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시어사 송암 승무 조에 대한 역사적 고찰
翰林侍御史 松庵 金承茂 祖 아버지는 (初諱 鍊成)軌이시며
金軌는 高宗21년(1234년)에 장원(壯元)급제(及第)한 영재(英材)이며 평장사(平章事)로서 고종 22년에 졸(卒)한 김인경(金仁鏡)의 아들인데 처음 이름은 연성(鍊成)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궤(軌)로 고쳤으며 예부시랑(禮部侍郞 :正四品) 김궤(金軌)는 원종(元宗)10년(1269년)12월에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正四品)로 자리를 옮겨 임금으로 하여금 바른정사를 펴도록 충간(忠諫)하였다 원종 11년(1270년)에 이르러 만 38년 동안 임시수도로서 항몽전(抗蒙戰)의 기지(基地)로 삼았던 강화도를 버리고 고려 조정이 옛 서울이였던 개성(開城)으로 환도(還都)하여 폐허가 된 도성(都城)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김궤는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正三品)로 승차하여 임금을 충성(忠誠)으로 보필하였고 원종13년(1272년) 6월에는 개성에 동서학당(東西學堂)을 설치(設置)하여 교육(敎育)을 진흥(振興)시키고자 했다 이때에 판비서성사 김 궤는 동부학당(東部學堂)의 별감(別監)이 되었고 상서좌승선(尙書左丞宣) 문열(文烈)은 서부학당(西部學堂)의 별감이 되어 몽고 침략으로 40년 동안 황폐된 교육을 다시 일으키었다
그 후에 김궤(金軌)는 한림학사(翰林學士,承旨;正三品)를 거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正二品)로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청렴하고 강직한 관직생활을 마치였다
장원급제하여 재상의 품계인 좌복야(左僕射)에 이른 김궤(金軌)는 출생 시기와 사망 시기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배위(配位)여흥(驪興)민씨(閔氏) 광균(光鈞)여(女)에서 아들 영(瑩)과 승무(承茂)조(祖)를 나으시고 딸婿- 任翊(匡靖致仕) 又 安東權氏 韙의女에게서 三兄弟를 두어 슬하에는 아들이 5형제였으니 모두 영특하여 문무반(文武班)에 출사하였다 장남 영(瑩)은 동생 승무의 음공(陰功)으로 전객령(典客令:正三品)을 지냈고 문평(文平)이란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2남 승무(承茂)는 초명(初名)은 락(犖)이시며 승무(承茂)조(祖)는 소년등과(少年登科)하여 한림(翰林)을 지내고 시어사(侍御史:從五品)로서 조세(早世)하였으며, 3남 성무(成茂)는 시랑(侍郞)정사품(正四品)에 오르고 4남 평무(平茂)는 대호군(大護軍)에 상장군(上將軍)을 지냈으며, 5남은 충무(忠武)라고 이름하였다
이와 같이 아들 5형제를 두어 모두관직에 나아가 부조(父祖)의 위대한 업적을 계승하였으니 세상에 드문 일이며 특히 2남 승무(承茂)는 장래가 촉망되는 영재(英才)였는데 불행히 젊은 나이에(34세) 세상을 떠났다
김승무(金承茂)의 행적은 고려사 열전(列傳)의 김인경(金仁鏡)전(傳)에, 동경지(東京誌) 등에 인경(仁鏡),궤(軌)승무(承茂) 삼대(三代)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승휴가 저술한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 서로 왕복했던 시(詩)들이 수록 되여 있다
고종(高宗)39년(1252년) 임자 4월에 과거(科擧)가 시행되였다 몽고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고종19년(1232년)부터 원종11년(1270년)까지38년동안 강화도를 임시 수도(首都)로 삼았기 때문에 임자년(壬子:1252년)의 과거도 강화도에서
시행되었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최자(崔滋)가 지공거(知貢擧)요 판대부사(判大府事) 황보기가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시행한 이번 임자년 춘장에서는 장원 급제 유성재(柳成梓)를 비롯하여 김승무(金承茂),이승휴(李承休),홍저(洪竚),최수황(崔守璜),김효적(金孝績)등, 33명의 진사(進士)와 아울러
명경(明經)5명 은사(恩賜)6명을 발탁하여 급제 시켰다
이때에 김승무(金承茂)는 홍안 소년의 어린몸으로 당당히 합격의 영광을 얻은 최연소 급제자(及第者)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영재(英才)였으며 고려사 열전에는 얼굴모습과 몸가짐이 아름답고[美容儀], 재주와 학식이 있으며[有才識],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少登第],사관과 한림원의 벼슬을 지냈다[歷史翰],고 기록 되여 있다
이처럼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출중한 미소년(美少年)의 몸으로 등용문(登龍門)에 오른 김승무(金承茂)는 그의 조부(祖父)김인경(金仁鏡)이 제2급 제자였고, 부친(父親) 김연성(金鍊成)이 장원급제(壯元及第)자였으며 3대를 이어 영특한 인재가 나온 명문가(名文家)의 귀공자(貴公子)로서 萬人의 선망(羨望)을 한몸에 모았던 기린아(麒麟兒)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친은 상서(尙書)좌복야(左僕射)한림학사(翰林學士)추밀원사(樞密院事)좌복야(左僕射),정당문학(政堂文學),감수국사(監修國史)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외조부 민영모(閔令髦[韙])도 상국(相國)을 역임한 고관대작(高官大爵)이였다
그러나 대대로 누린 화려한 관직에 비하여 생계는 항상 궁핍을 면하지 못했다. 청빈한 유학(儒學)숭상의 가문(家門)인데다가 .청백리(淸白吏)의 강직한 정신으로 일관해온 벼슬살이에서 생계의 윤택(潤澤)을 누릴 수는 없었다.
