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라이딩 * 세째 날 - 유후인의 푸른 밤...

[Piano*김찬호]

2010. 10. 08 (금) * 25Km / 총 157Km

벳푸 - 지옥온천 관광 - 벳푸시내 일주 - 유후다케 - 사기리다이 - 유후인

여행하면서 이틀째 맞이하는 새벽입니다.

긴장을 해서인지 일찍일찍 눈이 떠집니다.

온천욕을 한 효과가 있는지 피곤이 풀려 나른해진 몸을 반쯤 일으켜

머리맡의 리모콘을 잡아 티비를 켭니다.

어제부터 티비는 온통 일본인의 노벨 화학상 수상소식뿐입니다.

17명의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과학분야가 15명이 되었다고 법석입니다.

스즈키 아키라 교수와 네기시 에이이치 교수에게 축하는 하면서도, 부럽기는 합니다.

기초과학분야에 대한 오랜 기간의 투자와 사회적 격려가 일구어낸 영광이겠거니...

우리 나라에도 그만한 사람들이 있을텐데... 아쉬운 마음을 어쩔 수 없습니다.

올해 노벨문학상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상하기를 바랐었노라는 앵커의 목소리에

'원참.., 욕심도 많지...' 싶은 마음이 들며 작년 돌아가신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대통령의 생전 모습의 사진이 눈가에 아른거립니다. 

그러다가 날씨 뉴스를 찾아 채널을 돌려가며 유심히 듣습니다.

오이타 벳푸지역 아메, 아메... 하루종일 비, 비..!!

엇?!

얼른 창가로 가서 커튼을 제칩니다.

과연...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동거리는 짧지만, 경사도가 심한 벳푸이찌노미야선을 타야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해발 제로에서 코앞에 발딱 서있는 해발 1,583m짜리 유후다케를 넘어야 합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시뮬레이션을 하면서도 가장 걱정되던 코스였는데

비까지 내리다니... 하필 이런 힘든 코스를 우중라이딩이라니...

쿠벅 방에 모여 어젯밤 벳푸 야경을 구경하고 들어오며 사온

490엔짜리 도시락을 먹습니다.

부지런한 회오리가 벌써 전자렌지에 데워서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두런두런 비 걱정을 하다가 일어섭니다.

패니어를 레인커버로 둘러서 여행장비들이 젖지않도록 단단히 싸매고,

다들 우비들을 입고 씩씩하게 나섭니다. 모양 참 우습기도 합니다.

어제 들렀던 바닷가 요트 계류장, 선착장 앞에서

비 맞아가며 우중라이딩 기념촬영을 합니다. 뻘쭘한 모습들이 가관입니다.

비야 오던말던...

쏟아지는 비를 맞아가며

오늘 일정대로 강행을 합니다.

까짓거, 비가 오면 맞아주고, 바람 불면 또한 바람앞에 서주지.. 하는

마음으로 패달에 힘을 가해봅니다. 

비를 맞아 젖어서인지 첫날부터 삐걱거리던 구동계 쪽에서

다시 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어제 지나친 카메가와 방면으로 3Km쯤 되돌아갔다가

산을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바꿔 온천관광에 나섭니다.

좌회전 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라니...!!

국제적인 온천도시답습니다.

흡사 곳곳에 화재가 나서 연기가 피어오르듯

뜨거운 지열에 수증기들이 온통 도시 곳곳에서 피어오릅니다.

벳푸 전체가 온천입니다.

온천 속에 도시가 빠져있는 모습입니다.  

오르막길 끝에 지옥온천이라는 우미지고쿠, 바다지옥이 있어

끝없는 업힐구간을 올라가 도착합니다.

하~ 예쁘기도 하지...

어찌 저리 예쁜 색깔을 내는 연못이란 말인가.

옥빛을 내는 파란 온천입니다.

파란 물이 김을 뿜어내며 펄펄 끓으며 분출합니다.

어찌나 뜨거운지 달걀을 대나무 장대에 매달어 담궈놓으면 3분만에 익어버린답니다.

5개에 350엔을 주고 사먹는데 맛이 참 유별합니다.

