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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원과 연구사(연미사)
연미사가 있는 일대를 제비원이라고 불렀다. 지금 절 앞에 는 솔씨공원이 조성되어있고, 안동사람들은 이 일대를 성주풀이의 본향 또는 소나무의 본향이라고 부르고,이곳이 영남에서 죽령(竹嶺)과 새재(鳥嶺)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지나치는 사람 또한 많아 숙소인 원(院)이 생겨나자 그 이름을 연구사나 연미사란 절의 이름을 따 제비원(院)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사찰에서 포교와 자비의 일환으로 원을 관리하였으므로 이곳의 원은 연구사가 관리해 제비원이란 이름으로 불리어 진것으로 본다. |
▶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도 이와 거의 같은 수법을 보여준다. 불교조각의 지방양식이 강해지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입상이다.지방양식이란 불교의 조각기술 등이 정통하지 않은 장인들의 작품으로서 민중들과의 친밀도에 더 부합하는 형식을 말한다.
▶ 머리의 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어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스럽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되고 있다. 양 손은 검지와 중지를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그러나 규모가 주는 압도감이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엄숙함보다는 무심코 바위에 새긴 마애불이라는 생각도 지울수 없는게 사실이었다.
▶ 부서진 육계(肉髻)가 있고, 머리는 뒷부분의 절반이 파손되어 있으나 얼굴은 아름다운 미소를 잔잔히 품고있는 자애로운 극락도사 아미타부처님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자연암벽에 아미타부처님의 불신(佛身)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는 따로 만들어서 올려놓은 거구의 불상이다. 자연석에 머리 높이 2.43m, 전체높이 12.38m의 석불을 만들었다.
▶ 미소를 띤 풍만한 얼굴은 긴 눈과 우뚝 솟은 코, 붉게 채색된 두터운 입술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보다는 자비와 위엄이 없는 그저 무표정한 모습이다. 이마에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인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백호)이 뚜렷하게 양각되어 있는데 밖으로 그은 얇은선이 이채로왔다.육계(佛頂)나 양각인 백호(白毫), 인자한 긴 눈, 풍부하면서도 날카로운 코, 크고 긴 귀, 부드러운 입매 등은 적절하게 조화돼 있어, 불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 안동 이천동 석불상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보라.뚜렷한 이목구비, 특히 코와 입술의 선은 너무 아름다워(부처님께는 죄송하지만 너무 매혹적이라고 할까?) 한참동안 넋이 나간모양으로 보고 있었다(완전 반했다!!). 부처의 32상 80종호를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아름답거나 매력적인으로 표현해 놓은 마애불이 과연 어디에 또 있을까? 그 당시 선조들의 예술혼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1918년에 세운 연미사중수비. 불상 앞 바위 위에 서 있다.
★ 태화산 연미사 연미사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때(AD632~647)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해 온다. 대사는 5층석탑 앞 토굴에서 수도를 했다고 한다. 그 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석불을 조성했다고 하나 그 후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어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시 절이 세워진 것은 1918년의 일이다. 안동지방에서는 연미사를 연구사(燕口寺)라고도 불렀다는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의 기록에 따라 신라 선덕여왕 3년(AD634)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인 명덕(明德)이 창건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의상조사 창건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
▶ 비래방장(飛來方丈)의 제자 명덕
불상을 새겨 모신 이는 명덕 스님이라 한다. 그는 고구려의 열반종의 창시자인 보덕(普德)스님의 제자 중 한 명이라 전한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편 보장봉노 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조에 연구사(燕口寺)가 등장한다. 고구려 보장왕이 선왕인 영류왕을 시해하고 막리지에 오른 연개소문의 진언을 받아 노자를 교조로 하는 도교를 받들자 황해도 용강(龍岡)의 반룡사(盤龍寺)에 머물던 보덕법사가 도교가 불교와 맞서면 국운이 위태로워진다고 간했으나 왕이 듣지 않자 살고 있던 암자를 신력으로 날려 남쪽 완산주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른바 비래방장이야기이다.
