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목사님
세 번째 서신입니다. 세 번째 서신도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인용한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다시 한 번 계13장 앞에 서서, 그리고 거기서 오른손, 이마, 또는, 짐승의 이름, 수, 매매... 다시 한 번 세밀히 관찰’해보시라는 말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합동총회 신학부가 아니기 때문에 목사님께서 권면한 대상에는 포함이 안 되어 감사하는 일이지만, 저도 합동총회 신학부 못지않게 666 베리칩에 관심을 갖고 관찰을 해 왔기 때문에 그동안 제가 관찰한 배경으로 계13장 앞에 다시 서서, 세밀히 관찰한 내용을 피력해 보려고 합니다.
무명의 목사님
지금까지는 서론격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본론입니다. 본론은 계시록 13장을 중심으로 666표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리칩 종말론자들이 말하는 베리칩을 중점적으로 글을 쓰겠다는 것입니다.
무명의 목사님
저는 베리칩을 논하기 위해서는 베리칩은 전자칩으로서의 이해, 기능으로서의 이해, 종말의 징조로서의 이해, 이 세 가지 기본적인 이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는 지면상 세 번째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원서(原書)에는 세 가지 개념이 다 들어 있음). 여기 원서는 「잘못된 마지막 신호 666 베리칩의 진실」원고를 말합니다.
베리칩이 종말의 징조라는 것은 계시록 13장에 나온 666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적인 666표와 베리칩 종말론자들이 말하는 666표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베리칩의 종말론자들이 말하는 베리칩은 네 가지가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계시록 13장에 나온 666를 문자적인 해석에다 목숨을 걸고 베리칩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둘째는 ‘종말’이라는 목표를 고정시켜 놓고 세상의 과학이나 전자 계통에서 베리칩으로 보이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동원하여 666표로 끌어드리고 있으며, 셋째는 베리칩이 마치 마지막 구원의 단계처럼 말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베리칩을 666표라고 괴소문을 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666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계13:16-18)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666)이니라.”
이 말씀은 계시록 13장에 처음(서두)에 나온 말씀이 아니라 말미에 나온 말씀으로서 13장 결론적인 의미를 지닌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문자적인 해석’인 측면에 보더라도 666은 앞 절들과 반드시 연관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13장은 두 마리 짐승이 출현하는 것으로부터 내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두 짐승이 출현하는 바다와 땅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리고 두 짐승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누구이며, 만약에 경배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특히 두 번째 짐승이 사람들의 오른손이나 이마나 표를 받게 하는데 여기 오른손이나 이마는 무엇을 의미하며,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666표는 무엇이며, 더 구체적으로 네로 황제와 같은 인물이나 베리칩과 같은 물체를 말하고 있는가? 결과적으로 666은 문자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상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러한 신학적인 물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666표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도 주지에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666표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종말의 현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계13장은 두 마리 짐승에 관한 환상입니다. 1-10절까지는 첫 번째 짐승에 관한 것이며, 11-18절까지는 두 번째 짐승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이름과 그의 수인 666표에 대한 핵심구절은 16-18절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3장은 세 부분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정석일 것입니다.
여기 두 짐승은 ‘문자적인 해석’을 적용했을 때 상징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징으로 해석해서 상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짐승이 땅과 바다에서 실제적으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므로 상징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짐승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무명의 목사님께서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상징적인 짐승은 그야말로 상징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징적인 짐승이 하는 일은 대부분이 상징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이해일 뿐만 아니라 상식입니다. 이것마저도 ‘문자적인 해석’인 해석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문자(언어) 자체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문자를 억지로 상징으로 해석하여 상징으로 보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짐승의 출현(1-10) 첫 번째 짐승은 666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면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물론 원서에는 들어 있습니다.
두 번째 짐승의 출현(11-15). 첫 번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는데 두 번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옵니다. 이것이 두 짐승이 첫 번째로 다른 점입니다. 그러나 둘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처럼 외형적 모습에 대해 별로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신에 두 번째 짐승은 ‘어린 양처럼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는 것’이 가장 특징입니다.