일찍이 증조부 김영고(金永固)가 무신(武臣)들에게 집과 토지를 몰수 당하여 가족들이 유랑 생활을 한바 있으며 시어사(侍御史)의 벼슬을 지낸 김승무(金承茂)조가 34세로 별세(別世) 했을 때에. 그의 친구 이승휴는 만시(輓詩)에서 배고파 우는 어린,옷깃을 잡고 나오더라 “[啼飢稚子牽衣出]” 고 슬퍼했으니 그 생계가 이렇게 청빈(淸貧) 하였던 것이다
타고난 성격이 강직하였던 김승무 는 홍저, 최수황. 김효적.이승휴.등 동년 급 제자들과 매우 친숙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청렴결백한 선비로서 서로 뜻이 맞았고,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일류 명사들이 였으며 한결같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애를 마친 청백리(淸白吏)였다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들끼리 서로 친목을 도모 하기 위하여 계(契)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을 동년계(同年契)라 하였으며, 이 동년계원 들은 연령순으로 서로 의형제의 의리를 지키면서.좌주(座主);(지공거와 동지공거)를 부모를 섬기듯 존경하여 받들었다
소년 급제 김승무(金承茂) 는 동년 계에서 나이가 가장 어리기 때문에 막내아우처럼 사랑을 받으면서 과거 시험성적순으로는 당당히 형님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동년 급제 이승휴(李承休)는 계(契)에서 아우요 방(榜)에서는 형(兄)이였다[契中爲弟榜中兄] 라고 만시(輓詩)에서 애석한 정회를 토로(吐露)하였다 김승무(金承茂)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지기(知己)는 다음과 같다
*1. 이승휴(李承休)[1224-1300]
고종 39년(1252)에 29세로 과거에 급제한 이승휴는 성품이 정직하여 세상의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강원도 삼척(三陟)고을 서쪽45리에 있는 두타산(頭陀山) 귀동(龜洞) 돌아가 몸소 밭을 갈아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 그는 소년시절에 아버님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학문에 힘써 문장과 시로써 명성을 떨쳤다
두타산 중턱에 돌우물[石井]이50여 개나 있어 오십정(五十井)이라 하였다 골 (洞)이 깊고 물이 맑으며 땅이 비옥하여 밭농사로써 생계를 유지하면서 10여 년을 지내다가 40세가 지나서 벼슬에 나아갔다 충렬왕 6년(1280년)3월에 전중시사(殿中侍史;政六品)로서 왕의 잘못을 간하는 상소를 올리고 파직되어 다시 두타산(頭陀山)으로 돌아와 용안당(容安堂)이라는 초당을 짓고 호(號)를 동안거사(動安居士)라 하였으며 여기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著述)하였고 자연을 벗 삼아 18년을 은거(隱居)하였다
충렬왕 24년(1298년)2월에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 이승휴를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불럿고 8월에 정3품 밀직부사(密直副使)감찰대부(監察大夫),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서 치사(致仕)하여 충렬왕26년(1300)10월에 77세로 졸(卒)하였다 그의 문집(文集)으로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2.홍저(洪竚)
홍저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관서승(大官署丞:從九品) 직사관(直史館:政九品) 기거사인(起居舍人:從五品)등의 맑은 벼슬을 역임했으며 특히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으므로 고종46년 (1259년)7월에 홍저는 권지직사관(權知直史館)으로서 감문위(監門衛)녹사(錄事) 한경윤(韓景胤)과 함께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해적(海賊)행위를 금지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원종(元宗)4년(1263년)에는 대관서승(大官署丞)으로서 녹사(錄事)곽예(郭預)와 함께 화친첩(和親牒)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가 해적행위 금지와 고려의 포로 송환을 요청하였고 그들이 약탈한 쌀20석 마맥(馬麥)30석 쇠가죽 70령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2년 후 원종(元宗)6년(1265년) 정월(正月)에는 직사관(直史館:政九品)으로서 몽고로 들어가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수행하고 돌아왔다
* 3. 최수황(崔守璜)(?-1301)
과거에 급제하여 태학박사(太學博士) 사간(司諫:政六品)을 거처 충렬왕 11년(1285년)10월에는 좌승지(左承旨:正三品)로서 동공거가 되어 곽인(郭麟)등 31명의 급 제자를 선발하였다 최수황은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돈독하였으며 청빈하고 검소하여 귀한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고기반찬을 준비하지 않았고 잔치 할 때도 간소한 술과 음식으로서 소찬에 그 치였다 벼슬이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正二品)로서 치사(致仕)하고 충렬왕27년(1301년) 8월에 졸(卒)하였다
행주(幸州)기(寄)씨 족보에는 기홍영(寄洪穎)의 일서(一婿)최수황(崔守璜)(江陵人)이요 이서(二婿)김승무(金承茂)(慶州人)이며 삼서(三婿)에는 송염(宋琰) 礪山人이시다
최수황과 김승무는 과거 에도 함께 급제하였고 연령 차이가 있으니 둘째동서가 되었다고 본다
* 4. 김효적(金孝績)
동년 급제자 김효적의 행적은 그 기록이 소상하지않다 다만 김승무가 34세로 세상을 떠날때에 김효적은 정언(正言:從六品)으로 있었으며 최수황은 사간(司諫:政六品)이였고 홍저(洪竚)는 기거사인(起居舍人:從五品)으로 있었으므로 이세사람을 삼랑사(三郞舍)라고 불렀다
영재(英才)들의 정한(情恨)과 풍류(風流)
① 구관시(求官詩)
이승휴(李承休)가 급제한 후에 12년동안 두타산(頭陀山)에 은거하엿는데 원종4년 (1263년) 계해(癸亥)겨울에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심(李深)이 안집사(安集使)가 되어 관동 지방에 부임하였다가 이승휴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학문과 인격을 높이 평가한 이심(李深)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밝으신 임금께서 위에 계시고 어진 재상들이 그앞에 있어 인재를 발탁하여 등용하고 있는데 , 궁벽진 산 속에서 헛되이 늙어 군신의 의리를 져버리는 것이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하면서 즉석에서 노복(奴僕)과 말(馬)을 내어 주면서 도성(都城)으로 올라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성에 와보니 12년전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자기를 발탁해준 황보기(黃甫琦)는 상국(相國)의 지위에서 이미 해정(解政)하였으며 동년급제자 김승무(金承茂)와 홍저(洪竚)는 직사관(直史館)으로 등용되고 최수황(崔守璜)은 태학(太學:成均館) 의 박사(博士)로 임명되어 있었다 좌주(座主) 황보기(黃甫琦)는 사랑하는 문생(門生) 이승휴를 위하여 차자(箚子)를 올린 결과 이듬해 갑자(甲子)년(원종5년1264년) 정월에 겨우 동문원(同文院) 수제(修製)라는 벼슬에 임명되었다 이 사실은 안 황보기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한관(閑官)으로 소외(疎外)되다가는 어느때에 어대(魚袋)와 부절(符節)을 얻어 차겠는가?
자네가 직접 시를 지어 여러 고관(高官)들과 학사(學士)들에게 보내어 벼슬을 구하는 것이 좋을 듯 하네“
이 말을 듣고 이승휴는 구관시(求官詩) 여러 시를 지어 바쳤는데 직사관(直史館) 김승무(金承茂)에게 보낸 시는 다음과 같다
김사관 承茂에게 주는 시[贈金史觀承茂]
李承休 作
幾年流落寄江山 : 강산에 몸을 부쳐 타향살이 몇해였던가?
更踏京塵似夢間 : 서울 티끌을 다시 밟으니 꿈만 같구려
故舊皆爲天上貴 : 옛친구 모두다 하늘위의 귀인이 되었건만
困窮誰救轍中乾 : 잦아지는 물속의 곤궁한 고기를 뉘라서 구원하리
相逢盡怪形容變 : 만나는 사람마다 괴이한 형용으로변하였으니
欲語先羞舌脥頑 : 말하기도 전에 부끄러워 혀와 빰이굳어지네
曾忝金蘭緣不淺 : 일찍이 金蘭之交를 욕되게 한 인연적지않으니
寬懷時復一彈冠 ;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시한번 나의탄관이나 아뢰어 주오
위 詩는 직사관(直史館) 김승무(金承茂)를 비롯하여 태학박사(太學博士) 최수황(崔守璜)직사관(直史館)홍저(洪竚)등 세사람의 동년 급제자(及第者) 친구들에게 전달 하였으며 또 다른 구관시(求官詩)를 지어서 당시에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상국(相國) 이장용(李藏用)과 재상(宰相)유경(柳璥)을 찾아 뵙고 시를 바쳤다
과거에 급제하여 12년이 지났고 나이 41세가 되도록 벼슬다운 벼슬도 못한 이승휴(李承休)를 직접 만나서 그의 구관시(求官詩)를 받아본 이장용과 유경은 그의 탁월한 문학적 재질과 인격을 높이 평가하여 원종 6년 정월에 경흥부(慶興府) 서기(書記)로 임명하였다 경흥부(慶興府)는 지금의 함경 남도에 있던 깊숙한 산악지대의 작은 고을이다.
