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재 찾기
1) 시의 소재는 무한하다
시의 소재는 시를 쓰고자 하는 이에게 감동을 준 것 -사물, 현상 등-이라면 어느 것이나 좋다. 그러나 일반적인(평범한) 감동은 시를 쓰고자 하는 이에게 시상(詩想)이나 시정(詩情), 시흥(詩興)을 일으키지 못한 채, 이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이 감동을 준 사물이나 작용, 현상 등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거기에서 무한히 잠재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시정과 시적 흥미를 느끼게 된다.
즉, 시의 소재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던 어느 하나 시의 소재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 다만 그 많은 소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어떻게 표현하여 자신의 시 속에 용해시키느냐가 문제다. 시는 바로 소재를 어떤 관점과 의식에서, 어떤 가치관을 드러내기 위해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바꾸어 말하면 소재를 '발견'하는 노력과 의식에 따라 시는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2) 소재의 발견은 의식이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불도저가흙을밀었다
밀린 흙은 밀린 쪽의 흙이 되었다
<장원상 “불도저”>
위의 시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장난처럼 보이는 이 행위적인 시는 소재의 발견과 동시에 한 편의 시가 완성되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첫행부터 마지막행까지 모두 다 읽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시이다. 이 시를 시로서 자리매김 하려한 시인의 의지는 마지막 행에 있다. 그러나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이 끝 행으로 해서 시를 시로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시인은 어쩌면 시는 소재의 발견만으로 시가 될 수 없다고 믿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밀린 흙은 밀린 쪽의 흙이 되었다>는 진술을 통해 힘과 권력, 인간의 세상살기가 다 그렇다는 삶의 진리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 어쩌면 많은 독자가 마지막 행으로 인해 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면 장원상이란 시인이 불도저의 작업을 보고 밀린 흙이 밀린 쪽의 흙이 된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그것은 바로 의식(意識)이며, 부동산 업자가 불도저의 작업을 보았을 때 땅 값의 상승과 차익을 떠올리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80년대를 살고 있던 시인은 불도저가 흙을 밀어내고 있는 작업광경을 보고 밀리고 밀리는 힘의 이동을 보았으며, 데모대와 전경들의 투석전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2. 시의 소재와 주제의 관계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거적장사 하나 산 뒤 옆비탈을 오른다
아-따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길이다
산가마귀만 울며 날고
도적갠가 개 하나 어정어정 따라 간다
이스라치전이 드나 머루전이 드나
수리취 땅버들의 하이얀 복이 서러웁다
주물같이 흐린 날 동풍이 설렌다
<백석 “쓸쓸한 길”>
두 시의 소재는 다같이 길이다. 그러나 시 속에 흐르는 정서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일제치하의 시대적 배경이 같으면서도 시의 소재를 다루는 시각은 정반대의 흐름에 있다. 또한 같은 길을 소재로 하면서도 주제 의식은 시대의식을 도외시한 낭만적 주제가 되었거나(나그네), 시대의 아픔을 사실적으로 고통스럽게 그려내면서도 향토성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시(쓸쓸한 길)가 대조적이다.
우리의 삶이란 모든 사물과 직·간접으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길에 생쥐 한 마리가 등장해도 그것을 무심코 바라보면 그만이지만, 그것에서 의미를 찾으려면 한없이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구상 <현대시 창작 입문>).
쥐는 점점 납작해졌고
평평해지면서
쥐는 쥐도 아니고, 한 마리도 아니어서
그 죽음의 그림자마저 스러져버렸다.
그저 납작한 것이 한 장
햇빛을 받으며 젖혀져 있었다.
<오노 도사브로 “쥐”>
위의 시는 누구나 경험했을 길바닥에 깔려 죽은 쥐의 모습을 통해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현대문명의 냉혹함과 비정을 늘 염두에 두던 시인의 눈에 차 바퀴에 깔려 납작해진 종이장 같은 쥐의 시체는 더러움 이전에 현대문명의 희생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인식 세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소재를 달리 해석해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평범한 사람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쥐의 흔적을 보면서 무심할 수 없던 건 시인의 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3. 상상력을 부르는 체험과 관찰
천 년 몇 천 년이 걸릴지라도
네가 내게 입맞춤하고
내가 네게 입맞춤한
그 영원의 한 순간을
말, 다할 수가 없으리.
겨울 햇볕이 내리쪼이는 아침
<몽수리>공원에서의 일이었네.
<몽수리>공원은 파리의 안,
파리는 지구 위,
지구는 별의 하나.