온천물에 익힌, 지구가 익혀준 달걀을 먹는 기분이 묘합니다.

비가 오는 와중, 빗속에서도 먹는 일은 즐겁습니다.

회오리와 쿠벅이 헬맷에 달걀을 쳐서 껍질을 까먹으며 장난합니다.

여행을 나오면 평소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소한 일들도 모두 즐거워집니다.

파란 온천 옆에 있는 자그마한 신사입니다. 

붉은색 도리이를 주욱 세워놓아 강렬하지만,

파란 물이 철철 끓고 있는 옆에 있어 더욱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모습이

눈을 자극합니다.

원색들의 향연입니다.

파란 물, 붉은 기둥, 진초록 숲....

빨강 온천입니다.

파란 온천을 지나 이번에는 붉은 온천.

뭉클뭉클 김을 뿜어내며 솟아올라오는 물이 빨강색입니다.

진흙같이 점도가 높아 보여 가까이 가니 맑은 빨강색입니다.

자연이란 참 신기하기도 하지... 하는 생각에 수증기에 손을 대봅니다.

손바닥에 금방 따뜻한 물방울들이 맺힙니다.

자연이 주는 신비감은 나이와 상관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며

경탄하게 합니다.

파랑 온천, 빨강 온천을 관람하고

경탄과 감탄을 하다가 장소를 이동하려 밖으로 나와서 기념사진을 담습니다.

아침 첫 시작부터 빡센 업힐을 하고 올라와 초장부터 지쳤지만 표정들만은 밝습니다.

회오리의 노랑비옷, 쿠벅의 검정비옷, 반투명의 검정색 비닐에 비친 핑크비옷...  

입구에 자전거들을 타고 도착하자

비가 오는데도 직원들이 뛰어나와서 비 맞지않는 곳에

자전거를 주차하라고 안내해주고, 세워주던 직원들의 친절이 더욱 가슴에 남는

지옥온천 순례를 마치고 다시 장소를 이동합니다.

내리는 빗속을 자전거 타고 관광하러 오는 사람들이 가상해서 그런 것인지...

고맙기도 하고, 여행자를 대하는 그들의 따스한 마음이 온천수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감사해요, 안내해주시던 아가씨 여러분들....!

다음 관광은 하얀색의 일명 스님지옥온천입니다.

백색의 커다란 물방울이 솟아나는 점토온천인데 솟아올라오는 모양이

스님의 빛나는 머리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백색 온천 또한 신기합니다만....

약간은 이동해야하고, 앞으로 남은 일정이 간단치않아

들어갈까말까 망설이며 서로 의논을 합니다.

과감히(?) 포기합니다. 참 별스런 곳에 별 과장된 단어를 다 가져다 붙입니다.

여하튼 대신 그앞에 있는 커다란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사진으로만 관람하고 

드디어 오늘의 메인 로드인 '발딱 업힐'에 들어섭니다.

언덕배기에 산을 기대 산위로 길게 뻗어 만들어진 도시인 벳푸의 지형상,

도시의 이마를 가로지르는 길을 타고가다

유후인으로 가는 길을 넘어가야 합니다.

해발 1,375m의 쯔루미다케의 옆구리(?)를 지나

해발 1,583m의 유후다케의 어깨를 넘어가야하는 길입니다.

산이 의인화 돼서 어깨도 옆구리도 생깁니다.

아무래도 업힐을 넘어가야 하는데 따른 스트레스가 심한 모양입니다.

지도를 봅니다.

우선 출발하며 국도 500호선을 타고 1 킬로미터쯤 가다 직진하듯 좌회전,

좌회전해서 현도 52호선을 타고 벳푸시내 외곽을 관통에 7 킬로미터쯤,

자위대 주둔지를 지나 커다란 신사가 나타나면 현도 11호선으로 15 킬로미터 미만!

복잡하기도 합니다.

국도 500호선을 타고 출발합니다.

여전히 언덕배기 업힐입니다.

벌써 비가 옷 안으로 흘러들어와 땀과 함께 몸을 적십니다.

