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나들이
얼마만의 출사(出寫)인가. 헤아려보니 한 보름은 되는 것 같다. 부산불꽃축제이후 거의 보름을 나는 칩거 상태인 채로 세상을 외면하고 은둔자처럼 지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손끝도 까딱하기 싫은 때문이었다. 너무 무리를 했었나, 이른 아침부터 사진찍기 좋은 자리를 점유하면서 하루 종일 서성거리며 자리를 지키느라 온종일을 힘에 부치게 운신한 탓으로 몸이 심히도 압박을 받았을 개연성이 커 보였다. 무릎 관절과 허리 쪽의 협착증으로 인한 통증이 예사롭지 않은 때문이었다. 몸은 그렇다 쳐도 정신적 무기력증과 음울함은 더욱 나를 좁은 공간 안에 갇히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성싶었다. 그런 시간을 죽음처럼 보내고서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외출을 감행했다.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향 없이 집을 나선다는 느낌이 바로 이럴 거였다. 버스를 타고서야 비로소 목적지를 확정할 수 있었다. 오늘은 동구 쪽을 살펴 볼 엄두를 냈다. 하긴 지난 10월에는 동구 매축지를 탐방한 경험이 있다. 미구에 사라질 골목길을 마지막 삼아 투어한 것이었다. 도시는 시간에 따라 언제나 얼굴을 바꾸며 변신을 꾀하기에 자칫 시간을 놓치기라도 하면 우리는 미래에 소중한 회상거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증언할 수 없는 과거는 불확실하고 무익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미래를 혼란에 빠뜨리기 십상이다. 우리가 과거사를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수시로 옛일을 두고 갑론을박 시비를 자주 벌이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확한 자료를 남기지 못한 데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늘 과거를 적폐로 모는 어리석음을 반추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나라가 고통스런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부끄러운 모습조차도 역사의 현장으로 남겨 훗날에 교훈으로 삼는 정신은 충분히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나의 험난했던 청소년 시절과 신산했던 삶의 이력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참으로 보람 있는 역정으로서의 가치를 발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현재의 행복과 여유는 과거의 쓰라린 시련과 고통이 있었음으로 해서 더욱 빛나고 감사하며 자랑스런 것이다.
나는 서면 롯데백화점 앞에서 67번 버스로 갈아타고 동구 좌천동 가구거리 앞 정류소에서 내렸다. 드디어 오늘 투어할 목적지에 내린 셈이다.
동구 범일동 간선도로 양쪽의 가구거리는 50년대부터 형성된, 부산시내 가구점의 발상지대라 할 만하다. 2백여 개에 가까운 점포가 성업중이며 점포마다 직영공장을 가지고 있는 등 점포 나름의 특징이 있어 고객의 기호를 충족시키고 있다.
70년대 장식용 가구의 등장과 대량 수요증가로 칠기상가가 생겨 100여 개의 업소가 밀집된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대의 가구 상가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범일동의 농방(가구)거리와 좌천동의 자개골목은 바늘과 실의 관계라 할 수 있다. 농장을 만드는 농장공예는 범일동에서 일어나고 자개농과 자개장식구에 박을 자개를 갈고 닦는 조각공예는 좌천동에서 번창하여 서로를 돕게 되었다.
자개농, 자개경대, 자개함지, 자개항아리, 자개상자, 자개필통들이 한국의 특산물이 된 데에는 이 좌천동 자개골목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일신기독병원은 호주 장로교 선교회에서 의료 선교사로 파송된 맥켄지가(家)의 매혜란과 매혜영, 두 딸에 의해 설립되었다.
1952년 당시 6.25전쟁으로 부산에는 수많은 피난민과 빈곤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나, 그 당시 부산에는 의료기관이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때에 호주선교사 두 자매가 수많은 산부인과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일신부인병원의 문을 열어서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정신은 변함없이 지켜져 왔고, 의료와 시술은 시대에 맞춰 발전되어 왔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딸애를 이 병원에서 출산케 하였다. 지리적으로도 가까웠고(집은 문현동, 병원은 좌천동), 의료비가 저렴하다는 까닭에서였다.
일신기독병원은 우리나라 의료 환경이 열악한 1950년대부터 선진화된 의술과 사랑과 관심으로 여성과 산모와 갓난 아기의 생명을 구해왔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농·어촌(대저,철마,다대 등) 지역을 중심으로 매주 2회씩 직접 무의촌을 방문 진료했다.
이와 같은 진료 체계로 무료진료금액이 많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 호주선교회에서는 맥켄지 화운데이션을 만들어 후원금이 전달되었다. 이런 진료 현장이 알려지면서 많은 환자와 산모들이 모여들었지만 전국 어느 병원에 비하여도 낮은 모성사망률과 높은 출생 수를 자랑하고 있어 1952년 이후 2000년 8월에는 250,000번째 아기가 출생하였고 개원 66주년을 맞이하는 2018년 현재까지 총 출생아기 수는 약 295,000여 명에 달한다.