<자크 프레베르 “공원”>
시의식의 확대를 통해 범우주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시이다. 벤치 위에서 입맞춤을 하는 연인―몽수리 공원―파리―지구―우주로 확대되는 상상력이 독자를 자연스럽게 우주적 사고로 이끌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 이토록 크고 넓은 우주적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다. 시는 소재가 훌륭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재를 어떤 의식에서 비라보고 관찰하며 또한 상상력으로 표출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4. 시- 체험의 결과물이다
시는 결국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쓰이지만, 그 이전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면 시인의 체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시를 머리로 쓰느냐, 아니면 가슴으로 쓰느냐, 아니면 몸으로 쓰느냐 하는 구분을 확연히 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시는 '온몸으로 쓴 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가슴(情)으로 쓴 시'에서 막연한 감동을 공감하게 된다. 이는 천박한 감상주의로 인해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명시라고 들어 온 많은 시들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고운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관념적 체험만 있으며, 그 관념도 '왜?'란 질문에 뭐라 답할 수 없는 막연함이 느껴진다. 읽는 이에게 ' 깃발을 꽤나 어렵게 표현했군'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할 뿐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 교과서에도 실린 <깃발>에서 비유·상징의 묘미는 얻을 수 있을망정 시가 지녀야할 내용성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별로 할 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추상적 의미를 구체화시키며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 사물을 추상적 의미로 바꾸어 낯설게 하고 있음에 의의를 찾아야 할까? 날아가지 못해 찢기 우고 헤지는 색 바랜 깃발이 더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가? 지금은 그래도 많이 바뀌었지만 이 같은 시들이 중·고등학교의 국어교과서를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의 어린 학생들 시에서 우리는 머리로 쓴 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실한 체험이기보다는 '그럴 것이다'란 당위성에서 쓰이는 시, 어른의 흉내를 낸 시들이 백일장을 휩쓸고 있다.
봄의 소리
새롭다.
꽃잎이
열리는 소리.
나비의
날개 젓는 소리.
봄의 소리
들으면
가슴이 열리고
마음은 훠얼훨
하늘을 난다.
<초등학교 6학년이 쓴 시 “봄의 소리”>
초등학교의 어린이가 쓴 시에도 이처럼 억지 감동의 글이 있다. 어른들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심한 이 같은 꾸며진 상상은 상상이 아니라 거짓이다. 상상력과 거짓은 다르다. 상상력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 건강함과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하지만(딱지 따먹기), 거짓은 뿌리가 없으면서도 마치 있는 듯이,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짐작으로 위장된다(봄의 소리).
딱지 따먹기를 할 때
딴 아이가
내 것을 치려고 할 때
가슴이 조마조마한다.
딱지가 홀딱 넘어갈 때
나는 내가 넘어가는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이 쓴 시 “딱지 따먹기”>
시는 마음이다.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시삼백이면 사무사(詩三百 思無邪)라고 했다. 진실 된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거짓이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쯤에서 뛰어난 독일의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충고 몇 마디를 떠올려 보아야겠다.
①모든 사건은 언어를 넘어선 영역 속에서 일어난다.
②자기 자신 속에 침잠(沈潛)하라
③쓰라고 명령하는 근거를 캐어라
④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써라
⑤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필연 속에서 써라
⑥자연에 근접하라. 그리고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게 될 것을 모방하지 말고 표현하라
⑦보편적 주제를 피하라
⑧창조하는 자에게는 빈곤도 없다
⑨어린 시절의 풍성한 추억의 보고(寶庫)를 간직하라
⑩자기 자신 즉, 고독 속에 파고들라
릴케의 이와 같은 충고는 우리를 주눅 들게 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시도 하나의 글에 지나지 않으며, 글이란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에서 시작된다. 글에 대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이다. 릴케의 충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시상(詩想)의 발견
시상(詩想)이란 좁은 의미로써 시를 직접 마음속에 그려내는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상의 시작은 시심(詩心)에서부터 시작된다. 시심 속에서 싹이 튼 시상은 마음속에 그림처럼 그려짐으로써 시를 일으키는 그 첫 단계가 된다. 여기에서 시심(詩心)이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이나 자연의 현상,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서 느껴지는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로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슬픔, 고통, 기쁨, 황홀감 등의 일상적 심리상태와는 달리 자기가 일상적 감정으로 느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순수한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시심은 시상을 일으키는 텃밭이 되며, 시심의 순수함은 시 쓰기의 가장 기본이 된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애틋함을 느끼는 이같은 시심이 풍부해 누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아쉽게도 청소년들이 자신이 지닌 순수함을 계발하고 드러내어 한 편의 글로 표현하는 습관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글을 무조건 두려워하거나, 글이란 어려운 단어나 추상적 어휘가 들어가야만 하는 것처럼 오해를 가지는 경우도 있어 자신이 무얼 쓰는지 조차 분명하지 않은 글들이 쓰이게 되고, 결국은 글과 자신이 멀어지는 결과가 되고 있다. 시상의 발견은 우연(偶然)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이며, 수동적이라기보다는 의지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냥 앉아 있으면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늘 마음속에 준비하는 자세로 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소 시상도 찾아온다고 할 수 있다. 시상을 맞을 준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자세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1) 자연이나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하자.
