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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15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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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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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lzLXadLVp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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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디에서 예배하느냐보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예배당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개별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할 아주 중요한 직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언직입니다. 예언직이라는 표현 앞에 큰 부담을 지닐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구심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내게는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이라 초능력도 없는데, 나같은 사람에게 무슨 예언을 하라는 말인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본질적인 직무는, 미래에 다가올 뭔가 대단한 일을 알아맞추는 일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중,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감없이 전달하는 메신저로서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중차대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백성들 앞에 모범이 되는 스승이요 교사, 안내자요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가장 기본적인 측면이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은 외침이나 멸망, 큰 환난이나 대기근이 다가왔을 때,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할 때, ‘여러분들, 바로 이 길이 정답입니다!’라고 외치며 길을 열어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언자라고 해서 다 제대로 된 예언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이비 예언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경험과 판단으로, 위기 상황 앞에 서 있던 백성들에게 예언의 말을 건넸지만, 사실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삯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직관은 확실했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복음 6장 39절)
사이비 예언자들을 추종하고 따라갔던 사람들은 그 삯꾼들과 함께 우르르 집단적으로 심연의 구덩이, 멸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지금 이 시대 역시 인류 역사 안에 전무후무한 대환난의 시대입니다.
자연스럽게 거짓 예언자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릇된 가르침과 감언이설로 선량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안그래도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더 큰 혼란 속으로 빠트리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소멸해갔던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했던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과도한 성전지상주의, 지나친 성직주의, 극단적인 물질만능주의였습니다.
인류나 국가 공동체의 공동선이나 이웃과의 연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깊이 함몰되어, 다들 집단으로 멸망의 길로 걸어들어갔습니다.
오늘날도 거짓 예언자들, 그릇된 목자들이 자신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교’라던지 ‘애국’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듣는 사람들 민망하게 만들면서, 나라 전체를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고통이나 아픔 앞에 고민하고 근심해야 마땅한데, 지금은 정 반대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근심거리요 치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과 얼굴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훌륭한 목사님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온 나라를 흙탕물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선량한 목회자들께서 겪고 계실 참담함과 부끄러움이 참으로 크실 것입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목회중이던 예배당을 과감하게 처분해서 신자들에게 돌려준, 경기도 한 작은 교회 목사님의 말씀과 결단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어디에서 예배하느냐보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예배당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집을 위해서 가족을 희생하는 사람은 없죠.
지금은 콘크리트에 갇혀서 자기들만의 리그, 자기들만의 행복한 예배 공간, 예배 나눔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입니다.”(이규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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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리더보다 스승>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d_znF_5u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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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도 원수까지 사랑하고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리더’가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면 눈먼 인도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그러시면서 리더는 먼저 ‘스승’이 되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모범을 보이며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스승은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이고 리더는 남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먼저 자기를 다스릴 수 없다면 리더가 아니라 폭군이 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이런 자비롭기만 한 리더가 환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스승이면서 리더로서 제자들의 단점을 다 품어 안으셨습니다. 특별히 가리옷 유다를 더 품어 안으셨는데, 심지어 다른 제자들은 그가 배신하러 나갈 때도 그를 의심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도둑’이었는데도, 그를 ‘재정 담당자’로 세우셨습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입니다. 요즘 누가 도둑놈에게 자기 회사의 재정 담당을 맡기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 모습이 참으로 ‘스승다운 리더의 모습’이었습니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굶겨 죽인 것은 비록 사도세자만의 책임은 아니었습니다. 영조의 지나친 기대에 사도세자가 지쳐있었고, 거기다가 사도세자의 정책이 기득권인 노론세력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론은 사도세자가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아 틈만 나면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 정조로 책봉되자 그는 첫 마디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세력들은 사도세자가 왕이 되지 않게 방해를 해 왔었습니다. 역적의 자식은 왕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노론에게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임금이기 전에 자기를 다스리는 스승이기를 원했습니다. 활 솜씨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고 학문에서도 모두 그에게서 배워야 했습니다. 처음엔 정조가 경연을 만들어 신하들로부터 배우려고 했으나, 하다가 보니 자신의 학문을 따라올 자가 없어서 왕이 신하들을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정약용과 같은 인재는 학문은 뛰어났으나 체력이 약하여 일주일 동안 가두어 놓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시켜 합격하면 내보내 주었습니다. 건강하지 못하면 좋은 머리도 소용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모두 스승이 될 수 있었어도 아버지의 원수들을 해치지 않고 함께 정치를 해나가는 것은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화병으로 머리에 온통 부스럼이 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절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되기 전까지는 영조와 노론의 결정이 옳았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1786년 정조 10년에 왕세자였던 큰아들 문효세자가 죽고 문효세자를 낳은 의빈 성씨가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2년 뒤 이 둘을 독살한 사람이 무종 구선복임이 밝혀졌습니다. 정조의 후계를 막기 위해 그런 일을 벌였던 것입니다.