11시를 조금 지나자, 배가 고파옵니다.

아무리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행이라지만, 아침 먹은지가 불과 세시간전인데

벌써 배가 고파지다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도시락이 아닌 정식으로 든든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합니다.

더구나 오늘 넘어가야 할 산이 험한데다

가는 도중 상점 하나 없고 인적 드믄 산중길이니...할 수 없습니다.

850엔이나 하는 비싼 돈까스 정식입니다.

힐끗 회오리의 눈치를 보지만, 그도 오늘 일정을 감안해서인지... 

맛있다며 된장국, 미소시루까지 전부 훌훌 마십니다. 참 좋은 식성입니다.

쿠벅은 늘 다른 메뉴를 주문합니다. 카레정식입니다.

생각도 독특하고, 식성도 독특해서 재미가 더합니다.

식사를 하고나와 느긋한 표정으로 쿠벅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습니다.

회오리가 좋아하는 커피인 죠지아 에스프레소 골드를 찾아 마십니다.

비록 날은 덥지만, 비가 와 따뜻한 커피로 몸을 덥힙니다.

커피를 잘 마시지않는 그이지만, 입맛에 딱 맞는 모양인지 그것만 찾습니다.

생활태도도 단정한데, 입맛도 그의 생각을 닮은 모양입니다.

쿠벅은 마실 때마다 다른 메뉴를 찾습니다. 호기심 왕성한 장난꾸러기답습니다.

40대 중반인 그에게 막둥이, 장난꾸러기라고 하기엔 조금 어색하긴 합니다만...

육상자위대 앞 대로를 지나고 안도합니다.

길을 잘 들어선 것 같습니다.

육상 자위대 주둔지를 지나자마자 현도 11호선을 만납니다.

이제 저길만 따라 쭈욱 가면 된다는 생각에

길 찾을 염려가 줄어듭니다.

그러나....

드디어, 업힐이 시작됩니다.

경사도 10%가 넘는.. 경차들마저도 끌끌거리는 혀차는 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길을 10여킬로미터 넘게 올라가야합니다.

힘이야 들던지 말던지

비에 젖은 길이 참 예쁘기도 합니다.

구름속을 넘나들고, 길은 미끈거리고...

갓길에는 모래들이 쌓여 미끄럽고, 시야는 뿌옇고...

속절없이 저 짙푸른 숲과 검정 아스팔트의 조화와 대비는 선명해서

더욱 예쁩니다.

어찌나 힘이 들던지...

평속 5킬로인지, 6킬로인지...

넘어지지않을 정도로 굼뱅이처럼 기어올라가다

기어히 멈춰서서 쉽니다.

지친 다리가 좀체로 펴지지않으며 뻐근합니다.

살아오며 쉬운 길보다는 좋은 길을 선택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나 또한 말을 할만한 사람들에게 그 말을 반복했지만,

이 길은 쉬운 길도 아니며, 좋은 길도 아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그저 올라갈 뿐입니다.

지쳐서 자전거에 기대 의지합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농담과 기상천외한 말을 잘하는 쿠벅마저도

지쳐가는 모양입니다.

앞서가던 회오리는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연신 셔터를 누릅니다.

힘도 좋지...

한구비 돌아서면 또 한구비가 보이고

그 구비를 돌아서 올라가면 또 이마 위로 길이 나타나고...

무한 업힐, 무한 궤도같은 언덕길만 계속됩니다.

아직 반도 못올라 왔는데...

숨은 벅차고, 허벅지는 딱딱하게 굳어 비명을 지르듯이 아파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나무를 자르기 위해 8시간을 주시면,

첫 6시간은 도끼를 갈겠습니다.'라고 했다는데..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 전, 업힐 연습을 할만큼은 했어야했지만,

기껏 일산에서 임진각까지 왕복 100킬로정도에 헤이리까지 50킬로 정도 라이딩하고

나선 이 여행길이 과연 체력 무리없이 잘 갈 수 있을까.. 염려가 고개를 듭니다.

간신히 반이나 올라왔을까...

휴게소 겸 로프웨이가 나타납니다.

