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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과 공존을 위한 세상 끌어안기
-최숙미의 수필세계 -
권대근(문학평론가)
수필을 사랑하는 건 결코 작가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작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수필을 사랑한다면 그건 아직 수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수필을 사랑하는 건 결코 수필 속에 들어있는 풍경을 사랑하는 것 또한 아니다. 최숙미 작가가 상상력으로 구축한 풍경을 사랑하기 때문에 수필을 사랑한다면, 아직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수필을 사랑하는 건 결코 수필의 문학적 가치 때문도 아니다. 수필을 사랑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에는 그 수필이 세상을 다루고 있는 방식을 사랑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필을 사랑한다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그 방법이다. 그리고 또 다른 수필을 사랑하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말하자면 수필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서도 갈증에 시달리는 것은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만족할 만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좋은 수필은 끊임없이 세상을 껴안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지도 모른다. 수필의 지향점은 인문학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둘 다 모두 인간의 조건을 추구한다. 세상이 언젠가 수필이 될 것을 꿈꾸며 한국에세이작가연대 중부지부장인 최숙미 수필가가 수필집 <칼 가는 남자>를 상재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최숙미의 분신이다. 그래서 이 수필집에서 풍겨나는 향기는 작가의 사상과 인격을 통해 배어나는 감동이요, 교훈이다. 작가는 작품집으로 말해야 한다는 나의 독촉에, 나름대로 빨리 응답해주어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폭발적인 창작열로 우렁찬 고고성을 울린 데 대하여 우리 에세이문예 출신 작가들과 함께 기뻐한다.
본격수필 전문지 <에세이문예> 수필로 등단한 이후, 최숙미 수필의 성과를 한마디로 말해보라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그냥 간단하게 ‘놀랍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 달에 몇 편씩 메일로 도착하는 그녀의 수필을 음미하는 동안 나는 몇 년 전과는 분명 다른 차원으로 그녀의 수필이 엄청나게 질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성장의 결과물이자 결정체가 이번에 발간된 최숙미의 수필집 <칼 가는 남자>다. 좋은 수필의 출발점이 인식에 있듯 최숙미 수필의 시원은 발견과 재해석에 있다. 그녀는 지치지 않고 몇 번이고 그 자리로 되돌아가곤 한다. <멜리사의 발>, <모모>, <무진의 안개>, <비빕밥>, <소나기> 등은 삶의 틈새 사이에서 자신을 향해서 그리고 삶의 조건을 향해서 끝임 없이 묻는 글이다. 그녀의 수필을 정독하고 나면,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일 어둠을 밝히고자 등불을 들고, 때로는 횃불을 들고, 어떤 때는 수레를 밀고 언덕을 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성족보>, <파란 집> 등의 작품을 바탕으로 작가의 성향을 분석해 보면, 그녀는 어떤 억압과 속박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이데올로기도 세속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반대로 그녀는 자신의 고유함을 지키기 위하여 세속적 가치에 저항하려 한다. 그런 다음 기꺼이 공존의 방법을 찾는다는 것을 <까치밥>이란 수필을 읽고 나면 추론할 수 있다. 작가의 자태에서 풍기는 ‘단아함’으로부터 우리 삶의 보편적 가치로서 휴머니즘을 감지할 수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이 책은 우리들의 가슴에 따뜻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각각의 수필들은 독립된 항이지만, 지향점은 하나다. 그 ‘공존’의 그림자 형상들은 매번 각자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태이며, 하나의 사건이며, 하나의 세계다.