정조는 구선복에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뒤주에 들어갈 때 네가 아버지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을 내가 보았다. 그때 내가 너를 죽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너는 내 가족들을 다시 죽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을 내색 없이 참아내며 함께 정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지만 자신을 이기는 스승은 분노도 절제할 수 있습니다.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원수까지도 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정조는 뛰어난 리더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리더가 되기 위해 먼저 스승이 되고자 했습니다.
한 공동체나 단체에서 리더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치’입니다. 단합이 잘 되는 회사가 성적도 좋습니다. 그런데 일치의 기본은 ‘소통’입니다. 소통이 잘 돼야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권위주의입니다. 소위 군대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1997년 대한항공기가 괌에서 추락한 일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부기장과 기장 간의 소통 부재가 그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부기장이 기장에게 제 때에 경고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군대 문화를 바꾸기 위해 국제선 조종실에서는 영어로만 대화할 수 있도록 바꾸었습니다. 1990년부터 10여 년간 대한항공은 7건의 항공사고를 일으켰는데, 그 이후 사고는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스승이 아닌 리더는 힘으로 내리누릅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소통이 안 되고 분열됩니다. 권력으로 내리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비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 리더여야 합니다. 자기 눈의 들보 먼저 보아야 합니다. 항상 밑의 사람들이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을 수련해야 합니다.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워야 합니다. 리더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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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6,39-42 :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오늘 복음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지나친 심판과 비판은 그를 위선자가 되게 하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열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확하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서 눈먼 이를 이끄는 눈먼 이가 되지 않아야 한다. 무지의 어둠에 묻혀있는 자가 똑같이 어둠에 묻혀있는 자를 진리로 이끌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남을 심판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위험한 일인지 말씀하셨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면 최후의 심판 때에 단죄를 받는다.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잘못들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욕정에서 먼저 나 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바로 잡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는 어느 한 사람 완전한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에 대한 비판을 가하며 그 비판이 도를 지나서 자신에 대한 비판보다 더 엄격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 신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항상 접하고 생활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인 우리 가운데도 남보다 자신이 잘났다는 우월감과 색안경을 통해서 남을 쳐다보고 비판함으로써 남의 결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몰아세우는 일들이 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기 전에 이미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편견이나 우월감 등을 없애야 한다. 내가 그보다 무엇이 잘났기 때문에 충고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처지가 될 수 도 있고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상대에게는 엄격한 위선적인 것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하고 상대에게는 관대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모든 인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로 인도해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개개인은 모두 사회의 스승의 표양을 보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표양은 예수께서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간음하다 들킨 여인(요한 8,1-11)을 용서하신 것, 또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라(마태 18,21-22) 하신 말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이 모범들은 우리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의 표양을 보여야 할 본분이 있기 때문에 관대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엄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다스리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이웃을 대함으로써 진정으로 형제적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삶을 가질 수 있게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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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설렘과 동시에 재림에 대한 갖가지 해석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은 대개 두 가지 삶의 자세로 나뉘었습니다. 먼저, 제대로 살아야 예수님께서 얼른 오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누구보다 잘 살고자 애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달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안 오시니 신앙생활이 점점 나태해지고 세상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제 삶에 대한 각성 없이 흘러가듯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나태하고 게으른 이들이 아니라,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열심한 만큼 자신들의 엄격한 잣대로 나태하고 게으른 이들을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그 비난은 공동체의 친교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남의 눈의 티(본디 그리스 말은 ‘잔가지’를 가리킵니다.)를 빼내겠다는 호기가, 자잘한 잘못을 확대 해석하여 형제와 이웃을 마치 악마를 보듯 함부로 대하는 무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잘못에 대한 훈계나 비난이 아닙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예의 없음’이나, 보수의 이름으로 인습이나 관행을 무작정 옹호하는 ‘어리석음’을 찬찬히 되짚어 보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형제고, 형제여야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아집이 우리 눈을 멀게 하고 자꾸만 어두운 구덩이에 빠져들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서로에 대한 인정 없이 제 목소리의 정당성만을 외치는 이의 ‘정의로움’은 참 애처롭고 서글픈 것이지요. 