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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Annapurna Tracking 紀行文
산타페 추천 0 조회 164 09.09.28 21:15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8월 3일부터 8월 13일까지 10박 11일간 아들 수빈이와 함께 네팔을 다녀왔습니다. 경기도 안 좋은데 네팔로 트레킹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주변사람들에게 얘기도 제대로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런 이유로 기행문을 올리는 것도 많이 망설였지만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여행이었고, 많은 느끼고 깨달았기에 경험을 공유하고자 이 글을 올립니다.

 

Annapurna Tracking 紀行文

 

큰딸 수지가 초등학교 2학년, 아들 수빈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전국 최연소 구청장이 되었다. 아이들이 아직 잠들어 있는 이른 아침에 출근하였고 저녁때는 아이들이 잠자고 있을 때 퇴근하였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이 전국에서 가장 나이어린 구청장을 만들어주신 분들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고, 또한 나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녁때는 각종 모임이 많이 있었다. 못 먹는 술로 얼굴이 벌게 가지고 퇴근하는 날이 다반사였고, 토요일 일요일은 각종 행사주최 및 초청된 행사 ?아 다니느라 평일보다 더 바쁘게 지내야 했다.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장래의 꿈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딸은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고 아들은 소방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빠는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냐고 했더니 둘 다 “아빠는 구청장만 안하면 돼!”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은 아빠가 저녁때 퇴근하여 놀아주고, 주말이 되면 놀이동산도 데리고 가는 것이 꽤 부러웠던 것 같다. 내 딴에는 하느라고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 보기에는 항상 바쁜 아빠가 불만이었던 것 같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큰애가 중3, 둘째가 중2가 되었다. 요즘에는 모처럼 시간이 나서 아이들에게 외식이라도 함께 하자고 하면 큰 애들 둘 다 시큰둥하고, 핑계를 대며 안 가려고 한다. 그리고 모처럼 시간이 돼서 함께 외출을 하자고 하면 자기들은 친구하고 놀면 안 되냐고 한다. 그래서 세 살짜리 늦둥이와 아내만 데리고 외출하는 경우도 많다. 큰애들에게는 가족여행도

별로가 되었다. 대화도 길게 이어지기 보다는 점점 더 짧아지고, 묻지 않으면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굳어져 가면 아이들과 점점 멀어지겠구나 생각되던 어느 날 트레킹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장거리 여행이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서 좋고, 함께 힘들게 고생하다 보면 더 많이 친해질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들과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하여 가이드와 포터이외에는 일체의 동행인이 없도록 계획하였다. 때문에 페키지 여행이 아닌 개별여행을 선택하였다.

 

국내의 어떤 산은 말할 것도 없이 집근처 야산을 가자고 해도 이리저리 핑계를 대던 아들이 ‘비행기를 타고 네팔 히말라야로 간다.’는 말에 솔깃 하는 것 같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트레킹이 뭔지도 모르는 아들은 물론 나도 트레킹을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아들은 나와 함께 트레킹을 하고, 큰딸 수지는 엄마와 함께 집에 있기로 했다. 물론 늦둥이 작은딸이 끼여 있지만 큰 딸이 엄마하고만 있었던 적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가 수지와 아내에게도 괜찮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등산복, 등산화, 배낭, 스틱 등 산행 장비를 하나씩 하나씩 구입하였다. 남대문 시장에 가면 물건도 많고 싸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물건을 고를 전문적인 눈이 없고 가격을 비교할 만큼의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등산장비 전문매장에서 너무 비싸지 않은 것으로 구입을 하였다.

네팔 여행을 한 적이 없고 게다가 산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 현지 사정을 꼼꼼히 검색하여 알아보았다.

 

인터넷의 공통된 의견이 네팔은 6-8월이 우기이기 때문에 트레킹을 피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여름 방학이 아니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우기가 아닌 남방구나 다른 대륙의 산을 생각도 했었으나 안나푸르나 트레킹코스가 초보자가 오르기에 부담이 적다고 하고 또한 매번 방학 때면 네팔을 여행하는 잘 아는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에 조언을 구해가며 준비하기로 했다. 

 

 

 

8월3일 아침

 

일찍 집을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서 9시 출발, 네팔까지는 7시간이 걸렸고 시차는 -3시간 15분 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밖에 운행을 안해서인지 대한항공 여객기는 손님으로 가득찼고 비행기도 유럽의 보통나라 다니는 비행기보다 신형기종인 듯 했다. 그러나 네팔 카투만두의 트리뷰반 공항은 국제선 비행기가 이착륙하기에는 너무나 작아 보였다. 세계 몇손가락에 드는 인천공항을 보고 와서 비교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건물도 매우 초라했다. 우리도 저런 시절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트레킹 장소가 있는 포카라까지는 카투만두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하여 40분을 이동해야 했다. 20인승 작은 비행기였는데 양손을 조금만 벌려도 비행기 폭이 손에 닿았다. 길이는 버스보다 좀 크지만 폭은 버스보다 훨씬 작은 비행기였다.

 

 

 

 

 

 

소음이나 진동이 큰 비행기보다 훨씬 심해 좀 긴장이 되었다. 앞자리에 않은 수빈을 쳐다보니 잠을 자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무섭지 않았냐?”고 물으니 무서워서 눈을 꼭 감고 있었다고 했다. 잔 것이 아니었다.

 

인천공항에서 카투만두를 거쳐 포카라까지는 당일(8월3일)날 도착하였다. 우리는 포카라에

도착해 1박을 했다. 아들은 네팔의 저개발상태가 한편으론 신기하고 또 한편으론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아빠가 어렸을 때 한국도 네팔 같았는지?” 등에 대해 질문을 했다.

 

 

 

 

나는 불과 196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와 네팔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것과 새마을 운동과 우리의 높은 교육열, 우리 민족의 탁월성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지도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8월4일(산행 첫째날)

 

아침, 아니 새벽 3시 눈을 떴다. 수빈은 6시에 일어났다.

모닝콜은 7시에 맞춰져 있고 아침식사는 7시 30분 예정이었으나 예정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아마 시차 때문인 듯 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수빈이가 자발적으로 6시에 일어난 것을 난생 처음 본 것 같다.

