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에 등장하는 9파1방 중에서 소림, 무당, 아미, 곤륜, 화산, 점창 등의 6파는 대부분 공통으로 속하나 청성, 종남, 공동, 장 백, 형산 등의 문파는 작가의 취향에 따라 등장하기도 한다. 1방은 개방이다.
소림사 (少林寺)
9대문파의 태산북두 격으로 불교를 바탕으로 한 문파다. 불교에서는 중국 선종, 특히 임제종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소림사의 내력>
위치:소림사는 하남성 등봉현에 있는 숭산의 소실봉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소림사라는 이름은 '소실봉의 북쪽 숲 속에 있다' 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창건:흔히 소림사는 달마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사실은 약 1,500여 년전 북위의 효문제 때(495년) 인도에서 온 발타선 사가 창건했다. 전설에 따르면 발타선사는 여섯 명의 친구와 함께 출가했는데 친구들은 모두 성불하고 발타만 부처가 되지 못하였다. 그래도 낙망하지 않고 구도의 길을 떠난 발타는 마지막으로 중국에 이르러 효문제를 만나게 되고, 효문제의 명으로 소림사를 세웠다. 그는 30년간 소림사에 머물다가 떠났다고 한다. 이 소림사의 창건에 대한 역사는 <위서석노지>, <배최비>, <경덕전등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 얼마 뒤인 효명제 3년(527년:발타선사가 소림사를 떠난 뒤 불과 이 삼년 후에), 그 유명한 보리달마가 소림사를 찾는다. 중국무술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신승 달마는 석가모니의 28대 제자인데 원래는 남천축에 있는 향지국의 셋째 왕자였다. 그는 인도를 떠나 바닷길을 통해 동쪽으로 와 제일 먼저 광동성의 광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불법을 전파하며 양자강을 건너 소림사로 왔는데, 그때 갈댓잎을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신통력을 보여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일위도강'의 전설이다. 달마는 숭산의 오유봉 위에 있는 천연석굴에서 면벽 9년의 수도에 들어간다. 깊이 두 장 반(약 7미터), 너비 한 장(약 3미터) 남짓한 이 동굴은 그로 인하여 달마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면벽 9년 동안 달마가 마주보고 앉았던 돌에는 달마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버렸다고 전해진다. 거무스름한 빛이 도는 흰 돌에 좌선하는 달마상이 검은 색으로 찍혀진 이 '면벽석'은 높이가 석 자쯤 되는데 나중에 동배전(아미타전에 해당 되는 소림의 전각)으로 옮겨져 유리상자 안에 모셔지게 되었다. 달마대사는 후에 보리유지와 광통율사의 질투로 독살당한 뒤 관 속에 신발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에 인도에 갔다 오던 위나라 사신 송운이 인도로 돌아가는 사후의 달마대사를 만났다고 한다.
<소림사의 구조>
고루는 원나라 때의 초조암이며, 본전은 송나라 때의 목조건축이다. 본전의 내부에는 인왕, 용 등을 부각한 석주가 있다. 그 밖에 다수의 당송 이후의 석비, 동위의 삼존불, 북제의 조상 등이 있다. 본전의 앞에는 소림사의 승려들이 권법을 수련했다는 상석이 있고, 경내의 깊숙한 곳에는 역대 고승들의 묘와 석탑이 숲의 나무처럼 서 있는 탑림이 있다.이 외에도 각종 무공비급과 불교의 경전들을 보관한 장경각, 소림사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접대하는 지객당, 소림사의 노승들이 보다 높은 불법을 수도하는 계지원의 양심당, 소림의 제자들의 규율을 감독하는 계율원, 소림사의 장문인이 기거하는 방장실, 방장실을 앞뒤로 에워싸고 있는 팔대호원, 영화로도 익히 알려진 소림고수들의 무공연습실인 소림36방, 소림의 절정고수들인 18나한들의 거처인 나한전 등이 많이 알려진 장소들이다.그밖에도 작가, 혹은 작품에 따라 선대 고승들의 유골과 유품을 모아 놓은 조사전, 장로원 격인 장생전, 계율을 어긴 승려들을 가두는 참회동 등이 무협소설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소림사의 조직>
소림사의 장문인은 방장이라고 부른다. 방장이라는 칭호는 원래 천축의 유마거사가 처음 호칭한 말로, 불법을 많이 닦은 고승들이 주로 사방 1장(:3미터) 정도 되는 좁은 밀실에서 도를 수련한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대체로 방장 밑에는 그를 호위하는 8대호원이 있는데 그들중 우두머리는 감원이라고 한다. 4대금강이나 18나한은 자주 등장하는 것이고, 그들 외에 10계10승이 있다.10계10승이란 불교에서 승려들이 지켜야할 10가지 계율을 관리하는 승려 들을 말하는데 이들의 절 안에서의 위치는 상당히 높았다. 10계란 살계, 투계, 망어계, 기어계, 음계, 주계, 악구계, 탐계, 진욕계, 치계의 10가지로, 이를 주관하는 승려들을 각기 살계승, 투계승... 등의 명칭으로 불렀다.
<소림사의 배분>
소림사의 배분은 엄격해서 윗 배분의 인물들에게는 절대 복종하였다. 명나라부터 청나라 순치년간까지의 소림승려들은 대부분이 현자 배를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고 무협소설에서는 각기 다른 배분이 나오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느 자 배분이 우선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대체로 무협소설에 많이 등장하는 소림사의 배분을 가나다 순으로 기술하면 아래와 같다.
-각, 계, 공, 광, 굉, 담, 대, 덕, 도, 료, 명, 묘, 무, 방, 백, 범, 법, 보, 불, 심, 연, 영, 오, 운, 원, 언, 이, 일, 자, 정, 종, 지, 천, 해, 현, 혜, 홍....
<영약 및 신물>
소림사의 영약으로는 무림제일의 성약이라고 까지 불리우는 '대환단'과, 그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역시 놀라운 성능을 지닌 '소환단'이 있다. 소림장문인의 신물은 녹옥으로 만든 지팡이인데 흔히 '녹옥불장'이라고 한다.
<소림사의 무공>
(1) 역근경
소림사의 무공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역근경>과 <세수경>일 것이다. 이중 <세수경>은 실전되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역근경>만 전해지고 있다. 아쉬운 것은 지금 전해지는 <역근경>들이 하나같이 청나라 이후에 제작된 것들 뿐이어서 달마대사 때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역근경>은 모두 네 가지인데 제각기 내용이 다르다. 역근경의 행법은 팔단금과 같이 신체강건법의 일종이며, 기혈의 유통과 운행을 도모하여 근육과 근골을 개조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내공
소림사는 원래 내가기공보다는 외문무공에 더욱 정통하다고 알려져 있다.하나 소림의 내공은 불가의 신공으로서 항상 천하무림에 첫손가락을 꼽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8나한공이다. 십팔나한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인공수 패왕거정 좌우삽화 고수반근 야차탐해 추창량격 위타헌저 노승입선
철우경지 청룡파미 .좌우편마 연자탁수 호분인신 .진단대곤. 부자삼청례.이어타정
장료헌포 금구괘옥병
다음으로 무협소설에 많이 등장하는 소림의 내공은 아래와 같다.
-반야신공, 대승범천신공, 반야대능력, 무상대능력.
(3) 권법
소림사만큼 많은 권법을 가진 문파도 없을 것이다.소림사 하면 그야말로 권법에 관한한 천하제일을 자랑한다. 무협소설 속에서만 전해지는 권법에서부터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권법까지 그 수는 그야말로 수십, 수 백 가지에 달한다. 우선 소림사하면 달마대사가 만들었다는 달마18수가 유명하다. 달마18수는 달마대사가 소림사에 있을때 절의 중들이 신체적으로 매우 허약한 것을 보고 신체를 강건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했다고 한다. 일명 나한18수라고도 부르는데 현재 소림에는 모두 세 가지 종류의 나한18수가 전해지고 있다.달마대사의 나한18수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중화민국 초기에 <선천나한십팔수도세>라는 화산 요씨의 구장본에 갑자기 나타난다. 이 선천나한18수외에도 달마18수가 있고, 다시 나한18수가 전해진다. 달마18수 외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소림의 유명한 권법으로는 '소림5권'을 들 수 있다. 바로 달마대사가 용, 호, 표, 사, 학의 다섯 가지 동물의 동작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소림5권에는 무수한 전설이 전해지는데, 의성 화타가 만든 오금지희를 응용했다는 설에서 부터, 달마의 나한18수를 금원시대의 유명한 고수인 백옥봉이 128 수로 늘려서 다시 이것을 5권으로 정리했다는 설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그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를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지금 소림5권은 분명 전해지고 있고, 그것에서 현존하는 거의 모든 중국의 권법들이 파생된 것이 사실인 이상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억울하게 소림사에서 나온 장삼봉이 세운 문파로 짧은 시간에 소림과 더불어 무림의 양대산맥으로 불리워질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불가인 소림사와는 달리 도가 쪽에 속하고 무공도 소림의 강맹한 무공과는 달리 부드러움을 위주로 하고 특히 검법에 뛰어나다.
<무당의 소재지>
무당은 산의 이름으로 호북성 균현에 위치해 있다. 남웅주기에 의하면, 무당산은 하늘로 높이 솟아있고, 그 모양은 향로 같으며 사시사철 안개에 싸여 있다고 한다.그리고 형주기에 의하면, 무당산은 균현 남쪽 이백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오악의 하나라 한다. 수경주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무당산은 산세가 수려해 봉우리가 향로 같으며 증수가 산기슭에서 발원된다.' 무당산기에는 보다 자세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 '무당산의 둘레는 사, 오백리. 많은 봉우리 중에 삼령이란 봉 우리가 있는데 높이가 이십여리에 달하며 늘 흰구름에 싸여 있다. 해가 이곳에서 떠올라, 이곳에서 저물어 또한 일조산이라 한다. 하여 많은 참배자가 모여들며, 도 관이 많이 세워져 있다.'여지기에 의하면, '무당산은 모두 72봉과 36암, 24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주봉. 일명 자소봉이라 한다.'삼재도회무당산도고에는 무당의 위치가 옛 이름으로 적혀 있다. '무당산은 양양부 균주성에 위치해 있다.'