나는 다양한 제재 범주의 차이를 무시할 생각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제재 범주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집을 짓고 그 안에 어떻게 자기의 세계를 펼치느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속의 <가을 바다>, <갈망채>, <귀거래사>, <늙은 변소>, <달마실>, <동피랑>을 읽으면서 평자는 그 동안 알고 있던 것보다 더욱 작가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더욱 더 그녀의 후덕한 인간미와 해박한 지성을 엿볼 수 있었다. 육화된 그녀의 수필은 새로운 흥분을 자아내게 만든다. 전통적인 인포멀 양식의 수필을 지향하는 최숙미 수필의 우수성은 전략적 글쓰기의 일환으로 제시되는 주제의식의 ‘구체화’와 ‘의미화’에 있다. 이 두 요소는 수필에서 문학성을 결정짓는 하나의 축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우리 수필의 위상을 높여 줄 수필집 목록에 최숙미의 <칼 가는 남자>를 추가하고 싶은 것이다. 아직 등단한 지가 몇 년밖에 안 되어 문단의 말석에 앉아 있지만, 문학성으로 볼 때, 기성작가 못지않은 기량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냥 간단히 말하면 이 수필집은 올해의 발견이자 희망이다. 맛을 보려면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질 않는가. 현미경과 망원경의 눈을 동시에 지니고 최숙미 수필집으로 여행을 떠나본다. 무엇을 썼느냐보다 어떻게 썼느냐 하는 데 초점을 두고 분석과 판단을 할 것이다. 최숙미는 작은 풍경도 반드시 수필의 형태로 직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수필 작품으로 보여주는 작가다. 모든 세상의 가치는 크게 대대법적 대칭으로 나눠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겠으나, 그것도 최숙미 개인에 대입하면 하나로 축약할 수 있다. 이 작가의 문학세계에서 큰 축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삶의 복원을 꿈꾸는 상생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국문학을 전공한 작가답게 간접화와 우회화의 기법으로 자신이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서평의 가치는 그녀가 한국에세이작가연대 중부지부장이라는 사실과 제3회 풀꽃수필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데 있다.
II.
최숙미는 수필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국문과에 적을 두고 있는 상태에서 본격수필가의 꿈을 이루었다. 등단 후 본격수필가 양성기관인 저산본격수필창작특임연구학교의 ‘등단 후 과정’과 ‘심화 과정’을 수료한 이력으로 볼 때, 그 누구보다도 제대로 수필을 알고 쓰겠다는 의지가 강한 수필가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문재를 타고난 사람에게는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필마의 기운이 있는 법이다. <시크릿 가든>, <아르페지오>, <아리랑> 등의 글을 읽으면, 인간의 열정이 뿜어내는 추진력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느껴진다. 그녀의 견개한 자태 앞에 서면 어떤 아우라를 느끼기 십상이다. 간단히 그녀를 소개하자면, 수필가는 인류의 교사여야 한다는 지령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여류 수필가로서, 한국에세이작가연대 중부지부 지부장의 소임을 성실하게 소화하는 친화력과 열정을 갖춘 분이다. 한 달에 서너 편 이상의 수필을 꼭 써낼 정도로 왕성한 창작력을 보이는 것을 보면, 그녀에게는 분명 ‘필마’가 끼었다. 더듬이의 감각으로 사물의 발신음을 듣는 작가라 하겠다. 수필가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문학성이 짙은 <연지빛 에세>, <흙속 진주> 같은 수필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로서 이름과 자리에 맞게 자신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의 발로라 하겠다. 필마의 기운으로 수필 쓰는 일에만 몰두하여 수필을 썼기에, 수필집에 실린 <인디언 추장의 편지>, <칼 가는 남자> 등 거의 모든 글들이 하나같이 문학적 가치를 담고 있다. 오늘날 우리 여류 수필이 수필계를 선도할 수 있을 정도로 질적으로 나아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된다. 