그냥 말없이 보듬어 줄 수 있는 따뜻한 손,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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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 앞에서 걸어가면서 사람들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는 일도 중요하고, 사람들을 잘 인도하는 것도 중요한데, 사람들을 잘 인도하려면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는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을 잘 인도합니다. 이 말은, 선교활동을 잘하려면 먼저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선교활동을 하면,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잘못된 길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복음화 하려면 교회와 신앙인이 먼저 복음화 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와 신앙인의 세속화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고,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자신들도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세상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데리고 가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이 말씀에서 앞의 ‘눈먼 이’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신앙인(‘구원의 길’을 제대로 걷지 않는 신앙인)이고, 뒤의 ‘눈먼 이’는 ‘구원의 길’을 아직 모르고 있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씀은, 둘 다 ‘멸망의 길’로 간다, 또는 둘 다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인도를 받은 사람의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잘못 인도한 신앙인은 자신의 죄와 ‘남을 죄짓게 한 죄’(남이 구원받는 것을 방해한 죄)가 합해져서 더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루카 6,40)
이 말씀은,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이고,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다가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앞에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길을 만들어서 가는 사람, 즉 이단에 빠진 사람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능가하는 ‘계시’는 없다는 뜻입니다.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다 배우고 나면”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에 도착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고 하는 것을 '예수님 앞에서’ 막아서서 말렸습니다.(마태 16,22)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23) 이 말씀은, “사탄처럼 내 앞에서 걸림돌이 되지 말고, 내 뒤로 가라.”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 뒤로 가라.”라는 말씀은,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라는 뜻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이 말씀은 자신의 ‘큰 죄’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의 ‘작은 실수’를 비난하는 일은 잘하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죄를 감추고서 ‘죄 없는 척’을 하는 것은, 또 “나는 의인이다.”라고 자처하면서 남의 죄만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 ‘티’와 ‘들보’로 표현하신 것은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실제 상황에서는 ‘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형제의 눈과 나의 눈에 똑같이 ‘티’가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똑같이 ‘들보’가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남의 죄를 비난하기 전에 먼저 너의 죄부터 회개하여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인데, 그런데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남의 죄가 보여서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한다면? 그럴 때에 우선 먼저 할 일은 “나는 어떤가?” 라고 반성하는 일입니다. 내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고 있다고 해서 나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42)
여기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는 “자기에게 큰 죄가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은 큰 죄를 감추면서”입니다. (자기에게 큰 죄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죄가 없는 척 하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하기 전에 먼저 너부터 회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일차적으로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사실상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조당 상태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조당부터 풀어야 합니다. 만일에 조당 상태에 있는 사람이 예비신자를 인도한다면, 아직 교리를 잘 모르는 그 예비신자는 조당 상태를 정상적인 상태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너나 잘해라.”라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일러서 회개시키는 일은(마태 18,15) 신앙인으로서 소홀히 하면 안 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만 잘 회개해서 구원받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공동체의 형제가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도 죄입니다. 형제애 실천을(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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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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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에는 걸어 다니면서 볼 수 있는 글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사랑하시는 신부님께서 돌에 글을 새겨 넣은 것도 있고, 졸업한 선배 신부님들이 기증한 것도 있습니다. 도서관 옆에는 ‘교가’가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교가입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에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베리따스” 신학교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지를 교가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청춘을 바치기 위해서 신학교에 왔고, 구원의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 신학교에 왔음을 교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후배 신부님의 은경축 축하 미사를 마치고 함께 ‘교가’를 불렀습니다.
