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득성 연원(金氏 得姓 淵源)
김알지 신화(金閼智 神話)
김알지 신화는 고려 인종23년(1145)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와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으며
고려후기 충렬왕 7년(1281) 일연(一然)이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이(紀異) <김알지탈해왕대 (金閼智脫解王代) 條에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다.
위 두 고서(古書)에서는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에 대해 부분적으로 조금 다르게 기술(記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에서는 ‘탈해왕(脫解王) 9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서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金)씨라 부르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國號)를 삼았다.’라고 적고 있다.
미추이사금조(味鄒尼師今條)에서는 왕의 선조 알지는 계림에서 나왔는데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뒤에 대보(大輔)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았으니 구도는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첨해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우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처음이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해동금석원과 추사김정희의 해동비고에 있는 문무욍비문에 문무왕의 15대조를 성한왕(星漢王)이라 하였고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의 비문에도 태조는 성한왕이라 하였으며 문무왕의 9대손인 흥덕왕 비편에도 태조 성한왕이 흥덕왕의 24대조라 하였다.
또한 신라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아들인 金仁問의 묘비문에 있으며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은 "신라고사(新羅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金氏로 姓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을 김씨라고 한 것이다" 라고 했으며 김유신의 비문에도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少昊之胤)이라"고 하였으며 "남가야 시조 수로(南伽倻 始祖 首露)는 신라(新羅)와 同姓"이라고 하였다. 또 김부식은 "김유신은 왕경인(王京人)이다. 12代祖인 수로(首露)는 하허인(何許人)인지 알 수 없다. 후한 건무(後漢 建武) 18년 壬寅(AD 42)에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가락9촌(駕洛九村)을 바라보고 그 땅에 개국(開國)하여 국호를 가야(伽耶)라 했다" 고 하였다.
점필제 김종직은 "김알지가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으며 혹은 스스로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고 했으며 "신라고지(新羅古誌)에 이르기를 김알지도 금관국 수로왕의 후요 소호금천의 후손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고 하였다.
문정창(文定昌)씨는 그의 저서 <伽倻史>에서 "동방의 김씨는 모두 소호금천씨의 후손이요 金日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김유신은 김수로왕 후손인데 그 묘비문에 "소호지윤 칙남가야시조 수로여신라 동성야(少昊之胤 則南伽倻始祖 首露與新羅 同姓也)"라 하였으며 김수로왕의 외손인 문무왕의 능비문에 "지재생 - - - 후 제천지윤 전7엽(枝載生 - - - 侯 祭天之胤 傳七葉)"이라 했으니 후(侯)자 앞에는 투자가 있었을 것이니 곧 투후 김일제의 후손은 7대에 걸쳐 영화를 누렸다는 뜻이다. 김알지는 김수로 보다 24년 뒤에 낳았으니 그 일족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30대왕 김법민(金法敏), 즉 문무왕(文武王)의 능비(陵碑) 파편이 있는데 이 비문 중에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윤)이 7대를 전하여…” 하였으며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왔다” 고 하였다. 侯 祭天之胤傳七葉」에서 (투)侯는 한무제(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郭去病)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 金日제를 가리킨다. 金日제와 그 후손들의 생애는 전한서(前漢書)와 열전(列傳)에 있고 중국 서안(中國 西安)에 김일제(金日제)의 무덤이 있는바 실체가 분명한 김일제(金日제)를 문무왕의 비문에 『우리 조상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은 제천금인(祭天金人) 즉 金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손 김일제 일족이 漢나라에서 영달하더니 김왕망(金王莽)이 쿠테타로 한(漢)을 멸하고 신국(新國)을 세웠다가 17년 뒤 유수(劉秀)에게 패망하였다.(서기 25년)
이에 그 일족의 일부가 김해지방으로 왔고 김해에 정착한 김수로왕의 부친은 김해군 장유면 태정리 부근에 살면서 김수로왕을 비롯한 6형제 아들을 낳았다고 추찰된다. (김수로는 서기 42년에 출생) 태정리 부근 태봉(胎峰)에는 태대(胎臺)가 있는데 이것은 김수로왕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한다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발견된 중국 왕망시대의 화천(貨泉)은 김수로왕의 선친 또는 김수로왕 자신이 왕망의 신제국(新帝國) 출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방증(傍證)이 될 수 있다. 또 김해부근 다호리에서 출토된 붓과 중국화페인 오수전(五銖錢)등도 그 방증이 된다. 김수로왕의 이름이 청예(靑裔)인 것은 소호의 후손임을 암시한다. 소호금천씨의 호가 청양(靑陽)이기 때문이다.
또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존호(尊號)가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인 점은 중국의 보주(普州)와 어떤 연관(聯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경(漢鏡), 용봉환두대도(龍鳳環頭大刀)등이 유적지에서 발굴되고 있는 점, 그리고 은(殷)나라 사람들 처럼 좌지왕때 복사(卜師)가 점을 쳐서 괘사(卦辭)를 얻은 점 등은 연관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는 동이족(東夷族)
소호금천씨의 本고장은 남만주 봉천 요동지방이었는데 그는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 겨려다. 소호금천씨는 일찌기 산동반도에 진출하여 중국역사의 始源的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산해경( 山海經)이라는 중국사서에 "소호(少昊)의 나라는 동해밖에 있는 나라" 라고 하였다.
중국의 사학자 당란(唐蘭)은 ‘소호금천씨의 나라가 산동성 곡부(曲阜)에 도읍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근년에 발굴된 ‘대문구문명 당시에 이미 소호(少昊) 나라가 있었으며 소호국은 산동성 곡부지방에 있었다’ 고 하였다.
