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실 안에 아버님 고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안보이는군요.
『……』
대답을 미루던 그는 『별 이유는 없다』고 하다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뗐다.
『아버님 뵙기가 부끄러워서요…. 하두 잘못한 게 많아 겁이 나요』
- 아버님이 무섭습니까.
『저는 아버님 사진만 봐도 뜨끔뜨끔해요』
- 아버님에 관한 책들은 거의 다 읽었습니까.
『그렇죠. 아버님에 관한 책을 읽으면 재미있어요. 제가 아들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 아버님에 관한 기사가 나면 요즘도 다 스크랩하나요.
『저는 스크랩을 안합니다. 우리 직원들이 스크랩을 하지요.』
-아버님에 관한 기사들은 호의적인 게 많죠? 특히 요즘 들어서.
『요새는 별로 나쁜 내용이 안나오더라구요. 과거에도 그랬지만.
하지만 정치인들이 한 이야기들 중에는 나쁜 내용들이 많았죠.
신문에 난 것 정도에서는 아버님에 대해 나쁘게 써 놓은것을 거의 못 본 것 같습니다』
-아들로서 아버님을 어떻게 생각 합니까.
『남자로서 자신이 뭘 이루겠다고 한 것을 거의 다 이루고 돌아가신 분이죠.
남자가 자신이 뜻한바를 이루고 삶을 마친다는 것이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저는 참 멋있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떤 소신, 일을 하는데 대한 철학을 너무 확고히 갖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남들이 존경심을 갖고 있었죠. 저는 그런 아버님이 굉장히 부럽습니다』
머뭇 머뭇하던 그는 박대통령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자 한꺼번에 말을 쏟기 시작했다.
『남들도 잘 알잖아요? 아버님이 소신과 집념, 철학,
그런 것은 남자로서 다 가질 만한 덕목들 아닙니까.
그런데 요새 보면 그런 집념과 철학을 가진 분이 …있기는 있지만 드물죠.
한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그런 것을 확고히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지금도 그런 뭔가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 중에 소신과 철학을 가진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전 그래요. 아버님의 단점도 알죠.
그렇지만 남자가 그 정도의 삶을 산다면 훌륭하게 산 거죠』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아버님입니까.
『아버님과 어머님(고 육영수 여사)이죠』
-부모님 외엔 누구를 존경합니까.
『요즘 제가 교회를 나가요. 소망교회인데, 한 달 전쯤부터 나가고 있어요.
그곳의 곽선희 목사님도 참 좋아하죠.
그분 말씀도 좋고….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해져요』
-아들로서 아버님의 단점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점요? 단점이라기보다는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몇 가지 참 불만스러운 점들이 있었죠.
예컨대 장발머리를 마구 자르고 하던 거 있잖아요?
어머님께서는 「젊은 사람들이 머리 좀 기르고 하면 어떠냐」고 했고,
저도 그땐 젊을 때니깐 그런 것이 무슨 큰 문제냐고 생각했는데
아버님은 고집스러우셨죠. 글쎄요, 그런 것이 그 당시 우리나라에
필요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 의견도 좀 들어주고 하셨으면 했는데,
워낙 고집이 강하셨죠』
불만이 그리움으로 바뀌었다
-흔히 위대한 부모를 가진 자식들은 부모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곤 하지않습니까.
『저도 아버님을 거목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채 자라지 못한 작은 나무 같은 그런 느낌이죠.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성공은 아니었거든요.
아버님에게도 제일 많이 걱정을 끼쳐드린게
'왜 너는 의지력이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는 참 의지력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부터 의지력을 키우려고 하는데…』
그는 40이 다 된 자신이 의지력을 키우려고 한다는 말이
재미있는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볼 때 아버님은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이고 너무 큰일을 하셨어요.
어떤 불만스러운 점은 있을지 몰라도 틀린 점은 없었어요.
우리를 교육시킨 것이나 정책을 결정하고 나라를 이끄는 데 있어서,
물론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이지만 하나도 틀린 것이 없으셨어요.
그런데 저는 이것도 틀렸고, 저것도 틀렸고, 참으로 반성해 볼점이 많아요.
한 일을 떠나 인간으로서 비교해도 저는 비교가 안돼요.