강의실 들어가는 입구에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있습니다. 졸업한 선배들이 기증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특권도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무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그것이 나에게도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읽었습니다. 신학교 성당 앞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동상이 있습니다. 한국인 첫 번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사제가 된 다는 것은 사제에게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제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솔길 옆에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가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은 교우들이 바라는 사제의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우들이 바라는 사제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우들은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강론 준비에 성실한 사제,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하는 사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사제, 검소하며 물질에 신경 쓰지 않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끝가지 들어주는 사제, 웃어른에게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말이나 행동에 예의를 차리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 직무에 충실한 사제’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해박한 지식이나, 심오한 신학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듯이 사제의 직무에 충실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서로 만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베푸는 선행과 나눔 그리고 사랑과 희생은 험난한 삶의 거름이 되어 또 다른 모습으로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제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십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충분히 받았으면서도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가식과 비난 그리고 험담과 질투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봉사의 직분을 살아가는 교우들은 특별히 오늘 주님의 말씀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봉사와 나눔이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나쁜 말 때문에 빛이 바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기도로 제게 모범을 보여주셨던 어머니께서 목요일 새벽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 사랑하시는 아버님을 만나시고 남아있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정귀례 데레사와 죽은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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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먼저 나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제주도에 ‘봄’이라는 미술관이 있습니다. 작은 인연으로 전망 좋은 찻집에 머물 수 있었고, 작가로부터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먼저 물어 보았습니다. ‘봄’은 어떤 뜻이 있나요? 주인께서는 3가지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계절을 뜻하는 ‘봄’처럼 이곳을 찾는 분들이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경치를 ‘보다’는 말처럼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하늘을 보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보고 싶다’라는 말처럼 좋은 인연을 만들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작품을 감상한 스님들이 작가에게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혹 금강경을 아십니까? 금속으로 된 작품에는 작은 틈들이 있었고, 작품 안에는 백열등이 있었습니다. 원형, 피라미드 형, 반구형의 작품에서 은은한 빛이 사방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각 작품에서 나오는 빛이 서로 어우러지고, 평면인 벽을 입체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불가에서는 모든 것들이 ‘인연’으로 맺어 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선한 인연을 맺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도 금강경의 핵심이 그런 내용인 듯합니다.
저는 작품을 보면서 요한복음의 첫 장이 떠올랐습니다. 태초에 빛이 있었고, 빛을 통해서 세상 모든 것들이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빛은 때로 원의 모습을, 삼각형의 모습을, 사각형의 모습을 만들어 가듯이, 우리는 모두 진리이신 빛에 의해서 삶의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방에 빛이 사라지면 작가의 작품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인 작가분도 ‘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영혼이 빛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같은 작품이지만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대가를 바라고 정의의 저울을 속인 판사들이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불의한 이들에게 면죄부를 준 검사들이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의사는 다른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고 돌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의사가 자신의 몸을 잘 돌보지 않는다면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건강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을 집행하고, 사람들을 수사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본인도 법을 지키지 못하면 똑같이 수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의사, 검사와 같은 사람은 스스로 절제하고, 자신의 행동에 신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너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라, 다음에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높은 관직에 있을수록 더욱 몸가짐을 조심했다고 합니다. 가족들 또한 아버지의 관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하느님께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먼저 나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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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런 거야>
루카 6,39-42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거야>
갑자기 날아든
돌멩이들이 아니라
보일 듯 말 듯
묵직이 자리한
바위 하나가
물줄기를 바꾸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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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 탓이오>
제가 어렸을 적에 비하면 지금은 안경을 쓰는 어린 친구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안경은 각자 다릅니다. 그 모양뿐만 아니라 각자의 시력에 따라, 그리고 눈의 상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잘 보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안경을 쓰는 것은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이나 사물을 잘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쓰면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잘 보기 위해 쓸 수 있는 그런 안경이 있었으면 합니다.