관찰이란 이미 자신의 능동적 태도와 마음의 준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다. 평소에 사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습관이 갖추어질 수 있어야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고 사물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이해한다'는 것은 '잘 안다'는 것이며, 따라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느냐이다. 시인의 사상과 이념, 그리고 관심 영역에 따라 발견의 깊이와 모습은 달라진다. 자연을 아름답게 보는 마음에서 바라보면 <나비>처럼 아름다운 시가 된다. 나비가 예쁘기 때문에 예쁜 나비가 앉은 꽃은 당연히 예쁠 수밖에 없다. 꽃이 예쁜 이유는 꽃 자신에게 있던 것이 아니라 예쁜 나비가 앉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나비는 아주 예쁘다.
나비는 날 때도 예쁘다.
나비가 앉은 곳에는
꽃도 예쁘게 피어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이 쓴 시 “나비”>
다음의 <감자꽃 1>은 시인의 체험 속에서 발견한 시다. 농사일에 허리가 휘어보아야 감자 꽃이 허리 아픈 꽃임을 안다. 그 끊어질 듯 아픈 허리를 찍어 누르며 모녀가 오뉴월 따가운 여름 햇살에 감자밭을 매는 모습이 결코 꽃처럼 예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감자 꽃이 있기에, 농사를 짓는다는 삶의 진정한 모습이 거기 있기에 그 처절한 삶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앞의 <나비>와 그 발상과 관찰이 똑같다. 10살짜리가 바라본 사물과 50세의 시인이 바라본 사물이 너무도 똑같지 않은가?
앉아 피어도 허리 아픈 꽃
자줏빛 흰빛
서로 물들이며
어머니도 누이도
오뉴월 빛 속에 엎드리면
그렇게 꽃으로 보였다
<이상국 “감자꽃 1”>
2) 상상력을 동원한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감정이나 감동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전율할 듯 강한 감동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남이 알 수 있게 전달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감동일 뿐 남의 공감을 얻어낼 수 없다. 이러한 감동의 표현을 위해서는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감동을 구체화시키고 이를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어야 글이 되는 것이다.
장마철이 좋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이…….
비가 많이 오면 늘 밭에서 호미질에 모종에 일만 하는 어머니가
쉴 수 있는 날이다.
그래서 난 늘 비 오는 날은 우리 어머니의 일요일로 정했다.
생전 비라도 안 오면 밭에서 사실 것만 같다.
비가 가끔 많이 왔으면 좋겠다.
<대천 여중3년 최선화 “엄마의 일요일”>
<엄마의 일요일>에서 시적화자는 비가 오는 날 이외에는 늘 밭에 나가 밭일로 하루해를 다 보내고 쉬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을 쓰고 있다. 가끔 비가 와서 쉬는 날(일요일)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애정과 상상이 있다. 그러나 다음의 <곰팡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저 시커멓게 썩어버린 곰팡이 자국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바라보려는 시인의 상상력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곰팡이를 마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현미경 속
아름다운 흑백의 나선, 벌거벗음을 먹었다
축축한 회색빛 그늘 속에서
주검의 흔적처럼 은근한 냄새, 검은 화약자국
버짐처럼 번지는
저 말릴 수 없는 거부의 몸짓
메마른 세상에 너의 터전을 넓혀라
긴 장마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검게 스미는 불꽃
하나 됨을 위해 소리 없이 일어서야 하리
<박종헌 “곰팡이”>
3) 늘 보았던 대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보자.
세상의 모든 글감들은 이미 다른 사람이 모두 다 썼다고 슬퍼하지 말자, 소재는 무궁무진하지만, 만약에 한정되어 있다하더라도 모양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냄새가 다르며 촉감이 다르다면 그것은 내가 쓸 수 있는 소재다. 즉, 글이란 소재가 아니라, 그 소재에 대한 해석과 의미가 글이다. 따라서 아무리 낡은 소재라도 자신만의 세계에서 바라볼 때 새로운 의미가 탄생되는 것이다. 다음은 같은 제목으로 쓰인 시들이다. 즉 소재가 같지만 모두 다른 시이다. 구상(具象)의 강(江) 연작시는 강을 다양한 의미에서 조망하고, 깊은 사유와 관조로 의미를 파악한다. 평등과 겸손, 용기, 자유를 가르쳐 주는 강은 벌써 강이 아니다.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集合)이면서
단일(單一)과 평등(平等)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같이 비춰서
모든 것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강은
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
무저항(無抵抗)으로 임하지만
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
강은
뭇 생명에게 무조건 베풀고
아예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
강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서
어떤 구속(拘束)에도 자유롭다.
강은
생성(生成)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무상(無常) 속의 영원을 보여준다.
강은
날마다 팬터마임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다.