여기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계5:6; 14:1). 그런데 두 번째 짐승이 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처럼 나타날까? 이것이 가장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저는 사단의 최대의 술수라고 할 수 있는 ‘모방’ 곧 ‘흉내’ 내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짝퉁에 불과한 것으로서 모방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단이 어린양으로 모방하고 모방한다고 해도 사단은 사단입니다. 결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베리칩 종말론자들이 베리칩을 666표라고 아무리 모방하고 모방한다고 해도 베리칩은 베리칩입니다. 결코 베리칩이 666표기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리칩 종말론자들은 사단의 모방의 술수를 모르고 있으며, 오히려 사단의 장단에 춤을 처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혼란의 대명사는 이처럼 모방, 짝퉁은 사단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짐승이 ‘용처럼 말하더라.’ 이것은 짐승의 실체를 보여 주는 것으로서, 두 번째 짐승은 용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용의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짐승이 아무리 어린양처럼 모방하여 그럴싸하게 말할지라도 모방일 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용, 곧 사단의 고도의 술책이며 궤계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사단)이 마치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것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창 3장). 뱀(사단)은 자기의 지혜를 가지고 하와를 미혹하는데 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세로 예수님의 초림은 물론 재림 곧 종말까지 술책과 궤계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명의 목사님
목사님은 베리칩 종말론자들을 대변하는 듯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베리칩을 짐승의 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무지한 자들이 아니고, 광신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거나 주관적 상상력에 지배 받아 억지스런 해석을 해대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성경을 신중하고 진지하게 접근하고 해석하며, 과학적 사고의 체계도 갖춘 사람들입니다.’ (마야의 종말에서 어느 과학자 처럼 말입니다)
목사님 왜 이런 무모한 말을 함부로 하셨습니까? 베리칩이 성경의 666표가 아니라면 ‘성경의 신중성’을 사단에게 바쳐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아마 이런 말을 하지 않으셨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는 말합니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로 베리칩이 666표로 모방하는데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글을 다시 보면서 순식간에 세 가지가 뇌리를 스쳐갑니다. 첫째는 두 번 때 서신에서 말씀드린 젊은 지식층들이 대낮에 점술 집을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현장에서 안식교 교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안식교 자매는 ‘00안식교회를 갔더니 박사들이 한 두 사람들이 아니라 상당히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나는 무식해서 잘 모르겠지만, 박사들이 모르고 안식교회에 다니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안식교회는 잘못된 교회’가 아니라는 논리였습니다. 당시 저는 이렇게 응시를 했습니다. 한국 평강제일교회(옛 대성교회)에 대해 언급하면서 평강제일교회는 박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무총리도 다닌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 영적인 것은 반드시 지식(박사)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물론 저는 지식을 통틀어 하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박사라고 해도 영적인 진리는 모를 수 있다는 차원에서 말한 것이니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어느 베리칩 종말론자는 자기가 대학에서 정보 통신을 전공하여 과학(전자)적으로 베리칩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베리칩이 666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리칩의 단 한 가지 기능, 사람의 몸에 삽입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베리칩을 666표로 보는 어처구니없는 종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명의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과학도 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교회에 많은 박사들이 다니며, 평강제일교회에 국무총리가 다닌다고 해서 그들의 교리는 잘못된 것이 아니며 정당한 것입니까? 이성주의, 합리주의는 말할 것조차 없거니와 심지어는 박사, 과학 등도 성경에 도전하는 무서운 세상의 지식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화론의 과학이나 철학 박사 학위가 충분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무명의 목사님
저의 좁은 소견일연지 모르겠지만, 목사님이 베리칩을 666표로 보는 것은 문자적 해석과 더불어 베리칩에 지나칠 정도로 과학 지식에 의존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목사님은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시지만 이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단은 이처럼 지식(과학)으로도 고도의 술책과 궤계로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에 있을 외부적인 핍박에 인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특히 종말에 관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한 교회 내부적인 동요가 없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어린양을 모방하여 나타날 짐승(사단)을 본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베리칩을 모방하여 666표라고 잘못 가르치는 교사들을 환상으로 본 것입니다.