정말이지 자신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헛된 그림자들, 자기 부족, 자기 상처를 인식하고 보완할 수 있다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들은 엄하게 대하는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단순히 미사 중에 ‘내 탓이오’라고 하면서 가슴을 치는 행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한 행위에 진정으로 마음이 함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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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중학교 때, 학교 옆에 커다란 시립 도서관이 생겼습니다. 공부하는 곳이 학교와 집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선택지로 ‘도서관’이 더해진 것입니다. 더군다나 도서관의 지하 매점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음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컵라면’. 지금은 흔하고 또 종류도 많았지만, 당시에 컵라면은 정말로 새롭고 놀라운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도서관에 가는 것을 더욱더 좋아했습니다. 집이나 학교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공부하다 보니 집중도 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기말고사 바로 전날, 도서관에 갔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제 친구가 보이는 것입니다. 도서관 구석에서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있더군요.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모른 척을 했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이 친구에게 “공부 많이 했어?”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이 친구는 “나 어떻게 하지? 온종일 텔레비전만 봤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봤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말했을까요? “나도 그런데. 나도 텔레비전 보느라 공부 하나도 못 했어.” 왜 서로 거짓말을 했을까요? 시험 망쳤을 때의 보험을 미리 두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시험성적이 나쁘면 창피하니까 말이지요. 바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어서 때로는 거짓말도 하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먼저 바라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낮추고 나를 높이려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나오는 판단은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복음 말씀은 어제의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이어지는 비유들로, 주님의 뜻을 잘 드러내 줍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면 최후의 심판 때 같은 모습으로 단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심판하려고 할 때, 나 역시 같은 죄를 어쩌면 그보다도 더 큰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죄받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시선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큰 잘못들과 거역하는 욕정들에서 나 자신부터 건져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바로 잡을 자격이 생기지 않을까요? 오늘 독서의 사도 바오로처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힘쓸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부터 바로 잡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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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어요>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깨어 님 얼굴 본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날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오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고등학교 때 많이 듣고 또 많이 불렀던 가수 이선희 씨의 ‘알고 싶어요’라는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생기면서 알고 싶은 것이 많아지고 궁금해진다는 내용이지요.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궁금한 것은 없나요? 그냥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말 알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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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무지로부터 깨달음의 앎으로-
얼마전에 농민신문에서 ‘나이 들어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글을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더불어의 삶을 살아가는 기성 세대의 중년, 노년이나 젊은 세대 모두에게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1.나이 들어 큰돈 벌 생각하지 마라. 나이 들어 큰돈을 벌기 위해 투자를 하거나 사업을 하면 대개 사기당하거나 망한다. 나이들어 망하면 돈잃고 사람잃고 건강까지 잃게 된다.
2.나이 갑질하지 마라. 나이가 계급인줄 알고 젊은이들에게 훈계나 충고를 일삼다가는 모두 도망가게 마련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반말을 하거나 지시를 하면 즉각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과거 성공담이나 잔소리도 반복하면 명언名言이 망언妄言이 된다.
3.개근상 타려고 하지 마라. 나이가 들면 이런저런 모임에 모두 참석할 필요가 없다. 내가 참석안하면 큰일 날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때로는 참석했다가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좋다. 내 소중한 시간도 아끼고 젊은이들이 더 자유롭게 지낼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낄끼빠빠’, 낄때는 끼고 빠질 때는 빠지는 것이 새로운 예법이다.
4.화내지 마라. 특히 나이 들어 화를 내면 실수를 하거나 사고를 당하기 십상이고 건강까지 해치게 된다. 화를 자주 내면 친구는 물론이고 가족까지 멀어진다.