아, 저 로프웨이를 타고 정상까지 갔으면... 하는 바람이 꿀 같습니다.

그러나 그 휴게소마저 구름에 휩싸여 시야가 뿌옇게 흐려옵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물방울이 얼굴에 비옷에 맺힙니다.

비탈에 위태롭게 서있는 휴게소 건물에서 마약이라도 투입한양 

빗물 고인 아스팔트 바닥에 허물어지듯 앉습니다.

간신히 정상부근에 도착합니다.

오른쪽으로 산의 정상이 보입니다.

유후다케 1,583m의 귀 부근을 휘돌아가는 길입니다.

자, 이제 유후인까지 불과(?) 12킬로미터...

힘을 내봅니다.

서로 이름을 불러가며 힘을 북돋우고, 화답하며 억지 웃음을 웃습니다.

벌써 수십년 전, 국민학교 시절 가을 운동회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외쳤던 구령을 꺼내 왜장치듯 외쳐봅니다.

영차, 영차~!

으잉? 자전거가 줄다리기 동아줄인가....?

핑계삼아 또 쉽니다.

지쳐있을 때는 그저 쉬는 것 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벌써 업힐만 세시간째...!!

이제 네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정상부근을 지나며 붉은 망또를 걸친 보살상이 길가에 있기에

주저없이, 한치의 망설임 없이 패달링을 멈추고 브레이크를 당깁니다.

산중에 계신 그대여,

이렇게 쉴 공간과 시간을 주셔서 고맙구려...

석상의 표정이

'에구.. 이 비오는 날 고생도 참 많다.

차 타고 씽-하지 잘도 가면 되지, 그 짓을 왜 하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치긴 지친 모양입니다.

이제는 다운힐로 내달릴 일만 남았습니다.

정상을 지나자마자 나타난 사기리다이 휴게소입니다.

유후인을 조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업힐만 네시간여만에 도착한 전망대가 어찌나 반가운지...

안도하는 마음과 해냈다는 성취감 때문에

소리라도 지르고싶습니다. 

그래, 1,583m짜리 산을 넘은거야...

그것도 이 비오는 날에~!!

느긋한 마음까지야 들 여유가 없는 지친 몸으로,

체력은 이미 고갈되어 감을 느끼지만,

시원한 조망이 좋습니다.

분지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산골 마을 유후인 시가지가 한눈에 보입니다.

저 안개비에 둘러싸인 산중의 작은 분지마을을 가기 위해

벌써 몇시간을 업힐해왔는지... 

신나는 다운힐이 시작됩니다.

바람이 귓가를 지나가며 응원합니다.

씨잉- 씨잉- 소리를 내며 응원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하루 종일 비를 맞아 젖은 몸이어서 어깨까지 떨려오고,

이까지 맞부딛칠 정도로 풍속냉각이 심합니다. 

워우~!!

드디어, 유후인 역에 도착합니다. 

피렌체에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중흥시켰던 메디치가의 미술관을

그대로 전사하듯 옮겨놓은 유서깊은 건물입니다. 몇번을 보아도 참 근사합니다.

십수년전 피렌체를 여행하며 보았던 그 건물과 똑같습니다.

다만, 피렌체에서는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유후인에서는 기차역으로 쓰이는 것이 다르지만,

이 유후인역사는 좀 특별하기도 합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원래 건물의 용도와 맞춰 미술관 겸 기차역으로 사용하는 센스가 있어

재미를 더 줍니다. 기차역이 미술관이라니... 그 발상과 실천에 박수를 보냅니다.

비에 젖어 체온이 떨어져 몸은 떨리고, 날씨는 어둑해져가고 있어

흡사 기차를 놓치기라도 하는 듯이

후다닥 바쁜 마음으로 역으로 뛰어들어가 인포메이션 센타에 숙박업소들을 추천받습니다.

빅베어라는 호텔을 찾아들어갑니다.

비록 숙박요금이 제법 비싸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트윈룸에 맛있는 아침식사가 있다는 말에 덜컥 체크인합니다.

