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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29]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요한 1,47-51
그때에 47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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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 우리 삶에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 <독서 : 다니 7,9-10.13-14 또는 묵시 12,7-12ㄱ / 복음 : 요한 1,47-51>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노력과 기도를 봉헌합니다. 아울러 그 기도 안에서 예수님이 언제나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청원도 합니다. 저는 이런 우리의 노력이 삶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열매 맺는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어느 선택된 이들한테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 이들은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심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들한테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구원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구원의 초대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그 믿음을 지켜나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도 변화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타나엘은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부르신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확신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게 합니다.
내 신앙을 점검하려면 삶 안에서 얼마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부르고 계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이며, 또한 우리 삶이 주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함께하는 구원의 여정임을 깨닫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자료 : 이태훈 신부(서울대교구 압구정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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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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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fsp.pauline.or.kr%2Ffsp_upload%2F2015%2F09%2F20150918121558_63358.jpg)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 함께 하시기에 저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기에 저는 행복합니다.
무한하신 당신의 사랑 안으로 이끄시는 주님,
오늘 하루도 당신께 저를 온전히 맡겨드립니다.
주님, 저를 받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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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지구 환경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생명이신 하느님, 세상 만물을 만드시며 '보니 참 좋더라!' 라고 말씀하신 당신의 사랑에 감 사드립니다. 저희에게 환경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아 보존하고 살리는 일에 마음쓰게 하시고 후손에게 남겨줄 세상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남겨주게 하소서.
오늘의 복음 : [나해]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요한 1,47-51
그때에 47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8%2F09%2F00%2F52%2F489c6bb40b3d7%26filename%3Dda_icon05.gif)
영적독서 : 사랑 때문에 살리라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이 내 소원이다. 그의 사랑이 내 가슴을 불태우길 바란다. 나는 영원히 그와 결합되기 위해서 그를 바라보길 원한다. 그것은 내 천국이며 내 운명이다. 사랑 때문에 살리라............<모니카 마리아 슈퇴커,「소화 데레사의 삶과 사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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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2018-09-29) I 말씀 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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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경 로마 북쪽에서 성 미카엘을 공경하여 대성전을 봉헌한 날에 우리는 모든 거룩한 천사의 축일을 거행한다. 이 축일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시며 만물을 초월하여 계신지를 알게 된다. 성경에서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에 대하여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 라파엘은 토비트서 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 성서에서 가브리엘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이다. 한편 천상 군대의 우두머리인 미카엘은 종말의 큰 싸움에서 사탄에게 승리한다(묵시 12,7 이하). 창세기의 낙원에서 묵시록의 낙원에 이르기까지 천사들은 구원 역사가 전개되는 모든 기간에 걸쳐,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구원에 관여한다. 천사들은 주님의 계획을 알리고 그분의 명령을 전달하는 "주님의 영을 시행하는 자들"이다(입당송). 무엇보다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노래한다(영성체송). 그들은 다니엘과 요한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옥좌 곁에서 본 흠숭자들의 큰 무리를 이루고 있는 이들이다. 우리는 지상에서 행하는 전례로써, 천사들이 하늘에서 행하는 전례와 일치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을 노래하고 선포하려고 천사들의 찬미가에 우리 목소리를 일치시킬 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리며 우리의 봉헌이 천사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천상 제단에 올려지기를 하느님께 간구한다(예물기도).
다니엘은 환시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옷은 눈처럼 희고, 불꽃 같은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때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나타나, 그분의 통치권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는 다니엘서의 이 대목에 나오는 표현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제자로 선택하신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놀란다. 주님께서는 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라 하신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모습까지 보게 될 것이라 하신다(복음). |
<축일묵상-1> : †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는 주님의 천사들
천사란 희랍어 안겔로스(Angelos = 使者, 심부름꾼)에서 유래된 낱말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높은 지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존재로 천사들을 창조하셨다.
천사는 영적 존재(히브 1,14)로서 인간의 법칙에 매이지 않는다. 시공을 초월하며(다니 12,12.13), 인간보다 더 지혜롭고(2사무 14,20), 강하고(시편 103,20), 죽지 않는다(루가 20,35.36). 천사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으며(묵시 5,11; 히브 12,22; 마태 26,53), 천사들에게는 계급과 서열이 있다(골로 1,16; 다니 10,12-21; 1테살 4,16, 1베드 3,22). 천사는 하늘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고, 시중들며(묵시 5,11-12; 8,3.4) 땅 위에서는 주님을 위하여 심부름하며 하느님의 일을 행한다(민수 22,22; 마태 13,41).