② 사전시(謝餞詩)
이승휴(李承休)가 동문원 수제로 있던 원종 5년 (1264년) 5월에 몽고 사신이 와서 왕이 친히 몽고에 가서 조회(朝會)하라는 강요를 해왔고 8월에 이르러 왕은 도성(都城)을 떠나 몽고로 향했다 2개월 만에 왕이 연경(燕京)에 이르러 몽고 황제를 접견(接見)하고 또 2개월 이 경과한 12월 에 개성으로 환국(還國)하였다
새해 을축(乙丑)년 원종 6년1265년 정월에 고려 조정에서 는 몽고 황제에게 감사하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갈 사신을 보내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직사관(直史館) 홍저(洪竚)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어 따라가게 되었다. 엄동 설한 혹독한 추위에 먼나먼 북녘 땅 몽고로 떠나는 홍저(洪竚)를 위하여 송별연(送別宴)을 동문원(同文院) 고밀(高密)의 집에서 베풀었다 이 자리에는 한림 김승무(金承茂)와 최양(崔壤) 국자박사(國子博士)최수황(崔守璜) 어사(御使)설공검(薛公儉) 소경(少卿)이숙진(李淑眞)등 젊은 명사(名士)들이 모였는데 이 자리에 함경도 경흥부(慶興府) 서기(西紀)로 떠나는 이승휴(李承休)도 초청을 받았다 초청해준 동년 급제여러 친구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아울러 출국을 앞둔 홍저(洪竚)를 격려하기 위하여 이승휴는 고조(古調)의 시 한편을 지어 여러 친구들에 주었는데 김승무(金承茂)에게 보낸 사전시(謝餞詩)는 다음과 같다
謝餞詩;전송 잔치를 감사하는 시 李承休작
雪意多狂豊色惡 : 풍색이 험악한데 미친 듯이 흩날리는 눈송이가
飛入旅窓工紛泊 : 나그네 머무는 창가에 날아들어 어지러이 쉬고있네
沈吟獨坐不勝淸 : 홀로 앉아 읆 조리며 청정한 느낌이 그지없는데
忽有剝啄敲門聲 : 문득 문을 두드리는 똑똑 소리 듣더니
諸公欲餞丹陽子 : 제공들이 (丹陽子;洪竚)를 전송하고자
兼喚江陵老書記 : 강릉의 늙은 서기(老書記;李承休)를 부른다네
忙整烏紗騎白鳳 : 검은 사모 바삐 정제하고 흰 鳳凰을 탔더니
天晴餘驂盤空弄 : 맑은 하늘을 달리면서 넓은 蒼空을 희롱하네
便推東閣尋金蘭 : 문득 東閣을 밀치고 벗(金蘭)들을 찾으니
徘盤狼籍非人間 : 낭자(狼藉)한 술상들은 인간 세상이 아니네
金尊瀲灩搖微風 : 철철넘치는 황금 술잔엔 미풍(微風)이 한들거리고
淸嘯一聲磨靑空 : 한소리 맑은 휘바람이 푸른 허공을 전마(轉磨)하네
珠春玉碎話別腸 : 주옥(珠玉)을 깨트린 듯 애타는 이별을 이야기 하다가
壯心直向龍庭忙 : 장한마음으로 용정(龍庭)을 향해나아가기바쁘네
當今我聖巡五服 : 지금우리임금께서 오방(五方)을 순수정복하시니
聽奏四海昇平曲 : 승평곡(昇平曲)연주하는 소리 사해에들리네
要於他境顯國美 : 남의 나라땅에서 내나라 아름다움을 나타내시려고
千選萬選聊送似 : 천번 만번 가리고 가려내어 애오라지 보내시니
好去好來毋遲遲 : 잘가서 잘오시오 너무 더드지 않도록
佳期莫負春風吹 : 봄바람 부는 아름다운 시기를 저버리지마소
酒酣四座恣歡謔 : 모든座客 술에 취해 마음껏 諧謔을 즐기고
信口詩語令人愕 :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詩語는 사람을 놀라게 하네
自慙長爲山水客 : 기나긴세월 스스로 山水의 나그네 되었건만
尙未口吻餘鮮碧 : 아직도 입술엔 신선한 푸른빛이 없으니 부끄러울뿐
歸來茅屋月滿棟 : 초가집에 돌아오니 달빛만 온집안에 가득한데
怳疑驚破華胥夢 : 華胥之夢을 꾸었던가 황홀하여 의심하고 놀라네
* 유별시(留別詩) (一)
정월에 경흥 땅에 부임한 이승휴는 십순휴가(十旬休暇)의 말미를 얻어 4월 초순 에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지방 관리는 십순(十旬);100일 되면 20일 동안의 휴가를 주어 환향(還鄕)시키고 기일이 되어 임지로 돌아 간 것을 환관(還官)이라 했다 그가 환관 할 때에 몇몇 친구들이 다시 모여 작별을 앞두고 술잔을 나누게 되었다 이때에 이승휴(李承休)는 감개무량(感慨無量)하여 그의 천재(天才)적인 시재(詩才)와 문장으로 지난 정월 에 홍저(洪竚)를 전송할때에 읊었던 사전시(謝餞詩)의 운자(韻字)를 --악(惡)박(泊)청(淸)성(聲)자(子)기(記)봉(鳳)롱(弄)란(蘭)간(間)풍(風)공(空)장(腸)망(忙)복(服)곡(曲)미(美)사(似)지(遲)취(吹)학(謔)악(愕)객(客)벽(碧)동(棟)몽(夢)으로 시(時)를 지어 옥당(玉堂) 김승무(金承茂)와 최양(崔壤)에게 주었는데 그시는 다음과 같다
留別 玉堂金君承茂 崔君壤 兼自敍--李承休作
人間宦海風波惡 : 인간세상 벼슬길에 風波가 험악하여
萬鷁千艘困浮泊 : 천만척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네
先生胸中一掬淸 : 선생의 가슴속엔 한아름 맑은 생각
無人解聽洋洋聲 : 洋洋한 그 소리 알아듣는 사람 없네
長篇短篇壓餘子 : 長篇 短篇문장으로 모든 사람 압도하되
醉裏揮毫醒不記 : 취하면 붓을 휘두르고 술깨면기록하지않았네
毛骨傳從五色鳳 : 五色 鳳凰으로부터 毛骨을 傳受한듯
花紋錦彩隨風弄 : 꽃무늬 비단 채색 바람 따라 희롱하네
十分身上佩幽蘭 : 몸에는 幽蘭을 넉넉히 차고있어
淸香遠襲交遊間 : 사귀던 벗 사이에 맑은 향기 스며드네
噀向蓬山薰國風 : 향긋한 國風을 蓬萊山으로 뿜어내고
豪氣正與寬橫空 : 호걸스런 기상은 무지개로 더불어 허공에 비껴있네
自然餘論寒人情 : 自然스런 與論에 人情은 차가운데
狐群鼠輩皆奔忙 : 여우,쥐 같은 소인배들 모두다 奔忙하네