전실을 지나 침실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비맞아 떨리고, 춥던 마음이 비로소, 안정이 됩니다. 

과연 유후인다운 침실입니다.

깔끔하고 예쁜 방, 푸근한 분위기가 마음에 꼭 와닿습니다.

더구나 수트룸처럼 침실만 따로 분리되어 더욱 고급스럽습니다.

방마다 인테리어가 다 다릅니다.

각자의 방을 가보기도 하며 50전후반의 아저씨들이 그 예쁨을 탐하는 것이

참 재미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합니다.

이런 재미가 있어 여행은 더욱 즐겁습니다.

이제부터는 느긋하고, 여유롭게

천천히 유후인의 경치와 풍경과 안락함을 즐기면 됩니다.

하루 종일 그 업힐의 힘듦과 추위를 잊습니다.

우선 뜨거운 물로 샤워들을 하고, 유후인 산보에 나섭니다.

꿈을 향해 오랫동안 소망하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가듯...

오랫동안 유후인의 공간에 서 있기를 바랐던 그 마음이

비록 비가 내리고 해가 져 어두움이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을 때일지라도

이 유후인에 서서 스스로조차 푸르러져가며

조금씩 더 푸르름이 짙어지는 풍경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산보 길입니다.

산보의 첫길에 만나는 연회색빛 벽에서

따사한 빛이 새어나오는 창을 가진 집이 왠지 쓸쓸해 보입니다.

한켠에 서있는 100년쯤은 됐을법한 둥글고 빨간 우체통이 외로워 보입니다.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과 비가 내린 기상 탓일까...?

다가가보니 아직도 사용하는 우체통입니다.

어두운 골목 길가를 자판기의 형광빛이 밝혀줍니다.

멀리는 희미하게 오늘 넘어온 유후다케가 실루엣으로 그 존재를 보이고...

언젠가부터 스스로에게 묻지않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내 가치관에서 벗어나지않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하며 스스로를 벼리던 질문을

언제인가부터 잊고 살고 있었다는 자각이 듭니다.

그저 관성에 의해 살아온 날들이 얼마쯤일까 스스로에게 다시 묻습니다.

기능화 되어가는 삶의 수단으로서의 일에 매몰되었던 날들에 대한 반성입니다.

먼 이국땅, 일본의 큐슈지방 산골마을 유후인에 와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마시면서 별 생각을 다 합니다.

오늘은 여행만 생각하기로 하며, 마지막 커피 한모금을 목 너머로 넘깁니다.

좁다란 골목길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비에 젖은 길이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불안처럼, 또는 터쳐지는 기쁨처럼

다가옵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기쁨은 영혼을 풍요롭게 할텐데....

어찌 이 두가지 느낌이 한번에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지...

한때 죽도록 불처럼 열정을 일으켜 사랑하지만,

지나고나면 화톳불처럼 회억하게 되는 것처럼...,

소중한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안이하게 생각하다가

모자랄 때에 이르러서야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현상과 상태는 그대로이고 나만 변하는 것 같아 부끄럽던 그런 기억같아서

쓸쓸해지는 마음이 되어 마음 한켠이 비는 기분입니다.

'남자'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굽이굽이 지나온 세월의 틈새에 있는 기억들을 찾아내는 그런 기분이 됩니다.

빗소리 같은 맑은 피아노 멜로디가 그리워지는 풍경을 만납니다.

아슴아슴 기억이 날듯말듯한 멜로디...

단지 청아한 피아노 음만 떠오르는 그런 풍경입니다. 

뭘까, 뭘까... 어떤 음악, 누구의 연주일까....

잠깐 스치고 지나지만 맑은 소리로 가슴을 진동시켰던 그 멜로디는

무엇이었을까... 이 서정적 프레임을 보자 생각난 것은...? 

기억해내려다 잠시 내려놓습니다.

그저 눈앞의 이 풍경만을 넉넉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를 감상하고 받아들입니다.

아-

이런 풍경에 맞는 소리는 로망스다... 그것도 유키 쿠라모토의 로망스...!

