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수도 서울 방어작전과 함락
제 1절 창동-미아리-시가지 전투
1. 전투 개 요
전쟁 초기에 국방부와 군 수뇌부는 '서울 고수냐', '한강선 방어냐'의 기로에서 '서울 고수' 전략을 굳히고 모든 예비전력을 서울 북방에 집중으로 축차 투입하여 문산을 방어하는 한편, 의정부에서 적을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하려 했으나 26일 의정부가 피탈되고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군은 당일 17:00에 제7사단장 유재흥 장군에게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 직책을 부여하여 대전에서 올라오는 제2사단 등의 예비전력을 통합지휘 하도록 학고 창동-우이동선에서 적을 저지하여 제3. 5사단으로 반격으로 실지 회복을 한다느 구두명령이 하달 된다.
같은 시간에 문산 방면은 제1사단이 봉일천으로 철수중이고 김포반도는 적이 조강포 일대에서 도하를 시도하자 김포지구사령부를 편성하여 방어에 들어가게 되는 등 사실상 '서울 고수'는 의문시 되고 있었다.
이에 27일 01:00에 중앙청에서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었으며 계속하여 '서울 고수'를 주장하는 채병덕 총장의 견해와는 다르게 신성모 국방장관이 정부의 수원이동을 발의 하였다.
심야 국회에 참석해서도 채병덕 총장은 "반격으로 전환,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한 반면 신국방장관은 정부의 이동이 불가피하다는 암시를 던졌지만 국회는 "100만 서울 시민과 더불어 수도를 사수한다"는 결의문을 통과 시켰다.
27일 05:00에 국방수뇌회의가 소집되어 신장관이 서울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으나 채총장이 "정부는 남으로 이동하더라도 군은 서울을 고수한다"는 결심을 피력하며 회의를 끝냈으나 대통령은 이미 03:00에 경무대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국방 수뇌부 회의에 앞서 02:00경에 신장관과 서울시장, 그리고 조병옥경 내무부 장관이 경무대에 들어와 서울을 떠나지 않겠다는 대통령을 설득한 것이다.
그리고 27일 06:00에 정부가 수원으로 천도를 발표함으로써 시민들은 비로소 위기감을 알게 되었고 서울시내는 혼란속에 빠져 들었다.
당일 10:00에 창동 저지선이 무너지고 채총장은 서울 철수를 결심하고 극비리에 시흥의 보병학교로 이동한다고 하고 전방 부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에 최창식 공병감이 적이 서울시내에 들어오기전 2시간 전에 한강교(한강대교, 철교3개소,광진교)를 동시에 폭파하고 대략 16:00라고 보고 하고 공병대가 전선에서 후퇴하는 병력을 도하시키기 위해 공병 보트 18척을 준비한다고 하였다.
12:30분부터 육본이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13:00에는 대통령의 녹음 방송이 있었지만 시민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때 미 군사고문단장 대리 라이트 대령이 맥아더장군으로부터 곧 조사단을 파견한다는 전문을 받고 미군의 철수계획을 취소한 뒤에 다시 서울로 복귀하기로 하고 이를 채 총장에게 설명하고 함께 용산으로 복귀할 것을 권고하여 채 총장의 결심으로 18:00경 다시 용산으로 복귀하였다. 이때 각 신문사에서 미극동군사령부의 전방 지휘소 설치를 대서 특필하여 호의와 벽보로 붙였고 정훈국에서도 군 사기진작을 위해 가두선전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이미 27일 04:00에 적이 창동선을 급습하고 아군의 공세이전기도를 좌절시켰으며 유재흥 장군은 패퇴하는 병력과 증원부대를 수습하여 그들의 남하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우세한 그들의 전차와 포화로 이 선을 지탱하지 못하고 동일 14:00에 미아리-태릉선에서 서울 방어의 최후 저지선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8일 새벽에 한강대교가 폭파 됨으로써 우리 손으로 우리의 퇴로를 끊어버렸다는 후세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 문제 또한 만약에 폭파되지 못하고 적이 먼저 선점하여 전차부대의 도하가 이루어졌다면 아마도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기 이전에 승패는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가설은 힘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도 남는다.
이와같이 수도서울은 개전 4일만에 적에게 피탈되고 한강교의 폭파로 수많은 피난민과 전방에서 내려오는 군의 철수병력과 장비들이 갈 길을 잃고 허부적 거리는 비극속에 김일성은 이승엽을 내세워 서을시민위원히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프락치등을 내세워 무고한 시민의 처형과 사유재산의 약탈 등 만행을 저질르게 된다.
이제 아군은 시흥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적의 한강 도하(노량진-영등포 방면)를 막도록 하고 김포지구에서는 김포지구사령부가 김포반도로 유입되는 적 제6사다의 진출을 지연 시킴으로써 당초에는 3일의 지연이 6일동안이나 이 전선을 지탱함으로서 미군의 한반도 진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장에서는 수도권 전황과 한강선 방어에 대한 창동-미아리전투, 김포-오류동부근전투, 서울철수 상황으로 구분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2. 북한군과 국군의 상황
가. 북한군 상황
(1) 공격부대 임무
북한군 남침계획에 의하면 의정부-포천 방면에서 서울을 공격하는 적 제4사단은 3번 도로에서 국군을 견제하고, 제3사단은 그 우익에서 43번 및 47번도로를 따라 서울을 동측에서 포위하는 것이었다. 이때 제4사단의 죄익에서 제1사단이 개성-문산-서울에 이르는 1번 도로로 진출하여 서울 서측에서 국군을 양익 포위하도록 하였다. 이때 고속기동부대인 제105전차여단(-)은 2일차에 투입하여 신속히 한강교를 점령하여 한강이북의 국군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전쟁개시 1일차에 동두천과 포천을 점령하고, 전쟁개시 2일차에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3번도로 및 43번 도로를 따라 계속 공격을 하여 국군 퇴로를 차단한 후 제2단계 작전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군은 공격계획과는 다르게, 6월 27일 북한군 제4사단은 서울 북쪽에서 공겨하기 위해 3번 도로를 따라 수유리지역까지 진출해 있었다. 제3사단은 서울 동측에서 공격하기 위해 43번 도로를 다라 광진구 화양동 부근까지 진출해 있었다. 105전차여단(-)은 서울 동북쪽 4km지점의 정릉 유원지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또한 43번 도로를 다라 진출한 제107전차연대는 25일 오후에 의정부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최초 47번 도로로 기동했던 109전차연대는 26일 오후 늦게 의정부 지역에 도착하였다. 3번 도로로 기동했던 제203전차연대 제3대대도 국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27일 새벽에야 의정부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에 105전차여단장은 제109전차연대에게 수유리를 최근임무계선으로 하고, 그 후 서울까지 진격하는 것을 목표로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6월 27일 의정부 북쪽에서 서울로 진출하는 105전차여단(-)에게 한강교 점령 대신 중앙청을 비롯한 서대문 형무소와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점령하도록 지시 하였다.
(2) 전투 편성
우리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북한군 최초 공격제대는 2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이 의정부-서울축선에 배치된 국군을 집중공격하였다. 북한군은 최초 편성대로 공격에 가담하고, 다만 105전차여단은 김일성의 지시로 중앙청을 비롯한 서울 지역의 주요 건물에 대한 점령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당시 북한군은 보병 2개 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18개 보병대대와 122mm곡사포 24문, 76mm 곡사포 84문, 120mm 박격포 54문, 76mm 자주포 24문 그리고 전차 93대였다.
나. 국군 상황
(1) 의정부 함락 이후 육군본부 조치
당시 육군은 의정부가 함락되자 육본내에서 장교 100명으로 편성된 장교연대를 편성하고 26일 21:00시에 창동에 위치한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장비부족과 자질 부족, 낙오병으로 곧 해체되었다.
육본은 최초 제1사단에 증원할 게획이던 제5사단(-)를 의정부 함락이후에는 제15-2대대, 제20-1대대를 제20연대장에게 주어 미아리의 구릉지대에 배치하여 창동 방어력을 보강하였다. 또 가평으로 출동했다가 복귀한 제8연대의 1개 대대를 청량리 북쪽 141고지에 배치한다. 26일 야간에 서울에 도착한 제16연대-3대대는 창동선으로 보냈다. 공병학교장에게는 창동-미아리가늬 교량을 폭파하는 임무를 부여 하였다.
(2) 전선 부대의 재편성
의정부에서 철수한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26일 19:00시에 육군본부 전방지휘소가 설치된 창동의 노해지서에서 채총장으로부터 의정부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 지역의 부대를 총제할 통신망이 미비하여 가용부대의 소재와 병력규모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27일 04:00시까지 지휘본부에 도착한 지휘관은 제5연대장(최창언중령), 제1연대장(함준호대령) 뿐이었다. 이후에 08:00시에 다시 파악한 가용부대는 모두 5개연대였다. 하지만 각 연대병력은 300에서 700명 내외에 불과했다. 그러니 다 합쳐도 1개 연대에도 못 미쳤다.
이때 제1연대가 우이동에 있었고, 제3연대가 수유리 92고지에, 제5연대와 제16연대가 수락산 서남단 278고지에, 제25연대는 백석천에서 철수하여 우이동 제1연대 근처에 집결해 있었다.
한편 제9연대(윤춘근 중령)가 제1대대와 함께 26일 16:00시에 태릉으로 철수하고, 육사 생도대대는 26일 내촌에서 교전을 벌이다 학교장 지시로 태릉으로 철수하였다. 생도대대는 21:00시경 사관학교에 복귀한 후 1개 중대로 93고지와 학교주변 경계임무를 담당하고, 제9-1대대는 불암산 동남쪽의 210고지를 점령하여 퇴계원 방향으로 공격이 예상되는 적을 대비하고 있었다.
3. 창동 방어선 전투
가. 방어선 형성 및 전사요약
의정부의 실함으로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 제7사단장 유재흥장군은 이곳에 투입된 병력을 규합하여 창동을 중심으로 도봉산(우이동)-수락산(상계동)선의 구릉지대에 방어선을 계획하고 철수 병력을 수습중이었다.
이때 의정부 남쪽 백석천 일대에 배치된 엄호부대인 제2사단 제25연대(-) 26일 17:00경부터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3사단의 공격을 2.36"로켓조가 전차 1대를 파괴하고 이날 밤에 제11중대장이 편성한 전차특공조가 전차 2대를 파괴하여 적의 진출을 저지하였으며 이로인해 적은 다음날 새벽에 다시 공격해 왔다.
이 동안 의정부지구 전투사령부는 병력을 수습하여 우이동-창동 구릉지대에 제7사단 제1.3.9연대, 제2사단 제5.16.25연대, 제3사단 제22연대의 잔여병력으로 총 6개 대대로 규모로 병력을 배치하였다. 우측방 붕암산 방향에는 제9연대(-)철수병력이, 육사부근 고지에는 내촌에서 물러난 육사생도 대대가 배치 되어 있었다.
그러나 27일 10:00경 미처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도 전에 적 전차 40여 대와 자주포로 증강된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포병학교 제2교도대대 105mm 곡사포 6문이 지원사격을 하는 등 분전했으나 방어선이 돌파되고 이 과정에 제1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수유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무렵 미아리-회기동선에는 미아리에서 서울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아리지구 전투사령관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이 휘하의 제5연대 제1대대와 수도사단 제8연대 제2대대를 지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다가 철수 병력을 수습, 제7사단장과 정릉(171고지)-미아리-청량리(106고지)를 잇는 이른바 미아리 방어선을 형성하여 제5사단장이 제20연대 제1대대를 171고지 동쪽, 제1연대(대대규모)를 길음교 북쪽 공묘지, 제15연대 제2대대를 미아리고개 132고지에 배치하였다.
제7사단장은 혼성연대를 164고지에 북동쪽에,제8연대 제2대대를 회기동 143고지 및 중랑교 남쪽 106고지, 제16연대(대대규모)를 예비로 돈암국교에 배치하였고 105mm곡사포를 돈암동에 57mm 6문이 미아리 고개에 배치되는 등 27일 오후가지 미아리-회기동 선에는 약 3000명의 병력이 배치 되었으며 중랑교를 제3사단 공병대대가 폭파하였다.
27일 밤 폭우가 집중되는 가운데 적의 공격이 재개 되었다. 적의 기마정찰대와 적 전차 10여 대가 19:00에 수유리에서 미아리로 공격을 하여 제20연대 제1대대는 중과부족으로 밀려났는데 포병과 대전차포 등이 집중화력으로 선두 전차를 파괴하면서 일단 예봉을 제압하였으나 24:00경 다시 폭우속에 수미터 앞도 보기 힘든 그런 상황에서 전차로 밀어 붙여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고 길음교로 진출하고, 이때 서울 시내에 침투한 적의 편의대가 곳고에서 예광탄으로 신호를 보내어 국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고 제15연대 제2대대의 육탄 전차공격에도 결국 미아리 고개진입을 허용하게 된다. 이때가 28일 01:00경이었다.
미아리 방어선에서 28일 새벽을 맞이한 잔류병력은 적 전차가 시내에 진입한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날이 밝은 다음에 적 보병의 기습으로 분산 철수하기 시작한다.
창동 전투
의정부 적105전차여단
호원동 적4사 적3사
도봉산 수락산
창동 불암산
제5연(-) 제16연(-)
제25-2대 제3연(-) 제1연(-)
포병교=교도대(포 6문)
육사
길음동 전투사 봉화산
나. 전투 경과
6월 27일 04:00시에 백석천 저지선이 무너지고 04:30분에 적 전차가 창동선까지 진출하였다.
의정부지구 전투사는 의정부-서울 간의 3번 도로와 도봉산 줄기를 동남으로 횡단하여 우이동에 이르는 무명도로에 중점을 두고 4개 연대를 일선으로 전개시켰다. 그리고 1개 연대를 예비로 하여 사령부 부근에 배치하여 창동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26일 저녁 채총장으로부터 역습명령을 받은 의정부지구사는 전투정찰대를 27일 새벽에 출동(제25-3대대장이지휘)하였으나 짙은 안개 속에서 적에게 기도가 노출되어 피해를 받고 분산 철수하여 복귀도 하기 전에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방어선 정면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반신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개이호가 일렬로 연결된 창동 방어선은 북한군 포격에 매우 취약하였고 방어종심도 거의 없었다. 이러한 진지에 배치된 국군 제105mm 곡사포 6문이 적 전차에 포벽을 가하고 보병도 일제히 소총사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끄덕없이 전차는 접근하고 얼마 남지않은 실탄을 모두 사격해 버리고 하나 둘식 진지를 이탈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창동 방어선이 무너지는 무렵에 국군 일선 전투부대 뒤에는 독전대와 헌병을 배치하여 병력철수를 통제하고 , 낙오병을 수용하여 전열을 정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탄약과 급식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각 부대와 연락이 유지되지 않자 각 부대는 분산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의정부지구사령관은 창동방어선을 포기하고 미아리리고개에서 저지하기로 결심하였다.이에 연락장교에게 미아리고개로 철수하라 하고 지휘소를 11:00시에 창동 남쪽2km 149고지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연락장교들이 각 부대에 전달하지 못했고, 독전대와 낙오자 통제선에 있던 헌병들도 흩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국군은 북한군에 결정적 피해도 주지 못한 채 다시 후퇴하게 된다.
다행히 미아리-홍릉 선상에 후방에서 증원된 구군 제5사단(-) 2개 대대와 수도경비사령부의 제8연대 1개 대대를 사전에 배치한 것이 크게 도움이 되어 창동 방어선에서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여 미아리 방어선을 보강할 수 있었다. 태릉에는 국ㄱ군 제9연대(-)와 육사생도대가 불암산-93고지 방어선에서 북한군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정부지구사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27일 12:00시경 지휘소를 미아리로 이동하고 철수병력을 규합하여 미아리고개 좌우측에 저지진지를 편성하였다.
다. 전투 결과
창동 방어선이 무너지면ㅅ서 일선의 전투부대들도 철수하게 된다. 북한군과 제일 먼저 교전한 국군 제5연대(-)는 불암산-태릉으로 철수하게 되고, 그 좌우측에 배치된 제16연대(-)와 제3연대(-)는 태릉.미아리.삼각산 등지로 분산되었다. 김계원 중령이 지휘하는 6문의 105MM 곡사포는 일제히 포문을 열어 적 대열을 분산시키고 진출을 둔화시키는데 노력을 다했다. 시간이 지나 포탄 고갈로 미아라고개로 철수한다.
71고지의 제1연대(-)는 오봉산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려고 우이동으로 향하던 중에 수유리부근에서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27일 11:30분 경에 전사하게 되면서 제1연대 진지는 돌파되고 부연장 이휘권 중령이 인솔하여 미아리로 철수 한다.
이에 육군본부는 충격을 받게 되는데, 다행히 미아리-홍릉 선상에 후방에서 증원된 제5사단(-) 2개 대대와 수경사의 제8연대 1개 대대를 사전에 배치한 것이 크게 도움이 되어 창동방어선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여 미아리 방어선을 보강할 수 있었다. 태릉에는 제9연대(-)와 육사생도대대가 불암산-93고지 방어선에서 적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창동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은 149고지 서쪽 기슭(현 신일고 부근)에서 멈춘 후, 남쪽 일대의 국군 상황을 정찰하고 있었다. 당시에 북한군은 의정부를 점령한 후, 제3.4사단 및 제105전차여단 에하 부대와 포병의 혼란스러운 배치전환으로 소속 부대간에도 제대로 연락이 두절되어 혼란이 발생하였다. 특히 사단 포병들이 1개 도로에 몰려 혼잡한 상황이 초래되어 차후 방어진지를 형성할 수 없었다. 북한군은 6월 28일 새벽에야 진지를 편선했고, 이러한 혼란으로 국군은 차후진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반면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27일 12:00시에 지휘소를 미아리고개로 이동하고 철수병력을 규합하여 미아리고개 좌우측에 저짖진지를 편성하여 본격적으로 서울 최후의 방어선인 미아리 방어전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4. 미아리-회기동 방어선 전투
미아리-회기동 전투 상황도
북한산 적105전차여단 불암산 적3사
적4사 퇴계원
창동
수유동
25연(혼)
3연(혼) 장위동
공동묘지
20-1대대
3연(-)
2-15연 2-3연
제18연(혼) 집 중량교
북악산
청량리 한강
용마산 한강
한강
가. 방어선 형성
미아리-회기동 방어선 전투는 2개의 전투사령부가 방어책임지역을 분담하여 지휘하였다. 제7사단장 겸 의정부지구사 사령관 유재흥 준장은 미아리 고개 오른쪽 지역을 방어하기로 하였고, 제5사단장 겸 미아리지구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된 이응준 소장이 미아리고개 왼쪽지역을 방어하기로 합의하였다.
수도 서울의 고수 여부를 결정짓게 될 미아리-회기동 방어선은 대체로 27일 오후에 편성 완료하였다. 미아리고개는 103고지에서부터 164고지로 연결된 능선이 북쪽을 향하여 횡격실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이 능선 북쪽 기슭 하단에는 정릉천이 흐르고, 3번도로가 고개마루를 통과하여 방어에 유리했다. 그리고 이 고개 동쪽 2.5km 지점의 143고지(회기동)는 경춘국도 및 경원선과 주변 일대의 저지대를 감제하는 중요한 지형었다. 길음교와 중랑교는 북한군 전차의 진출을 지연시킬 수 있는 장애물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미아리지구전투사령괸에 임명된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은 26일 야간 열차편으로 광주에서 상격하여 27일 07:00시에 총참모장에게 도착보고를 하였다. 그는 27일 10:00시에 미아리에 도착하여 103고지를 전방지휘소로 정했다. 27일 16:00시경 방어선이 윤곾이 잡혔다. 그러나 총병력은 창동방어선에서 철수한 의정부지구사 예하부대를 비롯하여 제5사단 2개 대대, 제8연대 1개 대대 등 3,000명에 불과 했다.
그러나 실제 배치된 병력은 숫자도 적었고, 실전 경험이 적었고 있다할지라도 굶주림과 탄약부족 등으로 장병들의 투지가 크게 꺽여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장병들은 전차공포증에 걸려 완강한 저항과 방어진지의 고수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나. 전투 경과
(1) 미아삼거리 및 미아리 고개 전투
창동 방어선을 무너뜨린 적은 2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기마부대를 후속시켜 27일 17:00시에 미아리 방어선으로 육박하였다. 그러나 좌측 전선에 배치된 제20-1대대가 집중사격을 가하자 그들은 1대의 전차를 버린 채 도주하였다.
[트럭으로 위장한 적 전차]
그러나 27일 밤에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동안 야간공격을 하지않던 북한군이 날이 저물자 곧 공격을 개시하여 미아삼거리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미 시내로 치투한 편의대들이 도처에서 예광탄을 쏘아 올리며 그들 본대와 교신하고 있었다. 국군 제20-1대대는 적 전차가 목교부근에 이르렀을 때에 대기 중인 공병에게 파괴토록 했으나 사전 준비가 부족하여 제대로 파괴하지 못했다. 하지만 40여 대로 보이던 전차는 실제는 5대로서 트럭으로 위장하여 진출하였던 것이다.
일부 파괴된 교량에서 돈좌된 적은 일시 물러났으나, 다시 5~6대로 증강된 전차가 방어정면을 통과하였다. 하지만 제20-1대대는 별 공격을 받지않고 소강상태로 되어 밤을 지새우게 되는데 다음날인 28일 아침 서울 시내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상급부대와의 교신도 두절되고 이에따라 대대는 철수하여 청량리-뚝섬--광나루를 거쳐 시흥으로 이동하고, 일부는 수색을 경유하여 한강을 건너 수원에 집결하였다.
제20-1대대의 방어정면을 통과한 북한군 전차는 곧장 국군 제1연대(-) 방어정면을 통과하여 길음교 전방에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서 전차파괴 또는 교량파괴로 지연시킬 결정적인 기회가 있었지만 준비부족으로 교량을 파괴하지 못하면서 이로인해 장병들의 전의는 상실되었다.
적 전차가 계속접근하게 되자, 국군은 길음교에 매복한 제1연대(-) 및 제15-2대대 전차특공대가 2.36" 를 쏘고 육탄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효가 없었음며 적 전차는 미아리 고개를 넘어 돈암동으로 28일 01:00시에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방어진지에 남아있던 병력은 각개 부산되어 버렸고 제16-3대대 부대대장 최민섭 대위는 낙오병 1개 소대를 지휘하여 봉일천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리며 은거하다 서울 수복 후에 군에 다시 복귀하였다.
(2) 회기동의 143고지 전투
수도경비사 예하 구군 제8연대(서종철 중령)는 홍천 북쪽에서 38도선 경계진지를 국군 제2연대에 인계하고 서울로 이동한지 이틀 만에 6.25가 일어났다. 국군 제8연대 제1대대는 강태무.표무원 사건의 여파로 해체하다시피 하여 약간의 고참병을 기간으로 신병으로 재편성하여 교육훈련 중에 있었다. 제3대대는 진지교대를 먼저 끝내고 서울에 도착하여 다으날 24일 장충단에 참배한 후 휴가명령을 받고 각자 떠났다.
[2일간 헛된 시간을 보낸 제8연대(-)]
25일 오전 제8연대 2대대는 수경사 작전명령에 따라 흑석동-노량진 일대 한강변에 배치되었다, 이날 제8중대 제2소대장인 강영환 중위가 주기관총으로 한강교를 공격하던 북한군 전투기 1대를 격추했다. 제2대대는 다시 16:00시에 철수 명령을 받고 철수하여 26일 오후에는 육본 명에 따라 연대장 지휘하에 경기도 가평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의정부가 함락되자 육본은 이날 밤에 다시 제8연대(-)를 서울로 복귀시킨다.
27일 오후 제2대대는 회기동143고지(경희대 뒷산)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제5중대는 중량교 남쪽 무명고지에 추진하였다. 이 기간 중에 적과의 접적은 없었다. 하지만 피난민을 대상으로 검문검색을 하여 북한군 편의대 30~40여 명을 색출한다. 이때는 이미 적이 서울 시내에 진입했지만 국군의 저항부대는 없고 오직 제8-2대대 뿐이었다.
[보았노라, 달렸노라, 전하였노라]
제8-2대대는 회기동 고지에서 세차례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세차례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탄약이 바닥났다. 그런데 청량리 방면으로 탄약수령차 갔던 탄약차량이 적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동승한 병사 1명이 살아서 달려와 이 사실을 알렸다. 대대장은 더이상 방어가 무의미 함을 알고 중량교 남쪽 고지에 배치된 제5중대가 28일 03:30분에 중량교를 폭파되고, 11:00시를 전후하여 대대는 뚝섬을 경유하여 15:30분에 광나루에 철수하여 배 5~6척으로 한강을 건너 수원으로 철수하여 그 뒤에 용인의 김량장에 투입된다.
