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의 이야기, 마지막.
피곤했다. 긴급을 요하는 환자는 별로 없었지만, 이래저래 응급처치가 필요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들어왔다. 또 근처 어디선가 화재가 났는지 조금은 한산해질법도 했던 늦은 밤 시간대에, 화상을 입은 환자들과 호흡곤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밀려들어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쓸데없는 생각을 들지 않게 해줘서 다행이었다.
우현에게 한방 먹이고 그대로 뛰어와 선배들에게 몇 마디 훈계를 들은 뒤에는 정신없이 일해야 했다. 그리고 한참 뒤 시계를 다시 확인했을 때는 이미 5시는커녕 7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조금은 착잡한 마음에 핸드폰을 만지작댔지만, 금방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달려가야 했다.
그리고 밤 11시 30분.
여름이 가까워 이제는 춥지만은 않은 밤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재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슬프게도 서울 하늘에서는 그 잘 보인다던 북극성도 찾기 힘들다.
문득 고등학생 때의 전야제가 떠올랐다.
사소한 것도 즐겁고, 세상이 모두 내게 관대해 보이던 시절. 그때 어두운 산속에서 올려다보던 밤하늘.
그때 자신의 옆에 있었던…
“재휘야”
“……?!”
들려서는 안 되는,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에 재휘가 걸음을 멈췄다. 잘못 들었나, 자신이 깊게 생각하다 못해 환청까지 만들어 낸 건가 싶어 허무함에 웃으려던 재휘는 또 한 번 놀랐다.
“유재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이는, 다름 아닌 우현이었다.
“너…”
“많이 늦었네”
“어째서…”
정말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가 맞는지 가늠해보는 눈빛에,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재휘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그리곤 탐색하듯 우현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 설마. 아까부터 기다린 거야?”
우현의 행색이 아까와 별다를 것 없었기에 던진 말이었지만, 대답은 예상이상이었다.
“응”
“뭐라고?”
“너 일하는 것도 봤어. 병원도 좀 돌아다녀보고… 저녁은 여기식당에서 먹고”
“너, 오늘 다섯 시 비행기라며. 내일…”
“취소 했어”
“뭐라고?!”
“취소했다고. 비행기도, 내일 약속도”
어째서라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입 밖으로는 나오지 못했다. 대신 우현이 빨랐다.
“내일 언제 출근이야?”
“……. 한시”
“그럼 그때까지의 너의 시간. 내게 줄 수 있을까?”
“……”
“너와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비록 재휘가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 무언의 긍정에 우현은 재휘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휘의 손을 잡아 앞서 걸었다.
그런 우현의 뒷모습을 쫒다 잡은 손을 내려다본 재휘는 슬쩍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호응하듯 우현도 더 세게 재휘의 손을 맞잡아왔다.
분명 쓰러질 것처럼 피곤했는데, 왠지 어디든 갈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차는 한참을 달렸다. 서울을 빠져나가고, 경기도를 벗어나고 나서도 쭉 뻗은 고속도로위를 한참동안이나 더 달렸다. 재휘는 그동안 잠들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써보았지만, 결국 시트에 몸을 파묻은 채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그런 재휘를 운전하는 내내 곁눈질 하면서도 우현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지독하게 피곤해보였던 재휘였기에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는 모습이 마음 한켠이 편하기는 했다.
“휴…”
터널을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표지판이 나타났다.
-강릉 14km
무심하게 표지판을 읽고 지나면서도 우현은 술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써야 했다.
“어디…야. 여기가…”
“일어나서 나와 봐”
“으음…”
기껏해야 한 시간 남짓 잤을까. 그대로 쭉 자고 싶은 욕망이 뭉실뭉실 피어올랐지만, 재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살짝 젖혀져있던 의자를 제자리로 돌리고 안전벨트를 풀자 먼저 차에서 내린 우현이 친절하게도 조수석 문을 열어준다.
사양할 것 없이 편안하게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쭉 편 재휘는 코끝을 간질이는 바다냄새에 고개를 홱 돌렸다.
정신이 없어 눈치 채지 못했건만, 재휘가 내려선 곳은 몇 발자국만 앞으로 나서면 물에 닿을 정도로 바다와 가까운 모래사장이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 놀라 말문이 막혀있는 사이 우현이 뒷좌석에서 무언가를 꺼내들고 다가왔다. 그리곤 활짝 펼쳐 재휘의 몸에 둘러준다.