신경 세포 하나하나를 핀셋으로 들어올려 튕기듯이 섬세한 소리를 내는

바로 그 피아노 소리...

길을 가다 현관 너머에 있는 단풍들을 봅니다.

이런 경치에 알맞는 상상을 합니다.

이럴 때는 님이 있어 편지를 쓰고싶습니다.

깊게 들여다보아 짙푸른 어둑한 통로를 지나

단풍든 풍경이 내다보이는 이 길에 앉아

님, 그대에게 편지를 쓰고싶어집니다.

기다림으로 푸르름이 짙어가는 저 단풍든 숲길 넘어

오늘밤 그대 꼭 오시길 바랍니다

저 푸르름 짙어 짙어, 더 짙어가다 온전히 어둠으로 물들기 전

파란 물이 뚝뚝, 들다 들다 떠나기 전

그대 가슴, 그 따스함을 

바람소리 가득한 이 맨가슴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무수한 불면의 밤을 보낸 남자의 표정으로

편지를, 그렇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목이 늘어나고 팔꿈치가 튀어나오고

낡아서 몸보다는 가슴이 따스한 스웨터,

눈물인지, 물방울인지에 얼룩져 무늬가 일그러진

얇은 손수건이 주는 따뜻함... 같은...

그런 풍경을 만납니다. 

푸른 밤하늘을 위로 이고

따스한 전구빛이 비치는 다소 어지러진듯이 진열된 물건들이 있는

밤에 보는 풍경이 감성을 흔듭니다.

상호마저도 꿈을 감추고, 꿈을 저장하고 있다는 몽장입니다.

마치 저 집에서는 저장해놓은 꿈을, 

미처 알지못하던 감춰두었던 꿈을 내놓을 것 같습니다.  

포장마차처럼 길을 향해 매대를 내고 

손님을 맞이하는 고로케집을 지나갑니다.

등 뒤에서 너를 끌어안으면 너의 왼쪽과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과 나의 오른쪽이 정확히 겹쳐진다.

나의 심장은 너의 심장과 같은 자리에서 뛰고,

나의 왼쪽 손은 너의 왼쪽 손을 잡는다.

너는 내 눈을 보고 있지 않지만 내 마음을 읽고 있고,

날 완전히 상대에게 내맡기고 놓아버렸을 때의

평안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에게 뒷모습을 허락한다는 것은

전부를 주는 것이다.

시인 조진국의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시가 떠오릅니다.

저런 포장마차 형태의 집앞에 서서

그녀를 앞에두고 뒤에서 끌어안고

몇갠가의 고로케를 나누어 먹고싶어지는 청춘의 마음을 가져봅니다.

그저 바라보고 지나쳤다가 뒤돌아가선 고로케를 사먹습니다.

회오리도 쿠벅도 맛있다며 후후 불어가며 잘 먹습니다.

흠...

나는 마음 속의 누군가와 나누어 먹고 있다네...

어느 불켜진 이발관앞의 자전거들입니다.

안에서는 이발사가 한 사람의 머리를 깎고있고,

새어나온 형광 불빛은 파르스름합니다.

푸른 이 유후인의 밤과 잘도 어울립니다.

언젠가부터 이런 에피소드 같은 짧은 인상적인 장면을 만나면

니콜라스 케이지와 엘리자베스 슈가 연기했던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떠오르곤 합니다.

왠지 아무런 연관없이 그런 느낌이 들곤 합니다.

'사랑이 짧으면 슬픔이 길어진다'는 명대사와 함께...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오며 울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울음으로 다 뱉지 못하고 삼켜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억지 웃음으로 울음과 슬픔을 감추고 살아온 세월...

아무렇지않은 것처럼 위장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며 슬픔을 삭이던 세월...

그런 세월을 살아오며 나는 무엇을 얻은 것일까...

가슴 속에 서늘한 바람을 가득안고

허풍선이처럼 살아온 것이나 아닐까...

이제는 어느 가슴엔가,

저 창살에 비치는 온기있는 가슴, 온화로운 가슴에

기대보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이탓일런지...