(3) 육사 생도대 및 제9연대(-)의 철수 상황
26일 밤 내촌에서 사관학교로 철수한 생도대대와 포천에서 철수한 제9연대(-)도 사관학교에 집결하여 27일 아침 사관학교자의 작전통제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의정부 및 창동 방어선에서 철수한 국군 제5연대(-)와 제16연대 제1대대는 태릉지구에 배치되지 않고 곧장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상급부대와의 통신이 두절되고 경원선상에 북한군의 대병력이 전술행군 대혀으로 줄지어 남진하고 있음으로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제9연대(-)와 생도대대는 망우리고개-용마산을 거쳐 광나루로 철수하여 수원에서 재편성에 들어갔다.
육사 생도대는 제1기생(7월 10일 대전에서 임관)은 262명 중에 70명이, 제2기생(종합학교 제1기 및 2기로 입교)은 227명 중 82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는 큰 손실을 입었다.
한편 태릉에서 철수하지 못한 생도 10여 명과 각 부대 사병 20여 명이 "호랑이 부대"로 불암산에 남아 유격전을 전개하지만 결국 모두 격멸되고 말았다.
다. 전투 결과
미아리 방어선은 27일 23:00시가 지나면서 비가 점차 멎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투위치를 이탕한 병사들은 그 동안의 전장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기도 하였다. 이 시간에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총서이 울리고 있었다.
북한군은 이미 유격대를 잠입시켜 이들의 호응을 받아가며 27일 24:00시를 전후하여 미아리를 급습하였다. 북한군은 미아리에 설치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정찰병의 유도를 받으며 길음교로 진출하였다. 적 전차가 미아리 고개를넘는 시간이 28일 01:00시경으로 급편방어진지에 분산된 인원은 경악한 나머지 각각 분산하여 철수하게 된다.
제8-2대대는 회기동에서 28일 13:00시에 광나루로 철수하고, 제1연대는 미아리고개 164고지에 있다가 각각 분산하여 한강을 도하하고, 제15연대 제2대대는 미아리 고개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철수하고, 제25연대는 삼양동에서 북악산(중앙청 뒷산)을 경유하여 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고, 제20-1대대는 뚝섬에서 한강을 건넜다.
5. 한강교 폭파와 서울시가지 전투
가. 한강교 폭파
(1) 한강교 폭파 배경
6월 27일 11:00시에 채총참모장은 육군본부의 서울 철수와 동시에 한강겨와 철교의 폭파계획을 발표하였다. 처음에는 적이 27일 14:00시에 서울로 진출할 것으로 판단, 16:00시에 폭파할 예정이었다.
당시에 일부 지휘관들이 피난민에 대한 대책이 없이 군인이 먼저 철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도 있었지만 임진강 철교나 포천의 신북대교룰 파괴하지 못해 작전에 미친 영향을 들오 폭파족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대신 한강대교 옆에 도하용 단정 18척을 백사장에 준비해 두기로 한다.
27일 12:00시경 철수를 개시한 육본은 시흥의 보병학교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때 미고문관 라이트 대령이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한국 방문을 예고하여 육본은 다시 용산으로 복귀하고 서울 사수와, 한강교 폭파를 연기시키게 된다.
(2) 한강교 폭파와 영향
6월 26일 한강교 폭파 명령을 받은 공병감은 공병학교장에게 한강교 폭파 준비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다 육본이 다시 서울로 복귀하게 되자 폭파 계획은 지욘되고 있었다. 그러다 27일 23:30분에 미아리 방어선에서 공방전이 진행될 땡에 폭파준비명령이 하달되어 다시 폭약을 장전하게 되었다.
특히 28일 01:45분 채 총참모장은 전방지휘소장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돈암동에 적 전차가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고 지체없이 공병감에게 한강교를 폭파하라고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본인은 바로 빠져 나갔다.
피난민과 차량이 혼잡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이시영 부통령이 한강대교를 건넌 얼마 뒤 한강대교는 폭파되었다. 28일 02:30분이었다. 그로부터 1사간 30분 후인 04:00시에 광진교가 폭파 되었다. 그러나 겨인상행선 철교와 경부선 철교는 불발로 그쳤으며, 다시 재 폭파로 경부선 철교 일부만 파괴되었다.
당시 미아리지구 이응준 소장이 용산에 와서 전방부대의 한강도하 후 폭파를 주장하게 되어,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이 타당하다고 보고 즉시 중단을 지시했지만 통신 수단이 없어 작전국자잉 차량으로 달렸지만 인파 때문에 진출하지 못해 폭파 되었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 피해입은 인원이 500~800여 명이고 차량 50대 정도 였다. 하지만 군이 철수하지 못하고 각각 분산하여 철수하게 되면서 1,318대의 차량을 버려야 했다. 군병력은 총병력의 46%인 4만 4,000명의 병력이 흩어져 그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군 전차가 한강대교 입구에 출현한 것은 폭파된 지 7시간 반이 지난 28일 10:00시를 조금 지나서였다. 그 이유는 한강대교에 이르는 접근로를 헤매이거나, 중앙청. 방송국. 교도소. 전신국 등 주요시설을 점령하느라 늦었다. 따라서 한강교를 점령하여 국군 퇴로를 차단한다는 공격계획상의 임무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다.
나. 서울 시가지 전투
(1) 장애물 설치
미아리 방어선이 돌파될 위기에 빠져들었을 무렵 육본은 중요지점에 차량과 기타 물체로 바리케이드를 구축하여 도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도한 공병감에게 지시하여 전차특공조를 편성하여 혜화동으로 급파하였다. 수도경비사령부는 미아삼거리와 길음교, 그리고 돈암동 전차종점부근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였다. 이 외에도 안국동. 종로입구. 광화문. 남대문. 삼각지 등에도 화물차량과 버스 등을 동원하여 차량바퀴의 공기를 빼고 주요부품을 빼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그 주위에 철조망을 설치하여 전차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서울 시청에서 서울역 앞까지는 전동차를 일렬로 세워 좌우의 통행을 막았다.
(2) 북한군의 서울 진입과 시가지 전투
육본 지시로 공병들로 전차특공조가 편성되었다. 이에 제1공병단 제1전투중대장(전유형 중위)이 지휘하는 장교 3명과 사병 2명으로 편성하였다. 전차 폭파조는 창경원 앞에 구축된 바리케이드 앞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준비된 폭약등으로 전차 파괴는 불가능하여 결국 민수용 차랑으로 경인상행선 철교를 이용하여 노량진으로 철수한다.
한편 수도사는 시가전을 위해 제18연대 제1대대는 삼각지-마포 간에 제1중대와 제3중대를 배치하고 1개 중대는 삼각지 일대 민간건물과 도로변에 배치 하엿다. 여기에 대전차포 1개 소대 2문이 지금의 전쟁기념관 앞에 배치 되었다. 그러나 역시 적의 전차에는 역부족으로 결국 철수하여 마포나루에서 한강을 도하 철수 하게 된다.
[산화한 용사님께 신의 가호를]
반면 28일 아침 미아리 방어선에서 청량리로 철수하는 제5연대 제3대대의 일부가 적전차 12가 청량리역 앞을 통과하고, 그 후방 500~600M에 보병부대가 후속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에 백복성 일등상사외 9명의 하사관이 본때를 보여 줄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민강에서 사복을 차려입고 일제히 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을 집어넣어 7대의 전차가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러나 특공조 10명 중에 백복성 일등상사 등 4명만 살아 돌아왔다.
한편 참모학교 부교장 이용문 대령은 낙오병을 일부 수습하여 "백호부대"라 하고 남산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다 탄약과 식량문제로 결국 유격대를 해체하고 지하에 은거하다 서울 수복시에 군에 복귀하였다.
다. 서울 함락 이후 각급 부대의 철수상황
6월 28일 새벽의 한강교가 폭파된 이후 서울 북쪽의 부대들이 광나루. 둑섬. 마포. 행주. 이산포 일대에서 한강을 도하하였다. 한강교가 폭파되기전에 한강을 도하한 부대는 제16연대(문용채대령)의 일부 병력이다.
1950. 6. 30일까지 한강을 도하한 병력은 1만 2,382명에 불과하였다. 그 중에서도 포병교 교도대대 일부병력은 마포 나루터에서 105mm 곡사포 3문과 포탄 500여 발을 여의도로 도하시키는데 성공하였는데 이것이 서부 및 중서부 전선에 투입된 105mm 곡사포 45문중 한강을 도하한 유일한 3문이었다.
또한 한강대교 옆 밳하장에 준비시켜 둔 공병단정과 절단되지 않은 철교를 통하여 상당수의 병력과 차량이 노량진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전차가 나타난 28일 10:00~11:00시 이후에는 철교를 이용할 수 없었다.
제 2 절 정부의 철수와 북한군의 서울 점령
1. 비상국회의 서울 사수 결의
가. 제6차 본회의와 긴급동의
전쟁 당일 개최되지 못했던 국회는 26일 11:00시에 제6차 본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런자 국방부에서는 적이 남침을 개시하였으나 국군이 후방 3개 사단을 투입하여 의정부를 탈환하고 적을 북쪽으로 격퇴하였으니 걱정할 것이 없으며 1주일이면 평양을 탈취할 자신이 있다고 보고 하였다. 그리고 당일 13:00시에 유엔과 미 의회 및 대통령에 보내는 메세지를 채택하여 가결하였다.
다시 국회는 27일 01:00시에 비상국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서울시민과 더불어 수도를 사수한다는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국회 의장단이 이 결의문을 들고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이미 대통령은 서울을 떠났고(27일 03:00시경), 27일 04:00시에 국회로 돌아와 산회하였다. 그러나 이로인해서 210명이 의원 중에 62며의 의원이 서울에 잔류하여 이중 8명이 실종 또는 피살되었고, 27명이 납치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2. 비상국무회의의 서울 철수 결정
국무위원들은 서울 철수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27일 아침부터 정오무렵까지 한강을 건너 수원으로 이동하였다.
3. 행정. 입법. 사법부의 수원이동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이동에 앞서 27일 03:00시에 경무대를 출발하여 04:00시에 서울역을 출발하여 12:30분에 대구역에 도착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16:30분에 대전에 도착하여 충남지사 관사에 머물게 된다. 그러다 29일 무쵸 미국 대사가 운전하는 차로 수원에 올라와 맥아더 원수를 영접하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인 30일에 미국에서 돌아온 정일권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육군총참모장겸 3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행정부는 27일 미명 비상국무회의에서 결정된 철수에 따라 27일 15:00시까지 수원시청으로 이동하고 국무위원들은 대통려이 있는 대전으로 내려가 충남도청에 임시청사를 마련했다.
국회는 27일 04:00시에 산회를 한 후에 각자 행동에 들어가 최초 수원으로 이동하였다가 7월 14일 행정부와 더불어 다시 대구로 이동하여 7월 21일부터 임시국회를 열어 입법부의 기능을 되찾았다.
사법부는 26일 09:00시를 기해 민사 및 형사재판을 무기 연기하고 27일 아침 대법관 등 일부 요인만 이동햇다. 일시적이 대피지시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요문서 등에 대한 긴급조치도 강구하지 못했다. 27일 15:00시에 수원지청에 도착한 대법원 일행은 대통령이 체류중인 대전으로 내려간다. 그 후에 다시 7월 13일 대구로 이동해 경북도청의 강당에 사법부를 개설한다.
4. 북한군의 서울 점령
북한군 제4사단은 28일 새벽 5시 30분에 동북쪽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서울 북쪽 변두리를 점령하였다. 이후에 신촌 일대에 자리잡아 한강대교-마포-서강에 이르는 여의도 대안을 점령한다.
북한군 제3사단은 서울을 남쪽으로 우회하여 오후 4시 무렵에 서울 남쪽 변두리인 이촌동을 점령했다. 그 후에 사단은 용산 일대에서 이촌동-한남동 사이의 강변에 병력을 배치하여 차후 신사동으로 지향한다.
김포반도로 들어온 제6사단은 개성일대를 점령한 후 김포반도로 진출, 영등포 및 인천을 점령한 후 이곳에 머물다 제4사단이 수원을 공격할 때 이를 후속하였다.
북한군 제1사단은 뒤늦게 수색일대에 입성했으나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제2군단으로 배속이 전황되었다.
북한군 제105전차여단은 28일 05:30분에 서울 북동 및 동쪽으로부터 진입한 후 주로 방송국. 발전소. 우체국. 교도소 등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한강선의 돌파에 선두가 된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은 관측소를 남산과 와우산(105m) 및 노고산(104m)에 두고 포병은 신촌과 남산 기슭에 방열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퇴각하는 국군을 추격하지 않고 3일 동안 서울 복판에서 모호한 행동으로 아군의 한강 방어선 형서에 기여 했다.
제 3 절 국군의 한강이남 철수
1. 최종적인 국방부와 각군 본부의 철수
북한군은 6월 26일 13:00시에 의정부를 점령한 후 창동선을로 진출한다. 전화이 긴박하자 정부는 26일 심야에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수원으로 이동할 것을 겻을 결정한다. 반면에 비상국회에서는 서울 고수를 결의한다.
가. 국방부와 육군 본부 철수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27일 07:00시에 국방수뇌회의를 수집하여 정부는 철수하니 각 군은 각자의 양식에 따라 행동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본이는 27일 14:00시에 수명의 경호원과 함께 국방부를 출발하여 15:00시에 수원에 도착하였다.
육군은 27일 13:00시에 시흥으로 철수하자, 미 군사고문단도 시흥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 고문단장 라이트 대령이 극동군 사령과 맥아더 원수의 방한을 언급하게 되며 서울에 되돌아 가자 육군도 27일 18:00시에 서울로 복귀하여 미아리 방어선 방어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28일 01:45분을 전후하여 총참모장은 돈암동에 적 전차가 진입하였다는 상황보고를 받고 공병감에게 한강교 폭파를 명령하고 한강을 건너 시흥으로 다시 철수하였다.
나. 해군본부와 공군본부 철수
(1) 해군본부 철수
전쟁이 발발할 때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함정을 구입하기 위해 미국에 있던 관계로 해군삭관학교장 김영철 대려이 대리 근무를 했다. 해군도 27일 수원으로 이동하게 되어 해군본부는 차량 100대에 분승하여 수원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수원에는 옹진반도에서 철수한 백인엽 대령이 지휘한 제17연대가 있었다. 27일 밤 해군본부는 다시 수원을 출발하여 28일 대전에 도착하여 해군전투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2)공군본부 철수
공군은 27일 17:30분에 본부를 출발하였다. 공군본부는 이날 20:00시에 수원중학교에 도착하였고, 28일에는 한강교가 폭파되고 서울이 점령되는 등 전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므로 다시 대전으로 28일 12:00시에 수원을 출발하여 17:00시에 대전에 도착한다.
다.미아리 사령부의 한강이남 철수
6월 27일 23:00시부터 미아리 저지선의 전황이 적의 침입으로 무너지게 되자,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미아지구전투사령관)은 전선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육본에 긴급조치를 건의 하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자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유재흥의정부지구사령관)에게도 전령을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려 했으나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상황의 긴박함을 느끼고 각 부대에 철수하여 노량진으로 집결하라고 28일 01:00시에 긴급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응준 소장도 총참모장이 육군본부를 떠난 지 30분 뒤에 그 뒤를 다라 나섰^으나 한강 인도교 2000m 못 미쳐서 한강굑가 폭파되어 도하지점을 찾아 헤매다가 날이 샐 무렵에 서빙고부근에서 나룻배를 이용하여 한강을 건넜다.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도 05:00시에 날이 샐 무렵 반파된 철교로 한강을 건넜다.
2. 전선부대의 한강이남 철수
6월 28일 01:00시 무렵 적 전차의 시내개입과 편의대의 침투로 철수하게 된 미아리 바어선의 각 부대는 적이 주요 지점을 차단하였기에 건재유지를 못한 채 분산되어 한강 이남으로 빶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02:30분에 한강교가 폭파되어 한강선에 도달하지 않는 한 시내를 통과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노릇이었다.
다라서 전방부대들은 외곾지대를 빠져 광진교 일대와 마포 그리고 행주와 이산포 지역에서 민간 선박편으로 도강하여 서울과 한강이북지역에서 철수하였다. 한강교 폭파전에 철수한 부대는 제16연대의 일부였다.
비교적 건재를 유지하여 광나루 부근에서 도강한 부대로는 제8연대 제2대대와 제15연대의 제2대대 그리고 제20연대 제1대대로서 이 부대들은 대체로 병력의 50~80%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제20-1대대의 일부 병력은 돈암동에서 북악산쪽으로, 제3연대의 제3대대는 안국동의 풍문여고에 집결하여 중앙청 앞에서, 제25연대의 일부 병력은 북악산 근처에거 각개 분산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러 혼돈 상황에서 광진교 일대는 태릉을 경유하여 집결한 제9연대 1대대, 제5연대 2대대, 제16연대 일부 병력, 육군사관학교 등이 함류하여 혼란을 이루었다. 광진교는 28일 04:00시에 폭파되어 이후는 모두 나룻배를 이용하여 철수하게 된다.
당시 한강에는 광진교를포함하여 5개의 교량이 있었으나 모두 폭파되어 부대들은 민간인 나룻배나 굽조한 부유물을 이용하여 도강하게 된다. 그러나 대안으로 건너간 나룻배들이 되돌아오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으며, 민간인 인파가 많았던 서빙고 부근이 더욱 심했다.
한편 서울 시내의 각 종합병원에 임시 수용된 전상자에 대한 후송대책이 전무하여, 수도육군병원(대방동)에 152명, 제1육군병원(부평) 518명, 제2육군병원(대전)에 200명, 제3육군병원에 129명, 제5육군병원에 277명 등이었다. 그러나 개전 3일 동안에 3,200명의 전상자가 발생하여 수용능력이 초과하여 서울대부속병원(종로), 서울 위생병원(청량리), 서울 적십자병원(서대문), 서울시립병원(을지로), 철도병원(용산) 등 종합병원에 분산 수용된다. 이때 서울대병원에 100여 명, 그 밖의 병원에 각 70여 명이 수용되었다.
28일 아침 북한군은 낙오병을 색출하여 총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데, 이때 서울대 병원 부상자들이거동이 가능한 인원이 지휘하여 적들과 교전하다 모두 전사하였다. 병원에 남아 있는 인원은 전원 학살되었다.
3. 국군의 전선 조정과 한강방어준비
6월 28일 국군의 도하과정은 의정부정면에서 철수하는 병력은 주로 광나루와 뚝섬, 그리고 한남동과 서빙고의 각 도선장과 마포 및 하중리(서강)나루터에서 도강한다.
문산방면에서 철수하는 병력은 행주와 이산포 나루터에서 각각 어선이나 작은 목선 등을 이용하여 도하했다.
광나루를 거친 병력은 곧장 수원으로 집결하고, 똑섬과 한넘동 그리고 서빙고를 경유한 병력은 시흥과 수원으로 나누어졌다. 마포와 하중리 및 행주나루로 건넌 병력은 대부분 시흥으로 집결하였다.
철수 병력의 집결이 어느 정도 끝난 것은 28일 밤과 29일 아침 사이였다. 28일 낮에 수원농업시험장에 새로운 지휘소를 개설한 육본은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보병학교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29일 15:00시를 전후하여 혼성 제7사단(유재흥 준장)에는 혼성 2개 대대를, 혼성 수도사단(이종찬 대령)에게는 기갑연대 장갑대대와 제8연대 1개 대대로, 혼성 제2사단(임선하 대령)은 소사부근에 급편진지를 마련한 기갑연대 기병대대의 수용하에 말죽거리 일대에서 전열을 수습하였다.
제 4 절 유해방굴과 관련된 탐사 및 타문결과(참전용사 증언 포함)
1. 주요 증언 내용
육군본부 전방지휘소장 강문봉의 증언이다.('65.1.14)
"지금의 쌍문파출소(과거는 노해지서)에 지휘소가 있었는데 27일 미명에 제7사단 포병대대장 이규삼 소령이 찾아와 땅을 치며 "보병이 포병을 보호하지 않고 도망쳤기 대문에 우리는 포를 전부 잃고, 이제는 포 사격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통곡하였다.
이날 11:00시에 적 전차 공격을 받고 미아리로 철수하여 고개 남쪽에 있는 감천여관에서 작전계획을 짜다 과로에소 온 탓인지 잠시후 유재흥 장군과 잠시 잠들고 말았다.
누가 문을 두들기며 "전차가 오고 있다'는 고함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적 전차와 기관총 소리가 동시에 들려 여관 담을 넘어 성북 경찰서로 뛰어갔더니 수백명의 장병이 운집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전차가 창경원쪽으로 가고 있다고 알리고 지프를 빌려타고 육군본부로 가서 채총장에게 전차가 창경원가지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는데 이때가 28일 01:30분으로 알고 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3연대 제2대대 제7중대 소대장 소위 박태송의 증언이다.('64.8.25)
"그 당시의 소속은?"
"제7사단 제3연대였습니다. 그게 어디에 있었느냐면 지금 서빙고에 있는 여군중대 있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 제가 있었어요. 최초에 그날 지시를 받고 그 다음날 동두천으로 출동을 했어요.
거기에 출동을 했다가 별 접전이 없었고 새벽 무렵에 진지를 점령하고 있는데 저녁 무렵에 의정부를 거치지 말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무전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준비하고 있으니까 어두워서 돌아오는데 의정부를 거쳐오다가 대부분의 전우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때 제3연대장이 누구였습니까?"
"사변나기 직전까진 박임항 연대장이였고 그후에 젊은 연대장인데 이름은 모르겠어요.
20여명을 데리고 늦게야 미아리에 도착했는데 탱크 한대가 들어왔는데 그 탱크 한대 없애려고 있는 수단을 다해보았으나 그게 듣지 않고 새벽에 잠잠해져서 어떻게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너무 조용한 것 같아서 상사인가 중사인가 1명을 내보냈더니 뭐 어떻게 흔적이 없어요. 그렇게 많던 병력이 후퇴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지금 당시에 허무했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의 증언이다.('77.2.27)
전쟁 초기의 작전지도와 당시 상황을 정리해 보면 한 마디로 작전지도 혹은 전쟁지도체계가 전혀 서 있지 않았다고 본다.
물론 그때 나를 포함해서 거의가 연소했고 또 전쟁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어떠한 결심을 할 때에는 참모회의나 참모들의 판단에 의하지 않고 상급 지휘관이 단독으로 결심하여 실행했기 때문에 나쁜 결과를 가져 왔는지도 모른다.
당시 내가 작전국장이지만 참모부장이나 총참모장에게 건의한 것이 아니고 모두가 위에서 내려오기만 했는데 지금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알기로는 한강교 폭파와 같은 큰 문제를 6월 28일 한강교 폭파 당시에 들은바에 의하면 어떠한 회의도 없이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서울의 일부에 적의 전차가 들어온 후 2시간 40분니가 얼마 후에 한강교를 폭파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와 같은 최대령이 건의가 어느 부(국)에 속한 회의에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작전국장인 나 자신도 거기에 참여한 일이 없고 또 누가 폭파를 결심했는지도 모르고 있다.
육군본부 철수에 관하여도 나 자신이 건의 하거나 판단한 바 없고 상부의 결심에 따를 뿐이고 27일 먼저 일부가 철수했을 때 김백일 참모부장이 불러서 올라가 보니 내일 아침이면 맥아더 사령부가 서울에 오니 다시 복귀 시키라는 지시로 27일 오후에 복귀 시켰는데 이로 인해 28일 02: 30분경 한강교가 폭파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를 지연시키려 참모부장의 지시로 한강교 현장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물밀 듯 밀려나가는 피난 대열 때문에 한강 인도교 오구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어서 하차 후 도보로 몇 발자국 걷자마자 쾅!하느 소리와 함께 한강교가 폭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서빙고쪽으로 올라가서 수명의 장병들과 함께 노가 없는 조각배 하나를 찾아 타고 물결따라 손바닥과 판자를 이용하여 해치면서 도강하여 지금의 노량진 한 강 수위측정소 근처에 닿게 되어 시흥으로 가게 되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제2대대 5중대장 중위 안태갑의 증언이다.('67.2.2, '81.3.13)
제1차 증언 : 수도사단 제2연대와 우리 제8연대가 교대 되었다. 그래서 제8연대가 서울로 나오고 제2연대가 들어갔다.
내가 나온 곳은 '50. 6월24일 지금 육군본부 자리에 도착을 해서 그날이 토요일이라 집으로 외출을 했다. 25일, 그날은 장충동에 있는 충혼탑에 귀경보고를 한다고 정복을 하고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웅성웅성 하였다.