▶ 보덕스님의 예견대로 불교를 배척했던 보장왕은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이 되었다. 이처럼 혜안이 밝던 보덕스님에게는 11명의 제자가 있었고 이들이 각각 절을 세웠는데 그 중 명덕스님은 안동에 연구사를 세웠으며 이 연구사가 오늘의 연미사라는 것이다. 연구사란 이름이 생겨난 것은 명덕스님이 큰 석불을 조성하고 그 위에 지붕을 이은 모양이 앞에서 보면 제비의 부리와 같고 뒤에서 보면 제비의 꼬리와 같아 앞쪽 법당을 기준으로 할 땐 제비연(燕)자를 써서 연구사(燕口寺)라 했고, 뒤쪽 요사를 기준으로 할 때는 연미사(燕尾寺)로 불렀다는 것이다.
▶ 제비원에는 세조가 ‘통정대부’ 벼슬을 내린 ‘대부송’이라는 크고 멋진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 소나무가 솔씨의 근본이라 전한다. 석불 주변에는 대부송의 후손인 소나무가 많다. 그래서인지 가서보니까 석불 앞에는 솔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석불 앞 노천 법당으로 가는 길. 길이 굽어지는 곳에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에 자리한 사찰은 국가적 차원의 숙소인 ‘원(院)’으로 활용되었다. 연구사도 원으로 지정되어 ‘연비원’ 또는 ‘연미원’으로 불렸다. 그러나 조선 중기 불교의 억압으로 연구사는 폐사되고 이후 이름마저 잃었다. 남은 것은 석불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제비 연(燕) 자, 그리고 여관이었다는 원(院)의 역사뿐이다.
▶ 석불의 공식적인 이름은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그러나 보통 제비원 석불, 제비원 미륵이라 부른다. 지금 제비원 석불의 뒤편에는 조그만 ‘연미사(燕尾寺)’가 있다. 1934년 연미사(燕尾舍) 자리에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 큰 바위에 새겨져있는 마애여래입상의 앞에는 내방객들이 두줄로 절할 수 있는 공간을 두고 커다란 암벽이 있다. 좁은 공간에서 12m가 넘는 마애불을 찍으려니 배향 공간의 모서리에 바짝 붙어서 간신이 찍었다.그것도 내방객들이 몰려오셔서 한참을 기다려 찍었다.
▶ 자연암벽에 아미타불의 머리부분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가능한 바탕면보다 큼직하게 깊이 새겨 표현하는 수법인 음각으로서 불신을 새겼다. 그래도 상호 만큼은 정성들여 따로 만들어 올렸다고 한다.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과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같은 시대배경이 만들어낸 독특한 양식의 마애불이라고 한다.
▶ 부처나 보살 등이 앉는 자리인 대좌(臺座)는 불상의 발 아래에 대자대비를 상징하는 연꽃을 조형화한 단판연화문으로 음각하여 새겼는데 쌍사자가 받치고 있는 석등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 자세히 보면 우견편단이 아닌 양 어깨를 모두 덮는 방법인 통견(通肩)의 법의(法衣) 주름은 도식적으로 굵은 선으로서 음각화하여 선명하게 표현하였다. 실제 석굴암 불상 이전에는 양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通肩) 양식이었지만 석굴암 불상이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편단우견(偏袒右肩)을 취하면서 한국 불상 양식은 일대 변화를 보이게 된다.이처럼 신체와 옷주름을 선각으로 처리하는 경향은 9세기 후반부터 시작해서 조선까지 이어진다.
▶ 왼손은 가슴높이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중품의 근기를 지니고 있는 중생들을 위한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임을 알 수 있다.
▶ 아미타여래상은 중품하생인, 약사불은 반대의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중생의 근기에 따라 구제한다는 다불사상에 입각한 교리가 밀교형식의 수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천연 암벽에 신체를 선각하고, 정상에 별도로 부처님의 머리부분을 가만히 올려놓은 형식의 특이한 마애불이 바로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다.
▶ 여관이 있던 자리인 제비원 석불(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천연의 바위가 부처님의 몸이다. 부처님의 얼굴은 따로 조각해 그 천연의 바위에 올렸다. 부처님 앞에 바위 하나가 놓여 있는데, 상을 지붕으로 덮으니 바위와 바위 사이 석굴 같은 법당이 만들어졌다. 지붕의 모습은 제비와 비슷해 ‘연자루(燕子樓)’라 했고, 제비의 꼬리 자리에는 요사를 짓고 ‘연미사(燕尾舍)’라 했으며, 법당은 제비 부리에 해당하니 ‘연구사(燕口寺)’라 이름 지었다. 그때가 신라 선덕여왕 3년인 634년이다. 제비 부리 자리의 법당은 지금 지붕 없는 노천 법당의 모습이다. 높은 바위로 둘러진 법당은 제비 둥지처럼 아늑하고, 한껏 올려다보게 되는 석불은 하늘로 솟구쳐 날아갈 듯하다. 정말 무어라 형용 할 수없는 법향이 가득차있다.