丘明驚媿班馬服 : 班固와 司馬遷이 놀라부끄러워 굴복했던 左丘明이듯
眉目分明垂款曲 : 眉目이 分明하고 款曲함을 드리웠네
朅來玉堂名更美 : 玉堂에 오며 가며 이를 더욱 아름다워지니
滋味定將啖蔗似 : 滋味는 정녕 사탕 풀처럼 달콤하다네
廉幕深沈宮漏遲 : 珠簾帳幕 깊은 궁궐 刻漏는 더딘데
天風馥馥薰人吹 : 하늘높이 부는 향긋한 바람 사람을 훈훈하게하네
紅粧呵箏笑且謔 : 단장한미인 질탕한 풍악 웃으며 즐기는 자리에서
一掃百紙君王愕 : 白紙를 一掃하듯문장을 이루니 君王도 놀리시네
明年霜臺振漂溧 : 明年엔 상대(御史臺)에서 씩씩한 기상을 떨치고
便向藥階高步出 : 문득 藥階:(中書省)를 향해 발걸음도 높이 나아 가겠지
行看桃李塡門客 ; 桃李花 바라보는 나그네 문안에 가득한데
嫩白嬌紅映金碧 : 울긋불긋 고운꽃 金碧에 비치네
黃閣耽耽飛畵棟 : 黃閣:(丞相府)을 바라보니 畵棟위를 날아다니다가
乘舟過日思前夢 : 배를 타고 세월을 보내면서 옛 꿈을 생각하리
二
銀濤逈隔風塵惡 : 험악한 風塵,저멀리 은빛파도 이는곳
中有神山舞凝泊 ;그 가운데 神山이있어 춤을추며 떠다니는데
空明縹緲連三淸 : 물에비친 달그림자 아득히 三淸(神仙宮) 이어졌고
往往遙起笙簫聲 : 가끔멀리서 들려오는 생황 笙 퉁소 簫소리
丹丘生與赤松子 : 神仙世界, 丹丘生,과 赤松子
吸露飱霞年未記 : 아침 이슬 저녁노을 마시며 지낸 세 월 기록이 없네
驂却靑鸞駕丹鳳 : 靑鸞의 驂馬에 丹鳳의 수레타고
群仙正在空中弄 : 신선들 무리 지어 공중에서 희롱하네
相將拆麝又分蘭 : 서로들 麝香을 터뜨리며 난초를 나누어 가지니
濃香吹散雲煙間 : 구름과 안개사이에 짙은 향기 흩어저 나가네
紅塵何處有仙風 : 紅塵 ,어느 곳에 仙風이 있었던가?
銀臺一點凌晴空 : 銀臺(樞密院)한곳만이 갠 하늘을 凌駕하네
淸河先生多於情 ; 淸河先生은 情感이 많아서
風雨逐筆何驚忙 : 風雨처럼 달리는 붓 얼마나 놀라운가?
見之使人便心服 : 그를 본 사람마다 문득 心腹하게 되지만
阿誰知得陽春曲 : 陽春白雪과 같은 고상한 곡조를 아는사람누군가?
少年蕭洒淸且美 ; 少年時節엔 蕭洒하여 맑고 아름다움이
玉樹臨風無奈似 : 玉樹에 바람이 이는 듯 흡사하였네
沈香亨前春日遲 : 沈香亭 앞 기나긴 봄날
傾國閑將玉笛吹 : 傾國의 閑將들은 옥피리를 불고
君王廻眄一笑謔 : 임금님 돌아보시며, 한번 웃고 諧謔하시네
立進淸平人所愕 ; 즉석에서 淸平調를 지어바쳐 사람들이 놀라네
天恩煦暖解寒溧 ; 하늘의 은혜 따스하여 추위에 떨리던 몸이 풀리고
鳳糸孛 龍綸隨手出 ; 임금님 말씀 기록한 윤발이 손끝에서 나오네
鈴索不搖絶外客 ; 搖鈴줄 흔들리지 않고 外客도 끊어지니
長嘯一聲裂山碧 ; 긴 휘 바람 한소리에 푸른 산 이 찢어지네
餘音飛糸堯 龍 蟠 棟 ; 餘音이 날아가 龍 이 서린 기둥에 얽히니
驚起宮娥救好夢 ; 좋은 꿈을 구하던 宮娥들 깜짝놀라 일어나네
三
吾曾世路賦命惡 : 내 일찌기 世路에 주어진 운명이 험악하여
蒼翠千重寄栖泊 ; 푸르른 깊은 곳에 몸을 붙여 살아왔네
飱嚼山光吸水淸 ; 산빛을 음식삼고 맑은물 마시면서
有耳不夢紅塵聲 : 귀에도 紅塵의 소리는 꿈밖의 일었네
忽聞中興聖天子 : 문득 듣자하니 中興의 聖天子께서
盛德登封鐫石記 : 높으신 德으로 인재를 登封하시고 돌에새겨 기록하신다네
宵衣旰食下金鳳 : 宵衣旰食하시니 황금 鳳凰내려와
造化等與天公弄 : 天公으로 더불어 造化를 희롱하네
幽香彩盡楚畹蘭 : 楚畹의 난초에서 幽香을 모두 캐내고
長材搜遍牛山間 ; 牛山사이에서 長材를 널리 찾으시니
四海一旦廻淳風 : 四海엔 하루아침에 순풍이 감돌고
葱蘢佳氣常浮空 : 푸르고 아름다운 기운 항상 공중에 떠있네
飜然始動功名情 : 갑자기 功名의 뜻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蹇足趣向雲衢忙 : 雲衢로 급히 향해 다리 절며 달려갔네
何人爲脫籃車服 : 不遇한 이 몸의 옷 뉘라서 벗겨주리
試使弄影瑤池曲 : 그림자 희롱하며 瑤池曲을 불러보네
玉山雖有玉之美 : 玉山이 비록 玉의 아름다움을 지녔어도
瘦骨正與秋山似 : 파리한 骨格은 가을산과 비슷하오
寧嗟伯樂來何遲 :차라리 伯樂이 어찌 그리더디냐고 탄식할지언정
諸公不惜蝮虎吹 : 제공들은 蝮虎를 불기를 아끼지 마소
時復招呼同戱謔 : 때때로 다시불러 희롱과 익살을 함께 하건만
豈獨我媿傍觀愕 ; 어찌나만 홀로 부끄러운 가 傍觀하다가 놀랐네
那堪春風吹溧溧 ; 봄바람은 살랑 살랑 불러오는데
悽然獨向陽關出 : 나홀로 쓸쓸히 어떻게 陽關을 떠날수있나
何時喚作玉堂客 : 어느때에 옥당객으로 부름을 받아
宣醞相傾碧香碧 ; 술 향기 푸른 宣醞을 서로 기울이면서
十分첨影圭龍棟 * 달그림자 가득히 용동에 비칠때에
草罷天書同醉夢 ; 天書 草案마치고 함께 취해 꿈을 꾸나
위의 세 편의 시는 옥당에서 화려한 벼슬을 하고 있는 김승무와 최양의 장래가 촉망된다는 찬사와 더불어 초라한 이승휴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것이다 첫 首는 김승무 가 長篇과 短篇 의 詩에 뛰어나며 豊彩가 鳳凰처럼 화려하고
玉堂:翰林院에서 문장으로 명성을 떨쳐 명년 쯤 에는 霜臺=어사대 에 들어 갈 것이며 곧 藥階=재상의 거리 에 올라 黃閣=정승이 국사를 처리하는 곳으로 들어 갈 것이라는 洋洋한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 首는 옥당의 崔壤의 豊彩를 찬양한것이며 셋째 首는 李承休자신의 운명이 기구하여 산속에 숨어 살다가 태평성대를 만나 늦게야 벼슬길에 올랐으나 여전히 발탁되지 못한 불우함을 서정적으로 읊은 것이다 이제 겨우 書記가 되였으니 언제 玉堂으로 들어가서 임금님의 조서(詔書)를 바치는 한림(翰林)이 될것인지 아득하였던 것이다