여불위(呂不韋)가 지은 <여씨춘추(呂氏春秋)>에 "그 날은 경신일(庚申日)이고 그 임금은 소호(少昊)다. 경신(庚申)은 금(金)의 날로 소호는 금덕(金德)으로 천하에 군림하였다. 그러므로 金天이라 하였다." 소호국의 국조 지(國祖 摯)가 등극한 날인 경신일(庚申日)은 우리의 민속에 이어오고 있으니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庚申年 庚申月 庚申日)이라고 기록하는 습관은 "이 방아도 소호씨가 왕위에 오른 날에 탄생했다."는 뜻이다.
소호의 나라는 고신씨(高辛氏)의 제(帝) 곡이 이어 받았는데 제곡은 은나라의 조상이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이 그 후 중국의 서북부 내몽고에 위치한 농서지방에서 흉노 모돈씨)(匈奴 冒頓氏의 한 후국(一候國)을 건설하였다. 기원전 120년 한나라의 포기장군 곽거병(郭去病)이 농서지방에 쳐들어갔을 때 휴도왕(休屠王)의 太子인 14세의 김일제가 그의 아우 윤(倫)과 함께 모친 알씨(閼氏)를 모시고 한나라에 포로가 되어 갔다. 휴도왕의 나라는 중국서북부에 위치한 지금의 무위군(武威郡)이다. 포로가 된 김일제는 부마도위 광록대부가 되었다. 김일제의 어머니 알씨가 두 아들을 법도 있게 가르쳤으므로 일제의 모친이 사망하매 무제가 알씨의 화상을 감천궁(甘泉宮)에 그려놓고 친필로 "흉노왕비 알씨(匈奴王妃 閼氏)"라 하였다.
한나라 무제는 김일제를 후(候)로 봉(封)하고 일제가 사망하매시호( 諡)號를 경후(敬候)라 하였고 아들 상(常)을 투후로 삼았다. 이리하여 김일제를 비롯하여 國, 安, 常, 欽, 當, 遵, 등 후손이 투후의 벼슬을 하였다. 김일제에게 常과 建 두 아들이 있었는데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하므로 3인이 친하게 지냈으며 상이 소제의 봉거(奉車)가 되고 건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 소제가 제위 13년만에 下世하고 선제(宣帝)가 등극하자 상이 광록훈(光錄勳)이 되었으며 상이 죽고 國이 투후벼슬을 이어 받았고 국이 아들없이 죽으니 일제의 둘째 아들 건의 손자 當에게 투후를 제수하였으며 그 후 當의 아들 성(星)이 투후를 계승하였다. 전한서 기록에 의하면 투후 當의 모친 南은 곧 왕망의 生母였다.
전한서(前漢書)의 왕망 전(王莽 傳)에 의하면 효원황후의 生父와 그 兄弟가 모두 원제(元帝)와 성제(成帝)때에 후(候)가 되고 보국(輔國)의 位에 올랐으며 또한 김씨가(金氏家)에서 봉(封)을 받은 侯의 수가 9명에 달한다 하였다.
김일제의 아우인 윤(倫)의 아들 안상(安上)은 선제(宣帝)때 궐내(闕內)의 후(候)가 되어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며 궁중과 부중의 실권을 장악했다. 안상에게 常, 岑, 敞, 明 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중낭장(中郞將), 광록대부(光祿大夫),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원제(元帝)가 8세에 태자(太子)가 되자 김창(金敞)이 중서자(中庶子 즉 太子師)가 되어 은총을 받았으며 원제(元帝)가 즉위할 때 김당(金當)의 딸을 왕비로 맞아드렸다.
김일제전에는 왕망과 김당이 다같이 그들의 모친인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아들이라 했으며 효원왕후전에는 효원왕후를 김당의 딸이라 하였다. 원제가 즉위한 후부터 김씨일문의 권세가 더욱 커졌다.
김창(金敞)은 涉, 參, 饒,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제(成帝)때 모두 시중기도위(侍中騎都尉), 영삼보(領三輔), 호도위(胡越騎)가 되었다.섭(涉)에게 탕(湯), 융(融)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다 제조장대부(諸曹將大夫)가 되었으며 또 섭(涉)의 종부(從父) 흠(欽)의 아우 천(遷)이 상서령(尙書令)이 되니 이제 한(漢)나라 왕실(王室)은 金氏의 권력하(權力下)에 있게 되었다.
전한서(前漢書)에 왕망(王莽)의 군형제(群兄弟 즉 六寸)는 모두 장군(將軍) 겸 후(侯)가 되었는데 오직 망(莽)의 부친 만(蔓)은 일찍 사망하였다. 왕망의 백부(伯父) 대장군 봉(鳳)이 병으로 누우매 망(莽)이 극진히 시탕(侍湯)하니 봉鳳이 천거하여 망(莽)을 황문랑교위(荒門郞敎尉)로 삼았다. 왕망이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일하니 크게 발탁되어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38세의 망이 보정(輔政)을 맡았는데 얼마 후 원제(元帝)가 사망하고 성제(成帝)가 즉위하니 제(帝)의 생모 김씨(生母 金氏)를 황태후(皇太后)로 삼았다. 태후의 영향으로 자신의 친정형제 5人을 모두 후(候)로 봉(封)하였다.
