임금이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나라에서 청구한다 하여, 처음에는 이를 주려고 하매 대신들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일본이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일이 좇다가 뒤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이는 먼 앞날을 염려하는 것이 되지 못하옵니다.'' 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임금이 일본의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ㅡ 세종 22권,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2월 25일(임신년) 1번째 기사.
다시 말해 경판이 소중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것을 요구한다고 하여 주었다가 나중에 일본 측에서 주어선 안 되는 물건까지 요구할 것을 경계했다는 이야기이다. 대신 경판들을 인경한 대장경본들을 보내는 식으로 일본이 요구하는 바를 무마시켰다. 한편 세종은 직접 지시를 내려서 서울로 대장경판을 가져올 것을 검토했지만 예산 문제로 기각되었다.
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청하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밖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 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 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開慶寺)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 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겠지만, 단지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부에 논의하라.” 하니, 모두 말하기를, “수송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그 감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그 수령으로 하여금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ㅡ 세종 77권,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2년) 4월 28일(정해) 3번째 기사
덧붙여 세종은 한양으로 옮겨 보관할까 했지만 비용 따위 여러 준비 문제가 걸려 흐지부지되었고 도리어 이게 팔만대장경에게 좋게 되었다. 6.25나 임진왜란, 기타 각종 훼불 사건 등의 여러 참극을 생각할 때 서울로 옮겼다면 현존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 대장경의 이동장소로 거론된 양주 회암사는 무려 태조 이성계가 자주 거처했고 무악대사가 머물던 고찰임에도 수시로 유림들의 방화와 훼손으로 불상이 죄다 목이 잘리는 등 파괴를 당했고 이미 16세기에 소실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다.
전해 내려오는 기록물들을 살펴보면 일본뿐만 아니라 류큐 왕국도 시시때때로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고 팔만대장경판의 인경본을 받아갔다. 류큐에서는 여러 번 팔만대장경판의 인경본을 받아가다가 아예 원판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조선이 이를 거부해서 인경본을 받아갔고, 슈리성 옆의 엔가쿠지(円覚寺)에 보관했지만 1609년 사츠마번의 침공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리고 인쇄본으로 만족하지 못한 일본은 팔만대장경을 갖기 위해 가짜 나라를 내세워 조선과 우애를 위하여 달라고 하는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1484년 이천도국이라는 가짜 나라 사신을 내세워 요구했다가 거부당했으며 1741년에는 구변국이라는 가짜 나라를 내세워 같은 짓을 하려다가 역시 거부당했다. 급기야는 해인사로 무장 군대를 보내 약탈하려다가 무산된 적이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노렸는데, 해인사 승려들이 차라리 장경을 불태워서 같이 타 죽겠다고 하며 죽을 각오로 막았기에 일본도 번번이 반출하는 데 실패했다. 심지어 한 승려는 칼을 가져와 자해하면서 대장경을 가져간다면 내 피로 더럽히고 내 원한을 묻혀 보관하는 일본 어디라도 저주를 내리겠다고 할 정도로 목숨을 바칠 각오로 막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매천야록에서 황현도 이에 대해 감탄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해인사에 벌어진 화재로 일곱 번에 걸쳐 해인사 여기저기가 불타는 꽤 큰 피해였음에도 대장경은 멀쩡했다. 이 정도면 거의 초월적인 존재의 가호를 받는다고 생각될 수준.
숙종 21년(1695) : 동쪽의 많은 요사와 만월당, 원음루 화재.
숙종 22년(1696) :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전 화재.
영조 19년(1743) : 대적광전 아래 수백칸 당우 화재.
영조 39년(1763) : 화재
정조 4년(1780) : 무설전 화재.
순조 17년(1817) : 수백칸 당우 화재.
고종 8년(1871) : 법성요 화재.
세 번째로 경판들이 소실될 뻔한 일은 한국전쟁 때 미국 공군이 공습 할 때다. 전쟁 중에 빨치산들이 해인사에 숨어들자, 미군 군사고문단이 한국군 F-51 조종사였던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에게 빨치산 소탕을 위해 해인사 폭격을 명령했지만, 김영환 장군은 문화재 소실을 우려해 빨치산은 금방 빠져 나갈 것이나 문화재를 잃으면 복구할 길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명령을 거부했다. 당시 군법에 따라 전시 명령불복종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이승만이 총살하라며 대로(大怒)할 때 배석하고 있던 공군참모총장 김정렬(김영환의 형)이 팔만대장경이 지닌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그간 세운 전공이 있었던 덕분에 즉결처분은 모면했다고 한다.
이후 김영환 장군의 말은 들어맞아 빨치산들은 곧 해인사를 빠져나간 덕분에 대장경은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이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에 김영환 장군에게 금관훈장을 추서했다.
4.1. 보관 문제
대장경 일부가 세월 흔적에 훼손된 게 있다. 아주 극소수이긴 하지만. 개중에는 벌레가 파먹은 듯한 흔적도 있어서 흰개미 같은 나무에 해충이 되는 벌레가 노릴까 하여 해인사 측이 흰개미가 둥지를 지을 만한 근처 나무를 미리 자른 적도 있다. 하지만 곤충학자들에 따르면 흰개미는 오래된 경판을 먹지 않으니 큰 걱정이 없다는 태도이다.
다음은 먼지. 이 먼지도 오래 쌓이면 경판에 해가 된다. 예전에는 승려들이나 불자들이 자발하여 하나하나 붓으로 천천히 먼지를 털었지만 이젠 관광객이 많아져서 먼지가 더더욱 많이 쌓여지고 저렇게 털 틈도 없다. 진공청소기를 쓰자면 경판에 해가 될 거 같기에 한 청소기 업체에서 6달이 넘게 바람을 최대한 적게하고 나무에 해가 안 가게 연구하면서 특별히 만든 청소기를 쓰지만 역시 사람 손으로 터는 게 낫다고 하여 주기를 두고 관리하며 손수 털기도 한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경판의 마모 문제인데 반야심경 등 대중에 인기가 많아 인경(印經)할 일이 많은 경판에서는 글자가 깨진 것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1960년대 이후로는 인쇄를 안 하고 있어서 글자가 마모될 염려는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