그때까지도 부대에서 뭐가 났다는 이야기는 안하고 비상대기만 시켰다. 그리고 26일 아침에 부대가 출동한다고 하더니 우리 제2대대만 가평으로 갔다.
가평으로 가다가 밤에 다시 돌아왔다.
그때 우리 중대장이 5기생 이석우 대위인데 이 양반의 태도가 수상해 부대가 움직일 때마다 연락병한테 쪽지를 적어서 어디론가 보내기에 이상하다 여겨 연락 나가는 연락병을 도중에 체포하여 편지내용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 내용이 지금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무개한테 일금 얼마를 보내니 어디 있는 누구한테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실제 연락병한테 실지 돈을 받았느냐고 하니까 받은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때 제8중대장 정승모가 대대 선임장교인데 그분과 상의하였다.
우리 부대가 어디로 가려고 했느냐면 지금 고대와 고대 부근에 배치되고 제5중대장은 잔류토록 정리하였는데 본인이 꼭 가겠다고 애원하여 연대장(서종철 중령)에게 보고하니 나가라고 해서 나갔는데 연대 정보장교가 따라와서 우리 중대장을 데려가 즉결 처분을 했어요.
그 사람은 원래 제주도에 있을 때부터 국제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나중에 탄로가 나 즉결처분을 받았고 내가 현지에서 제5중대장 대리를 했습니다.
그후에 그곳에서 2일을 있다가 광나루를 건너 수원으로 내려갔다.
2차증언
"경력, 그리고 주요 전투 참가는?"
"만주 봉천 상업학교를 나왔고 월남하여 육사 8기로 입대하였다. 전투는 청량리전투와 공비토벌을 했다. 공비토벌은 신남전투, 정작골(자은리 북방)전투, 오대산 공비토벌 및 상남전투 등이 있다. 당시 대대장은 이현진 소령이고 중대장은 7기생인 이대용 대위였다.
연대장은 서종철 중령인데 노량진전투에서 부상당하여 이현진 중령 부연대장이 연대를 지휘했다.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부대이동 및 경로는?"
"홍천 두촌면 자은리 북방 정작골에 중대가 있다가 23일 출발하여 용문에 도착하여 하루를 자고 24일 서울 용산에 도착, 지금의 육본이 위치한 제18연대 자리에 들어갔다.
25일 09:00에 장충단에 있는 공비토벌전사자위령탑에 모이게 되어 있었다. 신당동 집에 가 쉬고 다음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38선에 북한군이 불법 남침 했다고 전 장병은 원대복귀하라는 방송을 듣고부대에 들어가니 출동준비가 되어 대대장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한강을 건너 노량진의 한강둑 제방에 방어진지를 편성 하였다.
배치되고 얼마안되어 대대장으로부터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어 대대는 다시 부대로 돌아왔다.
25일을 그대로 보내고 26일도 오전에 대기하고 있다가 오후늦게 가평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려 징발된 버스를 타고 가평까지 갔다.
그런데 중대장이 계속 북으로로만 진출해 물어보니 무조건 따르라고 해서 못하겠다고 말다툼을 하곤 했는데 밤에 다시 부대로 들어왔다가 아침 08:00경에 다시 청량리로 출동지시가 내려왓다.
이때 중대장이 전령을 시켜 뭔가를 보내기에 앞에서 말한 것을 확인하고 먼저 제8중대장인 정승화 대위와 상의하고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대책을 숙의중인데 연대장이 와서 물어봐 이야기 했더니 그대로 가라고 해 버스를 타고 청량리 회기동 파출소에서 전부하차하여 인원 및 장비검사를 하는데 연대 S-2보좌관이 3~4명의 하사관과 함께 와서 중대장을 체포해 갔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해방후 중국 공산당에 가입되어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우리나라에 프락치로 들어왔다고 한다.
"중대와 대대간, 소대와 중대간 통신유지는 전투간에 어떻게 했는지?"
"유무선이 없어 전령으로 통신을 유지했다."
"지휘통솔에 대하여는?"
"글쎄요. 당시는 적정을 너무 모르고 불명확한 명령을 하달했다. 노량진에 부대를 배치한 일이며 가평까지 가서 다시 돌아온 일 등은 무계획, 무모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제2사단 제16연대 제3대대 정보관 김희석의 증언이다.('65.10.13)
"대대는 청주에 주둔하면서 태백산지구 공비토벌을 하던 중에 출동명령을 받아 26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 하였다.
당시 대대장은 강태봉 중령이었으나 휴가중이라 같이 행동하지 못하고 부대대장 최민섭 대위가 연대의 후발대장으로서 3개중대 미달의 부대를 지휘하였다.
27일 05:00에 창동에서 제7사단장 유재흥 장군의 명령을 받고 의정부로 진출하다 적 전차와 만나게 되어 창동으로 철수하여 본대와 합세하게 되었다.
이날 12:00에 전차 20여대가 대대 정면으로 침입한 가닭으로 분산 되고 말았다.
제2사단 헌병대 선임하관 일등상사 조한철의 증언이다.('66.5.25)
"6.25때 어디에 계셨습니까?"
"대전, 제2사단에서 25일 의정부지구로 출동을 했다."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25일 오후 3시반에 기차로 헌병 34명과 장교 2명이 서울을 경유하여 의정부에 도착했다. 그때 시간이 26일 새벽 1시쯤일 거다. 그때 사단장 이형근 장군이 새벽 5시쯤 전투를 개시한다고 했다. 그래서 낙오자선을 의정부 초업 국민학교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에 설치하자마자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낙오자를 수습하기도 전에 전방이 무너졌다. 조금 있으니 많은 인원이 후퇴해 오는데 어느 대령에게 차를 막고 이렇게 후퇴해도 되겠습니까? 하니까 작명이 후퇴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말만 듣고서 그 다음부터는 전부 다 교통정리만 해 버렸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사단장이 내려오면서 그 연대장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장실상이 전장공포에서 온 공항심리를 인식하지 못한 실수를 한번 해 본 적이 있다.
창동에 오니까 사단장이 육군본부로 소환 당해 갔다. 그래서 우리 사단은 유재흥 장군이 통합지휘를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단장을 경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창동에서 본 인민군 탱크가 나타나면서 사기가 저하되어 완전히 뒤로 쳐져 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탱크가 아니고 자동차를 위장한 것은 확인 안하고 놀래버린 것이다. 작전참모도 갈팡질팡하여 지휘도 못하는 형편이라 할 수 없이 또 후퇴를 해서 미라리로 철수 했다.
미아리 고개에 부대를 배치하고 장교를 찾으니 장교가 없었다. 위관장교는 나 하나 뿐이었다. 한심했다. 배치를 하는데 참모장이 어디 있으며 대대장이 어디 있는지도 연대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뒤에서는 박격포가 떨어지고 오합지졸이었다.
나보고 지시를 하는데 제2사단과 제7사단의 헌병을 창경원으로 전부 집합시키라는 것이다.
그래서 헌병 72명을 데리고 창경원에 갔다.
그곳에 가서 서울시내 요소에 헌병 2명씩을 보내 놓고 나하고 3~4명이 남아서 낙오병을 집결시키니 80여명이 되었다. 한참 지난 후에 차를 세웠는데 인민군 탱크가 와서 무자비하게 사격을 가하여 많이 죽었다. 그래서 탱크 7~8대가 지나간 다음에 창경원에 들어가 보니 다 도망을 가버렸다.
그런데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창경원 뒤의 어느 민가에서 밥을 얻어 먹고 옷을 갈아 입고 오후 6시에 시내를 나왔는데 그때는 인민군이 다 들어온 것이다. 완전히 적들의 치하가 되었다.
서울 시내를 빠져 나가지 못하고 하루를 헤매다 다음 날 저녁때인가 마포강에서 도하하여 여의도에서 짚차를 잡아타고 수원까지 내려갔다.
제5사단 제15연대 제2대대 작전장교 중위 장영종의 증언이다.('80.10.18)
"입대전 경력과 전주에서 미아리까지 부대이동 상황은 ?"
"육사 7기로 임관했다. 원래 제2대대 5중대장을 하고 있다가 보병학교 초등군사반을 졸업하고 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S-3로 근무하라하여 제15연대 S-3보좌관이 되었다.
전쟁 직전에 서울에 있는 헌병학교에 교육파견 명령이 나서 6월 26일 입교하기 위하여 24일 서울에 와 25일 헌병학교에 갔는데 들어가지도 못하고 밤차로 전주로 갔다.
부대에 가니 이미 3대대는 출동했고 2대대는 올라가고 있어 혼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27일 05:00경 용산에 도착하여 제5사단장 이응준 장군을 만나 문산으로 가겠다고 했더니 미아리로 가라고 하여 다시 혼자서 미아리로 갔다."
"지형의 특색과 부대배치는?"
"전방에 길음교가 있었다. 200~300m 떨어져 있었지요. 그 당시에 분명히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선두 전차가 파괴되자 교량입구를 막게 되어 사용을 못하게 된 것이지요.
대대 OP는 132고지에 있었어요. 대대장 안광영 소령과 같이 있었습니다. 부대배치를 완료한 후에 위문품으로 들어온 정종도 있고 해서 전부대원에게 한 대접씩 나누어 먹여 휴식시킨 다음 전투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습니다.
아군이 적전차에 대하여 81mm 박격포, 57mm 대전차포, 그리고 L-4비행기도 폭격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아군의 적전차 공격으로 적의 공격이 약 6시간 정도 멈추었다가 새벽 4시경에 전차가 다시 움직였어요. 비도 조금 내리는데 전차가 전진후방으로 들어오니 약간 혼란이 일어났으나 보병이 없어 다시 질서를 회복했는데 아침 9시경에 적 보병이 내려와 한참 싸우다 탄약이 떨어져 탄약을 가지러 탄약차로 갔더니 차가 없어요. 알아보니 부상병이 타고 병원으로 갔데요.
탄약이 떨어져 오피로 올라서니 대대장과 제5중대원 90명이 있어요. 북한군이 계속 추격해 오니 우리는 여기서 대대장과 헤어지고 5중대원을 이끌고 내가 인솔해서 왔어요."
"철수 과정은?"
"서빙고로 도하 했는데 오는 도중에 동대문에 오니까 서북청년단원들이 적이 퇴계로에 있다고 하여 장충동 고개를 넘어 한남동으로 왔어요. 삼각지와 한강교에는 적의 전차가 있다하여 서빙고쪽으로 내려갔는데 이때 한강교 폭파를 알았어요.
한강에 오니 배가 11척이 있는데 그곳에는 제9연대 일부병력과 피난민이 혼잡을 이루어 무질서해서 권총을 쏘며 조용히 시켰는데 영감 한 분이 군인이 먼저 건너야 한다고 하여 3대를 사용하라고 하여 무사히 도하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나는 제15연대 제3대대 작전장교가 되었습니다."
제5사단 제20연대 제1대대장 소령 김한주의 증언이다.('77.3.17, '81.3.20)
1차증언 : 광양에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중 6월25일 연대본부로 모든 장비와 보급품을 가지고 철수하라하여 그 다음날 광주역에 도착했는데 하차도 않고 고용화기를 실고 1시간 뒤에 그곳을 떠나 동일 19:00에 용산역에 도착하여 비를 맞으며 제18연대 막사에 수용되었으나 곧 육본의 명령으로 철수를 엄호한다며 미아리공동묘지에 배치되었다.
이응준사단장과 박기병 연대장의 전화도 받았고 그런데 얼마 뒤부터는 아군부대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는데 적전차가 꼬리를 물고 뒤따랐다.
박격포와 기관총등 화력을 집중하였더니 전차로 보였던 그들 대열속에서 차량과 병력이 공중으로 치솟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이 전차아닌 차량으로서 위장하고 있음을 알았다.
적이 격퇴되고 28일 아침에도 적 저항이 없는 것을 보고 사단과 연대에 전화했으나 응답이 없어 전령을 보내봤더니 흔적도 없다고 한다. '사수하라' 명령만 내리고 철수해버린 상사들이 원망스러웠다.
뚝섬방향으로 도하하여 시흥에 집결하여 재편성하여 노량진 인도교까지 가서 진지를 점령했는데 적은 소규모로 소대공격을 수시로 할 정도였다.
지휘하는 사람도 없고 탄약 식사등의 보급지원도 잘 안되었다. 대대장이 알아서 지휘하라는 것인데 후방과 연락도 안되고 굶을 수가 없어서 다시 시흥쪽으로 부대를 철수시키고 말았다. 날짜는 정확히 모른다.
제2사단 제25연대 병기장교 강순형의 증언이다.('66.5.24)
"사령관께서는 6.25전쟁때 어디에 계셨습니까?"
"당시 온양에 있는 제25연대 병기장교인데 그때 제가 안동에 나가 있는 제1대대 병기검사하러 안동에 갔는데 6.25전쟁이 났다고 얘기를 들었어요.
여관에서 자려고 하는데 손님들이 말을 해서 라디오를 들으니까 전쟁이 났다고 해서 자고 그 이튼날 제1대대에 가서 검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우선 본대로 왔는데 본대는 출발하고 없어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용산역으로 왔는데 제25연대 사람 몇을 만났는데 부대가 의정부쪽으로 갔다고 하여 하늘에서 비행기가 공중전 하는 것을 보고 동대문으로 해서 청량리로 갔는데 거기서 트럭을 타고 의정부로 가려면 미아리로 가야하는데 태릉으로 갔어요.
여기서 제7사단 병력이 후퇴해서 내려오는데 물어보니 제25연대는 미아리쪽으로 가야 된다고 하여 미아리로 가니 낙오병들을 헌병들이 붙잡아 놓고 나보고 중대장을 하라고 (아마 유재흥 장군이)하여 미아리고개 동쪽 공동묘지에 80명을 데리고 배치하였습니다.
적전차가 새벽 1시경부터 들어오는데 총격전이 벌어졋는데 탱크는 고개 너머로 자꾸 가는 겁니다. 지휘하는 사람은 없고 연락도 끊기고 날이 밝아오는데 탱크하고 부대가 서울로 들어갔는데 우리는 거기에 있으니까.
그래서 저 건너 산에 배치된 부대로 병력을 데리고 가서 대대 선임장교가 동기생이라 함께 후퇴하기 시작하는데 서빙고로 해서 한강교로 가니 정말 다리는 끊어졌고 삼각지까지 차량과 사람으로 넘치고 시체도 많았어요. 여기서 민간이 타고 있는 배를 징발해서 한강에서 노량진 쪽으로 도하 했어요."
제7사단 제9연대 제6중대 소총병 이등중사 박인업의 증언이다.('66.3.4)
"월남하신 것이 언제이고 제주도 토벌도 참가 했습니까. 38선에서 6.25전쟁 나기전ㄲ지의 출동 같은 것을 경험했습니까. 그때 계급은?"
"1948년에 월남했고 제9연대로 갔는데 제주도에 가니까 토벌은 다 끝났습니다. 전선에서는 북한군 순찰병만 보았고 병장으로 제6중대 제1소대 입니다."
"대대본부는?"
"포천 신읍에. 그 전날이 토요일이라 전부 외출 나가고 전날 저녁에 전방에서 탱크소리가 들린다 하여 긴장상태에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침에 비가 내리는데 한 4시경 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전방에 1개 대대가 나가 있었는데 제2대대에서 제7중대인가 나가 있었을 겁니다.
아침에 전투가 벌어져 부상자가 나오고 7시반경에 부관이 전부 출동하라해서 나가려는데 벌써 피난민들이 나오고 비는 쏟아지는데 탱크 20대가 들이닥치더군요.
신읍리에서 3~400m에 탱크가 들어오더니 시민들에게 한참 연설을 하고 조금 있다가 탱크가 포를 우리 부대로 돌리더니 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린 밤새 걸어서 사관학교로 와서 재편성해서 미아리고개로 배치되어 이틀인가 싸웠습니다."
"미아리 어느 쪽입니까?"
"서라벌 대학의 산 중턱에 가서 이틀인가 싸우고 포가 날아와요. 우리가 밀려서 성동역으로 빠져 아침 8시에 철수하기 시작해서 나룻배로 건너 안양에 서 다시 수원으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2대대만 입니까?"
"대대가 다 헤어져서 다시 편성했습니다. 수원에서 특공대를 조직하여 서울에 전차를 부스러 간다고 1개 대대병력을 나흘동안 교육받았습니다. 교육받고 노량진으로 가서 국군묘지 있는데에 배치를 하고 배를 수습하여 TNT를 실고 건넜습니다. 정찰병이 북한군과 교전을 하고 그러다가 낮에는 그냥 지내고 밤에 그 놈들의 많은 병력이 나와서 다시 안양으로 철수했습니다."
수도경비사령부 부관부보좌관 중위 선우 길영의 증언이다.('80.12.23)
"주요전투는?"
"수경사 상황실 근무, 노량진 및 진천전투 참가했다."
"전투 경과는?"
"6월24일 장충동 집에서 자고 25일 10시경 충무로 5가에서 병참대장을 만나 비상이라하여 집에 가서 옷 입고 12시경에 귀대했다. 25일 예하 부대인 제3연대와 제18연대가 의정부지역으로 투입되었고 26일부터 후방에서 부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시 제5사단의 부대는 대대별로 문산지구, 의정부지구, 가평지구로 분산 배치되어 연대본부 인원들은 갈 곳도 없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았다.
낙오병이 계속 들어와 300~400명 정도 집결되었다. 27일에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의자에 앉아 잠이 들어 한강교 폭파소리도 못 들었다. 김응수 참모장이 나타나 적이 미아리선을 넘었고 한강교가 폭파되었다며 미아리 정찰을 간다고 나가 나도 낙오병과 행정병 10명을 데리고 제3연대로 걸어가니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김포반도로 들어온 적이 아군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한강다리를 끊은 줄로 생각을 하고 강을 건너야겠다는 생각에 한강으로 내려갔더니 차안에는 배가 한 척도 없고 대안에 11척이 있어 보이는데 수영할 줄 아는 사람을나오라 하니 아무도 안나와 내가 직접 옷을 벗고 건너가 배와 노를 구해와서 15명을 태워 건너서 관악산으로 갔다.
안양을 거쳐 다시 평택으로 가니 사단장이 이준식 장군으로 바뀌어 있었고 2~3일 사이에 다시 김석원 장군으로 바뀌었다.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105mm곡사포의 지원을 받으며 진천의 봉화산과 문안산을 제1연대가 공격하였으며 제1연대장이 윤춘근인데 우리가 보은에 정찰중인데 그곳에 와서 "우리 연대가 어디에 있느냐?"고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았다.
수도사 제3연대 제1대대장 소령 임백진의 증언이다.('77.8.9)
6월25일 밤에 의정부 부근의 금오리에서 광릉으로 헐수하였는데 26일 새벽 0:00시에 광릉에 집결해보니 적이 벌써 휩쓸고 지난 뒤였다.
그래서 야간행동으로 북한강으로나가 배 2척을 구하여 30명씩 분승, 철야로 도하를 해서 양수리에 철수했다.
28일 새벽에 천호리족으로 나오다 광진교를 폭파하고 나오는 공병을 만나 차량으로 수원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과천으로 갔으며 29일 아침에 연대장 이상근 중령이 아프다고 수원으로 가고 부연대장 최수청 중령이 연대를 지휘하여 과천으로 올라와 말죽거리 정면의 낮은 고지를 공격하기도 하고 판교쪽으로 철수를 하다 최중령이 전사했지만 유해를 가지고 오지 못했다.
수도사 제8연대 부연대장 중령 이 현진의증언이다.(.65.11.18)
"6.25전쟁중 겪으신 경험담을 듣고자 합니다."
"제1연대 1개 대대를 제8연대장이 지휘했습니다. 제2대대가 청량리쪽에 배치되었습니다. 저는 적들이 태릉까지 들어올 때가지 몰랐습니다."
"그때 2대대장은 누구입니까?"
"제2대대장은 고백규 장군이고 내가 부연대장. 하나는 인천쪽으로 공격하고 하나는 시흥 남쪽으로 공격을 했습니다. 여기서 29일부터 7월2일까지 약 5일간 여기서 견제했는데 그때 적의 공격으로 비행장을 몇 번 점령을 했느냐 할 것 같으면 다섯 번 점령당했습니다.
연대장이 직접 일선 장병과 같이 뚝에 있으면서 적이 다섯 번 공격해서 점령한 비행장을 다시금 공격해서 재탈환함으로써 적이 이지역을 침공 못했다는 것과 만약에 이 지역을 막지 못했다면 유엔군이 빠르게 증원되자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을 얻는 것인데 그 시간을 여기서 지탱했다는 것 그래서 7월 2일난 아침까지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후퇴한 것이 7월 3일날쯤 될 것이 아닙니까?
"3일날 아침입니다. 적이 1개 연대하고 철교를 건너온 전차를 동반해서 제7사단이 있는 곳으로 그냥 넘어 왔습니다. 여기에 전술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때에 제7사단은 이 뚝에 연결하여 배치를 안했어요. 한강 뚝을 연결해서 배치해야 되는데 병력이 넘어올 때까지 여기에 병력이 없었습니다. 능선에 배치되었습니다. 높은데 배치한다고 해서 능선에 배치한 것이지요"
"주둔지는 어디입니까?"
"육군본주 자리이지요. 제8연대 주둔지에 수도사 사령부가 있었고 서울지구에는 우리 연대 밖에 없었습니다."
"제18연대도 수도사에 속해 있었는데요?"
"서울지구 경비 부대장에 내가 임명받았으니까 나보다 선임자가 있었으면 내가 받지 않았을 것 아니예요? 제18연대장은 임충식 장군인데."
"제3연대는 여군 훈련소 자리에 주둔하고 있었고요?"
"여군 훈련소자리가 그때는 기용부대(?)가 있었습니다."
"6.25전쟁이 났지요. 그래서 고급지휘관반이 해산되어 사단장, 연대장들이 다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바쁘니까 제18연대를 의정부로 보내고 제8연대만 남아 아무 부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8연대를 어디로 보냈느냐 하면은 2개 대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 처음 출동을 춘천 방면으로 가라해서 차가 없어서 버스까지 동원하여 가평까지 갔습니다"
"실제 갔습니까?"
"연대가 전부 다 갔습니다. 가평경찰서에 가서 상황을 보니까 의정부가 더 바빴습니다. 서종철 장군이 직접 지휘하고 전화로 연락을 하니까 육군본부 작전참모가 강문봉 장군으로 기억하는데 다시 빩리 떠나라 이것이에요. 그래서 의정부방면으로 출동하였습니다."
"그 날로 돌아왔습까?"
"그 날 밤으로 돌아왔습니다. 25일 저녁까지 들어왔습니다. 26일 오후가 되어서 다시 명령이 내렸는데 의정부 방면에서 내려오는 부대가 많으니까 육군사관학교 쪽으로 들어온다 이것이에요. 그래서 농업시험장에서 광나루 다리있는 쪽에 2대대를 배치하고 그 나머지 1개 대대 병력은 대부분 휴가가고 없는데 육군본부를 경비하라 하였습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제2대대 작전장교 대위 남상욱의 증언이다.('81.4.18)
"부대이동에 대하여?"
"6.25전쟁 전에 제6사닺 예속부대로 있다가 수도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어 23일 강원 홍천 자은리를 떠났다. 23일 용문에 와서 하루저녁 자고 24일 기차로 용산에 도착하여 현 육군본부인 제18연대로 와서 군장을 풀고 그날을 보냈다. 서울에 집이 있는 사람은 외박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왜 노량진에 대대가 배치되었으며 누구의 명령으로 갔습니까?"
"연대장 명령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연대장 훈시도 있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부대 배치는?"
"중대별로 경계병을 배치할 정도였다."
"가평 출동은 언제? 왜?"
"25일인지 26일인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저녁때 도착한 것만은 틀림없다. 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춘천쪽에서 내려오는 적을 막기 위하여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의정부가 급하다 하여 그날로 돌아왔다. 27일 오후에 청량리에 가서 부대를 배치했다. 제5중대는 서울위생병원이 있는 야산에 배치하고 중랑교까지 담당하도록 하였다.
제6,7중대는 경희대 뒷산인 143고지 능선에 배치했다. 28일 아침이 되어 제6중대, 제7중대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몇 시간이 계속 되어 중대에서 탄약이 떨어져 싸울 수 없다고 하여 보급장교인 방용을 중위가 대대가 가평에 있는 줄 알고 그곳으로 가다가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어 보급지원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정보장교가 휘경동쪽으로 나가 소주 한잔하겠다고 나갔다가 포로가 되고 청량리역에도 인민군이 들어와 대대가 포위 되었다하여 대대장은 광나루로 철수를 명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제2대대 제8중대 소대장 중위 강영환의 증언이다.('81.3.17)
"부대이동에 대해서?"