 

예정보다 빨리 6시 30분 아침식사를 하고 일찍부터 출발준비를 했다. 어제 저녁 잠시 인사를 나눈 가이드와 포터가 합류했다. 가이드는 네팔의 세르파족 사람이고 이름이 ‘도르지’였다. 포터는 티벳 사람으로 이름은 구상밧데라고 했다.

 

포카라 호텔에서 8시 30분 Nayapul로 출발했다. Nayapul로 가는 길에 차안에서 안나푸르나

정상에 눈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폭염인데 산꼭대기는 만년설이 덮여 있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믿겨지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 아이스크림과도 같이 금방 녹아내릴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10시 정각 Nayapul에 도착하여 산행을 위한 준비 및 점검을 했다. 우리의 대부분 짐이 들어 있는 카고백을 머리를 이용해 질 수 있도록 포터는 끈을 사서 묶었고 나는 산행에 필요한 식수 등을 샀다.

 

기대하고 기대하던 6박 7일 간의 트레킹 출발!

 

 

 

큰 이변이 없다면 4일 동안 오르고 3일 동안 내려오는 코스다. 하지만 처음 하는 산행이라

건강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고, 너무 힘들어 지칠 수도 있기 때문에 정 힘들면 하루정도는

산에서 더 묵기로 하고 출발했다.

 

처음 출발 때부터 우리나라의 산들 보다는 규모가 크고 경사가 급한 산들이 겹겹이 우리

앞에 나타나서 위압감을 주었다.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계곡의 물도 많았고 흙탕물이었다.

한 시간 쯤 산행을 했을 무렵 길가의 가게에 들렀다. 망고 쥬스를 주문해서 아들에게 주었다.

 

아들은 쥬스 캔 뚜껑에 흙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다른 것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냉장고에서 새것으로 바꿔주었는데 냉장이 되기는 커녕 그것도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다. 깔끔한 성격인 수빈은 이러한 상황을 좀 못마땅해 했다.

 

나는 전기사정이 안 좋아서 그럴 것이라고 수빈을 달래고 다시 주인아주머니에게 닦아 달라고 하여 뚜껑을 열고 수빈에게 주었다. 몇 모금을 마시더니 수빈이는 유통기한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유통기한을 보자 쥬스를 먹지 않았다.

 

물론 주인은 쥬스를 환불해 줄 생각조차 안했고 우리도 요구하지 않았다. 수빈은 산행 내내 산중에서 파는 캔음료는 전혀 먹지 않았다.

 

12시30분 Syauli Bazar에 도착했다. 아침을 시원찮게 먹었는지 아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쳤다. 처음 산에서 먹는 식사를 네팔식 볶음밥으로 먹었다. 기름을 넣고 볶은 밥에 카레를

얻었는데 배가고파서인지 아들은 자기분량을 다 먹어치웠다. 나는 당연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20분 정도 쉰 다음 13시30분 Syauli Bazar를 출발했다. Syauli Bazar에서 Ghandurk까지는 경사가 매우 급했다. 평상시 산행한 경험이 별로 없고, 별 고생을 하지 않고 어찌보면 여리게 자란 아이라 잘 못 걸을 것 같은 아들이 생각보다 잘 걸었다.

15시 30분 경, 우리는 산행도중 학교가 있는 어는 마을에서 쉬게 되었다.

 

 

 

 

Ghandurk가는 길이 워낙 급경사이고 산행의 첫날이라 우리는 많이 지쳤기 때문에 언제나 Ghandurk에 도착하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우리 가이드는 30분이면 Ghandurk에 도착할거라고 했다. 그러나 다른 팀의 가이드는 1시간 30분이 걸린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였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우리가이드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가도 목적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가이드가 착각을 했던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었다. 30분이 지나가자 우리 가이드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거의 뛰다시피 하며 우리를 앞질러 나갔다. 자신의 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무리한 진행을 하는 듯이 보였다. 나는 가이드의 기분이 나쁘지 않게 천천히 가자고 요청하여 정상적인 속도로 걷게 되었다. 결국 상대편 가이드 말대로 1시간 30분이 걸렸다.

 

리더란 정확하게 모르면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고, 만약 자신의 이야기가 틀렸다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수정하는 자세 필요하다. 잘못 이야기한 자신의 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행동하다 보면 팀원에게 피해를 주는 둥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알았다.(이번의 경우처럼 팀원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섯 시가 넘어서 Ghandurk(1st Camp)에 도착 하였다. 롯지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씻기 전 닭고기 요리라고 생각되는 치킨카레라는 저녁식사를 주문했다.

힘들게 걸었기도 했고, 수빈이가 몹시 배고파했기 때문에 푸짐한 음식을 먹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치킨카레라는 음식에 닭고기는 작은 것으로 서너 점 들어있었고 밥은 훅 불면 날아가는 쌀밥이었다. 우리 입맛에 딱 맞는 맛은 아니지만 수빈이는 저녁식사도 맛있게 먹어서 다행이었다.

 

저녁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수빈이가 또 배가 고프다고 하여 끓는 물에 준비해간 컵라면 끓여 주었다. 밥을 먹고 나자 날이 곧 어두워졌다. 대충 정리하고 일과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수빈이가 갑자기 폐가 아프다고 하였다.

 

두통약, 설사약, 상처 난데 바르는 약, 압박붕대 등 여러 가지 상비약을 가져갔지만 폐가 아플 때는 어떤 약을 먹어야 할지 난감했다. 치료는커녕 아들은 계속 고통을 호소하는데 폐가 아프다고 말하는 아이의 고통이 도무지 어떤 고통인지조차 알 수 없어서 더더욱 답답했다. 혹시 저녁을 과식해서 배탈이 난 것은 아닌지 물어봐도 그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수빈이가 통증을 심하게 호소함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두통약을 한 알 먹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언젠가 성당에서 “배가 아플 때 어머니가 손으로 배를 쓸어주면 낳는 것은 손에 좋은 기가 흐르기 때문”이라는 신부님 말씀이 생각나서 손으로 아프다는 곳을 계속 쓸어 주었다. 수빈이가 좀 나아지는 것 같다고 하여 나중에는 수빈의 가슴과 등에 손을 대고 1시간정도 누워 있었다. 수빈이가 견딜 만 하게 나았다고 졸립다며 잠이 들었다.