▶ 밑에서 그냥 찍으니 미륵불의 상호가 잘 나오지 않았다. 렌즈를 바꾸어서 줌으로 당겼다.드디어 미륵불의 머리와 얼굴부분이 이 잘나온다.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3가지 수행단계를 이르는 삼도(三道)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을 새겨 장식하였다고 목부분은 살짝 붙였음을 알수있는 흔적들이 보였다.그러나 일부에서는 턱 밑의 목걸이 같은 구슬은 본래 모습이 아니고 보수할 당시 시멘트로 만들어 붙인 것으로 빨리 철거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한다.
▶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불신과 불두는 분리되어 있다. 불두의 얼굴과 머리도 따로 조각된 것이다. 여기에는 조각 솜씨를 겨루어 지는 쪽이 죽기로 한 형제의 무서운 내기가 전해온다.
★ 형제이야기 동생은 부지런히 돌을 갈고 다듬었지만 약속한 날까지 미륵을 완성하지 못했다. 형은 빈둥빈둥 놀며 머리만 다듬어 바위 위에 얹었다 한다. 동생은 죽고, 완성된 형의 미륵이 제비원 석불이라는 전설이다. 제비원 석불에는 많은 전설들이 있었는데 제일 밑에 모두 모아놓았다. |
▶ 그러나 분리되어 있는 불두는 잘린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이여송의 짓이라 전해진다.
실제 이 미륵불의 목 부분이 칼에 베인 까닭은 아닐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 견해이지만 당시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면 때로는 '설화'와 '실화'의 구분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자세히 보면 가슴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이 있고, 왼쪽 어깨에도 뭔가에 스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이여송이야기 이여송은 왜란이 평정된 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우리나라에 큰 인물이 날 명당자리를 찾아다니며 혈을 끊었는데, 제비원 앞에서 그만 말발굽이 땅에 붙은 듯 꼼짝하지 못했다 한다. 그러자 그는 길가의 미륵불을 발견하고 불상의 목을 친다. 석불의 목에서는 피가 흘렀고, 지금도 가슴에는 핏자국이,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 |
▶ 이외에도 절을 지은 목수가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는 전설, 큰 바위 둘이 먼저 이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는 전설 등, 제비원에는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아래에 자세히 발췌해 놓음>
▶ 석불의 오른쪽 솔숲 속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연미사 중창 때 산자락에 흩어져 있던 부재들을 모아 세웠다. 양식상 고려 초 혹은 신라 말기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정확한 자료가 없다
◆ 성주풀이
성주 본향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제비원에 솔씨 받아
이산 저산에다 던졌더니 밤이며는 이슬 맞고
낮이되면 볕살받어 그 솔이 점점 자라나서
청장목이 되었던가 도리목이 되었던가
.'성주풀이'의 한 대목이다. 여기에 제비원이 나온다. 그것도 성주의 본향으로. 성주 신앙의 메카로서 제비원 솔씨 공원이 나온다.성주란 집의 신이다. 성주풀이는 그러한 성주신의 내력을 노래한 서사무가다. 제주에서 함경북도까지,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불리는 성주풀이는 지역에 따라 노래의 투나 내용은 달라도 그 들머리는 대개 성주의 근본을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답은 으레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다. 집을 짓는 재목으로 쓸 나무가 모두 제비원의 솔씨에서 왔다는 이야기다. 제비원은 우리의 민속 신앙인 성주신앙의 근거지이기도 한 곳이다.
