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역사 속의 어머니와 딸들이 말을 걸어온다. '보자기 부인'은 깊고 질긴 한지의 물성을 닮은 한국의 여인상을 전통 오방색으로 채색한 작품이다. 2001년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한 정종미 화가는 규방문화를 대표하는 보자기를 통해서 전해져 온 채색 전통을 살려 종이 위에 숨결을 담고 인성을 부여했다.
미술평론가 박영택(경기대) 교수는 "정종미 작업의 핵심은 단역 색채에 놓여 있다"면서 "색으로 이루어진 이 풍경 앞에 서면 우리를 둘러싼 색의 세계, 자연이 품고 지닌 색의 맛과 품위, 전통적인 한국의 색이 얼마나 아름답고 현묘한지 절실하게 깨달을 것"이라고 밝혔다.정종미 초대전-11월 11일까지 부산 해운대 달맞이길 코리아아트갤러리. (051)742-7799
▷ *…책이 짐이 되는 세상이다. 서울 청계천에 즐비하던 헌책방이 자취를 감춘 지 몇 해 됐다. 그나마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골목이 제대로 골격을 갖추고 남아 있을 뿐이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은은한 보수동 헌책방 골목. 기억 속의 풍경이 오롯이 살아 숨쉬는 골목 사이 사이를 만화책을 좋아할 만한 나이의 학생이 지나간다. 화가는 책방 주인이 '책 사러 왔냐'며 학생을 유혹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참고서 사자마자 헌책방에 팔아먹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동아대 미대를 나온 박경효 씨가 최영철 시인의 산문집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산지니)과 그림책 '입이 똥꼬에게'(비룡소)에 실린 원화를 모아 개인전을 연다. 그는 '입이 똥꼬에게'로 올해 비룡소 황금도깨비상 그림책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박경효 제5회 개인전 '책'-부산 수영구 광안동 강갤러리. (051)751-0377
▷ *… 분홍색은 '황막한 광야에 버려진 낭인의 마음 속에 아직도 처연하게 살아오르는 연하디 연한 영혼의 속살(미술평론가 이주헌)'이다.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던 최민화는 전면이 분홍으로 칠해진 캔버스 위에 사회에 뿌리 내리지 못한 미미한 존재들을 동양화적 선묘로 형상화했다.
작가는 현실에 대한 막막함과 분노를 '분홍'이란 상징적 색채에 실어 사춘기적 불안과 충동을 상징했다. 백지숙 미술평론가는 "분홍 양아치들은 바람을 막고 있거나 해변의 바캉스를 즐기거나 한다"면서 "좋았던 한때-정말 좋았을까? 그래도 행복했지?를 자문하게 만드는-가 구현되어 있는 화면, 그곳은 보다 정직하게 말해 '분노와 허탈, 반항과 비애'가 뒤섞여 있는 회한의 공간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최민화 개인전 '분홍기타'-부산 해운대구 중동 인디프레스. (051)747-4719
▷ *…장욱진 화백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해와 달, 나무와 집, 소와 까치, 가족 등 주변의 일상적인 이미지를 단순하면서도 소박하게 표현해 애호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일상적인 소재를 아주 절제된 형태로 순진무구하게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동심처럼 맑은 그의 정신세계가 작품속에 투영된 것이다.
그의 나이 오십 무렵에 얻은 막내아들이 백혈병으로 사망한 1979년에 그려진 '가족도'에는 한 가족이 방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아들이 병을 앓기 시작한 무렵부터 연이어 그린 그의 가족화에는 자식에 대한 애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가족이 고독한 예술가의 삶에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가족동화'전-6월 6일까지 노보텔 앰배서더 부산 4층 가나아트부산. (051)744-2020
▷ *… 망각은 우리의 에너지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에로 집중하게 하는 힘이다. 자본의 힘에 도취된 현대인들에겐 아무리 위선과 행패와 패악을 부려도 그것을 잊고, 다시 삶에 매진하게 하는 '달콤 쌉싸름한' 망각의 힘이 있다. 현대인은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겐 결핍되어 있는 저 망각의 능력을 통해 늘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그런 인간들이다.
결핍된 인간의식의 본성을 탐구하는 작가 정윤선은 불확실성과 두려움에서 헤어나기 위해 망각이라는 매혹적인 유혹에 빠져 사는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마이크를 쥐고 노래하며 망각의 상태에 빠져들지만 항상 그의 뒤에는 총이 있다. 총은 망각의 힘을 잃고 기억의 노예로 변하는 순간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이자 남을 공격하는 도구가 된다. 정윤선 개인전 '의식의 진화'-23일까지 부산 프랑스문화원 전시실.(051)465-0306
▷ *… 장갑은 인간 손의 연장이다. 정경연 홍익대 교수는 장갑으로 섬유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단순한 섬유공예가 아닌 순수 조형예술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정 교수의 장갑 작업은 미국 유학시절 어머니가 고생하는 딸의 손을 생각하며 보내온 목장갑을 염색해 어버이날에 다시 보내드린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30년 동안 그녀는 목장갑의 여러 부분을 다른 농도로 염색해 일정한 패턴에 따라 엮거나 배치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무엇이 되든 장갑으로 나타난 손의 형상에서 우리들은 삶의 고단함과 역동성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그녀의 작가활동 30주년을 결산하는 자리이자, 갤러리예가의 개관 5주년 기념전이기도 하다. 정경연 초대전=13일까지 부산문화회관 전시실, 15~31일 부산문화회관 앞 갤러리예가. (051)624-0933
▷ *… 창문 밖으로 비치는 애절한 여인의 그림자에서 백제의 가요이자 한글로 표기된 최고의 가요인 '정읍사(井邑詞)'가 떠오른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 어느 행상인의 아내가 달에게 높이 솟아올라 멀리까지 그 빛을 비추어 남편의 안전을 지켜달라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내용이다. 여인의 기다리는 마음이 절창을 낳았다.
화력 40년 동안 4번째 개인전을 갖는 작가(81)는 문살과 문고리 등 창호지 문화에 매료돼 평면구성으로 문살과 창틀짜기에 화혼을 불사르고 있다. 작가는 "때묻은 손잡이, 찢어지고 바랜 창호지를 다시 오려 붙인 문살의 모습에서 파란만장한 민족의 운명을 보는 것 같아 숙연해진다"고 술회했다. 김재위 개인전=7일까지 부산 중구 중앙동 타워갤러리. (051)464-3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