무명의 목사님
목사님께서도 두 번째 짐승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대단하다는 것은 극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 짐승의 능력은 오늘날 최고의 사망률을 가지고 있는 암을 고칠 정도의 능력이 아니라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엘리아 선지자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왕상18장). 엘리아 선지자와 바알(아세라)선지자 850명이 갈멜산 꼭대기에서 자기 신에게 기도(요청)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했던 소위 ‘갈멜산 사건’입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오전 내내 자기 신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불을 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며 미친 듯이 이리저리 뛰며 간청을 해보았지만, 불은커녕 불빛 하나 깜박이는 현상도 없었습니다. 오전뿐만 아니라 저녁때까지 동일한 방법으로 계속해 보았지만 불은 결국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한 번 불러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했습니다. 1:850 대결에서 엘리야 선지자의 대승(완승)으로 끝난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바알(850명)의 선지자들은 애걸복걸하며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허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계시록에 나온 두 번째 짐승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두 번째 짐승이 마지막 종말 때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나타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짐승은 이 능력으로 못할 것이 없을 정도로 세상에서 판을 칠 것입니다. 666을 베리칩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능력도 기적도 아닐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도 하고 있는데 짐승은, 더 할말이 없습니다. 다만 있다면 신나는 '흥얼'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베리칩 종말론자들은 사단의 장단에 춤을 쳐주고 있다는 표현을 자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이 자신의 권세를 바다의 짐승에게 준 것처럼(4절), 땅의 짐승도 바다의 짐승으로 부터 권세를 부여 받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에 예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 모방, 술책 등으로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짐승은 행동 대원의 두목 급으로 이해하면 가장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짐승이 출현함으로써 사단의 세력은 용, 바다의 짐승, 땅의 짐승 세 체제로 구성하게 됩니다. 용과 두 짐승은 세상의 왕이 통치와 권세를 가지고 교회를 핍박할 뿐만 아니라 양의 탈을 쓰고 거짓 교리와 이단 사설로 사람들로 하여금 인본주의로 몰두하도록 하여 교회를 타락시키는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계16:13, 19:20, 20:10; 참고, 마7:15).
용, 바다의 짐승, 땅의 짐승 세 체제로 출현한 것도 삼위일체를 모방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사단은 마지막까지 완벽할 정도로 모방을 합니다. 모방품은 진품과 비슷할수록 더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모방품이 허술하면 누가 속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베리칩 종말론자들이 종말의 탈을 쓰고 666표를 땅이나 물체에서 찾아서 종말의 소문을 내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666표 출현(계13:16-18)
사도 요한은 666표의 출현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육’이니라.”
계시록 13:1-15절에서는 짐승의 출현과 모습 그리고 짐승의 활약성에 대해 본 환상입니다. 그러나 계시록 13:16-18절은 짐승이 666표를 종말에 마지막 수단으로 활용할 것을 본 환상입니다.
계시록 13:16-18절은 현재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베리칩 종말,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이슈가 되어 있는 베리칩 종말, 혼란과 혼동 그리고 공포의 괴소문으로 떠돌고 있는 베리칩 종말에 관한 최초의 정보입니다. 그래서 가장 오역되고 있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16절은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하나는 짐승의 표에 대한 최초의 정보로서, 두 번째 짐승의 마지막 임무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표(票)받을 대상과 위치(장소)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 ‘그’는 둘째 짐승을 말합니다. 그리고 ‘표를 받게 하고’라는 말은 그의 마지막 임무로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짐승은 불을 내릴 수 있는 능력으로 사단(용)에게 숭배하도록 모방의 술책과 능력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무릎을 꿇게 할 것과 그에게 경배하도록 하는 일입니다(계13:8, 12, 14, 15). 이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모방입니다. 짐승은 사람들을 궤계와 술책으로 미혹하여 우상 숭배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곧 표로 인치는 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하는 주요 임무입니다.
다음은 표를 받는 대상은 전우주적으로 모든 사람이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짐승은 모든 사람들을 표를 받을 대상으로 삼고 그의 능력과 술책으로 유혹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표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거룩한 백성으로 일컬음을 받은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표를 받는 위치(장소)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 장소로는 사람의 인체로서 오른손과 이마 두 군데 뿐 입니다. 오른손과 이마 외에 어떤 다른 곳은 표를 받을 장소가 아닙니다.
계시록 13:16절은 이와 같이 세 가지가 핵심입니다. 둘째 짐승의 마무리 중요한 임무는 사람들에게 주인의 표를 받도록 하는 것이며, 표를 받을 받게 하는 대상은 우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해당되며, 표를 받을 위치는 사람의 인체로서 오른손과 이마입니다.