"25일 새벽 06~07시에 비상이 걸렸다. 내가 그 날 일직근무를 하고 있었다. 38선에 적이 공격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자은리에 있을 때에 흔히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않게 생각했는데 얼마가 지났는데 적 비행기가 와서 한강을 폭격한다는 것이다.
50mm 기관총을 막사 앞의 배수로에 거치하고 비행기가 또 오기를 기다리는데 오전 10시경 비행기가 왔다. 20발 쏜 것으로 생각되며 적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1시간이 지나고 나서 육본에서 기간총 20여 정을 가지고 와서 병력을 있는 대로 실으라 하여 중앙청과 경무대에 배치하고 1소대장인 황인건 중위가 한강에 나갔고 오후 2시경에 적 비행기가 나타나 한강에 폭격을 하기 시작하여 기관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적기에 명중, 김포가도에 추락하고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낙하하여 민가집에 숨었다가 잡혔다고 알고 있다. 이때 최초로 적기를 추락시킨 결과를 전과보고를 하지않아 훈장이나 표창을 받지 못했다.
"그 다음은?"
"25일은 그대로 보내고 26일 오후 5시경 가평으로 출발하였다. 1,2소대는 가지않고 3소대만 갔다. 우리는 트럭 2대로 가평으로 가서 가평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 밤나무가 많이 있는 밤나무골에 들어갔고 다른 중대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도착하자마자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가 철수지시가 있어 다시 부대로 돌아왔다.
27일 다시 청량리로 이동하여 회기동 파출소 근방에 도착하여 비가 내려 근처 민가에 들어갔다.
보초를 세우고 검문검색을 하여 피난민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국군 3대 선서를 복창하라던가 애국가를 부르게 하고 직속상관 관등성명을 말하도록 하여 오열을 식별하도록 노력하였다.
28일 09~11시 사이에 적과의 교전이 시작되었고 지도도 없어 짐작으로 박격포는 쏘았다.
더 싸울 수가 없어서 철수하는데 포열이 달아서 수통물과 소변을 모아 겨우 식혀 철수를 시작하는데 이때 보도연맹이 팔에 완장을 하고 옆에 와서 있는데 몽둥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눈치를 보다가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고산 너머에서 인민군이 오는 것이 보이는데 공포를 쏘아 그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광나루에 도착해 배에 물이 차면 철모로 물을 퍼내면서 도하하여 광주를 거쳐 수원에 가고 용인전투에 참가하고 오산으로 철수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제8중대 소대장 중위 김용건의 증언이다.('67.2.15)
"이동하여 부대를 서울 위생병원에 배치하는 날은?"
"27일이다, 그때까지 몰랐다. 알 재간이 없었다. 시내로 북한군이 시가행진으로 계속 남하했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다 도망갔군요?"
"그래서 알 수가 없어서 답십리로 해서 뚝섬으로 갔다. 그런데 답십리를 지나가는데 벌써 지방 빨갱이가 완장을 차고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놈들은 막대기를 들고 다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대들지못했다. 수원으로 갔다가 혼합편성되어 영등포로 왔는데 노량진에서 김포 가는 뚝방에 배치되어 2~3일 지탱했다. 마포쪽에서 박격포를 쏘면서 진격해 오는데 북한군이 영등포 시내에 왔다갔다 하고 적색분자들이 사복차람에 권총을 가지고 갑짜기 뻥뻥 쏘기 때문에 병사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다가 분산 되었다.
수도경비사령부 제8연대 대전차포 중대장 중위 유기천의 증언이다.('80.12.11)
"대전차포 중대편성은?"
"중대는 3개 소대. 소대는 2개 분대로 편성되어 6개 분대이다. 중대 장비는 1개 분대당 57mm대전차포 1정이 있으며 3/4톤 차도 6대다.
그 외에 1/4톤 짚차 1대, GMC 트럭 4대, 3/4톤 무전차 1대, 인원은 160명 정도 였다.
"옹진에서 서울로 이동은 언제?"
"'49년 12월에 LST로 옹진에서 서울로 왔다. 임무교대는 제17연대와 했다."
"서울에 와서 57밀리 사격 실시여부는?"
"경기도 광주 포사격 훈련장에서 했다. 조준 렌즈가 있어 57mm 대전차 포는 명중률이 좋았다. 이곳이 육군의 포사겨장으로 105mm포도 사격했다."
"대전차포 철갑탄은 보급 되었는가?"
"철갑탄은 없었다."
"6월25일 전투경과에 대하여?"
"6월25일이 나의 약혼 날이었다. 24일 밤에 영등포 처가에 가서 자고 25일 아침 8시경에 약혼반지를 맞추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데 전쟁이 발발 했다고 귀대하라는 가두방소을 듣고 약혼자와 헤어져 용산에 있는 부대로 왔다. 연대와 같이 출발하여 의정부에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의정부에서 북서쪽으로 100리쯤 되는 곳에 대전차 포를 방열하고 잇는데 26일 12시가 좀 지나 적 T-34전차가 약 4Km 전방에서 사격을 하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얼마 후에 우리 보병이 내려오고 중대장이 연대에 가서 보고 하고 온다고 가버려 내가 부대를 지휘했다. 연대와도 연락 두절이고 중대를 지휘하여 의정부쪽으로 오다가 지서 경찰주임의 하는 말이 의정부가 적에게 점령당했다 하여 소로길로 경찰의 안내를 받아 빠져서 27일 아침에 서대문 영천으로 왔다. 용산부대로 갈려고 하는데 헌병이 미아리로 가라고 곳곳에서 고함치고 있어 미아리로 향했으나 각종 차량과 포와 기타장비가 혼란을 이루어 정릉으로 빠져 방열하고 있다가 보병이 없으면 싸울 수 없음을 느끼고 11시경에 연대본부(지금의 육본)로 돌아왔다.
새벽 3시쯤 폭음소리가 났는데 나중에 보니 한강교 폭파였으며 그로부터 약 20분 후에 전령이 명령을 가져왔는데 수도방위사령부 소속부대는 서울을 사수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명령을 받고 도망가는냐, 사수하느냐의 2가지 문제를 가지고 망설이다가 한강을 도하할 것을 결심하고 포를 걸어 차를 몰아 한강교로 갔지만 이미 폭파되고 주변은 아수라장으로 부상당하여 살라달라 아우성치는 사람 죽어있는 사람등 비극의 참상이었다.
우리는 다시 영내로 들어와 삼각지 일원에 방열하여 적 전차를 사격하였으나 잠간 멈추더니 한강 쪽으로 지나가고 우리는 위치가 탄로나 적의 사격으로 탄약차도 완파되고 인원도 전사하였으며 우리는 미 8군을 경유 이태원으로 가서 민복으로 갈아입고 학생증을 가지고 인민군의 검문검색을 피하기도하고 그들은 무릎과 팔굽을 검사하여 군인을 가려내려 혈안이 되고 있었다.
삼촌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마포로 나가 한강을 건너려고 한는데 보도연맹이라는 자가 까다롭게 하자 당시 월급이 2000원인데 8000원을 주고 영등포에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러 간다고 하여 한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 여의도에 갔더니 진지공사를 하고 있는데 제18연대 3대대였다. 연대 김상사가 빨갱이라고 죽이려 했으나 마침 3대대장이 있어 곤란한 장면을 면하였다."
혼성 수도사단장 이종찬의 증언이다.('77.5.2)
6월28일 새벽 04시쯤에 서빙고에서 이형근 준장과 함께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 동이 틀 무렵에 노량진으로 갔다. 10:00에 시흥의 보병학교에 갔더니 나를 혼성 수도사단으로 임명하였다. 지휘소를 우신 국민학교에 두고 있다 동양 맥주공장으로 옮기고 나중에 시흥으로 다시 이전했는데 동시 사단은 김포가도의 제방에 일렬로 병력을 배치하여 여의도쪽에서 건너오는 적을 막았다.
사단의 병력이라야 제8연대 밖에 없었으며 제18연대의 1개 대대가 양화교쪽을 막았는데 기갑연대의 장갑차가 지원되기도 했다.
당시에 내가 느낀바 중에서 가장 뼈아픈 것은 한강선에서 통제된 방어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병력을 축차 투입한 것인데 건제를 무시한 혼성병력이라 사실상 부대의 전투략은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수도사단 기갑연대 장갑중대 곽응철의 증언이다('65.12.8)
저희들 연대는 장갑 1개 대대와 기병 1개 대대, 도보 1개 대대로 주로 수색정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전쟁 직전까지 장갑 1개중대가 이북과의 가까운 지역주민들에게 안심하게 해 주기 위해서 우리가 무기가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전방에 나가 있기도 했습니다.
최초로 적과 교전한 것은 김포반도에 상륙한 적 부대를 맞았습니다. 9대가 1개 중대인데 김포가도로 나가는데 문산쪽에서 민간인 복장으로 철수하는 군인들로부터 적이 곧 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깃배 모양의 보트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장갑차에는 화력이 케리바 50과 37mm 전차포, 그리고 기관총 3대가 장비 되어 있는데 화력으로 상륙하는 보트 몇대를 침몰시킨 것 같아요. 그때는 몰랐는데 아침에 보니 적이 산꼭대기에 다 올라왔어요.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장갑차로 철수하여 김포비행장에 배치되었습니다.
오후 5시에 비행장에 있던 적이 저희들, 그리고 미군 비행기의 폭격에 의해 지리멸렬 상태에 들어가 노획품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기갑연대 소대장 유흥수의 증언이다.('66.12.6)
"부대를 어디서 수습하셨습니까?"
"후퇴할 때 본부에 화기소대가 하나 있었습니다. 연대본부 직속으로 화기소대가 있었는데 그 소대에는 81mm 박격포가 3문, 2.36인치하고 무반동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관총이 몇정있고 캐리바 50입니다. 그 다음에 수냉식 기관총이 있는데 이 소대는 제가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28일 날 아침에 또 장갑차 한 대를 연대장용을 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28일 아침에 비가 그쳤는데 그때 보병학교 문 앞에서 복잡했는데 도로 옆에서 장갑차를 제가 타고서 내가 맨 뒤 골짜기를 담당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나가라고 하고 있는데 그때 상당한 피난민들이 내려오고 부평에서 탄약과 무엇이 내려왔다고 해요.
거기에 있으니까 9시쯤으로 아는데 김백일 대령이 와서 노량진으로 나가서 쏘아라 했습니다.
무엇을 쏠까요? 했더니 마구 쏘아라 총소리만 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쏘고 있던 장갑차를 타고서 노량진에 와 보니까 노량진 수원지가 있는데 사무실의 유리가 다 날아가 버렸고 민가의 유리도 부서지고 수도 사무실에 들어가소 보니까 한강 북쪽에 기관총이 세 대인가 있어요.
쌍안경으로 보니까 그래요, 그래서 장갑차를 수도국 사무실보다 조금 뒤편인 영등포 쪽에 위치시켜 쏠려고 하니까 민간인이 나타나 의용군이라그래요. '노량진 고개 산에 있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그러면 내가 쏜 다음에 쏘아라 했더니 우리가 쏘고 뒤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아군은 배치가 안되었지요?"
"그곳에는 없었습니다. 민간인 사복 입은 사람이 조금 있었습니다."
"사복 입은 사람이 낙오자들 아닙니까? 낙오자가 아니면 총이 어디서 있겠습니까?""
"낙오자는 아닌 것 같은데 저도 의심은 했는데 그렇다고 우리 뒤에서 쏜 것을 보면... . 그래서 그곳에서 몇 방을갈기고 다시 보병학교로 돌아와 박격포를 끌고 나가서 노량진하고 영등포 중간지점에 삼각지 제2연대가 있던 제8군사령부에 조준을 해서 쏘았습니다.
29일날 경인데 박격포가 없어졌습니다.
각 사단에 배속 되었던 병력들은 빈손으로 들어오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장비를 잃어버렸는데 보고를 안했습니다.
어떻게 되었는냐 하니까 그때 제8연대장 서종철이 와서 몽땅 집어갔습니다. 후에 서종철이 자기기 박격포를 빼앗아 갔다는 것을 자기가 확실히 말했습니다. 아군끼리 중화기 쟁탈전을 했습니다.
29일날인가 장갑차 2대가 들어와 재편성했는데 김백일 대령이 김포반도로 나가라하여 갔더니 계인주 대령이 김포반도 방위 사령관을 하고 있는데 4km쯤 앞으로 나가니까 아군이 있는데 제9기던가 생도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총도 없이 맨 손으로 엎드려 있다가 박격포탄이 날아오면 밀려나고 하는데 대위 하나가 술에 만취가 되어 권총을 뽑아 가지고 이놈들 왜 후퇴하느냐 죽인다고 야단하는 것을 보고 돌아오니 계인주와 경찰들이 웅성거려 가보니 채총장이 나와 적이 어디 있느냐 아군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백일 대령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령관 앞에는 안되겠습니다. 철수시키겠다고 하니 안된다고 했습니다. 명령이니 보내라 하여 보냈는데 거기거 자살한 우중령이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비화같은 것이 없습니까?"
"요란한 것이 있는데."
"제1연대 하극상...?"
"그것이 내 중대에서 났습니다. 그 날짜가 4월인가 5월달일 것입니다. 비화를 얘기한 것을 써 놓으면 재미 있을 것입니다. 임부택씨가 그때 부교 하사관이지요. 대대에서 인사계를 했습니다. 입대해 들어오는 인원들 중에서 제일 왈가닥 같은 사람은 써비스 부대로 갔습니다, 얌전한 사람은 A중대 C중대로 보냈고 불량해 보이는 사람은 모두 저희 부대로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사고가 나는 것은 저희 중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 무엇이 논의 되었냐 하면 신탁통치 찬성, 반대 두 패로 나뉘어서 내무반에서 늘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빨갱이를 몰아내야 한다. 신탁통치 반대로 되었으니가 빨갱이를 몰아내야 된다고 해서 모의를 시작했는데 그때 장교중에 빨갱이가 들어와 있다고 해서 이것이 정일권 정위지요. 그래서 이것을 없애자는 모의가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하루는 주번사관을 하고 있는데 내무반이 뒤숭숭하여 꼼짝하지 말라고 돌아다니며 고함을 치고 했는데 조용해져서 이상하다고 내무반에 문을 열어 보니까 창문을 열고서 나갔습니다.
이놈들이 장교숙소를 습격 갔다고 해서 가 보니까 그때 정일권 정위가 매를 맞고 의무실에 와서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람들이 내가 선동을 해서 정일권씨를 몰아내려고 했다는 얘기를 하는데 전혀 사실무근이에요.
후에 보니까 그 주동자들이 좌익계열이었습니다. 좌익계열에서 똑똑한 사람을 몰아내기 위한 모의같았습니다."
제5사단 제15연대 제3대대 소령 최병순의 증언이다.('67.12.24)
"6.25전쟁 당시에 어디에 계셨습니까?"
"제15연대 제2대대장을 했습니다. 25일날 새벽에 나와서 26일날 적과 정면으로 부딪힌 것이 아침 9시경입니다. 그때 문산 벌판에서 2.36인치 로켓포와 대전차포 그것을 가지고 아주 치열하게 전투를 했고 그 이후에 대대가 한강을 맡고 있었는데."
"행주나루 건너서요?"
"아닙니다. 우리가 있던 것은 흑석동에 들어가는 길이 있잖아요. 노량진 수원지 흑석동으로 들어가는 길 그 봉우리를 맡고 있었습니다, 15연대 일부는 김포쪽을 맡고 일부는 여기에. 연대장은 성남중학교에 있었지요."
"교전을 치열하게 했지요?"
"29일날 저녁쯤 되었을 거에요. 적 1개 중대가 도하를 했는데 우리 진지내로 들어와 몽딸 전멸당했지요,그 이튼날 B-29가 서울에다 대대적으로 폭격을 했습니다. 적이 200여명 물에 빠져 죽고 무기를 7트럭 노획을 했으니까요."
"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가 문산 그곳에서 전쟁을 하지 못하고 당했지요. 적이 개성쪽에서 밀려왔지만 6월 25일 밤에 새벽에 나올 때가지 도하를 못했어요. 그래서 문산까지 오는데 하루가 걸렸어요.
적의 전차가 우리 전면에 나타났는데 18대입니다. 그때 생각으로는 M1총으로 쏘면 구멍이 뜷리고 로켓트포로 100야드거리에서 맞으면 완전히 지리멸렬해 지는 줄 알았어요.
전차가 18대 나오는데 적의 보병이 2개소대 엄호를 해서 나오고 적의 주력부대는 남으로 향해서 야산을 타고 강쪽으로 돌았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전차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적이 돌아서 오는 것을 몰랐어요.
벌판이라 전차가 오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전차가 오는 길에다 150m간격으로 로켓트포 진지를 구축하고 숨어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 밑에 대전차 포가 8문인가 있었어요. 그 뒤에 105mm가 6.7문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때리곤 했는데 맞지를 않아요. 교육이 잘 되어 50m 거리내에 오지 않은 것은 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놈들의 뒤에 오는 전차가 전부다 논밭으로 들어가서 기어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 이놈의 전차 6대가 로켓트포의 호 위에 있는거에요. 그래서 로켓트포 사수가 수류탄을 가지고 까집어 넣어서 전차를 3대 잡았어요.
그래서 뛰어가서 전차안에 다가 수류탄을 까집어 넣어라. 그랬습니다. 그곳에서 8대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적의 보병이 옆으로 와서 압력을 가하고 전차 뒤에 적의 기마병이 나타나는 거에요. 그래서 연대에 보고 하니까 연대는 이미 이동중에 있었어요.
"거기서 중대장 누군가 전사 했습니까?"
"제6중대장인가 제7중대장인가 대위인데 전사했어요. 그때 왜 전사했느냐면 대대장이 저나 위에 올라가니까 다 잡은 둘 알고 중대를 지휘해서 잘 나갔어요. 그런데 적에게 걸린 것이지요. 그때 최영희 장군이나백선엽 장군이 내가 적의 탱쿠에 올라 가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그 후 계속 후퇴를 해서 문산 밑에 역이 하나 있어서 쭉 걸어 내려 왔는데 부상자를 데리고 내려 오려니 상당히 힘이 들어 그냥 걸어서 내려와 문산역에 전화를 하니까 이북말이에요. 수색 사단에 전화를 하니 통하지 않고 그래요. 26일날 밤에 비가 많이 오는데 어느 집에 머물고 있는데 밤 11시쯤에 적 기마병이 나오는 거에요. 제11연대 제13연대 제15연대 이렇게 있었는데 부상병이 3천명 몰려 있었어요. 서울에 들어가려 하니까 이미 서울에 적이 들어왔다 하여 수색에서 도하하려다 조금 내려와 제2한강교와 영등포 중간쯤 해서 모래탑에 동그란 산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나갔어요.
그런데 그쪽으로 가보니 북한군들이 형무소의 죄수를 풀어주고 그사람들에게 총을 주어서 우리가 가니까 총을 쏘고 있어요.
나오는데 짚차에 엔진이 그대로 걸려진 채 팽개쳐 있고 그때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하고 집에 기둥을 빼서 위에서 나무를 띄워서 건너는 겁니다. 내가 총을 버린느 놈은 총살이라 하여 모두 휴대하고오후 4시인가 그때 다 건넜습니다.
"연대장은 다 갔지요?"
"그렇지요. 한강다리 끊어지기 전에 갔지. 내가건넜는데 수도방위사령부 2호차가인가 그것이 있어서 그 차를 타고 다니고 그때 동양맥주회사 지하에 가니 돈이 5,6가마 있었어요. 이걸 주고 물건을 사려하는데 받지를 않아서 가지고 다니기도 곤란하고 불에 태웠습니다.
시흥에 가서 재편성하여 유재흥 장군밑에 들어가 한강 방어선에 투입 되었던 것입니다."
제5사단 제15연대 제11중대 소대장 소위 박종순의증언이다.('81.1.21)
"전투에 참전한 날짜는?"
"나는 호국군 출신으로써 '50년 3월 시흥 보병학교에서 OBC 7기로 교육중 6.25전쟁이 발발했다. 다음날 나는 제15연대로 전속되어 용산역에 도착하여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에게 신고했다. 26일 09:00시의 일이다. 그런데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편입한 일자가기록상에는 '50.7. 16일로 되어 있다. 후퇴하는 혼란 속에서 행정정리가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예현장교들이 실제 전투에 참가한 20일간이 정리 되지않아서 이 동안에 전사한 동료들은 군번도 없이 무명용사로 취급되어 버렸다.
"첫 전투지역은?"
"26일 용산역에 도착한 부대는 제15연대 본부와 제3대대였다. 이날 문산으로 열차로 이동하였으나 수색역에서 적기의 기습으로 걸어서 문산에 들어갔다.다시 금촌으로 내려와 119고지에 배치 되었거 27일 오후 적과 교전이 시작 되었다.
여기서 용감한 병사들이 수류탄으로 육탄 공격을 감행하여 적 전차 3대를 잡았고 약 2시간 이상 싸웠다. 그러던중 고립 되었는데 철수하라는데 어디로 오라가라 하는 말도 없었다. 28일 아침 수색에 도착하여 아군 보급품을 적재한 화차 속에서 건빵과 카라멜을 찾아내어 3끼를 긂은 배를 채웠다. 그러나 부근에 아군의 그림자도 없었다.
일단 서울로 가기로 하고 마포로 갔는데 시민들로 부터 한강교가 폭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강변에 가보니 마침 보트가 있기에 큰소리로 불러서 사공이 배를 몰고 와서 3회 왕복하여 영등포로 건너가 시흥 보병학교에 가서 원대와 합류했다."
"시흥에서 재편성하여 다음 한강에 배치된 것으로 아는데?"
"28일 오후 늦게 한강변으로 북상한 바, 혼성된 우리 대대는 인도교 우측 흑석동 강변 일대에 진지를 구축 하였다. 대안에 적 전차가 출현하여 대대진지에 적지않은 포탄사격을 했다. 29일 우리 대대는 노량진으로 진지를 변환하였다. 이날 오후에 적은 보트로 타고 아군 진전으로 도하를 강행하여 18:00경 끝내 진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중대(대대)가 분산되어 중앙대 부근 주택가에 숨었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관악산으로 이동을 개시하는데 적이 이미 중앙대 뒷산도 점령하고 있었다.
행동 개시하여 움직이는데 산에 적 1개분대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어 수류탄으로 처치하고 동이틀 무렵 관악산 기슭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긴장이 풀리어 잠이 들어버렸는데 누군가가 '손들어' 하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독전 헌병이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안양으로 가라하여 안양에서 연대 일부와 합류하여(30일 오후) 재편성한 다음에 부근 어느 고지(안양 동쪽)에 배치 되었는데 갑자기 아군 제트기의 기총소사로 적지않은 병력이 죽었다.
30일 저녁 우리대대는 오류동으로 이동하여 7월 1일 지금의 동양공대 뒷산을 발판으로 하여 북쪽으로 여명공격을 감행했으나 적의 화력에 돈좌되고 논바닥에 엎드려 3~4시간을 보냈다.
고개만 들면 적탄에 쓰러지는 병사가 속출하고 여기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안양-수원으로 철수해 갔다."
혼성 제7사단 작전참모 중령 박권근의 증언이다.('67.6.2)
"제7사단에서 작잔참모님 하시지 않았습니까?
"6월 8일인가 그랬을 것입니다. 전쟁 나고 3~4일 되었을 때 미아리에서. 미아리로 철수를 한 것이 6월 28일 일 겁니다. 그래서 미아리에서 철수해 광나루에서 그 다음에 국립묘지 앞으로 너머 갔지. 그래서 노량진에 와서 제7사단 CP가 여긴데 한강 방어를 하다가 한강 전면이 영등포로 들어가는 기차길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서빙고 맞은 편으로 해서 과천으로 들어가는 곳까지가 책임구역이에요.
"한강선 방어에서 얻은 교훈은?"
"야간에 북한군이 올 때 진지가 노출되었으니까 아주 방어를 잘못했어요. 당시 전투란 한 마디로 엉망이에요. 당시에 무슨 화력이 있나. 운용할 예비대가 있나. 통신망이 있나. 인접부대와는 고사하고 상하의 연락ㄷ조차도 되지 않았다. 당시 병사들의 고충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사단 지휘소가 있는 서울공고자리에서 철수할 때인데 그 곁에 벽돌공장과 개천이 하나 있었다. 적의 포탄이 떨어져서 길을 막고 있는데 개천을 따라 가다 보니 그 개울가에 어떤 병사 두 사람이 복부에 파편을 맞았는지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나를 보더니 자기들은 제1연대 소속의 아무 아무개인데 이제 여기서 죽게 되었으니 뒤에라도 자기 부대를 만나거든 그곳에서 전사했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했다.