 

전기 사정이 좋질 않아 촛불보다 좀 밝을까한 전등아래서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물론 산중이라 텔레비전도 없었다. 겨우 해드랜턴을 가지고 책을 좀 읽다가 여덟시가 좀 지나서 나도 잠자리에 들었다.

 

초등학교 졸업이후 가장 먼저 잠자리에 든 날이 아닐까?

 

 

 

8월5일

 

3시 45분 기상. 일어나자마자 수빈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열도 없고 잠을 잘 자고 있었다.

여기 쌀이 날아갈 정도로 찰기가 없는 쌀인지라 밥맛이 없었다. 어제 저녁 수빈이 몸이 안 좋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잘 먹여야 했다. 가져간 라면을 끓여서 밥을 말아 먹기로 했다. 6시 30분에 아침밥을 먹겠다고 롯지 주인에게 예약을 해 놨으므로 나는 주방에 들어가 6시 20분 라면을 끓였다.

 

7:00 아침식사를 끝내고 우리 일행은 7시30분 Gandruk을 출발했다. 우리가 출발하면서 보니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가이드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서양 트레킹족들은 보통 9시쯤 출발을 한단다. 우리가 그들 보다는 좀더 아침 형 인간인가 보다.

 

출발당시 우리 가이드 말에 의하면 Gandruk에서 Chomrong(2nd camp)까지는 4-5시간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보다 아침에 일찍 출발을 했으므로 부지런히 걸으면 1시경쯤 점심을 Chomrong에서 먹을 수 있고 오후에 2-3시간 더 걸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는 도중 틈틈이 아들의 상태를 관찰했다. 아들과 모처럼 좋은 시간을 같기 위해서 왔는데 아들이 아프다면 아쉽지만 당연 하산을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들의 상태는 오히려 좋아지는 듯 했다. 날씨가 무더워 지치기는 많이 지쳤지만 몸이 아프다는 말은 쑥 들어갔다.

 

우리는 집에서 여행을 출발하면서 캠코더와 카메라를 가지고 왔다. 캠코더는 내가 찍고 사진은 아들이 찍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면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휴식시간에 소변을 보고 있는데 아들이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장난을 칠 만큼 상태가 좋아진 것이다.

 

5시간 열심히 걸었는데도 4-5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한다고 한 Chomrong 목적지는 나타나질

않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우리 가이드가 또 낙천적(?)인 표현을 했던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큰 비를 만났다. 산중에서 처음 맞는 비인지라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모르겠고

일단 비를 피하기로 했다. 멀리 농가가 보여서 그 집으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 배도 고프고, 비가 언제 그칠지도 몰라서 점심을 그곳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트레킹 코스 초반(1-2일 동안)에는 계단식 논과 옥수수 밭은 많이 볼 수 있다. 우리가 비를 피해 들어간 농가가 있는 동네에도 밭에 옥수수가 많이 달려 있어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옥수수를 좀 쪄 달라고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옥수수가 여물지 않아 팔 수가 없다고 했다.

 

그네들은 딱딱하게 익은 옥수수를 수확하여 그것을 갈아서 끓여 먹는다고 한다. 우리는 딱딱하지 않은 그런 옥수수를 더 잘 먹는다고 설득한 다음 내가 포터와 함께 옥수수 밭으로 들어가 알맞게 익은 옥수수를 골라서 땄다.

 

 

 

 

 

농가 안은 우리가 오지탐험등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바로 그런 모습이다. 집 안에

화덕이 있는데 굴뚝은 따로 없다. 아침밥을 해 먹고 재로 잘 덮어둔 그 화덕 속에 불씨가

있었다. 잔 나뭇가지를 몇 개 넣고 대롱을 이용하여 후- 불으니 불이 살아났다.

 

옥수수를 삶고, 감자(우리 감자와 거의 같음)를 쪘다. 그리고 우리 가방에서 라면을 세 개 꺼내서 수빈이, 가이드, 포터, 주인아주머니, 그리고 내가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기억하고 있는 어떤 식사보다 맛있는 점심이었다. 더욱이 좋았던 것은

네팔의 산중에 살고 있는 주민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고 잠시나마 함께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 참으로 좋았다.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이런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하니 비에 대하여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목적지만을 고집해서 계속 강행군을 했다면 몸은 몸대로 고생이 되고,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리더는 예상하지 않았던 상황에 접하게 되면 신속하고도 정확한 판단으로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

옥수수를 찌기 위해서 껍질을 벗기는데 아들이 기겁을 했다. 옥수수 밭에서 산거머리가 붙어온 모양이다. 말로만 들었던 산거머리를 처음으로 본 것이다.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하여 오후 4시경 Chomrong에 도착하였다. 일곱 시간을 걷기도 했고 비도 맞고 해서 Chomrong을 지나 Sinuwa까지 가려고 했던 계획을 바꿔 Chomrong에서 묶기로 했다. 수빈은 등산화도 안 신고 슬리퍼 차림으로 우리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는 포더를 많이 안스러워하는 듯 했다. 나에게 포터의 급여에 대해서 묻고 팁은 얼마를 줄 것인지 물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급여를 더 받으니 팁은 포터를 더 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식사를 마쳤는데도 7시밖에 안 되었다. 수빈은 자려다 말고 일곱 시라는 말에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잠을 안 잔다고 달리 할 일도 없다. 도시 생활은 전기라는 문명에 의해 낮이 밤으로 바뀐 줄도 모르고 불필요하게 밤늦게 자고 아침에도 늦게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Chomrong은 내가 본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 중 가장 큰 마을이라서 롯지도 여러 개가 있고 집들도 여러 채 있었다. Chomrong을 지나면 정상방향으로는 롯지가 있는 곳에 농가는 없고 달랑 롯지 만 있었다. 멀리 농가가 한두 채씩 보이기도 했는데 그마져도 Sinuwa를 지나면서는 농가가 거의 없었다.

 

 

 

8월6일

 

어제처럼 새벽 4시반에 일어났다. 헤드랜턴을 이용하여 책을 좀 보다가 일어나 아침식사와 출발준비를 했다.