계시록 13:16절에서 짐승의 표에 대한 최초의 정보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표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시비적인 양상으로까지 비화(飛火)된 상징적 해석이냐 문자적 해석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베리칩 종말론자들은 문자적 해석으로 몰고가면서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실상은 여기서부터 완전히 비틀어져 있으며, 마음대로 해석하여 베리칩을 666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말은 첫 번째 서신에서 계시록을 짓밟고 있는 주체가 ‘합동총회가 아니라 오히려 666 베리칩 종말론자들’이라고 했던 말과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무명의 목사님
저는 여기 짐승의 표는 세 가지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봅니다. 첫 번째 관건은 짐승의 표와 경배의 관계입니다. 둘째 짐승은 666표를 가지고 우상(사단)에게 경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인치는 것을 말합니다. 결코 666표에 어떤 답이 있거나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구원 받은 주의 백성들이 베리칩 따위로 마지막 구원의 문을 통과하는 그런 환상을 본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베리칩 종말론자들이 하고 있는 작태는 표에 대해 오역을 하면서 마치 사도 요한이 구원 받은 주의 백성들이 베리칩으로 마지막 구원의 문을 통과하는 환상을 본 것처럼 말하며 소문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계시록의 해석의 문제를 넘어서 종말이라는 이름으로 계시록을 짓밟고 있는 행위입니다.
666표는 둘째 짐승이 자기를 지상으로 보낸 자, 즉 사단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구별하는 하나의 증표, 곧 인침으로 사용할 예표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666표는 사단에게 경배하도록 하는 수단이 아니라 먼저 사단에게 경배했기 때문에 받는 증표인 것입니다. 이것은 666표와 경배의 관계 혹은 순위로서 전자보다는 후자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단에게 경배하기 위해 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단에게 먼저 경배했기 때문에 그 증표로서 받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짐승의 표 자체에 어떤 마력이 있다거나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짐승의 표에 대한 첫 번째 관건이며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두 번째 관건은 짐승의 표의 역할(관계)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우상에게 숭배하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깃(target)으로 표를 받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짐승의 표를 받을 대상은 우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역동적인 효과는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역동적인 효과’란 표가 없어 물건을 매매하는데 견딜 수 없어 우상에게 숭배하고 표를 받는,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단이 주는 표는 자기 백성들이 매매하는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는 것이 주된 역할(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인(표)을 치듯이 사단도 자기 백성들에게 인을 상징하는 표를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과 사단의 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은 '구속'과 관련되어 있으나 사단의 인(표는)은 ‘매매’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표는 구속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리칩은 구원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저는 입이 달토록 누차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다시 한 번 봅니다.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 환상입니다. 표의 일차적인 역활은 상거래의 편리성입니다. 그 이상이나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서 표가 없으면 매매하는데 상당한 불편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 관건은 표의 역할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짐승의 표의 역할(기능, 목적)은 매매의수단이며, 그 외에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짐승)이 표를 인치는 것은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구속을 막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의 역할은 바르게 아는 것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입니다.
세 번째 관건은 짐승의 표와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녀들과 관계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계시록 13:16-18절에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의 결말(형벌)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표가 우상(사단)을 경배하는 증표이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녀라도 외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충분하게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두 주인(하나님과 우상)을 섬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입니다(마6:24). 다른 하나는 믿음을 파선하며, 하나님을 배교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딤전1:19-20). 여기 하니님의 자녀가 표를 받았다는 것은 표를 받은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 행위를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배교하는 자들의 환상을 보고 경고한 것이지 표 자체 때문에 경고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녀들이 표는 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배반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짐승의 표에 대한 세 번째로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짐승의 표인 666를 상징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라는 중요한 문제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주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17절입니다.
17절 역시 두 가지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상거래를 할 수 없다는 것으로서 666표의 이차적인 역할을 말합니다. 첫 번째는 매매를 가능케 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표가 없으면 생활에 적잖은 불편함이 도래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은 자유롭게 매매를 할 수 있지만, 반면에 표가 없는 사람은 매매를 자유롭게 할 수가 없어서 생활하는데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된다는 환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표의 대한 최초의 정보(정체)로서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16절은 표의 역할에 대한 최초의 정보라면 17절은 표의 정체에 대한 최초의 정보입니다. 여기 ‘표의 정체’는 표의 주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17절에서는 표의 정체 곧 주인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야 만이 알 수 있는데 그것도 전체적으로 자세하게 아는 것도 아니라 희미하게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17절에서 짐승의 표인 666은 주인의 ‘이름과 그 이름의 수’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표의 정체는 어떤 물체가 아니라는 것과 그런 물체의 수하고도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물체인 베리칩을 가지고 666표라고 하는 것은 허망한 난센스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으로 18절입니다.