5.배우자가 하지 말라는 것은 일단 하지 마라(우리의 경우는 배우자 대신 수도형제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배우자는 수십년간 가장 가까이에서 삶을 함께 해 왔다. 그 누구보다 내 삶을 잘 아는 인생의 동반자이다. 배우자는 내 인생의 빅데이터 분석가다. 빅데이터에 근거한 것보다 더 정확한 판단은 없다.
6.나이들어서 고집부리지 마라. 나이 들어서 고집부리면 왕따 당하기 쉽고 본인만 외로워진다. 우스개 소리같지만 예로부터 ‘황소고집’이란 말은 있어도 ‘암소고집’이란 말은 없다. 남자 노인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결론하여 무지하지 말고 지혜로우라는 것입니다. 즉 주제를 파악하라는 바로 자기를 알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를 잘 아는데 본인만 모를 수 있습니다. 자기의 늙음을 제일 나중에 아는 자가 본인이라 합니다. 참으로 무지에서 벗어나기 힘든 현실을 지칭합니다. 하여 제일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고 제일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그동안 강론중 참 많이 나눈 게 ‘무지’와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동방영성에서 마음의 병중 첫 자리에 오는 ‘무지의 병’입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으로 봅니다. 하여 저는 자주 인생 여정을 사계절에 견주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역시 무지로 인해 파생되는 이야기입니다. 결론하여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눈먼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즉 무지의 사람이 무지의 사람을 인도하면 둘 더 구덩이에 빠집니다. 눈먼이가 상징하는 바 우리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무지한 우리들에게 영원한 동반자이신 예수님 스승이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형제의 눈속에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속이 티를 빼내겠다는 것 역시 무지의 소치입니다. 하여 “너가 뭔데?”, 또는 “너나 잘해!”라는 반발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결론 말씀입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적인 과제가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것, 바로 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강론 제목을 ‘개안의 여정-무지로부터 깨달음의 앎으로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참으로 은총과 노력으로 눈이 열려 영적 시력이 날로 좋아질 때 저절로 사라져가는 무지의 들보입니다. 개안의 깨달음과 더불어 서서히 소멸되어가는 무지의 들보입니다.
개안의 여정과 함께 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개안의 여정중에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아 일치가 깊어가면서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눈밝은 현자賢者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이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완전히 무지의 눈이 활짝 열린 ‘개안의 사도’ 바오로요 다음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한 각자覺者이자 현자賢者인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예수님 없이 자기를 알 수 있는 길은,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고백입니다. 개안의 여정은 평생 영적전쟁과도 같고, 평생 마라톤 경기와도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개안의 여정을 경기장에서 달리기 경기에 견주고 있습니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불멸의 화관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사람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개안의 여정중에 있는 주님의 전사이자 주님의 경기자인 우리 모두를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심기일전, 초발심의 자세로 느슨해지고 약화된 우리의 수행생활을 다시 강화하라는 경종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옵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 떠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시편84,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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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마!>
살아가면서 말은 청산유수인데 삶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만 보고는 나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라는 말을 합니다. 남의 잘못은 잘 찾아내고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른 사람의 추한 모습을 말하러 다니는 큰 험담꾼은 악마”라고 하시며 “험담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나쁜 전염병”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극히 하찮은 잘못은 크게 보이지만 자신의 잘못은 대단히 중대한 것일지라도 작게 보이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가6,42)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마!,‘ '너나 잘해, 잘난 체 하지 마!’하는 노랫말도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속으로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나 봅니다. 삶이 풍요롭지 못할 때, 하는 말이나 행동은 헛소리요, 위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합니다.