평제(平帝)가 나이 9세에 등극하니 김태황후가 섭정하였다. 김태황후는 망(莽)에게 서정(庶政)을 맡겼으며 서기 3년에 망(莽)은 11세의 평제(平帝)에게 자기 딸을 주어 황후(皇后)로 삼았으나 4년만에 평제(平帝)가 사망하였다. 왕망은 선제의 현손중 가장 나이 어린 2세의 유영(劉영)을 제위(帝位)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섭 황제(攝 皇帝)가 되었으며 서기 9년에 쿠테타를 일으켜 신(新)나라를 건국(建國)하였다. 왕망(王莽)은 영특하여 대혁신정책을 단행하였다. 侯제도를 페지하고 토지를 국유화 하였으며 노예매매를 금하였고 평형물가제도를 실시하여 상인의 농간과 중간착취를 방지하였으며 화페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동북방민족의 소요와 흉년이 계속되어 이로 인한 도적떼 등으로 민심이 흉흉한 중에 유수(劉秀)의 군대가 낙양(洛陽)을 공격하니 왕망의 시종 공손취(侍從 空孫就)가 왕망의 목을 베어 유수에게 바쳤다. 그 뒤 20여년간 전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일제의 후손이 한반도로 들어 왔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 성봉.
----------------------------- 少昊金天氏는 東夷族
소호금천씨의 本고장은 남만주 봉천 요동지방이었는데 그는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 겨려다. 소호금천씨는 일찌기 산동반도에 진출하여 중국역사의 始源的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山海經이라는 중국사서에 "少昊의 나라는 동해밖에 있는 나라"라고 하였다.
중국의 사학자 당란(唐蘭)은 "소호금천씨의 나라가 산동성 曲阜에 도읍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1977년 7월 16일자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은 중국의 光明日報를 인용, 다음내용을 보도하였다.
1) 大汶口 文明의 분포지는 山東省 濟南市의 약 100Km 남방으로부터 강소성 북부에 이르기 까지 7만평방Km에 달하는 지역이다. (충청, 전라, 경상 남북도의 면적과 비슷)
2) 방사성 탄소의 측정에 의하면 대문구 문명은 578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 상한을 거금 4천년전으로 하고 또한 考古遺品도 仰韶, 龍山의 2大 문명을 上限으로 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역사는 약 6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4) 산동성 寧陽에서 한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거기에는 死者와 함께 귀중한 陶器, 象牙로 만든 器物, 나무로 만든 궤짝 등 200여점이 묻혀 있었다.
5) 대문구 문명은 농업, 수공업, 목축업 등을 영위하였으며 또한 문자를 갖는 등 고도의 문명이었다.
6)대문구 문명 당시에는 이미 少昊라는 나라가 있었다. 소호국은 산동성 곡부지방에 있었다.
7) 소호국을 지배한 자는 질(質= 摯= 少昊金天)이라는 영웅이었다.
위의 보도내용으로 소호금천의 나라가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건국되었음을 알 수 있다.
呂不韋가 지은 <呂氏春秋>에 "그 날은 庚申日이고 그 임금은 少昊다. 庚申은 金의 날로 소호는 金德으로 천하에 군림하였다. 그러므로 金天이라 하였다."소호국의 國祖 摯가 등극한 날인 庚申日은 우리의 민속에 이어오고 있으니 디딜방아에 庚申年 庚申月 庚申日이라고 기록하는 습관은 "이 방아도 소호씨가 왕위에 오른 날에 탄생했다."는 뜻이다.
소호의 나라는 高辛氏의 帝 곡이 이어 받았는데 제곡은 은나라의 조상이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이 그 후 중국의 서북부 내몽고에 위치한 농西지방에서 匈奴 冒頓씨의 한 후국(一候國)을 건설하였다. 漢나라 高祖 유방이 40만 대군으로 모돈을 쳐들어 갔으나 포위당하여 유방도 7일간 먹지 못하였다. 한나라의 陳平이 畵工에게 命하여 절세의 미인을 그리게 하여 투기가 심한 모돈의 처 閼氏에게 사자를 보내어 많은 금품과 함께 그 미녀의 화상을 제시하면서 우리 황제가 이 절세의 미녀를 모돈에게 제공하고 항복하려 한다고 하였다. 알씨가 그러한 미녀에게 모돈의 총애를 빼앗길가 염려하여 모돈에게 "한이 강성한데 대군이 추적해 오기전에 적당한 조건으로 포위를 풀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설득하니 이에 모돈이 한고조 유방과 결의형제하고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 뒤 기원전 140년에 한무제가 제위에 오르자 대장군 衛靑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흉노와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 때 위청의 누이의 아들인 郭去病이 포기장군이 되어 기원전 120년에 병사 1만명으로 농서지방에 쳐들어가 折蘭王을 살해하고 盧候王을 참하여 渾邪王을 사로 잡았으며 포로 8천9백60명을 얻고 休屠의 祭天金人을 몰수하였다.
이에 외몽고지방에 본거지를 갖고 있던 선우(單于- 匈奴의 天子)가 연패하는 혼사왕과 휴도왕을 소환하여 처벌하려 하니 혼사왕과 휴도왕은 漢나라에 투항하기로 뜻을 모았다가 휴도왕이 뉘우쳐 한나라에 항복하지 않으니 혼사왕이 휴도왕을 암살하고 자신의 무리 10만명을 이끌고 漢에 투항했다. 이때 休屠王의 太子인 14세의 日제가 그의 아우 倫과 함께 모친 閼씨를 모시고 한나라에 포로가 되어 갔다. 휴도왕의 나라는 중국서북부에 위치한 지금의 武威郡이다. 14세에 포로가 된 일제는 처음에 漢나라 왕실의 養馬奴였다가 養馬監으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부마도위 광록대부가 되었다. 김일제의 어머니 알씨가 두 아들을 법도 있게 가르쳤으므로 일제의 모친이 사망하매 무제가 알씨의 화상을 甘泉宮에 그려놓고 친필로 "匈奴王妃閼氏"라 하였다.