<무당산의 이름과 신화>
형주기에 의하면, 무당산은 일명 선실, 일명 태화라 한다. 수경주에 의하면, 무당 산은 태화산, 혹은 삼상산, 혹은 선실이라 한다. 그외에도 무당산은 사라산, 태악, 대악으로도 불리워졌다. 무당산이란 이름은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원나라 대오룡령응만수궁비에 의하면,'양한 균방 부근에산이 있어 그 둘레가 팔백리에 달하니... 산의 이름은 태화였다. 한데 원무신이 이 곳에서 득도하여 이름을 무당이라 고쳤다. 원무신이 아니면 이 산을 당할 수 없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명나라 때 유삼오가 쓴 무당산오룡령비에 의하면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원천지기의 신이 건원씨 때 정락국에서 태어났다. 열다섯이 되던 해, 그는 요마를 소탕하겠다는 일념으로 부모의 곁을 떠났다. 하여 옥청자원군으로부터 무극상도를 전수받았다. 그후 바다를 건너 중원으로 돌아와 명산을 순례하던 중 어느날 한 산봉 오리에 올랐다. 당시 그 산에는 자소면양이란 요귀가 기거하고 있었으니 원천지기의 신은 검은 낙타의 뿔로 만든 검으로 요귀를 죽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했다. 그 산이 바로 무당산이다.' 원나라 성거천의 대천일진경만수궁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산봉우리의 최고봉은 남암이라 한다. 암앞에 동굴이 두개 있으니... 이름하여 대안황애와 천연정극풍천이라 한다. 위로는 뜬 구름 아래로는 가파른 절벽. 원숭이가 떼지어 살며 야수들이 우굴거린다. 사람은 이곳으로 한 걸음도 들여놓기 어렵다. 그런데 용한년대 허위지정이 내려와 사람으로 둔갑하여 이 산에서 수도를 했다. 도를 터득한 후 그는 용을 타고 승천하였으니 원무지신이라 한다.' 이러한 신화는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원나라 사람 식자홀이 그 전설의 허구를 파해쳤다. 그가 저술한 무당 사적서에 의하면, '임금의 명을 받들어 균주성에 부임했다. 무당산이 복지라는 것을 일찍이 전해 들은 것이 있어 전설에 대한 사실을 파헤쳐 나갔다. 그러나 모든 사람 의 애기가 제각기 달라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당 기공의 종류>
무술적 기공의 단련법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북숭소림, 남존무당>이라 하여 숭산의 소림사와 태극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무당파의 기공법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당파의 기공, 즉 무당공은 무당도인 서본선의 <<무당비공>> 이라는 책에 그 종류와 연공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천화포접공, 구궁장공, 건곤구공, 야행술공, 현무공, 유골공, 연경공, 차장공, 태극구공, 면장공 등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 사항>
무당파는 장삼봉이 세운 문파가 아니라 적어도 당나라 말기에는 성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교의 일파로서의 무당도는 원나라 말기에 전란에 의 해서 거의 파괴되었다가 명나라 성조 영락제에 의해서 부흥되었다. 성조는 1412(영락 10)년 칙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당산은 천하의 명산이고 현천상제를 모시는 곳이라 도관이 있었는데 원말의 소란으로 모두 타 버리고 말았다. 자신은 즉위할 때 신명의 가호를 받았기때문에 무당산에 도관을 건립하여 태로부처의 영을 위로함과 동시에 천하만민의 복을 기도하려 한다고.... 성조는 삼십여 만명을 동원하 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현천옥허궁(玄天玉虛宮), 흥성오룡궁(興聖五龍宮), 대성남암궁(大聖南巖宮), 태현자소궁 등 네 도 관을 건립했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이 외에도 다섯 개의 도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도관에는 많은 전답이 하사되고, 면세특권이 주어졌다고 한다. 성조가 이런 일들을 한 것은 사실 무당도에 귀의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저명한 도사였던 장삼봉을 자신의 측근에 두려했다는 설이 있다. 확실히 장삼봉은 무당파와 관계가 있었고 벽곡에도 뛰어났기 때문에(즉 도력이 높았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또 그가 무당파의 부흥에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성조는 호북성 방면의 인심을 사려 했는지도 모른다. 무당파는 성조의 도관 건립에 의해 경제적 기초가 확립되고 동시에 도록사(당시 도교의 관리를 맡았던 관청)의 한 자리에 무당파의 도사가 임명되어 도교의 관리 행정면에도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무당파는 연단과 구사(驅邪)를 본령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영종 때부터는 환관이 무당산을 관리하게 되어 그들에 의해 이용을 당하기도 했다 (<도교사> 참조)
화산파(華山派)
위치: 섬서성 화음현 화산의 서쪽에 있는 연화봉 정상.전설에 의하면 천시인 거령이 자신의 초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황하 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던 화산을 손발로 뒤흔들어 두동강이를 내버렸다. 화산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황하가 흐르게 되었고 화산에는 그 흔적이 남게 되었다. 이것을 고장이라 한다.
절기: 청운적하검(운하환생 등), 검법(72파검, 청운적하검), 수(대라산수, 수 양대구수), 신공(응원공, 청명심법, 영석신공), 기타(암향표).
공동파
9대문파의 하나. 정파라고 하기에는 사악한 면이 많아서 오히려 정사의 중간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위치: 감숙성 공동산.
내력: 옛날 황제가 은자 광성자를 찾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절기: 복마검법(위타복마 등), 육합구소신공, 복마장법, 개천풍운조, 음풍조.
개방
거지들만으로 이루어진 문파로 일명 궁가방이라고도 한다. 9파일방의 1방이 바로 이 개방이다
모산파(茅山派)
대강 3세기 말에서 4세기에 걸쳐 발생한 문파로 옥주궁파라고도 한다. 이 파의 개조는 삼모군 또는 진의 관리인 위서의 딸인 위화존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위화존의 일화는 <모산지> 제10권 [상청제일대태사] 편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위화존은 24세 때 부모에 의해 억지로 어떤 남자에게 시집 보내졌는데 그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얻게 되었다. 남편이 하남성의 현지사로 발령 받았기 때문에 임지로 동행하였으나, 그녀는 남편과는 다른 방을 사용하며 부부의 교합을 금하고 재계하고서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하였던 도교의 책을 읽으며 참깨와 다른 약초를 먹곤 하였다. 그러던 중 태강 9년(288) 12월 16일 한밤중에 돌연히 태극진인 등의 선인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31권의 도서를 주었다. 그녀는 81세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는데 거기에서 서왕모의 영접을 받아 자허원군이라고 하는 선녀의 자리를 얻었다.'
모산파는 남북조 시대에서 당대에 걸쳐 불교와의 논쟁에 큰 활약을 하여 교리에 밝았으나 후대에는 많이 약화되어 방랑 및 탁발행을 하여 주문 및 부적 쪽의 법술 면을 치중하는 문파로 많이 변모되었다.
당문(唐門)
위치: 사천성 성도 부근
특징: 암기와 용독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명가들을 배출하는 무림세가. 조금이라도 빚진 것이 있으면 넘어가는 법이 없어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암기제조법과 암기술, 용독술을 유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데릴사위제를 채택하고 있다.
암기: 독질려, 혈적자, 비황석, 단혼사, 육
혼망, 귀왕령 등 수십, 수백종.
절기: 만천화우, 비황진
전진교(全眞敎)
도교의 문파로서 도문의 종주라고 일컬어졌던 문파이다.
송나라말 도사 왕철(호는 중양자)가 창시하였다.
좌선과 수행을 중시하며 유교, 불교, 도교를 조화시킨 실천적, 서민적인 특색을 가졌다.
재래의 도교가 써 오던 약이나 부적에 의한 불로장생의 법을 배척하고 주, 색, 재, 기(酒色財氣)의 네 계율을 엄격히 따졌는데,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최근까지 큰 세력을 가졌었다.
특징: 오대산, 아미산, 구화산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4대 명산.기원: 1,000년전, 남해 관세음이 보타산과 이웃하고 있는 작은 섬 낙가산에서 불교를 포교했다 한다.
10세기경, 일본 승려 혜악이 산서성 오대산에서 관음상을 모시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중 귀로에 배가 암초에 걸렸으나 배가 닿은 곳에 절을 짓겠노라고 빌었던 바, 배가 암초로부터 떨어져서 보타산에 당도했다. 그 땅에 불배거암을 세웠는데 그것이 지금의 보제사(普濟寺)이다.
최성기에는 산 중에 대소 300여 개의 절이 있었고 3,000명의 승려들이 생활 했다고 한다.
무협 속에서의 보타문: 남해 보타암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 보타문은 비구니(여승)들로 이뤄진 청정도량으로 남해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나온다. 강호상의 위기가 닥치지 않으면 거의 출도하지 않는 은둔세력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소림, 무당과 더불어 정파 무림의 지주로 검공에 강한 것으로 묘사된다. 보타문의 의발을 이은 사람은 검도의 절정고수로 검후(劍后)로 묘사된다.
해남파(海南派)
위치: 해남도 여모봉.
특징: 모두 검날을 기울여서 검을 휘두른다. 이것은 완전히 정도에서 어긋났으나 기세가 번개 같이 빠르며 지극히 날카로웠고, 한 번 검식을 펼쳤다 하면 반드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야 만다.
제갈공명의 후손으로 묘사되는 이른바 제갈세가가 나올 경우에는 쾌검과 중검 등 절대검공으로 이름높은 무림세가로 나온다.
5대세가, 또는 4대세가의 일원으로 9파1방과 더불어 정파무림의 또다른 지주이다.
정파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천하 무림을 장악하려는 위선적인 세력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진주언가(晋州彦家)
언가권으로 유명한 진주언가는 권법과 강시술 등으로 유명한 무림세가이다.
기괴하고 악랄한 수법으로 경원시되고 있지만 사파는 아니며, 정사 중간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에 따라서는 사파로 묘사하기도 한다.
모용세가(慕容世家)
중국사람들이 오랑캐라고 천시하는 세가. 모용은 진시황에 의해 통일되기 이전의 7개국중에서 연나라 왕족이다.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해준 전진이나 동진도 연나라의 후손. 그리고 위로 올라가면 우리 민족과도 가깝다.무협소설에서는 무림제패를 꿈꾸는 나쁜 사람으로 나오기도 한다.
뇌음사(雷音寺)
천축에 있던 전설적인 밀교 사찰. 소뇌음사가 사악하고 이기적인 문파로 묘사되는 것에 반해, 대뢰음사는 공명정대하고 중생제도적인 문파로 묘사된다.인도의 소승불교적 전통과는 어울리지 않는 대승불교적 설정이라 보인다.천하에서 가장 강하고 빠른 번개를 본딴 기공과 장공, 검공을 주된 절기로 가지고 있는 문파로 묘사된다.
포달랍궁(包達拉宮)
서장(티벳) 황교의 법왕 달라이대라마 거주하며 집무하던 궁전으로 서장 무예의 총본산이다.
위치: 서장 납살 서북부의 마부르 산 위내력: 기원 7세기에 장왕 쑹찬깐브가 당나라 문성공주에게 지어준 건물로 방이 999칸, 원래의 홍루까지 합하면 1,000칸이다. 후에 수 차례의 증축을 거쳐 현재의 부지는 41헥타르, 궁전 주건물 13층, 높이 110m이다. 궁전 건물 중 5개의 지붕은 금도금 구리기와로 덮여 금빛 찬란하고 기세가 웅장하다. 포달랍궁은 홍궁과 백궁으로 나뉘는데, 홍궁은 주로 종교 사무에 이용하고, 백궁은 주로 정치와 생활에 이용한다.
흔히 사악한 저주의 주문과 환법, 기문둔갑법, 술법으로 무장한 사파 무림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묘사된다.
황교(黃敎)
티벳 불교는 본교라는 그들의 독자종교에 당나라 이래로 전래 된 중국불교, 원나라 때 이뤄진 몽고식 불교를 통합해 발전하였다. 이때부터 정교일치의 흐름이 강화되어 17세기부터는 법왕이 포달랍궁의 주인이 되어 정치도 함께 담당하게 되었다.예전에는 중의 결혼을 허용하였지만(홍교, 홍 모교: 붉은 모자를 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이것이 타락과 세속화를 부채질하자, 손 카파(1357~1419)가 기존교단의 타락을 비판하고 개혁을 일으 켜 결혼을 불허하는 황교(간덴파, 황모교: 노란 모자를 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를 창시했다.그후 황교는 세인들의 환영을 얻어 급속도로 확산, 후에 달라이대라마의 원류가 된다. 지금도 티벳의 국가적 종교를 이루고 있다.