▶ 성주(城主) 건물의 주신으로 여기는 성주는 성조(成造)라고도 부르는 상량신(上樑神)으로 나무 또는 솔씨를 의미하는데 팔도의 성주풀이가 모두 고향을 안동 제비원으로 읊고 있다. 아마도 부근에 송천(松川) 송현(松峴) 등 소나무와 관련된 지명이 많은 것처럼 예로부터 이 지역의 소나무가 건축목재의 으뜸이 됐던 모양이다. 또 경북 내륙의 유명한 금강송(金剛松)을 모두 안동의 소나무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성주풀이는 가택신(家宅神)인 성주신(城主神)과 그 부인인 터주신의 내력을 이야기하는 무가(巫歌) 또는 무속신화. 새로 집을 지었거나 이사한 경우 집의 신인 성주신을 모시는 굿을 하거나 독경(讀經)을 할 때 부르거나 읽는 것이 성주풀이이다. 일반적으로 성주신은 집의 주인인 남성을 보호하는 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집의 주재신이 된다. 이에 따라 성주신은 대청의 대들보 위에 모셔진다. 지역에 따라 성조푸리, 성조풀이, 성주본가, 성조신가 등의 이칭이 있지만 성주풀이가 널리 받아들여지는 명칭이다. <인용/편집>
▶ (비교)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제93호)
전체 높이 17.4m, 원립불(圓笠佛) 2.45m, 방립불(方笠拂) 2.36m. 화강암 천연암벽을 불신으로 그 위에 목 ·머리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은 불상으로 안동 이천동여래입상과 항상 같이 봐야하는 마애입상이다.
▶ 암벽에 세워진 거대한 마애불들은 신체의 비율도 맞지 않고 기형으로 생겼으며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친밀감이 가는 정다운 마애불이다.
▶ 둥근 갓(원립)을 쓴 입상은 자연스런 미소를 나타내 보이고 있으며 목은 원통형으로 삼도(三道)는 없고 통견(通肩)의 납의(衲衣)는 가운 모양으로 몸을 싸고 있다.
▶ 둥근 갓(원립)을 쓴 입상은 양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합장을 하고 있는데 방립을 쓴 입상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모습이다. 자세히보면 턱의 모양이이 서로 다름을 알 수있다.불상에도 관상법이 적용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인에 대해서 여러가지 견해가 있지만 원립입상은 연꽃을 쥐고 있으니까 미래의 깨달음의 염원을.. 방립입상은 깨달으면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님을 알 수있다는 의미인 합장의 원초적인 뜻으로 보고져한다.
▶ 사각형 갓(방립)을 쓴 불상은 합장한 인상이 다를 뿐 각부의 조각수법은 왼쪽 불상과 거의 같고 전설에 의하면 원립을 쓴 불상은 남자이며 방립을 쓴 불상은 여자라고 한다. 1995년에 발견된 명문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이 아니라 1465년(세조 11)에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로 조각한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다.이 입상은양손은 합장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마치 벙어리장갑을 낀 것처럼 두툼하지만 귀엽고 앙징스럽다.
▶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고 부자연스럽다.현장에서 보면 굉장히 크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점들은 본래의 불상의 종교적인 상징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그 지역 호족들의 얼글을 닮은 토착화,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으로 연꽃을 꼭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주조와 인상은 원립불과 같다.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의 뒷모습을 보면 매우 단순하면서도 정갈하게 만들어졌다. 귓볼도 적당히 내려왔으며 머리도 단정하게 단발머리를 연상케하는 친밀감이 가는 모습이었고 목부분도 어색하지 않게 마무리를 잘한 편이었다.
★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의 전설 이 지역사람들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완자가 없는 것을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
▶같은 형식의 거대한 형식의 마애여래입상들은 고려 전기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과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서로 비교가 많이 되므로 반드시 숙지하시를 바랍니다.