“뭐야…”
“자다 일어나서 춥잖아. 걸치고 있어”
대체 남자가 모는 차에 담요 같은 게 왜 있는 건지. 게다가 이런 세심한 배려라니.
정말 그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재휘는 담요끝자락을 부여잡았다. 잠깐 놀라는 바람에 잊고 있었지만 바닷바람은 차가웠고 막 잠에서 깬 자신의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을 정도로 추위를 탔다.
한 번 더 편하게 담요를 여민 재휘가 멍청히 선 우현의 옆에 다가섰다.
“여기가 어디야?”
“강릉”
“……강릉?”
“응”
“설마……”
재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휙휙 돌아봤다. 하지만 밤바다란 것은, 어느 바다나 똑같이 검었고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짙은 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긴가 민가 하는 사이 뒤를 돌아본 재휘는 연신 돌리던 고개를 멈췄다.
가로등-
외롭게 서있는 단 하나의 가로등.
그리고 물밀 듯이 밀려오는 그날의 기억.
눈 내리는 겨울의 바다. 반짝이는 눈 사이로 거칠게 심장을 후벼 파던 이별의 말. 너를 붙잡았던 차갑게 식어가던 손끝. 애타게 소리쳐도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던 잔인한 바다. 여전히 홀로 비추던 가로등 하나.
“아아… 이곳이구나”
지난 10년 가까이 발도 들이지 않았던 곳.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아 아주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었던 아픔뿐인 기억.
마지막 추억이 되기를 바랐지만 결국 슬픔으로 변질 되어버린 그 날.
어째서 이곳에 다시 데려온 걸까.
“생각해봤어”
“……뭐?”
우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바다를 향한 채다.
“네가 그렇게 가버리고, 계속 생각해봤어”
“……”
“대체 어디서부터 우린 이렇게 된 걸까. 어째서 이렇게 비틀어진 걸까”
“……”
“근데 하나밖에 없더라고. 결국엔”
“……”
“내가 이곳에서 널 먼저 놓아버렸던 것”
“!”
“이유가 어찌되었든. 한번 잡았던 너의 손을 내가 뿌리치고, 멀리 달아났던 것”
“……”
“그게 첫 어긋남이었고, 전부였어”
“성우현”
“아니. 내말 들어줘 재휘야”
뭐라 대꾸하려는 재휘를 막아선 우현이 말을 이었다. 우현의 힘없이 늘어진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네 말이 맞아. 그날 우린 끝났어. 끝났던 거야. 정말 그땐… 10년 이상 돌아오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근데, 있잖아 재휘야. 나도 2년이 한계였었나 봐. 널 참고, 또 참고 참아내는 게 2년이 끝이었던 거야. 내가 그때 독일에 있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아?”
“……”
“아, 유재휘는 이제 대학을 가겠구나. 대학에 가면 또 다른 친구들을 사귀겠지? 아, 여자 친구들도 많이 생기겠구나. 재휘는 여자랑 친하게 지낸 적이 없으니까 어려워하겠지? 다행이다. 아, 아니야. 워낙 성격이 좋은 녀석이라 누구에게나 잘해줄 거야. 맞아…”
“……”
“그러다… 혹시 다른 사람이 생기면 어떡하지…?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저를 버린 나 같은 건 몽땅 잊어버릴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버리면 어떡하지? 나는 어떡해야하지?”
“……”
“그렇게 실체도 없는 상대에게 질투에 눈이 멀어 난 너에게 갔어.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끝까지 내 이기적인 마음이었지. 그때 울면서 날 맞아주는 널보고 난 생각했어. 역시 유재휘도 나 아니면 안 되는구나. 그렇게 헤어져도 여전히 기다려주는구나. 넌 정말 나를 사랑하는 구나”
“……”
“왜일까? 난 왜 네가 날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왜 넌 나의 돌아올 곳이었을까…?”
“……”
“근데. 오늘 네가 날 먼저 두고 가는 순간 깨달았어. 상대가 내게 등을 보이는 행동이, 얼마나 커다란 상처로 다가오는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난 그걸… 오늘에야 알았어”
우현이 천천히 몸을 틀어 재휘를 봤다. 재휘는 이미 예전부터 우현을 보고 있었는지 바로 눈이 마주친다. 한기는 조금 가셨는지 이제 몸은 떨지 않는 재휘를 가만히 응시하던 우현이 재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미안해 재휘야. 미안해… 너의 희생을 모른척한 나를… 용서하지 마. 나는 어째서 네 웃음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매번 날 맞아주는 네 얼굴에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을까? 넌… 언제나 울고 있었는데”
아직도 약품냄새가 가시지 않은 재휘의 손끝을 매만지며 우현이 눈물을 흘렸다. 뺨을 그어 내린 눈물방울이 재휘의 손등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곧 쉴 새 없이 많은 눈물이 재휘의 손등에 떨어져 손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가만히 그런 우현을 보던 재휘가 입을 열었다.