또한 신자들을 인도하며(사도 8,26), 돕고, 보호한다(1열왕 19장, 다니 6,22). 천사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과 동행할 것이며(마태 25,31; 2테살 1,7-8), 주님의 자녀를 죽음에서 하늘로 인도한다(루가 16,22). 즉 천사는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천상적인 존재들이다. 즉, 천사는 하느님의 사업을 수행하는 하느님의 일꾼이다. 이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하나로 묶어 공동체를 이루며, 하느님의 섭리를 세상에 편다.
중세에는 천사를 크게 고급, 중급, 저급으로 나누고, 또다시 각각 3계급으로 나누어 모두 9계급(세라핌, 케루빔, 보품, 주품, 역품, 능품, 권품, 그리고 천사장과 일반천사)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성서에는 라파엘, 가브리엘, 미카엘의 이름만 나오는데, 이들을 대천사라고 부른다.
라파엘은 토비트서에 나오는 일곱 천사의 하나로, ‘하느님이 낫게 하였다’라는 뜻이다. 라파엘은 하느님의 충실한 심부름꾼으로서, 눈이 먼 토비트와 불행한 사라의 기도를 들어주라는 하느님의 명을 받고, 사라에게서 악마를 쫓아내어 토비트의 아들 토비아와 결혼시키는 한편, 토비트의 눈도 뜨게 해준다. 7세기경부터 베네치아 교회에서는 수호성인(守護聖人)으로 받들었다.
미카엘은 ‘하느님과 같은 자는 누군가’라는 뜻이다. 성경의 다섯 곳(다니 10:13, 21, 12:1, 유다 1:9, 묵시 12:7)에서 보인다. 선민(選民)의 수호자, 용의 형상을 한 사탄(악마)과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세력을 나타내는 천사로 그려져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숭배해 왔으나, 서방교회에서는 5세기에 몬테 가르가노의 《미가엘의 출현》 등이 있은 이래 차츰 성행하게 되었다. 회화(繪畵)에서는 전사(戰士)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으며, 마지막 대심판 때에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도 있다.
가브리엘은 계시(啓示)의 일을 맡은 대천사로서 하느님을 모시는 시종이다(루가 1:19).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사람’을 뜻한다. 또 그의 기능과 관련하여 ‘고지(告知)의 천사’라고도 하며, 구약성서에서 예언자 다니엘에게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을 알렸고(다니 8,16-19), 신약성서에서는 즈가리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루가 1,5-25),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 사실을 알려주었다(루가 1,26-36). 유대교에서는 미카엘에 버금가는 대(大)천사로 간주되며, 이슬람교에서는 마호메트에게 계시하여 예루살렘으로 인도한 천사라 하여, 4대 천사로 받들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천사보다는 불완전하게 창조하시고(시편 8, 6), 천사들에게 인간의 수호자로 인간의 생애와 모든 사건을 보살펴 줄 것을 명령하셨는데, 이처럼 인간을 보호하는 천사를 수호천사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천사를 먼저 창조하시었다. 그리고 천사로 하여금 사람들을 도와주고 인도하도록 하셨다.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도움이 필요함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이처럼 인간을 사랑하시고 염려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자. 우리를 인도하는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께 나아가자.......◆
[말씀자료 : 경규봉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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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묵상-2> : †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
오늘은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로서 묵상할 복음은 요한 1,47-51입니다. 이 복음 내용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첫 번째 주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제 1일부터 제 4일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제 1-3일에는 주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거가 있었으며, 그 결과로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안드레아, 요한)가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4일에 안드레아가 자기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제 5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 5일에 주님은 필립보를 부르셨으며,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1. 예수께서 필립보를 부르심
주님은 공생활 첫주간 제 5일째에 갈릴래아로 떠나가시는 중에 필립보를 만나셨습니다. 주님은 필립보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따라라"(아콜루떼이)는 말은 단순히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을 말합니다. 필립보는 주님의 말을 듣고 즉시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은 필립보와 대화를 통해서 그에게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필립보가 안드레아와 베드로와 한 동네(카파르나움 벳사이다) 사람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공생활 초기에 이와 같이 직접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자기에게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초청에 응한 사람들과 1:1 대화를 통해서 그들을 복음의 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필립보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2.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전도함
메시아를 만난 필립보는 기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그에게 주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안드레아가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하고, 요한이 야고보를 주님께 인도한 것처럼, 필립보 역시 안드레아를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라고 전했습니다.