Chomrong에서 Sinuwa까지는 눈으로 보이는 가까운 거리였다.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2-30분이면 걸어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으나 계곡이 워낙 깊어서 보통 등산객들이 한 시간 정도를 걸어 내려가고 다시 2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완전 V자 계곡이었다. 우리도 열심히 걸었는데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2시간 정도를 제외하고는 계속 비가 내렸다. 거머리도 간간히 발견되었다. 요즘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수빈이도 벌레라면 딱 질색이다.

 

듯도 보도 못했던 거머리를 처음 보고는 사색이 되었다. 나는 걸으면서 내내 수빈의 옷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혹시 거머리가 붙어 있으면 아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떼어내기도 하였다. 수빈이도 그렇게 징그러워 한 거머리가 실제로 붙으면 기겁을 하면서도 곧잘 떼어 냈다. 나는 모처럼 아들과 좋은 시간을 가졌는데 거머리가 수빈에게 여행의 안 좋은 추억만을 남길까봐 걱정이었다. 산행 내내 나는 ‘꼭 붙어야 할 거머리라면 수빈에게 붙지 말고 나에게 붙길’기도했다.

 

 

 

 

처음 산행을 시작할 때는 오르막이 나타나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평지나 내리막이 나오면 반가웠다. 그러나 산행이 계속되면서 특히 오늘처럼 심한 계곡을 반복적으로 만나면서 오르막과 내리막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어짜피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지금보다 높은 곳에 있다면 오르막을 만나다는 것은 목표에 가까이 가는 디딤돌을 만나는 것이고, 내리막길도 마냥

즐거워 할 것만은 아니고 곧 오르막이 나타나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예령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당연한 사실을 알고 나니 오르막이 나타나든 내리막이 나타나든 평정심을 잃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조금 힘든 일이 닥치면 쉽게 낙담하고 좀 좋은 일이 생기면 지나치게

기뻐하곤 한다(一喜一悲).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놓고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한다면 당장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당황하거나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저녁때 Himalaya(3rd camp)의 롯지에서 우리는 처음 산행할 때 만난 대전에서 온 교사부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방학을 이용하여 부부가 함께 온 것인데 참으로 보기 좋았다. 옛날 생각이 났다.

 

나는 아내를 대학 선배 부부의 소개로 만났다. 선배는 후배인 나를, 형수는 친구인 아내를

서로에게 소개하였다. 그렇게 만나다 보니 아내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다.

처음 신림동의 모 레스토랑에서 만나 가족관계, 취미, ..... 의례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내가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서 아마도 결혼하면 일찍 집에 귀가하는 스타일은 못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당시 현직 교사이었던 아내는 “땡하면 귀가하고 땡하면 출근하는 남자가 뭐가 좋아요.

 

사회생활 하다보면 당연히 늦을 수도 있고 그렇지요. 나도 남자라면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 더 좋아요”라고 말했다. 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애기 안하는데... 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

 

결혼 후 불과 1년도 안되어 아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랑직업은 교사라며 부부교사는

출근도 퇴근도 같은 시간에 하고 특히 방학을 함께 보낼 수 있어서 참 좋은 것 같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하였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젊은 그 교사부부를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조만간 늦둥이 수아만 데리고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 교사부부와 모 연구소 연구원인 한국인 여행객이 모두 우리처럼 비에 흠뻑 젖었다. Himalaya 롯지에서는 70루피를 내면 젖은 옷을 말릴 수 있도록 불을 피워준다고 하여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옷을 말리는 방법은 이렇다.

 

커다란 테이블 아래에 이동식 석유버너를 놓고 불을 땐다. 그리고 테이블 테두리는 두꺼운

천으로 빙 돌려 막는다. 테이블 주변의 기다란 의자에 사람이 앉게 되면 두꺼운 천을 들고

발을 그 안으로 넣게 되는데 굉장히 따듯하다. 젖은 옷은 테이블 아래쪽 가장자리에 줄을 달아서 거기에 넌다. 가장 안 좋은 점은 석유냄새가 심하여 머리가 아프다는 것인데 추운 것 보다는 훨씬 났고, 특히나 옷을 말릴 방법이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이 70루피를 지불할 의사가 없다고 하면 불을 안 피워준다.

 

불을 피워 옷은 말리기로 하였는데 석유냄새가 심하여 우리는 방으로 일찍 들어와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등산화나 옷이 제대로 마르지를 않아 젖은 옷을 다시 입고 출발 할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날씨(2000미터 이상 고지대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여름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춥다.)에 젖은 옷을 입기는 정말 싫다. 그러나 걸으면 추위는 곧 없어지고 오히려 더워지는데 더 큰 문제는 전날 땀에 쩔었다가 빨기는 커녕 마르지도 않은 옷에서 나는 냄새는 정말 고약하고 역겹기까지 하다.

 

침낭 이야기가 나왔으니 준비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처음 시도하는 트레킹인지라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자 하였다. 주위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 인터넷에서 검색한 준비물 = 우리 준비물로 했다. 때문에 무엇을 안 가져가서 고생한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짐을 많이 가지고 가서 고생을 했다. 우리는 짐도 확실하게 싸가지고 갔다.

 

혹시 모를 비에 대비해서 짐을 하나씩 개별적으로 비닐 지퍼백에 넣고, 이것들을 김장용 대형 지퍼백에 다시 넣은 다음 카고 백에 넣었다. 만약 우리 짐을 실수로 물에 빠뜨렸다고 해도

개별 준비물들은 물에 젖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짐을 쌌다. 일주일 중 6일내내 비가 내렸어도 짐 속에는 단 한 방울의 빗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산행을 출발하기 전 포카라의 호텔에다 산에서 내려와서 입을 속옷, 옷 등을 모두 맡겼다.

산에 끌고 올라가면 풀어보지도 않고 다시 지고 내려와야 하는 짐들을 모두 꺼냈더니 제법 많았다.