<구상 “江 16”>
신경림 시인은 강을 '울음'이 밴 강으로 보고 있다. 역사 속에서 한없이 울기만 했던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빗줄기가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진흙 속에 꽂히고 있다
아이들이 빗줄기를 피하고 있다
울면서 강물 속을 떠돌고 있다
강물은 그 울음소리를 잊었을까
총소리와 아우성소리를 잊었을까
조그만 주먹과 맨발들을 잊었을까
바람이 흐느끼며 울고 있다
울면서 강물 위를 맴돌고 있다
아이들이 바람을 따라 헤매고 있다
울면서 빗발 속을 헤매고 있다
<신경림 “강”>
김용택은 섬진강변 시골 분교의 교사다. 그가 바라보는 강물은 어둠의 강물이면서 핏줄이다. 어둠을 씻어주면서 어둠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스민 강이다.
겨울 짧은 해 침침하게 진다
저뭄에 홀리고 홀려서
저문 데로 가서 그림자만 부리고
저물어 돌아오면 누가 그대 온 줄 알겠는가
하루를 저물게 하여
강물은 끊임없이 어둠을 실어가
세상을 다 저물게 한다
보아라 어두운 강물에 언뜻언뜻 보이는
강물의 희디흰 뼈
피도 보이지 않는다
저물 때 저물어 가서
저물어 돌아오면 누가 그대 돌아온 줄 알겠는가
소리없이 흐르는 물 가까이 걷는
그대의 기쁨을 누가 알겠는가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에
그대 핏줄을 잇고
핏줄 끝을 잡고 나는 풀잎처럼 쓰러져 강이 된다
<김용택 “강”>
남들은 저를 보고 쓸쓸하다 합니다
해거름이 깔리는 저녁
미류나무 숲을 따라갔기 때문이지요
남들은 저를 보고 병들었다 합니다
매연에 찌들려 저의 얼굴이
검게 탔기 때문이지요
저는 쓸쓸한 적도 병든 적도 없습니다
서둘러 그들의 도시를
지나왔을 뿐입니다
제게로 오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제게서 가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그들의 눈 속에 흐르는 눈물입니다
<이성복 “강 1”>
이성복 시인의 <강 1>은 의인화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을 생명 있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모든 것을 씻어주고 거두어가는 존재로 보고 있다. 이렇듯 동일한 소재라도 바라보는 이의 시각이 어디에 머물고 있으면 어떤 의식에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사뭇 달라지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재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일이다. 나의 시각에서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소재를 발견하는 일은 자신의 몫이다. 소재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시를 쓰는 이의 의식에 달려 있다. 건강한 의식과 건전한 비판 정신, 그리고 사물에 대한 애정은 좋은 시를 쓰는 기본자세다.
4) 시상의 형상화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삶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명령하는 대로 살기 마련이다. 이러한 생각은 다시 말로 표현되고 이를 글로 나타내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느끼는 발견이나 미적 감동, 깨우침 등을 창작이란 기능으로 다듬어 낼 때, 비로소 시상이 머리 속에 자리 잡는다. 우리가 흔히 '참 표현이 시적이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상의 표현이 언어화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상의 머무는 단계에서 체험과 의지, 사고력, 역사성, 사회적 배경 등이 작용하면서 재구성되어야만 한 편의 시로 태어날 수 있게 된다. 시가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는 이러한 재구성의 단계가 분명하며 미적 감동으로 형상화(image) 되었느냐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재구성의 모습은 성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다음에서 보듯이 어린이는 자신의 경험을 사실대로 말하고, 소년기가 되면 수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인들은 이를 자신의 경험 세계에 비추어 비유와 상징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청소년들은 단순 수식의 과정에서 상상과 비유의 과정까지 폭넓게 펼쳐지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인의 단계에 도달한 시를 쓰는 학생이 있는 반면에 아동기의 발상으로 시를 쓰는 단계까지 상당히 넓게 펼쳐져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청소년의 정신발달과 괘를 같이하는 것이므로 적절히 아이들의 생활시(어린이시)에서 성인들이 쓰는 일반시로 유도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무너지는 것이 '백일장' 대회란 필요악이다.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의 경우에는 감동보다는 반짝이는 말재주를 뽑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백일장에서 당선작들은 자신들의 삶과 무관한 성인시 수준의 작품을 뽑게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청소년들의 문학적 성장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으므로 신중해야만 한다. 아래의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는 삶이 없고 관념만 남은 아동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자
너와 나
해바라기처럼 항상 웃고
친구와의 우정, 슬픔을
함께 나누자
추억을 만들기 위해
김밥을 싸가 뒷산에서 먹고
소풍도 간 날
"친구야, 오늘 재미있었니?"
하고 말하면
친구는 "어∼"
하고 대답한다.
