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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110(2021)년 6월 28일 《통일의 메아리》
극적인 인생전환
이 시간에는 일화 《극적인 인생전환》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주체37(1948)년 3월이였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남북련석회의를 친히 발기하시고 남조선의 각당, 각파, 각계층 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도록 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명단대로 초청장을 작성하던 일군들은 어느 한 이름에서 눈길을 딱 멈추고 굳어져버렸습니다.
김구,
그들은 놀라움과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한것은 그가 공산주의자와는 도저히 화합될수 없는 완고한 반공분자로 락인되고있었기때문이였습니다.
해방후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은 친일지주, 자본가세력의 집단인 《한민당》이 림시방편으로 내세웠던 《림정추대》에 편승하여 민주세력과 정면대립해나섰는가 하면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이 전해졌을 때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리승만과 쌍벽이 되여 《반탁》운동을 주도하면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그의 휘하에 집결되였던 우익반동들은 그의 이름을 빌어 횡포한 백색테로를 감행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이였던 강량욱목사의 아들, 딸들이 그의 명함을 가진 테로단에 의하여 살해당한 사실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사태로 하여 그는 이무렵 《테로의 두목》으로 불리울 정도로 민주세력, 특히 북반부인민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해방전 《림정》에서 활동할 때에도 그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테로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향하에 《림정》과 기맥이 통하고있던 동북의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가는 청년들을 부당하게 살해까지 하였던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해방전부터 화해할수 없는 반공분자였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의 영구분렬이라는 정세하에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그의 애국심을 귀중히 여기시고 그를 불러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대해같은 도량과 뜨거운 포옹력에 의해 초청장은 남조선의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선생에게 정확히 전달되였습니다.
그런데 초청장을 받은 그자신이 선뜻 발을 내짚지 못하고 주춤거렸습니다.
그에게 인식된 공산주의자들이란 민족은 안중에 없고 계급투쟁만 부르짖으며 덮어놓고 민족주의자들을 경멸배척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과연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질시하면서 테로까지 공공연히 감행해온 자기와 진심으로 손을 잡자고 한단 말인가.…
의심과 동요와 번민속에 모대기면서도 민족분렬의 현실을 외면할수 없었던 김구선생은 자기의 비서를 먼저 평양으로 떠나보냈습니다. 평양으로 가더라도 담보를 받고 가자는것이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런 그를 탓하지 않으시고 《특사》를 흔연히 만나주시였습니다.
접견석상에서 《특사》는 김구선생의 의사를 이렇게 말씀올렸습니다.
《장군님, 백범선생이 평양에 들어와서 장군님과 만나겠는데 과거를 백지로 해주실수 있겠습니까?》
간단치 않은 요구조건이였습니다.
하지만 민족대단결로 조국통일위업을 이룩해나가실 웅대한 뜻을 품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즉석에서 쾌히 답변을 주시였습니다.
좋다, 백지다!
이렇게 되여 백범이 평양으로 오게 되였습니다.
백범이 평양에 체류한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버이수령님의 위대한 사상과 걸출한 령도력, 숭고한 인덕에 완전히 매혹된 그는 그이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면서 《반공》으로부터 련공합작에로 극적인 인생전환을 하게 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했다가 서울로 떠나려는 백범을 만나주실 때였습니다.
《장군님,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백범 김구는 이렇게 정중히 말씀드리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묵직한 함을 그이앞에 내놓았습니다.
《지난날 저는 해외로 돌아다니면서 크게 하는 일없이 <상해림시정부>의 법통을 지켜왔습니다. 적으나마 민족사에 흔적을 남긴 <상해림시정부>의 인장을 받아주십시오.》
참으로 뜻밖의 일이였습니다.
《상해림시정부》의 인장이라면 그가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겨오던것이였습니다.
그 인장으로 말하면 백범 김구와 그 동료들이 피어린 3.1운동을 계승하는것으로 자부하는 《림시정부》의 법통을 상징하는것으로서 그것만 꺼내보이면 천하가 자기들을 《정부》로 인정해줄것만 같아 상해에서도, 머나먼 중경에로의 피난길에서도 그리고 귀국의 수천리길에서도 그가 애지중지 품고다닌 《옥새》맞잡이였습니다. 그것을 지금 제손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올리겠다는것이였습니다.
김구선생으로서는 하나의 결단이였습니다.
그것은 파란곡절많은 70고령을 넘긴 백범이 이제 민족의 운명과 자신의 넋을 다 민족의 령수, 절세의 위인이신 위대한 수령님께 의탁하겠다는 뜻깊은 인생전환의 선언을 의미하는것이였습니다.
그가 올린 인장을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을 받는것을 사양하시면서 자신에게는 그저 인민대중의 두터운 신임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이 겸허한 풍모에 더욱 감동된 백범은 그이이시야말로 우리 민족이 받들어나갈 참된 령도자이시라는것을 다시한번 더욱 깊이 느꼈습니다.
그후 남조선에 돌아간 백범은 련공으로 돌아선 자기의 신념을 지켜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통일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걸어갔습니다.
지금까지 일화 《극적인 인생전환》을 보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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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에서 세금제도의 완전한 페지는 언제 실현되였는가>
주체50(1961)년 9월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4차대회에서는 로동자, 사무원들의 소득세와 농민들의 현물세를 없앰으로써 낡은 사회의 유물인 조세제도를 종국적으로 없애고 근로자들을 온갖 세금부담에서 완전히 해방하며 그들의 실질적소득을 더욱 높일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였습니다.