四
봉증시(封贈詩)----
유별시(留別詩)를 남기고 임지에 환관(還官)한 이승휴(李承休)는 쓸쓸한 경흥(慶興)고을에서 여름과 가을을 보내고 눈보라 치는 음력섣달을 맞이했다 병인(丙寅年;1266년) 새해를 앞두고 12월 상순에 경흥부(慶興府) 서기(書記)를 사직한 이승휴(李承休)는 개성으로 돌아오기 전에 장구팔운(長句八韻)의 시 한 수를 지어 한림(翰林)원에 있는 김승무에게 봉증(奉贈)했다
------謹賦 長句八韻 封贈 金翰林--------
大手文章是世傳 ; 위대한 솜씨를 지닌 文章이 이세상에 전하였으니
壯元仙後壯元仙 ; 壯元仙 뒤를 이은 장원선이라네
電馳洛下酒千首 ; 洛下에 우뢰처럼 달려가 일천수의 시를 짓고
龍臥嶺南幾十年 ; 嶺南에 누운 용이 되어 십년이나 되었네
忽被雲宵垂玉詔 ; 문득 靑雲의 하늘에서 玉詔를 드리우니
直從蘿月涉花塼 ; 담쟁이에 비친달빛따라 花塼을 밟고가네
吟廻浩渺胸呑澤 ; 읊으면 넓고 아득하여 연못을 가슴에 삼킨듯
醉更風流面洒泉 ; 취하면 風流를 다시하고 샘물에낯을 씻네
栢署明朝誇臘操 ; 내일아침 栢署;(御史臺)에선 臘操를 자랑하고
藥階他日賞春姸 ; 다른날 藥階(中書省)에선 아름다운春을 감상하리
牽來驥子令追電 ;千里馬 새끼를 끌어내어 번개를 쫓겨하고
打起鵬雛俾擊天 ; 大鵬의 새끼를 때려 일으켜 하늘을 치게하리
顧向竹堂環錦寄 ; 竹堂을 돌아보니 비단으로 둘러 붙였는데
佇分蓮燭草綸宣 ; 잠시 蓮燭을 나누어 綸宣을 草하네
長鳴出塞情何限 ; 길게우는 말타고 변방을 떠나는정 끝이 있으랴?
莫惜風前下一鞭 ; 바람 앞에 채찍질 한번 아끼지 말게나.
이 시(詩)에서 김승무는 큰 문장가이며 壯元仙으로써 청운의 뜻을 이루고 풍류를 지녔으며 지금은 御史臺에 있지만 곧 藥階에 올랐다가 竹堂에 들어가 蓮燭을 밝히고 綸仙을 짓게될 것이니 마치 천리마 가 번개를 쫓아가듯 대붕이 하늘을 쳐 나르듯 장래가 양양하건만 변방의 微官末職을 버리고 떠나는 李承休자신의 심경은 착잡하고 초라하기 그 지 없음을 표현하였다
留別詩
朔風이 몰아치는 섣달추위에 北關을 떠나 松都에 돌아온 이승휴는 언종 7년 (1266년) 새해를 맞이하여 가족과 함께 한가로이 얼마동안 正初의 경축 분위기 속에 지냈다 이때에 조정으로부터 都兵馬錄事에 제수 한다는 첩지(사령장)가 내려왔기 때문에 또 다시 송도를 떠나 변방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에 김승무는 典籤이 되었고 최수황(崔守璜)은 國子博士로 있었다 임지로 떠나기 전에 이승휴는 동년 최수황과 김승무에게 長句八韻의 시 한 수를 유별시 로 주었는데 韻字는 지난12월 상순에 金承茂에게 奉贈했던 시의 韻; 傳,仙,年,塼,泉,姸,天,宣,鞭,을 다시 사용한 것이 였다
同年 崔國博-崔守璜 괴 金典籤 承茂를 留別함
------留別同年草國博守璜金典籤承茂-------李承休지음
路遠芳音恨未傳 ;길은 멀고 소식전하지 못해 恨스럽더니
重遊上界會眞仙 ;참 神仙들 모이는 上界에 거듭 노닐었네
相悲氷雪添新鬢 ;더해가는 서릿발 귀밑머리 서로 슬퍼하다가
却喜金蘭似昔年 ;깊은 우정 옛날 과 같음을 문득 기뻐하였네
人盡驚珠容按劒 ;사람들은 진주에 놀라 칼날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君何作鏡力磨塼 ;그대는 어떻게 벽돌을 硏磨 하여 거울을 만들고 있는가
滿鳩忠膽難鎔鐵 ;온몸에가득한 충성심은 쇠보다 녹이기 어렵고
凉肺淸談當飮泉 ;가슴시원한 맑은 이야기는 새물을 마신듯하네
海上已逢常逐醜 ;海上에서,이미추한 것을 모두축출하여버렸으니
鏡中休媿素無姸 ; 거울속에 비친모습 곱지않다고 부끄러워할것이없네
妙齡辯酒遊奏地 ; 젊은 나이에 술을 갖추어 진나라땅에 노닐었으니
晩節分符役楚天 ;만년 에는 부신 을 나누어 가지고 초 나라에 사신 가겠지
事與身牽歡易散 ;일과몸이 이끌려서 기쁨은 쉽게 흩어지고
情敎舌지語難宣;정에,겨워,혀가,굳어,말하기도,어렵구려
漢夫未解留連意 ; 주저하며 차마떠나지 못하는 뜻을 알 수 없는 하인놈은
臨別華騮勸着鞭 ;자별에 임하여 華騮말에 채찍질이나 하라네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正9品)는 도병마사(都兵馬使)에 소속된 8명의 녹사들을 말한다 고려 현종때에 서북면과 동북면의 병마사를 통솔하기 위하여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도병마사 관청을 설치하였다 도병마사의 녹사는 중서문하성에서 근무하는 것이 원칙이며 특별한 임무가 있을때에는 변방으로 파견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이 유별시(留別詩)는 동년의 벗들과 더불어 신선처럼 함께 지내다가 작별하게된 아쉬움을 나타 내였고 그들의 뜨거운 충성심과 올바른 언론(言論)을 찬양하였으며 젊은 나이로 등용문에 올라 장래가 총망 되는 김승무(金承茂)와 최수황(崔守璜)의 인격에 대하여 부러운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석별의 정을 끊을수 없어 머뭇거리는데 속 모르는 하인 놈은 빨리 떠나자고 보채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4)시어사(侍御史)김승무(金承茂)의 강직(剛直)
남달리 영특한 김승무는 사관(史館)과 한림원(翰林院)의 청직(淸職)을 두루 거치고 종5품 시어사(侍御史)에 승진했다 시어사는 어사대(御史臺)에 소속된 벼슬인데 시정(時政)을 논하며 풍속을 바로잡는 일과 백관(百官)을 감찰(監察)하고 탄핵(彈劾)하는 일을 맡아보는 직책이 였다 .
