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끝
8월 14일 맑은 날씨였다. 왜 기상 시간을 6시로 정해놓고 그 시각이 될 때까지 구태여 떨면서 기다렸는지 후회했다.
일어나서 움직이자 얼었던 마디가 조금씩 풀려오기 시작했다.
자일 끝에 매달려 있던 장비를 끌어올려 기계적으로 주섬주섬 몸에 걸고 장시간에 걸쳐 아이젠을 신었다. "아이젠 밴드 매는 데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어디 산쟁이 해먹겠냐"고 투덜대면서.....
남은 건포도를 입에 쑤셔넣고는 가까이 보이는 정상을 향해 뻗어 있는 설릉을 한발 한발 눈을 다지며 오르기 시작한 시각은 정확히 오전 8시. 눈앞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정상, 점점 높아져가는 나의 몸, 지난 1년간 정상을 향한 이 설릉을 오르기 위해 다져왔던 고통의 순간들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8시 30분, 드디어 정상에 섰다.
참으로 오랜 싸움이었다.
우리는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저 손을 잡았다.
아무런 희열도 행복감도 없었다.
단지 사랑하는 저 두 명의 친구를 위해 내일 당장 죽더라고 여한이 없으리라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정밖에는.....
선우는 무릎을 꿇더니 조그마한 얼음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품 속에서 두 장의 사진을 꺼내어 들고는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신건호 형과 주동규. 구태여 복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그들을 대신해 그들의 뜻대로 우리는 올랐을 뿐이다. 간 지 참으로 오래된 그들이 갑자기 보고 싶어졌으나 그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있지 않다는 자각이 우리를 슬프게 했다.
사진을 묻고 묵념을 하고 나니 뒤이어 유고 팀이 올라왔다. 같은 죽음의 벽에서 살아나온 사람들끼리 진심어린 축하를 나누었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우리 셋은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각자의 대학 산악부 기를 들고 또 찍었다. 산악부실에 갔더니 후배들이 하계 장기 등반에 들어가느라 부기(部旗)를 모두 들고 가버려 이것밖에 안 남았더라며 정원이가 꺼내든 한양대 산악부 기는 사람 두어 명쯤은 덮을 만했다. 아마 아이거 정상에서 휘날려진 깃발 중 가장 큰 것이었으리라.
또 한 번의 추락
한 시간 후 우리는 자일로 서로를 확보하며 서릉쪽 정상 설원을 하강하기 시작했다.
1858년 초등된 이 알프스의 고전 루트인 서릉에는 초보 등산가에서 북벽을 정찰하는 팀, 정상에서 하강하는 팀, 혹은 때때로 북벽 등반 중 조난당한 클라이머를 구하기 위한 구조대에 이르기까지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약간 위험한 정상 부근에는 40m마다 큰 피톤(Piton: 하켄의 동의어. 여기서는 하켄보다 큰 하강용 쇠고리)이 박혀 있었다.
마치 환각 상태에 빠진 듯 탈진한 채 비틀거리며 내려가던 우리는 배가 고파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색을 내려놓고 버너를 꺼내 설탕물을 끓여 마셨다. 며칠 전 움막을 떠날 때 눈치 보며 집어넣었던 몇 봉지의 설탕이었다. 며칠 만에 쬐어보는 따뜻한 햇볕 밑에서 배낭에 기대고 앉아 잠깐 취한 수면으로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하고, 하강을 계속했다.
설사면을 다 내려와서 아이젠을 벗고는 왼쪽 밑으로 비스듬히 바위를 가로질러 가다가 데드 맨 앵커(Dead Man Anchor: 한쪽이 뾰족한 알루미늄 합금판을 앵글형으로 구부려 가운데 구멍을 뚫어 철사 줄로 꿰놓은 것으로서 눈 표면에 45도 각도로 꽂아 확보하는 기구)라는 그다지 좋지 않은 이름의 설벽용 확보 장비를 하나 주웠다. 그걸 사 보내달라고 편지에서 조르던 산악부 후배 생각이 나서 배낭에 집어넣었다.