마음속에 남는
나의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
<초등학교 6학년이 쓴 동시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
글쎄? 무엇이 추억 만들기며 마음속에 무엇이 남은 것인지 감이 안 잡힌다. 추억을 만들기 위해 김밥 싸 뒷산에 가서 먹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그러니 "재미있었니?" 하고 물어도 "어∼"라는 대답 밖에 더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글에서 솔직한 것이라곤 "어∼"하는 대답뿐이다. 이런 시들이 잘 된 시로 신문<강원도민일보>에 실리고, 그것을 본 아이들은 시는 '저렇게 써야 되는구나' 하며 선생님의 지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 뻔한 일이다. 교실에서 올바르게 시 지도를 하려 해도 주위의 시들이 이런 모습일 때, 아이들은 오히려 혼란을 느끼게 된다. 정말 아이들의 삶이 베어 나오는 살아있는 아이들 시를 보여줄 수 있도록 아이들 작품을 선별하는 어른들은 신중해야만 한다.
내 몸집보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나는 오늘도 학교에 간다.
성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아주 공갈 사회책
외우기만 하는 자연책
부를 게 없는 음악책
꿈이 없는 국어책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잘 부러지는 연필 토막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일기장, 숙제장
검사받다 벌이나 서는 혼식 점심밥통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무엇이 들었길래 그렇게 무겁니?
얼마나 더 많이 책가방이 무거워져야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집어넣어야
나는 어른이 되나, 나는 어른이 되나?
<초등학교 5학년이 쓴 시 “내 무거운 책가방”>
나는 이 작품이 아이들에게 감동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확신한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아이들의 가장 절실한 생활문제를 그들의 친근한 일상어로 표현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아이답지 못한 좀 지나친 표현이 있어 순수한 아동의 작품임을 의심하게 하기도 하나,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들이 그토록 감동으로 읽는다는 데 있다. 아이들이 감동하는 것은 반드시 반항적인 마음이 나타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솔직한 그들의 일상―아무도 어른들이 시로 써 보여주지 않던 그들의 절실한 생활이 과감하게 씌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아동문학에서 동시에서 거의 완전히 망각되었고 버림받았던 것이 아동의 생활세계였던 것이다. 아이들의 체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그대로 시가 될 수 있다. 즉 체험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요 마음이며, 삶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더더기를 덧붙이고 깎고 다듬다 보면 감동은 사라지고 재미만 남게 된다.
생선 비늘이 뛰어
번뜩거리는 바다
노오란 지느러미를 펴다가
그물에 걸려든
해.
바다를 휘감고
퍼덕거린다.
개펄이 묻은
장대로
뛰는 바다를 치면
그 빠알간
해의 아가미 속에서
비린내 나는
햇살이 쏟아진다.
<이상현 “풍경”>
위 시는 말이 매우 신선하고 매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독자들의 머리 속에 바다의 풍경을 펼쳐 보이는 데 있어서 사물 자체로서 던져지는 살아 있는 말이 못 되고, 적어도 머리 속에서 한 차례 번역을 해야 하는 성가신 과정을 거쳐야 짐작이 되는 이질적인 말의 덩어리, 곧 죽은 말의 조립으로 되어 있다. 감동이 아니라 말재주의 재미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시의 본질이 아니다. 이러한 감동은 체험이 없는 상상의 세계에서는 오지 않는다. 아이들의 세계는 체험(삶)의 세계이면서 솔직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살아있는 세계다. 그래서 시적인 미숙함이 드러나면서도 오히려 읽는 이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들이 쓰는 동시는 시적인 완성도는 있을지 몰라도 감동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이들의 체험 세계에 들어가려는 잘못 된 동시 쓰기의 자세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이상현의 동시에서 '생선 비늘이 번뜩거리는 바다' , '그물에 걸려든 해' , '비린내 나는 햇살이 쏟아진다' 등이 바로 그러리란 개연성(蓋然性) 속에서 빚어진 언어로 쓰였기 때문에 감동이 없는 말장난의 시어가 되고 말았다.