“헤어지자”
“……뭐…?”
물기가득한 눈을 한 우현이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곧 싸늘하게 굳은 재휘의 눈과 마주쳤다. 여전히 우현의 눈에서는 눈물이 멎지를 않건만, 재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헤어져”
“재휘야… 제발”
“이 지긋지긋한 거, 끝내버리자”
“재휘야…… 제발… 그러지마… 제발…!”
“다 큰 남자새끼 우는 거, 하나도 감동적이지 않아. 그쳐”
“……!”
“너랑 나는. 끝났어. 7년 동안 이어온 끈질긴 인연. 끊어버리자.”
재휘의 얼음장 같은 말에 우현이 잡고 있던 재휘의 손을 툭 놓아버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고개 숙인 우현이 소리 없이 오열했다.
늦었다.
늦어버렸다.
뒤늦게 후회하기엔, 이미 10년이란 시간이 재휘를 전부 갉아먹어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흉하게 남은 흉터조차 제대로 봐주지 않았던 자신 때문에 이젠 자신을 사랑할 마음조차 남지 않아버렸다.
비싼 양복이 더러워지는 것도 모르고 엉엉 울고 있는 우현을 내려다본 재휘는 고개를 들어 보이지 않는 수평선에 시선을 던졌다.
바다너머- 대륙.
한국을 떠난 우현이 그 시간의 절반이상을 보내는 아메리카.
넌 그 너머에서 무엇을 했을까.
…….
하하. 그것 봐. 나도 널 모르잖아. 네가 날 모르는 만큼이나.
그동안 난 너의 무엇을 보고, 넌 나의 어떤 것을 보고 있었을까.
너와 내게 남은 게 무엇일까.
스스로를 향한 물음을 던진 재휘가 발걸음을 돌렸다. 뒤돌아 걸어가는 재휘의 모습에 우현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재휘는 빠르게 작아지고 있었다.
꽉 쥔 주먹에 들어온 모래알갱이들이 날카롭게 손바닥을 할퀴었지만, 우현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손안의 생채기보다, 심장에 새겨지는 아픔이 더욱 컸기에.
또한 자신의 뒷모습을 이렇게 비참한 기분으로 봐야했을 재휘를 이제야 알게 되어서.
그 후회에 자기혐오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죄지은 자신은 재휘가 자신을 잡았던 것처럼 차마 잡을 수도 없다.
짓눌러오는 무거운 마음에 우현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움직이지 못하던 우현이 여전히 좌절해있을 무렵.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사박거리는 모래를 밟는 조용한 걸음소리가 우현의 귀에 예민하게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가 이런 곳에 오나 싶었지만, 이것저것 생각하기에는 이미 머릿속이 팡 터질 것 같았기 때문에 차라리 귀를 막아버릴까 했다.
-자박자박. 탁탁
그런데 근처에서 소리가 멈추더니, 둔탁하게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소리가 나는 것은 근처에서 자신의 차뿐이라는 생각에 우현은 이 상황에 대체 누군가 싶어 짜증스럽게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은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라는 무언의 소리를 내지르면서.
“저기, 혼자 오셨나 봐요?”
“……?!”
“추운데 왜 거기서 그러고 계세요. 지금이 추운날씨는 아니지만 자칫하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에요. 바닷바람에는”
“……아니…”
“실연이라도 당하셨어요? 얼굴몰골이 말이 아니네”
“아…”
우현이 황급히 손등으로 대강이나마 얼굴을 닦아냈다. 물기가 한 움큼 배어나오는걸 보니 울기는 엄청 울었나 싶었다. 그런 우현을 가만히 보던 상대가 조근 조근하게 이야기했다.
“반갑네요”
“……?”
“저도, 여기서 실연당한 적이 있어요”
“……”
“어때요. 들어볼래요?”