솔직히 부모님하고 저를 어떻게 비교하겠어요.』
-아버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저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그분의 사랑을 알았어요.
살아 계실 때는 잘 몰랐어 요. 대개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모른다고 하잖아요.
저도 그땐 철이 없어서 그랬는지 반항심도 많았고 청와대 생활에 불만이 많았죠.
경호원들이 내내 따라다닌다거나 행동을 자유스럽게 하지 못한다거나….
그런 것이었죠. 지금은 그것이 불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움으로 변해 있지만,
그때는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그렇게 반항했었죠.
그래서 아버님에게 걱정을 많이 끼쳐 드렸죠』
박 전 대통령은 79년 10월26일 사망했고,
그때 박사장은 육군사관학교 3학년(만21세)이었다.
-청와대에 있을 때는 대통령 아들로 태어난 것을 후회 했나요.
『대통령 아들이라는 것보다 '왜 내 생활은 이래야 되는가' 라는게
고민이었고 불만이었죠. 예컨대 다른 친구들은 학교에 오고 갈 때도
자유스럽게 왔다갔다 했고, 사춘기 때 여학생도 만나고 그랬죠.
그런데 저는 여학생을 만나려고 하면 권총 찬 사람들이 따라다니니까
그게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겠어요. 정말 벗어나고 싶었죠.
그리고 대통령 아들이니까 항상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하는 그런 주의가 오죽 많았겠습니까.
나는 내 맘대로 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했어요.
이런 것들이 암암리에 마음속에 불만으로 쌓였던 것같아요.』
-청와대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항상 청와대 경호실차로 다녔습니까.
『차로 다녔는데 기합받을 때는 걸어다녔죠. 차를 못타게 하셨죠』
-국민학교(서울사대 부국에서 청운국교로 6학년 초 전학)와
중학교(배문중) 때도 그랬습니까.
『중학교 때까지는 그러지 않았어요. 멀기도 했고.
중앙고 다닐 때는 아버님이랑 사이가... 그래서 많이 걸어 다녔죠』
-아버님으로부터 가장 심하게 혼난 기억은 어떤 것입니까.
『담배피우다가 걸린 거죠』
그는 올해 초 담배를 끊었다.
필로폰 복용혐의로 세 번째 구속된 후였다.
30대를 거치며 네 번이나 마약 복용혐의로 검거된 그의 굴절된 생활의 뿌리는
고교시절 박대 통령 몰래 담배를 피운 것에서 시작됐다.
그는 담배에 얽힌 사연을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의 시점은 그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 75년도.
육영수여사가 그 전해 8·15광복절 기념식 장에서 문세광의 총탄을 맞아 숨지고
박대통령이 홀아비로 자식들을 돌보고 있을때였다.
『제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그때도 제가 담배를 살 수는 없었어요.
경호원들이 따라다니니까 가게에 들를 수도 없고,
청와대 안에 자판기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런데 제가 담배를 어떻게 얻게 됐느냐 하면 아버님 때문이죠.
아버님의 방은 항상 정리정돈이 잘돼 있었어요.
그런데 외국사람들이 청와대에 오면 그 당시만 해도 담배를 선물했었죠.
그러나 아버님은 양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으시거든요.
담배는 피우셨지만 선이나 그런 국산담배만 피우셨어요.
그래서 선물 들어온 담배는 그냥 쌓아 두셨어요.
물론 누굴 주지도 못하게 하셨죠. 양담배니까요.
그런 양담배가 쌓이고 쌓여 먼지가 앉을 정도였는데
아버님도 신경을 쓰지 않고 그래서 제가 거기서 슬쩍했죠. 그걸 피웠죠.
그런데 한번은 제 방이 하두 지저분하니까 아버님이 청소를 했어요.
제가 학교 간 사이에 「지만이 방이 너무 지저분하다」면서
직접 빗자루를 들고 나섰는데, 제 방에서 담배가 나온겁니다.
문제는 그 담배 자체에 있지는 않았어요.
그냥 국산담배라면 「너 앞으로 이런 것은 피우지 말아라. 몸에 해롭다」고
말했을 텐데 그것이 양담배였던 것이죠.