포탄이 떨어지고 달리 사람을 구할 길이 없어.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곳을 떠났는데 그들은 서로가 얼싸안고 '여기가 우리의 무덤이네' 하고 위로 하면서 군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때 그 병사들이 부르던 군가 소리가 지금까지 내 귀에 쟁쟁하다. 내가 군대 생활을 통해서 남은 한가지 한이 있다면 그때 그 병사들을 구해주지 못한 것이다. 당시의 병사들의 기개는 참으로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제7사단 제9연대 통신대장 중위 유한종의 증언이다.('66.2.8)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때 애기는 할 것도 없어. 그냥 밀려 내려가 버리는 거지. 어디나 다 그랬으니까."
"어디서 부상당했습니까? 중앙대학교 뒷 고지겠지요?"
"한강 모래사장이 보이는 고지가 모래사장 앞에 고지가 또 하나 있었어 그래서 거기서 부상당했는데 지금도 파편이 들어가 있고 그때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있지. '사병 하나가 일을 보고 있는데 급하니까 조금 떨어져 용변을 보는데 포탄이 5m쯤 떨어졌는데 불발탄이야. 그래서 이 사병이 용변을 다 보더니 돌아오다가 기절을 했어. 용변 볼 때는 참고 있다가 우리에게 오더니 그냥 쓰러진거야. 그래서 나는 그 후에 부상을 당해 병사 두명이 업고 가는데 민가를 지나는데 기운 센 놈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총을 겨누니까 이 놈이 대한민국을 절대 지지해요. 이놈들이 업고 두명이 호위하고 연대의무대로 가 무장해제하고 그런데 그때는 피난민들이 자꾸 나와요. 위험하다고 오지 말라해도 자꾸 오는데 적이 같이 와요. 그래서 수류탄 전지지. 그래도 올라오니까 우리진지인데 하나하나 조사를 했지. 그때 피난민들은 돈도 가지고 오거든. 그때 돈 뺏길까 싶어서 어쩔줄 모르더군."
"어느 병원에?"
"야전 병원이 아니고 연대 구호소는 지나버려 사단 구호소로 갔는데 담배 하나 달라고 해서 빨다가 기절해 버렸는데 죽은 줄 알고 담요를 덮어버렸데. 그런데 철수하는데 살아난거야. 그래서 당까에 얹힌 채 화차에 실려 대전으로갔지. 거기서 할머니가 나도 봐주고 다리가 날아간 처녀도 봐주고. 그러다 광주로 가서 비행장에 하룻밤 자는데 여자는 죽고 거기서 장교가 한 20명 되는데 여자들 한 60명이 발씻어 주고 그랬어. 간호하던 애들이 그대로 진주로 해서 마산으로 부산으로 갔지. 그냥 석어가는 채로 부산 부둣가에 내려 병원으로 갔지. 여기서 치료가 잘 되어 제9사단으로 조치되었지."
제10연대 제3대대 제12중대 구종철의 증언이다.('66.9.5)
"몇 연대에 있었습니까?"
"제10연대 제3대대 제12중대에 있엇습니다. 시흥에서 재편성을 한다고 했을때 8명을 데리고 서울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한강 다리가끊어졌다고 하여 겨우 도강하여 효창공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여대생들이 모여서 동무들 뭐 하냐면서 선동을 하는 겁니다. 인민군하고 교전을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일제히 총을 쏘고 뛰었습니다. 그러다 잡혀서 숙대 강당으로 끌려갔습니다.
소가죽 끈으로 묶어놓고 강당문을 잠그는 겁니다. 그리고 주먹밥 하나씩 주는데 멸치 꽁댕이 하나씩 주는 겁니다. 그때 내 나이가 20살인데 몇 연대에 있었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제21연대 부연대장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내일이면 심판을 받으러 간다고하는데 그 다음날 되니까 우리를 아군 도요다에 태우고 중앙청 지하로 갔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무조건 데리고 나가라고 해서 다시 그리 끌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탈출을 했습니다. 강당문이 하나 있는데 오래 되니까 앉아서 자더군요. 그래서 박상병이 살살 기어가서 입을 막고 총으로 가슴을 찔러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효창공원 오리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안전히 다 넘어 왔습니다.
보병학교 심유선의 증언이다.('66.7.12)
"전투때 하신 것을 말씀해 주세요."
"6.25전쟁 당시에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 후보생으로 있었다. 6월 28일 04시경에 출동을 김포반도 쪽으로 나가 적과 싸우면서 천안까지 내려왔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후보생 교육을 한다고 해서 전주로 전부 내려갔다.
"시흥에서 출동할 때 장비는?"
"99식 소총을 가지고 갔다. 그러다 3.4 일째 되는 날 미군 공군기들이 와서 M1 소총을 공중 투하해 주어서 그 다음부터 M1 소총을 가지고 전투했다.
"지휘는 누가 했습니까?"
"우리 소대장들은 후보생때 소대장 하던 사람인데 한 분은 임억재 소령이고 한 분은 엄경호 소위였다. 대대장은 그 다음날 김포반도에서 전사 했다. 후보생들이라 경험부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포병학교 정보과 보좌관 중위 오예식의 증언이다.('81.2.16)
"포병학교 위치는?"
"미군 포병이 최초에 영등포에 있었는데 철수할 때 한국측에서 인수받아 장은산 대령이 포병사령관이 되었다. '50년 봄에 용산으로 이동하면서 백웅부대라 하고 포병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학교장은 신태영의 아들 신응균 준장이 맡았고 부교장에 김계원 대령이 보직 되었다.
"당시 포병의 편성과 임무는?"
"부대를 현성하여 교육하여 전방 사단에 보내는 일이었다. 당시에 서북 청년단이 많이 지원해 들어왔다. 105mm 6개 대대와 57mm 대전차포 2개 대대를 교육시켜 포병학교에 105mm 1개 대대와 57mm 대전차포 1개 대대를 교도연대에 남겨 놓고 5개 포병부대는 옹진의 제17연대와 전방 사단에 각 1개 대대식 보냈고 57mm는 잘 모르겠다.
사격술은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에서 실시 했다.
"전투과정에 대해서는?"
"26일 육본지시에 따라 학교는 학도연대의 2개 포 대대를 전방으로 보냈다. 105mm 곡사포 대대는 1개 포대를 문산방면, 1개 포대를 의정부방면, 1개 포대를 포천방면으로 분산 배치하였다. 대전차포는 어떻게 배치 했는지 잘 모른다.
6월 26일 오후부터는 각 방면에 나가 있는 장교들이 하나둘씩 까만 얼굴과 흙과 따믕로 올룩진 작업복으로 또는 카키복에 정모를 쓴 채 맥없이 면목없는 모습으로 학교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두 유구무언이다. 분함을 참지 못하여 책상을 치며 통곡하는 장교도 있었다. 어떤 장교는 "고문관 매쾌린 소령 나쁜 자식이다. 미국 놈은 나쁜 놈들이다. 30리 밖에 못 미치는 작은 포에다 철갑탄은 안주고 순발신관만 주고서 이것을 가지고 대전차작전을 하다보니 내 부하만 죽였다"며 통곡하기도 했다.
6월 27일 오후에 옹진포대의 포대장인 김수산 대위가 학교본부에 도착했다. 김대위는 상황이 급해지자 포와 포탄은 바다에 버리고 포차는 불을 지르고 어선을 동원하여 후퇴했다 하며 통곡했다.
대대장 박정호 소령은 부하들을 해상으로 철수시키느라고 최후까지 남아서 지휘했다. 그 영감이 통곡하던 그 모습에 내 가슴이 뭉클함을 금할 수가 없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박정호 소령은 포로 교환때 없었는데 포로로 있을 때에 장교의 신분을 숨기고 운전사 행세를 하였다 한다. 결국은 신분이 노출 되어 처형 되었거나 강제 노동에 보내졌을 것이라 한다.
27일 비보가 왔다. 의정부쪽으로 출동했던 A포대의 장세풍 대위가 대전차포격전을 하다가 전사했고 김풍익 소령도 장대위와 같이 1개 분대를 직접 인솔하여 부하들이 말리는 것도 거부하고 적의 전차에 대전차 사격을 하다가 전멸했다는 것이다. 정말 슬프고 분통한 일이었다.
28일은 비가 언제 왔느냐는 듯 맑게 개였다. 오전 10:00경부터 학교장, 이기동중령 드이 안양국민학교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노소동 중위는 3/4톤 차량을 타고 왓는데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리 바퀴타이어를 빼고 레루를 타고 철교로 왔다고 하였다. 학교장이하 여러 장교들은 철교로 걸어왔다. 그 후 수원으로 갔다.
육군본부는 일제때 제2지원병 훈련소였던 농업시험장 자리에 들어가 있고 이곳은 이범석의 대동청년단 훈련소가 위치하고 있었다. 제1지원병 훈련소는 지금의 태릉 사관학교 자리이다.
이동중 평택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주둔하게 되는데 그 학교 뒤에 교회가 있고 촛불이 켜 있어 가 보니 목사 혼자서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대화중에 이 동네에 보도연맹이 3명이 있는데 북한군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한다.
그래서 선임하사에게 사복을 하고 서울 중앙당에서 왔다고 하고 사상이 어느정도인지 알아보도록 했는데 나머지 사람은 기다리다 못해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고 좋아한다.
그 당시에 북한군은 유격군을 후방에 사복을 입고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그날밤 24:00경 처단하게 되었다.
이 총소리에 놀라 게릴라가 동네에 기습해 온 것으로 착각하여 난리가 나 대피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우리가 학교로 돌아와 찾으니 아무도 없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찾으니 웃지 못할 가관이었다.
책상 밑에 숨어 있는 사람, 다락에 숨어 있는 사람, 이불을 둘러쓰고 있는 사람, 변소에 숨어 있는 사람, 취사장에 가니 쌀가마니를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어 그 가운데 숨어 있는 사람 등 웃어 넘길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 다음날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가니 미국으로 유학갔던 신응균 장군, 심흥선 대령,,강관영 대위 등이 귀국해 와 있었다. 대전에서 공수되는 M2 신형 105mm 곡사포를 인수하기로 했는데 비행장 사정 간계로 대구로 이동하여 대구 경북여고 자리를 잡고 들어가 대구 동촌비행장으로 도착하는 대포를 받아 대구에서 중고등학생을 보충받아 신병교육을 해서 전방으로 배속시켰다.
나는 전방부대에 나가 싸우고 싶었다.
그래서 1950년 7월에 50대대를 편성해서 제8사단에 배속하게 되어 대대 S-2로 보직받게 되었다.
우리가 하양국민학교에서 영천 시내로 무관측 사격을 가하고 공중 포격을 심하게 했는지 영천시내로 진격했을 때 보니 북한군 시체가 거리는 물론 부엌아궁이, 광, 마루밑 등 여기저기에서 썩어가 그 악취가 영천시내를 뒤덮었다.
육군본부 공병감실 계획과장 소령 유완식의 증언이다.
"공병감실에서 여러가지 하신 일이 많으실텐데 말씀해 주세요."
"우리가 6월 25일 아침에 비상이 걸렸어요. 그때 내가 삼각지 관사에 있다가 부대로 복귀하였다.
지역별로 주요 도로들은 철수계획이 있는데 적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하여 교량을 폭파한다는 등 한강교가지 폭파계획이 다 수립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기에 어떻게 한다는 것이 상세하게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28일 날 한강교가 폭파되지 않았어요. 새벽에 폭파 되었는데 그 27일 날 맥아더 사령부에서 무엇이라고 연락이 왔느냐면 B29 50대를 출동시켜서 인민군을 폭격할테니가 서울을 사수하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채병덕 장군이 상당히 뚱뚱하니까 자칫하면 좀 피곤해 하가든. 그래서 가장 정력적인 분이 김백일 장군이었어요. 그래서 김백일 장군이 참모회의를 소집해서 그런 얘기를 전달하고 작전지시를 하곤 하였습니다.
"오전에 했습니까?"
"이것이 맥아더 사령부에서 온 것이 26일 오후 7시경인가 그랬어요. 그래서 회의가 소집되어 사수하라. 그래서 그때 채병덕 장군도 기뻐하시고 이렇게 와서 폭격해 주면 우리가 저지할 수 있을 것 아니냐.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육군은 측지부대가 있었어요. 그 전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지도를 전부다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어요. KMAG도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다시 들어왔지요. 그때 시흥까지인가 가지고 나갔는데 28일날 아침에 폭파되는 바람에 지도 한 장 없이 작전하지 않으면 안될 그런 입장이 되었지요. 그리고 나는 병력 철수를 확인하고 나눗배를 전부 집결시켰어요. 어디에 집결했느냐면 한 강 그 남쪽에 전부다 집결했는데 한강교가 폭파되는 바람에 이곳이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 당시에 공병이 가지고 있던 일본식 장비가 있는데 그것이 몇 개가 남아 있었어요. 내 자신이 공병이지만 한강교가 폭파된 이후에 육군본부에 연락할 일 때문에 이 주대라는 것을 타고 갔다 왔어요. 시흥으로 이동했지요. 그리고 이동한 곳이 수원입니다.
육군본부 공병감실 측지장교 소위 차재웅의증언이다.('66.5.19)
"공병으로 계시면서 어디에 계셨습니까?"
"육군본부 측지감실에 있었는데."
"그때 얘기를 해 주십시요."
"그때 측지감실에서 한국군의 지도를 만들어 보급했는데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지금은 지도가 사진화 되어서 나오는데 그때는 원판을 만들어 도장찍듯이 나오는데 그것이 지도의 주종이 되었지요. 그때 그것을 한강변에 내버리고 갔어요. 못 가지고 건너가서. 한강교가 폭파되어 배가 없어서 다 내던지고 몸뚱이만 나가게 되었어요. 그때 당시에 그 지도가 없어져 버렸는대 미국사람들이 지도보급 못했으면 전쟁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군요?"
"전쟁 못했다는 말은 전쟁에 패한 것이다 하는 것과 똑같은 말이지요. 그때 가지고 나왔다가 최공병감이 다시 들어가라 해서 들어왔지요. 그래놓고 '지도 가져와라. 없습니다. 왜 없느냐 이런 지경입니다. 당신네들 맘대로 다리끊어 놓고 어떻게 하느냐 그때 높은 사람들이 대개 지도를 찾아요. 그러니까 부대가 망해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그때 정보국장이 4천만원인가 돈을 대전에서 수표 일부, 현금 일부 해서 돈을 줄테니 어떤 방법으로든 박으라. 그러니까 원판이 있어야 있어야 지도를 찍을 수 있을 것 아니에요. 부산 내려가서 이것 저것 모아서 찍어보았으나 알아볼 수 없을 정도 였습니다.
"그러면 지도가 정상적으로 보급된 것은?"
"그때 전부 미국사람으로부터 보급을 얻어 썼어요. 그러다가 일본에 있는 극동군 지도부에서 원판을 빌려다가 찍을 때부터 정상보급을 했으니 전쟁 나고 2년 후지요.
공병학교 등 한강교 폭파관련 여럿의 증언이다.
공병학교 폭파 교관 이창복의 증언이다('77.3.8)
26일 다른 사람들은 전차 육탄공격하러 나갔고 우리는 남아 있었는데 11:00시경에 육군본부 공경감실에서 오라해서 가니까 '한강교 폭파 정찰을 해오라'하는 것이었다.
정찰하고 오니까 13:00시경이다. 폭약량을 산출해서 내니까 27일 10:00시에 한강 인도교 건너편 노량진쪽에서 대기하면 제1공병단에서 폭약을 싣고 오면 그것을 인수해서 한강교에 장진하라는 것이었다.
폭파준비를 완료하고 있을 때 김백일참모부장이 와서 하는 말이 "이 교량은 총참모장이나 나 아니면 최창식 대령 그 다음에 공병학교 교장의 명에 의해서만 끊어라"고 하였다.
교량폭파는 칼빈소총을 연발로 발사후 후레쉬라이트를 흔들어 신호하기로 되어 있는데 나는 두가지 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고인도교가 폭파 되는 소리에 알았고 임흥순 중위가 마침 와서 '철교를 끊어라'하여 점화를 했으나 폭파되지 않았다.
병사들을 대기시켜 놓고 임중위와 가 보니 뇌관만 터졌다. 다시 뇌관을 갈아 끼고 점화를 하여 폭파시켰는데 완전히 끊어지진 않았다.
공병학교 교도대대 대대장 김재식의 증언이다.('77.3.6)
우리는 장전을 하다가 YAK기의 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으나 장진은 쉽게 끊났다.
그러나 이날 오후에 반격을 한다해서 폭파를 하느니 안하느니 하다가 차량안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밤중에 공병감이 왔다는 것이다.(이때 미군이 참전한다는 서식에 철수했던 육군본부 일부가 다시 복귀하였다.)
밖에는 비가 오는데 왁자지껄하여 나가보니 공병감이 "적이 오는데 무얼 하느냐"며 야단을 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적의 전차다. 빨리 폭파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였다.
공병학교 전기과 과장 황원회의증언이다.('64.10.16)
6.25전쟁이 날 때에는 공병학교가 남산에 위치해서 공병감실 지시를 받았다.
의정부 상황이 좋아졌다고 일단 철수를 했습니다. 완전히 철수를 한 것이 아니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나빴으며 그때 인민군 비행기가 한강에 하나 떨어졌다. 오스트레일리아 비행기 2대가 격추하여 동작동 앞 한강에 떨어져 그때 들어가 인민군을 건져냈는데 머리를 맞아서 엉망이 되었다.
그래서 밤에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는데 사병이 와서 깨우기에 보니 공병 공병 하고 찾기에 나가 보니 최공병감하고 엄홍섭 학교장이 왔다.
인도교 쪽으로 사람이 몰려드는데 총으로 쏘고해도 몰려들었다. 그때 점화하려고 할때에 이시영 부통령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맨 마중에 지나갔고 내가 직접 차를 세우고 확인했다. 그 후로는 차량 하나 사람 하나 인도교로 지나간 사람이 없다,
"북쪽에 헌병이 배치되어 피난민을 막았군요?"
"네. 그렇게 한 것이지요. 다 후퇴해 버릴 때니까 잘 모를 겁니다. 끊어진 교량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그때 이주하와 김삼룡도 여기서 헌병이 죽였습니다 형무소에서 데리고 나와서 한강에 와서 많이 죽였습니다,
"뒤에 차가 많이 있었던것은 사실 아닙니까?"
"네. 그것은 사실이다. 다리를 끊고 제일 먼저 헤엄쳐 나온 것이 미군인데 극동담당 무슨 기관원이데 아주 중요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큰 개를 한 마리 붙들고 나왔다. 나와서 삼각지 어느 집에 중요한 공중 촬영 사진이 있는데 갖다 주던지 그렇지 못하면 태워버리든지 하면서 수원까지 내려갈 차를 좀 달라고 하며 자기가 동경까지 가면 곧 비행기를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차를 주었더니 가서 쎄단차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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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 폭파가 주는 전장공항은 경험하지않은 우리세대는 느낌으로도 알 수 없다. 계급의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죽음이란 면제 앞에서 담대하게 역활을 수행할 지휘관이나 병력이 얼마나 될까!
"전방에서 내려오던 병력과 장비등이 갈곳이 없이 되어버려 모두 버리고 몸만 살아가야 했다."
이로인해 다리위에 있던 500~800여 명의 피난민과 일부 군경이 피해를 입었고 북한강 파출소에 차량 40~50여 대의 차량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고 국군 주력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버린 순간이 되었다. 이제는 두가지의 갈림길에서 우리 군인들은 선택의 길에 두리번 거리게 되었다.
첫째는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여 역사앞에 떳떳한 군인의 최후모습을 기록에 남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휘관들 중에는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마지막까지 가용한 도하수단을 찾아내어 목숨을 나누는 피맺힌 활동을 하기로 약속하고 움직이는 일행이다.
그래서 민간인 배를 찾고 공병여단에서 준비한 도하정은 극히 일부 높은 분(?)들이 이용하였다.
그리고 강 저편에서 재편성해야 하는데 이렇게 넘어가는 군인이 얼마 없어 사실 보병학교인 시흥에서 대부분 다시 재편성하여 한강선에 투입하게 된다.
둘째는 실리를 찾아 군복이 뭐고 다 벗어 던져 버리고 민복으로 갈아 입고 지하로 숨어들던지 아니면 내려오는 북한군으로 들어가던지 선택은 자유였다.
"이 시간부로 부대를 해산한다. 각자 알아서 갈 길을 찾아 간다. 한강 이북에 집이 있는 사람은 집으로 가라. 한강 이북에 갈 곳이 없는 사람은 각 자 한강을 건너 시흥 보병 학교에 집결하라. 가급적이면 시흥보병학교에 집결하여 다시 만나자. 이상 끝. 각자 행동 개시"
봉일천에서 고양으로 내려서며 서울에서 시가전을 위해 진격한다던 제1사단, 그러나 사실은 높은 분들은 먼저 행주나루로 이동하여 떠나가고 갔다. 제13연대 제3대대 제12중대장 한인성 중위의 통곡이다. 앞에서 언급 되었듯이 당시 제1사단의 황대형 참전용사의 증언처럼 우리에 갇혀 있던 닭들이 자유를 얻어 흩어지듯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6월 28일 저녁부터 6월 29일 아침 사이에는 각 부대가 행주와 이산포 부근에서 도선용 소형 선박들을 이용해 그런대로 한강을 도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이 함락된 다음날인 29일의 날이 밝자 적으로부터의 위험을 느낀 배들이 김포쪽 대안에서 차안으로 들어오지 않음으로써 각개행동으로 살아남아야 했으며 대다수의 병력이 적에 의해서 처참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황대형 용사님은 다행이도 어느 주인집에서 옷을 얻어 입고 널빤지 한 장으로 개헤엄 반 잠수반으로 소리를 죽이며 도하하여 개화산 기슭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렇듯 국군의 제1,7,2,수도사단등이 이렇게 무너지고 해산되고 그래도 살아나 한강을 도하한 인원들은 또 다시 시흥 보병학교에 모여들어 다시 총을 들고 한강선 방어를 위해 전진해 올라 왔으니 뭐라고 높임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요행히도 한강을 도하해 철수한 병력 대부분의 집단이 혼성부대가 되어 지휘자가 없는 가운데 오합지졸이 되어 북한군의 먹잇감이 되어 버린 경우가 허다했다.
푸른 제복에 청춘을 묻고자 했으나 준비되지 못한 전쟁으로 인해 짧은 인생을 마칠 수밖에 없게 된 안타깝고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서울 도심에는 삼각지와 마포 방면에 수도사 예하 제18연대 제1대대가 적의 진출에 대비하고 있었고 중앙청 남산 마포에 대공사격반이 운용되고 삼각지에 배치된 부대가 57mm 대전차포로 접근하는 전차를 공격도 했다. 남산의 박명웅 소위조가 기관총 사격으로 적 전투기 YAK 1대를 격추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무렵 미아리방어선이 붕괴되면서 제5연대 제3대대의 일부 병력이 철수하다가 적전차 12대와 보병이 시내로 진입하는 것을 대전차 특공조를 운용하여 공격 하였고 남산에서는 시가전을 벌이다 이곳으로 모여든 장병들이 참모학교 이용문 대령의 지휘하에 백호부대라는 별칭으로 뭉쳐 항전하다 장렬히 전사하고 일부 생존자는 뒷날까지 유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대 병원에서는 1개 경비 소대원 전원이 그리고 입원환자 80여명이 전사 하였다."(다음 한강선 방어선 전투에서 상세히 기록)
비록 건제는 무너지고 지휘하는 상급 지휘관은 없어도 우린 의병정신으로 북한군에 맞서 싸웠다.
입원환자까지 맞서 싸우니 그들은 부상병을 난사하여 다 죽이고 유해를 모아서 불질러 버리는 만행을 서슴치않았다.
그러니 그들은 서울에 들어온지 10시간이 넘어서야 한강선에 진출할 수가 있었다.
이 동안에 철수부대들은 분산되어 광나루, 마포, 그리고 행주나루와 이산포에서 생가사의 사투로 한강을 넘어서야 했다. 많은 인원이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8만의 지상군 전투병력이 3만으로 50%도 안되게 남아 미군의 참전소식에 고무적인 희망을 걸고 한강선에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제한적인 방어이지만 결사적으로 버티어 그들의 도하를 저지하였다.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당일부터 공공기관을 장악하고 서울에 남아있는 각 정당 사회단체 등 각계 각층의 대표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국유재산과 정부요인 및 자본가들의 사유재산을 모두 몰수하였다.
그들의 군사위원회는 점령지역에서 군수물자를구입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북한의 중앙은행권 1원에 남한권 8원으로 환율을 적용하고 남한권을 무제한 남발하여 화폐가치가 몰락하고 이로인해 물가가 폭등함으로써 시민생할에 위협을 초래하였다.