최숙미의 가세로 우리 수필이 더욱 전성기를 누리게 됨은 그녀에게는 문학적 숙명이고, 수필계로서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서문에서 수필과 자신의 관계성을 말하고 있다. “수필은 늘 내게 아침 새처럼 재잘댔습니다. 그 새는 감동적인 순간이나 아름다운 여행길에서만 만나지는 게 아니었어요. 무심히 보던 신문조각에도 날아들었고, 기름기 절은 공장골목에도 있었습니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는 그녀의 삶 자체가 수필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빨리 수필집을 내어서 에세이문예 출신으로서 이름을 빛내고, 작가다운 작가로 나아가려고 가열차게 자신의 안일을 채칙질했던 것이리라. 최숙미가 필마를 타고 달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촉촉한 감동이 실핏줄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인간이 독립적 자아로 세계와 마주 설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비로소 한 사람의 인간이 탄생되는 것이라고 볼 때, 최숙미는 세계와의 접점에 위치에 있는 작가다. 그래서일까. 모든 경계선에는 항상 불꽃이 터지기 마련이듯 여자라는 왜소한 자아가 거대한 대타자와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영혼의 스파크가 그녀에게서는 휘황하게 번쩍인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그 불꽃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흔적 없이 연소되지만 작가는 그 불꽃의 터널로 빠져나와 자신만의 빛깔로 영롱한 빛을 발한다. <파란 집>, <진달래>, 등은 직접 온몸으로 세계와 부딪치면서 형성된 육화된 체험이며, 그 체험의 흔적 하나하나가 영혼의 분비물이 되어 수필로 태어난다고 하겠다. 자신만의 렌즈를 가지고 있는 작가는 다양한 세계의 이해 방법론을 <폭설 서정>, <아마포 손수건>등의 수필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큰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있기에 결코 강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 최숙미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외로움에 주저하지 않는 발분의 정신을 지니고 있는 작가다. 그러기에 그녀에게는 아직 타오르는 순수함이 남아 있다.
최숙미 수필이 줄 수 있는 감동은 최숙미의 수필에 나타난 풍경이 우리의 뇌리 속에 나타났다가 읽고 나면 그것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책을 덮고 난 이후에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듯한 느낌을 주는 데 있다. <모가지 수난사>, <인디언 추장의 편지> 등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극이 주는 충격과 동일한 울림을 준다. 그녀의 수필은 풍경에서 출발했지만, 등단 이후 지금은 정경을 넘어 절경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라캉의 말에 따르면, 이미 상상계를 넘어 상징계에 진입하여 실제계의 경계에 있다고 하겠다. 류병숙의 수필이 '정서'를 낯설게 만든다면, 최숙미의 수필은 ‘풍경’을 낯설게 만든다. 최숙미의 수필 <틈>, <포도원지기> 등은 한마디로 새로운 실천, 새로운 삶을 위해 세상을 끌어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녀의 수필은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상생과 공존을 위해서 삶을 복원하고 삶에 동참해야 한다는 자본주의 4.0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녀의 세계관이 현실적이며 변증법적 역사 발전에 순응하고자 함을 나타낸다. 이로써 우리는 그녀가 서정의 물기가 잔뜩 배인 과거의 어느 날에서부터 먼 미래의 찬란한 날까지 하루도 자신의 영역에서 이탈하지 않고 모두를 품어서 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최숙미 수필을 읽히게 하는 매력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강한 설득의 힘이다. 그녀의 수필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행동으로 밀고 나갈 '정서‘와 ’논리‘의 힘을 내포하고 있다. 같은 여성 수필이라도 차원이 다르다. 최숙미의 수필 <노환>, <살구>, <룸메이트> 등은 삶 속에서 생각해볼 시간을 준다는 점에서 삶에 유익하다. 따라서 그녀의 수필이 지향하는 가치는 복원된 삶이다. 상생과 공존을 위한 세상 껴안기는 최숙미 수필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강줄기라 하겠다.