일제가 포로로 잡혀온지 35년만에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莽河羅가 무제를 살해하려고 했는데 이 때 김일제가 재빨리 망하라의 덜미를 잡아 뜰아래로 던져 무제를 구하였기 때문에 무제는 일제를 候로 封하고 일제가 사망하매 諡號를 敬候라 하였고 아들 賞을 투후로 삼았다. 이리하여 김일제를 비롯하여 國, 安, 常, 欽, 當, 遵, 등 후손이 투후의 벼슬을 하였다. 김일제에게 常과 建 두 아들이 있었는데 昭帝와 나이가 비슷하므로 3인이 친하게 지냈으며 상이 소제의 奉車(봉거)가 되고 건이 駙馬都尉가 되었다. 소제가 제위 13년만에 下世하고 宣帝가 등극하자 상이 光錄勳이 되었으며 상이 죽고 國이 투후벼슬을 이어 받았고 국이 아들없이 죽으니 일제의 둘째 아들 건의 손자 當에게 투후를 제수하였다. 전한서 기록에 의하면 투후 當의 모친 南은 곧 왕망의 生母였다.
前漢書의 王莽傳에 의하면 효원황후의 生父와 그 兄弟가 모두 元帝와 成帝때에 候가 되고 輔國의 位에 올랐으며 또한 金氏家에서 封을 받은 侯의 수가 9명에 달한다 하였다.
日제의 아우인 倫의 아들 安上은 宣帝때 闕內의 候가 되어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며 궁중과 부중의 실권을 장악했다. 안상에게 常, 岑, 敞, 明 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中郞將, 光祿大夫, 騎都尉가 되었다. 元帝가 8세에 太子가 되자 金敞이 中庶子(太子師)가 되어 은총을 받았으며 元帝가 즉위할 때 金當의 딸을 왕비로 맞아드렸다. 김일제전에는 왕망과 김당이 다같이 그들의 모친인 南의 아들이라 했으며 효원왕후전에는 효원왕후를 김당의 딸이라 하였다. 원제가 즉위한 후부터 김씨일문의 권세가 더욱 커졌다.
金敞은 涉, 參, 饒, 세 아들을 두었는데 成帝때 모두 侍中騎都尉 領三輔 胡越騎가 되었다.涉에게 湯, 融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다 諸曹將大夫가 되었으며 또 涉의 從父 欽의 아우 遷이 尙書令이 되니 이제 漢나라 王室은 金氏의 權力下에 있게 되었다.
漢書에 王莽의 群兄弟(六寸)는 모두 將軍 겸 侯가 되었는데 오직 莽의 부친 蔓은 일찍 사망하였다. 왕망의 伯父 대장군 鳳이 병으로 누우매 莽이 극진히 侍湯하니 鳳이 천거하여 莽을 荒門郞敎尉로 삼았다. 왕망이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일하니 크게 발탁되어 大司馬가 되었다. 38세의 망이 輔政을 맡았는데 얼마 후 元帝가 사망하고 成帝가 즉위하니 帝의 生母 金씨를 皇太后로 삼았다. 태후의 영향으로 자신의 친정형제 5人을 모두 候로 封하였다.
平帝가 나이 9세에 등극하니 김태황후가 섭정하였다. 김태황후는 莽에게 庶政을 맡겼으며 서기 3년에 莽은 11세의 平帝에게 자기 딸을 주어 皇后로 삼았으나 4년만에 平帝가 사망하였다. 왕망은 선제의 현손중 가장 나이 어린 2세의 劉영을 帝位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攝 皇帝가 되었으며 서기 9년에 쿠테타를 일으켜 新나라를 建國하였다. 王莽은 영특하여 대혁신정책을 단행하였다. 侯제도를 페지하고 토지를 국유화 하였으며 노예매매를 금하였고 평형물가제도를 실시하여 상인의 농간과 중간착취를 방지하였으며 화페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동북방민족의 소요와 흉년이 계속되어 이로 인한 도적떼 등으로 민심이 흉흉한 중에 劉秀의 군대가 洛陽을 공격하니 왕망의 侍從 空孫就가 왕망의 목을 베어 유수에게 바쳤다. 그 뒤 20여년간 전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일제의 후손이 한반도로 들어 왔다는 학설이 있다. ----------------------------- 신라김씨와 가락김씨가 동족이라는 설
신라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기록은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아들인 金仁問의 묘비문에 있으며 삼국사기를 지은 金富軾은 "新羅古事에 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金氏로 姓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少昊金天氏의 後孫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을 김씨라고 한 것이다"고 했으며 김유신의 비문에도 "김유신이 軒轅之裔요 少昊之胤이라"고 하였으며 "南伽倻 始祖 首露는 新羅와 同姓"이라고 하였다. 또 김부식은 "김유신은 王京人이다. 12代祖인 首露는 何許人인지 알 수 없다. 後漢 建武 18년 壬寅(AD 42)에 龜旨峰에 올라 駕洛九村을 바라보고 그 땅에 開國하여 국호를 伽耶라 " 했다고 하였다.