아버님 방에서 나온 것인 줄은 모르셨지만,
양담배를 제가 피웠다는 것에 대해 하여튼 엄청나게 화가 나셨었죠』
길었던 사춘기
『고교시절에는 때리지 않으셨어요. 제가 육사 다닐 때 처음 맞았지요.
그때 제 심경이 어땠 는 줄 아세요?
피라미 육사생도가 국군 최고통수권자 앞에서서 야단맞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 봐요』
-육사에서 어떤 잘못을 했는데 그랬습니까.
『저는 사춘기가 참 길었어요. 자유스럽고 싶었죠.
내 맘대로 행동해 보고, 내 맘대로 친구들을 만나고
내 맘대로 어디든지 가고 싶었죠. 그런데 그게 해결이 안됐어요.
항상 경호원들이 따라다니니까요.
그런데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니까 경호가 더욱 엄해졌어요.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런 불만을 얘기하면
친구들이랑 놀러가게 해 주셨는데, 어머님이 안계시고
경호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높아져 더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됐죠.
그런 사춘기가 육사갈 때(77년)까지 계속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육사에 가자 고등학교 때 못하던 반항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말도 안되는 것이었지만요.
아버님이 그래서 많이 화가 나셨죠』
-고등학생 때부터 그때 유행하던 가수들,
예컨대 「그건 너」를 부른 이장희씨 같은 사람들을 따라다니고 그랬다면서요.
『따라다닌 것은 아니고 그냥 좋아한 거죠.
이장희, 윤형주, 김세환씨 그런 분들의 음악을 좋아했고
볼 기회가 있으면 보고 그랬죠. 젊은 사람들은 요즘도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들 공연이 있으면 찾아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육사때는 그러지는 않았죠. 생활 자체가 그렇게 할 수 없었죠』
너그러웠던 아버지
『그건 학년마다 달랐어요.
1학년은 한 달에 한번 외박, 2학년때는 두 번, 3학년때는 세 번,
4학년 때는 매주 외박이 됐죠』
-대통령으로서 아버님의 성격은 어떤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까.
『옳은 것은 옳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확실하게 이야기 하시는 분이셨죠.
그리고 굉장히 너그러운 분이셨어요. 잘못을 시인만 하면 너그러우셨죠.
시인을 안하면 크게 화를 내셨죠. 아니 화를 내시기보다는
걱정을 하셨다는 게 더 맞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항상 너그럽게 용서해 주셨어요』
-아버님은 TV드라마 등에서 대부분 화를 많이 내는 사람,
집안에서도 검은 선글라스를 쓰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실제도 그랬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런 드라마를 보면
작가나 PD가 너무 아버님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너무 모르는채 표현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어요.
대통령이 항상 화를 내는 것으로 묘사를 하는데, 실제 대통령은 그렇지 않죠.
아마 그렇게 대통령을 묘사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대통령이 되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아버님은 점잖고 신중하고…그런 분이셨습니다』
-3공화국 관련 드라마를 쓰는 작가가
박사장에게 찾아와 자문을 구한적이 없었습니까.
『특별히 자문한 적은 없어요.
다만 MBC에서 제2공화국인가 드라마를 제작할 때
작가분과 식사를 한 번 한적은 있어요.
그분하고 작은누나(박서영씨 구명은 박근영)하고 식사를 했는데,
그 때도 잘 써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해달라는 뜻이었어요.
나쁜점은 나쁜 그대로 하고 좋은 점은 좋은 그대로 해달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 식사를 대접합니다라는 뜻을 전했어요.
그런데 워낙 아버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박혀 있어서 그런지
드라마 내용을 보니 맨날 화내시고 맨날 선글라스 끼고 그렇게 묘사되어 있었어요.
요즘 신세대들이나 집안에서 선글라스 끼지 누가 집안에서 선글라스를 끼겠어요』
-아버님은 잘 웃으시던 사람이었습니까.
『잘 웃는다고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가족끼리 식사를 할 때는 소박하게 잘 웃고 그러셨어요』
-농담도 잘 했나요.
『그런 편이셨어요』
-기억나는 농담이 있나요.
『아버님이 농담을 잘했다는 것은 어른들끼리 그랬다는 것이지,
우리보고 농담을 하지는 않으시죠』
-아버님은 작곡도 하고 그림도 그리곤 하셨죠.