이 수필집은 사람들의 눈이 미처 이르지 못하거나 별스럽게 보이지 않아 스쳐 지나간 것을 찾아내어 그것이 갖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진실한 의미를 세상에 전하기 위한 수단이다. 우리가 사십여 편의 수필을 읽었듯이 최숙미가 다루는 정경은 우리가 문을 열고 집밖을 나가면 접할 수 있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그림이다. 누구나 잊을 수 없는 기억 한 줄 정도는 있을 것이며, 어린 시절 한 번쯤은 혼자만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서본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최숙미는 수필을 학문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세상과 삶을 노래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수필을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수필 <모모>, <무진의 안개> 등은 이웃을 돌아보고,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역할에 있어서 언제나 선두에 있다. 그리고 그런 점은 첨예하게 세상을 사유하는 철학과 닮았다. 다만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삶 속에 느낀 점을 편안하게 써내려간 까닭으로 그녀의 수필은 쉽게 읽혀지고, 깊은 사유에 놓인 초월론적 현상학이란 이유로 약간은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 모든 것이 조금만 들여다보면, 사유든 현상학이든 모두가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임을 역설한다. 이번 서평의 목적은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공유의 미학을 쉽게 풀어내는 것이다. 가장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수필 <비빕밥> 속에는 복원해야만 하는 우리네 삶의 철학이 내재해 있어 관심을 끈다. 그 숨겨진 의미를 문학적 가치와 함께 견주며 차근차근 분석해 볼 이 글은, 그녀의 수필과 인간성을 큰 호흡으로 횡단하며 한 수필가의 고뇌에 동참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독자에게 내어 줄 것이기에 유의미하다 하겠다.
삶과 유리된 수필은 삶을 해친다.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의 추구는 삶의 질을 높이지 않는다. 인간행위의 모든 산물은 삶과 격리되어 있지 않다는 명제를 전해주는 이 책은 그래서 읽고 싶은 책이다. 톨스토이는 지극히 단순한 마음, 평범한 사람이나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것, 남의 기쁨을 기뻐하고 남의 슬픔을 슬퍼하며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것을 예술이라고 하였다. 최숙미의 수필 <살구>, <화살촉 햇살> 등은 진정으로 삶을 생각하고, 삶 속에서 삶의 길을 열어가는 공존의 풍경을 자유롭게 그려나가는 것이기에 한마디로 그녀의 수필은 인생론의 보고다. 인생이란 세월을 전제하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것과 시간의 흐름은 당연히 연속되는 사건을 만든다. 사건들은 인생의 긴 행로를 따라 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축적된다. 세월이 우리에게 나이만 무게를 보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중년을 넘어서고, 노년으로 접어들면 우리의 등 뒤에는 세월의 부피만큼 온갖 기억들도 무겁게 쌓여간다. 삶이라는 것을 소재로 하여 생명감이 넘치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이 최숙미의 꿈이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방송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등단 후에도 전공 심화 과정에서 본격수필 창작을 향한 향학열을 불태웠던 것이다. 끝자락을 펄럭이면서 더 빠르게 질주하는 세월을 놓칠세라, 한 점 한 점 그림을 그리듯 수필을 쓰며 <모모>, <무진의 안개> 등에서 자기 내면의 목소리는 물론 사회의 목소리, 역사의 흐름도 한 편의 작품 속에 담아내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을 나는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높게 평가한다. 다작이 한 작가의 문학적 성취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숙미는 다작 속에 수작이 나온다는 것을 믿고 수필의 시대를 관통한 젊은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 하겠다.
<호빵>, <양선>, <외계인 납치사건> 등의 수필을 읽고나면, 그녀에게 있어 수필은 지나가버린 삶의 파편을 주워담는 작업임을 알 수 있다. 기억의 창고 속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도 있고, 너무 깊이 보관되어서 얼른 찾아낼 수 없는 삶의 조각들도 있다. 기억들은 시간의 줄에 꿰어져서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낱낱이 부서진 채로 파편이 되어서 흩어져 있다. 분명히 내게 실재하였던 삶의 편린이었는데도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것도 있고 더 선명해진 부분들도 있다. 수필에 있어서 소재는 일상적이요, 평범한 삶의 이야기이면 충분하다. 문제는 그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 평범한 이야기를 어떻게 문학적 사건으로 승화시켜내느냐, 즉 인생에 대한 어떤 새로운 해석을 내림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느냐다. 최숙미의 수필 <토요품앗이>, <빈 경로석> 등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 인간미가 서려있던 시간들에 나름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수필 문체는 매우 섬세하고 안정되어 있다. 최숙미는 물상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을 종교적 상상력이라든지, 철학적 인식이라는 사색의 과정을 통해서 주체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었다. 그녀의 수필쓰기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과거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글쓰기다. 그렇다고 단순히 의미만 부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현재의 나에게 긍정적으로 보탬이 되는 성찰이 빠트리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삶의 브래이크들, 견디기 힘든 갈등을 보여주기도 하고, 통과의례를 치르듯이 감내해야 했던 뼈아픈 시련도 들려준다. 결국 모든 인간의 조건들에 대한 의문을 삶에서 해답을 찾는다. 그래야 삶을 바로 세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수필집에 수록된 수필들의 함의는 평자가 해설한 이상으로 깊고 아픈 영혼을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않고도 그 깊고 뜨거운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수필 <진달래>가 아니겠는가.