 

그리고 또 산에서 이틀 밤을 자고 나니 우리의 경험 부족으로 과도하게 싼 짐이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그 짐들을 이틀째 묵은 롯지에 남겨두기로 했다. 우리가 직접 지는 짐은

비상식량, 추울 때 입을 예비 옷, 판쵸우의, 물병 카메라 등이고 잠잘 때 필요한 짐 등은

모두 짐은 포터가 모두 지고 올라가지만 우리가 짐을 정확히 선별하면 그만큼 포터의 수고가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모두 선별하니 한 7-8kg은 되는 듯 했다. 산에 올라 갈 때는 가능한 욕심을 버리고 내려놓는 마음이 필요함을 알았다. 꼭 필요한 만큼 만 가지고 올라가야 내려 올 때까지 수고를 줄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두 차례에 걸쳐 거쳤기 때문에 산행 내내 무엇을 안 가져가서 부족함이 있다

던지, 너무 많아서 짐만 되었다 던지 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중요하지도 않은 가치를 너무나 많이 ?다 보면 정작 중요한 가치를 얻는데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요하지 않은 가치를 ?아 시간을 허비하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정말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내려놓는 것도 문제다. 준비부족으로 인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꼭 필요한 것을 제대로 준비하는 것과 허영과 욕심으로 비롯된 것을 얼마나 잘 내려놓느냐가 인생성공의 중요한 열쇠가 아닐까?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리더가 실력이 없으면 조직원들에게 광범위한 임무를 부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조직원들은 과도한 일로 인해 힘이 부치거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리더가 정확한 판단을 못하여 필요하지도 않은 일을 조직원들에 반복적으로 시킨다면 조직원은 리더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고 그 조직은 결국 경쟁력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8월7일

 

아침에 일어나니 정상 쪽은 맑고 아래쪽은 흐렸다. 우리는 위쪽으로 올라갈 것이니 오늘은 비를 맞지 않으려니 하는 기대를 가지고 7시45분 Himalaya를 출발을 하였다. 이수빈 걸음은 출발부터 완전 갈지자였다.

 

힘도 들고 이곳저곳 아프다고 성의 없는 걸음을 걸었다. Deurali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걸렸는데 Deurali를 지나자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준비해간 판쵸우의가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지 물기가 많이 스며들었다.

 

 

 

 

이수빈은 새로 구입한 고어택스 우의로 갈아 입고 나는 집에서 입지 않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방수가 될 만한 점퍼를 준비해 가서 입었는데 서너 시간 비를 맞았음에도 비가 스며들지는 않았다. 집에서는 거의 입지 않던 옷이 Himalaya에서 큰 역할을 했다. 점심을 먹을 때까지 수빈이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스틱도 대충 꽂을 뿐 아니라 말씨도 투덜거리는 투였다. 여전히 가끔씩 처음 날 저녁처럼 ‘폐가 아프다’고 했다. 심한 고통은 아닌 듯 하지 만 머리도 아프다고 했다. 수빈의 기분은 그야말로 꽝이었다.

 

“오늘 하루만 걸으면 Annapurna Base Camp(ABC)에 도착할 수 있지만 만약 수빈이가 아프다 던지 힘이 떨어져 못 올라간다면 아빠는 지금 당장이라도 미련 없이 하산할 것이다.”는 말을 해 주었다. 수빈은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도 단 한차례도 “왜 이곳을 왔냐”던지 “내려가자”는 말을 하질 않았다.

 

이번 산행 중 가장 힘들게 트레킹한 코스가 Deurali에서 ABC까지의 구간이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Deurali에서 MBC까지였다.

 

 

 

 

Machhapuchhre Base Camp(MBC)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의 목적지인 ABC로 출발을 하였다. 오전 내내 아프다고 하던 수빈은 성의 없이 걷던 걸음을 천천히 이지만 일정하게 걸음을 떼었고,

스틱사용도 바르게 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계속 걷는다면 충분히 목표지점까지 걸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산행도중 간간이 만났던 교사부부는 부인이 고산병으로 두통을 호소해 하루를 더 쉬어보고 판단하겠다며 MBC에서 하루 더 묵기로 했다. 수빈은 목표지점에 가까이 갈수록 말도 많이 하고 걸음걸이가 가벼워지는 듯 했다. 나는 산을 오르는 동안 단 한 차례도 힘들어서 수빈에게 뒤쳐진 적이 없었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아들과 함께 왔으므로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를 업고서라도 내려가야 한다는 정신적 긴장이 나를 덜 지치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목적지인 ABC를 약 한 시간 남은 시간부터 내려올 때부터 3일간 하산하는 동안은 내가 수빈을 따라다니기 힘든 지경이었고 수빈은 상대적으로 사뿐사뿐 다녔다. 우리는 보통 오십분 산행에 10분 휴식 형태로 걸었는데 MBC에서 ABC까지는 쉬지 않고, 그러나 자세는 트레킹 교본처럼 두 시간 가량을 걸었다.

 

여기저기 아프다고 투덜거리며 갈지자로 걸을 때면 혼을 낼 수도 없고 본인이 포기하지 않는데 내려가자고 할 수도 없고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마지막 구간을 한 걸음 한 걸음 듬직하게 걷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 보느라니 마냥 ‘아이’인 줄만 알았던 아들이 ‘다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오후 3시 28분 우리는 ABC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정상에 도착하자 우리는 카메라부터 찾았다. 사진을 찍는데 소극적이던 수빈이 오히려 젖은 옷을 벗을 생각은 안하고 오히려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그리고 여러 장의 연출사진을 찍었다.

6시30분 저녁식사를 예약하고 옷을 넌 다음 먼저 도착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터와 가이드를 빼면 프랑스인 4명, 독일인 1명, 한국인 3명(우리 둘 포함)이 전부였다.

 

저녁식사는 네팔식 수제비를 맛있게 먹었다. 감자를 훨씬 많이 넣은 것을 빼면 우리 수제비와 다름이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수제비는 가이드가 직접 끓였다는 말을 들었다. 가이드는

세르파 족 사람인데 세르파족 사람들이 먹는 수제비가 우리 수제비와 거의 유사한 것 같다.

 

올라오면서는 너무 힘도 많이 들고,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주변 경관을 충분히 감상하지 못했다. 물론 사진도 여유 있게 찍질 못했는데 내려가면서는 히말라야의 야생 꽃도 음미하면서 충분히 보고 수백 미터씩 떨어지는 폭포 등도 감상하고 사진기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올라오는 4일중 처음 날 만 빼고 계속 비가 왔다. 우리는 계획대로 정상적으로 목표지점까지 왔지만 만약 내일 아침에 또 비가 온다면 우리는 히말라야 고봉들을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베이스캠프까지 와서 정상을 보지 못하고 간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일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얘기 중 어떤 사람은 여기까지 와서 정상 봉우리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아쉬우니 내일 아침부터 비가 오면 하루를 연장해서 더 묵으며 기다릴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모래는 반드시 개인다는 보장도 없는데 무턱대고 하루를 연장하는 것도 무모한 시도라는 반론도 있었다.

