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야구 선수 (2)
프로 활동년수 8년, 통산 승수 15위(103승), 통산 탈삼진 19위(1019개) ... 혼자 취미 삼아 만들어가는 블로그지만 나름 명예의 전당이라고 구상하면서 최소 요건이란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적어도 프로 경력이 10년은 되어야 자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은 메이저리그 경력이 10년 이상된 선수들을 대상으로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를 한다..) 그리고 통산 승수 103승 통산 탈삼진 1019개도 우수한 성적임에는 분명하지만 최고중의 최고들인 명예의 전당에는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선수의 이름이라면 그가 남긴 기록은 그저 참고 자료일 뿐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가 어떤 기록을 남겼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야구를 좋아하고 한국프로야구에 대한 지식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역대 최고의 투수로 선동렬과 최동원을 뽑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1.프로필
1958년 5월 24일 부산에서 출생한 그는 토성중 경남고를 거쳐 연세대를 나와 실업 롯데에 입단 프로 출범후 롯데자이언츠의 상징적인 선수가 되었다... 그의 아마 시절은 여지껏 소개한 그 누구보다도 화려했으며 프로선수 최동원 이전에 야구선수 최동원은 하나의 문화적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최동원이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것은 토성중학 시절 바로 팔을 보험에 드는 매우 생소한 사건으로 부터다.. 뭐 얼마나 대단한 팔이기에 보험까지 드는가 싶겠지만, 그 이후 왜 그팔이 보험에 들어야 하는지 입증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교 2학년때 당시 고교야구 최강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것을 시작으로 고교 3학년때 최고 권위 청룡기 대회, 역전의 명수 군상상고와의 승자 결승에서 한경이 탈삼진 20개의 경이적인 기록으로 상대를 압도했으며, 이어 패자 결승을 뚫고 올라온 군상상고와의 리턴매치에서도 탈삼진 12개를 잡으며 경남고에 첫 청룡기 우승기를 안기게 된다.. 이때 부터 최동원은 최고라는 수식어를 항상 동반 했으며 그의 영향력은 단순한 운동 선수 그 이상으로 사회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일으키는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 잡아갔다..
고려대와 연세대 두 사학 명문의 자존심을 건 스카웃 쟁탈전 끝에 연세대에 입학한 최동원은 이후 일본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지바 마린스)의 가네다(일본 프로야구 400승 투수) 감독의 요청에 의해 테스트를 받기도 했으며, 그의 볼에 감탄한 가네다 감독이 그를 양자로 들일려고 했으나 최동원 선수의 조부의 반대로 일본 프로야구 진출이 무산되기도 했다.. 3학년때는 구타 사건으로 인하여(박철순 선수가 가해자) 또 한번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81년 실업 야구단 롯데에 총 1억원 상당의 금액으로 입단한후 역시나 맹활약 하며 롯데를 실업야구 리그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캐나다 애드먼튼에서 열린 대륙간컵 국제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상을 받으며 메이저리그 팀인 토론토와 계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 계약이 후일 불공정한 계약임을 이유로 최동원 선수측에서 무효화 하기에 이른다, 이후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실업야구단 롯데는 해체 되고 최동원 선수는 해외 진출을 포기 이 해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야구 선수권 대회의 주축 선수로 활약 병역 문제를 해결하고 83년 역시 총액 1억 규모의 계약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된다...
2.프로야구 성적
프로야구 입단 전까지의 설명만으로도 이미 이룰거 다 이루고 원 없이 던지 대 투수의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로 ;; 그의 아마 이력은 화려 했다.. 다소 늦긴 했지만, 그래도 장효조 선수만큼은 늦지 않았던 그의 프로 입성후 성적은 다음과 같다..