50이 넘어서면서 속울음을,

안으로만 우는 울음을 참지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 저런 온기를 비치는 부드러운 가슴을 만나면

그동안 참아왔던 속울음을 꺼내

꺼이꺼이 한바탕 울어보리...

참 유난히도 대비되는 푸른 길과 따스해보이는 창입니다.

추억은 행복하다.

과거로부터 오는 편지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은

지나온 세월에 대한 수긍과 자신에 대한 긍정이 있을 때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 평정심으로 지난 세월을 관조하듯 바라볼만큼

넉넉한 마음자세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짐짓 여유로운 척하며 

그런 자세를 배우고 싶습니다.

스스로에게 강요하듯 말해봅니다.

추억은 행복해.. 저 어둡게 실루엣을 비치며

뒷모습을 보이고 지나가는 사람 같은.. 그런 행복한 시절이 있었어라고...

아직 50대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세월은 어서 따라오라 채근하는 느낌, 몸만 먼저 훌쩍 저만큼 가버린 것 같습니다.

카메라의 어원인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카메라는 방, 옵스큐라는 어둠을 의미한다는데

어찌 이리 그 어원과 맞는 풍경인지... 어둠상자 한면과 빛이 들어가는 한면이 분할되어

사진을 만들어내는데... 정말이지 딱 맞는 커다란 집 카메라 같다는 생각이 드는 풍경입니다.

사진이 주는 추억을 담는, 그 추억의 따스함이 가슴에 방울지는 것이라면

지금 유후인에서 눈동자에 남는 이 따스한 불빛과 푸른 빛은 내 육신이 카메라가 되어

가슴 한켠 추억의 방에 진한 그림, 따스한 추억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은 감상적이고, 조금은 쓸쓸함을 좋아하는 감성 흐름을 선호해서인지

푸름에 물든 이 골목의 잔상이 남아 자꾸 들여다보게 됩니다. 

마치 허상을 쫓아다니다 허망의 늪에 발을 적시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 길 위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 길을 가도 좋다는 생각이

가슴에 스칩니다.

감상적인 가슴이 되는 이 순간,

유후인 밤의 이 감상, 이 가슴...

행복하다...라고 중얼거립니다. 

산책을 할수록 어둠은 점점 더 골목 깊숙이 내려오고,

불빛들은 점점 더 따스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이 깊은 푸른색은 마치..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풍부한 음색을 가진 낯선 이국의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홀리데이를 닮아 있습니다.

오랜 세월...

갈등과 험한 일을 겪으며 내적갈등을 탁한 목소리에 실어

감동을 끌어내는 그런... 풍부하면서도 진한 페이소스가 있는...

본능에 불을 지피고,

현란한 조명 아래 정신은 황홀에게 내주고 지냈던 어느 한시절,

그 시절의 나 자신에 대한 연민에 휩싸여

터벅터벅 발길을 옮겨 걸어가는 산책길만 같습니다.

이런 멋진 푸른 밤의 푸른 하늘이 빚어내는 풍광 속에 있노라면

컴퓨터도 멀리하고, 핸드폰도 안가져오길 얼마나 잘했는지....

그래서 오롯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옆 일행들의 가슴을 느끼는

이 아날로그적인 여행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몇번이고 듭니다.

내 힘줄이 움직여 이동되고, 인간적인 정의 따스함이 있는 이런 자전거 여행..

이번 자전거 여행의 찬가라도 부르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삶의 큰 소용돌이들 속에서 무시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있던 자잘한 기억들이

하나씩 둘씩 낚시찌처럼 떠오르는 자전거 여행길...

오늘,

나 스스로를 뒤돌아보는 그런 밤인것 같습니다.

여행이란 이런 기회를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드는 축복을 함축하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 강이라면 기대치않았던 행운도, 행복도, 기쁨도 있듯이

불운과 불행과 슬픔과 우울도 함께 공존하며 흐르는 것이겠거니...

오늘 비록  조금은 쓸쓸하게 길을 가는 것 또한 내 몫의 인생에 포함된 것 아닐까싶습니다.

작은 유후인 마을을 산책하고 돌아오며

산책길 끝에 있었던 유후인역입니다.