 

내일 날씨가 좋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만약 내일 비가 오면 내일 판단하기로 했다.

 

 

 

 

8월8일

 

1시 30분경에 잠을 한번 깨었다. 밖에 나가 보았다. 이슬비(구름비?)가 내리고 잔뜩 흐려 있었다. 우리가 구름 속에 있는 것이다. 3시경에 다시 깨어 나가보니 마찬가지였다. 안나푸르나를 비롯하여 히말라야의 고봉들은 못 볼 듯 했다. 5시 알람 시계소리를 듣고 잠을 깼다.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그리 맑지는 않지만 산의 형체는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산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빨리 들어가 수빈을 깨우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안나푸르나south, 안나푸르나 1, 안나푸르나 2, 구름 속에 숨어있던 고봉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구름속의 해 인줄 알았던 달이 날이 밝아오자 점차 자취를 감추면서 산봉우리에 태양의 밝은 빛이 비추고, 만년설과 붉은 태양빛이 어우러져 구름사이로 봉우리들의 금빛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은 어떻게 표현해도 그 장관을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식사하기 전 2시간동안 자연의 대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찍었는데

화면으로 나타나는 영상은 우리가 보는 그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하산 출발을 하려는데 ABC근처에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우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커다란 구름사발을 덮어놓은 것 같이 구름이 우리를 둘러쌓았다. 어마어마한

구름 돔 속에 우리가 있는 형국이었다.

 

짐을 챙기고 서둘러 출발을 했다. 한 20분 내려왔을까? 구름이 걷히면서 Machhapuchhre의

꼬리부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말 장관이었다. 또다시 카메라를 꺼내 들었으나 눈으로

본 광경을 카메라는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멋진 광경을 눈에

담아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에 저장하는 것인데 금방 잊어버릴 것이 염려 되었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다. “아내와 함께 올 수 있었으면...”

 

 

 

나는 오늘 아침 자연이 만들어낸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고

어쩌면 내 생애 또다시 저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못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 훌쩍 컸는지 나보다 키도 크고, 무슨 일이던지 엄마아빠를 의지하던 아이가 이제는 자신만의 세계를 고집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부모보다는 친구와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책도 많이

읽고 스스로 공부를 좀 했으면 하지만 컴퓨터에 빠져 게임하기를 좋아하고... 아이와 의견이 대립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일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아이와 좀 멀어지는 듯 한 기분도 종종 들었다. 최근 들어서는 아이를 안아본 적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장난삼아 아들을 안아 보았다.

 

아들은 싫지 않게 거절하면서 나에게 안기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나는 이 한 장면만으로도

안나푸르나를 참 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은 훨씬 수월했다. Himalaya에서 ABC까지 6시간에 걸쳐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세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5번째 camp는 Bamboo로 정했다. 열심히 걸었기 때문에 오후 2시 반에 Bamboo에 도착하였다. 두 시간 가량 욕심을 내어 더 걸을 수도 있겠지만 계속되는 비로 인해 속옷 등산화 등이 온통 젖어서 그대로 쉬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은 아들이 잘 걸었다. 한번 넘어져 구른 것을 제외하고는 내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잘 걸었다.

 

Bamboo에 도착할 무렵, 가이드 도르지는 열심히 잘 걷고 있는 우리를 향에 뜬금없이 “다 왔다!”는 말을 했다. 계속 비를 맞으면서 걸었기 때문에 도르지의 이 말은 희소식이었다. 모퉁이만 돌면 되려니 하는 마음으로 걸었는데 5분, 10분이 지나도 목적지는 나타나질 않았다.

 

“뭐가 다왔다는 거야” 드디어 아들이 투덜거렸다. 도르지가 착각을 했던지,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로부터 30분 이상 걸어서 Bamboo에 도착했다. 비를 맞고 또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에 쉬었다 출발한지 30분도 정도 지나서 ‘다 왔다’는 말을 듣고 또 다시 30분을 걷는다는 것은 그 소리를 안들은 것 보다 훨씬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오히려 1시간 정도 빗길을 열심히 걸었는데 갑자기 목적지가 눈앞에 나타났다면 그 기쁨은 이 경우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도르지의 말이 힘내라는 의미의 선의의 거짓말이라면 안 한 것만 훨씬 못했다.

 

리더는 정확하게 현실을 파악해야 하며 공연한 기대감은 오히려 실망을 안겨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며칠 만에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산행 이틀째부터 불통지역이라 전화사용을 전혀 못하고 지냈다. 서로가 연락이 불가능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결코 체념하고 맘을 편하게 하지 않는 다는 것을 그동안 느꼈다. 오히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할 위치에 있음에도 연락을 안 하는 것이 소위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무슨 일이 있어도 연락할 수 없는 곳에 있으면 공연한 걱정을 하게 된다. 집을 포함하여 몇 곳을 전화했는데 별 일이 없다고 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이런 시간을 참으로 오랜만에 갖은 듯하다. 밀려오는 피로감과 아울러 묘한 해방감! 지금 이순간 참 행복하다.

 

 

저녁식사는 도르지가 어제 정상에서 끓였던 세르파족 수제비를 먹었다. 식사시간이 되면 항상 먹는 것이 고민이다. 제대로 먹어야 걸을 수 있기 때문에 아들이 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주문해야 하는데 현지식에 대하여 아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수제비를 양푼으로 하나 가득 끓였는데 아들과 둘이서 맛있게 다 먹었다.

 

 

 

 

8월9일

 

앞에서 말한 대로 산중 생활은 해가지면 끝이다. 준비해간 해드랜턴을 이용하여 책을 좀 보고, 하루 동안 있었던 중요한 일을 기록한 다음, 다음날 일정을 확인한 후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그 동안은 항상 내가 수빈보다 늦게 잠을 잤다. 산중에서 저녁때면 수빈은 먹통인 핸드폰으로 소설을 보던지 게임을 하면서 잠들기 전 시간을 보냈지만 항상 나보다는 일찍 잠이 들었다. 그러나 어젯밤은 전자사전에 다운 받아간 영화를 다 보고 잤다고 하고 오히려 나는 8시가 못되어 잠이 들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왔기 때문에 긴장이 많이 풀리고, 그동안 힘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아들의 기분이나 상태가 좋은 것이 긴장을 풀게 만든 것 같다.