마교(魔敎)
페르시아에서 발생한 조로아스터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현교, 명교, 배화교, 마니교로 불리며 유행하였지만, 그 교리의 이질감, 극단적인 이분법, 하급 계층을 중심으로 한 신자들의 분포, 교리와 신자들의 계층적 성격 등으로 인한 반체제, 반정부 성향으로 인해 정부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고 지하로 숨어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송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한 방랍의 난, 원을 몰아내고 명을 세우는데 일조한 농민봉기(진우량, 주원장 등이 중심이 됨)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정부의 탄압에 대항한 일반 민중종교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주로 정부와의 우호적 관계가 자기 세력 유지의 관건이 되었던 사족, 세가에 기반한 무예가들은 이를 사교화하고 멸시, 배척하였다.무협소설에서는 극악한 마도의 종교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는 지배자의 입장을 반영한 관점에 기인한다.
팔극권(八極拳)
■ 팔극권의 특징 ■
팔극권, 정식명칭 [개문팔극권(開門八極拳)]은, 수 많은 중국권법 문파 중에서도 최대의 공격력을 자랑한다.일격필살의 가공할 파괴력은 [산을 무너뜨리고 흔들 정도의 돌격력]이라 일컬어진다. 그 공격력은, 양다리로 강하게 땅을 딛는 [진각(震脚)]이라는 동작에서 만들어진다.
팔극권은, 하반신의 진각이 만들어낸 힘을 상반신 부위를 사용해서 상대에게 가하는식으로, 전신을 사용한 동작에 의해 강한 파괴력을 발휘한다.전투자세는 몸의 중심선을 무너뜨리지 않고, 선 그대로의 상태에서 공방을 펼치는(이같은 무술을 입기(立技)계 격투기라고 한다), 타격 중심의 공격스타일을 갖는다.팔극권 전법의 특징으로는 [접근전(接近戰)]을 들 수 있다. [웅보호조(熊步虎爪)]라는 단어로 알 수 있듯이, 곰처럼 안정된 자세로 적에게 접근해, 호랑이같이 강맹한 단타를 처넣는다. 접근전에서 공격법은 장이나 권에 한정되지 않는다. 장이나 권 공격을 방어 당해도 연결된 동작으로 팔꿈치나 몸통 박치기 공격을 구사해 간다.
온 몸을 사용한 일격필살의 공격을 접근전에서 확실하게 처넣는다]는 것이 팔극권인 것이다.
■ 역사와 배경 ■
팔극권의 발상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명 대(1368-1644) 중기라는 것이가장 오래된 것이다. 명 대의 책인 {기효신서}에 등장하는 [파자권(巴子拳)]이 팔극권의 원형이 된 권법이라는 설이다. 팔극권은 주기( 技)를 사용할 때, [파자권]이라는 독특한 주먹 쥐는 법을 사용한다. 기효신서의 설은, 이 쥐는 모양과 명칭이 팔극권의 것과 닮았다는 점에서 왔다고 여겨진다.유감스럽게도, 팔극권 자체의 발상이나 창시자에 대한설은 어디에도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러나, 갖가지 발상설 중에, 청조 후기부터 자주 이야기가 전해온 오종(吳鐘)이라는 공통인물이 등장한다. 오종이 어느 선인(仙人)에게서 [팔극술(八極術)]을 익혀서이를 전했다는 것이다. 그 것의 진위여부는 불확실하지만, 팔극권은 청조 후기부터 확실히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 팔극권사, [이서문(李書文)]을 배출하게 된다.총조 후기 이후, 팔극권은 계속해서 명인이라 불린 권사를 배출했으나, 1864년부터 1934년을 산 이서문만은 못했다. 그가 무자수행 여행에서 연전연승을 거둠에의해, 군대가 팔극권의 우위성을 인식해 정식 과목으로 채용할 정도였다.또한, 이서문이 키운 몇 사람의 제자중 하나는, 청조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의 무술사범이 되어 팔극권의 지명도 상승에 크게 공헌하였다.
팔괘장(八卦掌)
■ 팔괘장의 특징 ■
팔괘장은, 그 이름이 나타내듯이, 장(掌)을 사용한 기법을 주체로 하는 권법이다.공격시는 장으로 상대의 점혈(급소)을 치고, 방어시는 상대의 공격을 장으로 받아서흘린다. 장과 발차기를 연결시키는 경우도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장을 쓰는 손기술을주체로 한다.또, 공방은 모두 원을 그리는 동작에 의해 이루어진다. 상대와의 간격을 맞출 때에는 주권(走圈)이라는 기법에 의해 원주(圓周) 위를 걸으며 상대의 측면이나 뒤쪽으로접근한다. 언제나 인간의 최대 사각인 뒤쪽으로접근해 공격을 해서, 상대에게 방어뿐만이 아니라 반격조차 하지 못하도록 한다. 공격기는 장을 내지르는 것이 아니라 팔을 휘둘러 치며, 방어는 상대의 팔을 비틀거나 돌리듯이 받아서 흘린다.팔괘장에서는, 한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도록 한다. 다른 문파처럼 딛고 들어가거나 멈춘 다음에 공방을 전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싸움이 시작되면 상대를 쓰러뜨릴때까지 끊임없이 계속 움직인다.팔괘장은 연속되는 원운동에 의해 높혀진 원심력을 발경의 원천으로 삼아 공격을 강력하게 만든다. 끊임없는 원운동으로 높여진발경을 장에 의해 상대에게 적중시킨다]는 것이 팔괘장인 것이다.
■ 역사와 배경 ■
팔괘장은 중국 권법 문파 가운데서도 새로운 것으로, 200년 남짓의 역사밖에는 갖지못하고 있다.
● 기원을 찾는 열쇠 / 원주 위를 걷는다
팔괘장의 기원은, 청 대(1644-1911) 말기, 창시자는 하북성의 권사, 동해천(董海川)(1797-1882)이 무술을 연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여행을 떠난 것에서 시작한다고 한다.제자 중 하나인 윤복(尹福)(1840-1909)의 저서, {동해천(董海川)}에 의하면, 남쪽으로의 여행은 1851-1861년의 약 10년간이었다고 한다. 무술이 번성했던 강호지방의 안휘성에 있는 구화산(九華山)에서 만난 화징하(華澄霞)(雲盤道人)에게서 받은 권법이 팔괘장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동해천이 어떤 권법을 받았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단정할 수 없다. 단지,현재 남파의 [번자문권(?子門拳)]이라는 권법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여겨진다. 이유는, 번자문권에서 전하는 [전천존(轉天尊)]이라는 원주 위를 덮듯이 걷는 기법이 팔괘장의 보법과 유사하기 때문이다.또, 번자문권이 동해천과 화징하가 만났다는 구화산 일대에 전해지는 권법이라는 것도 유력한 증거의 한가지로 여겨진다.
● 다른 하나의 열쇠 / 태극도
팔괘장의 원류가 번자문권이라는 설을 유력시 하는 이유는, 또 하나가 있다.[음양사상(陰陽思想)]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되는 [태극도(太極圖)]라는 그림과, 팔괘장의 관련이다.음양사상이란, 모든 사물이 음과 양이라는 상호 반대되는 것의 혼재에 의해 만들어 진다는 것으로 중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사상이다. 태극이란, 모든 사물의 집합체, 바로 우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 팔괘란 그 태극을 형성하는 음과 양을 세분화한 것으로, 인간이나 자연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현상의 요소를 말한다.우주의 법칙이라고도 하는 태극과 팔괘의 관계를 그린 것이 [태극도]이다.태극도의 의미를 이해하면 우주의 법칙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학문이나 종교를 탐구하는 자들에게 받아들여져 연구되었다. 태극도의 개념은 점([맞아도 팔괘,맞지 않아도 팔괘]라는 말도 여기서 생겼다)에 이용되는 경우가 많으나, 전천존 처럼 무술에 채용된 경우도 있다. 본래는 도교의 중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 태극도의 원주 위를 걸었던것에서 번자문권의 전천존이 태어났다고 한다. 다시말해서, 번자문권은 일부이지만 태극도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권법이다.이 점이, 번자문권이 팔괘장의 모델이라고 하는 설의 요인이 된다. 기록에 의하면, 동해천은 팔괘장을 창시하기 전에는 권사임과 동시에 음양사상에 정통해 그 연구에 몰두했었다고 알려져있다.그래서, 태극도의 진리를 권법의 기법에 채용하는 방법을 모색했다고 한다. 태극도의 진리를 그대로 살려낸 전천존을 기법에 채용한 번자문권은, 동해천에게는 이상적인 권법이었다.거기에 동해천이 방문한 지역에서 전승되었던 권법이었기 때문에 번자문권이 팔괘장의 모델이라고 주장하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고 한다.
혹은, 팔괘장의 기원에 대해서는, 화징하 다음에 만난 곽원제(郭元濟)(鐵拐道人)에게서 받은 기법이 팔괘장의 기반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동해천이 화징하 밑에서 8년간이나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다지 유력한 설은 되지 못하고있다.
벽괘권(劈掛拳)
벽괘권의 특징
벽괘권은 수 많은 중국권법 문파 가운데서도 가장 격렬하게 움직이는 권법으로 이름높다.
신속하게 상대의 주위를 돌면서 양 팔을 풍차처럼 휘둘러 중거리나 원거리에서 공방을 펼친다. 명칭도 그 팔을 휘두르는 모양에서 유래되었으니, 크게 휘둘러 내리치는[벽(劈)]과 휘둘러 올려치는 [괘(掛)]라는 동작에서 기인했다. 또,권(拳)을 거의 쓰지 않고 손을 편 채로 팔을 휘두르기 때문에 벽괘장(劈掛掌)이라 불리는 경우도 많다.공격은 가슴을 크게 젖히고 팔을 완전히 편 상태에서 기세 좋게 내리친다. 이때, 팔꿈치에 불필요한 힘을 넣지 않고 내리치기 때문에 팔을 채찍처럼 휘두르는 듯이 보인다. 팔을 크게 휘두르면서 공격을 구사하기 때문에 공격범위가 크다. 벽괘권의 기술은 상대의 기술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도 구사할 수 있다. 벽괘권이 중거리에서 원거리를 주체로 하기 때문이다. 낮게 움츠린 상태에서 단숨에 몸을 일으키면서 공격을 펼치기도한다.북파권법의 문파는 몸을 크고 부드럽게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벽괘권은 그야말로 그의 극치라고 말해진다.[신속하게 주위를 움직이면서 크게팔을 회전시켜, 공격을 할 수 없는 거리에서 상대를 제압한다]는 것이 벽괘권이다.
역사와 배경
현재까지,벽괘권의 상세한 기원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명 대(1368-1644)에 들어서야 {기효신서}에 의해 비로소 그 이름이 등장한다.명 대 중엽,하북성 창주의 용담(龍潭)지방에 격렬한 움직임을 하면서 팔을 크게 휘두르는 권법이 있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기효신서의 저자,척계광이 유담(流潭)지방을 방문해 그 권법을 찾았으나, 옛날부터 이 지방에 전해져 내려온 벽괘권이라는 대답만 얻었을 뿐이었다. 그 자들도 기원 등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현재에 이르러서도벽괘권의 탄생 비밀은 무엇 하나 알려진 바가 없다.