또 하나 최숙미 수필의 축을 이루는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자기 응시’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수필을 통해 자기를 응시하고, 나아가 성찰을 도모한다. 종국에는 삶을 바로 세워 그 중심에 서고자 한다. 이러한 성찰적 태도야말로 최숙미의 가장 큰 자산임은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수필에서는 자기 고백적 반성이 필수적이며, 이것이 결여되면 진정한 독자와의 공감대가 생기지 않는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수필이라면 최숙미의 수필들은 이런 조건에 아주 부합한다. 생각의 풍경에 담긴 작가의 수필 <초록 모자를 쓴 여인> 안에는 인간적인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표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정신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충분한 사고와 선택의 여과 과정 속에서 진솔한 자기 노출의 호소성이 있어 성찰의 글로써 수필의 향기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하루를 시간의 관성에 의해 살아가는 데 반해 작가는 하루의 가치를 위해 산다. <동피랑>이란 수필은 사실이나 체험에 따른 자신의 생각이나 상념, 느낌 견해 등과 같은 감정이 문학적인 언어와 함께 나타나 있어 읽는 맛을 준다. 각각의 수필에서 보이는 조형적 특성은 최숙미 수필의 가장 강한 매력이다. 이를테면 감동을 위한 형식상의 전략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조형미 구축을 위한 전략화는 구성미학 차원에서 멋을 내고, 서두와 결말부에 놓인 비유적인 문장은 연상과 상상의 통로로 연결되어 문학의 맛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형식미를 통해 멋을 내고, 문학적인 장치 활용으로 맛을 우려내는 감동의 배가 전략은 그녀의 수필적 기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녀의 문학적 행보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낸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그녀의 향후 가능성에 대해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동료로서, 필자는 최숙미가 자기 나름의 개성적인 색깔을 수필 속에 축성하기를 소망한다.
어쨌거나 본격수필 창작법을 익혀 구성적, 전략적, 미학적 조형성을 중시하고, 수필에 문학성을 주기 위해 일반적인 형식으로부터 탈피하여, 수필의 조형적 차원에서 낮설게 하기를 시도한 점 등은 높이 평가된다. 좋은 작품은 어떤 글이라도 복합적 통일성이라는 형식적 특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전제해서 볼 때, 그녀의 이 수필 <친절 마켓팅>은 언어의 조직적 구조면에서 특이성을 확보, 나름의 미학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녀의 삶과 사유는 위에 열거한 가치에 따라 원칙적으로 영위되기에, 이 수필집은 카타르시스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훈훈한 향기를 안겨준다고 하겠다. 그녀의 수필 <칼 가는 남자>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신앙적 믿음 위에 단아하고 우아한 교양미를 풍기는 문사인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실감의 유리와 보수, 즉 프리즘의 눈으로 읽어내어야 할 개인적, 사회적, 시대적 삶의 바람직한 방향을 훌륭하게 모자이크해 내는 솜씨로 볼 때, 이 수필집은 우리 수필을 한 단계 업그래이드시킨 작품집으로 기록되어도 손색이 없겠다. 수필이 안식과 위안을 주는 데 목적이 있는 만큼 최숙미는 이런 수필의 기능과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리랑>의 결말부는 언제나 구도자적 자세로 반성적 성찰이 나타나고, 미학적 차원에서 반전이나 여운이 끼어든다. 그 방법은 고백 아니면 여백이다. 이 수필집이 주는 또 다른 강점 중의 하나는 <흰 구름>에서와 같이 개인적 체험을 보여 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수필 <호빵>이 주는 최대의 매력인 고백성을 힘껏 활용하는 것은 독자를 감동의 고지로 끌어올리겠다는 강한 의지의 발로로 보인다. 작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나 단점까지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과감하게 노출시킴으로써 이 수필집 <칼 가는 남자>는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III.