적은 시민들 생계에 절실한 식량을 일반 시민들에게 동등하게 배급한다며 증록시켰으나 사실은 각 기관원이나 소위 의용군 유가족을 제외하고는 배급을 받지도 못했다.
적은 서울 시내에서 발간중인 각 신문을 모조리 폐간하는 대신 소위 해방일보, 조선인민보 등 공산계 신문을 등장시키고 관영언론 기관을 동원하여 기만선전을 되풀이 하였다.
이 무렵 문산으로 공격을 해온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봉일천 선에서 서울로 압박을 가하고 있었으나 제1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으며 김포반도로 남하한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비행장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한편 조공인 북한군 제2군단은 국군 제6사단의 선방으로 춘천과 홍천 말고개에서 지연되어 근본적인 한수이북에서의 포위소멸을 당성하려던 계획이 차질을 가져왔다
서울 실함시 전선은 김포-봉일천-서울-홍천-대관령-강릉선에서 유지되고 있었으며 북한군은 그들 계획대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으나 국군의 포위에는 실패하였고 또 그들이 믿었던 인민봉기가 일어나지도 안했다.
이상의 내용이 서울 철수와 관련된 그 당시의 주요한 몇몇 인원의 증언을 살펴 보았다.
직접 그 당시를 경험하지 않은 내가 무엇이 틀렸다 맞다하는 것은 위험한 판단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낮은 계급 군인은 정말 용감하게 잘 싸웠다는 것이다.
문제는 별로 나이 차이도 없으면서 높은 계급인 대대장 이상 지휘관들의 소위 전술능력 부족과 사명감이나 책임감이 너무 미약한 것, 나아가 병력을 놓고 본인들만 한강을 건너가 버리는 있을 수 없는 행태가 고스란히 이 서울 철수작전간에 다 노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탱크를 잡을 무기가 없었다고 하지만 문산일원에서 제15연대의 육탄공격이나 재래식 공격으로도 얼마든지 전차를 무력화 시키고 진출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다 했다.
하지만 의정부 축선의 부대들은 그런 능력이나 지휘통제가 부족해서 서울로의 진출을 너무 쉽게 허용하고 말았다고 한다면 지금 하늘에 있는 그 당시에 전사한 인원들이 나에게 뭐라고할지 두려워 진다. 또한 공과 사실에 있어서도 사실 제1사단의 공이 너무 포장이 되고 그 당시에 제5사단 제15연대(나중에 제1사단 제13연대로 통합이 되지만)의 분전은 대단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왜 전사에는 적의 탱크는 무법자처럼 묘사하고 있을까?
혹시라도 여기 등장하는 증언하는 분들이 과장해서 그런 말을 했을까?
2. 소련군 군사고문관 라주바예프의 보고서
여기서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전쟁 보고서'를 통해 서울 함락까지의 그들의 제1단계 작전결과에 대한 내용을 들야다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6월27일 아침 9시에 제3 및 제4보병사단과 제105땅크여단이 공격으로 전환한다.
그당시에 제4사단은 수유리에 제105땅크여단은 정릉 유원지 입구에 제3사단은 청량리부근을 확보한 후에 밤 11시에는 광진구 화양동부근을 점령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6월28일 새벽에 보병은 서울의 불암산(527고지)을 확보하고 4시 30분부터 30분간 공격준비 사격을 하여 동북방으로부터 서울로 진입하였다.
새벽 6시에 서울로 진입한 땅크여단은 방송국, 우체국, 전신국 및 여타 행정기관을 점령하고 아침 8시에 제4보병사단 제18연대가 서울 북쪽 변두리를 그리고 주력은 서울의 북부와 중심지역을 점령하였다. 제3사단은 서울을 남쪽으로 우회하여 오후 4시 무렵에 이촌동, 한강교와 지금의 원효대교 사이를 점령하게 된다.
이때 국군은 전투장비와 탄약을 버린 채 한강 남쪽으로 황급히 퇴각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군의 각 사단장들은 서울에서 퇴각하는 적을 적극적으로 추격하거나 한강 도선장을 점령하지는 않은 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모호하게 행동하였다. 또한 제105땅크여단 예하부대들도 서울을 점령한 후 3일동안 적을 추격하지 않은 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러써 우리에게 한강의 남쪽 강변을 강화하고 교량을 파괴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땅크여단은 7월 1일에 사단으로 개칭하였으며 우리의 포격과 사격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한강을 도하 강의 남쪽 강변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 병력의 약 35%가 전사 혹은 부상당하였다고 한다. 다른 부대들의 도하 역시 7월 3일 야간에서야 수행되었고 공병부대와 지역주민들의 힘으로 교량을 복구하였다 한다.
반면에 남쪽으로 우회한 제3사단은 6월 30일 새벽에 옥수동과 자양동 지역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오후 1시 무렵에 신사동 일대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7월 1일 아침까지 사단 병력의 50%가 남쪽 강안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사단은 한강 도하 이후 수원을 공격하라는 명령에 따라 공격으로 전환하였으나 성남의 둔전리일대에서 아군의 기습적인 측방 역습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7월 5일 저녁 8시 경에 수원은, 북쪽으로부터 공격한 제105땅크사단과 제4보병사단에 의해 해방되었고 하며 원래 땅크사단은 7월 1일까지 수원을 점령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7월 4일 아침에야 사단 주력이 한강 도하를 완료 하였다 한다.
수원으로 진출간에 아군의 지뢰에 전차 2대가 파괴되고 1대가 대전차포에 파괴 당하였다 한다.
이 서부전선의 전투 기록에 우리 아군이 문산벌에서 그렇게 많이 격파했다는 전차 잡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 일부로 그런 것인지 의도적인 것인지 모르지만 오산의 죽미령에서 미군 스미스부대와의 전투 기록도 보지못했다.
중부전선의 기록은 북한군 제12, 2보병사단의 작전에 대해 6월 27일 공격을 재개하였으며 양구-인제에서 홍천을 공격중인 제12사단은 종대대형으로 진출하다 제31보병연대는 군자리 고개에서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1차 멈칫하고 6월29일이 되어 오후 5시경에 아군을 격파하고 홍천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나머지 양개 연대는 6월 29일 저녁 8시까지 성산리 남쪽 고지에 대한 공격을 4차례 감행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기록하는데 아마도 말고개 전투를 의미한다고 보며 여기서도 전차의 파과나 자주포의 파괴등 그들이 입은 심대한 피해 기록은 없다. 따라서 6월 30일 오후 6시에 홍천을 피탈하고 7월 2일 아침 8시에 횡성을 오후 1시에 원주를 피탈한다고 되어 있다.
반면 춘천에서 우리 제6사단에 혼이 난 제2사단은 '50. 7. 1일부터 김량장리(용인)방면에서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당일 경기도 광주 원당리까지 진출 하였다. 여기서 주요고지마다 아군의 기습으로 진출 속도가 지연되고 7월 2일 아침 8시에 도시 점령을 위한 공격을 개시하여 10시무렵 김량장리를 피탈하였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이들은 도하가 지연되어 뒤늦게 따라온 야포와 자주포를 집결시키고 부대를 재정비한 후 7월 3일 아침에 공격을 계속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교량폭파가 주는 유불리에 대한 평가다. 만약 그들이 도하장비를 가지고 있었다든지 아니면 우리가 폭파이전에 그들이 점령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그리 길지않았다고 느껴지는 점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소련 고문관은 서울점령까지의 작전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먼저 우리의 작전결과에 대한 보고서 요약이다.
첫째 : 일정한 작전적인 고려 없이, 단지 방어전단과 그 직후방에서의 저항만을 염두에 둔 방어선이 구축 되었고, 또한 적절하게 고려된 방어계획이 부재하였다.
둘째 : 전투행동 과정을 통해 볼 때 전체 장교와 부대에 대한 교육훈련 수준이 매우 낮았다.
셋째 : 고지 방어시에 축차적인 예비 사격진지가 구축되지 않았다.
넷째 : 일반적으로 대대, 연대 및 심지어는 사단 예비전력까지도 소단위로 분할되어 투입되었으며 전선 혹은 인접 전선에 배치된 현역부대들과의 필수적인 협조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에 따라 에비전력을 결정적 목표에 투입하는데 실패하였다.
다섯째 : 아군의 포병은 인민군의 포병 포격에 극히 민감하여 특히 60mm 및 81mm 박격포의 경우에는 포격을 받게 되면 즉각 사격을 감소시키거나, 진지에서 철수해 버렸다.
여섯째 : 보병의 60mm 박격포, 60mm 대전차로켓포, 57mm 무반동포 등을 충분히 보유하였으면서도 방어전에서 이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길지 않은 종심을 따라 운용되어 전차 및 자주포에 의해 파괴되거나 포병의 포격을 받고 유기되어 버렸다.
다음은 북한군에 대한 기록이다,
첫째 ; 잘 조직되고 훈련된 군관요원들 및 병과부대들 덕분에 반격을 계획대로 진행하여 38선상의 아군 방어선을 전 전선에 걸쳐 와해 시켰다.
둘째 : 전투행동의 지휘가 평양으로부터 직접 이루어지도록 계획하였다.
이로인해 통신장비가 부족하고 전선과 총참모부가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부대의 효율적인 지휘를 곤란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상급 지휘관의 명령이 없을 경우 부대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였다.제2 및 제12사단)
셋째 : 공격작전 전 기간 아군에 대한 추격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인해 아군이 유리한 지역에서 방어선을 재구축할 수 있도록 하였다.
넷째 : 서울을 점령한 후 각 부대가 행한 극단적인 완만한 행동과 개별부대 지휘관들의 임무 유기로 인하여 아군은 한강을 도하하고 교량을 파괴하였으며 남쪼 강변에 방어선을 조직하여 인민군의 진격을 늦추게 되었다.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몇가지 반복되는 잘못을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 준비 되지 않은 지휘관과 부대훈련이다.
이 문제는 당시의 주요지휘관의 연령이 그렇고(30대 초반) 실제 정상적인 군구조 속에서 편성되고 훈련되지 못했다는 것은 짧은 당시의 군의 연역에서는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둘째 : 지휘자의 전투의지와 사상적 문제가 크나큰 작전결과를 가져왔다.
흔히 맣하기를 '병사는 용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용감성은 무모한 희생을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 병사를 지휘하는 자들이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어 중대장이 도망치고 연대장이 공백이고 철수한다면서 병사들은 알아서 가라하고 본인들은 먼저 행주나루를 건너가는 그 있을 수 없는 현실이 증언자들의 입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 "가능하면 살아서 남쪽 시흥에서 만나자"는 그 결별선언(?)이 눈물나기만 한다.
셋째 : 한강선 방어에 지휘의 공백이다. 도대체 누가 계획하여 통제하는 것인지 혼성 사단을 편성하여 방어하라 해놓고 그 다음은 아무 것도 없는 소련군 고문관의 증언대로 소부대대로 싸우니 통합전투력이 나오겠는가.
넷째 : 초기 전투의 패배가 무기체계라는 빌미는 이제 더 이상 변명의 꺼리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에 보유한 대전차 무기로 얼마든지 소련 전차를 잡을 수 있었다. 소련군 고문관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이 제대로 안되어 종심깊은 운용이 안되었고 철갑탄을 준비도 안한 것이 누구의 잘못인지 묻고 싶다. 그런 와중에도 제15연대의 문산벌에서의 대전차 공격을 귀감이 되는 것인데 그런 내용이 소련군 기록에도 없고 우리의 기록에도 미흡하니 그 진실을 다시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 도대체 병사를 놓고 한강을 먼저 건너간 고위 지휘관이 누군지 이제는 밝혀야 한다.
행주나루일대에서 무려 2,000여 명이 우왕좌왕하다가 숨져 가거나 포로가 되고 철수한다는 이야기도 없이 각 부대별로 알아서 하도록 한 문제는 '군의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도 그냥 지나가서는 안되는 문제다.
3. 유해발굴 관련 탐사와 탐문결과
서울시내는 나의 고향이다. 내가 초중고를 이곳에서 나왔는데 국립현충원 서달산이나 성남고의 용마산이 내가 놀던 곳이었다.
한강변에서는 고기잡기 하고 여름날 멱을 감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누구하나 이런 곳이 전투현장이란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군에 들어가서도 중령을 달고 대쟁장이며 인사참모까지 하고 있어도 몰랐고 대대장 시절 우리의 작계진지가 전투현장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사관학교에서나 군사교육기관에서 배우던 전사에서도 그 교훈이나 전술적인 면에 중점으로 가르치지 어디서 얼마만한 피해가 발생하여 어떻게 되었다는 그런 내용이 없다.
따라서 서울 지역에서의 유해를 찾기위한 탐사나 제보자 등을 찾는 다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게 요란한 전사가 숨어 있지만 유해를 찾는 것은 불과 10여구 내외다.
아니 한강 백사장에 다 묻혀 큰 홍수에 다 떠내려 갔던지 아니면 무자비한 개발에 밀려 그저 그 속으로 다시 묻혀버렸느지 아니면 모두 발굴 되어 화장되어 자연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가 없다.
창동에서 미아리, 미아리에서 한강변에 이르는 주요 고지군은 다 올라가 돌아보았다.
강변도 행주나루, 마포나루, 광나루, 동빙고, 서빙고등 그들이 도하 아니면 우리가 쪽배나 널판지를 이용하여 도하했다라고 하는 곳은 다 가보았지만 현재 원형이 보존 되어 잇는 곳은 한 곳도 없다.
물론 행주나루나 이산포 지역은 강변은 그래도 살아 있지만 참전용사니을 대동하고 현장을 가보니 그때의 강변이 아니란다. 위치만 맞는 것이다.
우선 의정부 호원동의 회룡사-사패산 능선, 수락산-불암산 능선, 북한산 능선은 지난 19년간 적어도 3회 이상은 다 올라가 보았다. 특히 불암산은 등산객에 의해서 제보가 오고 불암산 우측 자락 또한 제보자의 신고로 실제 출동하여 현장 확인과 유해발굴을 해 본 적이 있고 6구의 유해를 발굴 하기도 한다.
여기에 5구는 군인의 것이지만 1구는 민간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누군가 타살하여 자루에 담아서 산 등산로 패인 곳에 오래 전에 매장한 점버를 입고 있는 남성의 유해로써 경찰에 인계했다.
1주간의 발굴 기간에 이곳 일대, 중계동과 별내동 일대의 노인정과 마을회관을 찾아서 사실관계를 찾으려 했으며 노원고개와 태릉지역까지 광범위한 조사를 해봤다.
중계동 지역은 전쟁은 있었다고 하지만 일방적으로 북한군이 밀고 내려갔다는 이야기가 전부고, 불암산에 일부 군인이 숨어 들어가 홍길동처럼 행동하여 '호랑이 부대'라는 애칭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불암사로 들어갔다. 오르는 길 우측으로 푯말이 서 있는데 호랑이부대의 이력이 기록되어 있었다. 주로 육군사관학교를 방어하던 인원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지속적으로 유격활동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신고 장소에 도달하니 등산로를 따라 물줄기가 있고 소나무뿌리가 길게 자라 발굴하기에 곤란한데 신발끝이 보이고 있다. 하루 종일 경찰 입화하애 발굴해 보니 겨울용 점버를 입고 있는 건장한 남자인데 꽤나 오래 전에 묻은 사체로 결론이 나서 경찰에 인계헸다.
5구는 노원고개 위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바로 얼마 안가서 비로 산이 약간 흘러내린 곳에 탄피와 실탄등이 나와 주변을 확장하여 발굴 결과 5구가 나오는데 소련제 모시나칸트탄과 중공제 방망이 수류탄도 나오고 초기 전투가 아니라 그 이후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 또는 중공군으로 식별 되어발굴하여 정밀감식을 의뢰하여 진행 중이다.
북서울 숲에는 약 50여개의 개인호가 남아 있지만 그 당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상태이고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번동의 배봉산이나 신내동의 봉화산에는 20여개의 개인호가 남아 있다. 특히 봉하산 주변은 그 당시에 논에 야산은 배밭인데 군인들이 배밭으로 들어와서 봉화대가 있는 곳에 잠깐 머물다 떠났는데 큰 부대가 아니라 몇명이서 움직이는 군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곳의 노인정에는 참전용사 한분이생존해 계시면서 실제 본인이 이곳에서 학도병으로 군인들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가 전쟁에 참여 했다면서 동네에 전투는 없고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고 한다.
전농동의 배봉산은 이곳을 지나 중랑천을 건너면 광나루로 가는 길이라 많은 군인이 지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장안평 일대와 군자동 자리는 그때만 해도 하허 벌판이고 군자동쪽은 강변에 고구마밭이 많았고 그렇게 주민이 많이 살지않아서 전쟁 목격자가 적었다.
바로 우측에 용마봉(348m)과 아차산(287m)이 있고 남북으로 길게 능선이 다리면서 북쪽에는 망우공원묘지가 있고 남쪽에는 아차산성이 있는곳이다.
망우공원묘지에 가면 묘비에 많은 총탄자국들이 전쟁의 상터를 안고 있는데 들리는 소문이 6.25전쟁 당시에 많은 사람이 이곳에 숨어들었다고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가서 정밀 탐색을 해보고 오래전의 관리인등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초전에는 아니고 9.28 서울 수복당시에 우리 군인들이 많이 이곳으로 밀고 올라 갔고 1.4 후퇴시부터 중공군이 들어와 있는 시기에 이 산속에 유격군이 실제 많이 숨어서 활동을 했다고 증언한다.
나. 망우리 묘지는 일제시대 확대 조성되게 되는데 그 이력을 잠깐 소개하면 이렇다.
일본은 우리의 장례문화에 문제점ㅌ중에 많은 부분이 무분별한 장지선정에 있다고 보고 전국의 몇군데를 공동묘지 지역으로 정하게 되는데 서울지역은 1929년에 신당동과 아현동의 공동묘지를 홍제동과 수철리로 이전하게 된다.
1933년에는 서울의 확대로 시내에 남게 된 공동묘지를 외곽으로 이전시켜 턱없이 모자라는 묘터를 늘렸다. 이렇게 해서 망우리와 미아리의 공동묘지는 전국에서 가장 큰 묘지로 각광받게 된다. 당시 이태원동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4만여기가 들어서서 포화상태가 되었다. 이 이태원 것을 이전하게 되는데 이때 유관순 열사의 묘도 훼손되게 되었다고 한다.
미아리 공동묘지는 이제 흔적도 없다.
이곳은 공동묘지이면서 격전지로써서울 방어에 매우 중요한 우치가 되는데 서울지역 재개발로 그 흔적조차 없으며 미아리고개 좌우측에 70년대에 그나마 남아 있던 전쟁의 흔적마저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아루런 단서를 찾을 길 없다.
당시에 수도사단 제3연대 제1대대에 근무했던 김세철용사님('08)의 증언이 미아리 일대에서 적 전차를 잡으라는 연대장 함준호 대령의 명령으로 특공임무 수행자를 모집하여 10명이 지원하였고 이들이 적전차 파괴임무를 부여받고 육탄공격을 감행 하였으며 6명이 죽고 4명이 복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그 위치는 흔적도 없다.
용인 동천동에 살고 있는 김영채('08)씨의 제보도 있다. '50년 6월 말에 국군 3명이 후퇴간에 하얀 적삼으로 환복을 하고 내려오다 동네 고정 빨갱이들에게 들켜 인민군에게 넘겨지고 삼선동 지역에서 총살을 당해 계곡쪽에 매장(한성대 부지)되었다는 제보로 현장을 확인결과 재개발 지역으로 발굴이 가능하여 1구를 찾아냈다.
나는 돈암동 미아리 일대에서 중학교시절 신문배달을 6개월가량 한 적이 있어 이곳 지리는 그래도 골목까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다음에 유해를 찾으러 가보았더니 천지개벽이다.
미아리의 지명 유래는 당당히 의미가 있어 소개한다.
공식적인 기록은 조선말 고종 초라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 고개를 미아리 고개로 불러서 고개 이름이 동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되너미 고개가 한자로는 돈암현이라 한다. 이 외에 미아 7동에 있는 불당곡에 미아사라는절이 오랫동안 있어서 이 절 이름이 동네 이름이 되었다는 설도 잇다.
명칭 유래에 대해 몇가지 더 알아보면 첫 번째는 병자호란때 되놈들이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침입해 왔다고 해서 되너미 고개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과 두 번째는 돈암동 방면에서 길음동, 미아동을 지나 의정부로 이어지는 길 목인 이 고개가 끝나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이곳 일대에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시내에서 사람이 죽으면 되너미 고개를 넘어가게 되는데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히면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하여 되너미 고개를 미아리 고개로 불렀다 한다.
유명해진 것은 '단장의 미아리 고개'로 인데 한국전쟁당시에 북한 공산당들에게 납북되어 끌려갈 때에 이 고개를 넘어 끌려갔다고 한다. 그래서 대중가요로 이 노래가 나왔고 유명해지면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그 후로 장충공원 장충단에 있던 을미사변 당시에 순국한 우리의 용사들을 모두 이러한 곳으로 옮겨버려 그 정통성을 끊어버리려 많은 노력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태릉이든 그리의 동구릉이던 가면 조선시대 왕들의 묘비나 상석에 많은 총알 자국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전사하여 매장되었다는 제보나 증언은 아직 듣지 못했다.
초기 전투시 남양주의 동구릉과 금곡지역 벌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그 흔적으로 앙릉안에 소나무에 탄흔자국이 많이 있다하여 전수조사를 하였으나 신통한 증언은 받지를 못했고 그 나무마다 남아 있는 흔적은 일부 확인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몇건의 제보가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고 이걸 기초로 정말 한구라도 찾으려 노력해 왔으나 만족할 성과는 없다.
은평구 녹번동에 살고 있는 이기성('08)씨는 몇년전에 서울대학교 병원 근처에 하수도 공사중 유해와 유품(철모)을 발견하여 현장에 매장했으며 유해의 골격이 매우 크다는 제보를 하였다. 확인결과 매장 위치는 장례식장 앞 울타리주변 잔듸있는 곳으로 추정 되는데 이곳도 이미 한차례 또 정화작업이 진행 되어 찾기가 곤란했다. 바로 그 일대에 당시 대학병원에서 숨져간 용사님들의 "자유의 추모비"가 있다.
거주지를 밝히지않은 이기성('08. 70)씨는 현재 전쟁 긴념관과 미군부대 사이에 '50년 6월 28일에 2구의 국군 용사를 매장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는데 위치가 이미 변하여 발굴이 제한 되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조재원('08. 79)씨는 현재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지역에 셋강이 있었는데 조개 잡으로 갔다가 1구는 강뚝에 1구는 강바닥에 있었다고 제보하며 지금의 위치는 하늘공원이나 자유로 도로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으나 발굴이 제한 되었다.
다. "성동구 하왕십리 안정사 절에서 백우스님이 연락이 왔다. 5구의 국군 유해가 있다"
임무 수행중 정말 고마운 전화며 많이 들어왔던 사찰에 보관된 유해라는 의미에 바로 달려갔다. 이절은 규모는 적었지만 조선의 개국공신 무학대사와 인연이 있는 절로써 망우리에서 한양을 바라보고 들어오던 첫번째 당시 사찰이었다 한다.
이유야 어쨌든 달려가 보니 처음으로 6.25당시 화장유해의 실체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기막힌 기허ㅣ였다. 5구의 유해가 목곾에 화장해서 들어가 계시는데 그당시의 광목에 쌓여지고 누런 종이에 씌여진 글씨에 명확하게 신원이 기재 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실체가 확인되는 6.25당시의 화장 유해"
말로만 소문으로만 들었던 유해가 화장되어 원형 그대로 어떻게 절에 남아 있었을까?
사실 우리에게 연락을 취한 백우스님도 그 내력을 알지 못하고 재개발지역이 되어 절을 이전하게 된 상황에서 절의 오래된 지장전의 깊숙한 곳을 정리하는 과정에 유해들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오래된 신도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전쟁이 나고 언젠가부터 전사한 유해들이 자가봉송되기 시작하는데 그 당시에 피난이나 다른 이유로 유족이 받지못할 경우에 인근 사찰에 맞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는 바로 큰절을 올리고 경례를 했다.
하지만 바로 모셔갈 수가 없었다. 절에서 그동안의 관리한 보상이라할까 응분의 보상을 바라기도 하는 것같고 이렇게 음지에서 나왔는데 그냥 보내드릴 수 없다며 날짜를 잡아 지장기도를 하고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돌아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다시 절에 찾아가 주지스님을 만나 우리의 사업 취지를 설명해 드리고 양해를 구했다. 그결과 혼쾌히 승인을 해주셔서 아무조건없이 지장기도도 100여만을 절에서 부담하여 지내는 것으로 하고 어느날 현충원으로 모셔왔다. 그리고 이 5인(소위 김경섭, 육군 일병 목좌균, 목인준, 정용구, 해군 김택영)의 유해는 이후에 3인의 유가족이 찾아져서 다시 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2인은 현재 유족을 기다리는 중이다.