우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상대는 먼 곳에 시선을 두며 회상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은 겨울이었는데. 눈까지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죠. 하지만 처음 오는 여행에, 폴짝폴짝 뛰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어요. 사랑하는 상대와 첫 여행을 떠났는데 내리는 함박눈이라니. 아무튼, 그랬죠”
“……”
“근데 그날따라 상대가 영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라구요. 뭐, 모르겠어요. 전부터 그랬는지는. 근데 그 안 좋은 기분을 건드렸던 걸까?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
“끝이었어요. 첫사랑이었는데”
“……”
“홀로 집에 돌아오는 길, 간신히 막차를 탔지만 이미 눈을 많이 맞아버린 상태라 감기가 오려는지 으슬으슬 몸도 추워지고… 몸에선 열이 오르는데. 날 내치던 상대가 어찌나 차갑고 매서웠던지. 마음 하나만은 얼어서 녹지도 않고 점점 더 차가워지더군요. 그때는 울면 눈에서 얼음이 떨어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내내 참았죠”
“……”
“가는 길은 함께였지만, 돌아올 때는 혼자였어요. 그리고… 다시 둘이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마저도 이젠 부질없는 것 같지만”
“저……”
“서로 사랑함에 부족함은 없었어요. 아니, 거짓이 없었죠. 그렇지만 우린 두 번이나 헤어졌어요”
“……그…”
“실패한거죠”
“……!”
우현의 말을 가로막은채 말을 이어가던 상대가 두르고 있던 담요를 걷어냈다. 그리고는 팔을 뻗어 우현의 어깨에 걸쳐주더니 꼼꼼하게 여며주기까지 한다. 가만히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우현이 막 떨어져 가는 상대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런 우현의 갑작스런 행동에도 상대는 놀라지도 않고, 장난기마저 어린 말투로 말했다.
“어때요? 실연당한 사람끼리. 실패한 사람끼리”
“…뭐…?”
그러더니 얼떨결에 우현이 잡아챈 손을, 상대는 오히려 꼭 마주 쥐었다.
“우리. 사귀어볼래요?”
“……?!”
“당신이라면 왠지 잘 맞을 거 같아요. 나랑”
“아…그…”
“싫은가요?”
우현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실망감을 감주치 못하며 상대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당황한 우현이 황급히 다시 강하게 잡아챘다.
“아니. 아니요. 아니! 싫지 않아요. 절대로”
놓칠세라 꾹 잡아 누르는 우현을 보며 상대가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이에요. 저도 당신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이름이 뭐죠?”
“…성, 성우현”
“난 유재휘라고 해요”
재휘의 얼굴에 감돌던 희미한 미소가 짙어졌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재휘를 마주한 우현이, 잡고 있던 손을 당겼다. 저항 없이 끌려온 재휘가 우현의 품에 안겼다. 재휘의 어깨와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우현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
“고마워… 아니, 고마워요…”
우현의 품에서 재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주 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우리의 10년은, 이제 없어.
사랑했지만, 사랑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은 이제 없는 거야.
너와 내가 어긋나고 틀어지기만 했던 아팠던 시간은, 과거가 된 거야.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반짝였던 그날처럼.
풋풋함이 사랑스러웠던 그날처럼.
하지만 어른인 이대로.
어렵게 다시 마주한 교차점에서
실패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조금은 성숙하게
손을 맞잡고 놓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아가면서 사랑하자.
누구의 등 돌린 모습도 보지 않는,
서로의 얼굴과, 같은 방향만을 볼 수 있는
그런 사랑을.
* * *
약 두 달 뒤, 세계의 각종 유명한 음악관련 매스컴에서는 한 가지 기사를 일주일동안 다루는 이례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 상황을 벌어지게 한 이는 바로-
18살의 나이에 생애 첫 콩쿨에서 우승하며 세상에 알려진 천재피아니스트 성우현. 음대를 졸업하고 그 실력을 인정받은 이후 세계 곳곳 굴지의 음악가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며 각종콘서트에 초청되고, 단독콘서트도 수 십 번 열어낸 남자.
바로 그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지 채 3년을 채우지 않고 모국인 대한민국으로 주 활동무대를 옮기기로 선언한 것이다. 그 엄청난 행보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전문가들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일이라며 맹비난했지만 그의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 그의 결정은 음악계는 물론이거니와, 출중한 외모와 가끔 인터뷰에서 보여주던 멋진 매너, 위트에 반해 알게 모르게 두텁게 형성되었던 일반인 팬층까지 엄청난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런 혼란을 뒤로하고, 선언이후 오스트리아에서의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미련 없이 한국으로 떠난 그를 잡기위한 취재진들로 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에 있는 그의 본가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로부터 폭풍 같은 일주일이 지났다.