작가 최숙미야말로 독자들이 수필을 통해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빈틈이 없이 완벽하고 단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릇처럼 움푹 패인 부분이 있어 인간적인 사람이기에 독자에게 친밀감을 준다. 결국 작가는 삶을 복원하는 방법 속에서 결코 이데올로기에 억압되지 않겠다는 걸 보여주며, 삶 속으로 들어가 복원된 삶과 더불어 살아가기를 소망하기에 삶은 나눔의 터전이요, 공존의 광장임을 역설한다. 궁극적으로 최숙미 수필은 삶에 대한 존재 규명과 방법의 모색을 목적으로 하는 자기 응시의 수단이기에 그녀의 수필 쓰기는 구원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개인의 의지를 한 다발 묶기 위해서는 하나의 신조가 필요하다. 물론 이 신조에 대한 동의는 수필집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한에서 가치가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리란 신념이 있다. 아마도 최숙미 수필에서 발견되는 이상한 힘은 이런 강한 확신과 종교적 믿음에서 나오는 것 같다. 누구라도 그녀의 수필을 읽고 나면 쉽게 마음이 움직여진다. 수필학교를 통한 문장 수련과 폭넓은 독서로 다져진 그녀의 문장력은 본격수필의 진수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최숙미의 수필을 읽을 때마다 해가 지날수록 작가적 역량이 무르익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삶의 복원을 외치며 세상을 껴안고자 하는 그녀의 인도주의 정신이 담긴 이 수필집이 서점가에 진열되기를 기대해 본다. 본격수필을 쓰겠다는 열의가 있으니 그녀의 책이 날로 잘 팔려나가리라 믿으며, 최숙미 수필의 판매율이 우리 한국수필의 새로운 활로로 이어지길 바란다.
아무튼 최숙미 수필은 삶의 이삭줍기다. 작은 이야기로, 깨달음으로, 삶의 진리를 애기할 수 있는 그녀의 수필은 우리가 가는 길의 길동무와 같다. 어쩌면, <칼 가는 남자>라는 인생의 길동무는 성속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살되 탁류에 살지 않는 은어처럼 그렇게 삶의 질을 높여 주며, 그렇게 높아진 삶을 우리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사물을 보는 눈은 맑고 따스하다. 예리한 관찰력과 문학적 형상력을 기반으로, 그녀는 풍경의 미세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묘사해서 마치 페르시아 융단을 짜듯 한 편의 수필을 직조한다. 최숙미 수필의 가치는 그 대상적 사물을 바라보는 주체적 작가의 눈, 그 심오한 사상이나 정서 등의 심미안에 의해 문학성을 보유한다는 데 있다. 신이 창조한 세상 속의 현실적인 작가와 마음 속에 있는 세상을 그려내는 현상학적인 눈의 작가가 공존의 삶을 위해 세상을 끌어안는 모습이 어찌 아름답다하지 않겠는가. 그녀가 무슨 수필을 쓰건 내겐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수필은 제재, 그 자체로는 매우 평범한데도 불구하고 그 맥락 안에 있는 사유의 무게와 깊이를 통해서 그것이 미학적 형상으로 살아나기에 예술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수필은 인문학의 저장고다. 그녀의 무르익은 인문학적 향내는 우리 수필을 건강하게 지키고 선도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해라는 인생의 고단한 길에 주저앉아 있는 모든 이에게 이 수필집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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