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가 멸망시키고 중원의 주인이 되어 자금성을
차지한 청나라를 살펴보자.
청나라는 신라의 후예라고
자처했다. 후금의 태조는 누루하치다. 그는 만주의 여진족을
통일한뒤
중원으로 진격해서 중원의 지나족의 땅을 점령했다. 지나족들은
반청복명의 기치를 세워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이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공산화가 되기까지 최후의 중국
지배자 청나라의 왕족들의 성(性)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후금(後金)은
금나라가 다시 일어섰다고 해서 후금이다.그들이 청나라로
나중에 국명을 개칭했다. 그런데 왜
금나라와 후금왕족들의 성에는 신라가 들어갈까? 신라왕족의 성이
금(金)이 아니던가? 신라가 또한 청구(淸邱)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그들이
처음에는 후금(後金)이라고 칭하다가 나중에는
淸이라고 칭했다. 청구(淸邱)에서 언덕구(邱)를 뺀
글자이다. 신라왕족의
성은 금(金)이며 금(金)나라,청(淸)나라 왕족의 성은 신라(新羅)이다.
단지 국호와 성의 위치만 바뀐 것이다. 궁예와 후백제
견훤이 일어나고 왕건이 고려를 세웠을 때 신라의 후예들은
고스란히 고려에 흡수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신라의
후예들은 만주로 가서 금을 세운 것이 아닐까? 고려말에
청나라의 시조가 된 누르하치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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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好太王 淸太祖 愛親覺羅
奴兒哈赤 : 재위 1616∼26 麗末 이성계와 연합하여 조선을 개국한 여진족은 조선에서 벼슬을 받는 등 민족 통합과정을 걷는다. 그러나
남북민족의 통합을 우려한 明조정의 반발과 이방원을 축출하기위한 이성계와의 연합군이 패한 후 다시 野人의 길을 걷게 된다.누르하치는 어렸을 때 명나라 장군 이성량 집안의 노비였다고도
한다. 어깨 너머로 한문을 배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수호전(水滸傳)>을 즐겨 읽었다. 그의 지략은 천성적인 면도 있지만 이 두 소설에서 얻은 것도 많았다. 후일
建州女眞의 추장이 된
누르하치는 1583년 군사를 일으켜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87년 蘇子河 상류에 최초의 성인 興京老城을 구축하였다.1592년 壬辰倭亂때에는 같은
겨레인 조선에 원군을 보내려고 했으나, 민족 통일을 우려한 明나라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99년에 海西女眞의 哈達를 멸망시키고,
1607년에 輝發, 1613년에 烏拉 등을 병합하여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통일한다. 16년에 칸(汗)의 지위에 올랐다.(유전적으로도
한국인은 남방계와 북방계 두가지 형태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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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백성들에게 병자호란을
가져다준 이들이 바로 청나라이다. 그때 한겨울에 수많은
백성들이 피난을 가다가 눈길에서 얼어죽었다고 한다.
조선의 명장 임경업장군은 미처 그들이 임장군이 지키고
있는 성을 피해갈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수도를 급습당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고 결국 청나라를 향해
구배지례를 하는 굴욕을 당하고 청나라에 굴복하게
되었다.
필자가 지금 이야기
하는 바는 청나라의 조선침략을 정당화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이민족이 쳐들어와 그나라와 문명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경우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청나라와
전쟁때 일반 백성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던가? 아니다.
대부분
피난길에 눈속에 얼어죽은 것이 원인이었고 마을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거의 안전했다. 사망한 숫자는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로 극소수이며 제대로 전투한번 붙어보지
못했기에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규모도
못되었다.
임경업장군이 천하의 명장인지라 이들이
먼길을 돌아 수도를 공략했을까? 임장군이 천하명장이긴
하지만 그들 청나라의 팔기군 입장에서 보면 결코 아니다. 적어도
청나라의 팔기군은 소수로 드넓은 중원대륙을 정복한
이들이다. 이들의 팔기군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부대의 편성을 8개로 나누어 팔쾌의 원리에 따라 종횡무진
움직이는 팔기군은 진속에 갇힌 적군을 매번 전멸시켰다.
그들의 진에 갇혀 살아난자가 전무할 정도였다고 하니
잔혹성 역시 알아줄만 했다. 그런만큼 자존심과 자부심도
대단했다. 하물며 전쟁에서 비록 실력이 딸리더라도
무인이 전투를 회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런
팔기군이 피를 보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 먼길을 돌아갔던
것이다. 지략에 뛰어난 임경업장군조차 상상조차 자존심 강한 청나라 군대가 성을 우회해서
수도로 향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청나라는 지나족 병사들이나
타민족의 군대들은 몰살시키면서 우리 조선의 병사들과
접전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청나라는 명나라와
전투때 투항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잔인하게 죽였다)
게다가 수도를 공략하는
과정에서도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같은 만행
또한 찾아볼 수가 없다. 타민족 국가를 침략할 때는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 이런 모습을 곧잘 보이기 마련인데...
