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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의 추억(e8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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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님 문화 산책 스크랩 다산과 황상의 일화를 읽고 돌아가신 은사를 기리다.
김봉길 추천 0 조회 64 17.04.19 18:31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며칠 전 꿈에 몇 년 전 작고하신 은사를 뵈었습니다. 잠이 깬 후 무얼 어떻게 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꿈인데 아무튼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저는 내세에 대해 믿는 사람이 아니지만 어쨌든 꿈을 꾼 후 새삼 돌아가신 분이 새삼 그리워졌습니다.

 

생전에 드린 것 보다 받은 게 더 많은 터라 제 형제보다 더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고 지내었지요. (제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선생님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잠이 안와 꺼내 본 책이 ‘미쳐야 미친다(정민 지음)’란 책인데 책 내용 중 정약용과 그의 제자인 황상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훌륭한 이야기였습니다. 또한 저와 선생님의 인연을 새삼 되새겨 보게 한 책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이란 분이 교육자로도 훌륭한 분임을 새삼 느꼈지요. 황상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향리에서 공부에만 매진하다가 다산의 작고 전에 강진에서 한양까지 찾아가 뵙고 내려오던 도중 스승의 부고를 듣고는 곧바로 다시 귀경하여 스승의 장례에 참석하고는 상복을 입은 채 귀향했습니다.

10년이 지나 스승의 기일에 다시 기별도 없이 한양을 찾아가니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이감동하여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했다지요.

 

그가 15살 되던 해 한양에서 뛰어난 선생님이 주막집에 내려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용기를 찾아가 배움을 청합니다. 아마 그는 처음엔 그다지 우등생은 아니었나 봅니다. 자신의 공부가 미진함을 스승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선생님 제가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너무 답답한 것입니다. 그런 제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을 들은 다산은 잔뜩 주눅 든 소년 황상에게 기를 북돋워줍니다.

 

“배우는데 항상 문제는 제가 민첩하다고 생각하고,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단다. 암기력이 뛰어난 아이들은 그 뜻을 깊이 음미할 줄 모르고, 제목만 주면 금방 글을 짓는 사람들은 똑똑하다고 하나 저도 모르게 경박하고 들뜨는 게 문제란다. 한 마디만 들려주면 열개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곱씹지 않으니 깊이가 없기 쉽단다. 네가 둔하다고 하나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둔한 끌로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선 막히지 않는 큰 구멍이 뚫릴 것이고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미욱한 것을 닦고 또 닦으면 그 광채가 눈부시게 될 게야. 그러니 첫째도 부지런함이요, 둘째도 부지런함이며, 셋째도 부지런함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넌 부지런이란 걸 결코 잊지 말거라.”

 

(따지고 보면 저 역시 둔하고 앞뒤가 꼭 막힌 성격에다 소심한 성격이라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가르침을 황상은 평생 두고 잊지 않았고 그때로부터 무려 61년이 지나 77세가 된 임술 년에 그 첫 만남을 ‘임술기’란 글로 남겼을 때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정약용 사후 15년이 지나 그의 나이 63세 되었을 때 꿈에 스승을 뵙고는 ‘몽곡’이란 애절한 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다산이 황상에게 한 것 같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지금의 제 모습이 황상에 비할 바가 못 됨이 아쉽습니다.

 

 

돌이켜 보니 선생님의 은혜를 입어 과학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때문에 교직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되어 남보다 빠른 승진도 하게 되었지만, 돌이켜 보면 남들이 똑똑하고 재주 많다고 추켜 주는 것에 교만해진 거 같습니다.

 

학문에 대한 노력이나 자기 내면의 발전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여 학식의 수준이 경박하고 깊이 없음을 느낍니다. 황상과 같은 부지런함과 꾸준함이 모자랐던 게지요.

 

학문 외에도 선생님께선 제게 사진과 음악에 대한 이해를 좀더 깊게 해주셔서 평생의 취미가 되어 삶을 좀더 즐길 수 있고 어려웠을 때도 이것들로 위로를 받고 살아 갈 힘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교직에서 퇴직한 후 선생님을 자주 뵐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다른 것에 정신이 빠져 선생님이 아쉬워 찾으실 때만 달려가 뵈었을 정도로 무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방에 제가 제주도에서 찍은 꽃 사진을 갖고 계신 걸 보고 저의 무심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생님이 저와의 만남을 기다리셨다는 것을요. 아마 평소 선생님은 제가 퇴직하면 함께 여행도 하고 공통의 취미인 오디오와 음악을 즐기려 하셨나본데 건강을 상하셔서 그 희망을 접으셔야 했고 갑자기 지병이 악화되어 병원 입원치료도 별 효과를 못 보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꿈에서 깨어 곰곰이 생각하니 선생님이 남겨 주신 게 무척 많음을 느낍니다. 가장 큰 건 유능한 후배들과의 인연입니다. 선생님께서 남긴 가장 큰 유산이 제자들이지요. 교육자로서 가장 큰 보람이 바로 제자들의 훌륭한 성장이고 그 제자들이 스승에 대해 고마움을 갖고 있는 것인데 그 점에선 저는 선생님의 발끝도 못 미칩니다. 교직생활 중 저를 좋은 스승이라고 기릴 제자가 얼마나 될까요. 아마 열손가락 정도나 될까.

 


 

다행히 주변에 선생님의 유물이 남아있어 선생님을 기릴 수 있으니 새삼 고마움을 느낍니다.

 

양평 집에 가면 선생님이 분양해 주신 진돗개가 저를 반깁니다. 오래 전에 데려왔기에 사람으로 치면 팔십이 넘었을 터라 데리고 나가면 전 같이 뛰어 다니지 못하니 이 놈하고도 이별할 날이 가까워지는 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집에서 LP를 들을라치면 선생님께서 양도받은 SME 톤암을 만지게 됩니다. 그리고 음원 역시 선생님께서 생전에 남겨 주신 음반이 여럿 됩니다. 그리고 제게 만들어보라고 넘겨주신 진공관 여러 개와 스피커 유닛이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해 목표가 이것들을 완성하는 거라 차근차근 부속을 준비하고 있지요.

 

 

이젠 저도 70을 바라봅니다. 선생님과 첫 만남이 1971년이니 만 46년이 흘렀네요. 그리고 선생님을 마지막 뵌 지도 벌써 4년이 되어 갑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유족 분들과 불화가 있어 묘소에 찾아뵙지 못한다 해도 늙어가는 제자가 선생님에게 항상 고마움과 그리움을 안고 지낸다는 걸 알아주시고 위안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내세가 확실히 있다면 머지않아 저도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가게 되었을 때 생전에 못한 것들을 함께 즐기게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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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7.04.19 18:33

    첫댓글 꿈에서 본 것과 황상의 "몽곡'이란 글의 내용이 상당히 일치해서 여기에 그 느낌을 올린 겁니다.

  • 17.04.19 18:49

    김봉길님 연세가 많으시네요~~~
    카페의 자랑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할배들의 열정에 감동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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