좌천동굴은 정공단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평일에는 동굴 개방을 오후 4시까지 하는데 이날 마침 나는 오후 4시 문 닫는 시간에 닿아 동굴내부를 탐사할 수는 없었다.
충장공 정발 전망비는 1761년(영조 37) 경상좌수사 박재하가 영가대에 세운 것인데, 일제강점기 전차선로 개설에 따라 영가대가 헐리면서 정공단으로 이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忠壯公鄭撥戰亡碑’라는 비제(碑題)가 횡으로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임진왜란 당시 정발 장군의 행적과 비를 세운 내력이, 비의 좌측면에는 이 비석의 건립일, 우측면에는 박재하의 명(銘)이 적혀있다.
부산포 이야기
부산포는 현재의 동구 좌천동과 자성대 일대 부근을 가리킨다.
조선은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놈들의 통제를 위해 1407년(태종7년) 부산포를 개항하고, 이곳에 왜관을 설치하여 교역 및 접대의 장소로 사맜다.
성종 즉위년인 1469년에는 동평현 관내 인근의 가마솥처럼 생긴 산 이름에 따라 이곳의 원 지명인 ‘富山浦’가 ’釜山浦‘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 첨사영(수군첨절제사영)이 들어서면서 왜구를 막는 중요한 국포 변방의 군사요지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부산포는 국방의 중요한 길목인 까닭에 임진왜란의 첫 결전지가 부산진성 전투였고, 적군도 임란 때 가장 용감한 장수로 정발 장군을 일컫는다.
김영숙 해설사님은 번거롭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나의 정중한 사양이 있었음에도 안용복 장군과 문화관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특히나 해설사님의 정확한 역사 연대를 기억해 내는 머리와 명확한 내용설명은 나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안용복(安龍福) 장군은 누구인가?
안용복 장군은 부산 동구 좌천동(현 매축지) 출신으로 홀어머니 아래에서 나라에 대한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는 엄한 가훈을 받고 자랐으며, 독도를 우리나라 고유 영토로 인식하고 이를 지켜낸 인물로서, 우리에게 영토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준 역사적 인물이다.
《미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부산을 중요 선교지로 지목하여 배위량(W.Baird) 선교사를 부산으로 파송한다(1890년). 배위량은 미국 공사 헤어드(A. Heard)의 조력으로 부산진에 약 80평의 대지의 한옥을 확보, 동년 11월 그는 부인과 함께 당시 공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 몇 사람과 예배 드리게 되었던 것이 부산교회(후에 부산진교회로 개칭)의 시작이다.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by H.A.Rhodes, P.129)》-교회연혁에서
일신여학교 지붕
좌천동 경사형 엘리베이트는 2016년 3월부터 운행되고 있는, 세계에 설치된 수직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트, 경사 엘리베이터, 휠체어 리프트 등 각 분야에서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제품을 선정해 시상하는 엘리베이터 월드(Elevator World, Inc)로부터 2017년 세계 경사 엘리베이터 콘테스트(Project of the Year)에서 1등으로 선정됐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행정자치부 주관 2016년 행정생산성 향상 부문에서 장관상을 받았다.
건물 등에 설치 운행하는 일반적인 엘리베이터와 달리 부산 도시재생사업으로 건물이 아닌 기존 거주지에 설치, 지역 주민과 관광객의 편의를 증진시키고 교통 약자의 보행환경을 개선한 점이 높게 평가됐다고 엘리베이터 월드측은 밝혔다.
부산 최초의 경사형 엘리베이터는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에서 증산공원까지 98m 구간에 설치돼 운행되고 있다. 이 구간은 주민들 사이에서 ‘지옥의 계단’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평소 이곳은 평균 경사가 약37도로 가파른데다 계단 수만 190개나 돼 산복도로와 증산공원을 오르내리는 주민들과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깔딱고개로 불려지기도 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산복도로 관광에 나선 관광객들도 계단 오르내리는 것이 힘들어 다시 찾기를 꺼려할 정도로 불편을 토로해 온 터였다.
이 경사형 엘리베이터는 1구간(63m)과 2구간(62m) 각각 1대씩 설치됐다. 한번에 최대 13명(900kg)을 태우고 1분 정도 걸려 오르내린다.
이 엘리베이터는 분속 60m로 비교적 느린 속도로 비탈길을 운행해 탑승자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탁 트인 경관을 구경하는 이색 즐거움도 누릴 수 있어서 산복도로관광의 새 명품 코스로 부상하고 있다.
엘리베이터의 외벽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경사를 오르내리는 동안 멀리 북항대교와 탁 트인 산복도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내부에는 CCTV와 냉난방 시설을 갖추고 3중장치도 마련하는 등 안전에도 철저히 신경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