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 산책 9>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10)
[My Review MDCCLXXIX / 인물과사상사 16번째 리뷰] 1960년대 미국의 대통령은 JFK와 LBJ이었다. 다시 말해,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말이다. 케네디가 3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 때 존슨은 부통령을 지냈고, 케네디가 암살을 당하자 대통령직을 위임 받았다가 3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진보적 정책을 착실히 실행하였다. 허나 두 대통령은 서로 경쟁 상대였다.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말이다. 그만큼 스타일도 달랐는데, 직무적인 능력으로 본다면 젊은 케네디 보다는 연륜 넘치는 존슨이 더 신중하고 착실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단다. 하지만 대중은 케네디를 더 선호했다. 아니 열광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텔레비젼이 널리 보급되던 시절이었기에 '보여주기'에 능했던 케네디가 미국 시민들에게 더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나 케네디는 '얼굴과 말만 번지르르한 무능한 대통령'이었다. 그가 하는 일마다 일은 꼬였고 성과는 극히 미미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섣불리 쿠바를 침공했다가 '소련제 미사일'이 미국의 앞마당(쿠바)에 설치되는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가에 위기를 초래하는 젊고 방탕한(?) 대통령이 못마땅한 것이었던지 케네디는 끝내 암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온갖 미스터리만 남기고 '암살자'로 지목 당한 오스왈드 또한,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케네디가 수 발의 총탄에 저격 당해 죽었는데, 오스왈드는 단 한 발의 총알만 쏘았을 뿐이고 그가 쏜 방향(5시 방향)과는 전혀 다른 (11시 방향)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케네디의 시신은 '공개부검'도 받지 않고 서둘러 장례식을 치뤘고, 케네디의 부인과 자식들은 장례식장에서 너무도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암살자로 지목된 오스왈드는 제대로 된 변론도 받지 못한 채, 1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고 재판장을 나오면서 기자들을 향해 무죄를 주장했지만, 그 순간 괴한이 등장해서 오스왈드는 총격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사망을 했다. 오스왈드가 총격을 받을 당시에 괴한을 저지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괴한은 너무도 순순히 체포되었다. 이렇게 케네디의 암살은 '음모론'이 만들어지기 딱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JFK>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였단다.
하지만 케네디는 미국시민들에게 '전설'로 남았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발표했던 연설은 미국인들에게 '뉴 프런티어'를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은 위대한 사회다...그런 미국의 정부는 해줄 것이 없다. 오히려 국가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기보다는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미국인들 자신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메시지로 전해지며, 위대한 미국은 미국인들의 '개척정신'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열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젊은 대통령이 이렇게 말을 하니, 뭔가 있어보인 것도 사실이다. 이런 대통령이 젊은 나이에 암살을 당하니, 미국인들의 마음속에는 그가 한 일이 별볼일 없었다는 사실보다 그가 추켜세워준 '미국인의 자긍심'에 더 열렬히 반응했던 것이다.
이런 '케네디의 전설'을 가장 싫어했던 인물이 바로 '린든 존슨'이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스타일이었고, 자신이 공약한 것은 '해내고 마는 실천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텔레비젼 시대'에 걸맞지 않게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어눌한 말솜씨에 긴장한 것이 역력한 굳은 표정을 짓곤 했던 탓에 국민들로부터 그닥 호감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카메라'나 '녹음기'가 없는 곳에서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탁월하게 직무를 다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케네디보다 존슨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지만, 호사가들에겐 존슨은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을 뿐이다. 그랬던 탓인지 존슨은 '케네디'를 너무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열정적으로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대중 앞에서 활짝 웃기만 해도 "케네디를 따라한다"한다는 언론의 반응을 받게 되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도 전한다. 그는 그렇게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될 운명이었다.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발을 담근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고 말이다.
60년대 미국 사회는 '마틴 루터 킹'과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시끌벅적했다. 링컨 대통령 시절에 '흑인노예 해방선언'을 했는데도 미국사회는 여전히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은 '한국전쟁'에 이은 또 하나의 '이기지 못하는 전쟁'에 참전했다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더구나 '공산주의 팽창'을 막고 세계 평화를 위해 참전을 한다는 명분에 걸맞지 않게 '사살한 베트콩의 귀를 잘라내는 장면'이 텔레비젼 방송을 통해 전세계에 송출된 것을 지켜본 미국시민들의 '반전시위'는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미정부는 서둘러 '참혹한 전쟁 참상'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으려 하지만,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입까지 막을 순 없었다. 더구나 참전용사들 가운데 '흑인병사들'에게는 더 위험한 전투에 투입하는 '차별'이 자행되자, 인종차별에 반전시위까지 미국사회는 발칵 뒤집어지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1961년 박정희는 5·16 쿠테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미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지만 케네디 행정부는 박정희를 푸대접하고 만다. 하지만 63년에 케네디가 암살 당하고 64년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자 린든 존슨 행정부는 박정희에게 '월남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이를 받아들인 박정희는 린든 존슨에게 환대를 받았고, 박정희도 린든 존슨을 격렬하게 대접한다. 이렇게 한미간의 혈맹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지만, 날로 커져가는 '공산진영의 확장'에 맞서 한미일 공조를 견고하게 쌓고 싶어하는 미국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국민들은 격렬하게 반일시위를 벌이며 '반성과 사죄 없는' 국교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며 결사반대를 외치지만,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던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강행하게 된다.