천성이 강직하고 청백하였던 김승무는 시어사로서 매사를 엄정하고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두려워 하였다
당대의 세도 재상으로 횡포가 심했던 김준(金俊) 조차도 나이 어린 신진(新進) 언관(言官)인 김승무(金承茂)를 가벼이 여길수없었다 더구나 김준(金俊)은 원종5년(1264년) 예부시랑(禮部侍郞)이였던 [김궤(金軌);승무(承茂)의 부(父)] 가 바른말을 했기 때문에 죽이려고까지 했던 흉악한 인물이 였으나 오히려 승무를 소중하게 여겼으니 그가 탁월한 인품과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 였다
김준(金俊)이 역적으로 죽임을 당한뒤에 승선(承宣)허공(許珙)이 집정(執政)을 하였다 허공은 공암현(孔巖縣)사람인데 성품이 공손하고 겸소하여 자기생산을 일삼지않았다 비록 달관(達官)에 이르렀으나 먹는 것이 한그릇에 불과 하였고 베이불과 부들자리로 만족하였다 akdf을 삼가서 했으며 젊은 시절에는 남의 버린 시체를 매장해 주는 음덕을 행하엿다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올랐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러한 허공(許珙)이 각도(各道)를 안찰(按擦)할때에 강헌(康軒) 한완(韓琓)등의 무리가 허공(許珙)의 세도(勢道)를 등에업고 교활한 방법으로 많은 뇌물(賂物)을 거두웠다 이때에 시어사(侍御史)의 벼슬에 있던 김승무(金承茂)는 뇌물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탄핵하는 강경한 상소문을 올렸다 이로 인하여 허공(許珙)이 김승무를 미워하였다고 한다 덕망있고 청빈했던 세도 재상허공의 인격으로도 뇌물사건을 예방하지 못했고
또 이것을 탄핵하는 김승무(金承茂)를 증오 했다고 하니 애석한 일이다 (고려사권101김인경 김승무참조)
(5) 하늘도 땅도 통곡한 수재(秀才)의 조세(早世)
불세출(不世出)의 영재(英才)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김승무(金承茂)는 從5品 시어사(侍御史)로서 벼슬이 그치고 청빈(淸貧)한 생활(生活)를 하다가34세(歲)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움을 애석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특히 동년 급제자로서 형제처럼 서로 의지하며 아끼던 이승휴(李承休) 홍저(洪竚) 최수황(崔守璜) 김효적(金孝績) 등 네사람은 애도(哀悼)의 정(情)을 시(詩)에 담아 슬퍼했고 홍승제(洪承制)는 석상가(石床歌)를 지어 애석한 정을 나타내었다 이승휴는 석상가(石床歌)의 운(韻)을 빌어 다음과 같은 만시(挽詩)를 지어 읊었다
김시어사의 죽음을 통곡하는 시 와 서(哭金侍御幷序) 李承休
侍御諱承茂 ---- 侍御史의 諱는 承茂이니
相國仁鏡之內孫--相國平章事 仁鏡의 內孫이요
閔相國令髦(丸鈞)-민상국 영모(환균)의 외손이며
相國軌之子也----相國;尙書左僕射 軌의 아들이다
風儀甚度-------풍채와 행동이 절도가 있으며
而通敏兼才-----일에 통달하고 민첩한 재주를 겸비하여
有過人者焉-----사람들 가운데에서 뛰어났다
眞覇王英器也----참으로 王의 霸業을 이룰 英特한 그릇이였는데
年三四而卒------나이 삼십사세로 졸하니
何其短耶---------어찌 그리도 短命하단 말인가?
於予爲同年友-----나에게는 동년(1252년)급제의 벗으로서
交遊中年最少-----서로 사귀던 사람 중에 가장 젊은 나이였다
其巾車之日-------그의 장례를 치르던 날
風雨暴作---------폭풍우(暴風雨)가 일어나
儒釋會葬者-------장례에 참석했던 선비와 스님들이
皆霑濡掩抑-------모두 비어 젖어 어찌 할 바를 몰랐고
有失聲呼哭者-----목이메어 울부짖는 소리조차 들리지않았다
明日 借用--------이튿날
洪承制石床歌韻----홍승제(洪承制)가 지은 석상가(石床歌)의 운(韻)를 빌어
作一篇歸之於正-----한편의 글(弔詩)을 지어 정식으로 보내고
以示洪崔金-------홍저(洪竚)최수황(崔守璜)김효적(金孝績)등
三郞舍-----------세사람의 낭사(郎舍):門下府의 諫官에게보여 주였다
挽 詩 (李承休 作)
蒼山短簏蓋棺畢 ;푸른산 작은 기슭에 관을 덮어 끝마치니
靑樽雅笑難邀一 ;푸른 술잔 맑은 웃움 한번 다시 할수 없네
廟堂何以爲璵璠 ; 묘당엔 무엇으로 보옥을 삼을까?
帝寶皇珍埋地室 ; 황제(皇帝)의 진보(珍寶)가 지실(地室)에 묻히었네
無端行路尙齋咨 ;무단히 지나는 길가의 사람도 오히려 탄식하는데
況奈翁姑與姻姪 ;하물며 부모(翁姑)와 조카(姻姪)들이야 오죽하겠는가
嗟-哉 子貢之徒 ;아-! 자공의 무리여
勤勤雖好問 ; 비록 근근하게 학문을 좋아해도
此生無復尋師乙 ; 이승(此生)에선 스승을 다시 찾기 어렵겠네
花山交遊能幾人 ; 화산(花山)에서 사귀던 사람 몇몇이런가?
崔金與洪爲比隣 ;최(崔守璜)김(金孝績)이(李順)가 이웃에살았고
更有洪君住不遠 ;다시,홍(洪竚)군 이 멀지 않는곳에 살고있으면서
無絃琴上 ; 현(絃) 없는 거문고(無絃琴) 위에다가
共拂知音塵 ;지음(知音)의 티끌을 함께 떨어 버렸네
詩酒淋漓聲價重 ;흥건한 술과 詩는 聲價가 重하여
一一皆爲席上珍 ;하나하나 모두가 좌석 위의 보배였네
而予懶拙亦何幸 ;게으르고 졸렬한 나 또한 얼마나 다행한가?