점필제 김종직은 김알지가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으며 혹은 스스로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고 했으며 新羅古誌에 이르기를 김알지도 금관국 수로왕의 후요 소호금천의 후손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文定昌박사는 그의 저서 <伽倻史>에서 "동방의 김씨는 모두 소호금천씨의 후손이요 金日제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김유신은 김수로왕 후손인데 그 묘비문에 "少昊之胤 則南伽倻始祖 首露與新羅 同姓也"라 하였으며 김수로왕의 외손인 문무왕의 능비문에 "枝載生 - - - 侯 祭天之胤 傳七葉"이라 했으니 侯자 앞에는 투자가 있었을 것이니 곧 투후 김일제의 후손은 7대에 걸쳐 영화를 누렸다는 뜻이다. 김알지는 김수로 보다 24년 뒤에 낳았으니 그 일족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소호금천씨의 후손은 祭天金人 즉 金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손이 漢나라에서 영달하더니 金王莽이 쿠테타로 漢을 멸하고 新國을 세웠다가 17년 뒤 劉秀에게 패망하였다.(서기 25년) 이에 그 일족의 일부가 김해지방으로 왔고 김해에 정착한 김수로왕의 부친은 김해군 장유면 태정리 부근에 살면서 김수로왕을 비롯한 6형제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김수로는 서기 42년에 출생) 태정리 부근 胎峰에는 胎臺가 있는데 이것은 김수로왕의 胎를 묻은 곳이라 한다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발견된 중국 왕망시대의 貨泉은 김수로왕의 선친 또는 김수로왕 자신이 왕망의 新帝國 출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傍證이 될 수 있다. 또 김해부근 다호리에서 출토된 붓과 중국화페인 五銖錢등도 그 방증이 된다. 김수로왕의 이름이 靑裔인 것은 소호의 후손임을 암시한다. 소호금천씨의 호가 靑陽이기 때문이다. 또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尊號가 普州皇太王과, 普州皇太后인 점은 중국의 普州와 어떤 聯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漢鏡, 龍鳳環頭大刀등이 유적지에서 발굴되고 있는 점, 그리고 殷나라 사람들 처럼 좌지왕때 卜師가 점을 쳐서 卦辭를 얻은 점 등은 중국과의 연관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대 弩禮王의 왕비는 辭要王의 딸 김씨이고 제 6대 지마왕의 왕비는 愛禮夫人金氏로 摩帝國王의 딸이고 9대 벌휴왕의 모친 只珍禮夫人도 김씨이고 조분왕과 점해왕의 어머니 옥모부인인 김구도 갈문왕의 따님인 김씨이니 신라의 김씨는 미추왕이 등극하기 전에도 계속하여 왕비족으로 세력을 갖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김알지가 왕위에 올랐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니 <三國志 韓傳>과 <後漢書 韓傳>의 蘇馬시는 우리말로 쇠말치니 치, 支, 智는 인칭대명사로 금알지요 곧 김알지라고 할 수 있다. ---------------------------------------------- 상고시대의 동이족
中國史中에서 秦 이전의 역사는 東夷族의 역사라 볼 수 있으나 중국의 학자들이 중국사로 날조하여 놓았다. 즉 중국의 학자 章太炎은 "漢나라 때의 학자라는 사람들이 중국의 역사를 모조리 위조해 놓아서 漢나라 이전의 문화를 연구할 수 없게 死滅시켰다."고 했으며 梁啓超도 "歷代로 王朝가 갈리면 中國歷史와 當代 왕조에 불리한 기록들은 모두를 王命으로 깎고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中國史는 알 길이 없다."고 했다 歷代神仙通鑑(康熙帝 때 著述)과 綱鑑金丹(明나라 潘光祖 著述)에는 東方에 東戶氏가 일어나 250년을 다스리다가 드디어 太白山으로 들어가 버리고 그의 자손이 7代를 이어 갔다. 이로 부터 여러 백년을 지난 뒤 마침내 동해에 성인이 나타나 六龍이 수레를 타고 밝음을 쫓아 百婁山(白山)에서 살았다. 그가 비로서 백성들에게 나무를 엮어 집짓는 방법을 가르쳐 준 까닭에 그를 有巢氏라 하였다. 유소씨가 200년을 다스리고 그 자손들이 8代를 이어 갔다. 유소씨가 동아역사에서 불을 맨 처음 만들어낸 사랍람이다. 그 뒤 여러 백년을 지나서 震에서 나온 太昊伏羲氏가 임금이 되었다. 司馬遷의 史記에 의하면 "태호복희씨는 東夷人으로서 그 성은 風氏이며 母는 화서(華胥)이다. 복희씨는 冀州의 雷澤(山東省 濟陰)가에서 잉태되었고 甘肅省에 있는 成紀에서 出生했다. 복희는 성스러운 덕이 있어서 天文을 보고 八卦를 그었다. 만물의 情을 살려 글자를 만들어 정치를 하였으며 그는 木德으로 임금이 되고 봄의 계절을 맡으니 周易에서는 帝가 震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震 땅에서 나온 임금이요 正月을 맡은 임금이어서 그 임금의 號는 太昊이며 이 震 땅의 위치는 東方에 있고 또 이것이 해의 밝음을 뜻하는 까닭에 太호라고 부르는데 호는 밝음을 뜻한다. 그는 훗날 冀州땅인 河南省의 陳이라는 땅에 가서 도읍을 정하고 동편인 太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111년간 임금자리에 있었다. 史記(권4 周本紀 제4 左傳 昭公 17)에 依하면 伏羲氏가 도읍을 한 陳땅을 뒷날 太昊의 터(墟)라 하고 周 武王이 舜임금의 공덕을 기리는 뜻에서 舜임금의 후손인 규滿을 이 陳땅에 封했다. 그래서 이 陳땅을 규氏姓이 차지했다고 하였다. 강감금단에 의하면 복희 여동생인 女와는 BC 3407년에 임금이 되었다. 史記(권130 末 神史記 三皇本紀)에 의하면 여와가 재위 15년만에 죽으니 神農氏는 여와의 外孫으로 (신농씨는 복희씨의 후손이니 춘추시대의 宿, 須, 句, 전, 臾, 는 모두 風氏의 후손이었으며 여와씨 역시 風姓이었다) 뒤에 임금이 되었다. 신농의 부친은 少典이고 母는 여와의 딸 安登이다. 신농은 陝西省 岐山縣 姜水가에서 자라난 까닭에 姓을 姜이라 하였고 火德으로 임금이 된 까닭에 炎帝라 했으며 또 농사법을 가르쳐 준 까닭에 神農이라 했는데 .