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 도전 가능
마음 챙기기 백성호의 예수뎐2
그는 초라한 젊은이만 봤다, 빌라도가 못 본 ‘예수의 왕국’
카드 발행 일시2023.06.24
에디터
백성호
백성호의 예수뎐2
관심
(39) 예수의 왕국과 빌라도의 왕국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서자 빌라도가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들의 임금이오?”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마태오 복음서 27장 11절)
예루살렘 일대에서 하늘의 뜻을 전하던 예수는 결국 성전경비병에게 체포됐다. 재판권을 가진 로마 총독에게 넘겨진 예수는 결국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던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예수는 왜 그렇게 답했을까. 유대인의 임금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는 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했을까. 그들의 생각과 예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는 ‘왕국’과 예수가 보는 ‘왕국’은 달랐다.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요한복음서에는 예수의 답변이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신이 유대인들의 임금이오?”라는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준 것이냐?”(요한복음서 18장 34절)
이 말을 들은 빌라도의 표정이 어땠을까. 예수를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빌라도는 솔직하게 말했다.
“나야 유대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이 말을 듣고 예수는 비로소 자신의 왕국과 빌라도가 묻는 왕국이 다름을 역설했다.
예수는 자신의 왕국과 빌라도 총독의 왕국이 다름을 역설했다. 갈릴리 호수 위로 새들이 날고 있다. 백성호 기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복음서 18장 36절)
이 말은 빌라도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빌라도는 ‘예수의 나라’를 보지 못했다. 예수의 내면에 깃든 신의 속성을 보지 못했다. 빌라도의 눈에는 그저 초라하고 왜소한 갈릴래아 출신의 한 젊은이가 서 있을 뿐이었다. 빌라도의 눈에는 이 땅의 왕국이 중요했다.
예수의 눈은 달랐다. 이 땅의 왕국은 잠시 존재하다 사라질 뿐이다. 제아무리 큰 제국이라 해도 결국 소멸하게 마련이다. 로마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제국은 없다. 그런 왕국은 예수에게 속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예수의 나라는 사라지려야 사라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태초 이전부터 있었던, 본래부터 있었던 신의 속성이다.
그 말을 들은 빌라도는 초조해졌을까, 아니면 궁금해졌을까.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길. 가톨릭 수도원의 수사들이 이 길을 따라가며 묵상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이 말을 듣고 예수는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를 설했다.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복음서 18장 37절)
누구나 삶의 이유가 있다. 예수는 자신이 사는 이유를 간결하게 풀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I come into the world, that I should be testifying to the truth).” 그랬다. 예수가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온 이유는 하나였다. 우리가 사는 땅으로 걸어 들어온 이유는 하나였다.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진리(眞理)’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진(眞)실한 이(理)치다. 예수는 그것을 증언하고 증명했다.
예수의 증언은 세례 요한의 증언과 다르다. 세례 요한은 나침반이었다. 지팡이를 들어 진리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예수는 달랐다. 자신의 가슴에서 진리를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예수 안에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내면이 신의 속성으로 차 있었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불어넣었던 그 ‘신의 속성’ 말이다. 예수는 그것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어서 예수는 말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진리에 속한 이는 누구이고, 속하지 않은 이는 누구일까.
예수는 자신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말했다. 그가 품고 있던 하늘나라의 속성, 신의 속성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갈릴리 호숫가에 피어 있는 들꽃. 백성호 기자
성경을 읽다 보면 간혹 갑갑할 때가 있다. 무언가 한 발짝 더 들어갈 필요를 느낄 때다. 예수가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지가 궁금해질 때다. 그럴 때면 나는 종종 묵상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어 성경을 펼쳤다. 성경은 처음에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번역 과정을 덜 거친 예수의 ‘말’이 거기 어딘가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리에 속한 이’는 그리스어로 ‘pas ho on ektesaletheias’이다. 영어로는 ‘every the one-being out of the truth’, ‘진리로부터 나온 모든 존재’다.
〈40회에서 계속됩니다. ‘백성호의 예수뎐2’는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천 가지 재물보다
한 시간의 배움을 더 기뻐하신다.”
배움과 자녀 교육을
무척 중시하는
유대 민족의 격언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대인의 배움에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정통파 유대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간 적이 있습니다.
교실에 들어섰을 때
상당히
낯선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귀밑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정통파 유대인들이
백과사전만큼 두꺼운 책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웅성웅성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모습이
좀 특이했습니다.
한눈에 봐도
선생님으로 보이는
연세 많은 랍비가 앉아 있고,
그 앞에
학생 두 명이 마주 앉아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토라와 탈무드 등
유대 민족의 경전 내용에 대해
서로 자신의 의견을 내놓으며
깊은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참 열심히 공부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유가 있더군요.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공부하면서
율법에 담긴 섭리를 이해하고,
그걸 통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유대인에게 율법 공부는
일종의 수도(修道)라고
부를 수도 있겠더군요.
율법에 담긴 이치,
다시 말해
신의 섭리를
이해하고 깨닫기 위한
과정이니까 말입니다.
그걸 알고
이 구절을
읽어보니
감회가 다르더군요.
“하느님은 천 가지 재물보다
한 시간의 배움을 더 기뻐하신다.”
한 시간의 배움이란
한 시간만큼
신에 더 가까이,
신의 속성을 더 알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율법의 종교라고만
알고 있던
유대교에도
깊이 들어가 보면
어김없이
수도의 과정이 있습니다.
다만,
그 방식과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
나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접할 때는
나 중심의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생각도 열고
마음도 열고서
말입니다.
그럴 때
나의 종교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지는 법이니까요.
에디터
백성호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1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