나는 매일매일 그날 있었던 일들을 기록했으나 수빈은 처음 날을 제외하고는 그동안 매일 미루면서 기록을 하지 않았다.

 

수빈이는 그동안 밀렸던 일기를 기억을 더듬더듬 쓰기 시작했다. 아프다거나 힘들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고 스스로 그간 밀렸던 일기를 쓰는 것을 보니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Bamboo를 출발하여 Sinuwa을 거쳐 우리가 짐을 맡겼던 Chomrong에 도착하였다. Chomrong에 도착하니 갈 때 무심코 지나쳤던 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아담한 초등학교 였는데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관광객이 많이 다녀서 인지 이곳 아이들은 참으로 인사를 잘한다. “나마스떼!”하고 인사를 하는데 ‘나의 신이 당신께 축복을 드립니다.’는 뜻으로 우리의 “안녕하세요!”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곳 학생들은 초등하교부터 모두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 었다.

 

처음부터 짐을 정확히 쌌더라면 여기까지 짐을 들고 올 이유도 맡길 필요도 없었을 것이지만 늦게나마 올바른 판단으로 짐을 맡기기로 한 것은 참으로 잘한 판단이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올라갔던 길과는 다른 하산 길로 접어들었다. Jhinu Danda라는 6th Camp를 향해서 걸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의 비탈이었다. 짧은 거리의 급경사는 여러 차례 걸어 봤지만 그렇게 깎아지른 비탈길을 한 시간 이상 걸어보기는 처음이다.

이곳은 가파른 산악지대이라 계단이 많았다.

 

 

 

계단이라 하면 층층이 쌓아 놓은 계단을 연상하게 되는데 이곳 계단은 이러한 계단 이외에 돌 사이에 넓적한 돌은 끼워서 만든 계단도 많이 눈에 띄었다. 넓적하고 단단한 돌이 많기도 하고 또 좁은 공간에 급한 경사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일행은 세 시경에 Jhinu Danda에 도착하였다. 대충 짐을 풀고 우리는 야외온천으로 향했다. 간편한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온천으로 출발하였는데 금방 나타날 것 같은 온천이 빠른 걸음으로 약 2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하였다.

 

야외온천은 무섭게 흐르는 급류와 맞닿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2-30미터를 사이에 두고 미지근한 탕과 좀 더 따듯한 탕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탈의실 등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급류가 불어나면 야외 온천에도 계곡물이 들어오게 되고 부주의하게 다니면 급류로 떠내려갈 위험이 있었다. 실제 온천에 놀러 왔던 여행객 중에 급류에 떠내려가 사고를 당한 여행자도 있다는 예길 들었다.

 

아들과 나는 따뜻한 탕으로 들어갔다.

최근에 급류가 들어왔던지 탕 속에는 고운 모래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고산지역에서 목욕(샤워)를 하면 고산병 증세가 나타난다고 샤워를 안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정상에서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일 샤워를 했다. 하지만 이처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것은 산에 올라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순간에 피로가 가시는 것처럼 좋았다.

 

탕의 깊이는 내가 바닥에 철벅 앉으면 목이 나올 정도였는데 수빈은 바닥에 앉질 않고 쪼그리고 앉았다.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바닥에 있는 모래를 이물질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억지로 바닥에 앉히니 자기는 롱다리라서 키는 아빠보다 크지만 앉은키가 작아 물이 목위로

올라온다고 나를 놀렸다. 우리는 한 시간 가까이 온천욕을 즐기고 다시 Jhinu 숙소로 돌아왔다. 온천을 왔다 갔다 하면서 떼어낸 거머리의 수가 열 마리는 족히 되었다 슬리퍼를 신었고 온천가는 길이 물이 흐를 정도로 매우 습해서 거머리가 많이 사는 듯 했다.

 

우리가 Chomrong에서 출발할 전에 만났던 일행을 또 만났다. 그들은 Jhinu Danda 야외온천을 들를 계획이 없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그쪽 가이드 말이 야외온천 옆의 급류가 위험하여 갑자기 물이 불어나면 휩쓸려 떠내려갈 위험도 있고 그런 사고도 있었다는 말로 만류했다고 했다.

 

그런 위험이야 현장에 가서 보면 쉽게 판단할 수 있을 텐데 가이드가 미리 좋은 추억꺼리 하나를 제외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행 중에 그쪽 팀을 여러 번 만날 기회가 있어서 그 가이드 또한 여러 차례 보았는데 우리 쪽 가이드와 비교하면 우리는 너무 적극적이고 낙천적인 반면 그쪽 가이드는 너무 소극적인 경향을 보았다. 산행도 우리 일행은 가이드가 가장 앞서고 중간에 아들 맨 뒤에 내가 걸은 반면 그쪽 팀은 가이드가 항상 후미를 지켰다. 일행을 챙기기 위해서 맨 뒤에 걷는 것이 아니라 힘들어서 뒤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리더는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장애물을 정확히 예측하고 그 대안을 수립해야 한다. 만약 문제점이 나타날까봐 대안을 모색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사람은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며 그런 사람이 리더가 되면 그에 속한 구성원은 좋은 기회를 놓질 수 도 있을 것이다.

 

저녁 식사는 그동안 가이드와 포터가 매우 고생을 했으므로 그 동네에서 제일 큰 닭을 한 마리 시켜 가이드와 포터를 포함하여 우리 팀 전체가 함께 먹기로 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보통 식사는 롯지의 주인이 준비를 하고 우리는 주문만 하면 되는 것이나 오늘은 한사코 가이드가 직접 준비하겠다고 했다. 수제비 요리처럼 가이드의 요리 솜씨가 뛰어난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우리가 야외온천을 다녀오는 사이 가이드는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산행의 초반부에는 식사 때 가이드와 포터는 우리와 식사를 따로 했다. 한사코 같이 먹자고 해도 우리가 먹은 다음에 식사를 하겠다고 그들이 강하게 주장하여 따로 먹은 적이 많았다. 처음 산행을 출발하기 전 들은 이야기로는 그들은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계급의식이 투철하여, 우리가 그들을 고용했으므로 함께 식사를 안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우리하고 친해져서 그랬는지, 우리가 강하게 권해서 그랬는지 자연스럽게 우리와 함께 식사를 했다.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산중에도 농가에서 키우는 닭이 있고 우리나라 등산객이 많이 다녀서인지 닭백숙이 산중 요리로 자리잡은 듯 했다. 맛있게 닭죽을 끓였고, 고사리나물을 무치고, 오이 겉절이를 한 푸짐한 만찬으로 우리는 산행 중 마지막 저녁 식사를 했다.