八卦를 곱해서 64爻를 만들기도 했다. 사기(신사기 삼황본기)와 歷代神仙通鑑(권2, 제1節)에 의하면 姜氏姓을 가진 諸侯들 가운데 치우(蚩尤)가 있었다. 치우는 신농의 후손이다. 신농의 나라가 망한 뒤 州, 甫, 甘, 許, 戱, 露, 齊, 紀, 怡, 向, 申, 呂 등의 姓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강성의 후손이다. 사기(권1, 오제본기 제1)에는 백이가 강태공의 조상이라(佰夷太公之祖也)했고 史記(권32, 齊太公世家篇)에는 강태고 呂尙은 東夷之士로서 神農의 후손인 동시에 또 佰夷의 후손이기도 하다. 그의 성은 姜이요 이름은 牙이다. 그의 조상인 백이가 舜임금과 堯임금을 도와서 큰 공을 세웠으므로 이 때에 백이를 지금의 산동성 臨淄縣 呂라는 땅에 封했는데 이 땅이 훗날에 齊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여기에서 말한 백이는 기자때의 백이와 숙제의 그 백이가 아니라 순임금 때 벼슬한 백이를 말한다.) 史記의 補史記에 의하면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이 모두 少典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가 모두 유와씨의 자손이며 황제의 어머니가 염제의 어머니 후손이므로 뒤에 강씨성인 염제와 희씨성인 황제가 다같이 소전씨로 부터 나온 것이고 황제는 소전국 임금 啓毘의 次子로 有熊國의 임금이 되었다. 그가 曲阜縣의 壽丘의 姬水가에서 출생했으므로 姓을 姬氏라 했다가 뒤에 公孫氏라 했고 또 이름을 헌원이라고 한 것이라고 했다. 司馬遷의 史記에는 "黃帝는 白民에서 낳았으니 자신이 東夷에 屬한다"고 하였으며 前漢書(卷20)에는 염제신농의 왕비가 황제를 낳았다고 했으니 이는 황제가 신농의 자손임을 나타내고 있다. 禮記와 강감금단에 의하면 소호금천은 황제헌원의 長子이다. 그런데 1977년 중국의 사학자 당란이 소호국 유적을 탄소측정한 결과 5787년전의 것임을 알아냈다.그러므로 소호금천이 황제이전의 사람임을 알 수있다. 소호의 이름은 질 또는 摯요 姓은 己 또는 紀이다. 그는 쇠(金)의 德으로 임금이 되고 흰 것을 숭상한 까닭에 金天氏라 하였다. 좌전(소공 17년)을 보면 淡子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의 조상인 금천이 東夷人이라 했고 三國史紀 金庾信傳에는 新羅人은 스스로 金天의 後孫이라 한다 (羅人 自謂少昊金天之後)고 했으며 중국사학자 徐亮之는 그의 著書 <中國史前史話>(下篇 제4 灰陶文化)에서 "少昊金天氏 東夷部族 最早的 盟主"라 했고 삼국유사(紀異傳 第1)에 皇娥가 窮桑의 들에서 노닐더니 그 때 白帝子라는 神童이 있어 서로 사귀어 少昊를 낳았다고 하였다 중국의 辭海에 依하면 白帝는 五天帝의 하나고 少昊는 少호라고도 표기하여 황제의 아들이고 궁상에서 邑하니 號를 窮桑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中國古今人名大辭典에 少昊를 少호라고도 하고 그가 태호복희의 道法을 배우고 닦았으므로 太昊에 다음가는 사랍이라 하여 少昊라고 한 것이라고 하였다. 後漢書(권30)에 소호금천씨가 옛 奄나라인 魯나라 곡부의 북녘에 있는 궁상에서 임금이 되었다가 뒤에 곡부로 이거했다고 했다. 綱鑑金丹에 "전頊高陽(BC 2531-2436)의 조부는 황제헌원이요 부는 昌意이며 母는 女樞인데 이 여추가 전욱고양을 若水에서 낳았다."고 하였다. 史記(권1)에 전욱고양은 황제의 孫이요 昌意의 子라 하였다. 전욱고양의 뒤를 이은 임금은 제곡고신(BC3435- 2365)인데 강감금단에 제곡고신의 성은 姬씨요 그의 조부는 金天이고 부는 嬌極인데 河南省 박, 뒷날 殷의 서울이라는 땅에 도읍을 정했다 했으며 史記(권13)에 堯임금(BC 2357- 2360)은 제곡고신의 아들이며 姓은 伊祁, 또는 祁이며 이름은 放勳이고 황제헌원의 5대손이라고 했다. 吳越春秋에 의하면 夏나라의 禹王도 자기 자신을 嘉夷(가이=훌륭한 東夷)라고 自讚했으며 우임금이 나이 30에 장가들지 않았는데 塗山에 이르렀을 때 혼기를 놓쳐 제도에 벗어날까 염려했으나 그래도 사양해서 말하기를 내가 장가들려면 반드시 應報가 있으리라 했는데 때마침 白狐九尾가 나타나 응보를 禹임금에게 만들어 주었다. 우임금이 말하기를 "白은 나의 의복 빛깔이요 九尾는 지극한 數로서 내가 왕이 될 증거이다. 塗山의 노래에도 '유유白狐 九尾方方'이라는 말이 있다. 나의 집안은 훌륭한 東夷로서 손님으로 와서 王노릇을 하면서 집을 이루고 王室을 이루었으며 나는 저(彼=中國)를 昌盛하게 했으니 내가 장가듦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舜임금은 孟子와, 史記評林 等 中國古典에 東夷人이라고 되어 있으며 중국사학자 서양지와 임해상은 舜임금을 殷민족의 始祖라 했으며 東夷人이며 산동반도에 정착, 황하문명을 연 민족이 동이민족이라고 하였다. 1992년 12월 30일 홍콩의 중국계 신문인 文匯報와 大公報는 서기전 2300년의 垓字陶磁器가 (古朝鮮時代 우리겨레의 옛터인)山東省 추평현 丁公村에서 出土되었는데 이 도자기에는 기원전 2300년전에 사용한 한자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보도했다. 風俗通에 의하면 "舜임금은 그 이름이 무궁화(橓)를 나타내며 白衣를 입었다."고 했으며 史記에 "殷민족은 白衣를 입었다"고 되어 있으며 史記(卷 1)에 "舜임금(BC 2255-2208)은 東夷族으로 복주(복州) 雷澤縣의 姚丘에서 낳았으므로 그의 姓은 姚氏요 이름은 重華"라 했다고 되어 있다. 중국사학자 林惠祥은 그의 著書 <中國民族史>에서 東夷人인 舜임금은 殷나라의 조상이요 또 殷字는 곧 夷字이며(殷字作夷) 夷字는 射字에서 나누어져 된 글자인데 殷人들은 살고양이(놜理)를 쏘기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林惠祥은 또 朝鮮과 殷은 같은 系統아며 東夷와 貊은 同族이라고 하였다. 史記(권3, 殷本紀 제3)에 殷니라 시조 설(契, 卨, 薛)은 帝곡高辛의 子로 東夷族이요 名이 天乙(하늘)이며 東夷人이라고 했다. 中庸(右 제30章 言未道也)에서 子思는 孔子가 堯 특히 舜의 思想을 繼承했다고 했으며 稽古錄(권 4, 有虞氏 下)에 孔子는 "後世雖有作者 虞舜不可及也己矣"라 하였고 史記(권 47., 孔子世家 17)에 孔子는 殷나라 湯王의 後孫이라고 했으며 孟子(권 12)에 孟子는 孔子의 학문과 道는 貊道라 하였으니 濊貊의 道라는 뜻이다. 呂思勉 童書業 두 사람이 共著한 古事辨(제7冊 제1편 p. 92)에 殷이 東夷族이라는 것은 중국학계의 定說이라고 하였으며 禮記(檀弓篇)에 "夫子曰丘也 殷人也"라 했고 史記(권47, 孔子世家 제17)에 공자가 "나는 殷나라 사람이다"라 했으며 論語(권9, 子罕 제9)"子欲居九夷 或曰 陋之如何 子曰君子居之 何陋之有"라 했으니 즉 공자는 구이에 살기를 원했다. 누추해서 어찌 하겠는냐고 누가 물으니 군자가 사는데 어찌 누추함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韓人 공자는 九夷에서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 김씨의 뿌리를 찾아서 (세계일보 20011 4 12 )