어미게와 아기게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어미게가 아기게의 걷는 모습을 보니 걷는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미게가 말합니다. “제발 옆으로 걷지 마라. 의젓하게 똑바로 걸어라.” 그러자 아기게가 말합니다. “네, 엄마. 그러면 엄마가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어미게는 “그래. 따라서 하렴”하고 걷는데 자꾸 옆으로, 옆으로 걷습니다. 아기게가 뒤따라 옆으로, 옆으로 걸었습니다. 교훈을 늘어놓기 전에 자신부터 똑바로 살고, 똑바로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하며 가슴을 펑펑 칩니다. 입으로가 아니라 온몸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용서를 할 수 있고 화해를 이루며 화목해지고 행복해집니다. 남의 탓하지 않는 하루의 삶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맺음 역시 주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 잘살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아름다워지며 가슴을 여는 만큼 풍족해집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내 자신을 바꾸고 쇄신시키는 일부터 시작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 눈의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요?”
“우선 네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부터 하여라.”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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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지금은 당신께 배우는 입장이지만 앞으로는 하느님 백성을 도와주어야 할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간절한 권고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먼저 우리는 이 말씀이 눈먼 이의 능력을 한정하거나 비하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하고 말씀에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각장애인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 하느님 사랑에 눈이 뜨이지 않은 신앙의 초심자들과, 그들을 안내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신 것이니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느님께 대한 앎과 그분 사정에 한 발 먼저 눈을 뜬, 따뜻하고 선명한 시력의 인도자이길 바라십니다. 그들에게 이끌려 신앙의 여정에 들어선 이들이 헛발 디디지 않고 애먼 데를 헤매지 않도록 말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들보와 티는 아주 대조적 심상입니다. 들보는 크고 무거운 반면 티는 아주 미세하고 가볍지요. 또 들보는 한자리에 놓이면 여간해서는 옮기기 어렵지만 티는 쉽게 움직입니다. 혹 천재지변으로 들보가 제 자리를 이탈하게 되면 누군가를 해치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지만 티는 소소한 불편을 주는 정도로 그칩니다. 들보와 티는 그런 조합입니다.
그래서 "내 눈의 들보와 남의 눈의 티"는 제자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의미심장한 비유가 됩니다. 조금 먼저 배우고 믿어서 다른 선량하고 순수한 초심자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이들의 들보는 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지요. 더 널리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들일 경우, 그 반대의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42)
그런데 제 눈의 들보를 알아차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미 제 몸처럼 익숙해져서 당연하게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고, 타인의 선의와 순수를 왜곡하고 굴절할 만큼 시력을 잠식했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먼저 출발한 영성생활이라도 섬세하게 자기 양심을 성찰하고 영혼을 가다듬는 꾸준한 노력이 없으면 시야를 지배하는 것이 제 눈인지 들보인지조차 알아차리기 어렵게 되어 버립니다. 위험천만하게도 들보인지 눈인지도 모르면서 섣불리 형제들에게 메스를 들이댈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신앙과 사랑의 영역에서는 물론 기본적인 도덕 윤리적 영역에서도 늘 삼가하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도 모르는 들보가 타인에게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복음선포자로서의 자신의 포부를 밝힙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앞서 사도는 복음 선포가 자신의 직무이며(1코린 9,17 참조), 복음에 동참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한다고 고백했지요(1코린 9,23 참조). 이토록 자신감 넘치는 사도에게도 노심초사 긴장하는 부분이 없지 않은데, 정작 먼저 예수님을 체험하고 열성으로 그 복음을 전한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건 구원의 길에서 뒤쳐질 수도 있다는 염려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들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구원을 향해 매진하는 것으로 더 생생히 복음 선포자의 소명에 투신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타인에게 복음이 되어야 할 우리도 이 건강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말이나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말과 실천과 표양으로 전해지니까요.
눈먼 인도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선 자신에게서 들보를 발견하고 치워버리는 겸손하고 성실한 자기 부정과 비움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형제를 깊이 사랑하지 않고는 함부로 "티"를 지적하거나 메스를 들이대지 않는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지요. 지도나 교정 등 모든 일에 앞서, 티 정도를 묻히고 있는 그 형제를 사랑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우선되어야 할 겁니다.