몇 미터 옆으로 오버행이 있었고 거기에는 빨간 캐신(Cassin: 이탈리아의 유명한 등산 장비회사)제 블레이드형 하켄이 하나 박혀 있어 자일로 하강해야 되는 곳으로 보였다. 해머로 하켄을 몇 번 더 두드려 박고는 별 생각 없이 자일을 걸고 5m 정도 하강하여 왼쪽으로 몇 스탭 수평이동하는데 갑자기 몸이 붕 뜨더니 약 3m를 떨어져 엉덩이와 배낭의 밑바닥이 낭떠러지의 끝에 겨우 걸치고 멈추었다. 밑으로 약 20m의 오버행이 나의 자유 낙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켄이 힘 먹는 각도가 바뀌자 그냥 빠져버린 것이었다. 북벽에서 1,800m를 떨어지나 여기서 20m를 떨어지나 마찬가지 결과인 죽음의 직전에서 겨우 빠져나왔음을 내 머리가 채 자각하기도 전에 위에서 정원이의 낮은 신음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에 찬 그의 음성이 뜨거운 동기애를 몰고 가슴에 와닿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4박 5일의 격전을 함께 치르고 살아나온 사랑하는 친구가 하강하고 있는 하켄이 눈앞에서 쑥 빠지는 것을 본 그의 충격이 어떠했을 것이며, 곧 이어 예상되는 추락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친구를 보았을 때 느끼는 환희는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그러나 비척비척 일어나서 배낭을 추수리고는 새로 박은 하켄에 자일을 걸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하는 내 머리 위로 그는 아까와는 전혀 딴 목소리로 한 마디 던졌다.
"야, 임마! 죽으려면 거의 다 가서 죽어라. 너야 죽어도 상관없지만 저 아래까지 메고 내려갈 생각하니 끔찍하다."
옆에 있던 선우도 한 마디 거들었다.
"야! 너 죽으면 네 장비 내가 다 가져도 되냐?"
저 밑으로 문명세계의 안락함이 꿈같이 보이는 아이거 글레처 역이 점점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차츰 쾌활해져갔다.
계속 너덜 지대(돌 덩어리들이 사면에 덮여 있는 부분)를 걸어서 내려가 마지막 한 번의 20m 자일 하강을 하고 설원 위에 내려서서 아이젠을 신었다.
북벽이 넘겨다 보이는 제법 편편하고 넓은 바위 지대까지 내려왔을 때 우리의 주방장 정원이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누군가 바위 위에 초콜릿 네 개를 두고 간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틀째 거의 못 먹어 허기져 있던 우리는 "이거 하나씩이면 하루치 식량이다"라고 농담하며 하나씩 먹어치우고 남은 하나는 도로 올려놓았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우리보다 더 굶주린 팀을 위하여.....
자일의 확보가 필요없는 평지에서
오후 4시 15분, 또 하나의 설원을 지나 드디어 아이거 글레처 역에 도착했다. 우리의 지치고 더러운 몰골은 역 주위와 지나는 기차 안의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작년 사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던 아이거 글레처 레스토랑의 매니저는 선우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당시 현지 신문에 실렸던 기사를 스크랩해놓은 것을 보여주며 우리의 등정을 축하해주었다. 굶주림에 기진해 있는 우리에게 그가 대접한다며 내온 세 병의 맥주는 우리를 빠른 취기와 탈진감으로 몰아넣었다.
저 아래 보이는 클라이네 샤이데크까지의 30분 거리는 마치 하루 길과 같이 멀게만 느껴졌고 더 이상 걸을 만한 투지가 우리에게는 이미 없었다. 그러나 기차를 탈 돈이라곤 한푼도 없었다. 우리는 오르는 일만 생각했지, 내려와서의 일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올라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도 벅찬 일이었기에.....
북벽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안 기차의 차장이 나중에 지불하겠다는 우리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덕분에 한발 한발을 괴롭게 내딛지 않아도 몸을 앞으로 가게 하는 편리하기 그지없는 기계-기차라는 것에 우리의 몸을 실었다.
달리는 기차의 차창 밖으로 반가움에 눈동자가 확 젖어드는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기다림에 지쳐 우리를 맞으러 걸어 올라가던 영배 형이었다.
우리를 깊이 사랑하고 우리의 안전만을 기원했을 형의 가슴속까지 우리의 존재가 깊숙이 들어가 있음을 느꼈다. 인간과 인간이 산을 매개체로 해서 이토록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인가!