필립보는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요한과 같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이 메시아를 이해할 수 있도록 기초 작업을 해 놓았습니다. 필립보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나자렛 예수를 메시아에 관한 성경과 연관지어 해석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아는 나자렛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오실 것이라고 구약의 예언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고 신통치 않다는 식의 말을 했습니다. 즉, 관심없다는 말입니다. 나타나엘은 예수가 나자렛 출신이라는 필립보의 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나자렛은 촌 동네였을 뿐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천시하던 동네였습니다.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이미 메시아가 사람들에게 천한 신분으로 평가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시편 22,6-8. 69,8, 이사 53,2-3). 사실 주님께서 나자렛 사람으로 불려지게 된 것은 이러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필릴보는 자기 능력으로는 나타나엘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타나엘에게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그 분을 만나보자"고 권했습니다. 그는 자신은 주님에 대해 설명할 수 없지만, 나타나엘이 주님을 만나보면 그의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타나엘은 이런 필립보의 초청을 따라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3. 주님과 나타나엘의 만남
주님은 나타나엘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 말씀을 유추해 보면, 당시의 종교와 정치는 세속화되고 형식화되어, 참된 경건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타나엘을 보시고 굉장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주님 당시에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메시아를 고대하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타나엘은 그 사람들 중의 하나였으며, 주님은 이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나타나엘은 자기를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는 것을 보고 심히 놀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께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이 질문에 주님은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나타나엘은 주님께 오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서 성경을 묵상하며 메시아를 고대하는 기도를 드렸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이러한 그의 모습과 그의 기도를 들으셨으며, 그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필립보를 그에게로 보내셨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주님께서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먼 곳에서도 신자들을 볼 수 있으며, 그가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알 수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주님께서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것을 보고 그 분이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주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이스라엘의 임금님"으로 고백했습니다.
4. 더 큰 계시에 대한 예고
그러나 주님은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야곱이 형 에서우를 피해 야간도주 하다가 베텔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자다가 본 환상이었습니다. 야곱은 베텔에서 천사들을 발견하고 그 곳이 하느님이 계신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잠에서 깨어난 후에 그 곳에 돌제단을 쌓고 기름을 부은 후에 그 곳이 하느님의 집이 될 것이라고 서원했습니다.
앞으로 제자들은 주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기적과 말씀을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 풍성한 은총과 계시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나타나엘은 주님을 만나 후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나타나엘이 예수님의 제자인 바르돌로메오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르돌로메오란 말은 이름이 아니라 '돌로메오의 아들'이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나타나엘이 돌로메오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다음 글은 인터넷에서 발췌하였는데 출처를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행운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처세술이나 인간관계 행동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안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불확실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을 회의론이라고 합니다.
나는 확실하게 나인가? 이런 문제를 의심하기 시작한 사람은 데까르트였습니다. 근대 합리주의의 아버지라고 하는 데까르트의 철학은 바로 나를 의심한 끝에 형성된 이성의 근원적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찾아내었습니다.
사물의 존재가 확실한가 하는 의심은 결국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에 이르고 이 존재에 대한 의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의심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므로 자기 존재는 확실하다고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론 같지만 이성적 사유를 하는 자아의 존재만을 믿는 합리주의적 태도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나 자신만이 나를 알 수 있다는 막힌 사고의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 합당한 것만 진리였습니다.
성경에 소개되는 나타나엘이라는 생소한 제자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막힌 이성을 뚫고 들어오시는 예수의 접근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예수가 자기를 아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나 외에 누구도 나를 알 수 없다는 사고는 결국 내가 승인한 진리만 존재한다는 막힌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알고 있다”는 태도에 의해 무너집니다.
나는 누군가 타인이 알고 있고 나도 다른 사람을 알고 있다는 개방적인 자세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의 근원입니다. 절대적 진리는 그러므로 나에게 수용되어 내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자기 안에서 예수를 발견할 때까지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하고 의문을 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의문의 과정으로 그는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적 진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타자적 진리를 발견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나는 나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바로 타자적인 진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신비는 바로 진리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내 안에만 갇혀있는 것에 한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타자적인 진리를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고 진리를 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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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