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왜구의 침략이 잦아지자 세종대왕은 1419년 쓰시마섬을 정벌하여 교통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식량에 결핍을 느낀 도주 소사다모리[宗貞盛]는 조선에 사죄하고 통상의 길을 열어줄 것을 간청하니 조정에서는 평화 회유책으로 1443년(세종 25) 조정을 대표하여 변효문(卞孝文) 등이 쓰시마 섬에서 일본의 쓰시마도주[對馬島主] 소사다모리[宗貞盛]와 세견선(歲遣船) 등에 관하여 계해조약을 맺고 삼포(三浦)를 열어 무역을 다시 허가하고 거기에 왜관(倭館)을 두어 머물게 하였다
계해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세견선은 1년에 60척으로 한다. ② 선원수는 대선(大船) 40명, 중선(中船) 30명, 소선(小船) 20명으로 정하고 이들에게는 식량을 지급한다. ③ 삼포에 머무르는 자의 날짜는 20일로 한하되, 상경한 자의 배를 지키는 간수인(看守人)은 50일로 정하고 이들에게도 식량을 지급한다. ④ 고초도(孤草島)에서 고기잡이하는 자는 조선의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의 허락을 받은 뒤 고기를 잡고, 이어서 어세(漁稅)를 내야 한다. ⑤ 조선에서 왜인에게 주는 세사미두(歲賜米豆)는 쌀과 콩을 합하여 200섬으로 제한한다는 등이다.
삼포란 지금의 부산진(釜山鎭)에 해당하는 동래(東萊) 부산포(釜山浦), 지금의 경남 진해시에 해당하는 웅천(熊川) 내이포(乃而浦 일명 薺浦), 지금의 경상남도 방어진(方魚津)과 장생포(長生浦) 사이에 해당하는 울산 염포(鹽浦) 등을 말한다.
삼포를 개항한 이래 일본인들의 무역·거류가 허가되고, 해마다 그 수가 늘어났다. 체결 당시 60명에 한하여 허가한 거류민의 수가 세종 말년에는 약 2,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점차 교만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조정의 명을 어기고, 관리들도 이들을 압박하는 일이 생겨 상호간에 자주 충돌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제정(諸政)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조정에서는 이곳에 왜관을 두어 그들의 교역·접대 장소로 하는 한편, 여러 차례 그들의 귀환을 요구하고 통제에 부심하였다.
1510년 쓰시마도주[對馬島主] 소사모다리[宗貞盛]에게 통고하여 그들의 철거를 요구하고, 또 일본 선박에 대한 감시를 엄중히 하자 그들의 불평이 늘어갔다. 그러자 3포의 일본인들은 쓰시마 일본인의 원조를 얻어 4,000∼5,000명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한때 내이포·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熊川) 방비를 격파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에 즉각 대응하였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석철과 중앙에서 파견된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 황형(黃衡)·유담년(柳聃年)은 이를 반격하여, 대파하고 곧 3포의 일본인 거류민도 추방하였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간의 교통이 중단되었는데, 일본의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는 다시 수교할 것을 간청해 왔다. 이에 따라 계해조약을 개정하여 새로 임신조약을 체결, 내이포만을 개항(開港)하였다.
삼포왜란시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왜인들을 격파한 석철공은 연안김씨 9세로 직강공파이다. 공은 세조 1년 성균관 직강 승공의 제이자로 태어나시었다. 성종 8년(1477년) 정유식년 진사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그해에 무과에도 장원으로 급제하니 문무양과에 모두 장원을 한 수재로 세인인 모두 놀랍게 보았다
1490년(성종 21) 부장(部將)에 오른 뒤 남포현감(藍浦縣監) ·훈련원판관 ·제포첨절제사(薺浦僉節制使), 1500년(연산군 6)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1506년(중종 1)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1509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이듬해에 일어난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 이어 경상우도방어사가 되고 무재(武才)가 특출하여 제주목사로 나갔다.
1513년 한성부좌윤이 되고, 1514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15년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다시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516년 종2품 공조참판이 되어 진하 겸 정조사(進賀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28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수시로 어전에서 병가방략(兵家方略)을 강론할 정도로 병법에 밝았다.
三浦平亂事蹟(朝野僉載所攷略)
출처 연안김씨 대종회
[출처] 삼포왜란과 김석철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