김수로왕계 김해김씨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알지계 신라김씨
- # 한국 사회에서의 김씨
2010년 대한민국 인구주택 총조사 잠정결과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총인구는 4821만9000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올 초에 주민등록번호를 받은 인구가 5000만명을 넘어섰다고 발표되었다(2011년 1월 행안부). 이 숫자는 해외에 거주하는 재외동포(약 570만)와 북한 주민(약 2400만)을 제외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식 성과 본을 사용하는 인구는 대략 8000만명으로 추산된다.
그중 대한민국의 성관(姓貫)은 286개 성씨와 4179개 본관으로 파악되고 있으며(2000년 인구센서스·통계청), 성씨별 본관 수는 김(金)씨 349본, 이(李)씨 276본, 박(朴)씨 159본, 정(鄭)씨 136본, 최씨(崔)씨 159본, 강(姜)씨 33본, 서(徐)씨 57본으로 되어 있다. 그중 김씨는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 992만6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김수로왕계의 김해김씨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알지계의 신라김씨 계통이다. 그 외에 신라김씨 계통이나 김해김씨 계통이 아닌, 조선에 귀화한 ‘왜장 사야가’를 시조로 하는 ‘사성 김해김씨’도 있다.
김씨의 본관별 인구 수를 보면 김해김씨가 412만5000명으로 가장 많고, 경주김씨가 173만7000명, 광산김씨가 83만7000명, 김녕김씨가 51만3000명, (구)안동김씨(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둘째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로, 고려 개국공신인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신안동김씨와 구분된다)가 42만5000명이다. 그 외에도 의성김씨(25만3000명), 사성김해김씨(19만9000명), 강릉김씨(16만5000명), 선산김씨(10만9000명) 등이 있다(2000년 인구센서스, 통계청).
사실 김씨라는 한자 성을 사용하는 인구는 중국과 만주 등 동아시아 지역에 매우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금나라의 금이라든지, 중국 성씨 중에 금씨는 우리나라의 김씨와 깊은 연관이 있다. 김씨는 고려 때까지 금씨로 불렸는데, 음양오행에 따라 이씨 조선을 무너트릴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을 염두에 둔 태조(이성계)의 명으로 쇠금이 아닌, 성김으로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 설화로 본 김씨의 기원
그럼 김씨의 뿌리는 무엇인가?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삼국사기의 김알지 설화(서기 65년)와 삼국유사의 김수로 설화(〃 42년)이다. 그중 삼국유사의 김수로왕 탄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상사일에 구지봉(龜旨峰)에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구간 등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중략) 구간 등이 구지가(龜旨歌)를 부르고 춤을 추자, 하늘에서 자색 줄이 드리워 땅에 닿았는데, 줄 끝에는 붉은 폭에 금합(金合)이 싸여 있어 열어 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알 6개가 화하여 사내아이로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이 축하하는 절을 하고 공경을 다하였다. 그 달 보름에 모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諱)를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는데, 수로는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고 나머지 5인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김알지 설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65년(탈해왕9) 8월 4일 왕이 밤에 금성(金城·경주) 서쪽 시림(始林)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호공이 시림 속에서 큰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가운데 황금 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어 왕께 아뢰었다. 왕이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이는 박혁거세의 옛 일과 같으므로, 박혁거세를 알지(閼智·지혜가 뛰어나 이름을 ‘알지’라고도 함)라 한 선례에 따라 이름 지었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 아기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하였다. 왕이 좋은 날을 받아 태자로 책봉하니 그가 곧 김알지이다. 그리고 시림도 계림(鷄林)으로 고쳐 국호로 삼았다.”