5) 정서의 흐름 따르기
시도 일반적인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를 시에서는 정서의 흐름이라고 한다. 일어난 감정의 첫 단계(도입)가 주위의 배경과 함께 확장되고(발전), 감정의 극대화(정점-전환)를 이루고 드디어 정리단계(맺음)로 이르는 4단 구성의 흐름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정서의 흐름이 곧 시의 흐름이며, 이러한 단계는 시낭송을 할 때 감정의 상승과 하강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한 편의 시에 담겨 있는 시인의 감정 상태를 독자는 직감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시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그 감정의 오르내림에 따라 어조의 높낮이를 달리해 읽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의 기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시인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의 자작시 낭송을 들어보면 감정의 높낮이나 어조의 변화가 없어 뜻 전달이 전혀 안 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경험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오늘의 시가 가지는 낭송의 부적절함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시인들의 상당수는 시가 여전히 나약하고 애처로움 속에서 읽히고 음미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수되어 시를 낭송해보라 하면 백이면 백 모든 학생들이 예쁘게 애처롭게 읽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과서에 실린 시들의 대부분을 목청을 돋워 침 튀기며 낭송할 작품이 별로 없음은 물론, 시는 이런 것이라는 듯이 한결같이 감정을 내리 깔아야하는 시들이기 때문에 시낭송의 즐거움과 향유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독자들은 이런 시의 감정의 흐름을 1차적으로 파악해가며 시에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정서의 변화나 흐름이 느껴지도록 시를 읽고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시에 담겨 있는 이러한 정서의 흐름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또는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반대로 긍정에서 부정으로, 밝음에서 어둠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러한 정서의 흐름은 시인의 의식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마련이다. 정서의 흐름은 바로 주제 의식과 직결되어 독자의 마음속으로 전달된다. 시적 형상화(이미지)의 모습도 바로 이와 같은 정서의 흐름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미당 서정주의 대표시로 꼽히는 <국화 옆에서>다.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4단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1연에서는 시상의 진술이다. 2연에서는 촉발된 시상이 확장되고, 3연에서는 누님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며 감정의 극대화에 이른다. 4연은 정리 단계다.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남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읽은 시인은 불교적 연기설을 떠올리며 형상화에 이른다. 시는 소설과 달리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게 된다. 비유나 상징의 표현을 사용하는 목적도 바로 이 내면의 정서를 보다 구체적으로 또한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1인칭의 수필이 가지는 고백적 성격과 같으나 수필보다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정서의 변화와 주제 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정지용의 <유리창1>에서 정서의 변화와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 “유리창 1”>
유리창에 어린 영상은 새의 이미지다. 안과 밖을 단절시키는 유리창 속에서 내다보는 밤하늘의 별들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러나 시적화자는 여전히 유리창 속에 머문다. 시적화자는 열없이 유리창에 어리는 물먹은 별의 반짝임을 보고 싶어 입김 자국을 지우고 지우면서 더 잘 보려한다. 이런 행동은 슬프고 애절한 마음의 행동이다. 여기서 유리창은 이승(밝음, 화자의 세계)과 저승(어둠, 죽은 자식의 세계)의 경계이며, 투명한 유리의 속성에서 보이듯 서로를 연결시키는 영매적 세계이다.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 죽어버린 자식은 산새처럼 사라져 버렸다. 여기서 별의 이미지는 죽은 아들의 이미지와 아버지의 눈에 고인 눈물의 이미지로 복합되어 있다. 죽은 영혼과의 교감은 격리된 유리창을 통해 가능하지만 유리창을 열 수 없고 다만 '지우고 보거나, 유리를 닦는'행위로 밖에 자신의 안타까움을 표현할 길이 없다.
<유리창2>에서는 정서의 변화가 더 구체적이다. 모더니즘 계열의 정지용 시인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밖의 세상은 어둡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잣나무는 자란다. 그것은 희망이다. 일제하의 어둠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아직 요원하다. 목이 마르다. 나는 유리항아리 속에 갇힌 금붕어다. 목마름을 달랠 물도, 희망의 등대가 될 별도 보이지 않는다. 갇힌 나를 꺼내달라고 외치지만 현실을 꿈쩍도 않는다. 현실과 타협할 수 있다면 이 고통도 사라지리라. 그러나 시인에게 허용될 수 없는 차가운 입맞춤에 지나지 않는다. 쓰라리고 아련한 향기는 멀리 도회의 하늘을 피어오르는 화재의 불꽃처럼 멀리만 있는 것이다.
내어다보니
아주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 앞 잣나무가 자꾸 커 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
유리를 입으로 쪼다.
아아, 항 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소증기선처럼 흔들리는 창
투명한 보랏빛 유리알 아,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열이 오른다.
뺨은 차라리 연정스레이
유리에 부빈다, 차디 찬 입맞춤을 마신다.
쓰라리, 알연히, 그싯는 음향―
머언 꽃!
도회에서 고운 화재가 오른다.
<정지용 “유리창 2”>
6) 시 쓰기와 고치기
시 쓰기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퇴고의 과정 속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어쩌면 이 과정이 몹시 지루하고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이 창작의 과정이고 자신을 확인하는 아주 귀중한 시간이다. 고쳐 쓰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시가 태어날 확률이 높아간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촉발된 시상을 부여잡고 하얗게 밤을 새우는 날, 비로소 언어의 조탁(彫琢)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다음은 필자 자신의 시 쓰기 과정을 보인 것이다.