얼토당토 않게 기차를 세우라는 우리의 요구는 무시당한 채 기차는 클라이네 샤이데크에 다다랐다.
우리가 북벽에 있는 동안 내내 무전기와 망원경을 끼고 살았던 영배 형을 찾아와 마치 가족처럼 걱정을 했다는 호텔 주인에서 요리사까지 올라와 진심으로 우리의 성공을 기뻐해주고 돌아갔다. 국적이 다른 데다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우리는 그저 감동해서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기에 바빴다.
계속 물만 들어갈 뿐 실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밥은 입 안에서 모래알처럼 겉돌아서 거의 먹을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 밤을 보낸 설릉에서 입은 동상으로 인해 발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자 피로가 다 풀린 듯했으나 몸을 눕히고 눈을 감자마자 세 명의 무섭게 코고는 소리와 함께 깊고 행복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일의 확보가 전혀 필요없는 평평하고 넓은 매트리스 위에서....
며칠새 북벽에서의 비박이 습관이 되어버린 우리는 눈을 뜨고도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로 고개만 좌우로 가만히 돌려 우리가 과연 어떠한 상황에서 자고 있는가를 살폈다.
주위에는 바위도 얼음도 없고, 확보용 자일도 쳐져 있지 않았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도 좁은 테라스에서 몸이 밀려 내려갈 염려가 없는 따뜻한 평지 위에 누워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아침 햇살에 빛나는 북벽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수년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북벽이 매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다시는 쳐다보기조차 싫은 지긋지긋한 벽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저 벽을 올랐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 어려운 꿈같이 아득했다.
갱도 입구에 데포시켜놓았던 장비를 점검하기 위해 정원이와 함게 올라갔던 영배 형이 비를 흠뻑 맞은 채 풀이 죽어 돌아왔다. 자일과 하켄류, 상당량의 등반 식량 등이 거의 모두 없어진 것이었다. 아마도 정찰하기 위해 오르던 팀이 누가 포기하고 간 것인 줄 알고 그들의 장비와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들고 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단독 등반을 은근히 만류하던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의 눈에 비친 아이거 북벽은 솔로(Solo Climbing: 파트너 없이 혼자 등반하는 방법)로 오르기에는 너무도 위험했다. 어쩌면 나는 도봉산 선인봉을 내려오다 우연히 만나 상추의 물기를 탁탁 털어 고기를 올려놓고 소주를 같이 마실 수 있는 형으로라도 계속 살아 있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이 아이거 북벽의 단독 등반은 1963년에 스위스의 미셸 다르벨러에 의해 단 이틀 만에 이루어진 이후 많은 등반가들이 도전해 성공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라인홀트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는 1974년 이 벽을 단 열시간 만에 오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들은 1978년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오르는 데 성공했고, 2년 뒤 메스너는 혼자서 에베레스트를 다시 무산소로 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 아이거 북벽을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8,126m) 루팔 벽과 남미의 아콩카구아(6,959m) 남벽과 더불어 '세계의 3대 어려운 벽'이라 칭한 바 있다.
몇 가지 기념품을 사러 가게에 들렀을 때 우리가 북벽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알아본 사람들은 앞다투어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기념품을 거저 싸주기도 했다. 북벽에서의 사고를 수십 년 동안 보며, 그 죽음들로 더욱 유명해진 아이거 북벽을 보러 혹은 회수되지 못한 채 몇 년째 자일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시체를 보기 위해 몰려오는 관광객들과 더불어 살아온 이들 클라이네 샤이데크 사람들은 살아 돌아온 우리를 마치 대단한 사람인 양 몇 번씩 다시 쳐다보곤 했다.
철수하는 영배 형과 알피글렌에 도착해 꿈에도 못 잊던 우리의 보금자리. 움막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제야 나는 우리가 살아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 우리가 북벽을 끝내고 살아서 돌아왔단 말이야!