이런 한국국민들의 반대시위를 무마하기 위해서 미국은 '한국경제의 빠른 성장'이라는 선물(?)을 마련하는데, 이른바 '경제성장 5단계설'이다. 날로 확장되는 '공산진영'과는 상반된 성공 케이스로 한국이 낙점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의 경제성장 시나리오를 마련하고, 한국의 수출품을 미국이 대량으로 사들이는 정책을 폈으며, 한국이 원활한 수출을 위해서 필요한 자금은 '일본배상금'이 아닌 '일본차관'으로 충당하는 방식으로 성사시켰다. 당장 배가 고팠던 한국의 경제 상황으로서는 피치 못할 '당근책'이었으며, 이로써 한국경제는 기적과도 같은 성장세로 쑥쑥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제성장이 달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주도로 밀어붙인 '한일 국교정상화'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도 없고, 배상금도 한 푼 들지 않은 '면죄부'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해국에 대한 처벌은커녕 '피해국의 위기'를 이용해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으로도 모자라 '부당한 논리'로 벌어들인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피해국을 '놀림거리'로 삼는 일본의 우익집단들의 행패가 날로 심해지는데도 이에 대한 제지도 하지 않고 '당연한 귀결'로 치부하고, 미국은 이를 그저 방관만 하며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태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을, 과연 '무엇'으로 납득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는 절대적으로 미국의 무지에서 비롯된 처사다. 미국은 고종황제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미국 사회에 날로 번져가는 '반전시위'로 베트남에 파병할 장병이 절대부족해지자 미국정부는 '우방국(?)'들에게 월남 파병을 요청하는데, 이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나라가 바로 '박정희 정부의 대한민국'이었다. 그렇게 비전투병력인 '비둘기 부대'를 시작으로 '청룡, 맹호 부대'에 이어 '백마 부대'까지 수많은 국군장병들이 파병되었지만, 그렇게 파병된 '한국군'이 받는 월급은 미군의 6분의 1, 필리핀이나 태국 군인의 4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군도 미군과 똑같은 수준으로 월급을 올려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과 시위가 있었으나, 미국정부는 난색을 표명했다고 한다. 애초에 '용병 취급'으로 값싼 비용으로 합의한 박정희 정부의 요구와 상반되기 때문이란다. 과연 미국은 '대한민국'을 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미국을 '우리'는 어떻게 요리해야 마땅한 것일까?
'굴욕외교'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우방'이니 '혈맹'이니 떠들기에 앞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얻는 것'도 없이 '퍼줄 것'만 생각하는 자세가 바로 '굴욕외교의 시작'이다. '우방'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차원에서 '도청'을 허용할 거라면 공평하게 서로 도청하는 것을 '합법화'해야 한다. 미국의 대통령에게 대놓고 욕할 자신은 없으면서, 대한민국 입법부(국회)를 향한 욕지거리였다는 변명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세가 '굴욕외교'란 말이다. 외교관계에 '겸손'을 떨 필요는 없다. 서로 '자국의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갈라서는 것이 '외교관례'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외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미국의 약점'을 파헤쳐서라도 미국을 꼼짝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다 못해 '대의명분'에서라도 미국보다 우위에 서서 미국 스스로 쪽팔리게 만들어야 '다음 외교'에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법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약소국의 비애'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그러니 외교에서 절대 물러서는 모습이나 뒤처지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꿀리지 말라!' 국제관계는 '힘의 논리'로 결론이 나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된 '대의명분'이 더 크게 작용하는 법이다. '고려거란전쟁'에서 거란이 고려에 참패한 것도 '외교전'에서 기선제압을 당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란은 고려를 침공할 '명분'이 없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땅의 대부분을 차지했더라도 진정한 '고구려의 후예'는 고려가 가질 수밖에 없었기에 거란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고려침공을 했음에도 실패하고 만 것이다. 반면에 절대적인 약세였던 고려는 '대의명분'에서 꿀릴 것이 없었기에 싸움에 나서서도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명분 위에 '실력'이 더해지니 불리했던 것이 유리하게 작용한 셈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인 실력에서 미국은 대한민국을 '압도'한다. 하지만 미국은 절대로 한국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 발을 빼는 순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이어 지금까지 '휴전'하고 있는 한국전쟁까지 패배라는 불명예를 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의 이익이 없어 한국에서 발을 뺀다하더라도 그 순간 미국은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러시아보다 형편없는 실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기에 미국은 더욱더 한국과 긴밀히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이 미국에 설설 기는 굴종외교를 이어가는가? 과연 굴종외교를 통해 한국이 얻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절대로 고개 숙이지 말라. 우리는 미국을 철저히 이용해 먹어야 할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미국이 일본에게 '면죄부'를 줘서 대한민국이 '대신' 받은 불이익과 불명예를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착실히 힘을 키워나가 미국과 일본에게 퍼주다시피 내어준 '국익'을 톡톡히 받아내야만 한다. 그러기 전까지 미국은 절대로 대한민국을 등쳐먹고 내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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