● 전승의 단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조사가 행해졌으나 판명된 것은, 벽괘권이 청 대(1644-1911) 중엽부터 두 가지 계통으로 나뉘어져 전승되었다는 것뿐이다.현재 양 파 모두 그들의 개조가 어떻게 해서 그 권법을 익히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나 상세한 연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상세한 기원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벽괘권의 역사를 아는데 있어서 기효신서와 함께 유일한 단서가 되고 있다.한 파의 개조는 좌보매(左寶梅)라고 하는 염산현 대좌촌에 살았던 권사로,[한(韓)]이라는 도사에게서 그 기법을 배웠다고 한다.다른 일파의 개조는 남피현에 궁중 무관으로 일했던 곽대발(郭大發)이라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곽대발은 자신의 분파를 조가(趙家)라는 집안에게 계승시켰다. 그 때문에 현재 곽대발의 흐름을 잇는 일파는 조가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 팔극권과 함께 발전
벽괘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청 대 말기 이후의 일이다. 최초의 계기를 만든 것은, 의외로 팔극권사였다.청 대 말기, 금모(金某)라고 하는 팔극권의 달인이 벽괘권의 우수한 실전성에 주목해, 가르침을 청했다. 벽괘권에 매료된 금모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그 기술을 전했다고한다. 인기가 있던 팔극권과 함께 전해지게 되면서 벽괘권은 자연히 세상에 퍼져나가게 되었다.널리 보급되면서도 언제나 팔극권과 함께 전해졌던 벽괘권이 독자적으로 전승되게 된 것은 1900년대 전반이 되면서 부터라고 한다.염산현파의 마영도(馬英圖)와 남피현파의 곽장생(郭長生)이 같은 시기에 중국 국술관(1929년 설립)에 교관으로 채용된 것을 계기로, 양자는 기술 교환을 시작했다. 국술관의 정식 과목으로 채택된 것과 함께, 두 파의 장점을 융합해, 보다 높은 실전성을얻은 벽괘권은 순식간에 발전을 이루었다. 결국 현재에 와서는 북파권법의 한 문파로서 중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기에 이르렀다.
번자권
번자권의 특징
번자권은, 주먹 연타를 공격의 주체로 하는 북파권법이다.이름에 단긴 [번]은 [번생불식(숨도 쉬지 않고 연속으로 한다)]라는 단어의미를 간략화한 것으로서 번자권의 싸움법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접근한 상태에서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단숨에 좌우의 주먹 연타를 퍼부어 승부를 내는 것이 번자권의 전법이다.기법은,일격필살보다도 연속 공격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전법을 기본으로구성되어 있다. 예를들어,번자권에서는 하나 하나의 기술을 구사할 때 팔을크게 휘두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주먹을 쏠 때, 상반신은 팔꿈치 앞부분을내지르는 정도, 하반신도 허리를 가볍게 돌리는 정도에 그친다. 극히 작고재빠른 동작으로 일격을 펼침으로서 스무드하고 신속한 주먹의 연타를 치는것이 가능하게 된다.빠르고, 틈이 없는 연타는 일괘편,중국에서 축제때 쓰는 긴 폭죽 꽃불과같다고 불릴 정도이다.또한,번자권은, [팔섬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번자권의주요 기법이 8종류의 기술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으로, 연타의 신속함이 섬광과 같다고 묘사되기 때문이다.동작이 작기 때문에 일격의 위력은 약하지만, 그 문제점은 신속한 연타를점혈에 찔러 넣음으로서 해소한다.[신속하고 틈이 없는 연타로 상대를 제압한다]는 것이 번자권이다.
역사와 배경
수수께끼에 쌓인 역사
번자권의 기원에 대한 상세한 것은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예로부터 하북성 고양현,교양현,박야현,려현이라는 4개 지역에서 널리 전해져 왔다는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 발상의 연대, 창시자에 대한 기술이나 전승들이일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역사상의 기록들에서 번자권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明代(1368-1644)부터가된다. 많은 문파의 역사를 고증하는데 가장 유력한 증거가 되는 [기효신서]속에 [팔섬번]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번자권이 팔섬번이라고 불렸던 것이후세 책등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최초의 증거라고 일컬어진다.그러나, 明代부터 淸代(1644-1911) 후기에 이르기까지 다시 역사가 확실하지 않게 된다. 명 대부터 청 대 후기에 이르기까지,번자권에 대한 전승이나기록들이 불가사의하게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당시의 전승자가 번자권의 기법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꺼려 철저한 비밀주의를 지켰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설이 강하다. 그러나 진위에 대해서는아직도 수수께끼에 쌓여 있다.
단가의 등장
청 대(1644-1911) 후기, 하북성의 段家라고 하는 분파의 손에 의해 다시세상에 퍼졌다. 동시에 하북성 이 외 지역에서도 보급되었다.단가가 번자권을 다시 퍼트리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번자권과 착각(발차기를 주체로 하는 문파)의 달인인 무관, 趙爛益이 퍼트리도록 단가의 사람에게 명령했다고 하나,진위여부는 알 수가 없다.
또한, 단가의 등장으로 인해 다른 분파도 기법을 퍼트리게 되었다고 한다.번자권은 근대에 국기의 하나로 인정되면서 각지에 급속히 퍼졌으나 그 계기를 만든 것은 단가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 이전의 전승 경로에 대해서는조사하려고 해도 참고가 될 만한 전승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앞으로도 밝혀질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된다.
응조권(鷹爪拳)
응조권의 특징
응조권, 정식명칭 [응조번자권]은, 이름 그대로, 독수리가 먹이를 잡는 모양을 참고한 움직임으로 기법이 형성된 북파권법이다. 정식으로는, 독수리가 먹이를 잡을 때의 동작이 아닌, 잡을 때의 발톱을 본뜬 [응조수(鷹爪手)]라는 손 모양을 나타낸다.공방의 때에는, 이 응조수로 상대를 치고, 상대의 기(技)를 받아 낸다.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을 하던지, 먼저 응조수를 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후는,단숨에 연타를 구사함으로서 승부를 낸다.또한,응조수에 의한 공격은, 항상 상대의 눈이나 사타구니,점혈 같은 급소를 노린다. 방어 시에도 상대의 공격을 받아 냄과 동시에 응조수로 상대의 점혈을 찔러 넣는다. 이 점혈에 찔러 넣는 기법은 [사경(死勁)]이라 불 리는, 응조권 독특의 경법이라고 알려져 있다.[독수리의 발톱과 같은 손에 의한 연타로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끊임없이급소를 찔러 넣는다]는 것이 응조권이다.
역사와 배경
응조권은 송 대(960-1279) 중엽의 무장으로서 이름을 떨친 악비(岳飛)라는 인물이 원형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발상지에 대해서는, 하북성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상세한 연대와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단언은 할 수 없다. 다만,청대(1644-1911)까지,하북성 이 외의 지역에서의 전승이 확인되지 않았던 경위로 봐서 발상지에 대해서는 거의 분명하다고 말해진다.
완성
역사상 기록에 응조권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다른 많은 문파들과 마찬가지로, 명대의 기효신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유사사(劉士梭)라는 권사가 악비가 남긴 [분절쇄골법(分筋鎖骨法)]과 [사경응적(死勁?敵)]이라는 두 가지의 기법을 중심으로 응조권의 기법을 완성했다고 한다.분골쇄골법은 72종에 이르는 신체의 단련법으로, 현재에도 권사들의 수련법에 반드시 포함되는 것으로서, 발경을 점혈에 찔러 넣는 108가지 방법의 집대성이며 사경응적과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기법상 빠질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 때문에,응조권은,그 두 가지 기법을 산출한 악비가 원형을 만든 인물로, 그것을 근본 기법으로 완성을 이룬 것이 유사사라고 불려진다.
실전성을 높이면서 야기된 쇠퇴
유사사에 의해 완성을 본 응조권은 근대에 이르러 응조번자권으로 이름을 고친다. 번자권의 기법을 대폭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응조권의 전승자 중 하나였던 진자정(陳子正)(1883-1938)이 1910년에 상해정무체육회에 교사로서 초대되어 갔던 것이 계기가 된다. 상해 정무체육회는,수 많은 문파의 보급 활동을 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조직이다. 진자정은 뛰어난 수완으로 응조권에 국기(國技)로서 거기에 모인 권법의 기법을 첨가해 실전성을 높이려 했다. 그 중에서도 비슷하게 연타를 구사하는 기법이 뛰어났던 번자권에 주목, 순식간에 승부를 결정짓는 응조권의 특징을 높여,정무체육회에서 교육한 권법 중에서도 최고의 것으로서 자리잡는데 성공했다. 그 때문에,응조권은 태극권,당랑권과 더불어 {정무삼대문파(精武三大門派)}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그러나,정무체육회의 활동을 추진했던 청조가 붕괴하면서,응조권은 쇠퇴하게 되었다.중화민국(1912-1949)의 건국과 더불어 국술관이라는 새로운 무술 전승 조직이 만들어졌으나 응조권은 그다지 추천되어지지 못했다. 이유는,청대 진자정 때문에 눌려지냈던 타 문파들로부터의 불평이 국술관 창설자들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말해지나 사실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일반적으로는, 언제나 급소를 공격하는데서 오는 위험성 높은 권법이란 것이 보급을 꺼리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응조권 쇠퇴의 역사는 우수했던 높은 실전성을 증명한다.
삼황포추권(三皇?? 拳)
삼황포추권의 특징
삼황포추권은 신화시대부터 전승되온 권법으로 인기가 높은 권법이다.아주 오래 된 권법이라고 이야기되고 있으나 확증은 청 대부터 밖에 없기 때문에 연구가들 사이에서 신뢰성은 낮다.하지만 인기의 이유는 전통 때문만이 아니라 기법이 단순해서 간단히 습득할 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삼황포추권은, 다른 권법에 비해 복잡한 기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투로는 모두 직선으로 변화가 거의 없이 움직이도록 구성되어져 있고, 기술의 수도 적다. 그다지 노력도 필요치 않고, 단기간에 기법을 익힐 수 있는 것이 이점이라고 한다.또한, 삼황포추권은 용맹 과감하게 싸우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다. 공격 궤도는 단순하지만, 찬스가 보이면 단 숨에 연타를 퍼부어 승부를 내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삼황포추권의 연타에 의한 공격은, 궤도의 단순함과는 달리 상당히 피하기가 어려운 것이 많다. 왜냐하면,기본기를 익히기가 쉽기 때문에 권사들이 모두 연타 콤비네이션의 습득·연마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 확고한 공부를 몸에 익히기 때문이다.[기본기가 단순하기 때문에 확고한 공부가 실린 연타를 펼치는 공방을 이룬다]는 것이 삼황포추권이다.
역사와 배경
삼황포추권의 기원에 대해서는 일반에서는 신화에 등장하는 삼황(복의,신농,황제의 3인)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정착돼 있다. 황제(黃帝)가 수많은 금수(禽獸)와 치우(蚩尤)라는 군신(軍神)을 쓰러뜨릴 때 섰다는 무술이 사람들에게 전해져 정리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설에 대해서는, 아무런 역사상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어디까지나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삼황포추권의 이름이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때는 의외로 늦어서 명 대 말부터 청 대 초기 무렵(1600년대 전반)이 되기 때문이다.당시,하북성 기현(冀縣)에서 이름을 떨치던 교삼수(喬三秀)라는 삼황포추권을 하던 자가 그 기술을 책으로 기술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 되고 있다. 그 이전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삼황포추권의 역사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불확실한 것으로 다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은,1845년, 북경에 삼황포추권을 전하기 위한 무도장[북경회우표국(北京會友 局)]을 만들면서이다. 북경회우표국은,전승자의 하나였던 송언초(宋彦超)가 설립한 것으로서,삼황포추권이 북경에 뿌리내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북경에서 인기가 정착한 덕에 삼황포추권은 1912년 중화민국 건국이래 국기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1916년에는,산서성 태원(太源)에 있는 산서국술관이라는 국기로 인정받은 권법을 가르치는 학교(중국 각지에 있다)에 전승자의 하나인 자우감(子于鑒)이 초대되 거기에서 지도를 했던 점도 크게 공헌했다. 자우감은 국기로 갓 인정된 삼황포추권을 열심히 보급해 산서성에서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삼황포추권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외국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명도는 낮지만, 수련이 용이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일반에도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에서 인기가 높아서 시민들은 일종의 건강권(健康拳)으로 받아들여 널리 하고 있다.