『작곡은 작은 누나가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나와 옆에서 도움을 많이 받으셨죠.
아버님이 작사를 해서 음∼음∼음∼이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면
작은 누나가 그것을 음표로 받아 적었죠』
-「나의조국」이라는 노래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마찬가지예요. 아버님이 풍금을 갖고 곡을 만드시면
작은누나가 최종적으로 악보를 만든거죠』
-혹시 월간조선에서 만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란 테이프를 들어봤습니까.
월간조선은 작년 8월 부산의 정부기록 보존소에서 박 전 대통령 가족의 생일파티와,
장모 생신날 친척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베푼 연회장면 녹음을 찾아내 공개했다.
육여사가 숨진 이듬해인 75년으로, 당시 고교 2년생이던 지만씨는 박대통령이
『어이 지만이도 한 곡 불러 봐』라고 하자 한참을 생각한 끝에
이런 노래를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새벽 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기껏 생각해낸 것이
박대통령이 만든 「새마을 운동가」 였다.
『들어봤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 노래를 못불러요. 노래는 좋아했지만…』
-아버님이 그래도 기본 음을 만들정도면 음악에 대해 잘 안다는 얘기지 않습니까.
『그렇죠. 학교 선생님을 했으니 기본적으로 풍금도 치시고, 피아노도 했죠』
박 전 대통령은 일제시대인 1937년부터 40년까지 문경소학교에서 교사를 했었다.
-그림도 그리셨나요.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 한동안 그림에 취미를 갖고 계셨어요.
70년대 초반쯤일 겁니다. 지금도 한 20여 점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단호하고 강직한 분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엄한 아버지였습니까.
『일에 있어서는 소신이 강하셨죠.
그렇지만 남들이 잘못됐다고 건의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금방 받아들이는 분이에요.
그런점에서는 참 특이한 분이죠. 가만히 들어보고 그것이 맞다 싶으면
바로 고쳐주는 분인데, 앞서도 말했지만 장발이나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옆에서 말해도 절대 허락을 안하셨죠』
- 박지만씨의 아버지 박대통령에 대한 회고 인터뷰에서... -
< 부 언 >
아시아에서 박정희 대통령,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 등소평 주석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국가의 경제발전을 이끈 위대한 인물들이다.
오늘날 박대통령의 경제적인 비젼에 대해 다시 많은사람들이 재조명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시절 우리나라에는 경제적인 희망이 없었다.
미국의 원조를 받아서 간신히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
일부 각료들이 북한과 같이 국가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할 것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은
사회주의 국가나 하는 것이라고 일언지하에 거부하였다고 한다.
4.19 의거후 이승만 대통령이 급작스럽게 하야한 후
준비없이 집권한 민주당은 구파, 신파로 나뉘어서 정치싸움만 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 집권한 과정은 절차상 흠은 있다.
그러나 그는 집권 후 민족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아니하는 국가를 만들자는 비젼을 가졌다.
국가의 과학기술력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966년 미국의 원조금으로 당시 거액이었던 일천만불로
과학기술연구원을 세우고 과학기술연구를 지원한 것이다.
독일을 시찰하고 나서 우리나라에도
라인강의 기적과 같은 것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산업을 일으킬 민족 자본이 없었다.
그래서 광부와 간호사의 월급을 담보로 독일에서 차관을 받아 오고
그래도 모자라는 돈을 얻기 위해 베트남에 파병을 하고
일본과 수교협상을 한 것이다.
사실 일본과의 수교협상은 아직 일제 치하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인 도박이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산업자본을 마련하기 위하여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생긴 돈을 가지고 당장 국민들의 호의호식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다.
박대통령은 독일을 보고 나서
우리나라가 부강하기 위하여서는 수출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외국에서 얻어온 자본을 포스코 등 장기적인 수출을 겨냥한
중화학 사업에 투자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수출위주의 제조업이 지금 우리나라를 있게 한 것이다.
이광요수상은 아직 생존해 있으면서
국가 고문관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국가정책에 자문을 하고 있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생존하여 국가를 위한 조언을 한다면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할까 상상해 본다...
아마도 사고뭉치, 거지발싸개같은 싸가지없는 쓰레기 인간들은
발 붙힐 곳도 없게 만들었으리라...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