18절이 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이 13장에서 본 두 짐승의 대한 결론적 의미입니다. 둘째는 짐승의 표는 계시록에만 아홉 번 나오는데 13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여 20장에서 끝납니 다. 그러나 18절은 짐승의 표에 대한 핵심구절입니다. 그래서 본 절은 종말론에 있어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지만, 반면에 가장 오역하여 잘못 해석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특히 666 베리칩 종말론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17절에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름의 수는 아무나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 있는 자만이 셀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짐승과 사람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결코 짐승과 물체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짐승 곧 사람의 수는 ‘육백 육십 육(666)’입니다. 그러므로 666은 짐승(사람)과 관련된 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두 가지로 다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짐승과 사람의 대비에서 짐승으로 상징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른 하나는 짐승 곧 사람의 수인 666해석의 문제입니다.
전자는 계시록 종말이 임하기 전에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베리칩 종말론자들은 미국으로 당당하게 지목하며 거침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본 카페에서도 이런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난센스(nonsense)이며, 성경의 종말보다 앞서가는 그릇된 종말 사상입니다.
후자는 지혜 곧 총명이 있는 자만이 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2000년 전, 사도 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666을 셀 수 있는 지혜(총명)자가 과연 있었는가? 그러나 저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만약에 있었다면 지금의 666 베리칩 종말의 혼란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시대 이후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그 누구도 666을 셀 수 있는 지혜(총명)있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베리칩 종말론자들은 666를 베리칩으로 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종의 잘못된 돼지 셈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셈으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경적으로 종말을 침착하게 준비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베리칩 종말의 괴소문이라는 역풍으로 되돌아 와서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을 베리칩 종말론자들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명의 목사님
짐승의 수를 셀 수 있다는 것은 사도들의 지혜(총명)에 버금가야 가능할 일이라고 저는 봅니다. 한국에 신사도운동에 선구자요 자칭 사도라고 하는 변모 목사도 짐승의 수를 셌다는 말은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셀 수도 없습니다. 변모 목사가 왜 아직까지 짐승의 수를 세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서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는 변모 목사는 짐승의 수를 셀 수 있는 ‘큰 믿음’과 ‘교회’와 능력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지혜(총명이)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짐승의 수를 세는 일, 곧 666에 대해 안다는 것은 그 만큼 어렵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명의 목사님
하물며 계시록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마지막 신호의 저자인 차 형제가 어느 날 짐승의 수를 당당하게 셈을 했다며 지상에 공포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종말의 최대의 혼란과 혼동에 시금석이 된 ‘마지막 신호’입니다. 제가 차 형제를 문제 삼는 것은 마지막 신호 자체가 아니라 신뢰성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신호에서 말하는 종말, 특히 베리칩과 666 관계에 얼마나 신뢰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건대 차 형제는 666은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444’를 셈한 것입니다. 여기 ‘4’는 하늘의 수인 ‘3’의 반대로서, 땅에 수 혹은 죽을 사(死, 4)를 뜻하며, ‘444’는 땅에 완전한 수를 말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지면상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저의 원서에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무명의 목사님
목사님께서 합동총회 신학부에 무시무시한 말을 했지만, 합동총회 신학부에서 보고한 내용은 저와 똑 같은 표현은 아니지만 같은 기조(基調)에서 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기조아래서 보고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의 글을 보고서 ‘착잡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무명의 목사님께 글을 올리려고 붓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첫 번째 서신을 쓸 때는 감히 이런 표현은 하지 못했습니다만, 이제 세 번째 서신을 쓰는 마당에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작은 의분(義憤)’도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무명의 목사님
오늘은 여기서 이만 줄입니다. 그리고 다음 네 번째 서신으로 끝을 맺으려고 합니다. 다음 서신은 계시록 13장을 중심으로 표의 특징과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으로 보는 666표, 즉 베리칩이 될 것입니다.
<계 속>
2013. 11. 2.
바나바 선교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