통배권(通背拳)
통배권의 특징
통배권의 [통배(通背)]라는 문자는 발경을 등에서 공격에 사용하는 부위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통배권은 북파권법중에서도 경법(勁法)에 특징이 있기로 이름 높은 권법이다. 기술에 발경(發勁)을 실을 때의 방법은 9가지가 있어 공방 상황에 따라 사용이 구분된다.
또한, 동작은 모두 원숭이의 움직임을 참고로 만들어져 경쾌하고 재빠른 몸놀림을 기본으로 한다.공격시에는 원숭이가 먹이를 채듯 팔(어깨)을 길게 편다. 팔극권등에서도 중시되는 [방장격원(放長擊遠)]의 요령으로 손기술을 구사한다. 그 때문에, 원거리에서 중거리의 공방(攻防)을 특기로 한다. 신속한 움직임으로 치고 빠지기의 공방을 펼친다.[신속한 몸놀림으로 상대의 사정거리 밖에서 기술을 구사해 공방을 펼친다]는 것이 통배권인 것이다.
또한, 비슷한 권법으로, 팔에서 만들어진 경력을 온 몸으로 보내는 [통비권(通臂拳)]혹은 [통비권(通備拳)]이라는 문파가 있는데 이것은 통배권의 분파로 후에 발전해 독립한 것이라 생각된다.
역사와 배경
통배권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현재는 그 어느 것도 확정되지 않고 있다.
가장 기원이 오래된 설은 춘추 전국 시대(기원전770-기원전221)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원(白猿)과 손빈(孫 )이라는 무관(武官)이 통배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그리고, 청 대(1644-1911), 하북성 분동진 준산에 살았던 도사(導師),한도장(韓道長)이 창시했다는 설이 있으나 전의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확증이 없어 전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최근 조사에 의해, 명 대(1368-1644)의 서적 몇 점에 통배권과 기법상의 유이점이 보이는 [후권( 拳)]이라는 권법이 기록된 것을 알게되, 통배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주장이 증가하고 있으나 이것도 단정할 수가 없다.통배권의 기원에 대해서는 북파 각파에 기법이 채용된 흔적이 보여지기 때문에, 그것들보다도 오랜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설이 강해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발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역사에 대해서는 미지에 싸인 권법이라 하겠다.
형의권(形意拳)
형의권의 특징
형의권은, 심의육합권에서 파생된 북파권법이다. 그렇지만 현재는 심의육합권보다도 융성을 이뤄 태극권, 팔괘장과 함께 내가삼권(內家三拳)이라 불리고 있기 때문에 분파라기 보다는 하나의 독립된 문파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심의육합권이 격렬하고 큰 동작을 기본으로 한는데 반해 형의권은 보기에도 조용하고 작은 동작을 주체로 하기 때문에 기법 상으로도 전혀 다른 권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근래의 중국 권법 영화에 있어서, 형의권의 동물의 동작을 딴 부분만을 클로즈업하는 경우가 많았다.분명히,형의권에는 열 두 동물을 참고로 동작을 만든 십이형권(十二形拳)이란 기법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급자가 쓰는 응용에 불과한 것이고, 작은 동작에 의해 구성된 기술을 쓰는 것이 기본이다. 공격을 구사할 때, 크게 내딛거나 팔을 휘두르거나 하지 않고, 자세 상태에서 그대로 권을 짧은 간격에서 내지르거나 장을 휘두른다. 형의권의 진수는 동작을 극단적으로 작게 함으로서 상대가 방어하기 곤란하게 하는 것이다.형의권의 기술은 예비 동작이 극히 작기 때문에 별로 위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형의권의 권사는 호흡과 동작을 일체화시키는 방법을 씀으로서 그 문제를 해소시킨다. 바로, 발경이란 것이다.공격시, 근력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움직임을 하는 발경의 근원이 되는 기(氣)는, 호흡에 의해 생겨난다. 형의권은 그 발경을 만들어 내는데 가장 효과적인 호흡법을 확립하고 있기 때문에 근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위력 있는 공격을 구사할 수가 있다.예비동작이 극히 작음에도 불구하고,위력있는 공격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형의권은 다른 문파에게서도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형의권이 권법의 궁극의 형태라고 말해질 정도이다.[가장 효율이 좋은 공격을 구사하는 권법], 그것이 형의권이다.
역사와 배경
형의권은 청 대의 1805년 전후에 이낙능(李洛能)이라는 심의육합권 권사의 손에 의해 태어났다. 산동성에서 전승되던 심의육합문파에서 수련을 쌓던 이낙능이 고향 하북성에 돌아갔을 때, 형의권이라는 문파를 창립했다고 한다. 진위에 관해서는, 다수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개조인 이낙능 대부터 많은 명인들이 배출된 까닭에 형의권은 순식간에 퍼졌다.
희대의 달인 / 곽운심
특히 이낙능의 제자 중 하나인 곽운심은 중국 권법 사상 손꼽히는 명인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권사다. 그는 [붕권(崩拳)]이라는 형의권의 가장 기본적인 공격기를 통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한 번 붕권을 쏘면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중국 권법을 배우는 자라면 모두 아는 것이다. 곽운심은 십이형권의 하나인 [호형권(虎形拳)]도 만들어 내 이낙능과 함께 형의권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내가권의 삼대문파
곽운심이래 많은 명인이 등장했으나 가장 형의권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이장유(李長有),상운상(尙雲祥),손록당(孫祿堂)의 3인이다. 이 3인은 모두,중화민국건국당초의 1912년전후에 이름을 날린 달인으로, 화북(중국 북부)에 있어 형의권의 이름을 높여 현재까지의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상운상은 곽운심과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권사로서 산동성에 형의권을 뿌리내리는 초석을 쌓았다.많은 달인의 활약 덕인지 19세기 초두에 국술관 정식과목중 하나로 채택되면서 보급되기까지 시간은 그다지 걸리지 않았다.일본을 시작으로 외국에도 기술공개가 진행된 형의권은 중국권법중 가장 발전한 권법이라 불린다.
심의육합권(心意六合拳)
심의육합권의 특징
심의육합권은 회족(이슬람교도)등 비밀주의가 강한 일족 사이에서 전승되온 권법이다. 철저한 비밀주의 때문에 근년까지 실태는 물론,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못했으나, 높은 실전성 때문에 공개하자마자 순식간에 이름이 알려졌다.현재 중국권법계에서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팔극권과 견주는 최강의 권법이라고 하는 목소리가 많다. 심의육합권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전신을 씀으로서 생겨나는 공격력에 있다. 손으로 치거나 발로 차는 공격은 그다지 쓰지 않고 박치기나 몸통 박치기 등의 공격을 적에게 가한다.그 공격은 상대의 측면이나 등뒤로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정면에서 한다. 정면에서만 공방을 펼치는 것은 상대에게 몸 정면에 집중되어 있는 급소를 공격당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급소인 머리도 마찬가지이다.그러나, 심의육합권은 그 금기를 무시함으로서 다른 권법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엄청난 공격력을 발휘한다.또한, 첫 공격을 시작하면 단 숨에 상대를 쓰러뜨릴 때까지 이어서 공격해 상대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한다. 먼저 박치기를 먹이고, 이어서 뛰어들어가며 팔꿈치로 치고, 끝으로 어깨로 일격을 가하는 식의, 연속 공격으로 단숨에 승부를 낸다.[위험을 무릅서고 정면에서 상대를 향해 나아가 전신을 사용한 공격으로 승부를 낸다]는, 이 것이 심의육합권이다.
역사와 배경
심의육합권의 기원은 청 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산서성(山西省)의 권사, 희제가(姬際可)가 하남성(河南省)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수행을 하던 중, 상대에게 직선으로 치고 들어가는 창술의움직임을 힌트로 원형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그래서, 희제가가 만들어 낸 심의육합권의 원형은 소림사에서도 전승되었다. 그 기법은 [심의파(心意把)]라는 비전 기법으로 자리잡아 심의육합권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소림사에서의 수행 후, 희제가는 고향인 산서성 노산(魯山)에서 심의육합권을 완성시켰다.
분열된 심의육합권
희제가의 사망 후,심의육합권은 2,3대의 계승을 거치면서, 대가(戴家)라는 파와 회족 일파의 두 개 파로 갈라졌다.두 개 파로 분열되기까지의 자세한 햇수에 관해서는 파마다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다.확실한 것은, 그들 파의 창시자에 관한 것뿐이다. 대가의 창시자는 대룡방(戴龍邦), 회족 일파의 창시자는 마학례(馬學禮)라는 권사라고 한다.두 사람 모두 희제가에서 2,3대 뒤의 계승자인 조계무(曹繼武)에게 심의육합권의 기법을 전수 받았다는 점에서 둘 다 비슷한 시기에 분파를 설립했다고 생각된다.창설 이 후, 대가류를 받아들인 파는 대가심의문, 회족류를 받아들인 파는 심의육합문이라 불리며 현대까지 심의육합권을 계속 전승하고 있다.하나, 두 파가 창설되고부터 근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모든 파가 비밀주의를 고집하기 때문에 그다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유일하게 청 대 말기에 회족 일파에서 나타난 매장도(買莊圖)라는 달인이 새로운 문파를 만들었다는 것 정도가 알려졌을 뿐이다. 게다가 그 분파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모든 파가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탓에 심의육합권의 역사는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근년에 이르러 대가류를 받아들인 일파가 상해에 이주함으로서 드디어 기술공개가 이루어졌으나 아직도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권법이다.
소림권(少林拳)
■ 소림권의 특징 ■
소림권은, 하남성에 있는 숭산 소림사에서 전승되는 북파 권법이다.한 때, 인기를 모았던 쿵푸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를 비롯해세계 여러 나라에서 지명도가 높다. 그러나, 소림권이란 소림사에서 전승되는 북파권술의 총칭일 뿐, 소림권이라는 이름의 권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중국에서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소림권이란, 궁보나 마보라 불리는 자세를 하고, 단순한 발기술을 사용하는 권법을 가리킨다. 다른 문파에 말하는 [장권(長拳)]과 닮은 것으로, 투로 속에 [좌산세(坐山勢)]라 불리는 기식(투로에서 최초로 하는 형)이 포함되어 있는가 아닌가로 구분이 가능하다. 소림권이라 불리는 권법은 많이 있으나, 숭산 소림사의 흐름을 받아들인 분파는 반드시 좌산세를 기식으로 차입하고 있다. 소림권이라 불리는 권법이면서도 좌산세를 투로에 포함하지 않는 것은, 전설상 존재했다고 하는 타지역의 소림사를 발상지로 하는 경우가 많다. 복건성이나 광동성에서전해지는 소림권이 그것에 해당한다.또한, 창시자가 소림권에서 수행한데서 비롯되 만들어진 권법이 소림권의 이름으로전해진 경우도 있다. 연청권, 당랑권, 번자권 등은 그 경향이 강하고, 특히 해외에서는 소림권의 이름으로 전해진 경우도 자주 있다.[숭산 소림사의 흐름을 받아들인 것으로, 기술에 공통점을 갖고있다]는 것이 본래의소림권인 것이다.또한, 일본에서는 [소림사 권법]이라는 무도가 존재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소림권의 분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림사에 가서 권법을 배워와 일본에서 만들어낸 독자의 무도이다.
■ 역사와 배경 ■
소림권의 발상지인 숭산 소림사가 탄생한 것은,후위(後魏)(398-556) 시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위 태화19년(495)에 인도에서 온 발타(跋陀)선사를 위해 당시 황제였던 효문제가 건립한 것이다.소림사의 본산을 숭산 소림사라고 부르는 것은, 건립할 때, 효문제가 중국 오악(중국에서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5개의 산)중 하나인 숭산(嵩山)을 골랐기 때문이다.