신문 기사를 읽고 있던 재휘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식탁위에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자신이 보던 기사를 잘 보이도록 착착 접어내더니,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감상하며 소파위에 길게 누워있는 이에게 휙 던졌다. 얼마나 잘 던졌는지 꽤 묵직해보이던 신문은 눈을 감고 있던 상대의 얼굴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윽! 뭐야”
“뭐긴. 여전히 시끄러운 네 소식이지”
“아아…”
아릿해져오는 콧잔등을 문지르며 일어난 우현이 헤드셋을 목에 걸고는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재휘가 던진 신문을 건성으로 훑더니 탁자위에 던져버린다.
“하루 이틀인가. 이제 슬슬 조용해질 때도 됐는데”
“여기까지 쳐들어올까봐 무섭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을지도?”
다 마신 커피 잔을 개수대에 내려놓은 재휘가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소파위에 편하게 늘어져있던 우현이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재휘의 뒤를 따른다. 졸졸 쫓아오는 그를 힐끗 본 재휘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훌렁훌렁 옷을 벗어젖혔다.
“으악! 너 뭐해!”
“뭐하긴. 출근준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볼 거 다 본 사이에 뭐 어때서”
“그게 문제냐…”
“왜. 아니면?”
막 반바지를 내리려던 재휘가 멍청히 서있는 우현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얇은 티 한 장 걸친 우현의 가슴께를 문지르면서 은근하게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하고 싶어질 거 같아서?”
“유재휘! 그러지 말라니까? 아저씨 같다고 했지!”
“흥”
물론 하고 싶어 질까봐-가 정답이긴 하지만, 저렇게 능구렁이처럼 자신의 몸을 더듬어가며 얘기한다면 말은 달라진다. 우현은 고등학생시절, 제 손이 재휘의 상의 속으로 들어간 정도로 화들짝 놀라 울먹이던-기억에 약간의 오류가 있다- 그 귀엽던 녀석은 대체 어디 갔냐며 속으로 절규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재휘는 반바지도 빠르게 벗고, 순식간에 바지와 셔츠를 입었다. 늘씬한 몸이 가려지는 것을 보면서 쩝 입맛을 다신 우현이 막 셔츠단추를 채우고 있는 재휘의 뒤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뒤에서 감싸 안듯이 팔을 둘러 재휘가 막 잠그던 단추를 풀어놓았다.
“뭐해?”
그 황당한 행동에 재휘가 어이없어하며 다시 단추를 잠그지만 질세라 우현의 손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잠그고 풀고를 몇 번을 했을까. 결국 재휘가 팩 성질을 부렸다.
“야! 나 출근해야 된다니까?!”
“도발은 네가 했잖아”
“뭐어?”
맨 아래쪽 단추만 잠긴 셔츠의 카라의 뒷부분을 잡아당기자 쉽게 재휘의 목덜미가 드러났다. 슬쩍 입술을 묻은 우현이 쪼는 듯한 키스를 하며 재휘의 어깨선을 더듬는다. 뜨거운 숨결이 약한 부분에 닿아오자 재휘가 어깨를 움츠렸지만 우현은 멈추기는커녕 더 노골적으로 입술을 놀렸다.
“나 출근해야 된다니까…”
“아직 7시야”
“그래. 오전 7신데 하고 싶어?”
“응”
재휘가 황당해하며 묻는 물음에 고민도 없이 대답한 우현이 예고 없이 이를 세웠다. 살짝 깨물리면서 느껴지는 따끔하면서도 야릇한 통증에 재휘가 놀라 신음을 흘렸다.
“읏… 지각한단 말야”
“보내줄게”
“한번 시작하면 몇 시간은 안 놔주는 게 말은 잘하지”
“정말로”
재휘의 목덜미를 씹느라 발음도 부정확한 주제에 거침없이 나오는 우현의 대답에, 재휘가 ‘믿을 수가 있어야지…’하며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이제는 슬금슬금 셔츠 속으로 들어오는 우현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폭 내쉬고는 결국 제 손을 들어 잠겨있던 마지막 단추를 풀었다. 그리곤 그대로 뒤돌아 우현의 입술을 덮쳤다.