烏覩蚢哉攀龍鱗 ;가마귀가 쑥누에를 본 듯 용린(龍鱗)을 휘어잡았네
李候昨年嶺南沒 ;이후(李候;李順)가 작년에 영남(嶺南)에서 죽으니
至今南望空傷神 ;지금도 남쪽을 바라보면 부질없이 마음이 상하는데
今朝又復金候逝 ;오늘아침 또다시 金候;(金承茂)가 서거하여
縢公之室 ; 公의 방을 닫았으니
路傍留柩開貞珉 ;길가에 영구 멈추고 비석(貞珉)만 펴 놓은채
相將酒盡千斛淚 ;서로서로 슬퍼하며 천곡(千斛)의 눈물 흘리니
散作飛雨傾河濱 ;흩날리는 빗물되어 강가(河濱)에 기울어 흐르네
煙沈霧暗呼不起 ; 안개는 자욱하고 침침한데 불러도 일어 나지 않으니
天何使我時至此 ;하늘이 어찌나로 하여금 이때에일게 하시는가?
歸來萬事摠成空 ;모든 일이 다 헛것이 되어 돌아갔으니
此身何啻不雲似 ;이 몸인들 어찌 구름과 같다고 아니하겠는가
功名富貴不須臾 ;공명과 부귀는 須臾(다만 잠간도)못되나니
石火電光那共擬 ;石火와 電光이 어찌그리 비슷하리요
人生差別何足嗟 ;인생의 이별을 어찌 탄식만 할 것인가?
我輩同歡奚止是 ;우리함께 기뻐함이 어찌 이에서 그칠것인가?
却後五百年相從 ;문득 오 백 년 후에 서로 만나서
水摩銅犬犬 談終始 ;銅犬犬 (동은)을 어르만지며 始終을 이야기 하리
이와같이 이승휴가 장구(長久) 의 만시를 지을때에 홍저(洪竚)가 육운장구(六韻長久)의 만시를 지었고,여기에 최수황과 김효적이 화답시를 이 세사람의 만시를 본 이승휴는 더욱 애절한 정을 이기지못해 다시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세편의 만시를 지어 통곡했다
김시어사 죽음을 거듭통곡하는 시와 서
[重哭金侍御幷序]
洪起舍 竚 ---;홍기거사인 저(竚)가
作六韻長久 ----;육운(六韻)의 장구(長久)를 지었는데
崔司諫 守璜----;최(崔)사간(司諫) 수황(守璜)과
金正言 孝績屬和;김정언(金正言)효적(孝績)이 화답(和答)을 붙여서
而三同年聯寫---;동년(同年)급제(及第) 세사람이 연사(聯寫)해서
爲一通示之---- ;한통을 만들어 보여 주기에
次韻奉答 -----;이것을 차운(次韻)하여 봉답(奉答)하였다
만시(挽詩) 이승휴(李承休) 작(作)
1
嗟哉此弟泣諸兄 ;슬프다! 이 아우 형의 죽음을 슬퍼하니
人百猶難贖更生 ;백 사람의 속(贖)을 다 바칠지라도 다시 살릴수 없네
昨盖金棺傷事了 ;어제 금관(金棺)을 덮어 상사(傷事)를 마치니
更看珠唾倍魂驚 ;주옥(珠玉)같은 글을 다시 보니 놀라움이 더하네
篇篇盡帶難窮恨 ;편(篇)마다 끝없는 한(恨)이 어리어 있고
脉脉空添叵奈情 ;맥락(脈絡)마다 하염없이 더하는 정을 어쩔수 없네
讀史螢窓同把卷 ;형창(螢窓)에선 함께 책을 들고 사서(史書)를 읽었으며
作詩僧壁共題名 ;승벽(僧壁)에다 같은 제목으로 시를 지었네
春軒邀醉桃花酒 ;봄이면 대청마루에 맞이하여 도화주(桃花酒)에 취하고
夏榻呼嘗玉葉羹 ;여름이면 平牀에 불러 옥엽갱(玉葉羹)을 맛 보았네
尙未轉頭便陳迹 ;아직도 묵은 자취에서 문득 머리를 돌리지 못하노니
此身眞箇等雲行 ;이몸은 참으로 한낮(箇)흘러가는 구름과 같구려
2
契中爲弟牓中兄 ;계(契)가운데 아우요 방(牓)가운데 형이 되어
出處相期賴子生 ;서로 출처(出處)를 기약하며 그대를 의지해 살았다네
叵奈採眞遊大迫 ;진실을 캐다가 큰 핍박 속에 지내더니
却疑欹臥夢還驚 ;문득 비스듬이 누워 꿈속으로 갔는가 의심하여 놀랐네
花鳥盃瀲誰同手 ;넘치는 화조배(花鳥盃)를 누구와 함께하며
雨夜床空孰話情 ;비내리는밤 텅빈 평상(平床)에서 누구와 정화(情話)하리
臺論飽聞餘好語 ;어사대(御史臺)에서 듣던 논의(論議)는 좋은말로남아있고
街啼忍聽說香名 ;거리에선 울음소리 들리며 아름다운 이름을 말하네
擬陳藥石醫民疒莫 ;약석(藥石)을 베풀어 민생(民生)의 고통을 고치고
虛把鹽梅作帝羹 ;염매(鹽梅)를 가지고 임금의 국(羹;善政)을 지었네
家國憂勞多少業 ;나라를 근심하고 수고하여 多少의 업적 이루고
滿庭黃葉趁風行 ;뜰에 가득한 황엽(黃葉)처럼 바람따라 떠나갔네
------3 --------
精金宜與石爲兄 ; 精金은 마땅히돌을 兄으로 삼아,
負質初從礦裏生 ; 지닌 바탕은 처음에 쇳돌(礦)속에서 나온다네
躍受爐槌人盡怪 ; 노퇴(爐槌)를 받은 듯 활약하니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고
凜廻霜雪鬼猶驚 ;霜雪이돌아가듯 늠름하여 귀신도 오히려 놀랐다네
踊衝斗角難藏氣 ;부두성 각성을 뛰어찌를기상은 감추기어려웠고
吼作龍吟別有情 ;웅장하고 뛰어난 시문은 특별한 정감을 지녔네
刃遣邪心含媿赧 ;간사한 마음에는 칼날을 보내어 부끄러워 얼굴붉히게 하고
柄歸賢手立功名 ;어진사람의 손에 권세가돌아가니 공명을 이루었네
但剸犀兕題鴻業 ;다만 물소들소를 베어 큰 업적을 기록했고
肯割鷄豚助肉羹 ;즐겨 닭 돼지를 베어 육갱(肉羹)을 도왔네
神物從來難久蓄 ;신기한 물건은 예로부터 오래도록 쌓아두기어려워
一朝雷雨上天行 ;하루아침 雷雨에 하늘위로 올라갔네
---------4 ----------
玉立蓬門屢喚兄 ;사립문에 고이서서 형의 이름부르고 또부르니
十分光彩里中生 ;光彩만 가득히 마을 속에 비치는데
啼飢稚子牽衣出 ;배고파 우는 어린 아들옷깃잡고 나오면서
臥病殘身倒屣驚;병든몸에짚신을 거꾸로신은채깜짝놀라네
倏忽便成千載事;千年의 사건도 갑자기 이루어지고
窮通偏感一般情;貧窮과 榮達의 偏感은 모두가 같다네
那堪更閱同年錄;어짜차마 동년록(同年錄)을 다시보리요
可忍空看結社名;부질없이 결사명(結社名)만 바라보며 참을수밖에
誰復見容無用木;누가다시쓸모없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용납하리요?