라. "서울대 병원자리에서 60여구의 유해가 나왔다."
이 사실은 지금 사실 미궁에 빠져있는 실체이다. 어느날 해화경찰서에서 연락이 발굴단으로 왔다. 서울대 병원안에 과거 황우석 박사 연구동(지금은 다른 용도로 변경)을 건설하기 위해 터파기를 하는데 엄청 많은 유해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와 이거 혹시 서울 피탈 당시에 병상에서 전사한 80여명의 국군이 아닐까하는 기대감에 바로 달려가 현장을 조사해 보았다. 아뿔사 그런데 나오는 유해들이 두개골도 있고 실제 골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해도 있다. 사람이 아니라 무슨 동물 실험장이나 일본군의 731부대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뼈는 날카로운 도구로 부분 절단된 모습이 뚜렸하고 어떤 약품처리를 했는지 인체의 가죽이 그대로 원형대로 있고 어린아이로부터 나이먹은 사람까지 각 단계별로 또한 여성도 남성도 있다.
이 자리가 원래 연못 자리였고 그걸 메꾸어 건물을 지었다가 허물고 터파기를 하는 과정에 나왔다. 군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유해는 비상통로에 남아 있던 1구로써 통일화가 있고 일부 탄피도 있다. 이걸 가지고 경찰은 우리에게 넘길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이게 아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 숨어 있는데 분명 경성제대시절도 이곳이 그런 곳이라니 나이먹은 의사들은 분명 알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모두가 함구하고 있다. 수인번호처럼 나무에 새겨진 번호판도 있었다. 분명 대학에서 적어도 사람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증거다. 골이 그대로 보존돈 모습, 그리고 다리뼈나 팔뼈에 사람가죽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 살아 있는 사람을 잡아다(?) 이런 짓을 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는데 다시 그곳에서 연락이 왔다. 정현주라는 분이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08년 10월부터 국제협력단 건물중 제1 별관(과거 미술대)을 철거하고 2별관을 철거중 벽를 허물고 평탄 작업중 방공호로 추정되는 호속에 4~5구의 유해가 나와서 보관하고 있다는 제보였다. 이 또한 성격이 같은 유해로 우린 경찰과 협조하도록 조치하고 말았다. "내가 19년간 업무를 한 유해발굴 사업에서 가장 큰 미지의 사건이다."
이곳의 관련제보는 또 있다. '09년도에 종로구 명륜동에 사시는 서병국(69)씨의 말에 의하면 본인이 어릴 때인데 국군이 밀리고 있는데 서울대에 입원해 있던 일부 부상병들이 동네로 숨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네 빨갱이들이 붙잡아 처형한 것을 동네사람들이 서울 의과대학 뒤에 야산이 있는데 가묘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국군 지휘관도 1명이 붙잡혀 인민군이 심문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학교 지하실에 숨은 국군을 사살하려고 수류탄으로 공격 하였다 한다.
마. "경기 오산에 살고 있는 참전용사 최하용('09. 79)씨는 서빙고에서 60~70구를 매장했다"
참전용사님은 병으로 처음 전쟁에 참전하여 갑종장교로 임관하여 1201공병단에서 근무했다. 전쟁이 종료되고 '55 3월경 서빙고동에 여군중대 및 훈련소 신축공사중 전사자를 무더기로 발굴하여 당시 교회옆 비탈진 곳에 매장 하였다고 한다.
사실 이 증언도 매우 신뢰성이 높았던 증언이다. 왜냐하면 한강교 폭파로 도하를 못하고 있던 병력들이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 도선을 기다리려고 대기하게 되는데 인민군이 밀어닥쳐 모두가 총받이가 되었다는 참전용사의 수많은 증언이 있었다. 과거 중경고자리가 그 일대로 여기에 꼭 흑염소 집단 매사장소처럼 뜨거운 태양아래 썩어가는 그 시신이 모두 국군이었다 한다. 그런데 그 약도를 가지고 탐사해보니 천지가 개벽해 버렸는데 어디서 무엇을 찾겠는가... !
"아~, 서울이여!"
어느날 한분이 현충원에 우리를 찾아 오셨다. 하남에 사시는 차명주란 분이였다. 전쟁 당시에 어린 나이였는데 국군이 지금 용산 우체국 뒤로 가면 국방부 들어가는 길이 있고 우측은 미8군 자리인데 이 일대가 옛날에는 야산이었다 한다. 한강을 도하하지 못한 병력이 인민군에게 죽어서 100여명이 있는데 얼마나 냄새나고 개들이 물고 다니고 난리가 아니였다 한다. 그러니 인민군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인근 야산에 매장하는데 본인도 직접 참여하여 매장을 도왔다고 한다.
요청하면 함께 탐사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도 수많은 제보가 있었고 '00년 초기부터 많은 조사를 해 왔던 곳으로 지금 불럭 울타리로 경계가 구분되어 있다.
사실 그 후에 토지구획이 이루어지고 개발과 주택지로 변하였고 군부대가 조밀하게 들어서 이미 현장이 훼손되어 찾을 수가 없는 곳이였다.
"당시에 서울의 야산에는 군인이 죽어 있지만 피난민들 촌이 들어서며 모두 없어졌다 한다."
경희대 뒷산, 성균관대 뒷산, 서울대 병원자리, 이화동을 끼고 서울 도성일대, 남산, 옥수동의 매봉산, 성동구 응봉동의 응봉, 고려대 뒷산-미아리 고개에 이르는 구간등 많은 지역을 탐사하였다.
모든 지역에 전쟁의 흔적은 조금은 있으나 발굴할 만한 곳은 찾지 못했고 다만 한양대학교 뒤산이 옛날 피난민촌이었다가 철거되었는데 그곳에 전사하여 묻혀진 용사가 있다하여 행당동 노인정을 찾아 수소문을 하고 실제 위치를 확인하여 발굴 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바. "하지만 창동이나 미아리 격전지에는 흔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기록을 중시하는 문화가 살아 있었던 민족이다. 조선시대 왕조실록이 그 대표적 자산이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서는 이 땅에 진서가 단 한장도 없다고 한다.
백제의 기록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3천궁녀와 의자왕의 애로물적인 그러면서 타락의 대표상인 마냥 적어진 이야기가 우리에게 낯익은 것이고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에 펼쳐지는 자식들의 행태가 전부인양 되어 있다.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에 그 시대의 기록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어찌 우리 민족은 지워버리기를 좋아하고 그래서 진취적인 기사을 가졌다는 역설적인 해석이 맞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서울의 관문에서 벌어진 6.25전쟁의 흔적은 이곳에는 찾지를 못하였지만 그 인근에 사는 나이드신 분들의 증언에서 전쟁은 분명했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좀 찜찜한 것은 제대로 전투하는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이 전차포 몇 방 쏘고 박격포가 몇 발 떨어지면 인근의 국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보 1호인 숭례문에 관련해서도 마찬 가지다. 아니 바로 문앞에 서 서 좌우측의 축성을 보면 총탄자국과 박격포탄같은 퍄편의 탄흔이 엄청나게 많고 동대문도 그렇다. 하지만 안내 간판에 그 축성된 돌에 남겨진 흔적이 뭔지 아무런 해명이 없다. 잘못하면 일본이 한반도를 침입해 오면서 남겨진 흔적이라고 혹시 문화해설사가 설명하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이유는 우리는 일본이 저지른 것이라고 해야 시선을 받으니 그런 해법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6.25전쟁의 상처다. 그런대도 어디에도 그런 설명은 없다.
사. 은평구의 진관동에 있는 북한산 자락의 진관사란 고찰에 가면 절 바로 들어가는 입구 좌우측에 석축에 탄흔자국이 많이 남겨져 있다. 하지만 이 절에는 일제점령기에 사용된 태극기 원본이 하나 보관돼 있는데 이에 대한 전시나 자랑은 많이 한다.
하지만 진작 6.25전쟁의 6자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바로 위에 응봉이 있는데 이 응봉으로부터 비봉 향로봉 구간에도 아직 전쟁 당시의 개인호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런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태고사 지역 일대는 우리 아군의 1개소대 병력 정도가 은거하며 북한산에서 유격전을 수행했고 모두가 장렬히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본인의 실명을 밝히는 것을 거북스러워 하는 지극한 나이를 드신 분이 직접 목격했다며 절 마당에 죽어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 일대 어딘가에 매장 되었다고 한다. 절에 가서 수소문하면 알게 될거라고 하여 엄청 큰 희마을 갔고 태고사 인근에 있는 절은 다 들어가 사실관계를 확인하였으나 그런 사실을 알만한 노스님도 없고 관심도 없어 보였다.
다만 노적사에 들어가니 현 주지 스님이 이곳 출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관심이 있는 스님을 만났다.
임진왜란 당시나 병자호란 등에 관련된 전쟁이야기며 당시의 승병들이 축성한 내력과 병력 배치를 알고 계셨고 노적봉에 인천 앞바다에서 함포가 날아와 떨어진 흔적이 그대로 있다는 말씀도 하며 전쟁 당시에 많은 인원이 산속에 은거하여 유격할도을 하다 숨져갔는데 그 흔적은 찾기가 힘들다 한다. 다만 바위 밑이나 혹시 동굴이 있다면 그 동굴속에 나아 있을 수도 있을 거라 하였다.
30년 전만 해도 철모나 탄피 탄알, 전투화, 박격포 등이 보였는데 지금은 숲도 우거져서 보이질 않는다는 설명이다. 태고사 주변의 이야기는 본인은 듣지 못했고 다만 지역이 안으로 쑥 들어가 있어 그럴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고 하신다.
며칠전 창동에서 집단 유해 매장이 발결되어 관심을 끌었다.('22.11) 나는 혹시나 군인들의 유해가 아닌가 하여 관심을 기울렸지만 유품에 전쟁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럼 어덯게 30여 구의 유해가 집다으로 발견되었단 말인지 이제는 찾아가서 확인할 책임도 없고 아쉬움만 남았다.
"북한산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
태고사 위로, 북한산성계곡 길을 따라 백운대(836m)를 거쳐 남서쪽 능선 또는 산성을 따라 이동하면 북한산성의 대동문이 나온다. 정릉이나 수유리 방향에서도 오를 수 있다. 이곳 문의 좌우측을 살펴보면 역시나 탄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니 서을 피탈후 수복까지 3개월간의 유격전과 '51년도 1.4후퇴시부터 다시 3월 15일 서울을 재수복하는 기간에 이곳은 우리 국군뿐만 아니라 북한산 뒷편은 골든선이라 하여 미군이 진출하고 많은 병력과 화력이 집중되어 탈환 및 방어한 곳이기에 분명 뭔가는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소나무 군락이나 당시의 가람이 보이지 않는 것인데 이를 두고는 일부 인원은 미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다 불타버렸다고 철없는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었다.
'물에 빠진 분을 구하여 주니 지갑 내놔라'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지금 우리는 다시금 해방이후에 격었던 그 이념의 갈등에 이제는 후손들이 얽혀서 또 다른 이념논쟁으로 비화하여 갈 길이 먼데 멈칫 거리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역사를 잃어버리면 죽은 민족이라는데 이 삼천리 금수강산은 아직 이분법이 난무하고 당시를 증명하는 분들이 세상을 떠나니 죄인처럼 살았던 분들의 한풀이 장이 되어가는 느낌마저 든다.
총을 잡고 자유 민주주의를 그리고 대한민국을 지키려 싸운 것이 마치 강대국의 사주를 받아 민족해방을 방해한 것처럼 되어 가는 현실이다.
하지만 아무런 기록도 없다. 전사책에만 있는 기록은 기록으로 가치가 없다. 군인만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면 이 역사는 잘못된 것이다. 모두가 피흘린 역사도 알아야 한다.
"드디어 강북지역 북한산에서 유해를 발굴 하다."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하고 많은 시간이 지난 '10년도에 어느 등산객이 바위 밑에 전투화가 있고 뼈도 보인다는 제보를 해 왔다.
사기막계곡 깊은 곳이다.
넓적 바위가 있고 그 밑에 굴은 아니지만 비눈을 가려줄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있는 곳이다.
주변에 풀들이 자라 뿌리가 무성하게 자라있고 활엽수 나무들의 뿌리도 들어와 낙엽과 함께 수수북한 모습인데 그 속에 유해가 있다.
한 등산객(이00씨로 51세)이 아마도 산삼이나 이런 것을 캐려 들어와서 비가 내리니 잠시 피난처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일어나 보니 이상한 것이 보여 확인해 보니 전투화 잔해가 보이고 수류탄이 있었다. 다시 상세히 관찰하니 사람뼈도 보이는 것같아 신고를 하게 되었고 우린 출동하여 현장확인과 발굴 작전을 벌여 1구를 찾아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고 풀뿌리들이 침투하여 유해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러니 사실 피아판단도 어렵고 언제 전사하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서울지역에서 그것도 국립공원인 북한산에서 처음으로 찾아낸 유해라는 점이 앞으로 얼마든지 유해는 발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아. 서울 강남에서는 '07년도에 현충원 뒷산에서 2구가 발굴 되고~
우리는 이 보다 먼저 강남지역 동작동 현충원이 있는 산 28번지에서 '07년도에 유해 2구를 발굴한 적이 있다. 지역에 살고 있던 이재석씨(75세)의 제보로 본인이 17살에 이수교에 살았고 전쟁이 나고도 피난가지않고 있으면서 이곳 현충원일대의 전투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야 현충원이 아니고 논밭으로 되어 있고 강변에 나가 멱감고 고기잡아 먹었던 시절이니 전쟁이 나서 한강교가 무너지고 그 많은 군인이나 피난민이 이곳을 통하여 과천으로 빠져 나가는데도 강단이 있던 아저씨는 남아서 동네를 지켰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도망가지 못하고 숨어있던 군인인지 경찰인지 2명을 데리고 와서 묘지 부근에 데리고가 총으로 쏴 죽이는 모습을 그대로 목격했다고 하며 현장에 직접 오셨다.
우리는 땅 소유주와 협조하여 발굴결과 전투화 밑창등과 2구의 유해를 발굴해 냈다. 하지만 두개골이 완전히 풀뿌리로 휘감겨 꼭 야구공 속처럼 스폰지로 되어버려 어떻게 손질조차도 못하는 상태로 남아 있어 당시 서울 지역에 상주하는 그 많은 언론이 취재를 와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쓰라림이 있었다.
사실 그 유명한 해병대 전투지역인 연희고지도 우리가 40여개의 호를 식별하여 발굴했지만 유품마저도 찾지 못했고 인민군의 주요지휘부가 있었다는 이화여자 대학교 야산과 안산에서 흘러 내리는 능선을 따라 봉원동 현저동 대신동 아현동 일대의 산처럼 생긴 곳은 다 들어가 탐사하였지만 초기전투시는 아니고 9.28 서울 수복시 인민군이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무성했다.
강남에는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에 주로 흔적이 아직 남아 우리를 기다렸다.
영등포구의 여의도와 관련된 밤섬이나 노들섬에는 아예 흔적이 없다. 그 이유는 언젠가 언급했는지 모르지만 피난민이 몰려들어 풀 한포기도 없이 완전히 벗겨지고 말았다니 뭐 그런 상황에 유해를 본들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동작구는 현충원 서달산에 일부 개인호와 피탄흔적이 바위에 남겨있다.
사육신 묘에도 일부 개인호가 20여개 남겨져 있어 우리가 발굴까지 했다. 실제 묘역까지도 협조를 구해 발굴을 했다.
성남고 용마산에도 30여개의 흔적이 있어 발굴했지만 현재 공군참모총장 공관 안쪽 부분을 탐사 및 발굴하지 못했다. 이곳도 지역주민의 증언과 실제 경계근무중인 병사로 부터 전해오는 괴담에 비오는 날에 귀신(?)을 보았다는 제보도 들었다.
자.그런 어느날 나는 주말을 이용하여 이화장을 찾고 낙산에 올라 미아리고개를 바라보았다.
요즈음 대세인 미스트롯의 우승자 송가인이 부른 그 미아리 고개는 나는 중학교시절에 신문배달을 하며 거의 6개월간을 하루도 빠지지않고 걸어 다녔던 곳이다.
낙산 성벽은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청룡에 해당하는 곳인데 지금 동대문에서 올라서면 이곳으로 올라선다.
그런데 이 길이 수많은 그 당시에 납북자들을 인민군이 결박하여 끌고 갔었다니 너무도 비극이다.
이유는 성벽밑을 이용하여 걸으면 하늘에서 비행기에 노출이 잘 되지 않으니 그 길을 이요애야 했고 실제 서울을 벗어나 의정부에 이르는 단거리 길이란다.
현재까지 그 성벽을 따라 나는 제대로 알고 걸어본 것은 이 유해발굴 사업을 하면서 한성대 뒤에 살고 계시는 이00이란 분이 이곳 일대에 유해가 매장 되어 있다는 제보에 의해서 걸었지 한 50년 살았어도 걸어본적이 없다.
여기 올라서서 그때 끌려가신 분들의 눈물나는 애환을 그려보고 서쪽으로 보이는 서울의대 병원과 창경궁을 바라보며 서울 피탈시 부상병으로 실려와 있다 진입한 북한군에 무자비하게 죽어가고 휘발류가 뿌려져 전사한 그 숭고한 호국영령님들의 얼굴을 그려보곤 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바로 옆에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자리잡고 지금 성균관이 자리잡고 지금 성균관대학이 생존하여 있지만 그 몇 백년된 아름들이 은행나무들이 이 사연을 알고 있는지...
전쟁 당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했다는 창경궁안의 낚시터를 그려보고 미아리 고개전투시 어느 여관에 잠들다 도망쳐 이곳 창경궁에 이르렀다는 솔직한 당시 지휘관의 증언, 그곳을 경비하러 달려온 헌병출신이 증언, 그리고 밀어 낙친 북한군 탱크의 위용(?)을 그려보며 낙산에서 내려와 명륜동에 도달한다.
차. 나는 중구 회현동, 남대문 경찰서 바로 뒤에 있는 경로당에 3번이나 찾아갔다.
찾아간 이유는 그당시에 이곳에 세브란스 병원이 있었고 서울대 병원 못지않게 많은 부상자들이 이곳으로 실려왔기 때문이다.
이곳으로부터 남산을 끼고 필동에서 동국대, 옥수동의 매봉으로 연결되는 산이 서울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결사항전한 군인들이 전투를 벌인 장소이며 특히 필동에서 동국대 후문에 이르는 구간은 당시 군 시설이 위치한 곳으로 적군이 들어와서 이 일대에서 많은 우리의 부상자나 포로들이 처형되어 남산의 Y지선에 묻혀졌다는 제보가 있었기에 그 사실을 확인하러 이 일대는 자주 가본다.
힐튼호텔이 있는데 일제시대에 그 밑으로 땅굴이 구축되어 있었다.
"남산 주변에 시신이 깔려 있고 세브란스병원에는 차량이 전사자나 부상자를 실고와 그대로 놓고 도망쳐 버리고 북한군이 들어와 모두가 죽어야 했다."
바로 이곳에도 많은 인원이 죽어서 있었으며 수복과정에 모두 처리 되어 그 흔적은 지금 없다. 이곳은 직접 8240부대원인 장기락 참전용사님이 서울에 당시 머물며 직접 목격한 사실이다.
회현동 경로당에서 들은 제보로는 남산경찰서 뒤로 교통부장관 관사도 있었으며 우물도 있었다 한다. 그런데 우물도 흔적도 없고( 아마도 시신이 많이 들어있었으리라 추정됨) 빽빽한 건물만 있다.
"당시 사형을 선고 받고 대기중이던 죄수들은 모두(?) 한강 백사장에 끌려나와 총살 되었다"
서대문 구치소만 있는게 아니고 마포구치소도 유명한 교도소로 많은 죄수들이 일제시대부터 구금되어 있던 곳이란다.
그런데 전쟁이 나고 밀려내려온다 하니 중범죄자들을 차로 실어내 마포강변일대에서 미리 땅을 파놓고 대기하다 그곳에 집어넣고 총살시켜버리고 교도관들은 강을 건너 남으로 내려갔다.
실제 그 임무를 집행한 장본인을 만나 들은 이야기로써 우린 보도연맹의 죽음과 연관선에서 이 문제도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본다.
전시란 분명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고하게 한 생명이 죽어도 좋다는 것은 않일진데 우리 6.25전쟁간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은 그 믿음에 어울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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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서울은 인민군 제1군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인민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이 제105전차연대(-)와 협동으로 철원에서 의정부, 미아리, 창동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에 진입한 것이다.
이무렵 문산으로 공격을 해온 인민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봉일천 선에서 서울로 압박을 가하고 있고 김포반도로 남하한 인민군 제6사단의 1개연대는 김포비행장 부근가지 진출하고 있었다.
한편 조공인 인민군 제2군단은 제2사단과 제12사단이 국군 제6사단의 분전을로 춘천 점령이 지연되고 홍천 북방 말고개 일대에서 저지당하여 그들의 한간선 이북에서 포위소멸의 목적은 달상하지 못했다.
서울 실함시 전선은 김포-봉일천-서울 홍천-대관령-강릉 선에 형성되었다.
인민군은 최초에는 계획대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나 그들이 믿었던 민중봉기가 일어나기는 커녕 국군과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으며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고 그들의 남침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반면에 국군은 불의의 기습을 받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서울을 피탈당했다.
주요지휘관들의 부재와 정치사상적 문제 등으로 고전하고 많은 인명 피해와 장비 손실을 가져오고 전쟁지도 능력의 부재와 재경주대와 예비사단을 서울북방으로 부대별로 축차적 투입하여 상호 지원 부대간의 암투 등이 공공연하게 작용하여 의정부-미아리 축선이 무너지자 한강교량의 피탈을 우려하여 교량을 파괴하였다.
이로인해 교량의 파괴로 서울시만 대부분이 피난하지 못하고 국군은 비록 포위는 면했으나 조직적인 철수를 할 수 없어 와해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때 미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국군을 도와 참전하기 시작하였다.
4. 서울실함의 주요원인 분석
여기서 나오는 내용중에는 미아리고개가 제일 많이 나오고 그중에서도 공동묘지에 배치된 부대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각자 도생을 위해 알아서 철수 했다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물론 병력들이 축차적으로 전선에 투입 되는데 건제도 없고 그저 들어오는대로 재편성해서 여기저기 방어하게 하고 지휘체계도 없었다.
지휘관도 높은 지휘관은 없고 잘해야 중대장이고 소대장들은 그런대로 열심히 현장에서 싸웠다고 본다. 하지만 적 상황도 모르고 부대를 보냈다가 다시 복귀시키고 엉뚱한 노량진 한강변에 배치했다가 다시 복귀시키는 등의 많은 문제점이 정말 사실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따라서 주요 문제점으로 다음 몇가지를 분류해 보았다.
첫째 : 지휘체계의 마비다.
강문봉 육본 전방지휘소장의 증언대로 미아리고개 남쪽 감천여관에서 잠시 잠든 사이에 적 탱크는 서울로 28일 01:30분경에 진입했다. 누가 지휘를 했겠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면 답은 나와 있다.
그러니 제7사 제3연대같은 경우도 동두천으로 갔다가 다시 의정부를 거치지 말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지시와 또 이를 지키지않고 의정부를 거쳐 오다가 많은 손실을 입었다는 증언도 그렇다.
도대체 지금 적이 어디 있는지 아무런 상황 설명도없이 가라는대로 가는 군대였다.
그러니 미아리 고개전투에서는 아예 지휘하는 상급부대장이 없었다고 한다.아니 탄약차에 탄약이 실려 있는데 부상병이 차를 가지고 가버려 실탄이 없어서 싸우지 못했다는 것은(제5사단 제15연대 제2대대 작전장교 장영종 증언) 뭐라 해야 하겠는가?
더구나 위문품으로 들어온 정종을 한사발씩 마셨다는데 전시에 지금 앞에 적전차가 으르렁 거리는데 참 기막힌 증언인데 사기가 진작 되었다고 하니... .
둘째 : 역시 부대에 침투한 프락치들의 농간이 심했다고 봐야한다.
수도사령부 제8연대 제5중대는 26일 아침에 가평으로 갔다가 다시 그 다음날은 청량리로 출동 하라하고 이 과정에 중대장 이석우 대위가 바로 공산당원으로 제주도에서부터 활약한 인원이었으며 제1소대장 안태갑의 제보로 결국 도중에 즉결처분 되는 내용이다.