● 소림사의 발상
소림사는, 발타선사와 같은 인도에서 숭산 소림사에 온 달마(達磨)대사라는 인물이, 인도의 승려가 현재로부터 5000년전부터 익혀 온 천축나라지각(天竺那羅之 )이라는 호신술을 소림사에 전해, 그것이 발전한 것이라는 설이 일반적으로 소림사에서도 계속 전승되고 있다. 현재는 달마가 실재 인물이 아니라는 학설이 발표된 경우도 있기때문에 실제인지 아닌지는 단정할 수 없다. 지금 소림사에서의 소림권 발상에 대한설은 변함이 없으며, 사실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달마대사 실재의 진위 여부가 밝혀진 뒤가 될 것 같다.역사적으로 소림권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명 대(1368-1644)가 되고 부터이다.명 대 중기, 왜구라 불리는 일본해적이 중국 동남해안에 출몰해, 치안을 어지럽혔다. 특히 가정(嘉靖)(1522-1566)이라는 시대에 활동이 활발했다. 당시 황제의 칙령을 받아, 왜구토벌에 성공한 것이 독자의 권법을 쓰던 소림사 승려였다.이것은, [일지록(日知錄)], [운간잡지(雲間雜誌)], [강남경략(江南經略)]이라는 많은 사서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또한, 권법과 함께 소림사의 승려들이 중시한 곤봉쓰는 법, [곤법(棍法)]에 대해서는, 원(1279-1368) 시대부터 그 존재가 역사에서 확인되지만, 먼저 탄생했다고 하는소림권에 대한 기술은 사서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달리 확증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에 소림권이 역사상에 확인되는 것은 명 시대부터로 잡는 것이 타당하다.
■ 주된 전승 지역 ■
소림권의 발상지는, 숭산 소림사가 있는 하남성 숭산이라고 보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소림권이 다른 지역에까지 퍼지게 된 것은, 명 대 이후부터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 이전에도, 소림사를 방문했던 권법가의 손에 의해 다른 지방에 기술이 전해진 적도 있으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다.명 대부터 청 대(1644-1911)에 걸쳐, 소림사를 방문한 많은 권법가들이 소림권을 퍼트리게 되었다고 한다. 소림권에서 문파 확립의 기초를 고안해 자신의 전승지로 돌아간 자가 많기 때문에, 지역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보통 중국 전역에 퍼졌다고 말한다.청 대 이후, 소림권은 중국 국기로 보호되었기 때문에, 보다 발전을 추구하는데 성공한다. 1900년대 초에는 소림권 기법을 적은 책이 많이 발간 되 널리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그러나, 남방, 다시말해 남파 지역에 대한 전승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단순히 소림권이 전승되었다는 것 뿐, 남파 지역의 복건성이나 광동성에 소림사가 존재했다고 하는 전설은 있으나 그 사실여부가 일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파 지역 소림사의 존재 유무를 생각하지 않고, 소림권 전승경로만을 찾으려 해도 역사적 증거가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 때문에, 남파에 있어서 소림권은 남파 소림권이라는 다른 권법으로 인지되는 경우가 많다.
1900년대 초반에 국기로서 중국 전역에 보급된 일도 있어서, 그 후에 남파 지역에 전승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 이전의 전승 유무를 확인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다른 나라에의 전래에 있어서도 많은 혼란이 보인다.일본에 한해서는, 1900년대 초반이라고 확인된다. 1917년에 중국을 방문했던 선승, 석종연(釋宗演)이 소림사에서 수련이 행해지는 모습을 보고, 귀국 후 그 기법의 실전성에 놀랐던 것을 보고한 것을 계기로 일본에서도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소림사 권법도 그 흐름을 이은 것이다. 반면에, 서양에 있어서는 많은 혼란이 보여진다. 서양에서는 근래 쿵푸 영화 붐 영향을 받아, 많은 도장이 열리기까지 이르렀으나, 그 중에는 명성만을 이용해 변변찮은 기술을 가르치는 문파도 있었다고 한다.소림권인지 어떤지 확인하려면 기본이 되는 예식(좌산세)를 전하는지로 판별이 가능하나, 그 것이 서양에서는 퍼지지 않아서, 소림권의 전승범위를 바르게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태극권(太極拳)
■ 태극권의 특징 ■
태극권은 지명도가 높아서 중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보급된 권법이다. 그것은, 초기 수련법이 온몸을 사용해 천천히 운동하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건강체조로서 기공에 채용되있기 때문이다.또한, 태극권의 본질이 근력이 아닌, 호흡법에 의해 만들어진 경력을 활성화한 권법인 점도 크다. 근력과 달리, 호흡은 연령의 영향이 적어, 늙은 사람이나 근력이 미발달한 사람도 관계없이 배울 수 있다.그러나 그 장점이 종종 곡해되어, 태극권 평가에 악영향을 준 경우도있다. 체조나건강법 쪽이 세상에 퍼진 만큼, 그것만이 태극권의 전부라고 오해되는 경우도 많다.분명히, 태극권은 힘에 의존하지 않고도 수련할 수 있지만, 이점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호흡에 의해 만들어진 경력은, 엄청난 파괴력을 낳는다. 이 경력을 그대로 공방에 사용한다는 점이야말로 태극권의 진가인 것이다.그 중에서도 특징으로 간주되는 것은, 전사(纏絲)라고 불리는 비틀기 동작을 많이사용해, 경력을 몇 배로 증가시키면서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사경이라고도 한다. 공격을 할 때, 단전에서 만들어져척수(脊髓)를 통해 각 곳에 전달된 경력에, 팔이나 다리에서 허리에 이르는 부위에 회전력을 가함으로서 위력을 보다 높이는 것이다.또한 방어 시에는, 상대로부터 받은 공격의 충격을 비트는 동작을 통해 사방으로 흩어 내 버리는 효과도 있다.비틀기는 다른 점에서도 효과를 발휘한다. 거리에 관계 없이, 위력있는 공격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일반적으로, 상대와 밀착할 정도의 근거리에서 찌르기같은 타격기는 공격을 구사할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비틀기를 가하면,문제가 해소된다. 내지르는 동작은 할 수 없어도, 비틀기에 의해 만들어진 회전력이 위력을 만들어 내준다.태극권을 몸에 익힌 자는 밀착전이라는 상황에서 안전하게 싸울 수 있다. 그 상황에서, 권(拳), 장(掌), 주( ), 슬(膝), 족(足), 견(肩)과 같은 여러 부위를 공격에 사용한다.태극권은 단순한 체조가 아니다. 인체의 전부를 무기로 해서, 거리에 관계없이 공격을 하는 것이 가능한,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권법이다.[밀착 상태에서도 마음대로 공격과 방어가 가능하다] 는, 그것이 태극권이다.
■ 역사와 배경 ■
태극권의 창시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설상의 기원은 송대(960-1279)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전설상의 개조 / 장삼봉
송 대 말기, 요동 의주(懿州)에 장삼봉(張三峯)이라는 권사가 있었다. 장삼봉은 하남성 숭산 소림사에서 권법 수업을 한 후, 호북성(湖北省)의 무당산(武當山)을 방문했다. 그 때, 학과 뱀의 싸우는 모습을 본 것이 태극권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학이 날개를 펴고 선회하는 모습과, 뱀이 온 몸을 구부리며 달리는 모습에서 원모양의 비틀기 원리를 깨달아, 태극권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태극권이 한 때 무당파(武當派) 라 불려온 것도, 발상지 무당산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역사상의 개조 / 진왕정
그러나, 장삼봉에 관한 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많다. 최근 연구에서, 장삼봉이 명 대(1368-1644)의 권사였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역사적 고증에 따른 것은, 명 대 말기에 하남성 온현(溫縣) 진가구(陳家溝)에 이름을 떨쳤던 무장(武將), 진왕정(陳王庭)을 개조로 보는 설이다.진왕정이 도교의 토납술(吐納術:呼吸法)과 도인술(導引術:曲伸法)이라는, 몸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법을 조합해 나선으로 원운동을 함으로서 굉장한 순발력(촌경)을 얻고, 이것에 경락(인체의 기와 피의 흐름)을 다스리는 것을 더해서 그야말로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방법을 만들어낸 것이 태극권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현재도, 이쪽 설을 택하는 자가 많다. 또한, 진왕정의 자손이 현대까지 태극권을 세상에 널리 보급한 공적을 갖고 있는 점도, 이 설의 정통성을 뒷받힘 해주고 있다.
● 발전의 역사
진가 14대(1771-1853)에, 태극권은 진장흥(陳長興)의 노가식(老架式) 과 진유본(陳有本)의 신가식(新架式) 이라는 두 파로 나뉘어졌다.노가식이란, 예로부터 전해 오는 태극권의 기법을 그대로 전승한 파를 말한다.이에 반해서, 신가식은 예로부터 전해 온 태극권의 기법 중에서도 실전적인 것을 추출해 다시 구성한 파를 가리킨다. 또한, 다른 문파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차입해, 보다 진화한 형태의 기법 확립을 목표로 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들 두 파는 각기 다양한 분파를 배출해, 태극권의 이름을 각지에 전해졌다. 노가식에서 나온 분파로 유명한 것은, 진장흥의 제자 중 하나인 양로선(楊露禪)(1799-1872,별명:福魁)가 창시한 양파(楊派) 이다. 양파는, 그 자식들이 각기 분파를 만들어 내기도 해서, 하북성 뿐 아니라 북경에까지도 전해졌다.예를 들어, 양노선의 둘째 아들인 옥(鈺)(1837-1892,별명:班候)은 양파 기법을 만주족에게 전해, 청 대에 이름을 떨쳤던 달인인 오전우(吳全佑)와 그의 아들 오감천(吳鑑泉)이 오파(吳派) 라고 하는 분파를 만들어 내도록 한 공적자로 불린다.셋째 아들인 감(鑑)(1839-1917,별명:健候)과 그 일족은 오랜 세월에 걸쳐, 양파를 널리 세상에 퍼뜨리는데 노력하였다. 현재 중국은 물론,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널리 보급된 24식 간화 태극권이라는 초보자용 간략기법은, 감의 일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간화 태극권을 포함해서 양파의 흐름을 이은 파는 모두 양가태극권(楊家太極拳) 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다.한 편, 신가식에서는, 진청평(陳靑萍)이 창시한 조보파(趙堡派) 라고 하는 분파가 유명하다. 초보파는, 양파와도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무우양(武禹襄)이라는 달인이 두 파의 기법을 통합해 만들어낸 무파(武派) 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있다.게다가, 무파에서는 무우양의 후계자인 이역여(李亦 )의 이파(李派) 가 탄생한 것에 그치지 않고, 손록당(孫祿堂)(1861-1932)의 손에 의해 팔괘장과 형의권의 기법을차입한 손파(孫派) 도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태극권은 분파를 많이 배출한 문파이지만 특징적인 것은 근년에 이르기까지 각 파간에 활발한 기술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현재는 예로부터의 기법을 지켜내려오던 노가식마저도 신가식의 실전적인 기법을 응용 기법으로 차입하거나, 신가식에서도 기초적인 기법을 습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가식 기법을 수련하거나 하게 되었다. 지금은 두 파의 차이는 거의 없고, 노가식을 기초적인 기법, 신가식을 응용기법으로 하는 것이 거의 모든 파에 있어서 기본이 될 정도다.