不曾聞括有餘羹;남아있는 국물을 모은다는 말은 듣지 못했네
號天痛哭徒爲爾;하늘을 부르짖고 통곡해봐도 헛된 일이라,
只帶西風作短行;다만 서풍(西風)에 향하여 짧은글을 짓노라
가난과 불운(不運)을 딛고 일어서는 후예(後裔) 들
불세출(不世出)의 아름다운 수재(秀才)가 34세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청백(淸白)하고 강직(剛直)하여 시어사(侍御史)의 벼슬에서 물러 나온 김승무(金承茂)조(祖)의 집에는 조석(朝夕)의 끼니조차 이어가기 어려운 처지에서 병약(病弱)한 젊은 아내 (행주기씨(幸州奇氏) 기홍영(寄洪穎)의 이녀(二女))와 어린 자녀 4남내 를 남겨두고 세상을 버리니 그 유족(遺族)의 고난(苦難)은 형언 할수 없었다 이승휴(李承休)의 만시(挽詩)에 “배고파 우는 아들 옷깃을 잡고 병든 몸으로 짚신을 거꾸로 신은 채 사립문 앞으로 나오는 부인(夫人)의 모습을 보고 깜작 놀랐다” 고 하였으니 그딱한 형편을 짐작 할수 있다
그러나 가난과 근심 때문에 자녀 교육을 페지할 수 없는 것이 선비집안의 가풍이다 청상(靑孀)이된 행주기씨(幸州奇氏)부인(夫人)은 자녀 교육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훌륭하게 아들 삼형제 딸 하나를 성취 시켜 선비의 가문의 전통을 계승(繼承)시켰다,
아버님을 여의고 배고파 울던 아이들 일자(一子) 일(鎰)이자(二子)류(鏐)삼자(三子) 건(鍵) 일녀(一女)백충생(白忠生)이 자랐으니 큰아들 일(鎰)일자라 군기(軍器)소감(少監)종사품(從四品)이 되었고 손자(孫子) 김견(金汧)은 임금이 하달하는 조서(詔書)를 지어 올리는 지제교(知製敎)에 올랐으며 증손자 김문중(金文仲)은 형부산랑(刑部散郞) 정육품(政六品)을 지냈다 그리고 현손(玄孫) 김천서(金天瑞)는 국구(國舅)로서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이 되어 가문을 중흥 시켰다
월성부원군 은 왕비를 낳았다
월성부원군 김천서는 정숙공 김인경 의 육대손 이며 시어사 김승무의 현손인데 고려말에 과거 에 급제하여 판예빈시사(判禮賓侍事)정삼품(正三品)를 거처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종일품(從一品)에 이르렸다 슬하에 영특한 아들 형제와 아름다운 딸 두분을 두셨는데 이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함께 벼슬하고 있던 이성계(李成桂)가 김천서(金天瑞)의 따님이 뛰어난 규수(閨秀)임을 알고 청혼(請婚)하여 둘째 아들 이방과(李芳果)와 혼인 하였다 세월이 흘러 고려는 망하고 사돈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開國)하여 태조(太祖)가 되었다 고려의 신하로서 사돈앞에 나아가 신하노릇 할수 없다고 생각한 김천서는 관악산(冠岳山)에 들어가 숨어살았다 이태조(李太祖)가 누차 사자(使者)를 보내어 벼슬하기를 간청 하였으나 끝가지 사양하다가 마침내 경기도 고양(高陽)의 귀동(龜洞)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정절(靖節)을 지켰고 그대신 아들 형제를 벼슬하도록 허락하였다
태조(太祖)7년 (1398년)왕자의 난이 얼마나 형제끼리 살육하는 비극이 일어나니 태조는 둘째 왕자 방과(芳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咸興)으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사위는 조선왕조 제2대 정종(定宗)임금이요 따님은 그 왕비가 되었으므로 임금의 장인이 된 김천서(金天瑞)는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으로 봉(封)해졌고 뒤에 다시 계림군(鷄林君)으로 추봉(追封)했다
그리고 장자 충열(忠烈)은 판윤(判尹)(지금의 서울시장)을 지내셨고 손(孫)에는 김수(金需)는 경기도 도통사(都統使)를 지내셨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했으며 시호(諡號)를 정호공(靖胡公)이라 했으며
차자(次子) 김의열(金義烈)은 형조판서(刑曹判書)지내셨고 일자(一子) 준(準)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내셨고 차자(次子)소(邵)正三品 行政懷德縣監晉州牧使를 지내셨으며
♥ 翰林侍御史公의 차자(次子)이신 류(鏐)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내셨고 鏐의 아들 충하(冲河) 判密直司를지내셨다 樹隱公 冲漢과 함께 南原시 흑성면(지금은송동)으로 南下하여 터를 이루셨다 孫子 서(䋡)는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 부사를 지내셨고 玄孫 의직(宜直)은 남평(南平)현령(縣令) 오세(五世)손 옥(鈺)은 고원(高原)군수(郡守)를 지내셨고 육세손(六世孫) 상념(尙廉)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충무위(忠武尉)부사직(副司直) 즉 이순신 장군 과 함께 임진왜란을 징벌하셨으며 구국을 위하여 헌신 하셨고 칠세손 秀采는 中直大夫 司圃 署別提를 지내셨고 팔세손 熙 宣武郞 南原郡守지내셨으며 九世孫 文世는 成均進士陞資通政大夫를 十世孫 伯仁祖의 諡號는 武亭이시며 司憲府監察官,訓練院僉正을 지내셨다
♥한림시어사의 第三子이신 鍵祖는 中書舍人 判敦寧을 지내셨으며 孫子이신 生水[初諱 起水] 贈 戶曹參議 成均館 大提學을 지내시다가 혼란한 世態를 비관하고 公職을 사임하고 居 慶州에서 學堂을 設立하여 良家의 子孫들에게 활강(活講)을 하시다가 전라도(全羅道) 옥구 회현에 오시어 터를 닦은 후 始居祖가 되시었다 公은 국가의 장래와 후손들의 번창은 교육의 힘이 크다면서 양성에 목표를 두고 회현 서당을 개설하여 자손과 인근 청소년들을 교육하는데 심혈을 기울이 시였다 공이 서당을 잘 운영한 결과로 고을 이름을 學堂村이라 하였으며 서당의 뒷산을 書堂山이라고 불러지게 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서당출신 제자들이 입신양명(立身揚名)한 현관(顯官)들이 많았고 공의 아들손자 3대가 문무(文武)에 급제(及第)하여 아들 영보(永輔)는 담양(潭陽)부사(府使) 손자(孫子) 석동(石仝)은 함경도(咸鏡道) 병마우후(兵馬虞候) 증손(曾孫)자 발(潑)은 담양(潭陽)부사(府使)가 되어 선정을 함으로 서 관리와 백성들의 칭송이 높았다고 한다 발(潑)조(祖)는 세현(世顯)세의(世義) 세명(世鳴)을 두셨다
한림(翰林)시어사(侍御史) 송암(松庵)승무(承茂)조의 자손(子孫)들은 김제(金堤) 남원(南原)군산(群山)옥구(沃溝)에서 시작 전국에 분포 되고 호사(豪士)준재(俊才)가 거성(巨星)하였으니 과연 한림시어사의 피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봅니다
후손들은 긍지를 가지고 자손의 도리를 다 하시기를 바랍니다
후손(後孫) 김천국(金珔國)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