또한 제2사단 헌병 조한철의 증언처럼 헌병이 낙오자 수집선에서 확보한 많은 인원들이 창경원에 갔다가 많은 피해를 입고 분산철수 하게 되는 장면도 그렇다.
셋째 : 열심히 싸운 인원은 병사들이고 낮은 계급이었다.
먼저 당시는 통신수단이 전무해서 전령을 운용하는 방법이 일반적인데 그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일단 통신수단의 마비가 곧 상급자의 지휘를 불가능하게 하였고 또한 전쟁공포가 심해 연대장도 말없이 철수해 가는 상황이니 참 안타깝다.
하지만 병들고 초급 지휘자들은 가지고 있는 화기를 이용하여 마지막까지 싸웠고 대전차 특공대 임무도 수행하며 적을 저지하려 했다.
넷째 : 편제장비의 조작 미숙이다.
제5사단 제20연대 제1대대 제4중대장 대위 김용림의 증언('77.3.21)에 의하면 미아리고개 우측 공동묘지에 배치 되어 2.36" 로켓포 2문으로 사격하려 했으나 접속부분의 고장으로 한발도 못쏘았다고 한다. 적 탱크가 무적이 아니라 우리의 교육수준이 미흠하였다고 봐야 한다.
다섯째 : 적의 위장전술이다.
제5사단 제20연대 제1대대 제4중대장 김용림의 증언, 제1대대장 김한주의 증언에 의하면 탱크인줄 알았는데 박격포나 포병 사격으로 공중으로 치솟는 것을 보니 차량에 위장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제 서울 시내에 들어온 적 전차는 얼마였을까?
여섯째 : 도하장소에서의 질서유지와 국군의 도하과정에 미스테리는 있다.
제5사단 제15연대 제2대대 작전장교 중위 장영종의 증언에서 서빙고쪽에 배가 11척이 있었고 이중 3대를 군인이 우선 사용토록 노인이 주었다고 하는데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어온 상황에서 과연 물리적 행사없이 군인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는지, 그리고 과연 그것이 맞는 조치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문제다.
5. 민간인 피해현황
가. 서울 서빙고 사건('50.6. 전쟁 발발 직후) : 군경(추정)이 정치범 200여 명 학살
당시 서울에는 일반범을 수감하는 서대문 형무소와 군인을 수감하는 마포형무소가 있었다. 6.28일 북한군이 서울에 진주한 직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은모두 석방했다. 하지만 마포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정치범 200여 명은 서울 서빙고에서 정부가 패주 하기전에 학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서울 서빙고 주민들의 목격에 의하면 서빙고 뒷산에서 약 200여 명이 기관초으로 처형됐다고 한다. 시신은 한 줄씩 묶은 뒤 무거운 돌을 달아 서빙고 앞 강물에 수장했다고 하며, 북한군이 서울에 진주한 이후 약 40여구의 시신을 수습해 가매장했다고 한다.
나. 서울 마포구 미군 폭격('50.9.6~9.7) : 미군이 마포구 주택가에 약 70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 사건으로 약 100명의 사상자와 수많은 주택이 파괴됐다.
다. 서대문형무소 재소자 학살('50. 12.16) : 경찰이 수감자 34명을 영국군 29연대 관할지역으로 끌고가 학살
서울이 수북된 후, 극소수의 도강파들은 다수의 잔류파를 향해 부역혐의를 씌우고 압박했다. 이에 잔류파들은 정부가 전황을 거짓으로 선전하고 피난길을 막은 것에 대해 사과해야한다고 항변했으나, 도강파는 애국자, 잔류파는 부역자라는 인식이 득세하면서 부역자 처벌 및 약탈이 자행된다.
부역자 심사는 서울 수복 후 전국적을고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제 좌익세력과 부역자들은 대부분 북한군을 따라 서울을 떠난 뒤였고, 엄밀한 의미에서 부역과 관련없는 사람들이 대다수 희생되었다고 한다.
형식적인 법절차도 지키지 않은 채 경찰과 우익치안대가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즉결 처던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역자 가족을 몰살사키고 재산을 약탈하는 광범위한 학살이 서울과 경기동에서 특히 두드러졌다고 한다.
위의 사간은 '50.12.18일 미국 대사관이 일본 도쿄 미극동군 사령부에 보낸 기밀문서에 있던 내용이다. 이후에 영국군은 재소자를 데려오는 한국경찰은 무장해제 시켰다고 한다. 이 사건이 벌어진 구덩이를 파헤쳤을 때 34명이만이 아니라 수백명의 시체가 발견됐다고 증언한 기자도 있었다 한다.
라. 인천 보도연맹 학살('50.6.29~7.4) : 군경, 청년방위단이 인천 도원동, 월미도, 수인 , 송도 해안/역 앞산등에서 정치사범과 가족, 보도연맹 등 예비검속자 700~1천명 학살
전쟁 발발 직후 최초의 긴급조치는 6.25일 치안국장 명의로 각 경찰국에 하달된 "전국 요시찰인 단석 및 형무소 경비의 건"으로 즉시 요시찰요원 구속과 형무소 경비 강화내용으로, 이에 따라 주로 보도연맹원과 기타 불순분자들이 구속되어 수감돤다. 그러나 대다수는 전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검속된 후 2~3일 사이에 인근 바다, 골짜기 등지로 끌려가 학살된다.
이당시에 6.29알 일부 시만들은 인천시청 앞을 행진하며 북한군을 맞아들일 준비를 했다고 하며, 이대 후퇴하던 군경들이 돌아와 시가행진하던 민간인 수십 명을 현장에서 총살했다고도 하며, 4일 동안 군경이 상기 지역을 수색하여 검속된 자들을 끌고가 즉결처형했다는 것이다.
마. 인천 경찰서 학살('50.9.15일 후) : 북한군이 정치범 약 100여 명 학살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직후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인천 경찰성 유치장에 수감된 약 100여 명을 학살했다. 반면에 인천 형무소에 있던 인원 200여 명은 함포사격으로 전화선이 두절돼 착살을 면했다고 한다.
바. 인천 영흥도 학살('50. 8.19~9.12: 영흥도 내 육골.통걔.진여.덕적도 일대, 9.17이후: 영흥도. 인천시내) : 해군유격대, 대한청년방위대에의한 북하군 부역혐의자 등 다수 민간인
'50.8.18일 9정 규모의 해군기동함대 함정 승조 장병으로 편성한 육전대가 함포지원하에 덕적도를 , 8월 20일에는 영흥도를 탈환한다. 8월 23일부터는 lst에 탐승하고 있던 해군 이동기지 육전대가 상륙해 청년방위대와 함께 영흥도를 사수한다. 이후에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된다.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9월 17일에 서해지역으로 몰렸던 북한군과 내무서원들이 영흥도에 접어들었는데 , 곧 국군이 섬에 진입하여 이들을 처형하는데 이때 상당수 민간인도 학살당하는데 일부는 뗏목에 태워져 바다로 실려가 발에 돌이 매달린 채 수장됐다고 한다.
사. 인천 월미도 학살('50.10월 중순) : 우익무장유격대. 강화향토방위특공대.교동해군특별공격대가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월북혐의자 200여 명 학살
'50.7월 22일 대통령령으로 비상시향토방위령이 발효되었으며, 이것에 기초에 각 지역의 향토방위대가 조직된다. 이들은 부역자를 체포하여 월미도 앞 선상에서 재판하여 수장했다. 재판소요시간은 1인당 10~15초 정ㅊ도로 "아무개 사형, 아무개 10년"언도하는 식이었다 한다.
한현우(현장 생존자)증언 : 교동에서 배를 타고 강화를 들렀는데 사람들이 많이 탔다. 이 배에 탄 사람들은 내린 적이 없고 배가 잠시 정박하면 사람들이 다시 올라왔다. 김포에서도 사람들이 탔다. 내 기억으로는 한 200명이 넘는 것 같았다. 나는 배에서 재판이 이루어져 다행히 10년이 선도되어 배에서 하루를 보내고 마산까지 갔는데 다 없어지고 스무 명도 안됐다.
아. 강화 하점면 인애성(강령뫼) 학살('50.9.18~10.2) : 좌익이 반공인사 등 100명 이상을 강령뫼에서 학살
강화사에는 공산당원에게 체포된 수많은 사람들이 강화읍 옛 산업조합 창고에 투옥됐다가 그들 중 73명이 '50.9.28일에 공산당원 6명에게 강령뫼 산기슭 해변가로 끌려가, 구덩이에 쓸어 넣고 총과 창으로 반공애국지사를 학살했다고 기록한다.
당시 산업조합 창고에 강금된 인원은 약 300명이 이고, 어느날 북한군 간부가 와서 한사람람씩 조사를 했는데 100여 명이 죽었다 한다.
차. 강화 냉정리 찬우물 학살('50.10~12월) : 경찰. 치안대.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수십 명 학살
당시 강화에는 극단적인 우익단체들이 20여 개나 난립해 경쟁적으로 활동했다.
파. 강화 송해면 학살( '50.12.20 경(승천포), '51.1.7(돌미루), 1.12(양오리)) : 양사/하점면 행토방위 특공대, 서북청쳔단 등이 월북 후 귀환하던 민간인.부역혐의자 등 수백명 학살
강화도는 황해도와 강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어 드나들기 쉽다. 송해면 철산리는 월북통로이자 1.4후퇴 이후 월북자들이 귀환하는 곳이기도 했다. 또 북에서 조직된 우익치안대도 이 곳을 총해 남으로 내려오곤 했다. 따라서 북에서 온 차ㅣ안대와 지역 우익치안대 사이에주도권 싸움도 있었다.
1994년에 발행된 강화사에는 철산리 해안지대의 55세 미만 주민 중 80명으로 조직된 특공대가 12개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하던 중, '51.1.7일 밤 처ㅓㄹ산리 돌머리 해안으로 상륙하려던 80여 명의 내무서원 및 300여 명의 월북자들과 5분간 교전 끝에 289명을 생포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어 철산리 초소가 있는 해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던 저군과 교전하여 28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고, 향후 20여 차례에 걸쳐 450명을 생포 또는 사살해 강화를 적의 만행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이런 류의 관련 사건이 빈번히 발생하게 되는데, 이 사건과 관련해 특공대는 교전이었고, 체포된 이들을 상중하로 구분하여 악질 공산분자를 죽였을 뿐 민간인들을 죽인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피해자측의 목격자들 주장은 희생된 이들이 인민군이나 무장한 이들이 아닌 부역자 가족 등 민간이며 인민군은 소수였다는 주장이다.
안일채(당시 5816부대장) 증언 : 당시 강화에는 좌익분자들을 소탕할 목적으로 이북 각 지역에서 온 피난 치안대들이 운집했는데, 이들은 양민들의 재산탈취, 살해 등을 일삼으려 관할 1사단의 작전지휘도 받지 않고 무법행위를 자행했다.
000 (당시 목격자) 증언 : 1월 20일경 개풍군에 파난 가 있던 강화주민 300여 명이 배를 타고 오다가 숨어 있던 강화특공대원들의 집중사격을 받고 거의 사망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특공대원들에게 뚝방 너머로 끌려가 소총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쏘아죽였는데 한방에 7명이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타. 강화 길상면 온수리 학살('50.10월~12월, '51.1.4~8일) : 경찰 강화치안대,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온수리 건너편 공설운동장 인근, 사슬재 교통호, 신사터 등에서 부역혐의자 수백 명(최소 150이상)을 학살했다.
강화치안대는 1천 200명을 부역혐으로 검거해 경찰에 넘겼고, 일부는 인천으로 호송해 재판을 받게 했다. 일부는 재판도 없이 학살했다.
000 (당시 생존자) 증언 : 인민군이 강화를 점령하고 있을 당시 동생은 인민위원회에 소속하고 나는 부역을 했습니다. 수북 후 동생은 사라지고 나는 치안대에 잡혀 인천구치고에 투옥되었습니다. 3달 쯤 있다가 무죄로 석방되어 사촌형과 김포까지 걸어왔는데 외국군인들에게 잡혔습니다. 터키군으로 기억되는데 3번이나 체포되었습니다. 김포경찰서에서 또 왔느냐고 풀어주었습니다. 그때 갑곶으로 가면 죽인다고 하여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 다음 날에10여 명이 배를 타고 강화본도 끝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치안대에 체포되었습니다. 그 길로 온수리 사슬재로 끌려갔는데 사촌형은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진 여자를 업고 갔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교통호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새벽 한시 반쯤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교통호로 들어가다 냅다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어둑어둑해서 총을 쏴도 잘하면 피할 수 있디고 생각했습니다. 총소리가 나면 엎드렸다가 또 뛰었습니다. 10여 명이 그날 사슬재에서죽었습니다.
000(당시 목격자) 증언: 사슬재 온수교회 묘지 반대편 파치카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 있었는데 당시 시람들이 사슬재로 끌고가는 도중에도 총을 쏴서 죽였습니다. 당시 내가 150여구의 시체를 대충 수습해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마을사람들이 가래질로 가매장을 했습니다.자치 치안대 즉 특공대가 학살을 했습니다. 누가 죽였는지 죽인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입니다.
타. 강화 옥계갯벌과 갑곶나루터 학살('51.1.6~8알) : 경찰,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부역혐의자 300여 명 학살
'50.12.18일 25명의 우익 청년이 모여 강화향토방위 특공대(대장 최중석)을 결성했다. 특공대는 애초 강화 양조장을 본부로 활동하다이후에 본부를 곡물검사소(춘원자리)로 옮겼다가, 경찰이 치안을 넘기고 떠난 '51.1.2일이후에는 경찰서에 본부를 두고 활동했다. 이들은 1.4후퇴 당시에도 간ㅇ화에 남아서 16일과 19일 사이에 시가전을 벌였으며 '51.2월 말경에는 다른 우익청년단처럼 육군본부 소속 을지 제2여단 특별연대로 보충개편했다. 그리고 51.7월경 자진 해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중석(당시 특공대장) 증언 : '51.1.5일 범선을 타고 행단에 접근해 오는 내무서원 및 인민위ㅏ 요원 75명을 생포하고, 1.6일에는 역시 월곶으로 상륙해 오는 22명을 생포했다. 또한 1.7일에는 인천형무소에서 석방되어 철곶으로 건너오는 지방공산당원 105명 전원을 생포하여 그 중 악질 당원 60명을 식량문제도 있고 해서 처치해 버렸다.
김동환(당시 특공대원) 증언 : 그때 여자가 한 스무 명 정도였는데, 이부긍로 간 사람들의 가족들이었다. 남자는 부역했다가 피난 못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직접 잡아온 것도 아니고 기동대가 나가서 잡아왔다. 동네유지들한테 물어봐서 누가 악질로 굴었다 하면, 밤에 가서 잡아온 거다. 경찰이 철수한 뒤 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겼는데 먹일 것도 없고 해서 즉결처분했다. 그때가 아마도 1월 7.8일쯤 될거다
황재환(유족, 대구 거주) : 당시에 특공대가 할아버지,할머니,형,여동생을 끌어다 다 죽이고 나는 고아로 홀홀 단신이 되어 왕고모집에 자라다가 어느 날 갯벌에서 수류탄을 주어 놀다가 폭발되어 실명되고 팔 하나가 다쳤습니다. 강화읍 고아원에서 문산 고아원에 갔다가 대구 맹아 특수학교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공부를해서 지금 특수학교 교사를 하고 있습니다.
서영선(유족) : 부역혐의자와 가족들을 읍내 양조장에 잡아 가두었는데, 내 어머니 김덕임 씨도 애기를 업은채 12월 27일 잡혀갔고 그때 잡혀갔던 사람들은 60명 정도였다.
파. 강화 내가면 외포리 학살('51.1.17) : 경찰 및 강화향토방위 특공대가 30명 이상 학살
특공대는 부역혐의를 받은 이들의 가족을 좌익으로 몰라 학살했는데 임산부와 어린아이도 가리지 않았다ㅣ. 외포리에서는 민간인들을 배에 태워 항청리로 끌고 간 후 수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화도에서는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대부분 바닷가에서 이루어졌다.
서영선(당시 생존자) 증언 : 어머니는 50년 말경 갓난 동생을 업고 잡혀 갑곶에서 학살당했습니다. 할머니와 내가면 집으로 가던 중 고비고개에서 특공대원을 만났습니다. 할머니는 그때 끌려가 죽었습니다. 나는 동생과 함께 내가면 지서로 끌려갔습니다. 그랬다가 다른 삼람들과 함께 외포리 장포앞바다로 끌려갔습니다. 그 때 배표 파는 아저씨가 우리를 알아보고 몰래 숨ㅂ겨주엇습니다. 그 때 답혀있던 사람들은 배에 태워 후미진 곳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하. 강화 교동학살('50.12월 말~'51.1월 말(1.4후퇴 전후) : 특공대, 교동해군특별공격대, 무장 유격대가 부역혐의로 주로 여자와어린아이, 노인들 수백 명 학살
해군특별공격대는 '50.1.6일 김진성의 성봉 공격대가 교동으로 후퇴하면서 조직됐다. 김진성이 이끄는 이 부대는 '50. 11.12일부터 활동 기록이 나오고 있다. 김진성이 이끄는 평산 파견대가 최현기 호국군 장교, 김도제 등과 함께 연안지구를 탈환한 후 잔비를 소탕했다. 즉 교동해군 특공대가 모체가 되는 평산파견대가 연안과 교동, 서도, 등지에서 활동한 시기가 12월 12일 이전이라는 것이다. 교동의 학살과 교동해군특별공격대(200명), 낙오병으로 편성된 유소사 부대, 홍현 치안대, 벽성치안대, 연백치안대, 연백구국결사대, 평산유격대 등과의 관ㄱㅖ를 주시할 필여가 있다ㅣ. 이들이핛살 시기에 교동애 있던 유격대들인데, 이후에 타이어 여단의 모체가 된다.
1.4후퇴를 전후하여 '50.12월~'51.1월 말 사이에 교동에서는 강화특공대. 교동해군특별공격대. 그리고 북에서 내려온 무장치안대에 의해 학살이 진행된다.; 국민방위군 소속 청년들(17~45세)이 '50.12.19~24일 사잉데 외포리와 김포 방향으로 떠났고, 월북한 사람들도 대부분 청장년들이었기에 교동에는 치안대와 이북에서 내려온 무장 유격대원 외에는 청장년층이 거의 없었다고 봥야 한다ㅣ. 따라서 학살당한 이들은 대부분 여자, 어린이, 노인이었다.
000 (난정리 돌우물 학살 목격자) 증언 : 1.4후퇴시 교동에는 특공대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개 한복바지저고리를 입고 라디오를 갖고 있엇습니다. 주로 연백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ㅣ화개산 절 아래, 현재 쓰레기장 옆에 KLO부대가 있었고 교동에서 제일 센 부대이고 보급(기름, 옷)도 좋았습니다. 난정리 주민 18명이 돌우물에서 학살됐습니다.박봉기라는 사람과그 몇몇이 그 짓을 했습니다. 나는 18명의 사람을 인솔해서 돌우물로 가라해서 갔습니다. 나더러 돌아가라 해서 돌아서서 망를 쪽으로 가던 중에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돌무물에서 몇 백미터 떨어진 빈 집에 와서 정신을 놓고 앉아 있는데 곧 그들이 들어와 술을 마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옆방으로 나가라해서 옆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방에는 피범벅이 된 여자가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엇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자 옆방에 있던 특ㄱ오대들이 들어와 그녀의 목을 새끼줄로 감고 돌부리쪽으로 끌고 갔씁니다. 총소리가 났습니다. 돌우물 학살에서 온 좋게 살아났지만 발각되어 학살된 것입니다. 그녀는 18세로 우ㅠㅓㄹ북한 조복성 씨의 딸이었습니다.
000)교동 상룔이에서의 학살 목격자) 증언: 특공대들이 명단을 주면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구교동 교회 아래 Q씨네 집으로 갔습니다. 저녁인데 사람들이 꽉 찼어요. 애들과 연세드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국수를 줘서 먹고 있는데 옆방에서 "다 쏴서 죽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정신이 으득해졌습니다. 나가보니 아까 다 죽이라고 한사람이 "여기는 민주주의 나라다. 안 죽인다. 안심하라"고 말하고 있엇습니다. 그들이 사태골 안개산 2/3 지점에 있는 교통호에서 Q씨 집에 모여있던 사람들을 모두 학살했습니다. 나와 동료는 몰래 도망쳤습니다.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아직도 그 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자들이 많았어요. 유근학씨의 누니와 김역탁씨의 부인도 있었고, 주로 쑥고개 사람들이 많이ㅏ 죽었어요... .
당시에 깜깜한 밤에 애기를 풀섶에 몰래 밀어넣으며 자식을 살리고 싶어했던 애기 엄마가 학살당했는데 그때 아기가 지금 살아 있습니다.
하-1. 강화 삼산면 석모도 학살('51.1.16이후 1월 말까지) : 무장유격대와 특공대가 부역 혐의자 150명 이상 학살
석모도와 강화 인근 섬에서의학살은 남과 북의 정규군이 없는 곳이기에 최소한의 질서조차도 없었다. 오직 무장한 우익청년들이 법이었다. 교동도와 강화 인근 섬들은 우익무장대의 피신처이자 유격대의 근거지이며 생명이 달린 땅이었다. 즉 유역지로서 생존 근거지로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존재를 제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1.4후퇴 직후인 1월 16일 강화 본섬에서 후퇴한 특공대와 유격대가 석모도 어류정 해안에서 석모도의 월북했던 주민 40~50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으로 쏴 죽였다. 또 1월 19일부터 30일 사이에 인민군의 강화 재상륙 후 삼산면으로 후퇴하던 우익단체들이 매매음리 해안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홍종택(당시 부대장) : 모두가 강화 출신 월북자들로 한때는 호형호제하던 이들도 눙에 띄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의사를 표시한 이들이 살해되는 것을 막지못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000(목격자) : 당시 소년대원으로 어류정으로 40여 명의 사람을 직접 인솔, 학살장면 목격
내가 확인한 사실?
당시의 상황은 우리가 한마디로 이렇다 저렇다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강화도에 거의 지난 20년간에 1년에 날짜로는 한달정도 방문해 왔다. 그러니 웬만한 지역의 마을회관과 지역주민은 만나서 인터뷰를 해 봤다.
앞의 증언자들 말과 같이 토착 치안대와 북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핵심인 치안대가 존재했다. 여기에 미군 통제, 유격대로 활동하던 8240부대원과, 우리의 제1사단 5816부대가 통제하던 유격대원이 존재하여 전쟁을 유리하게 하려는 적진 깊숙히 침투하여 정보를 획득하고 보급소를 파괴하고 요인을 납치하는 등의 임무를 용감하게 했었고, 많은 기여로 중공군이 한강이남으로 밀어붙이지 못하게 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
강화유격대 회장인던 이석훈님, 앞의 안일채님, 가수 진미령의 아버지인 우리나라 최초 유격대장인 김동석님(육사 8기) 등 거의 100여 명의 참전용사님도 만났다. 여기에 타이거여단 출신들의 교동도 고구리에 묻혀있는 20여 명의 전사자 관련 매년 그 추모행사에 10회 이상 참석하였고, 그 회장인 목성균님과 장기락. 김인식.김청산님 등 엄청난 인원을 만났다.
그러면서 어느 하나의 사건의 진실공방은 내가 나설 것이 못되었다. 당시는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서로가 응어리져 있었다. 강화도나 연백 옹진 해주 개풍이 바로 강건너에 있다보니 부역자를 구별하는 것도 어렵고 피아판단도 어려웠다. 남에서 올라가고 북에서 내려와 뒤범벅이된 섬의 실태는 불타는 섬마을이었다.
여기에 북에서 잠깐 내려왔다는 인원이 볼름도나 교동같은 곳에 아니 서해 근접지역 섬에는 100명 사는 마을에 1000명이, 500명 마을에 5000명이 몰려들어 살다보니 풀뿌리도 남아나질 않았다 한다. 먹을 것이 없어지면 다른 섬으로 옮겨가는 기막힌 생과사의 순간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이러다보니 무슨 공을 세우려고 누구는 몸부림 치고, 누구는 고향이 그리워 낮이나 밤이나 강건너 고향땅을 바라보며 한숨짓다 혹여 기회가 오면 밤배로 살짝 고향에 가서 부모형제 생사를 확인도 하고, 게 중에는 일부 악덕 지휘자를 만나 개풍이나 연백. 개성에 들어가 토산물인 인산 등을 들고나와 물물교환을 하기도 하고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들이 목숨을 걸고 벌어졌기에 감히 내가 이건 이거다 말 할 수 없는 곳이 서해 5도의 흑역사며 가슴아픈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