특히 7개년계획기간에 로동자, 사무원들의 실질수입은 1.7배로, 세대당 실질수입은 7년동안에 2배이상으로 높일데 대한 웅대한 목표와 함께 앞으로 짧은 기간에 주민들로부터 받는 세금을 없앨것을 예견하였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국가예산수입의 많은 부분이 사회주의적국영기업소들에서의 축적에 의하여 보장되고있었으며 주민들로부터의 세금수입은 보잘것없는 아주 낮은 비중을 차지하고있었습니다.
경제, 문화건설에 필요한 자금이 국가축적만으로 능히 해결될수 있는 조건에서 이제는 세금의 완전한 페지를 일정에 올리는것이 가능하게 되였던것입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력사적인 보고에서 로동자, 사무원들의 소득세와 농민들의 현물세를 없앰으로써 낡은 사회의 유물인 조세제도를 종국적으로 없애고 근로자들을 온갖 세금부담에서 완전히 해방할것이며 그들의 실질소득을 더욱 높이게 될것이라고 천명하시였습니다.
이후 우리 나라에서는 자립적민족경제건설로선을 철저히 구현하여 나라의 경제토대를 더욱 튼튼히 하고 인민생활향상에서 획기적인 전진을 이룩하였습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전원회의에서는 사회경제발전의 성숙된 요구를 반영하여 낡은 사회의 유물인 세금제도를 완전히 없앨데 대하여 토의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체63(1974)년 3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3차회의에서 법령 《세금제도를 완전히 없앨데 대하여》가 채택됨으로써 4월 1일부터 세금제도가 완전페지되였습니다.
하여 세금없는 세상에서 살아보려던 인민들의 꿈은 드디여 현실로 되였으며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세금없는 나라로 되였습니다.
이것은 근로자들의 복리를 높이는것을 자기 활동의 원칙으로 삼는 인민의 진정한 당에 의하여서만 실현될수 있으며 인민대중이 나라의 주인으로 된 사회주의제도에서만 실현될수 있는 력사적사변인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세금을 완전히 없앨데 대한 법령이 발포된 때로부터 어언 4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이 나날에 우리 인민들은 세금없는 세상에서 남다른 행복을 누려왔으며 자신들이 얼마나 고마운 품에 안겨사는가를, 사회주의제도가 얼마나 우월하고 귀중한가를 뼈속깊이 새겨안았습니다.
첫댓글 쿠바도 50년만에 세금징수가 부활되어서리, 북만이 세금없는 나라네요.
정보전이나 테러전의 기본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인데...
테러분자에게서 김구의 명함이 나왔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당시 정치적으로 상호 모함과 기만,첩보,이중간첩,테러, 소요 등이 난무했을 시기인데...
그냥 시기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정치적으로 김구의 대척점의 진영이거나, 국공합작 반대 진영 짓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됩니다
임시정부 때 이미 수차례 비밀작전을 지휘한 김구가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을테니까...
@인향만리 지금의 정치술수 모습과 옛날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단지, 민족을 위한 애국으로 진정성 있게 서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모습이 70년을 지난 이제는 결실을 맺으면 좋겠습니다 ^^
@김덕신 당연히 결실을 맺어야죠.
그러러면 상호 신뢰가 전제인데, 국힘당이 적대적 태도로써 정치적 기반을 삼고 있기에 지금의 국힘당으로는 요원하다고 생각합니다
@인향만리 국힘당이 정권을 잡으면 전쟁이라고 봐야죠. 그래서 더더욱 민주당의 정권연장이 필요한데....
운명론은 거시기하지만 결국, 파인데로 물은 흘러가겠지요.
@김덕신 전면 전쟁은 명분도 뚜렷이 있고, 100%승리를 확신하며, 아군의 피해가 거의 없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승리 후 질서 유지까지도...
미국이 자국의 영토와 국민 희생을 감수하는 전쟁을 못하는 것 처럼...
@인향만리 힘의 균형은 전쟁으로 깨진다는 것이 인류역사의 결과물입니다.
미중,남북대결은 결국 전쟁입니다.
단지, 남북은 작은 전쟁이고 미중은 큰 전쟁입니다.
왜 그렇게 전쟁으로 흘러간건지 현생인류는 두눈으로 보고 있는 중입니다.
세금제도의 완전한 페지는 1974년이지만
그 뿌리는 훨씬 오래전인
간고한 항일혁명시기에 이루어졌지요
만주 간도에서 항일유격대가 창건되고
각 지역에 유격근거지들이 창설되였고
인민혁명정부가 창설되여 수천명의 유격구인민들에게
인민혁명정부는
무상치료와 무료교육을 실시하였고
당연히 세금도 없었고 화페도 없었지요
세금이 없다면 국민들이 전원 국가가 경영하는 각종사업에
동원돼야 하죠.
결국이것은 세금을 돈으로 받지 않는 것이지
노동의 댓가로 배급을 받으면서 세금도 다 낸다는 경제구조이죠.
방식만 다르지 경제순환고리는 다 같습니다.
국가가 배급제를 실시하면 국가수뇌부가 경제논리와 사회논리가
매우 발달돼서 어떤 제도보다도 고효율성이 담보가 돼야 하죠.
이런 집단적 노동은 오로지 사람의 기계적 신체노동만을 강조하게 되고
결국 가장 저효율적 생산방식으로 전락하여
마침내 효율성부족한 제도에 만족하는 수뇌부의 무지가
공산주의라는 개살구를 버리게 하죠.
노력봉사가 빛을 내려면 그만한 경제효과를 누리게 돼야 하는데
제도에서 오는 태만과 만용이 결국 지도부의 목을 날려버리고
한 때에 풍미한던 미개한 공산주의는 막을 내리고 말죠.
권력정점의 수뇌부판단력이 초등학교수준이라서
그런 결과를 낳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