그 동안 우리의 운이 너무도 좋았음을 신에게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를 피해 떨어진 무수한 낙석은 둘째치고 등반이 끝난 다음날부터 나빠진 날씨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럼주 두 병을 사고 상추를 뽑아오자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다시는 필요없을 것 같아 진흙바닥으로 던져버렸던 돌판을 다시 주워오랴, 안주를 만들랴 이리저리 분주히 왔다갔다 하며 자축의 술판을 벌였다. 우리에게는 이제 어떠한 초조함도 없었다.
밖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우리의 노래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 모두 체력이 약해져서인지 술 2병을 다 해치우지도 못한 채, 평소 주선(酒仙)을 자칭하더니 제일 먼저 떨어진 주졸(酒卒) 선우를 눕히고는 간격을 두고 차례로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꿈 같은 산행을 끝내고 이들과 헤어져야 하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구나.
이별주
8월 16일 월요일, 그 동안 정들었던 움막과 윈터, 호텔 식구들을 뒤로 하고 기차를 타고 베른에 도착해서 영배 형과 헤어진 후 대사관으로 향했다. 작년의 사고 후 귀찮은 사후 처리를 떠맡아주었다던 대사님과 대사관 직원들을 만나 인사를 하였다. 모두들 우리의 성공을 기뻐해주었다. 작년에도 신세를 졌다던 고마운 '미카엘라 엄마'라는 한국인 교포 아줌마 댁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대사관의 백영사 댁에서 술로 밤을 보냈다.
다음날 8월 21일, 파리에서 서울로 떠나는 말레이시아 항공의 대기자 명단에 선우와 정원이를 올려놓고서, 내일 취리히에서 뉴욕으로 떠나는 스위스 항공에 내 자리를 예약했다. 대사관에서 베푸는 점심식사에 참석했다가 대사관 직원인 김신균 씨 댁에서 저녁을 대접 받고는 거기서 묵었다.
8월 18일, 베른 역 안의 간이주점 앞에서 조그만 사과주를 한 병씩 손에 들었다. 이별주였다.
입으로는 평소 버릇대로 "지겨운 놈, 이제야 헤어지니 후련하기 짝이 없다"라고 지껄여댔지만 속으로는 등반을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노력한 서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우리들의 얼굴은 헤어짐을 슬퍼하는 표정을 억지로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는 노력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오전 10시 15분, 샤모니로 떠나는 선우와 정원이를 배웅하고 우리의 원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네 시간 뒤 나는 뉴욕 행 비행기 안에서 동상 걸린 발을 문지르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동기들에게
원정 등반은 끝났다. 산을 처음 입문한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뒤 할매집이라는 술집에서 산악부 선배로부터 아이거 북벽이라는 생소한 이름을 처음 접하고, 언젠가는 그 벽을 오르고 있으리라는 운명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 이후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 원정을 동경해왔던가.
사랑하는 두 명의 산 친구를 잃었을 때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을 대신해 오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과연 이 벽을 살아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끈질긴 의구심에서 비롯된 절망감을 이겨내고 올라서고야 말았다.
동상과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하강하면서 나는 북벽을 저주했고 나의 생의 전부라고 항상 자신 있게 이야기하던 클라이밍이라는 것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클라이밍은 안 하리라고 이를 악문 지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나는 아이스 해머를 끌어당겨 녹을 닦아내기 시작했고, 우리의 다음 원정은 어디로 할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내가 갈 곳이라곤 산밖에 없으므로.....
자일의 확보도 필요없이 이 평평한 땅 위에 설 수도, 누울 수도 있음에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내가 이 행복함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밤에 잠 못 이루고 빌었을 어머니, 나에게 바위와 얼음 하는 법을, 그리고 산 친구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 형들, 나의 사랑하는 졸개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나의 동기들에게 그저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1982년 8월
첫댓글 다 읽었습니다........
등반중 처절하게 힘들고 지쳐있을때 이들이 바라는것은 그져 평평한 땅을 걸을수 있고, 안락한 문명의 삶을 누리길 소원하는 고백 이였습니다,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넘어 죽음조차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산악인임을 스스로 저주하며 치를떨면서도 또 다음 등반을 계획하는 그 경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틀을 굶고 하산중에 누군가가 놔둔 초코렛4개를 발견 했는데 셋이서 2개를 나누어 먹고 2개는 다음사람을 위해 남겨놓을수 있는 그들의 정신세계야 말로 사람으로서는 최상의 브랜드가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