단적으로 말해 청나라는 조선을 같은 민족이 설립한
다른 국가로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신라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또한 고구려와 같은 기마민족의 후예임을
자처했다.(고구려의 후예로 자처하는 것은 주로 몽고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런만큼 같은 고구려,
신라의 후예인 조선을 지나족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여러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적어도 광해군은 이러한
명과 청의 틈바구니에서 중립외교로 훌륭히 국가를
지켜냈다.(국가의 힘이 약하니 힘을 기를 때 까지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이 실각하고 청나라를
적국으로 돌리자 청나라는 인조를 목표로 공격해온
것이다.
이때
청에서 인조에게 보낸 서신에는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내용이 나온다. 그 문서에서 청국에서는 예로부터 조선과
청은 같은 민족이라는 구절이 나오며 또한 조선에서
원한다면 군신간이 아닌 형제국으로의 예를 갖추도록
하겠다 란 구절이 나온다.
조선의
건국공신이 여진족이며 이지란장군의 동향사람들이
만주족이 힘을얻자 이제는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을
군신관계 또는 형제관계로 삼자고 하니 인조로써는
치를 떨 만했다. 명의 입장에서는 만약 조선이 청의
편으로 돌아서면 명의 안위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것이다. 혹자는 명이 임진왜란때 원군 45000명을 보내준
것에 대한 의리라고 할 수도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청나라는 임진왜란때 조선이 원군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원군을 보내줄 의사를 보내왔다. 물론 이때 선조가
거절함으로써 양국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져 갔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정설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무엇과
닯았는가? 그렇다 고구려가 초기 신라에게 했던 모습과
똑같다. 또한 견훤이 신라의 마지막 왕에게 행했던
모습이기도 하다. 언어가 통하고 문화가 같은 민족이기에
이들 나라에 있는 백성들은 언제든 자국민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끼리의
전쟁은 늘상 군대끼리의 전쟁이었고 백성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청나라라는 별도의 국가가 체계가
세워지면서 이들의 양상은 많이 달라졌으며 조선의
백성들을 핍박하거나 약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민족에 대한 탄압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백제나 고구려가 멸망해서 신라의
국민이 되더라도 거기에서 차별성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중국에서 국가끼리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지의 위, 오, 촉이 그랬고
중국내의 국가끼리 전쟁에서는 민간인 대량학살을 보기힘들었다.
반면에 지나족과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이민족과의
전쟁에서는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전쟁양상을 보이며
장차 성장하여 군인이될 소지가 있는 어린아이까지
죽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금의
만주족은 우리와 완전한
같은 민족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제주도 순수방언을 경상도나 함경도 사람이 처음들으면
무슨소린지 알아듣기 힘겨운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사투리가 오랜시간 변형되어 이젠 언어가 달라져 버렸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신라의 후예다. 이는 그들
만주족의 역사가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가 여진족을
신라의 후예로 인정한다면
만주족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 세운 다른국가였다. 국제적
역사를 깊이있게 연구한다면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것은 고구려,백제, 신라끼리의 전쟁과 같은 양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아시아 국가 전체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연구한적이
단 한번도 없다. 21세기에는 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여진족들은 고구려의 백성이었으며 신라의
백성이었고 고려건국에 참여한 국민이었고 조선의 건국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실제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출신지가 만주 여진족이 살던곳이다.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는 여진족을 다스리는 고려의 관리였고 증조부,조부까지
그곳의 관리였다. 태조 이성계가 그토록 활솜씨가 뛰어난
것은 바로 여진족속에서 자랐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그곳에서 의형제 이지란(퉁두란)을 만나 건국의 뜻을
품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함경도와 같이 한 국가안에 지역적 문화와
언어의 차이가 나는 국민이었다. 여진이라는
말은 숙신(肅愼), 조선(朝鮮), 주신(珠申)과
이두문자로 같은 뜻이다. 그 말은 광명의 세계를 뜻하는 말로 마찬가지로 밝달(밝은 들), 배달과 같은 뜻이
된다.
카스피해와 흑해부근의 스키타이 유물과 한반도 신라의 그것은 너무 닮아서 러시아 학자들조차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KBS 일요스페셜.97.3) 특히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관(金冠)은 스키타이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줄줄이 달린 곡옥은 지금도 흑해남부와 터키지방에서 발굴되는 스키타이
종족의 것과 일치한다
고구려와도 다르고 백제와도 다른 이 금관의 주인공들의 강역은 카스피해 근처다. 이런 추정이 틀리더라도 최소한 동일한 문화를 뿌리고 가지고 만주
전역과 조선의 의주지역과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혹자는 같은 유물과 같은 문화양식이라는 공통점만으로 같은 민족이라고하는 것은
가설일뿐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필자는
묻고싶다. 정설이란 것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역사의
정설이란 것은 일정한 지역의 유물과 문화양식을 통해 추정되는
내용을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인준한 것이다. 정설과
가설의 차이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준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단지 그차이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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