지난 해 여름, 방학을 했지만 보충수업은 여전히 실시되고 있었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뭐든지 붙들어야만 하는 교사와 고3 입시생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땀을 흘렸다.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열고도 흐르는 땀은 멈출 줄 몰랐다. 앞뒷문을 열어젖히고 언어영역 참고서 문제에 나온 김수영에 거품을 물다보니, 아이들은 어느 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버렸다. 반 이상의 잠들고 나머지 반은 비몽사몽이다. 칠판 한 쪽에는 'D-99'가 선명했다. 이른 바 수능고사 99일전이란 무언의 압력이었다. 정말 고3교실은 전쟁터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공격 99일전에 이미 패잔병이 되어가고 있었다. 벽에 걸린 전자식 둥근 시계가 눈에 들어 왔다. 유리는 벌써 오래 전에 없어진 듯 자판이 누렇게 변색이 되었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빨간 초침은 전지가 다 닳았는지 9자를 건너뛰지 못하고 움찔거리고만 있었다. 시침도 ㄹ자로 구부러졌고, 시침도 반쯤 꺾어져 나간 채였다. 고3이란 정말 불가사의의 특수 그룹이다. 그들에게는 초능력이 요구되고 그들에게는 판단이나 청소년의 푸른 삶이 존재하지 않았다. 잠든 아이들과 벽에 걸린 초현실적 시계가 그대로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거의 단숨에 다음의 시를 썼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부러졌을 거다.
또 누군가의 입에서
분침은 부러졌을 것이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이리저리 구부러졌을 거다.
지금은 폭염.
아이들은 모두 D-99를 보고 있었다.
훅훅거리는 교실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한밤이다.
두 대의 선풍기로 맴도는 교실처럼
남은 전지가 다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초침을 밀어 올리는
달리의 시계처럼
3학년 7반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 시를 두 번째 고쳐 썼을 때는 1연의 마지막 초침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지 못해 '이리저리'를 고3학생들이 꿈꾸는 S대학의 이니셜로 바꾸어 대학과 아이들의 반항적인 행위를 상징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2연에서는 'D-99'의 상징적 숫자가 타의에 의해 빚어진 일종의 엄포요 압력수단임을 드러내기 위해 ' 눈앞에 내걸린 D-99'로 바꾸어 썼다. 3연에서 '남은 전지가 다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초침을)밀어 올리는 달리의 시계처럼'의 뜻이 되어 이미지의 연결이 되지 않을뿐더러 초현실주의 미술가 달리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면이 있어 '남은 전지가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다음의 시가 되었다. 조금 정리된 듯하지만 아직도 선명치 못한 구석이 있었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을 거다.
아이들은 모두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었다.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한밤이다.
두 대의 선풍기로 맴도는 교실처럼
남은 전지가 마지막으로 초침을 밀어 올리는
3학년 7반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이다. 사실적이지만 구체성은 오히려 살리지 못하고 있다. 시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직 만족할 수가 없다. 분침을 익명성에, 아이들은 특수성을 강조했다. 2연에서는 교실분위기를 좀더 구체화시키고, 시계의 고통스러움과 교실의 풍경을 삽입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살지 못하는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3연에서 현실을 떠난 교실의 모습으로 이미지화시켰다. 차라리 희극적이던 선풍기를 교실을 들어올리는 프로펠러로 비유하면서 초현실주의자 달리의 그림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성을 드러냈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구부러졌을 것이다.
또 누군가의 손에서
익명의 분침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특수반 아이들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을 것이다.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는 고3반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눈알이 새빨갛다
책들만 어지러이 쌓이고
분필가루 속에서 벽 속의 시계는 컥컥댄다.
교사의 다그침이 메아리지는
여기는 삶의 변방.
두 대의 선풍기는 프로펠러가 되어
교실을 들어올린다.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
3학년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아직 시상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3연 구성이 단조로움을 주고 있다. 강조할 부분과 시적 배경이 조화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연과 2연을 바꾸어 '상황 제시- 상징적 묘사- 시상의 전환- 부정적 인식의 끝맺음'으로 4연 구성으로 정리했다. 먼저 1연에 교실 상황과 분위기를 속도감 있고 건조하게 묘사했다. 2연은 시상의 구체적 전개부다. 여기서는 상징의 방법을 썼다. 따라서 굳이 추정적 어미를 버리고 단정적인 어미로 바꾸었다. 3연에서는 지친 시계와 아이들을 초현실주의자들의 식탁으로 시적 전환을 꾀했다. 이어 4연을 1행으로 처리하면서 삶의 변방으로 끝맺음을 했다. 어느 정도 만족한 모습이다. 제목은 아무런 수식 없이 <고3 교실>로 했다. 비로소 주제가 살아난다. 군더더기도 많이 사라졌다.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는 고3 교실.
펼쳐진 책장 위에서
아이들은 고개를 꺾었다.
분필가루 속에서 벽 속의 시계는 컥컥댄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ㄱ자로 구부러졌다.
또 누군가의 손에서
익명의 분침은 떨어져 나갔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다.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
3학년 교실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두 대의 선풍기는 프로펠러가 되어
교실을 들어올린다.
여기는 삶의 변방.
7) 시를 압축하고 생략하기
시를 쓸 때 감각의 깊이를 더해가는 노력과 끈기, 그리고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게 된다. 상식적인 생각과 관습적인 사고로서는 결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낼 수 없다.
길가에는 벚꽃이 뿌려지고
언제 저버릴지 모르는 벚꽃은
계속 피고, 피고 있었다.
