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릴로 상자, 해석의 대상으로서의 예술 -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이후
어떻게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물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가? 슈퍼마켓의 진열장에 그것과 지각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브릴로 상자들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워홀의 <브릴로 상자>만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가?
도대체 무엇이 <브릴로 상자>가 다름 아닌 1964년에, 즉 그것과 지각적으로 똑같은 사물이 이전에는 예술작품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 분명한 바로 그때 가능해졌는가?
무엇이 <브릴로 상자>를 하필이면 1964년에 역사적으로 필연적이게 만들었는가?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는 “앤디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 상자 사이에 외적으로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또한 개념미술은 어떤 것이 시각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시각적 대상이 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더 이상 실례를 들어서 예술의 의미를 가르칠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관에 관한한, 어떠한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그것은 당신이 예술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자 한다면 감각 경험으로부터 사고(thouhgt)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은 철학으로 향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단토는 <브릴로 상자>를 예술의 종말, 혹은 예술사의 종말을 말해주는 하나의 신호로 해석한다. 1400년경부터 시작된 예술의 시기가 <브릴로 상자>와 함께 종언을 구하고 겉모습과 상관없이 무엇이든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탈역사적 시기, 예술의 시기 이후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의 단토에게 예술의 본질은 역사적 양상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아울러 미술의 역사를 내러티브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와 함께 단토의 철학적 입장이 무역사적인 분석철학적 분석으로부터 헤겔주의적인 역사적 설명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단토가 보기에 예술을 정의하려던 과거의 많은 시도들이 실패한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본질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을 잘못된 곳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작품의 ‘지각적 식별불가능성(indiscernibility)’에 주목한다면 예술의 정의를 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단토의 예술철학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두 가지 대상이 겉으로 보기에는(지각적인 층위)똑같이 생겼는데도 하나는 예술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한 사물이라면 무엇이 이것들을 이렇게 구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단토에 따르면, 이 문제가 미술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에 의해서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는 감성적으로 볼 때, 즉 감각인상의 층위에서 각각의 상자는 동일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산업생산물과 순수예술작품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만약 브릴로 상자 따위가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어떠한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미적인 것과 예술의 개념적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예술철학에게는 의미심장한 문제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슈퍼마켓의 진열장이나 지하창고에 놓여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브릴로 상자와 똑같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자는 예술작품이 되고 후자는 단순한 사물에 불과한가? 도대체 무엇이 이것들을 이렇게 구분하는가? 단토는 예술철학은 바로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지각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다. “어떤 대상을 예술로 본다는 것은 우리의 눈이 볼 수 없는 무엇 (예술이론의 분위기, 예술사에 대한 지식), 즉 예술계를 필요로 한다.” 단토가 보기에 평범한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바꾸는 것은 그 대상에 더해지는 이론적 해석이다. 하나의 대상이 예술작품으로 간주되는 것은 그것이 해석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작품이란 이렇듯 해석을 부여받을 수 있는 대상임에 반해, 실제 사물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단토는 예술작품 및 그 작품에 대한 감상이 이론 의존적이라고 말한다.
단토는 예술작품이 일종의 진술을 하고 있는 의미체라고 생각한다. <브릴로 상자>는 확장된 의미의 재현이고, 재현이란 언제나 무엇에 관한 재현이다. 재현으로서의 <브릴로 상자>는 내용과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일종의 진술을 하고, 심지어 모종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사물의 영역에서 의미의 영역으로 이행했음을 말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예술가들은 외관의 영역이 아니라 의미의 영역에서 작업한다. 현대의 미술은 미를 의미로 대체한다. 따라서 워홀이 입증한 것은 미술을 정의하는 것이 한 사물의 한갓된 시각적 속성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맞은 배경이 주어지고 적합한 이론 작업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우리에게 현대 예술은 이제 더 이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임을 시사한다.
단토가 보기에 예술사가 해야 하는 일은 간단명료하다. 그것은 지각적으로 동일한 두 예술작품을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 양상의 문제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단토에 따르면 과거의 본질주의자들은 예술개념의 외연이 역사적으로 변화무쌍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지표화됨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고정된 본질인 것처럼 예술을 정의하려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예술의 본질을 영구불변한 특정 양식과 동일시하는 본질주의는 당대의 예술작품들은 포섭할 수 있을지 모르나 미래에 출현할 예술작품들 앞에서 난파되고 만다. 단토에 의하면 진정한 예술철학이 가능한 것은 미술사의 특정 단계가 도래하고 나서였다. 예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질문의 진정한 형식은 역사적으로 그것을 묻는 것이 가능해지고 나서야, 즉 <브릴로 상자>와 같은 예술작품이 역사적으로 가능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제기될 수 있었다. 진정한 예술철학이 가능해진 것은 미술사가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등장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실행되고 난 후인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떤 것이 예술이 되기 위한 불변의 조건에 대한 지식에 도달한 시점이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예술의 본질을 필요충분조건의 견지에서 정의하는 예술철학도 가능해 진다.
이런 관점을 견지하면, 현대 예술은 예술의 종말과 예술철학의 등장을 선언하는 한 형식이다. 이렇게 단토는 미술사를 헤겔적인 내러티브로 파악한다. 그리고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출현한 이후 이러한 미술사가 종결되었다는 것이 단토가 주장하는 예술종말론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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