열렬한 호응에 잠시 멈칫했던 우현이 이내 페이스를 되찾고는 재휘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질척하게 감겨오는 것을 아플만치 쪽쪽 빨아들이며 슬금슬금 걸음을 옮긴 우현이 재휘를 침대 쪽으로 유도한 뒤 밀어 넘어뜨렸다. 여전히 입술은 서로 떨어지지 않은 채로 폭신한 침대에 몸이 잠기자 재휘가 잡고 있던 우현의 셔츠를 위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우현이 옷을 벗기는 것을 돕기 위해 살짝 상체와 팔을 들어 올리자 어느새 티셔츠가 방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자신의 옷이 떨어지는 것을 흘깃 본 우현이 자신의 노력으로 이미 앞섶이 모두 풀린 재휘의 셔츠를 벗기기 위해 재휘의 몸을 살짝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재휘의 움푹 패인 쇄골에 키스를 하면서 말했다.
“왜 이렇게 섹시하냐 유재휘. 돌아버릴 거 같아”
그 말에 재휘가 웃음을 터뜨렸지만 바로 입을 막아오는 우현 덕에 소리 내어 웃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은커녕 다른 어떠한 생각조차 하기 힘들 정도의 열락에 빠져들었다.
우현과 재휘가 세 번째로 시작하던 날. 우현은 예정대로 다음날 출국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랜 기다림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재휘도 선뜻 손을 놓아주었고 우현도 죄책감 없이 돌아섰다.
미국에 있던 매니저와 만나 프로젝트를 백지화시키고 미리 예정되어있던 중요한 콘서트 외에는 모든 자잘한 스케쥴을 캔슬 했다. 가능한 한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가능한 많은 일들을 거절하며, 하나하나 정리한지 2개월. 드디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자 우현은 공식적으로 활동무대를 옮길 것을 발표했다.
물론 고등학교와 대학시절 은사님들과, 스승님이 극구 반대를 하며 결정을 번복하길 권유했지만 우현은 완고했고, 밀어붙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해외를 떠돌아다니면서 쏟아 부었다면, 이제는 고국에 돌아가 그곳의 음악에 이바지 하고 싶다는 것이 고귀하다면 고귀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들은 우현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렇게 2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돌아온 우현은 모든 매스컴의 눈을 피해 재휘를 찾았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재휘는 그런 우현을 반갑게 맞이했고 큰 결정을 한 우현을 그러안아주었다.
그 이후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졸지에 백수가 되어버린 우현은 재휘의 집에 눌러앉았지만, 그를 돌봐줄 겨를도 없이 의사인 재휘는 연인이 어떤 상황이든 간에 꾀부림 없이 병원을 나가야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전처럼 오랜 헤어짐이 없으리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재휘가 출근한 새에 서로 떨어져있는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면서 이제 우리는 해피엔딩이구나! 했던 것은 잠깐, 재휘는 근래 들어 전보다도 육체적인 피곤함을 더 많이 느껴야했다. 그이유인 즉- 시도 때도 없이 우현이 엉겨 붙어 왔기 때문이었다.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에 4시간이상을 자지 못하는 재휘에게는 곤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한동안 못 치게 된 피아노에 쏟아 부을 힘을 이쪽에 퍼붓기로 작정했는지 몇 시간을 해도 지치지 않는 우현 덕에 죽어나는 것은 재휘였다. 처음에는 다음날 일에 지장이 생기는 바람에 며칠 동안 접근금지를 시켰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번 이렇게 못이기는 척 넘어가주는 이유는…
“하아… 사랑해. 재휘야”
“읏…”
“사랑해. 사랑해…”
“아…앗”
“사랑…해, 사랑…”
뭐…,
베갯머리송사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SIDE STORY : EPISODE 2. END-
*정말로 진짜로 끝났습니다. 감회가 새롭네요.
*어때요, 파경에 다다라가던 두녀석의 결말이 맘에드시나요?
달달함을 애타게 찾으시던 여러분들을 보면서 제 마음도 꽤나 조급했답니다.
알콩달콩함은 없어도, 그래도 달달한 끝이라고 제 스스로 위안을 삼으면서 이렇게 너의목소리, 완전히 마칩니다.
*뒷얘기를 한가지 하자면, 에피소드2는 총 여섯편입니다.
한편은.... 아시죠? 정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쓴 씬이지만 자체심의하에 통째로 들어내버렸습니다.
