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0:1-5, 34-35, 11:14-15
구원의 4가지 원리
1) 인간의 자발적 의지 아닌, 하나님의 선도적인 은혜로.
2) 인간의 도덕적 공로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3) 인간의 믿음없는 율법 지키기 아닌,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4) 양심과 인격도야 아닌, 성령의 내주로
♪♩♬ 세상 살아갈 때에 주를 더욱 사랑합니다. 밝고 빛난 천국에 ...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롬 3:29.
이것은 그리스도 이전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모르던 이방인들 중에서도,
(1)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을 믿고
(2) 그들이 알지 못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때문에,
(3) 성령의 내주역사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변화되어
(4) 양심의 율법에 따라 의롭게 삶으로써 구원받은 자가
있었을까요?
1.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 전 혹은 그 직후 이스라엘 민족 밖의 사람들 가운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에노스 시대에 여호와의 이름을 힘써 불렀던 사람들,
에녹, 노아, 멜기세덱, 욥, 엘리후, 그리고 빌닷, 소발, 엘리바스 등등 많습니다.
그 시대에 모세의 율법이 있었습니까?
그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복음이 선포되었습니까?
모세의 율법도, 십자가 보혈의 복음도 아직 발생하지 않은 시대입니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죠?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훗날에 있을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알았든 몰랐든.
그들은 양심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화와 내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화에 따라 선을 행하고 양심의 율법(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행함으로써,
훗날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난 번에,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 이전 상고시대의 우리민족 가운데도
하나님을 진실히 섬긴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요,
만일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면,
역시 앞에서 말한 4가지 원리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상고 우리민족 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전적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심령에 성령이 임하심으로써
속사람이 거듭 태어나,
양심의 법으로 선과 의를 행했기 때문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근거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욥은 그의 구원자 그리스도(욥의 표현으로는, 고엘, 구속자)가 이 땅에 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욥 19:25.
욥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자 예루살렘 왕이었던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져온 사건도,
인간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흘림과 살의 찢김, 즉 속죄의 죽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멜기세덱의 축복기도로 개선한 군사들이 나누어먹었을 그 떡과 포도주는,
영해하자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내다보는 일종의 성찬예식이었습니다.
2
그렇지만,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제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던 구약시대의 이방인들과 신약시대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성령의 내주 역사가 있을 수 있을까요?
성령의 내주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우리가 앞에서 선언했죠?
이것은 예민한 문제입니다.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다시한번 구원의 원칙 4가지를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적 은혜.
그리스도의 속죄보혈.
하나님께 대한 믿음.
성령의 내주와 감화.
이 진리는 우리에게 언제나 큰 감격을 줍니다.
이방인 욥이 고백한대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이십니다.
이방인들도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찬송: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3.
복음을 모른 이방인들의 구원문제에 관해,
성령의 내주가 있었는가를 중심으로 삼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내주 역사가 있었다면,
그 사람도 구원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형성 이전 신앙인물들도 성령의 내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실은 내가 전에도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실의 증거가 신약성경에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사람이 성령의 거듭나는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질책하셨습니다.
요 3:10.
그 시대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이며,
아담 때부터 그리스도 시대까지의 인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성령으로 거듭 나는 일"을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밝히 설명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도 모두 성령의 내주와 거듭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니고데모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 아주 명명백백합니다.
18세기 대각성운동가이자 미국역사상 최고 석학인 조다난 에드워즈의 이 견해가 옳다고 나는 믿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내주하시고 다른 성도들에게는 내주하시지 않고
그냥 감화만 하셨다는, 그런 견해는 틀렸다고 봅니다.
성령의 내주와 거듭남이 없이는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예수님이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3:3,5.
(2)
예수님의 이 중생에 관한 말씀은 오로지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니까요.
욥기 32:8,
"사람의 속에는 영[루아흐]이 있고 전능자의 숨[네샤마]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신다."
욥의 친구 엘리후의 이 말에서 "루아흐"는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킨다고
박윤선 박사는 주석했습니다.
전후문맥, 7절과 9절을 볼 때, 이 해석이 맞습니다.
이방인 욥과 엘리후가 성령의 내주와 거듭남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이 진리는 구약시대의 다른 민족에게도 적용되어야 마땅합니다.
찬송: 나의 사모하는 선한 목자는...
시온성에 사는 처녀들이여 사랑하시는 내주를....
4.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과 성령의 내주역사가 있(었)을 수 있을까요?
그에 관해 상고해 볼 수 있는 근거 사례가, 비록 완벽한 사례는 아니지만,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합니다.
로마인 고넬료는 사도 시대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몰랐으나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한 로마인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10:2을 주목해 봅시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구제를 많이 행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판단하건대,
그는 베드로의 복음을 듣기 전 이미 죄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그 혼자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닙니다.
온 집안 식구들까지 하나님을 믿게 했고,
하나님께 항상(디아판토스)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니,
그의 신앙은 보통 수준 이상이었음이 명약관화합니다.
그는 수준 높은 하나님사랑(항상 기도)과 이웃사랑(구제)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맞는,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었고,
천사까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정도면 연약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가 성령의 내주와 감화 없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1:14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 위의 사실과는 배치되는 말,
고넬료가 베드로의 복음을 들을 때까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들릴 수 있는
그런 말을 합니다.