저마다 크기와 무게가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들보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넓고 깊게 자리하면서 사사건건 시야를 가리우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형제의 티가 보이면, 들보의 발동인지 사랑의 발동인지 먼저 성찰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성급히 나섰다가 모두 구덩이에 빠지거나, 티도 못 빼주고 형제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좀 불편하고 아플 수도 있지만, 자신의 들보를 찬찬히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너무 크고 험하고 위압적인 들보가 발견되더라도 놀라지 마시고요. 일단 스스로 자신의 들보를 알고 나면, 의외로 이 부끄러운 들보가 부족하고 죄인인 타인을 포용하게 해 주는 선물이 되기도 한답니다. 빼내는 것은 그 다음 문제고요. 그건 주님께서 함께해 주실 겁니다. 나 자신과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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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불편함과 좌절을 겪어서 반드시 의미를 찾아라. 교만을 떨치기 위해서
살다 보면 편치 않은 사람과 상황을 맞닥뜨릴 때 우리의 마음은 풍랑을 만난 듯 힘이 들고, 하필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반드시 의미가 뒤따릅니다.
첫 번째 의미는 좌절을 이기는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는데, 운동을 안 하면 몸의 근육이 약해지듯이 마음의 근육을 만드는 방법은 불편한 상황과 불편한 사람들을 참아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조건을 견뎌내다 보면 마음에 근육이 생겨서 웬만한 일에 넘어지지 않는 힘이 생깁니다.
두 번째 의미는 세상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유아적인 이기심을 부수기 위해서 입니다.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기도가 내 뜻대로 다 이루어지고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까요?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교만의 끝을 달리게 됩니다. 교만을 떨쳐 내기 위해서라도 살면서 불편함과 좌절을 겪는 것을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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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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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페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 곧 자신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일일 것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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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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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6,41)
<남을 심판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들보와 티의 비유를 들어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들의 잘못, 곧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심판한다는 것은 내가 너보다 더 잘 알고 있고, 너보다 더 잘났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1코린8,2)
예수님께서는 나의 앎과 잘남에 머물러 있지 말고, 끊임없이 내 눈 속에 있는 들보, 곧 너를 옳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먼저 치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너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본질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를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의 들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말합니다.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피하기 위해 충실하게 또 헌신적으로 일해야 하고, 거룩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9,19.22)
오늘도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거룩한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끄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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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GngYrfW7vg&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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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 42)
먼저
우리 눈에서
위선의
들보를 빼내는
것이 우리가
제대로 사는
믿음의 길이다.
들보를
빼내는 것이
회개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느님중심으로
변하는 삶이다.
교만의 들보는
영혼을 모두
병들게 한다.
거짓과 위선의
시대를
아파하시는
주님이시다.
종교의 모순을
바로보고
바로잡는
은총의
시간이다.
온전한 믿음은
가난한 마음에서
늘 시작한다.
많은 것을
소유하면
교회가
부유해지면
양심과 믿음까지
잃게 된다.
들보를
빼내는 길은
양심을 성찰하는
봉헌이다.
내면의 빛을
따라가는
삶이다.
벌거벗은
우리 영혼을
기쁘게
맞아주시는
주님이시다.
먼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것이
공동체를 다시
살리는 길이다.
들보를 빼내는
형제들이
많아지는
공동체가
살아있는
공동체이다.
너가 아닌
나로부터
회개가
시작되는
공동체는 반드시
길을 찾게 된다.
들보를 빼내는
십자가가 다시
우리 길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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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6, 39)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떠날 것인지를 기도하게 됩니다. 참된 인도자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주님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참되고 참된 사랑을 맛보았기에 참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눈먼 우리들을 치유하는 것은 주님과의 참된 관계뿐입니다. 참된 관계가 참된 인도자를 만들어 냅니다.
참된 인도자는 자신을 알기에 가장 낮은 곳에서 주님을 말씀을 듣습니다. 눈먼 이로 눈먼 이들을 이끌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 존재를 알게 하시는 주님 사랑을 만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인도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사랑의 발자국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것은 섬김이라는 사랑의 발자국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스승과 참된 인도자는 섬김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서로를 진정으로 섬기는 섬김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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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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