안타까운 현실 아닌가요? ㅠㅠ
*제가 목소리를 쓰기시작하면서 정말로 추천해드리고 싶었던 소설이 하나있는데,
인소닷 소설은 아니지만 상관없겠죠?
많이 bl소설쪽을 읽어보신분들이라면 보신분이 계실수도 있겠지만 제가 추천하고싶은 소설의 제목은
'반짝이던 여름'
이라는 소설입니다.
너의 목소리는 따라갈수 없을정도의 달달함과 상큼함, 순수함을 모두 겸비했죠.
제가 읽었던 모든 연애소설을 통틀어 가장 가슴떨리게했던 소설이 아닌가 싶네요.
자극적인 내용이 들어가있지 않다는 면에서 너의목소리와 부합하는점이 있어 추천해드립니다^^
윗 소설말고도 추천하고싶은건 엄청나게 많은데, 인소닷에는 딱히 추천글을 올릴데도 없네요
전파하고싶은 명작들이 많은데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그동안 댓글은 남기지 않아도 꾸준히 올라가는 조횟수를 보면서 제 소설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매일 뿌듯한마음이 들었습니다. 부족한 글솜씨로나마 제 글을 읽는 동안 여러분들이 즐거우셨다면 좋겠네요.
읽어주신분들과 댓글달아주신분들, 그리고 마지막까지 추천해주신 여러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차기작은 예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년 겨울 중요한시험을 앞두고있거든요. 하지만 결과가 좋다면 그이후에는 컴백을 할수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여러분들이 제 합격을 함께 기원해주신다면 조금더 확률이 높아질지도 모르구요. 하핳
<너의 목소리> - 우현과 재휘의 이야기
그동안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첫댓글 드디어 완결이군요!!! 이렇게 해피해질꺼면서 뭘 기리 고생했는지..10년만의ㅎㅎ
맨날 눈팅만하다가 이렇게 댓글남김니다.. 참 달달한 소설인거 같아요... 시험 꼭 합격하세요^^
드디어 끝이군요...정말 다행이에요...이들이 다시 시작하고 끝을 맺어서...
해피 마니아인 저의 취향에 딱 ㅎㅎㅎㅎㅎㅎㅎ
추천해주신 '반짝이는 여름'은 어디가서 읽어야 할까나...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찾아봐야겠네요.
저도 자극적인 것보다 달달하고 잔잔한게 너무 좋아요.
내년에 중요한 시험이 있다니 잘되길 빌어드릴게요.
다음에 다시 오신다면 기억하고 챙겨서 읽을게요.
그동안 글 쓰시느라 정말 수고하셨어요. 늘 행복하세요~~~
-반짝이는여름이 아니고 '반짝이던 여름'이네요. 치킨조님의 소설입니다 ^^
재미있게 읽으시고, 후속작으로는 '빛나던 가을' '찬란하던 겨울'도 있으니 그것도 함께 읽어보세요.
본문은 수정했지만 모르실거같아서 이렇게 대댓글을 답니다. 그동안 하와이갑부님과 댓글로 이야기 나누면서
즐거웠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완결이 되는군요. LST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감동을 안겨 주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시험에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잘봤어요 ㅋㅋ 마지막은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예요 ㅋㅋ 끝나서 좀 아쉽네요 ㅋ
작가님 진짜 수고 많으셨어요!
마지막 해피라서 정말 좋음^^
중요한 시험은 분명 잘 치루실거예욤!
끝까지 잘봤어요~~ 마지막에 해피라서 정말정말 다행있어요~~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어요 작가님
내년에 중요한 시험 꼭 좋은결과가 있을거예요~
젬있께 보고가요... 이제 완전히 끝나 버렸네요....
수고가 많으셨구요... 내년 셤도 열심히 준비하셔서 좋은 결과있으시길 기도할께요...
아아...다행이군요...ㅋㅋ
아웅~ 너무 잼있게 잘봤어요!! 유재휘 능구렁이가 다됬네요 ㅋㅋㅋㅋㅋ 엄마미서가 저절로~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내년 중요한시험도 열심히하셔서 꼭 합격하세요!! 화이팅~ 입니다용~^^
완전 재미있게 잘봤습니다~ㅋㅋㅋ 오랜만에 좋은 소설 한편보고 가네요^^
결국 해피엔딩이어서...너무나 흐믓합니다..
작가님..고생하셨습니다..
셤 공부 열심히 하셔서 꼬~옥 합격하시구..
또 오셔용..
항상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