★ (보충) 스토리텔링을 위한 제비원의 전설모음★
1. 마음씨 고운 연이 처녀 제비원에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이곳에서 심부름을 하던 연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인물도 곱고 마음도 착하며 불심 또한 깊어 이웃의 총각 뿐 아니라 지나가는 과객들 또한 연이를 사모하였고 고운 마음씨에 탄복했다. 이웃 마을에 김씨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집은 부유햇지만 마음씨는 나빠 다른 사람을 도울 줄 몰랐다. 이 집의 총각도 연이를 사모했는데, 갑자기 비명에 죽어 저승에 가게 되었다. 염라대왕은 총각이 살아 생전에 악덕을 많이 쌓았으므로 다음 생에는 소로 태어날 것인데 이웃 마을의 연이는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선행의 창고가 가득 쌓여 있으니 좀 꿔서 쓰면 다시 살아 돌아갈 수가 있다고 하였다. 저승에서 연이의 재물을 빌려쓰고 살아난 총각은 이승에 돌아와 연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큰 재물을 얻게된 연이는 이를 모두 부처님을 위해 쓰기로 하고 법당을 지었다. 큰 법당을 짓느라 5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마지막날 기와를 덮던 와공이 발을 헛디뎌 지붕에서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높은 지붕에서 떨어진 와공의 몸이 마치 기왓장처럼 산산히 조각 났는데, 그 순간 와공의 혼이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절을 제비사 또는 연미사라고 부르고 이 일대를 제비원 또는 연미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 두 목수이야기 안동에는 연미사 외에도 6.25 때 소실된 법룡사(法龍寺)란 절이 있었는데 어느 땐가 목수 두 사람이 절 짓기 내기를 하게 되었다. 한 사람은 법룡사를 짓고 다른 한 사람은 제비원 절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비원절 목수가 내기에 져 죽기를 결심하고 지붕에서 뛰어 내렸지만 그는 죽지 않고 한 마리 제비가 되어 푸른 하늘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고창의 원은 제비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절의 이름도 연비사(燕飛寺) 또는 연미사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후에 법룡사는 불타 없어졌지만 연비원은 그대로 남아 있다. 3. 명공의 질투 이 마애불 조각을 당시 이름난 석공에게 의뢰를 하였는데 석공보다는 함께 일하던 제자가 더욱 조각의 솜씨가 뛰어나 주변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샘이 난 스승은 제자가 절벽에 사닥다리를 딛고 올라가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사닥다리를 치워버렸다. 그러자 그 명공은 한 마리의 제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버렸다.이 전설로 인하여 이 곳의 지명이 연미원, 즉 제비원이 되었다고 한다.
4. 제비원 미륵불을 벤 이여송 임진왜란 당시에 청병으로 명나라에서 온 이여송은 난이 평정되자 우리나라의 훌륭한 인물이 날 자리를 찾아 혈을 끊었다고 한다. 이여송이 제비원 앞을 지나게 되었을 때 말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사방을 둘러본 이여송은 미륵불을 보자 칼로 목을 쳐서 떨어뜨렸다. 칼로 목을 벤 까닭에 미륵불의 목부분에는 아직까지 가슴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이 있고,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의 자국이 있다. 당시에 떨어진 목은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어느 스님 한분이 와서 떨어진 목을 제자리에 갖다 붙이고 횟가루로 붙인 부분을 바르면서 염주 모양으로 불록불록 나오게 다듬어 놓았다고 한다.
5.제비원 미륵불을 조각한 형제 어떤 형제가 일세에 뛰어난 조각가가 되려고 열심히 노력을 하였다. 형제 가운데 어느 한쪽은 당대 제일의 조각가가 될 수 있지만 한쪽은 둘째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뜻을 이루지 못한 한쪽은 죽기로 했다. 일정한 기간을 두고 미륵을 만드는 내기를 했다. 동생은 열심히 돌을 다듬었으나 형은 빈둥빈둥 놀기만 했다. 약속한 날이 되자 동생은 그날까지 미륵을 완성하지 못했으나 형은 미륵의 머리만 조각하여 바위 위에 얹어 훌륭한 불상을 만들었다. 동생의 미완성 조각은 개천에 굴러다닌다고 하며 제비원 미륵불상은 목부분을 보면 이어서 만든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6. 제비가 된 목수와 욱바우골 제비원 절에는 난간이 있다. 목수가 이 난간 집을 짓기로 구상했다. 목수는 절 밑 부분부터 정성들여 지어 올라갔다. 절을 다 지은 뒤에 내려 올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구상대로 난간집을 지은 목수는 제비가 되어 날아가버렸다. 제비원의 미륵불이 만들어지기 전에 큰 바위 둘이 서로 그 자리에 좌정(坐定)하려 했으나 현재의 미륵불이 먼저 좌정을 해 하나는 제비원 넘어 욱바우골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현재의 미륵불은 먼저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불도들이 받들어 모시는 미륵불이 되었다. 욱바우골의 바위는 이것이 원통해 울면서 나날을 보내게 되고 사람들에게 우는 바위로 알려지게 되어 욱바위라 불리게 되었다. |
<사진.글.편집 석암 이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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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첫댓글 즐감하고 좋은공부 감사합니다
제비원 불상 잘 보았습니다...나무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