후반부 3년은 그의 이미지를 강성으로 각인 시킨 지리한 연봉 협상 선수협 구성을 위한 투쟁과 보복 트레이드로 인한 이적등의 이유로 사실상 선수로 활동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였기에 사실상 그의 프로 생활은 5년이다... 이 5년간 그는 공에 혼을 담아 던졌다... 5연 연속 200이닝 이상을 소화한 투수는 최동원이 유일하며 한시즌 탈삼진 200개 이상을 2시즌 이상 기록한 것은 선동렬(3회)과 함께 유이한 기록이며, 아직도 한국프로야구 한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은 84년 최동원의 223개이다.. 그리고 최동원을 이야기 할때 결코 빠지지 않는 유일 무이 한국시리즈 4승.. 84년 후반기 롯데는 후기리그 우승권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에이스인 최동원에게 너무 과하게 의존했다. 후기리그 50경기중 최동원은 38경기에 등판해야 했으며 한국 시리즈에서도 7차전까지 무려 5경기에 등판하여 4승 1패의 성적을 올리게 되었다.. 유두열의 극적인 역전 3점 홈런으로 롯데는 자신들의 우습게 여기고 져주기 까지 해가며 자신들을 결승 파트너로 택한 삼성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겼다, 그리고 그해 최동원은 타격 트리플 크라운 이만수를 제치고 시즌 MVP에 선정되는 겹경사를 누리게 된다...
롯데는 약한 팀이었다, 그러다 보니 매년 200이닝 이상을 던지고 200개에 가까운 탈삼진을 잡으며 1점대 후반에서 2점대 평균 자책점을 찍으며 20승에 가까운 활약을 최동원이 보였어도 이후 롯데는 우승권에 근접하지 못한다...
86년 선동렬이 프로에 입단하면서 그와 선동렬의 대결은 최고 투수간의 대결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두 최고 간의 대결은 1승1무1패로 과연 명불허전이며, 소문난 잔치집에 먹을게 없다는 속담을 무색하게 만드는 명승부로 남았다...( 내가 야구를 본것은 1990년 부터이기 때문에 두 투수간의 대결이 얼마만큼의 무게감인지 직접 느껴보지 못한것이 다소 억울하기 까지 하다;;)
그리고 최동원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또 선수협이다... 지금은 2000년대 최고 당시 최고 스타였던 송진우 양준혁 등이 주축이 되어 온갖 우여 곡절 끝에 선수협회가 정식으로 인정 받은 상태지만, 그보다 10여년이나 앞선 시기에 최동원은 선수협회를 만들기 위해 총대를 메고 나섰었다.. 당시 선수협과 관련하여 롯데 주장 김용철이 각서를 제출 할 것을 종용받고 이에 반발하자 최동원은 김용철을 적극지지 하며 유니폼을 벗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발언을 하기까지 했었다.. 결국 이에대한 보복 트레이드를 당해 당대 최고의 선수들인 장효조 김시진 최동원 김용철등이 포함된 메가톤급 트레이드로 삼성으로 옮기게 된다..
3.수상
MVP 1회 1984년
다승 1위 1회 1984년
방어율 1위 0회 (왜!! 집어 넣었는가 하면; 그의 통산 방어율은 2.46으로 선동렬에 이어 2위이다 다만 200이닝 이상 던지고도 84년은 장호연의 102와 1/3 이닝 1.58 85년 선동렬의 111이닝 1.70에 밀려 타이틀이 없었을 뿐이다..)
탈삼진 1위 2회 (1984년 1987년)
골든글러브 1회 1984년
올스타 베스트 10 2회 (86,87)
한국시리즈 우승 1984년
첫댓글 방송의 단맛을 봤기에...
명예의 전당에 한번에 쉽게 가지는 못할듯............
권위에 도전했다는 괘심죄죠,,, 본좌 최동원인데...:::
말년에 삼성에서 패전처리용으로 나올때는 정말 씁슬.....//혼자 코시에서 4승.....독보적이였죠. 아마때 한번, 프로에서 한번, 개인적으론 선동렬보다 더 쳐주는 이유...선동렬은 솔직히 상대팀에서 먼저 겁먹구 에이스끼리 붙이질 않아서리.....대부분 루키와 붙여줘서, ""선동렬 선수 통계에는 거품이 껴있다""
윤학길도 200이닝 5년하지 않았나요?