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 / 유현숙
산바람이 차다는 한계령에서 온 메시지입니다
덕장에 널린 명태들의 떼울음을 듣습니다
강원江原의 겨울을 엿듣습니다
그가 안고 떠난 울음입니다
동쪽에서 들려온 이 울음을 길게 펼쳐 드는 동안
나뭇가지는 야위어갔고 내 목청은 다 닳았습니다
날 저물어 山집에 든 그는 이 울음을 갈아 글씨를 씁니다
깊은 그믐의 밤입니다
떨어져 앉은 사람들이 떨어져 앉은 채로 잠들지 못합니다
나무 향이 쌓이는 처처悽悽한 산골에다 그를 풀어놓는 그가 있고
불빛 작은 이 누옥에다 나를 풀어놓는 내가 있습니다
마을에는 그저 흰눈이 내렸으며 아침은 더디게 오고 있습니다
각수刻手는 아직도 산벚나무 목판에다 칼질을 하고 있겠지요
찻물만 따르는 한겨울, 거기도 여기도
깊디깊은 강원講院의 밤입니다
미시령에서 / 강연호
올 때는 한계령을 넘었으니
이제 미시령 타고 돌아가자며 우리는 쉽게
결정했다 때로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
세상 건너가는 법 아니겠냐고
폭우 쏟아지는 오르막을 무릅쓰는 동안
방향 없는 왜바람 몇 자락에도 움찔 놀라
차는 자꾸만 시동을 꺼뜨렸다 운전이 서툴러서도
굵디뻑센 빗발 때문도 아니었으리라
너나없이 무겁게 실어놓은 쓸쓸함 감추려
차창을 열고 고래고래 악쓰며 노래부르며
이대로 실종되자고 시끌벅적했지만
굽이치는 산맥의 옆구리에서 끊임없는 안개다발
풀어지니 한여름 폭우쯤에도 가슴이 시려
저마다 문득 때아닌 군불을 지피고 싶었다
한계령이거나 미시령이거나
시원하게 뚫린 도로와 가드레일과 낙석주의 표지판,
지나온 곳과 가야 할 곳 명쾌하게 지시하는 이정표있으니
우리 건너가야 할 세상 멈춰 서게 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일기예보는 고개 너머 저쪽
춘천조차 맑다고 자못 경쾌했지만
낮은 포복으로 산맥 오르다 지친 먹장 구름들
되내려와 이곳에만 폭우 뿌려 분탕질하며
왜 함께 젖지 않느냐고 쏘아붙이고 있었다
허나 마음 둘 곳 없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여서
함부로 차를 몰면 어느새 미시령 꼭대기
휴게소에 잠시 들러 먹는 강원도 감자맛이
어째 영 아니다 싶어 문득 고개들어 바라보면
아, 일제히 주먹 쥐고 감자먹이는 산
미시령이거나 한계령이거나
어느 세상인들 만만하게 건너갈 것인가
입안 가득 씁쓸한 감자를 삼키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서둘러 남은 길 재촉할 때
그제야 조용해졌다며 산은 천천히 돌아눕고 있었다
- 강연호 시집 <비단길> 1994
나와 백석과 하얀 차와 한계령 / 김왕노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는 백석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면
오늘 밤 푹푹 눈은 내려라.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여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앉아 적설의 량만큼 그리움을 푹푹 쌓는다.
그리움을 쌓으면서 생각한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와
눈이 푹푹 쌓이는 밤에는
차를 타고 한계령을 넘어가 한 살림 차려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그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 누군가는 이 쌓이는 적설의 그리움이라면
아니 올 리가 없다.
한계령을 넘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이름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그 누군가는 나를 사랑하고
주차장에서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쓴 차는 오늘 밤이 좋아
부릉 부릉 혼자서 시동을 걸어 볼 것이다.
*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패러디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