역사를 다시 보고싶어 간 것이 아니라,

저녁 산책으로 시간을 보내느라 저녁식사시간을 놓쳐

벤또를 사러 돌아다니다가 없어서 결국은 역까지 다시 돌아갔습니다.

벤또 찾아 삼만리, 도시락 찾아 삼만리...인 셈입니다.

결국은 도시락이 없어 지나치다 본 작은 편의점에서

도시락 두개와 빵을 사서 빅베어 호텔로 돌아갑니다.

미리 밥부터 먹을 것을... 유후인의 경치에 취해,

유후인이 주는 기묘한 푸른 밤에 홀리듯 식사시간도 잊고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간 밥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연민과 회상에 빠져 회오리와 쿠벅에게 저녁조차 못먹인

얼빠진 날이 되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가슴 가득합니다.

오늘은 별별 경험을 다합니다.

검은 온천입니다.

아침에는 빨강온천, 파랑온천, 하양온천을 보았는데

밤에는 검은 온천을 경험하고 그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급니다.

이제 노랑온천과 보라색 온천만 보면

무지개빛 일곱색깔 온천을 하루에 다 경험할 듯 합니다.

비 맞아가며 십수킬로미터를 업힐하고 다운힐하면서

바람과 추위에 떨어서인지 감기 기운이 올까 두려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궈 예방하려

룸에 들어오자마자 미리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풍덩 뛰어듭니다.  

회오리는 이 검은 물이 나오자 땀에 젖은 져지를 세탁하다가 멈춥니다.

수도관이 낡아 검정물이 나온다고...

유후인 빅베어 호텔이 제공하는 특별 온천수를...

넓은 방, 아늑한 분위기가 있는 유후인의 밤...

아무 생각없이 며칠쯤 쉬어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절로 가슴을 휘도는 밤입니다.

뜨거운 온천수,

검은색의 온천탕에 앉아 얼마전에 재미삼아 배운

창부타령 한가락 조용히 중얼거리듯 불러봅니다.

일본에서 전통 온천탕에 풍덩 빠져 부르는 창부타령이라니...

아니 아니 노지는 못허리라

서산에 해 기울고 황혼이 짙었는데

안 오는 님을 기다리며 마음을 조일 적에

동산에 달이 돋아 왼 천하를 비쳐 있고

외기러기 홀로 떠서 짝을 불러 슬피 우니

원망스런 우리 님을 한없이 기다리다

일경, 이경, 삼, 사, 오경, 어느듯이 새벽일세

추야장 긴긴 밤을 전전불매 잠 못들제

상사일념 애타는 줄 그대는 아시는가

둘 데 없는 이 내 심사 어디에다가 붙여 볼까

차라리 잊자 해도

욕망이 난망이라 차마 진정 못 잊겠네

얼씨구 절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려

[엔돌핀(최종현)]

夢蔵 꿈을 저장하는 창고 가게이름 참 좋습니다. 유후인 아기자기하고 참 예쁜 마을이네요.

[회오리]

그래도 끌바는 없었잖아요~~~~~!!! 엄청난 업글능력을 보이신 형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쿠벅(최중오)]

다시 가고 싶은곳 중 하나 입니다 ... 아침 밥도 맛 있엇고요 ...업힐도 짱 입니다.!!!

[나도달인]

由布岳와 連み岳의 높은 업힐을 즐길 수 있는 체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신 지*신재익]

go away---하필 왜 비는 내려 모습 초라하게 ㅎㅎ...2ne1 에 잘 어울리는 여행~~모두들 넘 행복해 보이시네요^^

[초록손(김남웅)]

떠나고파도 떠나지 못하는 생활인을 위하여 담엔 지나 차마고도편도 부탁하옵니다. 잘 읽었습니다.

[휘슬러 캔디]

옆에서 함께 여행하듯 살아 숨쉬는 피아노님의 글에 밤을 지새웁니다. ...^^;

[love행운]

고운 필력의 연륜을 감상하고 또 하고^^ 잔차 여행 책 하나 내어도 괜찮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