위의 글에서 '길가에는 벚꽃이 계속해서 피어난다'는 사실 이외에는 별다른 요소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분명 벚꽃이 피고지고 하는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에 쓴 것일 텐데 단순한 자연의 현상만이 나타나 있어 왜 이런 시를 썼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글을 쓰게 한 것일까? 시는 바로 이러한 이유와 근거마저도 시 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우리는 흔히 시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하면서도 왜 그런 표현을 썼느냐는 되물음에는 묵묵부답이거나 그것이 정서라는 말로 얼버무리는 경우를 본다. 마치 시는 적당히 써놓으면 이렇게 저렇게 이해하면 된다는 안일한 답변을 듣는 경우도 생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이름 있다는 반짝거리는 시인들의 시에서도 발견한다. 시는 그렇게 무책임한 것이 아니다. 길다란 산문보다도 더욱 엄격히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이 시이다. 최초에 느꼈을 그 '무엇'을 찾아내어 시를 빚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잘 빚은 항아리는 보기도 아름답고 그 기능면에서도 쓸모가 있기 마련이다. 위의 시를 아래와 같이 고쳐보면 어떨까?
길가에는 벚꽃이 지고
지는 꽃을 보면서
지는 꽃 사이사이에
다시 뜨는 하늘의 별처럼
꽃봉오리가 매달리고
꽃봉오리가 벙글고.
위의 3행을 여섯 행으로 늘리면서 비유를 통한 이미지화를 꾀하고 있다. 앞의 시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그런데, 시는 압축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길어졌으니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 자신이 쓴 글이나 시에서 빼거나 줄여도 내용을 전달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빼야 한다. 물론 리듬의 조화를 위해 남기거나 오히려 늘릴 수도 있지만 이는 한 두 음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압축을 위해 우리는 상징이나 비유 등의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길가에는 벚꽃이 지고
지는 꽃 사이사이에
다시 뜨는 하늘의 별처럼
꽃봉오리가 벙글고.
이러한 시 고쳐 쓰기는 활자화되기 전까지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또 고쳐서 보다 완전한 시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활자화가 된 이후에 고치는 경우도 있게 되는데 이를 개작(改作)이라고 한다. 다음은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어떻게 개작되어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시가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에는 ← 가실 에는 말업시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 고히고히 보내들이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내
아름 다 가실길에 리우리다
가시는거름거름
노힌그 츨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고히나 즈러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처음 『개벽』25에 실렸을 때는 오른 쪽의 모습이었으나, 후에 자신의 시집 『진달래꽃』에는 왼쪽의 모습으로 개작되어 실렸다. 이렇듯 시는 끊임없는 퇴고 속에서 다듬어지고 완전해지는 것이다.
흰 달빛 흰 달빛이 비치는
자하문(紫霞門) 경주 불국사 자하문을 열고 들어서면
달안개 달빛 젖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물소리 물소리는 청량하게 들려온다.
대웅전(大雄殿) 절의 대웅전 뜨락에 서니
큰 보살 큰 보살님이 미소짓고 있네
바람 소리 바람소리가 시원하게
솔 소리 소나무사이 소근거리는 소리로 불어오네
범영루(泛影樓) 절 앞의 누각인 범영루는
뜬 그림자 추녀깃을 들어 올리는 그림자로
흐는히 달빛에 흐릿하게
젖는데 젖고 있는데
흰 달빛 흰 달빛이 내리 비치는
자하문(紫霞門) 불국사 자하문 근처의 밤은
바람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한데 어울려
물소리. 달빛 안개 속에서 깊어만 가네
<박목월 “불국사”>
시와 산문의 가장 큰 차이는 같은 내용이라면 길이가 짧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는 압축과 생략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없어도 상상이 되는 불필요한 수식이나 어휘, 조사, 어미 등은 과감히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의 생성과 전달, 그리고 음악적인 리듬감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불필요한 언어라고 보아도 된다. 위의 박목월 시인의 <불국사>를 본래대로의 의미와 묘사로 확장시켜보면 오른쪽에 늘여 쓴 시와 같은 모습이 된다. 왼쪽의 <불국사> 원문과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오른쪽의 시는 오히려 풀어지면서 상상의 여지가 사라져 버렸다. 시에서 언어의 과감한 생략은 많은 어휘를 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표현 방법이 된다. 처음 시를 쓰는 사람은 자꾸 덧보태려 하는데, 시는 더하기의 미학이 아니라 빼기의 미학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아기야. 너는 어디서 온 나그네냐? 보는 것, 듣는 것, 만 가지가 신기롭고 이상하기만 하여 그같이 연거푸 울음을 쏟뜨리는 너는, ―몇 살이지? ―네 살? 어쩌면 네가 떠나 온 그 나라에선 네가 집 나간 지 나흘째밖에 아닌지 모르겠구나!
<유치환 “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