"너와 네 온 집의 구원얻을 말씀"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얻을 말씀"은 바로 은혜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복음을 의미하고,
"구원얻을"은, 그들이 그 때까지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미래적 구원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구원에는 과거, 현재, 미래형이 있습니다.
과거형: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엡 2:8,
현재형과 미래형: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며, 빌 2:11,
미래형: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입니다. 딤후 4:18.
{ 신약성경 헬라어에서 과거와 관련된 동사 시제는 4 종류[부정과거, 미완료과거, 완료, 과거완료]가 있지만,
미래 시제는 단 하나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넬료의 미래적 구원을 말하고자 했을지라도,
주동사의 미래형("이르리라")보다 더 먼 미래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에 따라,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세계 이방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나님을 사랑하던 로마인 고넬료 집안에 먼저 전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안에 복음을 전할 때, 오순절 성령강림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데요,
행 11:15,
이는 그들에게 그 전에 성령의 감화와 내주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도들도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 성령의 내주와 감화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요 14:17, 13:10, 마 16:17, 눅 10:21.
그러나 요엘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처럼,
맨 먼저 오순절에 유대인들에게, 그 다음 사마리아인들에게, 그 후 로마인들(이방인들)에게 성령이 강력히 강림하셨습니다.
♪♩♬ 허무한 시절 지날 때
둘째,
우리가 사도행전의 이 본문을 엄격히 분석해보면, 이것이 고넬료의 미래적 구원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단지 구원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을 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 "그[베드로]가 너[고넬료]와 네 온집의 구원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he will speak words to you[주절] by which you will be saved, you and all your household[종속절].
[편의상, 헬라어대신 영어 NASB 번역본의 구절을 옮겼습니다.]
여기서 붉은 색 글자의 단어들은 둘다 동일 시제로서 미래형입니다.
관계대명사 구[엔 호이스, by which]가 이끄는 종속절에서 "구원얻을"이라는 미래형이 사용된 것은,
미래적 구원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절의 동사(이르리라)가 미래형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관점으로 볼 경우,
주절의 동사(이르다)를 현재형으로 바꾸면,
시제의 일치 원칙에 따라 종속절의 동사(구원받다)도 현재형으로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고넬료 온 집의 구원얻는 말씀을 고넬료에게 이른다."
이렇게 보면, 그 단어는 구원의 원칙을 천명한 것이 됩니다. }
즉 고넬료와 그의 일가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알지 못한 주전과 주후의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받은 자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맨 서두에서 명시한 원칙처럼,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의해서입니다.
♪♩♬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참 깊고 넓도다 구원하는 크신 능력 다 찬송할지라.
멜기세덱과 욥과 고넬료의 사례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승천 이후, 신약시대의 이방인에게도,
그가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되고, 또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기 전이었지만,
어쨌든 성령의 내주 역사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행 10:34-35.
이 구절은 이방나라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있었고,
그들을 하나님이 받으셨다(데케토스. 영접하는, 기꺼운), 즉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물론 성령의 내주는 (장차 오실, 혹은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5.
그러나 신약시대의 고넬료는 특수한 경우일까요, 아니면 이것을 좀 더 넓힐 수 있을까요?
즉, 소수지만, 세계 여러나라에,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겠느냐, 있을 수 있겠느냐
라는 문제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어보면, 행 10:35, 그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고루과문해서 그런지는 모르나,
세계 선교 역사상
선교사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미전도 종족에게 들어갔을 때,
그 종족 가운데 마치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받은 듯,
십자가 복음은 몰라도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며
의롭게, 사랑으로 살아가는 현지인(들)이 이미 있었다는,
그런 사례보고를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설사 그런 사례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선교사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므로,
선교사들이 이를 인식하기는 심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 민족 가운데는 그런 사례가 있었을까요?
다른 민족은 몰라도, 욥이나 그의 친구 엘리후가 속한 민족의 후예들 가운데는 혹시 신약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을까요?
그리스도가 오시기 오래 전,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밖에도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그런 사람들이 성경에 등장하는데,
왜 신약시대에는 그런 사례를 찾기가 어려울까요?
구약시대에는 성경의 기록 때문에 진실한 신앙인들이 있었음을 우리가 환히 알고 있지만,
신약시대에는 성경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세월이 많이 흘러 조상들로부터 전수되던 하나님 신앙이 흐려지고 우상숭배와 혼합되다보니,
사람들의 심령이 강팍해져 하나님을 점차 잊게 됨으로써,
신약시대에 이르러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찾는 자들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고
추정해도 될까요?
다른 나라들에서 신구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른 채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긴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내가 잘 알 수 없으니,
(세계 각국에서 하늘의 하나님을 섬긴 사례들은 발견되지만,)
다음 시간에 우리 민족에 대해서만 잠깐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결론:
(1) 신구약시대의 모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멜기세덱과 욥과 고넬료의 사례가 입증).
(2) 적어도 구약시대의 일부 이방인들에게는 성령의 내주가 있었다.
(3) 그럼 신약시대의 복음을 모르는 일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내주가 있었을까?
고넬료의 사례와 베드로의 고백(행 10:35)이, 그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찬양: 죄짐에 눌린 사람은 다 주께 나오라. 주말씀 의지할 때에 곧 평안 얻으리.
샬롬.
2023. 4. 16.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