● 태극권이란 이름의 유래
태극권의 기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이름의 유래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태극(太極)이란, 중국의 역경(易經) 에 나오는, 태극(太極)과 같은 의미로 여겨지며, 천지(天地)가 미완성일 때, 혼탁했던 기(氣) 에 유래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의미는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 라고 하는 단어로도 집약되어진다.태극생양의란 음양(陰陽)이라고 하는, 우주에 가득 찬 상대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달과 해, 밝음과 어둠, 움직임과 정지, 허와 실,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 같은, 우주속에는 대립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수히 많다.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 허와 실 같은 개념은 다른 중국 권법과도 공통적인 것이다. 강한 것은 힘에 의해 발휘되는 동작, 부드러운 것은 힘을 이용한 동작을, 실은 공격을 구사하는 것을, 허는 공격을 도중에서 변화시키는, 이른바 훼인트를 거는 것이다. 그 원리가 실전에서도 응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안 전설상의 개조, 장삼봉이 태극이야말로 권의 진리를 나타낸다고 생각해서 이름으로 채택했다고 한다. 기원에 여러 가지 설을 주장하던 자들도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그것 뿐만이 아니라, 태극은 권사들의 궁극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다른 문파에까지 침투해 있다. 중국 권법을 수련하는 이들의 목표는 자신을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로까지 높여, 대우주(大宇宙)와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태극은 그들이 목표로 삼는 소우주와 대우주의 합일을 나타낸 궁극의 진리이기도 한 것이다.
연청권(燕靑拳)
■ 연청권의 특징 ■
연청권은 수많은 중국 권법 속에서도 가장 변화가 풍부한 기법을 가진 북파 권법이다. 기술을 구사할 때에는 기민하게 움직이며, 구사한 다음에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다음을 준비한다. 움직임의 강약을 조절함으로서 적을 교란시킨다.또한 공격을 할 때, 위를 치는 척 하면서 아래를 치거나, 상대의 눈앞에서 회전을 하여 공격을 하는 등의 훼인트를 섞은 공격,중국권법에서 말하는 [허(虛)와 실(實)]을 이용하는 것도 특징이다.이러한 기법 상의 특징 때문에,연청권에는 권(拳),장(掌),주( ),족(足)등 공방 시에 중점적으로 이용하는 부위는 없다. 주먹을 쓰는 척 하면서 발로 차는, 그런 식으로 한 번이 아닌, 서로 다른 부위를 섞어서 사용하는 것을 하나의 공격기로 삼는다.훼인트를 이용하는 기법은, 이동할 때에도 나타난다. 급속히 쫓아간 뒤,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측면이나 뒤로 돌아가, 아래로 숙였다가 다시 뛰어오르는 식으로 변화를 주면서 상대에게 접근해 간다.중국 권법에는 정(靜)과 동(動), 허와 실, 강(剛)과 유(柔)라고 하는 대립되는 개념을 기법에 채용한 문파가 많다. 그러나,연청권처럼 공방과 보법의 기법 모두에 변화를 주는 문파는 없다.[끊임없는 변화에 의해 상대를 현혹하여 확실한 공격을 가한다]는 것이 연청권이다.또한 연청권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기로 유명한데,비종권 (秘宗拳),미종예(迷踪拳),예종예(猊踪藝)라는 이름을 들 수 있다.
■ 역사와 배경 ■
연청권의 발생은 명확하지 않다.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전설이 난무한다.
● 수호전의 영웅이 개조?
가장 유명한 것은, 송 대(宋代)(960-1279)의 책,[수호전(水滸傳)]의 등장인물,노준의를 개조로 보는 전설이다. 산동성에서 이름을 떨치던 노준의는 소림사에서 무예를 익혔다. 그 후,양산박으로 가,연청이라는 영웅을 제자로 삼고, 자신이 편성한 권법을 가르쳤다.노준의에게서 배운 권법을 연청이 매일 노력을 더해 기법을 완성시켰고, 세상에 퍼졌을 때, 그의 업적을 기려 연청권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연청권의 본래의 이름을 비종권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사이에 전해지는 기원에 관한 전승은 좀 다르다. 연청의 제자들이,양산박이라는 반란 거점에서 수련한 것으로 판명되는 것을 두려워해 권법의 이름을 비밀로 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개조의 이름을 비밀로 하는 권법}의 의미를 담아 비종권이라고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기원에 관한 설은 이 외에도 많이 있다. 연청권이 미종권이나 예종예라 하는 명칭으로 불린 적이 있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름이 많은 것은 기원에 관한 설이 그 이름만큼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미종권이라고 불리는 것은,연청이 도망칠 때,발자욱을 기묘하게 남겨 혼란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예종예라는 이름은 소림사의 중이 [예원후(猊猿 )]라는 원숭이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 움직임을 기본으로 권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어느 것이나 전설상의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설은 알 수 없다.
● 역사상의 개조
역사상으로 확실한 사실인 것은,손통(孫通)이 연청권을 피로(披露)했던 청 대(淸代)(1644-1911)이다. 산동성(山東省) 대현의 손통은 충주의 장(張)이라는 인물에게서 연청권을 배워 대성했다는 말을 들었다. 손통은 또, 중국 각지에서 시합을 하여 차례로 승리를 거둬 연청권을 이름을 널리 알렸다. 만년에는 하북성 창현에 이주해 살면서 연청권을 퍼트리는데 전력을 다했다.청 대에 들어와서는,연청권을 세상에 널리 알린 연청권사가 또 한 명 있다.청 대 말기에 하북성에서 [연청신추(燕靑神 )]라는 분파를 만든 곽원갑(藿元甲)이다. 하북성 출신의 곽원갑은,청대 말기,정무체조학교의 설립에 관여했고, 그 곳을 기점으로 연청권을 세상에 퍼트렸다.곽원갑은 연청권 뿐만 아니라,다른 권법 전반도 정무체조학교의 교련에 채용했기 때문에 중국 무술 전반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로서도 유명하다.근대에 들어와서는 조풍정(趙風亭)이 연청권의 발전에 가장 공헌한 인물이다. 조풍정은 많은 무술가가 모인 [무술의 도(都)]라 불린 요령성(遼寧省) 대련(大連)에서도 으뜸가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는 타류시합에서 승리함으로서 연청권의 이름을 알렸다. 그 중에는 일본의 무술가도 있어 일본무술계에 연청권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말해진다.
장권(長拳)
장권의 특징
장권은 사권(査拳)·화권(華拳)·포권(砲拳)·태조권(太祖拳)·홍권(洪拳)·소림권(少林拳)등 유명한 북파권법을 총합한 권법이다.삽입한 문파가 가진 그들의 장점이 그대로 장권의 특징이 되었다. 몸을 크게 뻗으면서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중시하며 높이 뛰어올라 차는 기술이나 몸을 회전시키거나 뛰면서 도는 동작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다이내믹하고 아름다운 기술이 많기 때문에 중국 권법의 아름다움을 지닌 문파라는 평판이 높다. [주먹은 유성과, 눈은 번개와 닮았다]라 불릴 정도다. 화려한 동작을 좋아하는 외국에서 인기가 높아 태극권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알려진 문파이다.많은 문파의 기술을 갖고 있는 장권이지만 초기 수련 시에는 기술 연습보다도 육체의 단련(이것을 [기본공]이라 부른다)을 중점적으로 한다. 그 초보적인 부분만으로도 건강 체육으로 시작하는 것이 가능해 젊은이의 신체 육성에 매우 우수하다. 그 때문에 국기(國技)로서 인정되 중국 전역에 보급되었다.물론, 본격적으로 몸에 익히려면 약동감(躍動感)있는 움직임을 실천하기 위한 고도의 운동 능력이 요구된다.문하생은 많지만 건강 체조 수준을 뛰어넘는 수련을 하는 자는 많지 않다.그렇더라도 많은 중국 권법을 통일해 만들어진 권법이라 다른 문파에의 적응력이 우수하다. 다른 문파의 기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금세 적응할 수 있는 기초를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되는 것이다.[배우기 쉽고, 다른 문파의 기초적인 기법을 닦는 권법]이 장권이다.
역사와 배경
장권은 많은 문파의 기술을 총합해 만들어진 권법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역사는 거의 없다. 게다가 지금은 같은 장권이라도 분파의 전승자에 따라서 중시하는 투로나 기법이 바뀌는 일이 많기 때문에 장권 본가의 루트를 조사하는 것도 곤란하게 되어 버렸다.현재, 다양한 장권 속에서도 특히 평균적인 기술 체계를 가져, 잘 알려진 것이 [규정권(規定拳)]과 [교문장권(敎門長拳)]의 두 가지이다.규정권이란 여러 종류가 된 장권 속에서 공통되는 것이 많은 투로나 기법을 학교등 훈련소에서 가르치는 무술로 국가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한 편, 교문장권이란, 중국의 회족(이슬람교도)에 의해 전해진 예로부터 존재해 온장권을 가리킨다. 많은 기법을 삽입한 장권의 분파 가운데서는 가장 진기한,[사권(査拳)]과 [탄퇴(彈腿)]라는 두 문파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다. 교문장권은 때에 따라서 사권과 장권의 별칭으로도 쓰이는 때가 있다.
여기에서는 장권을 형성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주요 문파의 권법 역사와 기법 상의 특징을 소개한다.
사권
사권(査拳)은, 신체를 크게 뻗으면서 신속하게 움직이는,장권 최대의 특징이랄 수 있는 기법의 원형이 되는 권법이다. 도약하면서 하는 발차기가 많은 것도 사권 기법을 채용한 영향이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사권의 탄생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상의(査尙義:원래 이름은 사밀이(査密爾))가 창시자라는 설이다.명 대 무관이었던 사상의는,당시 명에 있어서 정벌의 대상이었던 몽고족이나 복건성·광동성을 휩쓸던 도적 때들의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긴 여행 동안 중병에 걸려 산동성 관현의 산촌에서 농민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사상의는 마을 사람들의 온정에 감격하여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연구한 권법을 전해 줬는데 그것이 사권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사상의에 대한 전승에는 또다른 설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그는 청 대(1644-1911) 말기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 설에서는,당시 청을 위협하던 영국등 열강국과 싸우기 위해, 그는 북경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병에 쓰러져 병치료를 하던 땅에 머무르며 권법을 전수했다는 것이다.이 외에도 명 대에 척계광(戚繼光)이 쓴 {기효신서(紀 新書)} 속에 등장하는 [온가칠십이행권(溫家七十二行拳)]이라는 문파가 사권의 원형이 아닐까 하는 설도 존재한다.
화권
상대의 눈앞에서 회전하면서, 하나 하나의 동작에 완급을 주면서 기술을 구사하는, 변칙적인 기법을 특징으로 하는 권법으로 유명하다.전승에 의하면,협서성(陜西省) 화음현(華陰縣)에 있는 화산(華山:중국 오악(五岳)이라 불리며 성스러운 산의 하나로 간주된다)에서 태어난 권법이 화권(華拳)이라고 전해진다. 화권의 이름도 그 발상지를 딴 것이라고 한다.
포권, 태조권, 홍권
이 3개의 권법은, 전승이나 역사에 대해, 공통점이 있으므로 한데 묶어서 소개한다.