이렇듯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린 김씨의 유래를 보면, 그 시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 금석문이 전하는 김씨의 기원
이와 다른 이야기들도 발굴되고 있다. 역사서가 아닌 금석문을 통해서이다. 그중 하나가 김유신과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의 비문이고, 추사 김정희가 밝혔다가 200년이 지난 1961년에 우연하게 발견된 문무왕 비문이다. 또한 중국에서 발견된 ‘대당 고 부인 김씨 비문’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먼저 김알지 설화를 전한 김부식조차도 “신라 고사에 금궤가 하늘에서 내려와 김씨로 성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며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고 하였고, 성을 김씨라고 한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기에 삼국사기에 전하는 김유신 비문에는 [김유신이 헌원지예(軒轅之裔)요 소호지윤(小昊之胤)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김춘추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비문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궈자탄(郭家灘)에서 출토된 ‘대당 고 부인 김씨 비문’에는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금천씨이다.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의 성씨를 받게 된 세조이시다. (중략) 먼 조상은 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을 하였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투후)에 봉하시니, 7대에 걸쳐 벼슬하매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중략) 한이 난리가 나서 괴로움에 처하자 멀리 피해 요동에 살게 되었다. (중략)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이하 생략)”라고 적혀 있다.
이렇듯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천강설화와는 달리, 신라 김씨들은 자신의 조상을 소호금천씨(중국 3황 중의 하나인 황제 헌원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전에는 김부식이 전하는 김유신 비문이나 같은 내용이 수록된 김인문의 비문에 대해 ‘모화사상’에 따라 지어낸 것이라고 치부하였으나, 새로 발견된 문무왕 비문과 대당 고 부인 김씨 묘지명의 내용을 볼 때, 단순히 모화사상에 따라 지어낸 이야기로 덮어두기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특히 다시 발견된 문무왕 비문의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다. 그 비문에는 “지재생 … 후 제천지윤 전 칠엽(枝載生…侯 祭天之胤 傳七葉)”(5행),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6행)라며 신라 김씨의 내력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투후’는 한무제 때, 흉노 휴도왕(흉노는 선우 묵특 때 한 고조 유방의 15만 대군을 물리친 후 한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던 국가인데, 휴도왕·休屠王은 흉노 선우 휘하의 왕이었다)의 태자였다가 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어 노예로 살다가 무제의 신임을 받아 김씨라는 성을 하사받고 투후에 봉해진 ‘김일제’(BC134∼BC86)를 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를 토대로 해석할 때, 가야와 신라의 김씨 일족은 알타이 계통의 유목민족인 훈(또는 흉노)의 선우 휘하에서 왕을 하던 휴도왕 태자였다가 곽거병과의 전쟁에서 포로가 된 뒤, 한무제의 신임을 받아 투정후로 봉해진 김일제를 시조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중국 사서의 김일제 기록을 보면, 김일제 일족은 7대에 걸쳐 투후로 직분을 수행하다가 외가 쪽 친척인 ‘왕망’의 반란에 가담하여 전한을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자, 배를 타고 한반도 남쪽으로 도망쳐서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김일제가 시조이고, 문무왕의 15대 조 성한왕은 ‘김알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것 중, 신라 김씨가 삼황오제(소호금천씨)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은 자기 성씨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신라가 소호금천씨를, 고구려와 백제가 전욱고양씨(또는 제곡고신씨)를 자기들 조상으로 여겼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김일제 이후에는 역사서에 분명한 기록이 전해지는 것들이며, 역사적 증거도 적지 않다. 이 기록들이 자기의 성씨를 높이기 위해 모화사상에 입각해서 쓰였다면, 성씨의 유래를 중국의 천자가 아닌 그것도 야만족 취급을 받는 흉노의 후예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 김씨의 기원과 진실
이렇듯 김씨는 깊고 다양한 뿌리가 거론되고 있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다른 이야기도 있다. 즉, 고구려에서는 장수왕,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그리고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부터 성씨를 썼다는 주장이다. 이전의 기록에서는 왕의 이름만 쓰이고 있을 뿐, 한자 성을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거론한 비문들에 김수로와 김알지 이전에 김씨 성을 쓰고 있었다는 주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부에서는 비문(문무왕 비, 김인문 비, 김유신 비, 대당 고 부인 김씨 묘비)이나 문건(삼국사기, 삼국유사)들이 통일신라 이후에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위작되거나 첨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발굴된 비문들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투후 김일제 등)의 인과관계를 거론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단순히 조상을 찬양하기 위해 첨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현재까지 거론된 김씨 성의 기원에 대한 주장을 살펴보면 ▲삼황오제의 하나인 소호금천씨의 이름 금천(金天)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김유신 비문, 대당 고 부인김씨 묘비문), ▲대륙에서 한나라와 자웅을 겨루던 훈(흉노)의 선우 휘하에서 나라를 이끌던 휴도왕의 아들 ‘투후 김일제’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문무왕 비문, 대당 고 부인김씨 묘비문), ▲천강설화에 따라 가야의 수로왕과 신라의 대보공(김알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라가 고대국가 왕권을 수립하고 계승하는 과정에서 한자식 김씨 성을 쓰게 되었다는 주장 등 네 가지 설이 병존하는 셈이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출처] 김씨 득성 연원(金氏 得姓 淵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