 

산행 처음 망고 쥬스에 질린 수빈은 산행 내내 물 이외의 어떤 판매하는 음료도 마시질 않았다. 기본적으로 산중 음료는 불결하고 유통기한이 지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최초로 콜라를 한잔 마셨다. 아마도 우리 수빈에게 마시멜로 시험을 하면 상당히 끈기가 있는 아이로 증명될 것이다.

 

 

 

 

8월10일

 

아침부터 또 비가 왔다. 그러고 보니 처음 산행을 시작한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비가 내렸다. 당초 7시 30분 출발 예정이었으나 30분을 연기하여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왔다. 그냥 비를 맞으며 빗속을 출발하기로 했다. 다행히 어제 오후 햇빛이 났을 때 신발을 잘 말려 놓아서 출발만은 뽀송뽀송하게 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루에 걸은 거리로 보면 오늘이 제일 많이 걸었을 것이다.

 

New Bridge를 출발한지 4시간만에 처음 출발할 때 점심을 먹었던 Syuli Bazar에 도착하였다.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농가도 제법 있고 옥수수 밭도 많았으므로 점심대용으로 100루피를

주고 옥수수를 7자루 사가지고 Syuli Bazar롯지에 도착하였다. 옥수수 일곱자루를 수빈과

나누어서 다 먹는 것으로 점심을 때웠다.

 

Syuli Bazar에 도착하니 하산중에 만났던 한국인 단체 트레킹팀이 먼저 와 있었다. 우리는 점심을 Chomrong에서 먹고 Jhinu에 3시경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일정이 급하다고 Chomrong를 지나쳐 더 가서 점심을 먹겠다고 했다. 우리가 Jhinu에 도착하니 거기에서 3시경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야외온천에서는 시간이 급해 온천욕도 빨리 하고 내려가야 한다고 했지만 Syuli Bazar에서 만났다.

 

늦은 점심과 충분한 온천도 즐기지 못하고 왔는데 결국은 우리와 산 아래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럴 바에는 좀 더 여유 있게 음미하면서 여행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마음만 바빠서 허둥대며 서둘렀지만 정작 시간은 절약되지 못하고 오히려 과정만 소홀히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산행이 끝났다.

 

 

이 트레킹을 시작할 때만 해도 수빈의 얼굴은 불만이 가득차고 걸을 때에는 스틱을 아무 곳에나 딛고, 발걸음은 갈지자 걸음이었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은 나보다 훨씬 잘 걸었기 때문에 따라 내려오기가 힘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수빈이가 관심있어 하는 CEO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고 수빈이의 내성적인 성격이 실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성격이라는 것과 성공한 사람은 70%이상이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번 여행은 참으로 악조건이었다.

 

여름인지라 출발할 때는 섭시 30도 내외로 매우 더웠다. 몇 걸음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하였다. 둘째 날 부터는 비가 매일 왔다. 때문에 젖은 옷을 말릴 수 없었다.(석유버너를 통해

말리기도 했지만 개운하게 마르지 않았고, 아침에 땀과 비에 젖은 옷을 다시 입으려면 차가움과 역한 냄새로 정말 기분이 좋질 않았다. 첫날을 제외하고 매일 거머리와의 전쟁이었다. 특히

아들은 거머리를 싫어해서 산행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기온은 내려갔다.

 

대부분 다 녹았지만 작년에 내린 눈이 완전히 녹지 않은 곳이 있을 정도로 차가운 기온이었고, 3000m이상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고산증도 약간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악조건이었던 것이 오히려 좋았다.

 

어짜피 산에 오르는 것은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이고 인내에 대한 시험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히려 우기 여름의 산행은 이러한 도전과 시험을 할 수 있는 더 좋은 기회였다.

 

아들에게 물어봤다. “내년에 또 트레킹을 갈까?”

아들이 대답했다. “거머리만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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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9.30 09:35

    첫댓글 촌장님^^ 장문의 기행문 잘보았습니다.수빈이와 아버지의 도전이 큰 교훈이 되었고 사랑을 확인시켜주는..시간들이라 보람 있었던것 같습니다.자신의대한 도전 인내 시험...중간중간 촌장님의 가족사랑을 진하게 느낄수있었습니다.몸소 느끼고 깨달은 경험이 의정활동에도 많은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촌장님 화이팅!!

  • 09.09.29 10:18

    우리 딸 들과 한번 도전해 보고 싶네요~ ㅎ 잘 보았습니다.

  • 09.09.29 18:09

    왜....눈물이날까??? 감동적인 아버지의 이야기.....거머리만 없다면 저두 도전해보고 싶네요^^;;

  • 09.09.29 20:30

    결정과결과에 감동받았답니다. 어떤 일이라도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합니다,큰일을 위해서 언제나 바쁘신 촌장님 모든사람들의 힘이되어주시길 바랍니다

  • 09.09.30 03:35

    글을 보며 가슴 뿌듯하게 밀려오는 부자간의 애뜻한 사랑, 가족사랑을 느꼈습니다.~~~~수빈이는 네팔 여행에서 돌아와 한층 더 성숙한 모습으로 생활 할 것이며, 앞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과 인내를 시험 하면서 멋지게 성장할거란 생각을합니다. ~~~촌장님! 글을 보며 많이 느끼고 갑니다. 도전과 인내, 사랑과 희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촌장님 화이팅!!

  • 09.09.30 17:38

    흠~~~ 촌장님의 가족사랑 자식사랑 참으로 감동적입니다,,꾸벅

  • 09.10.05 09:42

    감동적인 여행입니다. 부럽습니다. 아들하구 설악산이라도 가야겟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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