포권(砲拳)과 태조권(太祖拳)은, 권법이 발달한 하북성이나 산동성에서 예로부터 전해 온 권법이다. 포권에 대해서는 상세한 전승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데 반해, 태조권은 명 대에 쓰여진 {무편(武編)}이나 {기효신서} 등에 그 기록이 남아있는데,송(宋:960-1279) 태조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한다. 홍권은 북파사대문(北派四大門)의 하나로, 창시자에 대해서는 태조권과 같은 송태조라고 하는 설과, 전국시대의 손무자(孫武子)라는 설의 두 가지가 있다. 발상지는 영화 등에 의해 잘 알려진 숭산 소림사라고 한다.위의 세 문파는 모두 팔을 쭉 펴면서 내지르는 손기술을 주체로 하는 권법으로 알려져 있다.장권을 구성하는 이 3개의 권법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은,남파권법 속에 있는 똑같은 이름의 문파와 혼동된다는 것이다. 특히 포권은 한자는 달라도 발음이 같은 것이 많이 있다.
탄퇴 (담퇴)
탄퇴(彈腿),혹은 담퇴(潭腿),원퇴( 腿)라고 불리는,북파권법 중에서도 예로부터 이름이 알려진 문파이다. 원래,탄퇴와 담퇴는 두 개의 독립된 문파였다. 탄퇴는 도약, 또는 다리를 크게 펴는 등의 큰 동작에 의한 발차기를 연속적으로 하는 것을 전법으로 하는 권법이다. 이에 반해 담퇴는 몸을 낮춘 상태에서 연속적으로 발차기를 하는 것을 주체로 하는 권법이다.그것이 근대에 장권 속에 흡수된 것을 계기로, 한 문파로 통합돼 전승되게 되었다.기원에 대해서는, 탄퇴쪽은, 회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이 있다. 그 전승에 [남경(南京)을 떠나 북경(北京)에 이른 탄퇴(彈腿)는 교문(敎門)에서 나왔다]고 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 중에서 [교문]이 회교를 말하며 그들이 탄퇴의 역사에 크게 간여했다고 한다.또한, 회교도들 사이에는 사권의 시조, 사상의를 탄퇴의 창시자로 하고 있다.
담퇴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개의 설이 있다. 한 가지는,산동성의 용담사에서 나온 권법이라는 설. 절 이름이 그대로 권법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하남성 담모(譚某)라는 인물이 만든 권법이라는 설이다. 그 담모의 [譚]이 나중에 [潭]이 되었다고 한다.
당랑권(螳螂拳)
■ 당랑권의 특징 ■
당랑권은, 북파권법 중에서도 특히 실전성이 높은 18문파의 기술을 모아 만들어진것으로, 북파권법의 집대성이라고 부른다.근접전을 주체로 하며, 당랑수법이라고 하는 사마귀의 손움직임을 모방한 동작으로, 공격을 할 때에는 점혈(급소)를 중심으로 공격하고, 방어를 할 때에는 상대의 공격을 받아 막는다. 이름 그대로 당랑(사마귀)이 먹이를 잡는 모습을 참고해 만들어진 권법이다.보법 또한 독특해서, 원후보법이라 불리는, 원숭이가 발을 교차시키면서 걷는 모양을기본으로 한다.원후보법을 써서 접근해, 끊임없이 상대의 측면이 등뒤로 돌아들어가듯 움직이면서 당랑수에 의한 수기(手技)를 연속적으로 구사한다. 연속적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하는게 아니라 상하로 나누고, 그것도 언제나 급소를 노리는 것을 기본전법으로한다.이 기본전법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당랑권은 전법상의 특색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경우, 당랑수에 의한 공격을 중점적으로 구사하여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을 주체로 하는 파를 경당랑권(硬螳螂拳)이라 하고, 상대의 자세를 발걸이나 관절기로무너뜨리거나, 기술에 [허]를 섞음으로서 상대를 교란시키면서 공격을 구사하는 것을 주체로 하는 파를 연당랑권(軟螳螂拳)이라고 한다.경파에는 칠성(七星), 매화(梅花), 비문(秘門)이라고 하는 분파가 대표적이다. 한편, 연파에는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이라고 하는 분파가 해당된다. 양파의 중간으로 팔보당랑권(八步螳螂拳)이 존재하는데, 형의권, 통비권, 팔괘장의 기술을 차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쉬지않고 상하 컴비네이션을 구사해 단숨에 승부를 낸다]는 것이 당랑권인 것이다.
■ 역사와 배경 ■
● 당랑이 태어난 고향
당랑권은 청 대(1644-1911) 초기, 산동성 묵현(墨縣)의 권사, 왕랑(王朗)에 의해 태어났다고 한다.왕랑은 숭산 소림사를 방문했을 때, 한 승려와 몇 번이나 시합을 했으나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머리를 짜던 중에 사마귀가 신속하게 움직이는 매미를 간단히 잡는 모습을 보고 당랑수법을 만들어내는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거기에원숭이가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참고해서 원후보법을 만들어, 당랑수법과 통합해 당랑권의 기반을 만들어 냈다.자신이 만든 당랑권으로 승려에게 승리한 왕랑은 다시 무자수행(武者修行)을 계속했다. 그 뒤, 여행 도중에 일게된 권법 중에서 우수했던 북파 18문파의 기술을 집대성·통합해 완성한 것이 당랑권이다.왕랑이 차입한 북파 18문파는 아래와 같다.
1.태조장권(太祖長拳)
2.한통(韓通)의 통배권(通背拳)
3.정은(鄭恩)의 전봉(纏封)
4.온원(溫元)의 단권(短拳)
5.마적(馬籍)의 단타(短打)
6.손항(孫恒)의 후권( 拳)
7.황점(黃粘)의 고신( 身)
8.추장(雛張)의 면장비질(面掌飛疾)
9.회덕(懷德)의 솔랄경붕( 硬崩)
10.유흥(劉興)의 구루채수(勾 採手)
11.담방(譚方)의 곤루관이(滾漏貫耳)
12.연청(燕靑)의 점나질법(占拏跌法)
13.임충(林庶)의 앙무각(鴦 脚)
14.맹소(孟甦)의 칠세련권(七勢連拳)
15.최연(崔連)의 와리부추(窩裏剖 )
16.양곤(楊滾)의 곤채직입(棍採直入)
17.금상(金相)의 개수통권( 手通拳)
18.왕랑 자신이 만들어낸 당랑권의 원형
● 당랑권의 퍼지게 된 계기
당랑권은 발상지인 산동성에서도 이름을 잘 모를 정도로 1900년대에 들어서기까지 널리 일반에 기술이 알려진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태극권이나 팔괘장같은, 일반인을 대상으로한 교본을 출판해, 보다 넓은 계층에 보급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당랑권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910년, 상해에 정무 체조 학교가 설립되면서이다. 설립자인 곽원갑에게 초대된 칠성·매화당랑권의 달인, 나광옥(羅光玉)이 당랑권을 일반에 가르칠 기회를 만든 것이 세상에 퍼지게된 시작이었다.정무 체조 학교는 후에 중앙 정무 체육회로 이름을 바꾸어, 홍콩, 광주, 하문 등의 중국 남부 각지에까지 지부를 설립해, 당랑권을 동남아시아 주변에 전파하였다.1948년, 중국에 정변이 일어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이동할 때 많은 당랑권사들이 대만으로 이주했다. 그 때문에 대만에 있어서 당랑권의 지위를 확립, 현재까지도 널리 대만 무술계에 퍼져있다.
또한, 근대, 광동주에서도 주가(周家) 당랑권이라는 권법의 존재가 확인되었으나 산동성을 발상지로 하는 당랑권들과는 원류·기술에 있어서도 전혀 다른 것이다.(역자 주: 이 주가 당랑권에 대해 원류가 북파 당랑권이라는 주장도 있다.)
영춘권(詠春拳)
■ 영춘권의 특징 ■
영춘권, 또는 윙챤은 수많은 중국 무술 속에서도 가장 단기간에 기술 습득이 가능하며 실전적이기까지한 권법으로 인기가 있다.밀착전을 특기로 하며 방어에서 순식간에 공격으로 바뀌어 단숨에 결말을짓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영춘권의 숨을 쉬지 않는 연속 공격은 상대의 공격과 방어를 쳐서 부수기 때문에 [연소대타(連消帶打)]라는 단어로 불린다.그 공격의 기법은 모두 최단거리에서 상대에게 공격이 가해지기 때문에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문파에서는 원의 움직임을 이상으로 삼는 일이 많지만 영춘권에서는 상대의 공격을 깰 때 외에는 원의 움직임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상의 특징에서,영춘권은 [간련(簡練),근전(近戰),쾌속(快速)]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기법 상의 특징은,손기술을 주체로 하고 자신의 손을 상대의 손에 붙이듯이 해서 공방을 펼친다는 점이다. 영춘권에 있는 발기술은 그야말로 손기술의 보조에 지나지 않는다.[방어에서 순식간에 지르기 연타로 전환해 적을 단숨에 제압한다]는 것이 영춘권인것이다.게다가 영춘권 이미 사망한 쿵후스타 이소룡이 수련했던 권법으로서 유명하다.
■ 역사와 배경 ■
영춘권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을 소개한다.
영춘권의 개조는 중국 권법에 있어서는 드물게, 여성이라고 한다. 때는 청 대(1644-1911)말기. 복건성(福建省) 교외에 영춘(詠春)이라는 여성 권사가 있었다.영춘은 어릴 적부터 복건 소림사의 권사였었던 아버지에게서 소림권을 배웠는데 여성이라는 육체적 한계를 고민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권법을 고안하게 되었다.그런 즈음에, 영춘은 집 뒤에서 학이 여우(뱀이라는 설도 있다)를 제압하는모습을 보고 영춘권을 창출하는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학의 움직임에 주목했던 영춘은 당시 복건성에 널리 퍼져 있던 [백학권(白鶴拳)]의 [纏繞呑吐(전요탄토)]라는 자신과 상대의 손을 감은 것 같이 하여 공방을 펼치는 기법을 참고하여 영춘권을 고안해 냈다.영춘권은 영춘이 죽은 후,3대 후까지 직계인 자에게만 전승되었다. 영춘권이 몇 개의 분파로 나뉘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광동성 불산의 황화(黃華)가 전승자로 선택되면서이다.불산파가 세상에 널리 퍼지자 광주파를 시작으로 몇 개의 분파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이소룡이 익혔던 것으로 유명한 엽문파이다. 현재, 중국에는 별로 인기가 없는 영춘권이 서양에서는 태극권과 대등할 정도로 유명한 것은 이소룡의 공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영춘권=이소룡이 만든 권법이라는 오해가 지금까지도 존재한다.
홍가권(洪家拳)
■ 홍가권의 특징 ■
속칭 [홍권(洪拳)],홍가권은,수 많은 남파권법 중에서도 1,2위를 다툴 정도로 인기 있는 권법이다.인기의 이유는, 단기간으로도 실전에 통용되는 기술을 몸에 익힐 수 있다는 점이다. 홍가권은 전란의 시기에, 단기간에 병사를 길러 내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수련은, 익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내공이라는 몸 속에서 힘을 끌어내는 방법이 아닌,외공이라 불리는 근육이나 뼈를 단기간에 철저히 단련하는 방법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다른 권법에 비해 간단하다고 할 수 있다.기법 상의 특징도, 강하게 단련한 부위를 상대의 급소에 찔러넣는,높은 실전성을 추구한 경향이 보인다. 싸움에 있어서 주로 사용하는 것은 장으로, 침과 동시에 단련된 손끝으로 급소를 점혈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주먹이나 발을 사용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급소만을 노린다.
기법 상의 또 하나의 특징은, 허리를 크게 회전하면서 공격을 한다는 점이다. 홍가권의 권사는 수련 당초는 내공보다도 외공을 중시하기 때문에 강한 발경을 낼 수가 없다. 그 결점을 허리를 회전시키는 것으로 보완해서 강력한 공격을 구사하는 것이다.[근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공격을 언제나 급소에 찔러 넣는다]는, 그것이 홍가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